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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구의 변화와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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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인구수는 고장의 크기나 세를 나타내는데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우리나라에서 고을별 인구수를 기록한 자료는 삼국사기에 나오나 경주 같은 도읍지 급에 한하여 그것도 호수로 나타내고 있다.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서 인구 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 여겨졌다. 특히 세곡이나 국방과 관련하여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호구(戶口)를 파악하기 위한 제도나 기관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사내용이 남아있는 기록은 매우 제한적이다. 전국적으로 각 고을마다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는 최초의 것이 『세종실록지리지』이나 수치에 대한 해석을 놓고 아직 의견이 달리하고 있어 당시 인구값으로 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이후 자료로는 1759년에 나온 『여지도서』와 1789년에 펴낸 『호구총수가』가 있다. 이 두 자료는 면별 규모까지 알 수 있어 조선후기의 인구 규모를 살피는데 매우 중시 여겨지고 있다.

다음으로는 고을별로 읍지가 발행되면서 당시의 호구수를 표시하여 일정한 연대에 전국적인 값은 구할 수 없지만 해당 고장 읍지의 편찬 시기의 값은 각각 구할 수 있다. 이후 구한말 정부재정고문본부에서 『한국호구표』가 1907년 발행되어 전국의 각 읍면별 가구수와 인구수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이 자료는 국운이 어지로운 혼란기에 조사된 점으로 보아 정확성에 있어 다소 문제가 있다. 갑오경장 이후 우리 자체 힘으로 토지조사와 함께 호구조사를 서둘러 국가경영의 기틀로 삼으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그 실현에는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당시 마을별로 작성된 호구대장과 통표는 현재 남아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어 아쉬울 따름이다. 다행히 지난 1997년 고려대학교의 이헌창 교수에 의해 1910년 5월 10일 내부경무국에서 편찬한 『민적통계표』가 그 해설과 더불어 발행됨으로써 20세기 초 전국 읍면별 호구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직업별 분류표까지 있어 당시 사회생활상까지 추론할 수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일제는 통감부시대부터 인구조사를 했으나 센서스는 1925년에 처음 시행되었다. 이후 5년 단위별로 국세조사라는 센서스가 이뤄졌으나 1930년대 말부터 전쟁국면에 임하면서 완벽한 센서스는 행해지지 못했다. 이후 광복과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정확한 인구조사는 어려웠다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각 시군별 통계연보가 발행되는 등 본격적인 상주인구 조사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장성군의 2000년 12월말 현재 인구수는 56,223(외국인 237명 포함)이지만, 앞으로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됨으로써 세비를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으나, 인구 유입을 위한 특별하거나 구체적인 해결책은 없는 실정이다. 더욱이 광주라는 거대도시가 지척에 있어 점점 위성촌으로 되어가고 있다. 과연 앞으로 장성군 인구는 얼마나 남을 지가 염려되고 있다.

(2) 인구 변화
1)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장성과 진원현의 호구는 183호 840명과 144호 747명으로 합하면 327호 1,587명이다. 당시 오늘날 장성 영역 서부의 일부는 영광과 함평소속이었기에 고려해보면 500호 2,000명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참고로 선군(船軍)을 비롯한 군정을 고려해보면 장성현의 경우 시위군 13명, 진군 23명, 선군 140명이고 진원현의 경우 시위군 21명, 진군 51명, 선군 106명으로 두 고을을 합하면 시위군 34명, 진군 74명, 선군 246명으로 모두 354명인데, 서부 지역까지 더한다면 500명 쯤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지도서』에 나온 장성의 인구는 진원현이 통합된 점을 고려해서 보아야 한다. 18세기 중엽 장성군에는 8,463호에 30,037명이 살고 있었다. 읍면별로 보면 오늘날 장성읍 관내인 읍동과 읍서 지역이 371호 1,501명, 731호 2,626명과 역면(북삼)이 760호 2,173명을 합하면 1,862호 6,300명이었다. 여기에 장성호 수몰로 없어진 북상면 603호 2,168명 중 일부를 더하면 2천여호에 6천5백명 정도가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는 삼계면 지역으로 당시 영광군 소속이었던 현내면 316호 1,215명, 내동면 174호 732명, 삼북면 471호 1,577명을 합하면 961호 3,524명이 살고 있었다. 세번째는 황룡면 관할로 남삼면 197호 886명, 서일면 228호 712명, 서이면 282호 927명을 더하면 707호 2,525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은 삼서지역으로 당시 영광 소속 삼남면 380호 1,557명, 외서면 261호 912명을 더해 641호 2,469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면 지역은 남일면 262호 989명, 남이면 297호 1,212명을 더해 559호 2,201명이었고, 진원면은 내동면 289호 1,054명, 외동면 333호 1,133명을 합쳐 622호 2,187명이며, 동화면내에는 영광소속 외동면 261호 996명, 나주소속 대화면 358호 1,146명을 합해 619호 2,142명이었다. 이어 북이면 504호 1,779명, 북일면 458호 1,665명, 서삼면 490호 1,608명, 북하면 437호 1,469명이 각각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인구 구조는 남자가 여자보다 2,482명이나 적었다. 따라서 당시 조사여건을 고려하면 남자인구는 3만 4천여명이 장성관내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호구총수』는 한세대 뒤인 18세기 말의 자료로 마을 이름도 나온다. 이때 장성의 인구는 총 8,947호 31,638명을 기록하고 있다. 읍면별로 보면 북삼면을 합한 장성읍 관내가 1,698호 6,022명으로 가장 많고, 삼계면이 1,068호 4,149명으로 두번째였다. 이어 삼서면 757호 3,036명, 황룡면 830호 2,931명, 북이면 651호 2,180명, 남면 616호 2,110명 순이다. 이 자료에도 남자인구가 2천여명 적어 조사여건을 고려하면 3만 5천명 정도로 짐작된다.

20세기 초 조사자료인 호구표는 남자인구가 여자인구 보다 훨씬 많아진다. 당시 장성관할에 10,147호에 남자 20,322명, 여자 16,461명으로 36,783명으로 120년 전보다 1천여호 5천명 정도가 증가했다. 이때 북삼면 포함 장성읍내가 1,179호 4,419명으로 오히려 상당히 감소한 반면 북하면은 824호 4,146명을 비롯하여 남면 953호 3,379명, 진원면 819호 2,747늘어났다. [표 1-12]

[표1-12]장성군의 인구변화

[표1-12]장성군의 인구변화 - 現邑面, 舊邑面, 1759, 1789, 1907, 1910, 1925, 1930, 1935, 1944, 1960을 나타낸 표
現邑面舊邑面175917891907191019251930193519441960
장성읍邑東1,5011,6141,1333,0099,73511,87716,68918,13524,868
邑東2,6262,2681,5413,200
北三2,1732,1401,7452,6243,8273,973
진원면內東1,0541,1761,5982,6326,6046,9667,1097,3518,972
外東1,1337391,1492,241
남 면南一9891,0301,3882,6696,6517,1217,5027,63710,411
南二1,2121,0801,9914,058
동화면外東9968931,3331,4034,9765,4225,5435,7257,410
大化1,1467714231,580
삼서면森南1,5571,4912,2053,5059,86910,35310,45912,00712,455
外西9121,5451,3282,348
삼계면縣內1,2151,4501,0831,60710,08410,23810,40311,44512,086
內東7327891,0331,537
森北1,5771,9102,3413,615
황룡면西一7127808241,4439,0829,5259,4559,67612,298
西二9271,4091,7202,444
南三8867421,1111,675
서삼면西三1,6081,6872,2973,7064,8555,0475,1035,1135,291
북일면北一1,6651,7071,7333,9514,7825,0385,1135,4475,867
북이/하면北二1,7792,1802,6214,9716,4186,8777,1587,4438,304
北上2,1682,8592,0404,6015,7565,7486,0565,6095,136
北下1,4691,3784,1464,3705,9485,9185,8795,8305,304
합계30,03731,63836,78363,18988,58794,10396,469101,418118,402
[표1-12]장성군의 인구변화 2 - 現邑面, 舊邑面, 1965, 1970, 1975, 1980, 1985, 1990, 1995, 2000을 나타낸 표
現邑面舊邑面19651970197519801985199019952000
장성읍邑東26,85125,69126,18124,16323,08119,22716,46214,873
邑東
北三
진원면內東9,8688,2797,8146,2595,0743,7553,7243,671
外東
남 면南一11,70010,2189,8297,9656,5494,6684,4084,243
南二
동화면外東8,1747,0856,5675,0804,2053,1292,9582,930
大化
삼서면森南14,19212,51112,1549,2577,3144,9754,3933,962
外西
삼계면縣內13,52112,65112,1589,4347,6894,9787,4868,752
內東
森北
황룡면西一13,62612,33611,5509,9438,3956,2346,6006,191
西二
南三
서삼면西三5,8675,2805,1174,0273,2262,7192,1762,027
북일면北一6,6685,8805,6804,8344,4983,2412,4752,155
북이/하면北二9,4858,6389,9217,9286,8035,2204,7044,170
北上5,8665,416
北下6,3155,9528,7615,9794,8003,6703,5783,249
합계132,133119,937115,73294,86981,63161,81658,96456,223

1910년 민적통계표 자료는 앞 자료에 비해 거의 두 배로 인구수가 증가한다. 몇 년 사이에 차이가 심한 것을 보면 호구표 자료에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장성 인구는 오늘날 보다 많은 13,456호 63,189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호수 1천에 인구 5천명이 넘은 읍면이 장성읍을 비롯하여 삼계, 남면, 삼서, 황룡면이었고, 가장 적은 면인 동화면은 724호 2,983호를 기록했다. 이 자료에는 직업별 인구가 있어 주목할만 하다. 관리와 양반이 많았던 면은 삼계면 지역으로 삼북면으로 관리 5호, 양반 12호이었고, 내동면 관리 7호, 양반 7호로 모두 31호나 되어 장성읍보다 많았다. 동화면 지역중 대화면은 유생이 29호로 다른 면보다 훨씬 많은 점이 눈에 띠고 있다. 상공업에 대한 호수는 삼계의 삼북면이 128호로 가장 많고 삼서의 외서면과 삼남면도 100호와 75호로 기록되어 있어 주로 영광 관할 지역이 많았다. [표 1-13]

[표1-13]1900년대 장성군 읍면별 인구현황

[표1-13]1900년대 장성군 읍면별 인구현황 - 現邑面, 舊邑面, 戶數, 人口, 男, 女, 官公吏, 兩班, 儒生, 商業, 農業, 漁業, 工業, 日稼, 其他을 나타낸 표
現邑面舊邑面戶數人口官公吏兩班儒生商業農業漁業工業日稼其他
장성읍邑東6623,0091,5821,42733 86462
邑西6583,2001,6631,53794 1063311
北三(驛)6322,6241,5151,10911 10620
北下8704,6012,4112,19023112852
진원면內東5532,6321,3851,24722210537
外東4852,2411,2041,0372217473
남 면南一5792,6691,4161,25311 9568
南二1,0764,0582,4491,60921 121,061
동화면外東4141,4031,05335014515372 107
大化3101,5807808002 2925246 143
삼서면森南7693,5051,9701,5353 575628 3721
外西5422,3481,3051,0434 100419 811
삼계면縣內3341,60788172616643249 1217
內東2361,537839698771217180 58
森北7643,6151,8731,7425125128570 2532
황룡면西一2931,4437806632335280
西二4652,4441,3071,13723413443
南三2751,67596970613210259
서삼면西三6823,7061,9261,78023112664
북일면北一7783,9512,0701,88122114759
북이면北二1,0914,9712,6582,31322 151,072
북하면北下9884,3702,3692,00112 13972
합계13,45663,18934,40528,78457647756312,5033210199

[자료] 1910년 5월 발행 민적통계표

2) 일제시대
1925년 최초의 인구센서스는 현주(現住)조사 방법으로 시행되었다. 당시 장성군의 인구는 18,152호 88,587명이었다. 장성읍내는 북삼 748호 3,827명과 자체 2,064호 9,735명를 포함하여 2,812호 13,562명이었다. 그 다음을 보면 삼계면 2,063호 10,084명, 삼서면 1,992호 9,869명, 황룡면 1,841호 9,082명, 남면 1,308호 6,651명, 진원면 1,348호 6,604명, 북이면 1,317호 6,418명, 북상면 1,232호 5,756명 순이다.

1930년은 일본인 1,068명을 포함하여 94,103명이었다. 장성읍은 내부에 일본인 685명을 포함하여 11,877명이고, 북삼면 지역은 3,973명이었다. 그 다음은 삼서면으로 10,353명이고, 삼계면이 10,238명이었다. 북이면은 읍내 다음으로 일본인이 많은 70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호남선 사거리역전통에 거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1935년 국세조사 결과 장성군은 19,041호 96,469명으로 증가했다. 장성읍은 북삼면과 통합되어 3,388호 16,689명이었다. 두번째는 삼서면으로 1,913호 10,459명이고, 세번째가 삼계면으로 2,075호 10,403명이었다. 다음은 황룡면 1,915호 9,455명, 남면 1,420호 7,502명, 북이면 1,440호 7,158명, 진원면 1,420호 7,502명 순이다.

광복전인 1944년 장성군 인구는 10만명이 넘어섰다. 1948년에는 12,599명이 되었으나 한국동란으로 1955년에는 남자 51,765명 여자 56,064명으로 107,829명으로 줄었다. 이어 1960년 남자 59,257명 여자 59,145명으로 118,402명으로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1965년에는 132,133명을 기록했다. 이 인구수가 장성군의 최대 인구였다.

3) 전출기
한국전쟁이 끝나고 베이비 붐이 일어나 폭발적인 인구 자연증가가 나타났으나 1965년을 기준으로 해서 그 이듬해부터 감소가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서울과 광주같은 도시 지역으로 취업과 학업을 위해 전출 러쉬가 일어나면서 부터이다. 당시 한국사회의 이른바 이촌향도 현상이 장성군에도 반영된 것이다. 1970년대까지는 10만명을 유지했으나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9만 명 선이다가 1985년에는 8만명을 간신히 유지하다 1990년대로 들어와 상무대 입주로 삼계면 지역의 인구 증가에도 불과하고 6만명 선을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1995년에는 18,894호 58,964명으로 5만명대가 되었고 2000년 12월 31일 현재 외국인 237명을 제외한 인구수는 55,986명으로 집계되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전입자보다 전출자가 3­4천명 정도 많다가 1990년대 중반에는 오히려 전입자가 2천여명 많았던 것은 삼계지역의 상무대 영향이었고, 다시 1996년부터 매년 6­7백명 정도 전출자가 전입자보다 많이 나오고 있다.

2001년 말에 이르면 장성군의 인구는 외국인을 제외하고 55,000명 선에 이르고 인구밀도는 1㎢당 106명이 될 것이며, 이 규모는 1세기 이전인 구한말 때와 비슷한 수치이다.

(3) 인구 구성
1) 연령과 성별구조
일반적으로 연령별 인구구조는 나이순으로 어린 층이 가장 높은 비율을 나타내고 고령자가 가장 낮은 비율을 차지하는 피라미드 구조를 보여왔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되면서 사망률과 더불어 출생률까지 떨어지는 이른바 선진국형인 종형구조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특히 장성군 같은 곳은 농촌지역이므로 전출형 모델인 표주박형을 이루게 되었다. 즉 중간 연령층의 비율이 낮고 노인 인구 층의 비율이 높은 형태이다.

1930년의 인구 구조는 전형적인 피라미드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1960년대까지 비슷했으나 1970년대부터 가족계획과 더불어 출생률이 감소한데다 이촌향도 현상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급박하게 일어나면서 전출형 구조인 표주박형 모양을 이루고 있다. 2000년 말 5세간 구간에서 20대 초반이 5,031명으로 9%로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병역과 학교문제로 실제 타지에 있으나 주민등록상 장성지역에 속해 있는 허수가 일부 차지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같은 연령층에서 여자의 경우 남자보다 597명이 적게 나타나는데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40대 후반 비율 5%까지 감소하다가 50대 초반부터 5.7%, 50대 후반 6.7%, 60대 초반 7.6%로 증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허리가 잘룩해지고 노인 층이 높아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성별 구조는 18세기에는 여자인구 100명에 남자인구는 85­87명인 여초현상을 보였다. 이는 1세기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란을 겪었던 이유도 있지만 당시 인구 조사에 있어 16세 이하와 60세 이상의 남성인구를 제외한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1907년 호구표 자료에는 남자 36,783명에 여자 20,322명으로 성비가 123으로 반대로 심한 남초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다소 완화되었지만 민적조사표에서도 나타난다. 즉 남자가 34,405명인데 비해 여자는 28,784명으로 여자 100명에 남자가 119명인 셈이다. 1935년대에도 남자 49,096명과 여자 47,373명으로 성비가 103으로 낮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남초현상을 보이고 있다. 1955년의 경우는 성비가 92로 반대로 여초현상이 되었다. 한국전쟁에 따른 결과라고 여겨진다. 다시 1962년에 가서 남자 61,656명 여자 59,436명으로 남자가 2,220명이 많게 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면 해마다 역전되다가 1980년대에는 여자가 약간 많았다가 1995년부터 남자가 다소 많은 경향을 타내고 있다. 그러나 연령별 성비 구조는 매우 다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2000년의 경우 40대 초반까지는 남자 비율이 높다. 특히 20대의 경우는 남자 5,609명에 여자 4,104명으로 1,505명의 차이를 나타내어 성비는 137로 여자 인구 100명이다면 남자가 137명이나 된 셈이다. 30대도 남자 4,179명에 여자 3,101명으로 성비가 134로 심한 남초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에 반하여 60대는 남자 3,132명 여자 4,293명으로 성비는 73이고, 70세 이상은 남자 1,703명 여자 3,379명으로 여자가 배나 많다.

외국인 현황은 2000년 현재 중국인 87명을 비롯하여 남자 140명 여자 97명으로 237명이 등록되어 있다. 외국인은 1998년 165명, 1999년 185명으로 점점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1999년 현재 읍면별로 보면 동화면 중국인 27명을 비롯 필리핀인 23명, 인도네이아인 17명 등 77명이 등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동남아를 중심으로 한 개발도상국 출신들이 농공단지 종업원으로 취업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장성읍에는 중국인 35명을 비롯하여 52명이 등록되어 있다. 일본인이 26명 등록된 것은 종교 결혼을 통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산업별 구조
1910년대 민적통계표에서 살핀 바와 같이 당시 가구의 92.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 다음은 상업이 4.2%, 관리 양반 유생을 합쳐 1.4%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삼계면과 삼서면은 상업이 14.1%와 13,3%로 타 읍면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1930년대 국세조사자료에 따라 직업별 인구 구성을 보면 농업이 44,958명으로 44.7%, 무업(無業)이 40,671명으로 42.8%, 기타유업자가 2,858명으로 3.0%, 공업이 2,793명으로 2.9%, 상업이 1,569명으로 1.7%를 차지하고 있다. 그밖에 가사사용인이 599명, 공무원과 자유업자가 530명, 교통업 116명, 수산업 9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업인구 중 방직공업에 496명 중 482명이 여자이다. 상업의 경우 접객업에 345명이 등록되어 있는데 여자는 208명이다.

1999년 말 기준 농가인구는 8,775호 26,703명으로 전체 가구 44.6%에 걸쳐 47.1%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산업별 사업체 종사자가 2,835개소에 10,684명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 현황을 나열해보면 제조업 315개 2,995명를 비롯하여 도소매업 903개 1,736명, 숙박 및 음식업 576개소 1,280명, 공공행정 및 사회보장행정 36개소 875명, 교육서비스업 87개소 819명, 기타 공공 사회 및 개인 서비스업 353개소 693명, 금융 및 보험업 40개소 560명, 운수업 236개소 519명, 보건 및 사회복지사업 70개소 393명, 건설업 38개소 208명, 통신업 16개소 145명, 오락, 문화 및 운동관련사업 69개소 124명, 사업서비스업 31개소 104명, 부동산업 및 임대업 47개소 103명, 전기가스 및 수도사업 3개소 35명, 농립업 14개소 85명, 어업 1개소 10명 등이다.

모든 사업체가 장성읍내의 비율이 높은 편이나 제조업의 경우 동화면이 48개소에 1,087명을 차지하고 있고, 음식숙박업의 경우 삼계면과 북하면이 90개소 254명과 83개소 217명으로 상당이 높은 편이다. 농공단지와 상무대 및 백양사의 영향으로 분석된다. 종교단체의 경우 기독교가 76개소에 88명, 천주교가 5개소 8명, 불교가 30개소 156명, 기타 8개소 13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머지 30%의 인구는 유아나 학생 그리고 고령자로 볼 수 있다. (김경수)

2.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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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은 이를 구사해 온 언중의 삶과 역사가 깃들어 있는 문화재이다. 이는 중앙어를 비롯한 다른 방언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말을 간직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문헌 기록 이전의 말조차 담고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처럼 방언은 역사 이전 선조들의 삶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무형 문화재이다.
이 글은 장성 지역어의 특징을 개관하고자 하는 글이다. 먼저 이 지역어의 음운 체계를 살펴보고, 이 지역어에 드러나는 특이한 음운 현상을 들기로 한다. 이 때에는 장성 지역어를 잘 보여 주는 특색 있는 낱말을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1) 음운 체계
그 동안 장성이 속해 있는 서북 전남 방언의 음운 체계 및 음소 목록에 대해서는 이돈주(1979)에서 이루어진 이래 별다른 이견이 없다. 필자가 장성 지역어를 검토한 바에 따르면 기왕의 조사 연구와 이렇다 할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장성 지역어의 음운 체계 및 음소 목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자음 체계
이 지역어의 자음은 19개로, 여느 전남 방언과 마찬가지이며 중앙어와도 다름이 없다.
순음 : ㅂ ㅃ ㅍ ㅁ
치조음 : ㄷ ㄸ ㅌ ㅅ ㅆ ㄴ ㄹ
경구개음 : ㅈ ㅉ ㅊ
연구개음 : ㄱ ㄲ ㅋ ㅇ
성문음 : ㅎ

2) 모음 체계
① 단모음
이 지역어의 단모음은 다음과 같이 9개이다.
ㅣ ㅟ ㅡ ㅜㅔ ㅚ ㅓ ㅗㅏ

/ㅔ/와 /ㅐ/를 중앙어나 동부 전남 방언과는 달리 구별하지 않고 있다. 이를 테면 '떼'와 '때', '베'와 '배', '세로'와 '새로' 등이 발음상 구별이 없다.
이 지역 단모음의 특징으로는 /ㅚ, ㅟ/를 비교적 명확하게 실현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를테면 /ㅚ/가 반영된 낱말로는 '꾀(꾀, 깨), 죄 (罪), 죄끼(조끼)' 등을 들 수 있고, /ㅟ/가 나타나는 낱말로는 '귓밥(귀지), 뉘 다((똥, 오줌을) 뉘다), 뒷 간(변소)' 등을 들 수 있다.

② 이중 모음
이 지역의 이중 모음은 8개를 확인할 수 있다.

y계 이중 모음(5개): ㅖ, ㅕ, ㅑ, ㅠ, ㅛ
w계 이중 모음(3개): ㅞ, ㅝ, ㅘ
이 또한 여느 서부 전남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다만 다음에 드는 보기처럼 주로 자음에 연결되는 이중 모음(또는 역사적으로 이중 모음이었던 것)이 단모음으로 활발히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a . ㅟ→ㅜ: 갈쿠(갈퀴), 구 신(귀신), 바우(바위), 사우(사위), 아숩다(아쉽다)
b . ㅕ→ ㅔ: 멩년(명년), 멩당(명당), 뻼(뼘), 벤소(변소), 펜(편)
c . ㅢ→ ㅡ: 느그(너희), 으 붓자석(의붓자식), 으젓허다(의젓하다)
d . ㅑ→ ㅏ: 달갈(달걀), 성 낭각(성냥갑), 외약빰(왼뺨)
e . ㅚ →ㅗ: 소시랑(쇠스랑)
f . ㅢ →ㅣ: (눈에) 띠 다(띄다)
g . ㅝ→ ㅓ: 시언 찬허다(시원찮다), 헌 칠허다(훤칠하다)
h . ㅙ →ㅔ: 꼭벵이(곡괭이), 께나(꽤)
i . ㅕ→ ㅣ: 이 드름(여드름)
j . ㅟ→ ㅣ: 지지기(기저귀)
k . ㅘ →ㅏ: 깍 (꽉), 미나리깡(미나리꽝), 나 두다(놔두다), 항 갑(환갑(還甲))
l . ㅚ→ ㅔ: 께제제허다(꾀죄죄하다)
m . ㅞ→ ㅔ: 헤 방(훼방)
n . ㅙ →ㅚ: 외장(왜간장)

3) 운소
이 지역어는 음의 장단에 따라 의미를 변별하고 있다.
가ː메(가마(轎))-가메(가마(旋毛)) 눈ː (雪)-눈(目) 말ː (言)-말(馬) 모ː 르다(不知)-모르다(마르다(乾)) 못ː (不能)-못(釘) 발ː (簾)­발(足) 밤ː (栗)-밤(夜) 섬ː (島)-섬(十斗) 질ː 다(長)-질다(濕)

(2) 음운 현상
이 장에서는 이 지역어에 나타나는 주요한 음운 현상을 자모음 순서로 살펴보고자 한다.

1) 구개음화
구개음화란 일반적으로 /ㅣ/ 모음 앞에서 /ㄷ, ㅌ/이 /ㅈ, ㅊ/으로 변하는 것을 이른다. 이 지역어에서는 이 밖에도 /ㄱ→ ㅈ, ㅋ→ ㅊ/ 구개음화 현상이 더 나타나며, /ㅎ/이 구개음화 환경에서 ㅅ/으로 나타난다.
지미(기미) 지와집(기와집) 지지게(기지개) 질 다(길다) 쪄입다(껴입다) 찌웃거리다(기웃거리다) 찬지름(참기름) 치/쳉이(키(箕)) 서(혀) 성(형, 언니) 숭년(흉년) 심(힘)
구개음화는 '성부(형부(兄夫)), 성제(형제(兄弟)), 점상(겸상(兼床)), 정황없다(경황없다(景況­))'에서 볼 수 있듯이 한자어에서도 일어나며, '꾸지다(꾸기다)'처럼 2음절에서도 일어난다. '엥기송꾸락(엄지손가락)'처럼 부정 회귀형도 보인다.

2) 경음화
어두 자음 된소리 현상이 두드러진다.
깔쿠리(갈고리) 깔크막(가풀막, 비탈) 깟난에기(갓난아이) 께고락지(개구리) 꽝지리(광주리) 꾀삐(고삐) 끄시름(그을음) 똘(도랑) 뚜디리다(두드리다, 두들기다) 뽀수다(빻다) 뽀시락장난(보스락장난) 쏘낙비(소나기) 쩌 그(저기) 쩸메다(매다, 묶다, 잡매다) 쬐깐허다(조그맣다) 찌웃거리다(기웃거리다)

3) 중음화
같은 음(또는 같은 자리에서 나는 음)이 겹쳐 덧나는 현상이 나타난다.
갈르다(가르다) 골르다(고르다(選, 平)) 굴리다((발을) 구르다) 글르다(그르다) 끌르다(끄르다) 눌르다(누르다) 둘르다(두르다) 물르다(무르다) 벨르다(벼르다, 미리부터 마음먹다) 볼르다(바르다) 올르다(오르다) 짤르다(자르다) 쭈물르다(주무르다) 지달리다(기다리다) 질르다((소리를) 지르다) 감마솟(가마솥) 두름박(두레박)

4) 유기음의 평음화
예사소리가 유기음 /ㅎ/과 결합하여 음절 축약을 보일 때에 거센소리로 나지 않고 그대로 예사소리로 나타난다.
곱어다(곱하다) 그러지라우(그렇지요) 먿어러(무엇하러) 몯어다(못하다) 육앙년(육학년) 합에서(합해서)
이 밖에 '가심베기(가슴패기)', '더수룩허다(텁수룩하다)', '보데기(포대기)', '시기다(시키다)'처럼 유기음이 평음으로 나타난 것도 있다.

5) 어중 /ㄱ, ㅂ, ㅅ/
중앙어와 달리 이른바 중간 자음 /ㄱ, ㅂ, ㅅ/을 보이는 형태가 나타난다.
① ㄱ:게금(개암) 돌가지/도라지(도라지) 또가리(똬리) 말기다(말리다) 반 버버리(반벙어리) 벌걱지(벌레) 숭구다(심다) 얼기미/얼멩이(어레미)
② ㅂ:세비(새우)
③ ㅅ:가세(가위) 가실(가을) 구수/구시(구유) 마실(마을) 목 세/모레(모래) 무시(무) 부석(아궁이) 여시(여우)
이는 대체로 중세 국어에서는 /ㄱ, ㅂ, ㅅ/을 어중에서 유지하다가 현대 중앙어에서는 탈락하는 형태들이다.

6) 유기음화
중앙어에서 예사소리로 나타나는 것이 거센소리로 나타나는 것이 많다.
차꼬(자꾸) 카마니(가만히) 타르박(두레박) 토((윷놀이의) 도) 토막(도막) 팜나(밤낮) 포도시(빠듯이, 겨우) 폴쎄(벌써, 진즉) 만치다(만지다) 몬차(먼저) 숭키다(숨기다) 혼차(혼자)
이 현상은 어두뿐만 아니라 어중에도 나타난다.

7) 음절말 /ㅈ/, /ㅊ/
음절 끝에 나타나는 /ㅈ/이나 /ㅊ/이 이 지역어에서는 /ㅅ/으로 변하고 있다.
빗이(빚이, 빛이) 꼿이(꽃이), 젓이(젖이)

8) 자음 교체
다음과 같이 자음 교체를 보이는 것이 나타난다.
a. ㄱ→ ㅂ: 버큼(거품), 주벅(주걱)
b. ㅂ→ ㄱ: 골게리다(볼가리다, 낯가리다), 어영구영허다(어영부영하다)
c. ㅍ→ ㅋ: 버큼(거품)
d. ㅇ→ㄱ: 구먹(구멍)
e. ㅁ →ㄴ: 구녕(구멍) 구녁(구멍)
f. ㅋ→ ㄲ: 헤 꼬지(해코지(害­))
g. ㄲ→ ㅋ: 세네키(새끼(繩)), 사네키(새끼)
h. ㄸ→ ㅌ: 투베기(뚝배기), 툭사발(뚝배기), 퉁겁다(굵다, 두껍다)
i. ㅉ→ ㅊ: 어치케나(어찌나)

9) 전설 고모음화
전설성 자음 뒤에서 /ㅡ, ㅜ, ㅔ/가 /ㅣ/로 바뀌는 현상이 상당히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가리(가루) 가심(가슴) 골미(골무) 구실(구슬) 노리(노루) 머심(머슴) 비실(벼슬) 시리(시루) 싯ː (셋) 쑤시(수수) 씨레기(쓰레기) 씰게(쓸개) 씰디(쓸데) 여시(여우) 오짐(오줌) 자리(자루) 지ː 비(제비) 수실(수술) 시ː금(세금) 시ː 베(세배) 지ː 사(제사) 지ː 수(제수)
이는 고유어뿐만 아니라 한자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ㅡ→ㅣ/, /ㅜ →ㅣ/ 교체는 후설 모음 /ㅜ, ㅡ/가 선행하는 전설성 자음 /ㄴ, ㄷ, ㄹ, ㅅ, ㅈ/ 등에 동화하여 전설 고모음인 /ㅣ/로 변한 것이다.

10) 후설 고모음화
/ㅇ, ㄱ, ㄲ/ 뒤의 모음이 /ㅜ/로 바뀌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모ː 구(모기, 〈 모 ) 조구(조기, 〈조긔〈조 ) 종우(종이, 〈죠 ) 삭후다(삭이다, 〈사기다) 저구리(저고리)
이는 대체로 원래 중세 국어에서 /ㆍ/나 /ㅜ/ 등이 개재한 이중 모음이었던 것으로, 중앙어에서는 개재 모음이 약화 탈락한 /ㅣ/가 나타나나 장성 방언에서는 오히려 /ㅣ/가 약화하고 개재 모음이 /ㅇ, ㄱ, ㄲ/의 후설성을 닮아 후설 고모음 /ㅜ/로 변한 것이다.

11) 움라우트
움라우트 현상이 두드러진다.
괴깃뎅이(고깃덩이) 구데기(구더기) 껚이다(깎이다) 넴펜(남편) 뎀비다(덤비다) 두루메기(두루마기) 떾이다(닦이다) 메디(마디) 베리다(버리다) 뵈기싫다(보기싫다(밉다)) 손젭이(손잡이) 쏘네기(소나기) 에비(아비) 엥기송꾸락(엄지손가락) 젱ː 인(장인) 쥑이다(죽이다) 지펭이(지팡이) 쩽끼(수꿩. 장끼) 퇴끼(토끼) 기리다(그리다) 딜이다((물을)들이다) 띧기다(뜯기다) 믹히다(묵히다)
'엥 겡(안경)'에서 볼 수 있듯이 이 현상은 고유어뿐만 아니라 한자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 현상으로 말미암아 이 지역어에서는 '젭히다(잡히다)'와 '젭히다(접히다)' 등이 비변별적이다.
움라우트가 일어날 조건이 아닌 경우에 움라우트가 일어나는 것도 눈에 띄게 나타난다.
가메(가마) 도메(도마) 독세(독사) 마느레(마누라) 만네다(만나다) 멘들다(만들다) 모자레다(모자라다) 방에(방아) 얼메(얼마) 장ː 게(장가) 텍(턱)

12) 원순 모음화
/ㅣ/가 /ㅁ, ㅂ/ 뒤에서 /ㅜ/로 나타나거나, /ㅏ/나 /ㅓ/가 /ㅗ/, /ㅜ/ 등 원순 모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① 거ː 무(거미 〈 거믜) 나ː 부(나비〈나 ) 볼르다(바르다(塗)  다) 폴껫심(팔힘) 볽다(밝다  다) 폴딱(팔딱. 팔짝. 벌떡)
② 몰다(말다(卷) 〈  다) 복ː 쥐(박쥐〈 쥐) 포리(파리, 〈  리) 폴(팔 〈   〈  ) 폿(팥 〈  / )
이 가운데 '나비'와 '거미' 등은 원래 중세 국어에서 'ㆍ'나 'ㅡ'가 개재한 이중 모음이었던 것(나 , 거믜)이 중앙어에서는 개재 모음이 약화 탈락한 'ㅣ'가 나타나나 이 지역어에서는 오히려 'ㅣ'가 약화하여 개재 모음 쪽이 나타난 것이다. '마르다, 말리다' 등은 중세 국어에서 'ㆍ'였던 것이 중앙어에서는 'ㅏ'로 나타나나 이 지역어에서는 'ㅗ'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선행 자음의 원순성을 닮은 것이다.

13) 음절 축약
모음과 /ㅁ/ 사이에 나타나는 /ㅡ/나 /ㅜ/가 탈락하여, 음절 축약이 일어난다.
금 ː날(그믐날) 밈ː (미음) 싸 ː남(사나움) 담ː(다음) 쌈ː (싸움) 첨ː (처음) 맘ː (마음) 무섬(무서움)
이 밖에 이 방언은 '곡석(곡식), 양석(양식), 음석(음식), 자석(자식)' 등처럼 중앙어의 '식'이 방언에서는 '석'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많고, '고상(고생), 동상(동생), 학상(학생)' 등처럼 '생'이 '상'으로 나타나는 것들도 상당하다. '광에(광어), 붕에(붕어), 상에(상어), 홍에(홍어)' 등처럼 생선 이름의 '어'는 이 방언에서는 보통 '에'로 실현한다.
서부 전남 방언권에 속하는 장성은 여느 서부 전남 방언과 마찬가지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밖에 특색 있는 단어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가락홀테(벼훑이) 가실허다(추수하다) 가투(벌레 먹은 콩이나 팥) 간지럼믹이다(간질밥먹이다) 갈앆다/갈앉다(가라앉다) 갈쿠막/깔크막(가풀막, 비탈) 거ː 라지(거지) 거ː시랑(지렁이) 거시(거위(회충) 겅게(반찬, 건건이) 게ː 꼿(철쭉) 게ː짐머리(감기(속된말)) 게구다리(의족) 겨나리다(거느리다) 고누다(겨누다) 고름장(고려장) 고얀시리(괜스레) 고페(글피) 곤자리(장구벌레) 골미손꾸락(검지손가락) 공ː갈(거짓말) 괴네다(뽐내다) 괴년적이(겸연쩍이) 괴비(호주머니) 괴얄시염(구레나룻) 구더리/구데기(구더기) 구두숟구락(구둣주걱) 군ː 지(그네( 韆)) 궁굴치다(굴리다, 구르게 하다) 귀ː 똘(굴뚝) 그께(그때) 그렁게/긍게(그러니까) 까딱지(깍두기) 까막깐치(까막까치) 까시젱이/까시뎅이(가시덤불) 까장(까지) 까장/까징(끼리) 까장은(깐에는) 깜밥(누룽지) 꺼울르다(거꾸러지다) 껍닥(껍데기, 껍질) 께고락지(개구리) 꽁뎅이/꼴랑지/꽁지(꼬리) 꽈메다(꿰매다) 꾕메기(꽹과리) 꿀떠덕(바위에 다닥다닥 떼지어 붙어 있는 굴조개) 꿀부다(꿇다) 꿩(자치기) 끌텅(뿌리, 그루터기) 끗기다(끌리다) 나락모게(벼이삭) 나락비늘(볏가리) 나마께(나막신) 나뭇가렝이(나뭇가지) 나숭게(냉이) 나찹다(낮다) 나트롬허다(나이가 지긋하다) 날게(지느러미) 날멩이(산등성마루) 날쌍허다/얄쌍허다((밥에) 물기가 충분히 있다) 낫네놓다(노골적으로 드러내다) 낭구(나무) 낭중(나중) 너무세(나물) 네ː 둥(일껏) 네둘치다(내두르다) 네치다(내려치다) 놀짱허다(노르스름하다) 농ː 판(멍청이) 누룽게(누룽지) 눈곱젱이(눈곱자기) 눈뜬봉ː 사(청맹과니) -능갑다(-나 보다) -능게미로(-는 것처럼) -니라(-너라) 니레오다(내려오다) 다담잇독(다듬잇돌) 다랏(다래끼) 다레미(다람쥐) -다우(-대요) 달ː 깡달ː 깡(부라부라) 달게다(달래다) 달공달공허다(치근거리다, 집적거리다) 달구가리(닭어리) 달구장테(닭장) 달구털(닭털) 달룽게(달래) 달큰허다(달콤하다) 달파니(달팽이) 달팍(덜컥) 당갈(달걀) 당그레(고무래) 데멩이(큰 구렁이) 데사리(다슬기) 데체나 /데처/데치/ 데큰(과연, 그렇지(요)) 도라(다오, 달라) 도치(도끼) 돈ː 비접(둥근 버짐) 돌ː 쪼구(돌쩌귀) 돌게(돌(石)) 돌돌(오래오래) 돌르다(훔치다(盜)) 되렴(도련님) 되아지(돼지) 따둑따둑(아장아장) 따미/따무로/떼미로(때문에) 땀떼기(땀띠) 떠ː 룹다(떫다) 떼까우(거위(鵝)) 떼꽐(꽈리) 떼떼시(방아깨비(수컷)) 떼레가두다(단단히 가두다) 떼왈(재래종 딸기) 똥 구먹이 걸다(오지랖이 넓다) 똥ː 뀌다(방귀뀌다) 띠방걸이(멜빵으로 짊어지는 일) 마ː수떼기(마수걸이) 마냥으로(처럼) 마니로(만큼,처럼) 마룽바닥(마룻바닥) 마적(마저) 만치다(만지다) 말ː 건지(소문거리) 말기다(말리다) 머구리(개구리) 멀그머니(날카롭게) 메짝((맷돌의) 암쇠) 멕동가리(멱살) 멧등/멧(뫼, 묘(墓)) 멧좃((맷돌의) 수쇠) 몀소(염소) 모님(먼저) 모듬쇠아들(아버지를 여럿 둔 아들(욕의 하나)) 모시메(사내아이) 모타리(모퉁이) 목사리(송아지) 뫼리(생각) 무시입삭(뭇잎) 무충무충/무케무케(무럭무럭) 문넹기(무넘기) 미영(목화(木花), 무명) 바ː 네기/널베기(소래기) 바꿈살이/빠꿈살이(소꿉장난) 바쿠/발통(바퀴) 발데중(발을 기준으로 삼는 어림 짐작) 밥세비(작은 민물새우) 버럭지/버레(벌레) 벅실벅실(북적북적) 번지다(버리다) 벌축허다(벌충하다) 보듬허다(넉넉하다) 보신(버선) 복조가리('복(福)'의 낮은말) 본꼬지(본보기) 부두각시(풍채가 좋은 각시) 부지땅/부이땅/부지뗑이(부지깽이) 부텀(부터) 북세(노을) 불겁다(부럽다) 비ː 게홋니(베갯잇) 비 땅(부지깽이) 비늘(보늬) 비람빡/비랑빡/비름빡(벽) 비암(뱀) 비우치리(좋은 비위를 타고남) 비접(버짐) 비치다(보이다(사동)) 빡ː 빡ː (개굴개굴) 빨렛방마니(빨랫방망이) 뻘소리(허튼소리) 뻘통(멍청이) 뻬뿌젱이(질경이) 뻴간(서랍) 뼁돌이(팽이) 뿌렁구(뿌리) 삐ː 비(삘기) 삐아리(병아리) 사루다(사랑하다, 귀여워하다) 삭다리/싹다리(삭정이) 산몰랑(산마루) 산지시락(산기슭) 삼세미(아지랑이) 서답(빨래) 섬마섬마(따로따로, 따따로) 세고리(갈고리) 세꼉(손거울) 세복(새벽) 소두랑/소드랑/소두방(솥뚜껑) 소케(솜) 소쿠뎅이/소쿠리(소쿠리) 솔겡이(솔개) 솔께비(솔가지) 솜근허다(솔깃하다) 쇠악(쐐기(楔)) 쇳데(열쇠) 시걸시걸허다(시글시글하다) 시누데(설대) 시아씨(시아버지) 시암(샘, 우물) 시지부지(흐지부지) 신발독/심방독(신발을 올려 놓는 돌) 신체(시체) 실가리(시래기) 실겅(시렁) 싳다(씻다) 싸게(빨리) 싸랑부리(씀바귀) 써빠지게(힘들게) 써울리다(써레질하다) 쓰다(켜다) 아ː 우아ː 우(야옹야옹) 아감지(아가미) 아사리밧(가시밭) 아시보다/아시타다(아우보다) 암ː 치케나(아무렇게나) 야(해, 것) 야ː(예) 양발(양말) 어리바리허다(으리으리하다, 어른어른하다) 어시름발(땅거미) 억박골(심술) 얼기빗(얼레빗) 얼척없다(어처구니없다) 엄살치다(엄살부리다) 엄씨(어미) 에먼뗌(누명) 에물다(애매하다, 억울하다) 에미(어미) 엥기다(걸리다, 잡히다) 여남(부탁) 여녕물(추수) 여지까지(여태까지) 역불로(일부러) 연치(여치) 영치다(얹히다) 오ː 사게(굉장히, 지독히(낮은말)) 오ː 지다(오달지다) 오강(요강) 오라부덕(올케) 오발딱지(온갖 답답증) 오욕질(구역질) 옴쓰라기(고스란히) 옹당시암(박우물) 외한아부지(외할아버지) 우게/욱(위) 울기다/울리다(우리다, 알겨내다) 움지다(한이 되다) 웃시염(콧수염) 위데다(위하다(말씨를 존대하다)) -으께(-을게) -으꼬(-을꼬?) -으시(-ㄹ세, -네) -은고니(-은가 하면, -는가 하면) -은다우/-은다요(-ㄴ대요, -는대요) -은담서(-ㄴ다면서, -는다면서) -을깝씨(-을망정) -을께미(-을까 봐) -을라(-으려) -을라우/-을라요(-겠어요, -을게요) -을락 허다(-으려고 하다) -을란(-으려는) -을랍디여(-을라고요, -겠어요(주로 반어적 물음으로)) -을랴(-을래) -음서(-으면서) -응가비다/-응갑다(-은가 보다, -나 보다) -응게미로(-은 것처럼) -응구나(-는구나) 이낫이로(이 나이까지) 이녁(자기) 이상시롭다(이상하다) 이약(이야기) 인제까(여태까지) 잉(친밀감이나 다정함을 나타내는 말) 잉그락(잉걸) 자/장(자위) 자 껏(잡것(雜­)) 자리(노래 따위를 세는 단위) 자울리다(기울이다) 자장게비(삭정이) 작신(흠씬, 늘씬하게) 작장작장(짝짜꿍짝짜꿍) 잔네비(원숭이) 장감장감(조금씩 조금씩 물속으로 잠기는 모양) 저만치시럽다(거슬리는 성질이 있다) 저망시럽다(깜찍하다) 저붐(젓가락) 저실(겨울) 정지(부엌) 조송얻다(사랑받다) 지ː (김치) 지게미(비듬) 지달키다/지달라지다(기다려지다) 지메끼(매끼) 직신직신(세차게 자꾸 밟는 모양) 진두찰(진드기) 진지리꼿(진달래) 질척(길섶, 길옆) 짐광(곡식을 감추어 놓고 먹기 위해 깊은 곳에 만든 곳간) 집비늘(짚단을 쌓아 놓은 가리) 짜잔허다(못나고 볼품이 없다) 짝두시암(펌프우물) 짝잘허다(심하다) 짬짬허다(꺼림칙하다) 쩸메다(매다, 묶다, 잡매다) 쬐깐허다(조그맣다) 찌데다(집적거리다) 찐덕살(도깨비바늘) 찡기다(끼이다) -차(-째) 차뎅(댁)이(자루(袋)) 차두(자루(袋)) 찰짜리(찬찬히, 자세히) 창(자위) 천방독/토방독(디딤돌) 천상(어쩔 수 없이) 쾨(방책) 타분타분(터벅터벅) 탁허다(닮다) 턱작(철사로 그물처럼 엮어 바가지 모양으로 만든 그릇) 통쇠(자물쇠) 트메기(틈새기) 포게입다(껴입다) 푸데(자루) 피 다(펴다) 하네/한아부지(할아버지) 하마(이미) 한ː 나(가득) 한피쪽(한쪽) 한큰(한껏) 할레(조차) 할나씨(할아버지) 항ː 기(밭둑) 허두런허다(허름하다) 허러끈(허리띠) 헤번지르다(헤치다) 헤이(김) 헤판(해거름) 헹감치다(가부좌하다) 호ː 숩다((흔들거리는 것을 탈 때) 재미있다) 호트메게(단단히) 혼쓰다(기절하다) 혼인발(혼인에 대한 문의나 의뢰) 홀릉게(올가미) 홀엄씨(홀어미) 홋바레기(홑옷, 또는 홑옷을 입은 상태) 회ː 기(새꽤기) 회떼기(버들피리, 호드기) 후타리(울타리) 훨쩍허다((인물이) 훤하다) 흉치(흉터)

이제까지 전남 서북부에 자리잡고 있는 장성 지역어의 특색을 살펴보았다. 살펴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음운 체계 가운데, 자음 체계는 중앙어와 다름없이 19자음 체계을 이루고 있다.(ㅂ ㅃ ㅍ ㅁ / ㄷ ㄸ ㅌ ㅅ ㅆ ㄴ ㄹ /ㅈ ㅉ ㅊ / ㄱ ㄲ ㅋ ㅇ / ㅎ) 모음 체계는 'ㅔ'와 'ㅐ'가 변별력을 잃어 9모음 체계을 이루고 있다.(ㅣ ㅟ ㅡ ㅜ ㅔ ㅚ ㅓ ㅗ ㅏ) 음의 길이가 의미를 변별하는 운소 구실을 하고 있다.
구개음화, 어두 경음화, 중음화, 유기음의 평음화, 어중 /ㄱ, ㅂ, ㅅ/, 유기음화, 음절말 /ㅈ, ㅊ/, 자음 교체, 전설 고모음화, 후설 고모음화, 움라우트, 원순 모음화, 음절 축약 등 음운 현상이 활발히 드러나고 있다. 서부 전남 방언권에 속하는 장성은 여느 서부 전남 방언과 마찬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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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배(1998). 〈전라남도 방언 연구〉. 학고방.
서상준(1984). 전라남도의 방언분화. 〈어학교육〉, 15. 전남대 어학연구소.
서상준(1997). 서부 전남의 방언. 〈송전 류우선 교수 정년 기념 국어 국문학 논총〉. 동 간행 위원회.
이기갑(1986). 〈전라 남도의 언어 지리〉. 탑출판사.
이기갑(1998). 전남 방언의 개관. 〈방언학과 국어학〉. 태학사.
이기갑 고광모 기세관 정제문 송하진 편(1997).〈전남 방언 사전〉. 태학사.
이돈주(1979). 〈전남 방언〉. 형설출판사.
이돈주(1984). 전라 남도 방언. 〈전라남도지〉 3. 전라남도지 편찬 위원회.
이승재(1977). 남부 방언의 원순 모음화와 모음 체계. 〈관악 어문 연구〉 2.
최학근(1962). 〈전라 남도 방언 연구〉. 한국연구원.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어문학 연구실 편(1991). 〈한국 방언 자료집〉 6(전라남도 편).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손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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