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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선사시대 및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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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서남단으로 전남의 북부에 위치한 장성지방은 북으로 노령산맥을 경계로 전북 정읍과 고창에 접해있다. 장성군의 중심에는 영산강의 3대 지류인 황룡강이 관통하고 있으며, 군의 남부인 진원과 남면은 극락강, 삼계면은 고막원천으로 연결되는 하천이 흐르고 있다. 이 하천의 흐름에 따라 주변 지형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황룡강유역에서는 강변에 형성된 분지형 평지가 발달되어 있고, 극락강과 고막원천 주변에는 저평한 구릉성이 발달되어 넓은 평지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환경속에서 장성지역의 선사문화는 타 지역으로부터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주변 지역보다는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석묘의 군집상으로 보면 독자적으로 지역적인 문화를 형성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장성지역의 선사문화 중 구석기나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일부 알려지고 있지만 아직 그 문화를 종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청동기시대에는 지석묘로 대표되는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이는 주변 지역과 같이 지석묘문화가 발전된 곳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지석묘문화를 배경으로 한 장성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는 철기시대로 발전되면서 고대문화의 형성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는 순수한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면서 혈연을 중심으로 한 집단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이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에 대비되는 무문토기의 제작 사용, 실생활용구로써의 마제석기의 보편적인 사용, 농경도구로 확인되는 농경의 보편화, 정형화되고 집단화되는 새로운 묘제의 출현, 청동기의 제작 사용 등으로 특징지워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청동기시대의 문화를 잇는 철기시대는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청동기시대의 문화는 고고학에서 중요한 시대가 되고 있다.

장성지역에서의 선사시대에 속한 고고학 조사는 1975년 장성댐 지석묘가 처음이었다. 그 후 이영문에 의해 1980년도에 지표조사가 이루어져 [장성군사](1982년판)에 수록한 바 있다. 90년대 초에는 이병직에 의해 장성군의 지석묘를 보고하였고, 상무대지역에서 지석묘 2기가 임영진에 의해 발굴되었다. 1998년 조선대학교 이기길 교수에 의해 장성일대의 고고학조사가 이루어졌다. 본 글도 이들의 글을 참고로 하여 종합한 것이다.

1. 구석기시대의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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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석기시대 개관

1) 구석기
구석기시대는 지구상에 인간이 처음 등장한 약 300만 또는 250만년전부터 1만년전까지의 동안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사람이 불과 도구를 사용하는 60만년 전후부터로 볼 수 있다. 선사시대에는 돌을 이용해 도구를 만들던 시기인데, 도구의 제작방법에 따라 시기를 구분한다. 구석기시대에는 깬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하였으며, 구석기와 신석기의 과도적인 시기인 중석기시대에는 잔석기(細石器)를, 신석기시대에는 간석기(磨製石器)를 사용하였다. 구석기시대는 지질학상으로 홍적세에 해당되며, 그 기간 동안에 몇 번의 빙하현상이 있었기 때문에 빙하시대라고도 한다. 이 홍적세 기간중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가라앉고 간빙기에는 해수면이 올라감에 따라 해수면은 크게 변화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빙하기 때마다 해수면이 내려가서 구석기시대에는 중국대륙, 한국, 일본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오늘날의 지형은 대개 1만년전부터 시작된 충적세에 이루어졌다.

구석기유적은 우리나라 전 지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나 그 대부분이 대동강, 한강, 금강의 상류지역과 석회암이 잘 발달된 평양부근 및 충북지방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구석기시대인들은 동굴과 강가에서 생활하였는데, 동굴유적은 주로 석회암 동굴지대에서 나타난다. 이는 추위를 자연스럽게 막을 수 있고, 짐승들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동굴의 입구는 평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대체로 동향이나 남향이며, 물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전남지방의 구석기시대 유물은 1962년 순천의 바닷가 언덕에서 주먹도끼, 긁개 등의 구석기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이후 주암댐 수몰지구에서 승주 우산리 곡천유적에서 구석기와 중석기의 발견과 더불어 개시되었다. 이후 곡성 옥과, 화순 사수리 대전, 순천 송광 금평과 죽산리, 월평 등 주로 섬진강과 보성강유역에서 발견 보고되었다. 영산강유역에서는 광주 상무지구의 치평동, 첨단지구인 산월동, 광주 철도이설 구간인 매월동, 화순 도산리 등지 이외에 나주시 공산, 왕곡지역을 중심으로 최근 많은 수의 유적이 확인되었고, 이들 유적에서 많은 타제석기가 발견되고 있다. 또 보성강유역에 대한 세밀한 지표조사를 통해 20여군데의 유적을 새로 발견하였고 찍개, 다면석기, 긁개, 주먹도끼 등의 다양한 형태의 타제석기를 발견하였다. 이것들의 연대는 후기 구석기시대에서 중기구석기시대 사이에 들어간다고 본다. 특히 순천 황전 죽내리에서는 4개의 구석기 문화층이 발견되었다. 제1·4 문화층에서는 많은 석기들이 출토되었고, 그 종류와 제작 기술면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어 시대별 석기 양상과 변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1문화층은 석기 제작에 직접떼기와 계단식 잔손질이 사용된 것으로 주로 석영맥암과 응회암을 이용해 중간크기의 주먹도끼, 큰 격지들, 돌날격지, 계단식으로 잔손질된 마주날 긁개 등이 특징유물이며, 대체적으로 중기구석기의 석기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제4문화층은 직접떼기 기법이 많이 쓰이지만 좀돌날석기에 간접떼기 수법이 새로 나타나고, 석기 재료에 유문암이 새로이 사용되고 있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석기들이 석기 제작에서 나타난 석기들이 많으나 완성된 석기가 적어 석기제작터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같이 구석기시대 유적지는 보성강과 영산강에서 강변에 형성된 구릉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구석기인들의 생활터전이 물과 가까운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석기인들은 강이나 하천의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하고 있지만 두 하천이 합치는 곳이나 곡류되는 지점의 주변에 그들의 터전을 잡았다. 또는 물가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조망하기 좋으며 햇볕이 오래동안 드는 곳에는 대부분 석기들이 발견되고 있다. 강의 상류와 중하류 어디서나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구석기인들이 산골짜기에서 평야지대까지 모두 살림터로 개척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 우리 고장의 각지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는 것은 이 지역에 광범위하게 후기구석기인들이 살았음을 시사해 준다. 지금까지의 발굴로 약 10만년전부터 1만년전사이에 해당하는 중기∼후기구석기시대의 석기 종류와 제작 기법, 석재의 종류 등이 밝혀지고 있다.

(2) 장성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

장성에서 최근 구석기 유물이 3곳에서 발견되었다. 북이면 달성리 밀등과 사가리 조산, 그리고 북하면 중평리 강선에서 조사되었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북이면 달성리 밀등의 구석기 유적은 달성제 부근 즉 달성마을과 용산마을 사이 894번 지방도로 양쪽에 있다. 이곳은 2∼300여m 높이의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로서 북이천의 상류 지역이다. 분지안의 나즈막한 구릉의 밭에서 유문암과 석영으로 만들어진 뗀석기들이 발견되었다. 유물은 좀돌날몸돌, 밀개, 부리날석기 등 후기구석기 늦은 시기의 특징 유물이 나오고 있다. 유물의 분포 범위가 매우 넓어 달성마을 부근부터 3 지점에서 뗀석기가 수습되었다.

북이면 사가리 조산의 구석기 유적은 조산마을 못 미쳐 장성에서 정읍으로 가는 1번 국도 좌측의 낮은 구릉(해발 약 110m)에 위치한다. 이 곳은 조산마을 남쪽의 시냇물이 개천으로 흘러드는 합수지점에 해당한다. 지세는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사방 약 1km)로 밀등유적과 입지가 비슷하다. 밀등유적에서 직선거리로 약 2km 떨어져 있으며 사용된 석재도 밀등유적과 같아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유물이 나오는 퇴적층은 갈색의 찰흙층이고, 둘레에 토양쐐기도 관찰된다. 수습된 유물은 유문암제 격지와 긁개 등이다.

북하면 중평리 강선의 구석기 유적은 남, 서, 북 삼면이 4∼500m 높이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의 터진 마을 안의 완만한 구릉(해발높이 약 300m)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응회암제 뗀석기와 유문암제 돌날몸돌과 격지 등이 수습되었다.

이 세 유적으로 본 장성지역의 구석기시대의 특징은 입지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완만한 언덕이다. 문화층인 갈색 찰흙층이 밭 경작으로 파괴되면서 유물이 드러났고, 발견된 유물들 중 좀돌날몸돌, 밀개, 부리날석기 같은 종류가 있으며, 사용된 석재가 산성용암류인 점에서 후기구석기 늦은 시기(15,000년전 무렵)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전남지역 구석기유적의 조사 성과를 참고하면 이 보다 더 이른 시기의 문화층이 장성군에서 찾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유문암제 돌날몸돌과 격지 등이 발견된 중평리 강선유적은 해발높이가 300m로 후기구석기시대에 매우 높은 곳까지 삶의 터전을 넓혔음을 보여준다. 밀등, 조산, 강선유적은 모두 장성군의 북쪽 산악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보다 남쪽인 개천 중·하류와 추암천, 평림천, 황룡강유역의 얕은 언덕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북일면 월계리 송촌 마을의 구릉에서 찾은 몇 점의 석영제 석기는 이 같은 예측을 뒷받침한다. 한편 장성읍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분포하는 석회암지대에 대한 동굴조사를 하여 두 곳을 찾았으나 문화층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장차 구석기유물이 포함된 동굴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은 크다고 여겨진다.

2. 신석기시대의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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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이룩한 문화의 발전 단계에 있어 신석기시대는 농경·목축 등 식량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정착사회와 구석기시대의 뗀석기 대신 보다 정교한 날을 세운 간석기가 사용되고, 또한 처음으로 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농업혁명 또는 신석기혁명이라 부른다.

신석기시대의 유물들은 대부분 하천과 해안을 중심으로 밀집된 분포를 보여주기 때문에 대동강·한강유역 및 인근 섬지역을 포함한 서해안지역, 낙동강을 포함한 남해안지역, 두만강유역과 동북해안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해안지역 등 크게 3개 지역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세 지역군의 토기 양상에 있어 특징을 보여준다. 서해안지역은 곧은 입술과 뾰족밑 빗살무늬토기가 전형적인 형태로써 한국 신석기시대 토기를 대표하고 있다. 문양은 주로 새기기법에 의해 아가리·몸체·바닥으로 구분하여 넣는데 아가리 부분에는 빗금무늬가, 몸체와 바닥에는 빗살무늬가 주류를 이룬다. 남해안지역은 원저를 가진 융기문토기와 아가리가 두겹을 이룬 이중구연토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동북해안지역은 평저이고 문양이 구연부 일부에만 있거나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신석기시대의 생업은 주로 수렵·어로·채집에 의한 경제생활이 위주가 되었으며, 이는 활과 화살 등 원거리용 수렵도구, 조합식 낚시바늘이나 그물추 등 어구류가 다량 발견된 것으로 증명된다. 기원전 약 2천년경부터는 농경의 흔적이 발견된다. 즉 탄화된 곡물과 함께 농경도구·대형 저장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다.

신석기시대는 움집을 만들어 생활하였다. 움집은 보통 하천변의 충적대지나 해안의 평탄면에 자리잡고 있고, 흔히 수십채씩 부락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생활도구로써 석기는 초기에는 구석기 제작 기법에 의한 조잡한 석기가 주로 쓰이다가 후기로 가면서 마제석기가 널리 이용되는데 도끼·화살촉·창·쟁기·원시맷돌·그물추 등이 주류를 이룬다. 실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가락바퀴는 많은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고 동물뼈를 갈아 만든 바늘도 몇몇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실이 바늘귀에 꿰어 있는 채로 발견된 예로 보아 이미 베를 짜서 옷을 지어 입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신앙으로써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조각품들이 서포항 등지에서 출토된 바 있고, 그 외 부산 동삼동, 강원도 오산리 등지에서는 조각품과 장식품이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은 신석기시대 유적은 전남지방에서는 주로 해안의 도서지방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영산강유역에서도 아직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바 없으나 최근 함평 당하리에서 빗살무늬토기와 반마제의 석기류와 함께 부석유구가 확인되고 있어 앞으로 신석기시대의 생활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많다. 내륙인 보성강류역의 보성 죽산리와 순천 송광 대곡리 강변 충적평지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또 곡성 유정리와 순천 황전 대치리 등 전남 동부지역에서도 발견되어 그 분포는 전남 전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도서지역의 신석기유적은 서해안의 영광 낙월도 패총, 지도 어의도 패총이 있고, 서남해안에는 흑산열도의 여러 섬에 패총이 있고, 남해안에는 여천 송도패총을 비롯하여 다수의 패총이 도서지방에 분포한다. 여천의 송도패총, 소흑산도 패총에서는 신석기시대 보다 이른 시기에 속하는 덧무늬토기가 출토되어 동삼동패총의 이른 시기와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전남지방의 신석기시대 문화가 오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들 신석기시대 유적은 대부분 패총이므로 이들 패총에서 출토되는 패각, 동물뼈, 물고기뼈 등으로부터 신석기시대 도서의 생업이 수렵과 어로였음을 알 수 있다. 수렵은 주로 사슴과 멧돼지를 대상으로 이루어졌고, 어로는 송도패총에서 출토된 조합식낚시와 참돔, 상어 등의 뼈로부터 큰바다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송도패총에서 출토된 흑요석과 안도가 패총에서 출토된 석거(石鋸)는 일본 구주지방의 교류에 의해서 반입된 것으로 미루어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바다를 통한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장성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이나 유물은 이번 조사에서 찾아지지 않았으나, 전남의 섬들과 영산강, 보성강, 섬진강유역에서 보고된 신석기 유적의 입지와 주변 지형으로 보면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많다. 황룡강변의 퇴적평지는 보성강유역과 매우 유사한 지형을 가지고 있고, 영산강변의 낮은 구릉지대는 함평 장년리와 같은 입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 청동기시대의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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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동기시대 개관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직접적으로 요령지방의 청동기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청동기시대의 시기구분은 2시기와 3시기, 그리고 4시기로 분류하고 있다. 전.후의 2시기로 분류한 경우는, 청동기를 중심으로 한 전기의 비파형동검문화와 후기의 세형동검문화로 보는 것이 대세이며, 토기를 중심으로 한 전기는 공열토기, 각형토기, 홍도 등 토기와 마제석기류가 공반된 시기, 후기는 점토대토기·흑도장경호·외반구연토기 등 토기류와 일부 석기들이 출토하는 시기로 분류하고 있다. 전·중·후의 3시기로 보는 경우는 비파형동검 이전 시기를 설정한 경우와 전기에 따로 비파형동검문화를 포함하는 소위 송국리 문화를 중기로 설정한 경우가 있다. 4시기로 보는 것은 비파형동검시기의 이전 시기와 비파형동검 문화를 전기와 후기로 세분하고, 세형동검시기를 구분한 것과 토기에서 전.중.후기에 앞서 발생기를 설정한 것이 있다.

이러한 청동기시대의 시기 구분은 중부 이북의 청동기시대를 구분할 때 비파형동검 이전 단계를 설정하고 있지만 남부지방에 광범위한 소위 송국리문화를 중기로 설정한 것이 학계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빗살무늬토기에서 무문토기로 바뀌어지고, 마제석기가 더욱 발달하여 각 석기마다 쓰임새에 따라 일정한 형태가 이루어지며, 농경이 본격화되고, 무덤이 정형화되어 혈연 가계가 형성되며, 청동기가 제작 사용되는 문화적인 특징으로 이해된다. 특히 청동기는 구리와 주석을 중심으로 합금한 것이어서 인간이 새로운 재료를 생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며, 석기에 비해 형태의 제약이 없고, 재제작이 가능하고, 견고하며, 날을 수시로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전남지방의 선사문화는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문화형성 단계에 돌입하게 되고 어느 시기보다도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고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 생활유적은 주거지로 대표되는데, 대부분 수혈주거지이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평면형태에 따라 세장방형, 장방형, 방형, 원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세장방형과 장방형 주거지에서는 각형토기, 공열토기, 두형토기, 홍도 등 토기류와 이단병식석검, 일단병식석검, 세장경식석검, 삼각만입석촉, 이단경식석촉, 반월형석도 등 석기류가 주로 출토되며 청동기시대 전기로 편년하고 있다. 그리고 방형주거지에서는 전기의 유물도 출토되지만 소위 송국리형 주거지서 출토되는 유물도 있어 청동기시대 전기말이나 중기로 편년하고 있다. 소위 송국리형주거지로 통칭되는 원형주거지에서는 외반구연호형토기, 말각평저의 홍도 등 토기류와 일단병식석검, 유구경식석검, 일단경식석촉, 세장형석촉, 삼각형석도, 유구석부 등 석기류가 주로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생산유적은 수렵, 채집, 어로, 농경 등 인간의 식량 확보와 관련되는 유적이지만 고고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농경관련 유적뿐이다. 청동기시대 농경관련 유적은 여러 유적에서 제시되고 있었지만 최근 진주 남강댐 수몰지구에서의 광범위한 밭자리가 확인되었고, 한편 논산 마전리 유적에서는 원형주거지, 석관묘·토광묘·옹관묘 등의 묘제, 목제로 가구된 우물터, 담수와 배수에 관련되는 수로, 수전과 밭의 확인으로 청동기시대에 활발한 농경활동이 이루어졌음이 밝혀지고 있다. 마전리 유적은 청동기시대 중기의 생활상을 추론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청동기시대의 생산유적은 전남지방에서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무안 양장리 농경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에서 원삼국시대, 백제시대에 이르는 수로와 그에 따른 보와 호안용의 목조시설이 수전으로 용수공급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 유적의 최하층에서 확인된 둑을 보강하기 위한 말목열 안과 둑을 따라 형성된 도랑 퇴적토에서 무문토기와 석촉, 홍도 기형의 토기가 출토되어 청동기시대에 조성된 수전 관련 유구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경작면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 유구의 주변에서 유구석부, 석도, 석겸 등 청동기시대의 목재 가공용구와 수확구들이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청동기시대에 수전농경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청동기시대 매장유적으로는 지석묘, 석관묘, 토광묘, 옹관묘, 적석목관묘 등이 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의 하나가 지석묘로 이는 땅속이나 땅 위에 돌로 묘실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상석을 올려놓은 형식의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른다. 고인돌은 전남지방에 집중적으로 밀집 분포되어 있다. 전남지방에서 지금까지 조사된 지석묘 수는 1만 9천여기 이상이어서 세계적으로 가장 밀집 분포된 지역으로 주목된다. 서해안지역을 포함한 영산강유역에는 973개 지역에 7,189기이며, 보성강유역에는 521개 지역에 4,098기이고, 남해안지역은 724개 지역에 7,773기이다. 이러한 분포에서 전남지방의 청동기시대를 지석묘사회라 할 정도이고, 많은 지석묘가 발굴조사되어 연구도 상당히 진척된 상태이다. 전남지역의 지석묘의 분포는 영산강과 보성강유역, 서해안과 남해안 지역에 밀집된 양상이지만 내륙지역보다는 강 중하류지역에 많고, 해안변에서는 반도지역에 밀집된 면을 보인다. 그리고 입지지역도 평지, 구릉, 산록, 고개마루 등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되나 평지의 경우 계곡평지에, 구릉의 경우 강에 인접되거나 산과 가까운 곳에 주로 입지하며, 고개마루는 옛 교통로와 관련되고 있다. 전남지역의 지석묘의 형식도 탁자식, 기반식, 개석식 등 모든 형식이 분포하고 있지만 탁자식은 희박하고, 개석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기반식의 경우 거대한 상석을 가진 것에서는 묘실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독립되어 분포하고 있어서 지역집단의 기념물 즉 제단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중국 요령지역이나 대동강유역에 분포한 대형의 탁자식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어서 각각 지역을 달리하여 형식만 다를 뿐 기능적인 면에서 서로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지석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석검과 석촉 등 무기류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남해안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 등 청동기와 곡옥·관옥·소옥 등 장신구류가 출토되고 있다. 토기류는 홍도나 채문토기가 석실내 부장유물로 발견되며, 주변에서 외반구연토기, 공열토기, 각형토기편 들이 일부 발견된다. 석실내의 부장유물로는 무기류와 공헌토기류, 장신구류들이 있고, 주변에서는 토기편, 석도 등 수확구, 유구석부·석착 등 공구류 외에 방추차, 어망추, 지석, 연석 등 많은 생활용구들이 일부 파쇄된 채 발견되고 있다.

전남지역의 지석묘는 지역에 따라 출토유물이나 석실구조의 차이를 보인다. 즉 서해안과 영산강유역의 지석묘는 지상에 석실이 마련된 탁자식의 분포, 주형지석을 한 기반식의 존재, 판석을 이용한 석관형 석실, 박장의 부장풍습 등으로 요약된다. 보성강유역은 대부분은 석곽형 석실로 평면이 장방형으로 할석이나 자연석을 2-3단 이상으로 쌓아서 축조한 것이며, 석검의 부장풍습이 유행하였으며, 남해안지역의 지석묘는 보성강유역과 큰 차이는 없지만 청동기와 옥, 공헌토기의 부장풍습이 상당히 성행하였다.

석관묘는 판석이나 할석으로 축조된 매장주체시설이 지하에 마련되고 이를 덮었던 개석도 지하에 묻힌 것이다. 이런 석관묘는 석상분, 석곽묘 등으로도 불리우던 것인데, 최근에는 적석목관묘로 통일되는 양상이다. 전남지역에서 석관묘군은 최근 함평 해보리에서 토광묘와 함께 발견된 것이 유일하지만 지석묘 발굴과정에서 상석없이 발견된 것도 상당 수 있다. 이 경우 주변에 적석시설이 없는 것을 상정할 수 있으며, 지석묘의 한쪽에 치우쳐 나타난 것이 보통이다.

함평 해보리 석관묘는 나산천변의 낮은 구릉 정상부의 5부능선상에서 등고선 방향으로 석관묘 6기가 석개토광묘 4기와 함께 발견되었다. 이 석관묘는 생토면을 파고 판석으로 조립한 묘실을 축조한 수혈식이며, 묘실의 뚜껑은 판석 2∼3매를 이용한 것과 할석을 이용한 것이 있다. 바닥은 생토면과 판석을 깐 것이 있다. 출토유물은 매우 빈약한데, 석촉편 1점과 옥편 1점, 무문토기 소량 뿐이다. 함평 해보리와 같은 석관묘는 대체로 군집된 양상을 띤다. 석실의 배치나 방향, 인접 정도에서 보면 서천 오석리처럼 3∼4개씩 군집군을 이룬 것도 보여 지석묘 석실의 군집군과 유사성을 보인다. 분포된 입지도 구릉상의 정상부나 등선상, 경사면이 있지만 주로 구릉의 정상부에 많다. 석관묘는 토광묘나 옹관묘와 혼재되어 발견된 경우가 많은데, 토광묘나 옹관묘보다는 그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 보통 석검이나 세장형 석촉 등 중기에 해당하는 유물이 주로 발견되고 있다.

토광묘는 순수토광묘와 이단토광묘, 석개토광묘 등으로도 불리우고 있다. 이단토광묘는 이단으로 묘광을 판 것에서, 석개토광묘는 판상석으로 덮은 구조에서 그렇게 부른다. 이는 묘광의 구조나 뚜껑의 재질에 의한 것이지만 매장주체시설은 대체로 목관으로 보고 있다. 묘광의 구조에 있어 먼저 장방형이나 타원형상으로 깊이 20∼40cm 정도로 넓게 판 다음 시신이 안치된 관을 넣기에 알맞은 크기로 묘광을 판 소위 이단토광이 주목된다. 이 이단토광은 석관묘나 옹관묘, 지석묘에서도 확인되나 토광묘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며, 옹관묘에서도 대부분 확인되고 있다. 석관묘에서도 확인되나 많지는 않으며, 지석묘에서는 매우 드문 편이다. 석개토광묘의 경우 이단토광 어깨선에 장대석 등을 가로놓여 있어 뚜껑을 덮기에 용이한 시설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토광묘는 최근 함평 해보에서 석관묘와 함께 4기가 발견된 바 있다. 이 토광묘는 뚜껑으로 판상석을 덮고 있는 석개토광묘이며, 출토유물은 없다.

금강유역에서 발견되는 토광묘의 관은 목관의 흔적이나 목관을 세우기 위한 홈구멍 흔적, 관위에 채워진 할석의 흔적, 관과 토광 사이의 점토의 흔적, 목관 안치와 관련된 소혈 등의 존재에서 대체로 목관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목관을 석개나 목개로 덮고 있는데, 목개의 경우 내부 충진토에서의 탄화목재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석개의 경우 장대석과 할석이 있는데, 장대석 수매에 할석을 보강한 것이 많으나 일부는 할석으로 덮은 경우도 확인된다. 이 할석을 이용한 것은 소위 적석목관묘의 한 특징이기도 한다.

옹관묘는 토기를 이용해 유아용 무덤으로 사용한 것인데, 구연이 외반된 항아리형 토기의 옹관 저부에 구멍을 뚫고, 납작한 돌로 덮은 것이 청동기시대에 속한 옹관묘의 특징이다. 옹관의 안치에 따라 직치, 사치, 횡치로 구분된다. 직치 옹관은 수직으로 세우고 개석을 덮은 것으로, 발견된 대부분의 옹관이 이에 해당한다. 전남지역에서는 곡성 연화리에서 발견된 것이 유일하다. 이 옹관은 구연부가 유실되었지만 외반구연의 호형토기로 소위 송국리형토기로 저부에 직경1.5cm의 구멍이 뚫려있다. 현고는 34cm이며, 출토유물은 없다. 전남 이외 지역에서는 익산 석천리·무형리, 부여 송국리, 공주 남산리, 공주 송학리, 거창 대야리 등 주로 금강유역에 집중되어 있다. 사치 옹관은 70°정도 비스듬히 안치하고 개석을 덮은 것으로 부여 송국리 52지구 옹관과 공주 남산리 옹관이 있다. 횡치 옹관은 광주 신창동이나 늑도에서 볼 수 있는데, 옹을 옆으로 눕혀서 만든 것으로 시기적으로 늦은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옹관의 형태는 대부분 구연부가 길고 완만하게 외반되면서 기복부가 팽창된 소위 송국리형 토기를 이용하고 있지만 익산 석천리 처럼 기복부에서 내경하고 각을 이룬 직립구연에 구순각목된 것도 있다. 옹관의 특징 중 바닥이나 기복부 하단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인데, 이 구멍은 배수나 방습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하며 또 신앙적이거나 특수목적에서 나타난 의례행위와 관계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옹관은 주거지와 인접된 곳이나 한 묘역의 외곽에서 발견되고 있다. 주거지 근처에 매장된 옹관은 유아 사망에 대한 특이한 습속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습속은 사망 원인이나 신분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 묘역인 경우는 부여 송국리처럼 석관묘와 토광묘 군집에서 4m 이상 떨어진 낮은 쪽에 배치되어 있다. 발견된 옹관은 군집을 이루기보다는 단독으로 발견된 경우가 많으나 익산 석천리처럼 1m 거리를 두고 3기가 나란히 배치된 것도 있다. 성인용의 무덤과 한 묘역을 형성하고 있는 소아장의 옹관에 대한 분석은 당시의 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유아나 소아의 무덤으로 사용된 옹관은 일상생활용기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토기의 형태로 보아 송국리형 토기가 주를 이루고 있어 송국리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지만 익산 석천리의 경우 직립구연에 구순각목된 토기는 청동기시대 전기 무문토기에 속하여 송국리형 토기보다는 이른 시기로 편년할 수 있다.

적석목관묘는 토광을 파고 목관을 안치한 다음 그 공간을 할석으로 메우고 그 위에 할석을 쌓아 만든 무덤인데, 화순 대곡리와 함평 초포리에서 발견된 바 있다. 화순 대곡리 유적은 비봉산에서 북서로 뻗은 줄기 말단부에 형성된 봉우리형 구릉 정상부로, 대곡리 중대마을에 속한다. 무덤은 돌을 쌓은 곽안에 통나무를 이용한 관이 안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내부에서 많은 청동유물을 부장하고 있었다. 부장된 유물은 세형동검 3점, 팔두령 2점, 쌍두령 2점, 잔무늬거울 2점, 동부 1점, 삭구 1점 등 11점이다. 이 대곡리 유적은 전남지방에서 처음으로 청동유물이 일괄로 출토되어 전남지방에서도 금강유역 등 서남해지역과 함께 하나의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함평 초포리 사산 유적은 긴급 수습 발굴로 청동유물의 배치상태나 부장위치의 일부를 밝힐 수 있었다. 이 유적에서는 세형동검 4점, 동과 1점, 동모 2점, 중국식동검 1점, 동부 1점, 동착 1점, 동사 2점, 세문경 3점, 간두령 2점, 쌍두령 2점, 병부동령 1점, 곡옥 2점, 지석 2점 등 26점이 출토되었다(이건무·서성훈, 1988).

이러한 적석목관묘 유적의 연대는 B.C. 2세기초나 전반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무덤의 피장자의 신분은 동령구류가 샤만(原始宗敎主宰者)의 무구로 추정되고, 무기류는 상당한 권력의 상징으로 보여져 의기와 병기를 바탕으로 주민에게 강제력을 구사하는 지배계급의 최고권력자로 제정을 관장하는 신분을 소유하였다고 보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뚜렷한 제사유적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하지만 여수 우두리 세구지 지석묘 옆에서 제사유구로 보이는 것이 있다. 이 제사유구는 지석묘군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동서장축인 3개의 장대석을 중심으로 다시 1개의 장대석이 상석처럼 올려진 형태이다. 이 구조는 인위적으로 만든 구조물이 아니라 자연상태이다. 이 내부에는 이중구연토기편, 각선문토기편, 무문토기 구연부편, 경질타날문토기편, 지석 등이 출토되었다. 구조상 매장시설이나 주거공간의 가능성이 없어 출토유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의 자연거석을 대상으로 한 신앙행위의 수행과정에서 이루어진 파의식을 행하던 유적으로 추정된다.

(2) 장성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유적 유물

장성군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지석묘이다. 지석묘를 만든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는 현재까지 조사되거나 보고된 예는 없다. 1996년까지 보고된 지석묘는 189기였으나, 이번 조사에서 56기가 새로이 발견되었고, 38기는 파괴되거나 확인할 수 없었다.

북이면 만무리 만무마을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세형동검은 초기철기시대에 장성군에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 시대를 잇는 마한시대의 유적도 삼국시대 고분과 유물산포지의 조사 예를 고려하면 남아있을 것으로 보인다.

1) 유적

① 지석묘

가. 발굴된 지석묘

장성지역에서 발굴된 지석묘는 장성댐 수몰지구와 상무대지구인 학성리 뿐이다.

ㄱ. 장성댐지역의 지석묘

장성군 북하면 덕재리에 있는 지석묘는 남바위마을에 5기와 원동마을에 9기 등 4기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 지석묘들은 영산강 다목적댐 건설에 따른 공사의 일환으로 세워진 장성댐에 수몰됨으로써 1975년 문화재연구소팀에 의하여 발굴조사되었다. 지석묘 중에는 지석이 있는 남방식 지석묘는 2기뿐이고, 나머지는 개석식 지석묘이다. 지석묘 14기 중 9기에만 석실이 있고 나머지 5기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석실이 있는 것 중에서 상석이 있는 것은 5기이고, 상석없이 주변에서 발견된 것이 4기이다. 지석이 있는 지석묘에서는 석실이 발견되지 않았다. 석실의 종류는 판석으로 짜맞춘 석관형, 돌로 쌓은 석곽형이 있는데, 석관형이 7기이고 석곽형과 위석형은 각각 1기씩만 확인되었다. 석관형들은 판석을 이용하여 긴 벽쪽은 2∼3매씩, 짧은 벽쪽은 1매씩으로 대개 ㅍ자형이다. 크기는 상석이 있는 것이 1.6∼1.78m의 길이로 크나, 없는 것은 1.2m 정도로 작은 규모이다. 이와같이 같은 지역에서 크기가 다른 것은 장법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신전장과 함께 굴장·이차장도 성행하였다는 증거로 보인다. 석실 주위에는 일정한 구역에 돌을 깔아 묘역시설을 한 것도 있으며, 또 1기에서는 석실을 쓰기 전에 자갈과 모래로 기초다짐하여 일종의 배수시설을 한 것도 있다. 덕재리 지석묘의 특징으로는 석관형 무덤방의 성행과 함께 출토유물이 1점도 없다는 점, 그리고 배수시설을 한 것들을 들 수 있다.

장성군 북하면 쌍웅리에 위치하고 있는 지석묘는 영산강 다목적댐공사로 수몰되는 유적의 분포와 현황을 조사할 때 발견된 것으로 1975년 국립박물관과 문화재연구소의 혼성발굴단이 발굴하였다. 모두 12기가 있었으나 이 중 수몰지역에 포함되는 3기의 지석묘만 발굴하였다. 형태는 대부분 남방식 지석묘이며 상석이 대형으로 갖추어져 있었다. 하부구조는 몇 가지 유형이 있었는데, 석관을 구축하는 경우와 석곽의 형태를 갖춘 구조, 또한 부석만 깔려 있는 상태로 대별되는 유형이 있다. 출토유물은 토기편 몇 점밖에 없었다. 특히 이 지역에서는 상석이 없이 석관만 출토된 경우도 있는 점으로 보아 지석묘군의 성격이 다양하고 복잡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석없이 석관만 발견되는 예는 춘성 대곡리 1호·제천 황석리 2호·진양 어은리 2호 지석묘 주변에서 발견되는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그러하다. 피장자의 매장방법은 형태가 신전장과 함께 측와굴장이다. 2차장인 세골장제가 함께 성행한 증거로도 보이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약간의 토기편만 출토, 수습되었을 뿐 석기 등 여타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고 있는 점에서 이 지역 지석묘의 한 특징이다.

ㄴ. 장성 학성리 지석묘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학동마을에 위치한 지석묘는 상무대 이전으로 인하여 1992년 전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이곳은 장성군과 영광군의 경계를 이루는 태청산의 남쪽 기슭으로 평지가 거의 없는 협곡을 이루는 곳이다. 학성리에서 조사된 2기의 지석묘는 모두 산기슭에 단독으로 있는 것으로서 서로 약 1km 쯤 떨어져 있다. 1호 지석묘에서는 비록 파괴되기는 했지만 판석으로 축조한 석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2호 지석묘는 하부에 적석이 있었을 뿐 석곽은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1호 지석묘는 주형 지석 3개가 상석을 받치고 있는 기반식 지석묘이다. 그러나 하부구조는 심하게 파괴되어 겨우 동쪽 장벽석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남아있는 동벽 일부로 보아 석실은 판석으로 짜 맞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석실은 장성댐 수몰지구를 비롯한 영산강유역에서 주로 조사되고 있는 것과 같은 양상이다. 2호 지석묘는 계곡의 가장자리에 있는 것으로서 상석 하부에서는 적석이 확인되었을 뿐 매장 시설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학성리에서 조사된 2기의 지석묘는 모두 단독으로 분포되어 있고 확실하게 유구에서 출토된 유물도 없어서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1호 지석묘 상석 아래에서 출토된 격자문 토기편이 지석묘와 관련된 것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우므로 만약 서로 연관된 것이라면 1호 지석묘의 연대는 기원 후까지 내려올 수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2호 지석묘는 원상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장을 위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과 이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묘표식 지석묘일 가능성이 높다.

나. 지표조사된 지석묘

장성지역에서 조사된 지석묘는 최근 이기길의 조사에 의하면 67개 군에 245기가 확인되었다. 이전에 조사된 것과 파괴 것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300여 기 이상일 것이다. 조사보고된 지석묘를 간략히 서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ㄱ. 장성읍의 지석묘
장성읍 백계리 백계 지석묘는 마을 앞 논(해발높이 약 50m)에 1기가 4조각으로 파괴되어 있다. 크기는 510×480×100cm로 매우 큰 편이며, 밑에 지석 2개가 있어 기반식 지석묘이다.장성읍 수산리 지석묘는 현재 황룡강을 따라 5지점의 7기만이 남아 있다. 수산리 동산마을 김덕용씨의 집 담 밑에 지석묘 1기가 있다. 수산리 중초 가 지석묘는 중초마을 입구에서 북동쪽으로 30m쯤 떨어진 길가에 1기가 있으며, 수산리 중초 나 지석묘는 중초마을의 양수장 길 옆의 뽕밭 가운데에 1기가 있는데, 크기는 270×245×95cm이며, 지석 3개가 있다. 수산리 중초 다 지석묘는 중초 나 유적의 건너편 은행나무 숲 옆 민묘 주변에 3기가 있다. 1호 크기는 250×104×60cm이고, 장방형이다. 2호는 방형으로 275×228×50cm 크기이다. 3호는 140×100×4cm 크기이며 일부분이 묻혀 있다. 수산리 중초 라 지석묘는 중초마을에 위치한 전라남도 내수면시험장 안에 1기가 있다. 원래는 지금의 관사가 있는 자리에 있었으나 잔디밭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장성읍 안평리 장동마을 지석묘는 장동마을과 잠암마을 사이의 소로 길 양편에 각각 1기씩 위치해 있다. 1기의 지석묘는 장동마을 정자 앞에 있던 것을 한쪽 켠으로 옮겨 놓았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다른 지석묘도 원위치에서 옮겨졌거나 이동해 복원한 것들이다.장성읍 안평리 잠암마을 지석묘는 잠암마을과 장동마을 사이의 골짜기에서 황룡강으로 향하는 산구릉(해발높이 약 70m)에 6기가 있다. 이 지석묘들은 3기에서 지석이 확인되어 기반식 지석묘임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지석묘는 길이가 430cm이고 밑에 지석 4개가 고이고 있다.장성읍 용강리 우동마을 지석묘는 우동마을 앞 장성­고창간 898번 지방도로 옆 밭에 1기가 있는데, 일부 묻혀 있다. 크기는 330×360×100cm로 원형에 가깝고, 원래 2기의 지석묘가 더 있었으나 도로 공사시 파괴되었다고 한다.

장성읍 유탕리 유탕촌마을 지석묘는 마을 외곽 밭에 1기와 조성수씨 논에 1기가 있었는데, 조성수씨 논에 있던 것은 경지정리시 파괴되었다고 한다. 마을 외곽의 밭에 있었던 1기의 지석묘는 집을 지으면서 마당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장성읍 장안리 봉암마을 지석묘는 마을 외곽 산자락 밑에 위치한 봉암 서원 앞, 황주 변씨 문중 소유의 논에 2기가 있고, 서원 앞에 1기가 있다. 장성군 남면 마령리 백운마을 지석묘는 불태산(해발 602m) 산자락 끝에 자리한 덕성리 서촌마을과 이 산자락에서 동남쪽 평야로 뻗어 가는 마령리 백운마을 사이의 야산(해발높이 약 50m)에 7기가 있다. 지석묘는 지석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큰 것이 300cm 정도이고, 나머지는 200cm 내외로 소형들이다.

ㄴ. 북이면의 지석묘
북이면 달성리 명정마을 지석묘는 마을 뒤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조성된 계단식 논 둑(해발높이 약 150m)에 1기가 있다. 지석묘 크기는 600×500×230cm로 대형이다.
북이면 사가리 사북마을 지석묘는 보건지소 앞에 1기가 있다. 지석묘 위치에서 보면 소재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 조망이 좋은 곳이다. 지석묘 280×260×70cm이나 현재 깨져 있으며, 지석 1개가 받치고 있다.북이면 오월리 송산마을 지석묘는 송산마을에서 바우백이산이라고 불리는 산기슭(해발높이 약 100m)에 8기가 있다. 지석묘의 분포는 등고선을 따라 2기, 4기, 2기가 각각 모여 있는데, 4기를 중심으로 하면 북서쪽으로 약 15m 거리에 2기, 남동쪽으로 약 30m 거리에 2기가 있으며, 같은 능선에 위치해 있다.북이면 오월리 오현마을 지석묘는 곰재 계곡의 입구에 자리하며, 백양사로 넘어 가는 국도 밑 곡간평지의 이창용씨 소유 논 가운데에 지석묘 2기가 있다. 또 이곳에서 약 500m 위 오현저수지 아래의 논둑에 1기가 있다. 이 지석묘들은 3m가 넘는 중대형들인데, 가장 큰 것이 410×320×60cm로 상석 형태가 원형이며, 지석 2개가 고이고 있다.

북이면 원덕리 구목란마을 지석묘는 방장산 지맥들 사이의 좁은 곡간평지을 따라 이어지는 마을의 진입로 좌우에 4기가 있다. 지석묘들은 2m 내외로 소형들이다.북이면 원덕리 신목란마을 지석묘는 장성­정읍을 잇는 1번 국도의 도로 옆 목란 휴게소 옆에 4기가 있는데, 2기는 옮겨진 것이다. 가장 큰 지석묘는 365×245×110cm이다.북이면 원덕리 신원덕마을 지석묘는 원덕 저수지 밑 노령 제2터널 바로 옆의 논 가운데에 1기가 있고, 장성­정읍을 잇는 1번 국도 옆에 3기가 있다. 논에 있는 지석묘의 덮개돌 크기는 420×350×200cm로 괴석형 상석에 지석 5개가 고인 전형적인 기반식 지석묘이다. 도로 옆에 있는 3기의 지석묘는 남­북 방향의 1열로 놓여 있으나, 이미 옮겨진 것이다.북이면 원덕리 원덕마을 지석묘는 마을 정자 앞의 분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옆으로는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원래 이 곳에 10여 기의 지석묘가 있었으나 호남고속도로 공사시에 일부 옮겨졌고, 그 외는 모두 파괴되어 현재 3기만 남아 있다. 정자 앞에 위치한 지석묘는 크기가 380×340×95cm인데, 마을에서 이를 '두꺼비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원래 지석 3개가 고이고 있었다고 한다. 지석묘 중 일부는 이동되어 불안정한 상태이거나 상석 위에 파괴하기 위한 채석공이 남아있는 것도 있다.

북이면 조양리 동정마을 지석묘는 마을 앞 오거리의 도로 옆에 비스듬하게 1기가 놓여 있다. 원래 논 가운데에 수기가 있었으나 1970년대 경지정리 시에 파괴되었다고 한다. 남아있는 지석묘 크기는 490×110×150cm이며, 마을에서 이를 '우렁이바위'라고 부르고 있다.북이면 조양리 조양마을 지석묘는 상봉산 산기슭에서 논으로 이어지는 야트막한 곳에 9기가 있다. 9기의 지석묘 중 5기는 남­북 방향의 한 줄로 정연하게 놓여 있다. 지석묘들은 150∼240cm로 소형들이다.

ㄷ. 북일면의 지석묘
북일면 문암리 금곡마을 지석묘는 마을 동쪽 골짜기 옆, 산기슭에 형성된 계단식 논둑에 6기가 있다. 이외에도 산비탈과 계곡 옆에 지석묘로 보이는 돌들이 흩어져 있다. 지석묘 중 4기는 360∼400cm로 대형들이며, 이중 가장 큰 것이 400×270×150cm의 괴석형 상석하에 지석 3개가 고이고 있는 기반식 지석묘이다.북일면 월계리 송촌마을 지석묘는 마을 뒤 산기슭 정상부에 3기가 있다. 지석묘 옆으로 호남선 철도가 지나가고 있으며, 3기의 지석묘 중 1기는 철도 옆 구릉 비탈에 비스듬하게 놓여 있다.

ㄹ. 북하면의 지석묘
북하면 대악리 대악마을 지석묘는 폐교된 북하남초등학교 안 북쪽 담장 밑에 1기가 있다. 현재 지석묘는 거의 묻혀 있어 윗변만 보이며, 학교 담장 밖으로 연장되어 이어진다. 크기는 440×240×25cm이다. 원래는 여러 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1기만 남아 있다.

북하면 덕재리와 쌍웅리 지석묘는 1975년 발굴된 것인데, 일부는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광주시립민속박물관마을에 이전 복원되어 있으며, 남아있는 지석묘는 이동하여 놓았거나 마을표지석으로 사용하고 있다.

북하면 대흥리 대흥마을 지석묘는 지방도에서 마을로 진입하는 산기슭에 3기가 있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으며, 밭에 묻혀져 있다.북하면 대흥리 갈마마을 지석묘는 마을 옆 계곡안에 있는데, 가장 큰 지석묘는 산과 평지가 연결되는 곳에 자리한다. 이 지석묘는 크기가 길이 540cm, 폭이 520cm, 두께가 270cm로 초대형이지만 하부가 땅에 밀착되어 있어 지석을 확인할 수 없다.북하면 성암리 명치마을 지석묘는 명치마을 앞을 150m쯤 지나는 도로 양쪽에 각각 10여기가 있으며, 이 도로공사시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주위에 흩어져 있다. 이 지석묘 중 크기가 340×235×85cm인 것은 마을에서 '콩바위'라고 부른다.

북하면 성암리 용동마을 지석묘는 마을로 들어가는 산기슭 밭에 2기가 있다.북하면 성암리 성암마을 지석묘는 마을과 국도변 사이 밭에 9기와, 이곳에서 250m 떨어진 산기슭에 3기와 밭에 3기 등 3곳에 15기가 있다. 9기의 지석묘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중 7기는 열지어 원형으로 돌아가고 있다. 크기는 대개 200∼350cm로 소형과 중형들이 혼재되어 있다. 산기슭 끝에 있는 지석묘는 크기가 420×260×240cm이고, 지석 2개가 고이고 있다. 그 옆에는 마을에서 '소바위'라고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북하면 신성리 신웅마을 지석묘는 계곡 입구의 마을 앞 논에 2기와 마을 뒤 산기슭 경사면에 2기가 있다. 논에 있는 것은 경지정리시 현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 주변에 바위들이 파괴된 채 흩어져 있는데, 주민들에 따르면 지석묘를 쪼개어 논둑이나 축대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마을 뒤 지석묘는 360×200×116cm 크기에 지석 3개가 받치고 있는 기반식이다. 주변의 밭에는 지석묘 상석을 한데 모아둔 것 같은 3군데의 돌무지가 있다.

북하면 약수리 약수마을 지석묘는 마을 안에 있는 약수중학교 중앙 현관 옆에 1기가 있는데, 원래 4기의 지석묘가 학교 부지 내에 있었으나 학교를 지으면서 3기의 지석묘는 파괴되었다고 한다. 지석묘는 280×270×125cm 크기로 타원형이며, 원래 4개의 지석이 있었으나 상석 위에 학교 설립 후원자의 감사비를 세우면서 지석을 들어내 버려 현재 1개만 있다.북하면 약수리 화룡마을 지석묘는 마을 앞의 도로변의 밭에 1기가 있는데, 일부분이 묻혀 있다. 원래 2기의 지석묘가 있었으나 도로공사시 1기가 길에 묻혔다고 하며, 현 김덕립씨 집 뒤에도 1기가 있었으나 파괴되었다고 한다. 한편 지석묘와 약 80m 거리에 선돌 2기가 남아 있다.

북하면 용두리 하만마을 지석묘는 당산나무 옆 논 가장자리에 2기가 있다. 원래 논 가운데에 있었으나 옮겨졌다고 한다. 현 위치에서 약 20m 떨어져 선돌 1기가 있다.북하면 중평리 강선마을 지석묘는 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 주변의 밭에 2기의 지석묘가 있다. 지석묘 중 지석이 있는 것도 있으며, 인근의 구릉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유문암제 몸돌과 격지 등을 발견하였다.

ㅁ. 삼계면의 지석묘
삼계면 능성리 나산마을 지석묘는 마을 앞 논둑에 1기가 있다. 크기는 250×200×55cm로 방형이며, 지석 1개가 드러나 있다.삼계면 능성리 성산마을 지석묘는 마을 뒤 산기슭에 2기가 있다. 지석묘의 입지는 북과 서쪽이 낮은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과 동쪽에 경작지가 조성되어 있다.

삼계면 부성리 부성마을 지석묘는 산기슭과 분지가 완만하게 이어지는 지점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물줄기의 양쪽에 10기가 분포하고 있다. 지석묘들은 집안과 담장, 밭둑, 논둑 등 4곳에 산재되어 있다. 집담장으로 이용되는 지석묘는 군집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마당에 묻혀 있으며, 논둑 등에 있는 것들도 원래는 더 있었다고 하나 경리정리로 묻거나 이동시켰다고 한다. 천변의 둑에 있는 지석묘 중 크기가 510×500×100cm인 상석하에 지석 4개가 고인 기반식 지석묘이다. 이곳의 지석묘에는 지석이 있는 형태들이 많은데, 소위 주형 지석으로 전북 고창과 영광지역에서 주로 보이는 형태이다. 도로 옆의 논둑에 지석묘 3기가 나란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340×155×130cm의 장방형 지석묘하에 4개의 지석이 고이고 있다. 삼계면 부성리 절암마을 지석묘는 최병양씨 집 뒤 대나무 밭에 2기가 있고, 또 다른 1기는 마을 표지석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나무 밭에 있는 지석묘 중 360×200×100cm인 장방형 상석하에 높이 40cm 정도인 지석 4개가 고인 전형적인 기반식이다.

삼계면 생촌리 생촌마을 지석묘는 국도 24호선 좌우로 4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다. 각각 2기, 4기, 1기. 6기의 지석묘가 군집되어 있다. 도로 옆 논둑에 있는 2기의 지석묘가 있으며, 한 지석묘 위에는 마을에서 '독당산'이라고 부르는 입석이 세워져 있다. 지석묘의 일부는 논둑에 묻혀 있다. 생촌마을로 들어가는 소로 옆에 입석 1기가 있고, 그 뒤에 지석묘 4기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주변에는 지석묘 상석으로 추정되는 돌들이 산재해 있다. 중매산의 동쪽 능선 끝 야트막한 구릉에 1기의 지석묘가 자리하고 있다. 상석의 크기는 480×290×260cm로 지석 3개가 받치고 있다. 수연산의 서북쪽 구릉에 자리하고 있는 지석묘는 산자락과 분지가 연결되는 곳에 대개 2열로 배치형태를 갖추고 있다. 6기의 지석묘에서 4기에서 지석이 고이고 있는데, 가장 큰 것은 450×170×120cm의 상석하에 지석 4개가 받치고 있다.삼계면 생촌리 성암마을 지석묘는 2곳에 분포하고 있는데, 성암마을 입구 논둑에 2기가 있다. 이 지석묘를 마을에서 '몰바우'라 부른다. 성암마을 입구 건너편 도로 옆에 지석묘 12기가 군집해 있다. 3기만 원위치이고 모두 지석이 있으며, 9기는 밭경작으로 인해 자리가 옮겨졌다 한다. 가장 큰 지석묘는 500×300×150cm이며, 지석 2개가 드러나 있다.

삼계면 수산리 만화마을 지석묘는 893번 지방도로 옆, 만화마을 입구 건너편 야트막한 구릉의 끝에 2기가 있다. 이외에도 주변에 여러 기의 지석묘가 군집되어 있었으나, 마을 제방을 쌓으면서 파괴되었다고 한다.

삼계면 덕산리 반월마을 지석묘는 마을 당산나무 아래에 2기, 이와 반대편인 덕산교회 안에 1기가 있다. 1호 지석묘는 360×265×120cm의 크기에 지석 2개가 고이고 있다. 또 삼계북초등학교 뒤편 논둑에도 1기의 지석묘가 더 있었으나 묻혔다고 한다.

삼계면 월연리 월구마을 지석묘는 마을 입구 산기슭에 1기가 있다. 지석묘의 크기는 275×195×70cm인데, 원래 3개의 지석이었으나 현재는 2개만 받치고 있다. 마을에서 '미영씨바우'라고 부르는데, 이 지석묘 위에서 미영씨를 빻아 기름을 만들었던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ㅂ. 삼서면의 지석묘
삼서면 대곡리 인지마을 지석묘는 장성읍쪽 도로 좌측에 1기가 있다. 상석은 280×255×90cm 크기로 지석 2개가 고이고 있다. 도로 우측으로 연결되는 능선상에는 고분이 있다.삼서면 대곡리 한실마을 지석묘는 마을 서쪽 구릉의 비탈에 1기가 있다. 또 마을 남쪽에 있는 삼서중앙초등학교의 뒤뜰 담장 앞에 1기의 지석묘가 잘 보존되어 있다. 지석묘는 학교 뒤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한다. 이 크기는 380×225×100cm이며, 지석 1개가 확인되었다. 이 바위는 마치 두꺼비가 앉아있는 모양과 비슷하여 마을에서는 '두꺼비바위'라고 불린다.

삼서면 보생리 생동마을 지석묘는 마을 입구를 지나 농협창고 뒤 과수원에 1기가 있으며, 과수원 뒤, 도로 옆 구릉에 2기의 지석묘가 더 있다.

삼서면 삼계리 학산마을 지석묘는 24번 국도 좌측 구릉 정상부에 3기가 있다.

삼서면 소룡리 묘동마을 지석묘는 마을 입구 구릉 정상부에 원래 4기가 일열로 있었으나 지금은 1기만 남아있다. 지석묘의 크기는 345×248×60cm이며, 상석하에는 장대석 4개가 받치고 있다. 형태상 기반식이지만 석실의 벽석을 겸하고 있어 탁자식의 변형이다.삼서면 소룡리 안정마을 지석묘는 마을 뒤 낮은 산기슭에 1기가 있다. 상석 크기는 240×190×50cm로 소형이지만 마치 제단처럼 놓여져 있다.

삼서면 유평리 관음마을 지석묘는 마을 뒤 산구릉에 만들어진 민묘 주변에 3기가 있으며, 각각 3m 떨어져 있다. 1호 상석은 255×200×105cm 크기이며, 지석 2개가 고이고 있다.

ㅅ. 서삼면의 지석묘
서삼면 송현리 해평마을 지석묘는 마을 북쪽 계곡 입구의 산자락에 1기가 있다. 밭둑의 비탈을 따라 기울어져 있어 옮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크기는 200×115×60cm이다.

서삼면 용흥리 태암마을 지석묘는 4곳에 2기, 1기, 2기, 1기 등 6기가 분포하고 있다. 마을 정자 근처 밭과 수로 옆 구릉에 있는 2기는 원래 마을 앞에 있었으나 수로공사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지석묘의 크기는 350×290×75cm이며, 방형이다. 마을에서 서쪽으로 300m 쯤 떨어진 구릉 정상부에 1기의 지석묘가 있다. 크기는 335×295×140cm이고, 지석 4개가 고인 기반식 지석묘이다. 주변에서 이형반월형석도가 수집되었다. 또 마을 서쪽에 있는 '이천서씨' 묘역에 2기가 있다. 그리고 연산마을과 태암마을 사이에 있는 용전 저수지 맞은 편 구릉 사면에 1기의 지석묘가 있다. 크기는 420×375×125cm로 대형이며, 지석은 상석이 땅에 밀착되어 있어 확인되지 않고 있다.

ㅇ. 진원면의 지석묘
진원면 상림리 만수마을 지석묘는 장성에서 담양을 잇는 24번 국도 옆, 진원면 단위농협 창고 뒤편 밭과 길 맞은편에 각각 1기씩 있다. 이곳 주변에는 낮은 구릉과 평야가 이어지고 있다. 상석 크기는 220×240×100cm이고, 지석 1개가 고이고 있다. 이외에도 마을 안 김금순씨 집과 서금순씨 집에 지석묘가 있었다고 한다. 김금순씨 집에 있는 지석묘는 매몰되었다고 하며, 장독대로 사용된 지석묘도 상석의 윗부분만 약간 노출되었을 뿐이다. 서금순씨 집에 있던 지석묘도 파괴하였다고 한다.

진원면 용산리 두월마을 지석묘는 만수마을에서 두월마을로 연결되는 소로 옆 논 둑에 1기가 있다. 상석의 크기는 205×167×90cm이다. 이 지석묘는 진원동초등학교으로 옮겨가 교문 앞에 세워 졌다가 다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상석 윗면에 충효(忠孝)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ㅈ. 황룡면의 지석묘
황룡면 관동리 용암마을 지석묘는 마을입구 논둑에 1기가 있다. 상석의 크기는 360×200×110cm이다. 마을에서 이 지석묘를 '개바우'라 부른다. 원래 이 논 가운데에 1기의 지석묘가 더 있었으나, 파괴되었다.

황룡면 신호리 신촌마을 지석묘는 마을 안쪽에 있는 이종관씨 집 앞마당에 1기가 있다. 지석묘의 상석 크기는 195×200×75cm이다. 마을 입구 이길수씨 집 뒤 대밭에도 1기의 지석묘가 있었다고 하나 파괴되었다.

② 입석

가. 입석의 의미

입석은 지석묘와 함께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세계적인 분포를 보인다. 거석숭배의 신앙은 유럽을 비롯하여 아시아 및 아메리카 대륙에도 있어서 매우 보편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입석은 켈트어로 돌(石, men)과 높다(高, hir)라는 의미로 멘히어(Menhir)라 하며, 영어로 Standing Stone, 희랍어로 Monolith라 한다. 한글로는 서있는 돌이라 하여 선돌로 쓰고 있다. 우리나라 입석에 대한 전설은 옛날의 힘센 장사가 세웠다는 설, 마고(麻姑) 할머니가 죽어서 화석(化石)이 되었다는 설, 땅에서 솟아났다는 설 등이 있다. 이런 입석에 대한 민간신앙은 장수(長壽)나 자손을 얻거나 자손이 잘 되기를 비는 대상물로 여겨왔다. 우리나라 입석은 형태상 두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대개 입석이라는 것으로서 자연석을 수직으로 땅에 세워 놓은 것이며, 다른 하나는 누석단형태의 적석입석이다.

입석의 명칭은 입석, 선바우, 벅수, 수구맥이, 돛대바우, 좆바우, 보지맥이, 괴석, 탑, 미륵 등 다양하게 불린다. 입석이 지닌 고유의 종교성은 민간신앙적인 것이지만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부합된 사상도 여러가지다. 소위 수구맥이, 돛대바위, 보지맥이 등은 모두 풍수지리적인 해석이 가미된 것이며, 탑이나 미륵 등은 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한 것이다. 적석 입석은 대부분 '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입석의 형태는 성별을 나타내기도 한데, 윗부분이 둥글거나 네모난 모양의 경우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할머니탑이나 할미바위로 불리운다. 남성을 상징하는 입석은 끝이 뾰족하거나 삿갓 또는 세모난 형태이며, 할아버지탑, 삿갓바위, 쇠뿔미륵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전남 화순 사수리 입석은 가족단위의 명칭으로 서방바우, 각시바우, 애기바우로 불리우는 3개가 있다.

입석은 위치에 따라 3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고인돌과 함께 세워진 무덤의 묘표 기능과, 둘째 논밭이나 이를 내려다 보이는 얕은 구릉에 있는 풍요를 상징하는 기능, 셋째 마을 입구에 세워 벽사나 수구막이 역할을 한 수호의 기능이다. 풍요 입석의 경우 암석숭배로서의 입석, 성기숭배로서의 입석, 칠성·달·거북 숭배와 관련되는 입석이 있다. 수호의 입석은 벽사적 기능과 수구막이의 기능이 있다. 이러한 입석의 기능은 지역수호신, 묘역수호신, 풍요기원신, 이정표 등으로 대별되는데, 이들 중 앞의 세 기능은 원시 종교적인 측면이 있고 후자는 실용적인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의 분류는 성격상 구분하기 위한 것일 뿐 2∼3가지의 기능을 공유한 경우가 많다. 지역수호신으로서 기능은 무엇보다도 입석에 대한 전설이 단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는 단지 외지인 또는 외세에 대한 수호신적 역할에 그치지 않고 마을민 모두에게도 항상 경계심을 갖도록 한다는 점에 있어 현실적 기능이 두드려지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성기석 형태의 입석은 성 그 자체가 말하듯 생산성과 관계되며, 풍요다산을 가져오는 것으로 믿어진다. 당신제 때 옷을 입힌다고 하여 입석에 이엉으로 감싸거나 줄다리기를 한 후 그 줄을 감아 올리기도 하는 행위는 생산력 증강을 위한 토속적인 제의방식이다. 충북 제천 황석리의 입석은 끝이 편평하여 여성을 상징하는 것과 뾰족하여 남성을 상징하는 것이 있고, 충북 옥천 석탄리 안터에서는 여성을 상징하는 입석 중앙에 원을 음각하여 임신한 모습을 표현한 것도 있다. 입석 중에는 남근석 형태는 성기숭배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에는 세가지 유형이 있다. 성기형태의 자연암석을 기자(祈子)나 마을 수호, 풍수비보의 대상으로 하는 신앙형태, 암벽에 남근을 조각하여 사냥 어로의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형태, 남녀 성기를 나무나 돌로 만들어 봉안하고 이를 신체로 모시는 신앙형태 등이다.

이러한 입석들은 선사시대의 기념물설, 이정표설, 묘비설 그리고 종교적인 신앙대상이나 남성의 생식기 숭배의 원시신앙 등 여러 가지 기능과 의미를 가진 것이다.

나. 장성에서 발견된 입석

장성에서 발견된 입석은 선사시대에 해당되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 거석문화의 유습이란 점에서 여기에 소개한 것이다.

장성읍 유탕리 유탕마을 입석은 마을을 관통하는 길인 도청거리 좌우에 낮게 쌓여진 돌위에 2기의 입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마을에서 좌측 입석을 '할아버지 당산'이라 하고, 우측 입석을 '할머니 당산'이라고 부른다. 또 마을 앞에 있는 당산으로부터 약 7∼80m 떨어진 논둑에 입석 2기가 세워져 있다.

남면 월곡리 덕촌마을 입석은 마을 입구 논둑에 세워져 있는데, 마을에서 조탑이라 한다. 남면 분향리 죽분마을 입석은 마을 앞 논둑에 2기의 입석이 세워져 있다. 마을에서 동쪽 입석을 할아버지라 하고 서쪽 입석을 할머니라고 부른다. 남면 분향리 분향마을(원분향) 입석은 마을 입구 우측 도로변에 1기가 있다. 남면 평산리 승가마을 입석은 마을입구 길가에 2기가 있다. 남면 행정리 검정마을 입석은 마을 앞 논둑에 방치되어 1기가 눕혀져 있다.

진원면 진원리 묘동마을 입석은 마을 입구 밭 가장자리에 1기가 방치되어 눕혀져 있다.동화면 구림리 구산마을 입석은 마을 중앙에 있는 할머니당산과 동쪽·서쪽당산에 자연석으로 된 입석이 각각 1기씩 있다. 동화면 남산리 한치마을 입석은 마을앞 도로에서 약 150m 떨어져 있는 논 가운데에 1기가 세워져 있다.

삼서면 석마리 마령마을 입석은 마을 서남쪽 입구 길가에 1기, 남쪽 입구 우측 도로변에 1기가 세워져 있다. 삼서면 석마리 전도마을 입석은 마을 입구 삼거리 길 우측에 시멘트로 만든 기단 위에 1기를 세워놓았다. 삼서면 금산리 죽산마을 입석은 마을 중앙에 있는 할머니당산나무 아래와 마을 입구 왼쪽과 오른쪽 등 세 곳에 모두 4기가 세워져 있다. 삼서면 대도리 수침마을 입석은 마을 앞 입구 상무대 입구 진입로 4차선 대로변에 1기가 세워져 있다.

삼계면 생촌리 생촌마을 입석은 마을 입구 큰길 좌측 논둑에 1기와 마을 입구 샛길 좌측 길가에 1기가 있다. 삼계면 수옥리 옥천마을 입석은 고길주씨집 담장과 마을 앞 대로변에 각각 1기가 있다. 삼계면 발산리 동발마을 입석은 마을 앞 당산나무 사이에 2기, 창고 앞에 1기, 마을 남쪽 입구에 3기 등 모두 6기가 세워져 있다. 삼계면 발산리 서발마을 입석은 마을 입구 개천가 당산나무 밑에 2기가 세워져 있다.

황룡면 황룡리 화곡마을 입석은 마을 입구 모정 앞에 1기가 세워져 있다. 황룡면 관동리 소곤이마을 입석은 당산나무에서 약 60m 떨어진 밭둑에 1기가 세워져 있다. 황룡면 신호리 내황마을 입석은 도로변 팔각정 옆에 1기가 세워져 있는데, 마을에서 미륵불이라 한다.

서삼면 송현리 여암마을 입석은 마을 서쪽 입구와 동북쪽 입구에 각 1기씩 세워져 있다. 서삼면 용흥리 갈전마을 입석은 당산나무 옆에 1기가 세워져 있다. 서삼면 장산리 임곡마을 입석은 마을앞 당산나무 아래에 2기가 세워져 있다. 서삼면 추암리 배치마을 입석은 마을 당산나무 아래에 1기가 있다.

북일면 성덕리 몰암마을 입석은 마을 입구 도로 좌측편에 1기가 세워져 있다. 북일면 성덕리 궁평마을 입석은 마을 입구 길가 옛 연자방아간 옆에 1기가 세워져 있다. 북일면 월계리 율리마을 입석은 마을 입구 당산나무 옆과 동쪽 논 가장자리에 1기씩 세워져 있다. 북일면 문암리 금곡마을 입석은 마을 입구 당산나무 앞에 2기가 세워져 있다.

북이면 조양리 덕곡마을 입석은 마을 앞 길 동북쪽 입구와 남쪽 입구에 각각 1기씩 세워져 있다. 북이면 오월리 송산마을 입석은 마을 앞 동쪽 논 가운데와 마을 입구 길가에 각각 1기씩 세워져 있다. 북이면 사거리 묘동마을 입석은 마을 입구에 1기가 세워져 있다. 북이면 사가리 복룡마을 입석은 마을 계곡 입구 김영조씨집 동쪽 뒷담장 논 가운데 1기가 세워져 있다. 북이면 원덕리 목란마을 입석은 마을앞 길 가장자리에 2기가 세워져 있다.

북하면 용두리 하만마을 입석은 마을 서쪽 당산나무 옆 밭에 1기가 세워져 있다. 북하면 단전리 단전마을 입석은 국도 옆 논둑에 2기가 세워져 있다. 북하면 약수리 화룡마을 입석은 마을 민가 뒷담장에 2기와 마을 입구 맞은편 논둑에 4기가 약 30m 거리로 서있다. 북하면 성암리 용동마을 입석은 마을서쪽 입구 길가에 2기가 세워져 있는데, 마을에서 돌짐대라 한다. 북하면 대흥리 갈마마을 입석은 마을 동쪽 지방도로변에 1기가 세워져 있다.

2) 유물

장성지방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유물은 발굴조사가 많지 않아 유물 또한 미약하다. 발굴품은 없고, 대부분 신고품이거나 지표 수습품 뿐이다. 이는 학술적인 자료는 떨어지지만 유물을 통해 장성지방의 청동기시대의 문화상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된다.

① 석기 유물

가. 무기류

ㄱ. 간돌검
간돌검(石劍)은 무기류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인데, 주로 지석묘 등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어 신분의 상징물로 알려져 있다. 또 주거지에서도 출토되나 소형들로 칼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간돌검은 보통 손잡이 자루가 달린 것이 일반적이나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부착하는 것도 있다. 뒤의 것은 돌창이라고도 하나 자루가 부착된 것으로 보아 손칼과 같은 검으로 대개 15∼20cm 정도이나 15cm 미만이 많다. 장성에서 발견된 간돌검은 장성읍 영천리 615번지에서 출토된 것이 지금까지 유일하다. 이 검은 신고품으로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토상황은 구릉사면에서 흙을 파다가 나왔다고 한다. 현지 조사시 토기편 등 다른 유물은 전혀 보이지 않아 주거지보다는 무덤이나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길이 12.5cm, 폭 3.5cm이다. 형태는 자루가 없는 소위 유경식인데, 슴베가 길고 끝이 돌출된 것으로 부여 송국리 주거지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과 같은 형태이다. 검몸의 양쪽에 희미하나마 홈(血溝)이 나있다. 검에 홈이 있는 것은 손잡이에 홈이 파여진 이단병식이나 슴베가 가늘고 긴 유경식에서 보이는 것으로 초기의 간돌검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ㄴ. 돌화살촉
돌화살촉은 간돌검과 같이 대표적인 무기류이다. 살상용으로 쓰인 돌화살촉은 사냥이나 전투의 수행에서 긴요한 도구이다. 무덤이나 주거지 등에서 주로 출토되지만 무덤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완형이 부장되고 있고, 주거지에서는 사용한 흔적이 많은 소형들이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돌화살촉은 지역에 따라, 시기에 따라 형태상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자루를 부착할 수 있는 슴베식(有莖式)이 주를 이룬다. 장성에서 출토된 돌화살촉은 동화면 구림리 587번지에서 발견된 것이 유일하다. 이 촉은 주민이 논두렁 보수시에 발견 신고한 것으로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크기는 길이 12.1cm, 폭 1.3cm이며, 형태는 슴베식이다. 촉머리(鋒部)만 약간 결실되었을 뿐 완형이다. 형태상 촉몸이 길고 가늘어 세장형인데, 이런 형태는 남부지방의 지석묘에서 주로 출토되는 유물이다.

ㄷ. 달도끼
달도끼는 동근 모양에 가운데가 두터운 형태로 중앙에 구멍이 하나있는 것이다. 형태가 둥글고 가장자리에 날이 세워져 있어 바퀴날도끼(環狀石斧)라고도 한다. 이 도끼는 지휘봉 같은 자루끝을 장식한 것으로 북한에서는 곤봉대가리라 한다. 이 유물은 주로 주거지에서 많이 출토되며, 무덤에서는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 장성에서 출토된 달도끼는 북이면 죽청리 182번지에서 발견 신고된 것으로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직경 18.5cm로 중앙에 1.5cm의 구멍이 있고 두께가 1.4cm로 큰 것에 속한다. 가장자리는 날이 세워져 있지는 않으며, 인위적으로 파손한 것 같은 깨진 흔적이 있다. 출토된 곳은 산기슭하의 자갈밭에서 자갈을 채취하다가 발견된 것이라 한다. 이런 경우는 청동기 등 귀중한 유물이 종종 발견된 것과 같은 양상이어서 아마 제사와 관련된 매납유물일 가능성이 많다.

나. 공구류

ㄱ. 돌도끼
돌도끼는 자루를 ㄱ자로 묶어 사용하는 것으로, 땅을 파는 굴지구나 나무를 베거나 가공하는 용도로 보고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출토되는 선사시대의 보편적인 석기 유물이다. 장성에서 발견된 돌도끼는 남면 행정리와 삼서면 석마리 산70번지에서 발견 신고 유물이 있다. 이 도끼들은 타원형의 몸통 중앙 윗부분에 희미하나마 구획선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는 자루에 구멍을 파고 삽입할 때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날은 양쪽에서 세운 것이며, 크기는 길이가 각각 16.2cm와 18cm로 대형 돌도끼이다. 이러한 돌도끼는 벌목용이나 쐐기용과 같은 용도로 사용된 것 같다.

ㄴ. 돌끌·대패날
이 유물들은 주로 나무을 이용한 생활용구나 생산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것이다. 오늘날 대패나 끌과 같은 기능을 가진 목공구로 일상생활에서 매우 긴요하게 쓰인 것들이다. 장성 동화면 구산리 통안마을에서 출토된 돌끌과 대패날은 5점이다. 돌끌은 길이 5cm 내외에 폭이 2∼3cm, 두께가 0.6∼0.8cm이다. 대패날은 길이 9∼10cm 내외에 폭이 4∼6cm, 두께가 1.4∼2.0cm이다. 출토된 곳이 세장한 구릉상이지만 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출토지의 입지로 보아 주거지의 가능성도 있지만 이와 관련되는 유물이 없어 나무를 가공하여 도구를 만들던 곳이 아닌가 한다.

다. 수확구류

ㄱ. 돌칼
돌칼은 청동기시대에 와서 나타나는 곡식의 이삭을 수확하는 도구의 하나이다. 형태상 반달모양과 삼각형에 구멍이 두 개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장성 출토 돌칼은 서삼면 용흥리 태암마을 뒷산 지석묘근처의 밭에서 수습한 것으로, 장주형에서 삼각형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형태는 단주형 양측을 갈아 둥글게 만들고 한쪽에서 날을 세운 것인데, 반파되어 있다. 크기는 현재 길이 8cm, 폭 6.1cm, 두께 0.8cm이다.

② 청동기 유물

장성지방에서 발견된 청동기는 확실한 유적이 없이 골동품으로 취급된 것들이다. 하지만 같은 하천을 끼고 있는 함평 나산 초포리 청동기유적으로 볼 때 장성지방에도 청동기 유적의 발견 가능성은 많다.

장성 출토품으로 알려진 청동기는 북이면 만무리 출토 한국식동검(細形銅劍) 1점과 장성출토라 막연히 전해진 청동창(銅 )와 청동끌(銅鑿) 주범(주물틀, 거푸집)이 알려져 있다.

가. 북이면 만무리 출토 한국식동검
한국식동검은 청동기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북이면 만무리 출토 한국식동검은 전남대학교 박물관(소장번호 505)에 소장된 것으로 출토 유적 등은 전혀 알려진 바 없다. 이 동검은 길이가 32.7cm, 하단부 폭이 3.6cm이며, 슴베(莖部)의 길이가 2.5cm로 전형적인 한국식동검이다.

나. 장성출토 청동기 주범
이 유물은 전영래 교수에 의해 소개된 것인데, 1986년 전주시내 골동상에서 확인한 청동창과 청동끌 주범으로 현재 유물의 출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골동품 가게에 막연히 전남 장성 출토라 하여 장성 출토품인지 확실하지 않다. 청동창 주범은 두께 5cm, 길이 30cm, 폭 6.5∼8.0cm의 사암제인데, 한면에 청동창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청동검을 새기다만 것이다. 청동창은 길이가 25cm로, 공구에 한 줄의 돌대를 두른 것으로 한쪽 측면에 고리가 있는 형식이다. 뒷면의 청동검은 길이가 17cm로 등대나 검날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아 확실한 동검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는 않다.

다른 청동끌 주범은 길이 15.5cm, 폭 4cm, 두께 3.0cm의 사암제로, 양면에 청동끌을 새겼다. 앞뒷면에 새겨진 청동끌은 같은 형식으로, 한줄의 돌대를 둘렀으며 한쪽이 약간 짧다. 끌의 전체 길이는 9.2cm이다.

4. 선사시대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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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지방의 구석기시대는 그 동안 소수의 유적만이 알려져 그 실체가 불확실하였으나 최근의 발굴조사와 분포조사에 의해서 영산강유역과 보성강유역에 많은 수의 유적이 분포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영산강유역에서는 나주시 동강, 공산지역, 보성강유역에서는 보성군 겸백지역, 장흥군 장평, 순천시 외서, 송광지역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장성에서 발견된 세 유적은 앞으로 더 많은 유적이 발견될 소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신석기시대 유적도 구석기문화와 다름없이 일부 도서지방과 내륙지방에서 몇 유적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내륙지방에서 발견된 신석기문화는 빗살무늬토기만 발견될 뿐 확실한 유적은 아직 발굴된 바 없다. 그러나 최근 조사에 의하면 함평 당하리를 비롯하여 충북 청원군 쌍청리, 경북 청도군 오진리유적과 같이 내륙산지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므로 장래 내륙 산간지역인 장성지방에서도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될 것으로 추측된다.

장성지방의 선사문화 가운데 주목할 것은 지석묘의 분포이다. 지석묘는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한 혈연집단들의 무덤으로 장성지방에서 지역별로 집단들이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와 그 맥을 같이 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각형토기와 공열토기 문화의 영향으로 하여 기원전 1000년 이상부터 800년까지 전기에 해당하며, 송국리 문화의 영향으로 기원전 800년에서 400년까지 중기로 편년될 수 있고, 금강유역의 청동기문화의 영향으로 기원전 400년에서 기원전 후까지를 후기로 보고 있다. 각 시기의 문화적 특징은, 전기에 대가족 중심으로 초기 농경이 시작되었으며, 전기말에는 혈연집단의 공동묘역의 지석묘가 조성되고, 비파형동검과 간돌검이 유력자의 위신재로 사용되었다. 중기에는 지석묘 등 무덤의 종류가 다양화되고, 방어시설은 한 취락지가 집단화, 수전의 확대로 집약농경의 등장, 지배자 무덤과 함께 조성된 가족묘의 등장, 전문인과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사회 계층이 더욱 분화 확대되어 가는 사회이다. 후기에는 수장층을 중심으로 지역공동체가 형성되고, 집약적인 도작농경으로 안정된 사회와 인구가 증가하면서 고대문화의 원동력을 마련한 시기이다.

청동기시대 사회는 농경이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이를 둘러싼 집단간의 갈등과 경쟁이 점차 심화되어 갔으며, 그들의 영역은 대개 농업공동체 집단들은 직경 10km 내외에서 활동하면서, 직경 30∼40km의 커다란 영역권을 형성하여 지역공동체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청동기시대에 신분의 상징물인 비파형동검이나 간돌검, 옥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장인계층이 존재하였으며, 이를 통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지배집단의 출현은 지석묘 사회에서 유력한 혈연집단의 묘역과 거기서 반출되는 유물로 보아 신분세습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을 뜻한다. 수장층 형성은 가족공동체 유력자의 가족묘나 단독묘에서 세대공동체 유력한 혈연집단의 가족묘역의 조성으로, 지역공동체의 수장들의 단독묘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청동기시대의 사회는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철기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소모적인 노동력이 요구되는 지석묘 대신에 간단한 토광묘나 옹관묘 등 묘제상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철기의 수용과 보급으로 영역 확장과 함께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로 하는 집약농경이 성행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중심세력간의 갈등과 전쟁이 빈번히 일어나면서 고대문화의 형성에로 진입하게 된다.

이와 같은 문화와 사회는 장성지방에서도 빈약하나마 나타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수 백기에 이르는 지석묘라든지 청동기와 석기류는 당시의 신분 계층의 등장을 엿볼 수 있는 것이며, 유물상에서도 농경에 필요한 농경구의 제작 사용으로 활발한 농경활동이 영위되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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