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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장성문화권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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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메뉴 정의
5차 메뉴 정의
  • 1. 서설
  • 2. 장성유학의 시원
  • 3. 신유학의 수용과 김인후의 도학
  • 4. 조선조 성리학의 발전과 장성의 성리학
  • 5. 조선조의 실학과 변이중의 구국활동
  • 6. 한말 성리학과 기정진의 유리설
  • 7. 결론

1.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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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의 유학사상이 언제 어떻게 형성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단정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문화의 발전과 그 시대적 배경, 그리고 국가의 변천과정에 따른 학문적 특징들을 아울러 살펴야 할 것이다.

장성의 유학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사상의 발전과정과 함께 살펴야 하겠지만, 유학의 전래에 대한 역사적 관점에 있어서도 그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장성유학의 시원을 명확히 밝히기는 어려운 실정에 있는 것이다. 또한 장성의 유학이라고 할 때, 이는 행정구역의 한계로써 분명히 구분지을 수 없는 문화적 환경적 개념이라고 할 것이며, 환경은 풍토적 내용을 포함하기 때문에 장성이라는 한 지역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유학이라는 학문 또한 공자학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이지만, 이른 바 정주학이라고 불리우는 신유학이 수입되기 이전, 공자학이 언제 수입되었으며 어디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장성유학이 문헌으로나 문집 또는 저술로서 분명하여진 시기는, 신유학이 토착화되면서 성리학적 연구가 본격화되었던 조선조 초기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이 발견되었다고 할 것이며, 그 이전의 문헌, 곧 [고려사]나 [삼국사]의 기록에서 장성유학이 있었다는 분명한 전거는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다면 유학의 시원, 곧 장성 지역에 유학이라는 학문이 전래된 시초는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한반도에 유학이 어느 때 들어왔느냐 하는 것과 종합하여 살펴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반도의 유학전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 또한 단순하지 않다. 이른바 재야학자들은 유학사상 자체가 한반도의 동이족(東夷族)이 지니고 있었던 정신에 연원한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고, 역사적 기록에 따라 중국에 통일 국가가 성립될 진나라 당시에 중국의 유민이 신라에 건너오면서 유학과 한자문화가 함께 왔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동이(東夷)의 문화가 중국문화의 원류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상이 우리민족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다시 검토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진한(辰韓)에 진(秦)나라 유민이 왔다는 기록은 그 규모와 내용을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이들의 신분이 유민이라는 점에서 과연 유학을 전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나의 생각은, 어떤 사건이나 사실은 추론이 아니라 객관적 기록에 의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유학적인 내용에 대한 명확한 사실에 근거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유학의 전래와 전수에 관한 문헌의 기록 가운데,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왕인에 대한 사료를 발견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왕인이 백제의 인물임이 분명하다면 장성 또한 백제의 지역으로써 장성유학의 시원을 거기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제 이 글의 서술은 첫째, 장성유학의 시원으로써 왕인의 유학 전수의 문제, 둘째, 장성의 유학이 유학의 정신과 이념에서, 하나의 일관된 의지를 나타내게 되었던 때를 조선조 초기로 이해 할 수 있다면, 이로부터 어떻게 발전되었던 것일까 하는 것을 살펴야 할 것이며 셋째, 장성유학의 많은 업적들은 어떤 특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러한 특징이 조선조유학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하는 점들을 살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순서로써 이 글을 서술하여 장성유학의 학문적 전개 양상을 일별하고 거기에 나타난 유학적 성격을 살피기로 한다.

2. 장성유학의 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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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이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기록은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에 나타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사료가 아닌 일본의 사료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유교가 전래되었음을 알리는 초전(初傳)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로써 백제는 신라나 고구려와도 다르게 일찍 유학사상을 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근거를 통해서 우리는 장성지역 또한 유학이라는 학문을 일찍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왕인이 일본에 도착한 것은 그들의 오오진(應神) 천황 16년인 서기 285년이다. 물론 이에 대한 해석에 따라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빠른 시기는 이때로 본 것이다. 이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경학을 강의하는 태학이 세워졌다는 기록보다 87년이 앞선 것이다. 이는 유학사상의 전래 경로가 육지를 통해서 전래되었다는 이른바 대륙 전래설보다 바다를 통하여 직접 전해졌다는 설, 곧 해로(海路) 직수설을 밑받침하고 있다. 여기에서 왕인의 출생과 그 지역적 연고가 호남, 특히 남도라는 점에서, 장성 유학의 발원을 그로부터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백제에서는 오경(五經)의 연구는 물론 제(齊)와 양(梁)등 빈번한 사신의 교류와 많은 문헌의 전수가 있었다는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호남, 특히 남도의 학문적 연원으로서는, 왕인의 유학이 대륙보다 앞서 일본에 전수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전수만이 아니라, 그 당시의 학문적 발전이 그와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성 유학의 시원은 이를 근거로 하여야 할 것이다.

왕인의 유학 전수 이후 장성은 백제의 영토로써 백제는 통일신라 그리고 고려조로 발전하면서 여러 차례 왕조의 교체를 맞았지만 실제로 장성의 유학이 어떤 특징을 나타내면서 변화하였던가 하는 것은 정확한 문헌이 없다. 이 시기의 유학적 특징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이때에 교육하였던 유학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고려 말 이전에는 신유학, 곧 정주학이 전래되기 이전의 시기로써, 한나라와 당나라의 유학정신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학문적 내용은 주로 오경(五經)을 연구하는 경학적 성격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며, 그 학문적 이념 또한 중앙집권제의 확립으로 인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충효열(忠孝烈)의 사상을 그 내용으로 하였다. 그러나 장성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은 그와 같은 제도권에서 시행되는 유학의 과거시험이나 궁중의 중추적 질서로써 참여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성지역의 특수성이란 신라나 백제의 조정과 지역적으로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며 장성을 중심한 호족 세력의 성장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백제 신라는 고려의 조정과 긴밀한 협조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당시에 유학적 이념이 되었던 충효열의 사상은 장성유학의 이념이 되었던 것이며, 그러한 이념을 몸소 실천한 인물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이념이었던 충효열의 정신에 투철하여 국가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호남출신의 인물 50여명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효행에 두드러진 인물로서는 장성 출신 서능(徐稜)이 있다. 그는 학문이 깊었으나 벼슬하지 않고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머니가 종기(瘡)를 앓게 되었다. 의사는 개구리가 특효약이라고 하였으나 겨울철이라 개구리를 구할 수 없자,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 하였는데, 약을 닳이는 탕기(湯器)에 개구리가 뛰어 들었다고 하였다. 이와같은 내용은 그 당시 충효열을 유학적 이념으로 숭상하고 그 중에서도 효에 대한 실천이 매우 훌륭한 인물로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3. 신유학의 수용과 김인후의 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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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왕 16년 안향(安珦, 1243∼306))에 의하여 수입된 신유학은 조선조의 통치방법과 국가의 이념을 다시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신유학의 전래와 초기유학의 수용시기에 있어서 장성의 학문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였던 것일까. 이에 대한 특별한 기록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호남사람으로서 신유학의 연구에 업적을 남긴 인물을 찾는다면 전북 부안의 김구(金坵, 1211∼ 1278) 정도이다. 그가 남긴 문집이 3권 2책인데 시와 표문(表文)등이 대부분이다. 이 시기는 고려와 조선의 왕조가 교체하던 때로서 호남인은 그 중심 권에 서 있지 못하였다.

우리가 흔히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을 정몽주로 여기는데, 이는 충절정신을 장려하기 위한 조선조 태종의 정책적 장려에 말미암은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정신을 장려하는 것은 국가의 기강을 이루고 있었던 충효열(忠孝烈)의 가치를 으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몽주의 뒤를 이은 인물, 길재(吉再)나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등 조선 초기의 사림파를 형성하기까지의 인물들 모두가 영남출신의 인사들이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고려 말로부터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성종 중종조에 이르기까지의 학문적 계승은 영남이 그 중심을 이루었고, 성리학 전래 이후 조선조의 학문적 전수를 규정하는, 이른바 도통 연원을 중심으로 볼 때에도 정몽주부터 조광조에 이르기까지 호남인은 한 사람도 그 정맥에 서지 못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도통개념이 얼마나 객관성과 신빙성을 지니는 것이었느냐 하는 것은 매우 회의적이라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조 초기 도통을 계승하였다고 규정하고 있는 인물들 모두 사화와 연관되었거나 사화로 인하여 참화를 당하였으며 장성의 유학적 특징 또한 사화와 연관되어진다는 점에 장성 도학의 청렴성과 학문적 순수성을 발견하게된다.

조선조의 도학과 성리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분으로서 기묘명현의 학문을 계승한 분은 하서(河西 金麟厚, 1510∼1560)이다. 하서는 모재 김안국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특히 학문적으로 총애하였고 기묘 명현인 최산두의 학문을 이었는데, 처음으로 천명도를 그렸으며, 의리실천의 도학군자로서 당대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조선조 도학과 성리학의 종주로 삼는다. 도학과 성리학은 그 의미가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성리학의 다른 이름을 도학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성리학이란 인간의 성(性)을 리(理)로 이해한다는 뜻의 '성즉리(性卽理)'라는 의미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도학이란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 곧 인도정신을 발휘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의리실천의 면에서 도학이라 하고 학문적 연구와 그 가치에 대한 탐구정신을 말할 때는 성리학이라 하는 것이다.

김인후는 인종이 세자 때에 그 사부를 지냈는데 문정왕후의 세력들이 조정에 포열하자 옥과 현감으로 내려와서 인종에 대한 그리움과 사모의 정을 이기지 못하여 시와 술로 한탄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의 시는 조정에서 임금을 올바로 모시다가 간신들에게 쫒겨난 굴원(屈原)을 조상(弔喪)하는 글과 임금께 충성을 맹세하는 시(詩)들이 그 사상적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도학은 임금에 대한 충절 정신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조정 권신들의 모함을 받고 쫒겨나서 죽음으로서 의를 지켰던 굴원(屈原)을 그리워하였고, 초사(楚辭)를 읽을 때면 통한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으며,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함을 탄식하여, 송사(宋史) 악비전(岳飛傳)을 탐독할 때는 원통하여 주먹을 쥐고 통음하였고, 인종을 몰아낸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진헌공(晉獻公)의 태자 신생(申生)을 폐위한 여희(驪姬)에 비유하여, 이를 통탄한 조신생사(弔申生辭)를 썼던 것이다. 그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다른시대의 흥망이 나와 무슨 상관이랴만
자연히 서로 느껴 부질없이 슬픈 노래부르네
라 하였으니 이는 인종을 핍박한 것을 가슴 아파하는 것이며, 또한 그가 남긴 유소사(有所思)는 서른살의 나이를 채우지 못하고 죽어간 인종에 대한 그리움과 충절의 정신을 노래한 것이다. 또한

그대 나이 삼십이 되어 가는데 내 나이 서른 여섯
즐거움 절반도 못누렸는데 한번의 이별 활줄의 화살이라
내마음 돌이라 굴러갈건가 세상사는 동으로 흘러가는 물
로 표현하였으니 이와같은 도학정신은, 그의 학문적 입장이 정주학을 기초로 하여 조선조 사림의 의리정신을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임금에게는 충성을 다하고 신하로서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며, 학문에 임하여서는 그 정통성을 계승하며 이단을 배척하고 도학의 중흥을 그 사명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 순창에 내려와 학문을 가르치고 장성에 머물면서 호남 도학의 영수가 되었던 것이니, 양산보 이항 유희춘 등과 혼인을 맺고 송순 등과 교유하면서 그의 문하에서 호남의 문인들을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정철, 임억령, 고경명, 김성원 등이 모두 이들과 직·간접적인 만남이 이루어짐으로써 사상적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니, 호남 도학사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의식적으로나 교유의 관계로서나 이를 주도하고 이끌었던 것은 김인후였다고 할 것이다.

4. 조선조 성리학의 발전과 장성의 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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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인후의 [천명도]

장성 출신의 학자로서 조선조의 성리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분 또한 김인후였다. 조선조 성리학이 기호 영남학으로 발전하게된 근본 원인은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설에 대한 의견의 차이에 있었던 것이며, 기대승을 지지한 이이의 학설은 기호학이 되고 이황의 학설은 영남학이 되었다는 것은 다 일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런데 그런 논의가 일어난 원인은 정지운이 그린 [천명도]에 대한 도설을 이황이 수정한데 대하여, 기대승이 그 도설의 수정이 잘못되었다고 이론을 제기하면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천명도](天命圖)란 성리학의 학문적 개념을 구성하는 천인성명(天人性命)에 대한 존재형태와 그 관계에 대한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을 도설(圖說)로 붙인 것이다. 본래 이 그림이 그려지게 된 원인은 중국의 성리학을 탄생시킨 주렴계(周濂溪)가 그 이론을 설명하면서 태극도(太極圖)라는 그림을 그려서 거기에 도설을 붙이고 우주의 발생과 인간의 형성을 밝혔는데, 조선조 초기에 이르러 권근(權近)은 이를 본 따서 천인심성 합일지도(天人性命合一之圖)를 그리게 되었고, 명종조에 이르러 정지운(鄭之雲)은 [태극도]와 [천인심성합일지도]를 바탕으로하여 [천명도]를 그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가 1543년이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조선조 성리학의 논쟁, 곧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서 이루어진 사단칠정 이기왕복(四端七情理氣往復) 변론의 실마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지운이 [천명도]를 그린지 6년 후인 1549년 김인후도 또한 [천명도]를 그리고 "추만(정지운의 호)의 [천명도]를 보고 깊이 느낀 바가 있어서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하였는데, 이때는 1558년 이황과 기대승이 사칠논변을 시작하기 9년 전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조 초기 성리학 연구에 있어서 김인후의 [천명도]는 사칠논변의 시작보다 9년이나 앞서서 자신의 견해로써 정지운의 천명도에 필적하는 새로운 천명도를 연구하고 창작하였다는 점에서 조선조 성리학의 연구 업적으로서 매우 깊은 의의를 갖는다.

이는 이황과 기대승이 논변을 통하여 연구하였던 것보다 시대적으로 훨씬 앞섰을 뿐 아니라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로써 천인성명(天人性命)의 관계를 도해(圖解)하여 이른바 [하서천명도](河西天命圖)를 그렸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재와 태극 음양 일물 이물설에 대한 성리학 논변을 통하여 그의 독자적 견해를 세웠다는 점에서 호남의 성리학 뿐 아니라 조선조의 성리학 연구의 업적으로서 부동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2) 김인후와 이항의 태극 음양 논변

김인후의 [천명도]연구 이후 태인의 일재 (一齋: 李恒 1499∼1576)과 장성의 하서 사이에서 태극과 음양을 일물(一物)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이물(二物)로 보아야 할 것인가하는 논쟁이 일게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일재 하서의 '태극음양 일물 이물설 논쟁'이었다. 이 문제의 발단은 일재가 먼저 기대승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하서는 고봉보다 먼저 이 편지를 보고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의 편지를 보내면서 논변이 본격화 되었다. 이때 기대승은 이황과 사단칠정에 대한 왕복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이 내용까지 물었고 이황은 그 편지를 보고 호남의 높은 학문적 수준을 흠모하는 답서를 보내왔던 것이다. 이로써 장성유학의 발전은 영남의 이황에게까지 흠모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항은 김인후와 사돈 사이였다. 이항의 딸이 김인후의 며느리였다. 그런데 이항은 그의 사위 종룡(從龍)을 통하여 기대승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이러하였다.

"근래에 김군 종룡이 나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기정자(기대승이 승문원 정자였음으로 기대승을 가리킴)는 태극은 음양과 섞어서 말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주역에 태극이 양의(兩儀:음양을 말한다)를 낳았다 하였으니, 이에서도 태극이 음양과 섞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는데, 나의 생각으로써는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기 이전에는 양의가 본래 태극 속에 있고, 태극이 이미 양의를 낳은 뒤에는 태극의 이치가 양의 속에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양의가 나오기 이전이나 이후나 태극의 이치를 떠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

이 편지에 나타난 이항의 견해는 태극이 양의(兩儀)로 나누어지기 이전에 음양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며, 양의로 나누어진 이후에도 또한 태극을 포함한다고 보기 때문에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는 주장이었다. 김인후는 그의 아들 종룡을 통하여 이러한 내용을 먼저 알게되자 이항에게 편지를 보내서 태극과 음양을 일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기군(기대승을 가리킴)에게 준 편지에 대하여 감히 말 할 수는 없지만 무릇 이기(理氣)가 혼합하여 천지 사이에 나오지 않음이 없고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지만, 그러나 도(道)와 기(器) 사이에는 계한이 없을 수 없으니, 태극과 음양을 일물(一物)이라고 해서는 안될 듯하다"고 반박하였던 것이다. 이는 태극이 동(動)하여 음양이되는 것이지만 태극과 음양은 변화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할 때의 나뉨(界限)이 없을 수 없으니 일물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글을 받아 본 이항은 다시 변론의 글을 보내면서 "태극에 대한 논의를 재삼 문제삼는 것은, 내가 이기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깊이 근심된 마음에서 그러한 것이다. 호남에서 우뚝한 위치로서 도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공(公: 김인후를 가리킴)과 기군밖에 없는 데, 공과 기군이 이렇게 말한다면 다른 학자들이 이에 휩쓸려 다시 생각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그러한 것이다. 나는 이기(理氣)가 계한(界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혼연히 일물로 본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김인후는 또한 반박하기를 "물(物)의 측면으로 본다면 혼연히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理)의 측면에서 본다면 비록 물(物)이 있지 않아도 다만 이(理)만 있고, 다만 이(理) 만 있고 물이 없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하였으니 이를 살피기 바란다"고 하였다.

기대승과 이황 사이에서 사단칠정논변이 왕복하고 있을 그 때에, 장성의 거유 김인후와 태인의 이항 사이에서는 태극과 음양이 일물인가 이물인가 하는 왕복 변론이 5∼6차에 걸쳐서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대승은 이를 이황에게 물었는데 이황은 "하서의 견해가 옳다"고 인정하고 이어서 "내가 사는 이 곳에는 나와 함께 학문을 강론하는 사람이 없고, 가끔 한둘의 동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 또한 벼슬살이에 분주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늙고 병든 몸을 어쩌지 못한다"고 전제하고 "지금 이 변론을 보고, 호남에 이러한 인물이 이와 같은 논변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되었으니, 이는 실로 우리나라에 매우 드문 일로써 우리 동쪽의 노나라임을 알게 되어, 깊이 사모하고 달려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사실들을 미루어 본다면 이황은 김인후와 이항의 학문적 논변을 매우 흠모하였고, 자신이 살고 있는 영남의 학문적 수준이나 그들의 풍토와는 서로 다른 장성의 학문과 학파적 발전을 존경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5. 조선조의 실학과 변이중의 구국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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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실학사상의 발생 원인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의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동기가 성리학에 대한 반성인가 아니면 사회 경제적 질서의 붕괴에 따른 제도적 변화에서 온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까지 하나의 과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조선조 실학자들의 관심이 토지제도의 모순으로부터 사회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제도개혁의 문제를 먼저 생각하게된 것은 호남의 환경적 특징에 자극 받은 바가 많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조 실학의 발생과 그 발생을 촉진시킨 원인, 이른바 그 동인(動因)으로서 호남이라는 지역적 특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장성지역은 김제나 고부처럼 넓은 평야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올바른 선비정신으로써 현실에 대한 불의를 바로잡고 재도에 대한 모순을 바로하려는 저항정신이 강했던 것이다.

국가를 위한 충절 정신으로서 임진난을 당하여 실학 정신으로 구국의 선봉에 섰던 분이 망암 변이중(望庵 邊以中, 1546∼1611) 이다. 변이중은 율곡의 문인으로서 46세 때 어천 찰방으로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피난길에 오르자 임금께 시무책을 상소하고 단번에 군마 2백여필을 징발하였다. 10월에 전라도 초모사가 되었으나 중간에 왜적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 바다 길을 통하여 전라도에 부임하고 40여일 동안을 순회하면서 무만의 의병을 모병하고 수원 안성 등지에 진주하여 충청순찰사 허욱과 병사 이옥과 더불어 기호의 적을 소탕하였다. 12월에 조도어사(調度御使)를 제수 받았는데 이때 화거(火車)와 총통(銃筒)등을 발명하여 이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 화력은 왜적의 병기를 제압하고 남음이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이는 기관포를 장치한 이동식 화기 같은 것으로서 화약을 이용한 대포알과 연발 화살통과 총통, 그리고 한꺼번에 40발의 총탄을 발사할 수 있는 화거(火車)로서 이를 사용한 조선 군은 왜적을 몰아낼 수 있는 화력을 소유하게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행주대첩을 이룩한 권율은 이와 같은 신무기를 사용하여 대첨을 이룩할 수 있었고, 조선은 마침내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학문에 열중한 선비라고 하여 국가가 위기를 당하였을 때에도 수수방관하였던 것이 아니라 창조정신으로서 국방을 튼튼히 하고 민족과 국가를 구하였던 것이니 장성의 실학정신은 이론과 경륜으로서 국가의 제도를 논하였던 실학과 다른, 실용성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6. 한말 성리학과 기정진의 유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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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윤은 {조선유학사}에서 "근세유학의 중심이요 또 참으로 근세유학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 셋이니, 기노사(奇蘆沙) 이화서 (李華西), 이한주(李寒洲) 3인이다. 그 가운데서 노사와 화서는 별도로 전수한 연원도 없이 각각 평지에서 굴기한 독학자들이다"고 지적하였다. 현상윤이 여기에서 말하는 조선조 성리학 연구의 3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노사(蘆沙 奇正鎭, 1798∼1879)는 순창 복흥 출생으로서, 장성에서 일생을 보낸 한말의 거유(巨儒)이다. 그는 재능이 뛰어나서 조선조 성리학 이론을 종합하여 하나의 논리 체계로서 정리하였던 것이니, 이러한 업적을 가리켜 한말에 이르러 조선조 유학의 결론이 장성의 유학으로서 정리되었다고 하는 것이며, 세칭 말하기를 '장안의 만목이 장성의 일목만 같지 못하다'는 속언을 낳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기정진이 어렸을 때 열병을 앓게 되어 한쪽 눈이 실명했던 까닭에 생겨난 것이다.

기정진은 뚜렸한 스승이 없이 오로지 혼자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5세 때에 이미 효경과 격몽요결을 통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7,8세 때 [소학]과 [통감강목]을 독파하였으며, 십세 전후에 [춘추]와 [대학연의]를 읽어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한다. 34세에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현릉 참봉, 사옹원 주부, 평안도사, 사헌부 장령, 공조참판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62년 진주 민란이후 백성들의 마음이 흉흉해지자 삼정대책(三政對策)을 논했고, 1868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다시 육조소(六條疏)를 국방을 튼튼히하고 서양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강화도가 프랑스에 점령당하자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했고,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모든 것을 체념하고 [외필](猥筆)을 저술하고 82세의 인생을 마쳤다.

노사가 주장하는 성리설의 중요한 내용은 그 당시까지 학설의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리(理)와 기(氣)가 일원(一元)이냐 이원(二元)이냐 하는 기호 영남학의 주장을 계승하거나 어느 한편의 입장에 섰던 것이 아니라 조선조 성리학을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한 것이며, 나아가서 주자의 성리학 이론과도 전혀 다른 견해를 피력한 것이었다.

성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우주의 발생과 인간의 성정(性情)을 논할 때는 리(理)와 기(氣)의 두 요소가 어떻게 존재하고 발용(發用)하느냐 하는 것이 그 중심된 연구 과제였다. 여기에서 리(理)가 먼저 발(發)한다고 본다면 리발(理發)이 되는 것이며 기(氣)가 먼저 발한다면 기발(氣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리기(理氣)의 조화와 선후 강약의 관계를 떠나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정진은 이와 같은 일반적인 이기론을 벗어나서 새로운 이기설을 확립한 것이다. 그는 인간과 우주를 관통하는 모든 현상과 존재의 근원이나 그 작용은 오로지 이(理)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주리설(主理說)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영남의 학자들은 이(理)를 주로하여 자기의 주장을 펼쳤다는 점에서 그 학문적 특징을 주리설(主理說)이라 하고 이를 추종하는 무리를 주리파라고 하였으며, 기호의 학자들은 기(氣)를 주로하여 자기의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 그 학설을 주기설(主氣說)이라 하고 그 무리를 주기파(主氣派)라고 한다. 그러나 노사가 말하는 주리설(主理說)은 리(理)의 존재와 작용은 물론 모든 현상 또한 리(理)가 아님이 없다고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영남학의 주리설과도 다른 새로운 학설인 것이다. 그는 리(理)와 기(氣)를 서로 나누거나 어디에 속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곧 리기(理氣)란 오직 리(理) 하나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氣)라는 것 자체가 따로 존재하거나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리(理)의 한가지로 작용하는데 불과 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기(氣)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氣)라는 글자까지도 사용하지 않으려 하여 기(氣)에 해당하는 글자 대신에 분(分)이라는 글자로써 기(氣)의 뜻을 포함 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존재와 현상은 오로지 리(理)에 근원하는 것이니 그것이 태극이며 태극은 이(理)인 것이다. 비유하여 말하자면,"한 덩어리의 구리나 쇠붙이는 하나의 태극인 것이며, 이 구리와 쇠붙이가 나뉘어져서 그릇이되고 칼이나 무기가 되는 것과 같이 우주의 무든 현상은 하나의 이(理)로서 나누어지는 태극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기(氣)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理)는 하나이며 현상은 리(理)의 나뉨에 불과하다는 명제(命題), 곧 이일분수(理一分殊)라고 할 때 현상인 분수(分殊)는 이일(理一)을 포함하는 것이니 그 자체가 이(理) 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리(理)가 현상으로 나뉘어지는 것이며 그 현상 자체가 리(理)의 나뉨이되기 때문에 현상 자체가 본연의 실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모든 도덕적 행위도 순수한 리(理)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노사의 철학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는 그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정신적 이념의 정립 곧 시대의식을 반영한 철학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처하였던 한 말의 상황은 국내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고 나라 밖으로는 열강의 침략으로 인하여 국운이 위태로워진 때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현실을 올바른 철학으로서 타개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변할 수 없는 근본 원칙, 하나의 정신적 지표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특히 리기(理氣)의 논쟁으로서 리발(理發), 기발(氣發), 리기강약(理氣强弱), 리선기후(理先氣後), 기선리후(氣先理後)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분열된 성리학의 이념으로서는 당시의 시대를 헤쳐갈 수 있는 강한 철학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오로지 하나의 이념과 그 실천을 통한 시대정신으로 난국을 타개하고자 한 것이 노사의 철학이었다고 할 것이며, 그 내용이 리(理)라는 한 글자로 종합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리(理)철학은 그 당시에 밀려오는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는 이념으로서 커다란 교훈이 되었던 것이다. 리(理) 철학은 그 당시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그 시대에 대처 할 수 있는 여러 지혜들이 짜여졌지만 모두 자기의 주장에 그칠 뿐 근본정신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때 기정진은 어떠한 현상도 모두가 근본 정신인 리(理)를 벗어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웠다는 점에서 기정진의 철학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한 철학은 당시 조선왕조가 처하여 있는 상황으로는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외세와 타협할 수 없는 근본 원칙을 중시하여야한다는 가르침이 되었던 것이니, 이에 따라서 외세를 물리치고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여야 한다는 척사위정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 자주적이고 배타적인 위정척사사상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상소활동이나 한말의병의 기본사상이 되었다.

7.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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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장성유학의 정신과 그러한 특징들이 국가적으로 어떤 공헌을 남겼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밖에 나타난 일부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와 같은 현상을 나타낼 수 있었던 저변의 의식이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것인데, 위에서 서술한 현상은 장성지역의 유학적 관심과 백성들의 관심이 어떠하였는가를 말해준다고 할 때, 그러한 수준에 대한 근거로서 제기되었던 것이 성리학시대와 실학의 시대, 그리고 척사운동의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훌륭한 업적들이었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조선조 성리학 연구의 선구가 되었던 김인후와 실학에 있어서는 현실에 대한 학문적 응용과 국방의 정신으로 강한 무기를 만들어 왜적을 무찌르는데 커다란 공헌을 남긴 변이중의 구국정신이 있었고, 한말에 이르러 국가가 위기를 당하였을 때는 혼란된 사상계를 바로잡고 척사위정의 철학을 확립한 기정진의 유리설이 있었다. 그리고 기우만과 기삼연의 의병활동은 척사위정의 정신을 의병활동으로 현실에 실현하여 조선조의 기개를 더욱 떨치게 한 빛난 업적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의 근원에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 보다 참된 삶을 유지하고자하는 유학의 인도정신이 있었던 것이니 이러한 행의와 정신을 통해서 장성유학의 보다 높은 수준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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