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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蘆嶺)의 큰 산줄기가 서남쪽에는 방장산·축령산·고성산·태청산으로 뻗었고, 동쪽에는 백암산·대각산·용구산·불태산·병풍산으로 이어져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우리고장 장성은 황룡강이 젖줄마냥 평야를 적시며 흐르고 있고, 장성호가 장성의 농지는 물론 광산과 함평까지 13,900정보를 촉촉하게 적셔주고 있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6만의 주민들과 그 보다 많은 출향인사들은 정다운 고장, 산좋고 물맑은 고향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따스한 어머니의 정을 느끼고 산다. 우리를 낳아 길러주고 조상의 뼈를 묻고 있는 고향 땅은 언제나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곳이다.

전남·북을 이어주는 경계지역으로 국도 1호선과 호남선 철도 그리고 호남고속도로가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 이 나라의 호국용사를 배출하는 상무대가 자리하는 곳, 명산과 대찰이 따뜻하게 방문객을 맞아주는 내 고장, 언제나 생기발랄하고 약동하는 우리의 보금자리 장성은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 속에서 우리들의 긍지를 북돋우고 밝은 내일을 향해 힘차게 달리게 한다.

고향땅 장성에서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청소년들, 이제는 어엿한 주인공으로 이 고장을 양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어른들, 날로 발전하는 고향 땅을 지켜보는 출향 인사들, 그 누구나 자신들을 낳아 길러준 보금자리 장성을 잊을 수는 없다. 수구초심(首邱初心)이라고 짐승도 죽을 때는 머리를 자기가 살던 곳을 향한다고 한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지적이며 의리에 강한 장성인은 자기가 살던 곳을 길이길이 간직할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곳에서 훌륭한 문화를 꽃피웠고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을 세워 우리들에게 장성인의 긍지를 가지고 고장을 계속 발전시키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고장의 지난날을 반추하면서 앞으로를 다짐하는 자랑스러운 장성인, 고향을 사랑하는 장성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선비정신의 본고장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올곧게 지켜 온 선비정신은 충절과 의리를 기본으로 삼고 있는데 그 한가운데 서 있는 곳이 바로 우리 고장 장성이다.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평야, 산자수려(山紫水麗)한 자연환경은 일찍부터 우리고장에 사람이 살게 하였고 수준높은 문화를 발달하게 하였으니, 선사문화(先史文化)와 마한시대(馬韓時代)·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백제(百濟)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겨놓았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정치의 주변부로 전락하였지만 열악한 정치문화에서 초연할 수 있게 해, 사람답게 살면서 사람의 도리를 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잘 보존하게 되었으며, 충절과 의리를 지켜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편안하게 살게 하면서 그들을 흠모하고 선망하게 했다.

고려말에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이 유입되면서 신진사대부들은 원나라와 야합하여 추악한 행각을 벌이던 권문세족을 규탄했고 드디어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정치·경제를 개혁하는 주도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하면서 이를 뒷받침한 정도전·조준 등과는 달리 충절을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의리의 사람들이 이곳에도 찾아왔는데, 고려말의 혼란과 왕조교체를 전후하여 장흥고씨·상산김씨·황주변씨·신평송씨·청송심씨 등이 먼저 자리잡았고 다른 곳을 거쳐 이곳에 정착한 광산김씨·옥천조씨 등도 있다.

정치권력을 둘러싼 더러운 싸움은 조선왕조에서도 한층 심각하게 전개되었으니 조선초의 수많은 정변과 사화·당쟁은 엄청난 살육을 빚었고 언제나 충절과 의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유배나 은둔을 택하게 했다. 우리고장에 정착한 울산김씨·하음봉씨·행주기씨·경주이씨·고령신씨 등이 모두 그러한 정쟁과 관련이 깊은 사람들이다.

연산군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반정군을 일으키자고 격문을 돌린 옥과군수인 영광인 김개(金漑)나 의리사상을 깊게 간직한 호남사림의 큰 맥을 이루게 했던 신평인 송흠(宋欽)이나 울산인 김인후(金麟厚), 청백리로 명성을 떨친 태인인 박수량(朴守良)은 모두 우리고장이 낳은 인재들이다.

충절과 의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장성인 등 호남인은 나라와 민족이 어려움에 처할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구국의 대열에 앞장섰으니, 임진왜란에서 이 나라를 건지고 한말의 일제침략에서도 의병활동의 중심이 되어 최후까지 싸웠다.

왜란으로 전국토가 짓밟히고 백성들이 유린당할 때 의병에 앞장선 장성인들이 많았는데 김경수(金景壽)의 남문창의를 비롯하여 기효간(奇孝諫), 기효근(奇孝謹)의 의병활동, 화차를 발명하여 행주싸움을 승리로 이끈 변이중(邊以中), 동래산성에서 적을 맞아 순국한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등이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데 크게 공헌했고, 입암산성에서 순절한 윤진(尹軫)의 충절은 장성인의 정신을 웅변해 주었다.

이러한 의병정신은 한말에도 계속되었으니 전기 호남의병을 주도한 장성의병은 기우만(奇宇萬)·기삼연(奇參衍) 등이 주도하였으며, 후기 호남의병의 중심이요 전국의병의 꽃은 기삼연이 삼계 수연산에서 출발한 호남창의회맹소였다. 일제 침략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기삼연의병대는 그가 순국한 이후에도 그의 막료들에게 계속되었으니 김용구(金容求)·김준(金準)·전해산(全海山) 의병들이 모두 기삼연의 후계자들이었다.

또한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장성인의 기질은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의 선구가 되게 하였으니, 기정진(奇正鎭)은 가장 먼저 상소를 올려 그 뒤를 이은 이항로와 함께 쌍벽을 이루어 우리 것을 지켜 사악한 외래사상을 배격하자고 주장해 한말의병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게 했다. 충절과 의리를 지키려는 장성인의 활동은 을사조약에 협조한 5적암살 활동에도 표출되었으니 기산도(奇山度)의 이근택 저격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장성인들은 잘못된 비리를 바로잡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변화와 개혁에도 앞장섰으니, 1862년의 임술농민항쟁에서도 장성의 농민대중이 궐기했을 뿐만 아니라 기정진 등은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혁신을 통해서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출하자는 상소문을 입안하기도 했다. 1894년에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호남인이 주도한 동학농민혁명에서도 장성인들은 적극 참여했으니, 농민군의 최대 승전지가 황룡전투였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일제 36년간의 가혹한 탄압과 수탈의 식민통치기간에 날카롭게 저항하면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는데도 장성인들의 활약이 대단했으니, 3·1만세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신간회활동 그리고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

1919년 3월 1일 정오부터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전국의 방방곡곡을 요동쳤다. 우리고장 장성에서는 군내 전지역에서 산상봉화시위와 삼서 소룡리의 만세시위, 장성읍의 만세시위 그리고 북이면 모현리의 만세시위가 두드러졌는데 특히 모현리 만세시위는 그 규모나 열의가 전국에서도 손꼽을 정도였다.

1927년에 모든 민족운동단체들이 결집하여 조직한 민족단일당인 신간회 활동에서도 장성인들은 지회를 설립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전국대표로 활약한 인사도 있었다. 1929년 11월의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도 장성출신의 학생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했으며 중책을 맡기도 했는데 사회인사로 학생운동의 배후에서 큰 활약은 물론 전국확산에 공헌한 사람도 있으며, 1943년에 전개된 제2학생독립운동은 장성인들이 주도하였다. 그리고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전남대의원으로 활동하였거나 해외에서 장성인의 의기를 발휘한 독립투사들도 많았다.

해방과 함께 냉전체제의 부산물로 강요된 분단정국에서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험준한 산악지역을 끼고 있는 우리고장의 피해는 엄청났다. 그러나 비극을 극복하고 반독재·반분단의 애국활동에서 눈부신 활약을 벌인 분들이 많았으니, 그러한 결실로 이승만독재와 박정희 군사정권, 그리고 신군부의 전두환·노태우 정권들을 타도하고 문민정부를 거쳐 수천년만에 이룩된 수평적인 정권교체를 통해서 정의와 자유가 넘치는 오늘의 국민정부를 탄생시켰다.

선비의 본 고장으로 충절과 의리를 소중하게 계승·발전시켰으며, 문향(文鄕)의 전통을 이어받은 장성인들은 이 땅에 민주화를 완성하고 분단을 극복하며 분배정의가 실현되어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다같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살기 좋은 내 고장
산이 아름답고 물 맑은 우리고장, 물산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한 장성땅은 인심도 순박하고 근검하여 사람살기 좋은 곳이라 자타가 공인하여 왔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서는 선비들이 문학을 숭상하는 고장이라 평했고,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민심이 순박하고 근검하다고 기록했으며, 옛부터 '생거장성(生居長城)'이라는 명언은 우리고장이 살기좋은 곳임을 웅변해주고 있다.

일찍부터 수준높은 문화를 창출했고 뛰어난 인물들이 많아 훌륭한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우리고장은 산수좋은 천연적 환경과 어울려 찾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 살고 싶은 땅을 이룩해 놓았다. 특히 우리고장은 호남의 웅도인 광주와 인접하여 교통이 편리하고 땅이 기름지니 전원생활의 적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머지않아 못재의 터널공사와 국도1호선의 4차선 확장공사가 완성되면 광주와 공동생활권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고장 장성은 풍부한 수자원도 확보하였으니 황룡강이 관통하고 있으며 장성호는 많은 물을 확보하여 장성의 농토는 물론 인근인 광산·함평의 평야까지 몽리면적으로 하여 축복받은 땅이며 이웃에게 베푸는 고장인 것이다. 그리고 잘 가꾸어진 산림은 맑은 공기와 물을 공급함은 물론 휴양림으로 개발되어 많은 사람들의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관광자원도 풍부한 우리고장은 유서깊은 백양사의 큰 가람을 비롯하여 노령의 단풍, 장성호의 맑은 물,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보존된 필암서원, 박수량의 백비(白碑), 황룡의 동학농민승전기념공원, 발굴·재현되고 있는 홍길동생가터 등이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리고 장성의 특산물은 옛부터 토산물로 꼽은 비자·감·석류에다가 새로 재배되는 포도·배·사과 등의 농산물과 삼서에서 재배되는 잔디는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인문과 자연환경이 잘 어울려 전원의 꿈을 이루면서 살기좋고 살고싶은 땅으로의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춘 장성땅은 군민들의 열정과 강인하고 정의로운 정신에다가 자치단체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생동하는 고장, 의욕이 넘치는 고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축복받은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 장성인은 선비정신을 계승·발전시켜 정의가 강물처럼 넘실거리면서 풍부한 물산과 전망있는 개발을 통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힘차게 달려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향(義鄕)과 문향(文鄕)의 계승자들인 자신들의 번영은 물론 향토와 국가발전에 공헌할 것이며 세계평화에도 이바지하는 의연하고 장엄한 장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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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