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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현대 이전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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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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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국립 고등교육 기관인 성균관은 고구려의 태학, 신라의 국학, 고려 때의 국자감 혹은 성균관 등으로 부르던 것을 계승하여, 1398년에 건물을 준공하여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에 걸쳐 통용된 이름이었으며, 그 밖에도 국학·태학·국자감·반궁(泮宮)·현관(賢關)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균관에는 문묘와 명륜당을 주요 건물로 하고 그 밖의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묘는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 )·서무(西 )로 되어 있고 대성전에는 공자 외 제현(諸賢)을 모시었다. 명륜당은 문묘의 뒤에 있으며 그 좌우 양측에는 동·서 양재(兩齋)가 있어 유생들이 기숙하게 되어 있다.
이밖에 지금의 도서관에 해당하는 존경각(尊經閣), 공자·맹자·안자·증자·자사(子思) 등의 아버지를 제사하는 계성사(啓聖祠)와 그 외에 비천당(丕闡堂)·일양재(一兩齋)·벽입재(闢入齋)·육일각(六一閣)·정록청(正錄廳)·서리청(書吏廳)·경관청(京官廳)·향청(香廳)·전사청(典祀廳)·낙생청(樂生廳)·수복청(守僕廳)·제기고(祭器庫)·차장고(遮帳庫)·직방(直房)·포주(包廚)·식당·서벽고(西壁庫)·문고(文庫)·동서월랑(東西月廊) 등의 부속 건물로 되어 있다.

성균관을 유지, 경영하는 비용은 나라에서 하사하는 학전(學田)과 어장(漁場) 등으로 충당하였다. 관원은 모두 문관으로 임용하였는데, 동지사(同知事) 이상은 다른 관청의 관원이 겸임하였고, 장격(長格)인 지사(知事, 정2품) 1인, 동지사(종2품) 2인, 대사성(정3품) 1인, 사성(종3품) 2인, 사예(정4품) 3인, 직강(정5품) 4인, 전적(정6품) 13인, 박사(정7품) 3인, 학정(정8품) 3인, 학록(정9품) 3인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직제는 고종때까지 거의 변동없이 계속되었다. 입학 자격은 일정한 신분적 요건을 갖추도록 했는데 생원·진사를 원칙으로 하며, 생원·진사가 부족할 경우에는 사학의 학생으로서《소학》과 사서와 1경에 통한 자, 일찍이 문과나 생진과의 향시나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한 자, 나라에 공로가 있는 집 적자손(嫡子孫)으로《소학》에 통한 자, 현재 관리로 있는 자로서 취학을 희망하는 자 등으로 충원할 수 있었다. 학생 정원은 조선 초에는 1백인이었다가 그 뒤 150인에서 2백인으로 충당할 수 있도록《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으며, 농사의 흉풍에 따라 감원과 충원이 좌우되었다. 교육 내용을 살펴보면 경술(經術)과 문예를 주로 하여 강독·제술·서법으로 나눈다.

1) 강독은 사서인《논어》·《맹자》·《중용》·《대학》과 오경인《시전》·《서전》·《주역》·《예기》·《춘추》를 9재로 편성하고, 《대학》에서부터 《주역》까지를 순차적으로 학습하게 하였다.

2) 저술은 의(疑)·논(論)·부(賦)·표(表)·송(頌)·잠(箴)·기(記)를 일정한 기간 동안 힘쓰게 하여 지식의 응용과 표현을 연습시켰다.

3) 서법은 해서·행서·초서를 단계적으로 반복 연습하되 해서를 장려하였다.

성균관의 면학은 매일 강을 받았으며 고시(考試)가 다양하고 철저하여, 일고(日考)·순고(旬考)·월고(月考)·연고(年考)가 있었다. 연고는 3월 3일과 9월 9일에 실시하여 시험관은 성균관 당상급 예조당상 2인, 예문당상 1인, 대간 1인이 모여서 고강(考講)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자치활동으로는 장의(掌議)와 색장(色掌) 등의 대표를 선출하여 조직적인 학생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공관(空館)·권당(捲堂)·공재(空齋) 등을 통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이들 거재유생(居齋儒生)들은 국가에 실정이 있거나 명륜(明倫)·풍교(風敎)에 어떤 해가 될 만한 일이 있다고 인정될 때는 이를 상소하여 탄핵하였다. 이것을 유소(儒疏)라고 하는데, 이때는 관생들이 명륜당에 모여 사무를 분장하고 상소두(上疏頭)·소색(疏色)·제소사소반(製疏寫疏反)·별색장(別色掌) 등으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소두는 관생들을 이끌고 관에 나아가 부복하여 상소하게 되는데, 이때 상소의 윤허를 받지 못하거나 소두를 벌주어 정거(停擧: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함)를 받게 되든지 귀양을 보내게 되면, 학생들은 권당·공재·공관 등을 취하였다. 권당은 식당에 들어가지 앉는 것으로 단식동맹을 뜻하며, 공재는 기숙사에서 나가는 것이고, 공관은 학생 전부가 대성전 신문밖에 이르러 4배하고 퇴거하는 것이니 지금의 동맹휴학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되면 왕은 근신을 보내어 교유(敎諭)를 내리는 등 무마에 힘쓰게 되어 마치 민주국가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것을 통하여 볼 때, 학자를 우대하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였던 당시의 풍토를 알 수 있다.

2.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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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은 고려의 동서학당 혹은 오부학당을 이어받아, 1411년(태종 11)에 국도(國都) 북부에 중학(中學)을 세우고 동·남·서부에 각각 동학·남학·서학을 세웠다. 사학은 성균관에 예속한 교육기관으로 학제나 교육 방침에 있어서 성균관과 유사하였다. 교과는 역시 경술과 문예를 주로 하고 학관은 대개 성균관 교수가 겸직하였고 때로는 서반직(西班職)에서 이를 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사학의 교육 성적이 다소 부진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477년(성종 8)에는 사학 교직에 구임법(久任法)을 판정하여 30개월 근속법을 세운 일이 있었고, 효종 때는 송준길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이 제시한 사학규제(四學規制)를 받아들여 제도를 정비하기도 하였다. 또한 매년 6월에는 사학에서 우수한 유생들을 각각 20인씩 뽑아 남학에 모이게 한 뒤, 3품 이하 문신 3인을 보내어 강론과 저술로써 시험하여 우등생 약간인을 뽑아 생원시나 진사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는데, 이를 승보(陞補)라 하였다.

학생 정원은 각 100인씩이고 그 경영은 나라에서 지급하는 전답과 어장의 수입으로 이를 충당하였다.

3.종학(宗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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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학은 종실 교육을 담당하는 왕족학교이다.《국조보감(國朝寶鑑)》에 의하면 [1429년(세종 11)에 처음으로 종학을 세우고 문행(文行)·학덕을 겸비한 자를 박사로 삼아 종친들을 가르치게 하니 이로써 예법과 질서가 바로 잡혔다]고 하였다. 종학은 연산군때 폐지되었다가 중종때 다시 설치되었으며, 그 뒤 문교 행정의 쇠퇴로 사라지게 되었다.

4. 향교(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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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지방 재정에 의하여 운영되던 중등 정도의 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때부터 크게 장려되었다.《문헌비고》에 의하면 태조 원년에 각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학교의 흥패로써 수령들의 치적을 고거(考據)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후부터 계속적인 장려로 부·목·군·현에 각각 향교를 하나씩 설립하게 되었으며, 그 규모와 지역에 따라 교수 혹은 훈도를 파견하게 하였다. 그 뒤 1읍 1교로 설치하여 큰 읍에는 70∼90인을 정원으로 하고, 중읍은 50인, 소읍은 30인으로 하였으며, 유지비는 역시 급제전(給祭田)과 학전 등으로 경영하였다. 학전 급수는 상세하지 않으나 영조 때 편찬한《속대전(續大典)》에 보면, 성균관은 400결, 사학(四學)은 각 10결, 주·부향교(州府鄕校)는 7결, 군·현향교(郡縣鄕校)는 5결, 사액서원(賜額書院)은 3결을 지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향교의 제도는 성균관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어 대성전과 동서 양무, 명륜당과 동서 양재의 구조를 갖추었으며, 특히 조선 말기의 향교는 교육보다 제례적 기능이 강화되어 향교 교육에 다소 소흘한 점이 있었다. 향교의 기능은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성현에 대한 향례와 유생 교육 및 지방민의 교화 등을 담당하였다.

또한 예양존중(禮讓尊重)의 풍교(風敎)를 고취시키고자 향교에서 양로연(養老宴)·향음주례(鄕飮酒禮)·향사례(鄕射禮) 등을 행하는 일이 있었다. 양로연은 매년 8월에 지방의 덕망 있는 80세 이상의 노인을 초대하여 공궤(供饋)하는 것을 말하며, 향음주례는 매년 10월에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고령 노인을 모시고 주연을 베풀어 서로 권면하여 장유유서의 예를 배우게 하는 것이다. 향사례는 매년 3월 3일이나 9월 9일을 택하여 그 지방의 효제충신으로 이름나고 예의바른 자를 초대한 뒤 읍양(揖讓)과 주배(酒盃), 궁사(弓射)와 음악 등으로 주연을 즐기고 예의를 중히 알게 하는 것이다.

(1) 장성향교

연혁
장성향교는 1395년(태조 3)에 그 당시 장성의 소재지인 지금의 북일면 오산리 산19번지 교촌에 건립되었다. 그리고 진원향교는 1397년(태조 5)에 지금의 진원면 진원리 산64번지에 건립되어 있었다. 장성과 진원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격은 후 두현이 매우 핍폐하여 자립할 수 없는 실정에 있어 양현의 부로들이 통합할 것을 청하여 1600년(선조 33)에 장성현으로 합하여 소재지를 두현의 중간인 지금의 영천리로 치소를 옮기므로 해서 향교도 현장성읍 장안리 산56번지 장자동으로 이건 되었다.

그후 1655년(효종 6)에 군비확장(軍備擴張)으로 입암산성수진관을 겸임토록 하고, 장성현을 도호부로 승격하므로 치소를 성산리로 옮겼다. 따라서 향교도 중설향교(中設鄕校)로 승격되었다. 원래 향교의 규모는 주·군·현의 차등에 따라 문묘의 설위가 대·중·소로 정해지고, 교생의 정원도 정해지는 바 장성 문묘는 중설위와 교생은 70명이 되었다. 따라서 향교의 규모가 협소하게 되어 1658년(효종 9) 3월에 이관서(李貫恕), 박용휘(朴用輝), 유유신(柳惟新), 박수휘(朴遂輝), 박행경(朴行敬), 기정하(奇挺夏), 김자양(金自揚), 정동오(鄭東五), 이유정(李惟禎), 이유상(李惟相), 반세영(潘世英) 등을 영건유사(營建有司)로 삼고, 송암(松巖) 기정익(奇挺翼)이 이건 상양문을 짓고, 현재 향교가 위치하고 있는 장성읍 성산리 성자산 아래로 이건을 추진하였다.

[도 5-1]장성향교 문묘 향사도 [도 5-1]장성향교 문묘 향사도 [도 5-1]장성향교 문묘 향사도

그러나 이 때의 향교 이건 문제는 국가에서 옛 터에 개건할 것을 명함으로써 난관에 봉착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장성부의 유생들이 국가의 명에 따르지 않고 옛 터가 협소하다 하여 임의로 새터에 이건 역사를 진행하자 동년 5월 25일에 조령(朝令)을 따르지 않았다 하여 부사(府使) 이송령(李松鈴)을 파출(罷黜)하고, 재임과 교생들을 중벌에 처하였으며, 감사 권우를 추고함과 아울러 옛 터에 중건하도록 다시 명하였다. 그 후 이 문제는 동년 10월 25일 본교 향교의 형세가 이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는 감사 서필원의 장계에 따라 조정에서는 감사가 친히 장성부에 순찰하여 옛 터의 협소 여부와 새터 건축공사의 진척 상황을 살펴본 후 보고하도록 조처하였다. 이 이후의 처리과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록에 나타나지 않아 잘 알 수가가 없으나, 결국 이때에 새터로 이건하도록 결정되어 현재 향교가 위치하고 있는 장성읍 성산리 성자산 하로 이건되었다.그 뒤 1796년(정조 20)에 박상초(朴尙初)와 김방경(金邦敬)이 집강으로 영건 도유사를 겸하여 중수를 하고, 또 1850년(철종 1)에 대성전을 다시 중수할 때에 상양문을 노사 기정진이 썼다. 1950년 봄에 전교 기원진(奇儀鎭)이 성균관장 김창숙의 령을 받아 중설위인 공문 10철과 송조 4현을 폐위하고 18선정을 올려 대성전의 동서벽에 봉안하고, 매년 2월과 8월 상정일에 지내던 대제를 폐하고 8월 27일 탄신제를 모시게 되었다.
1957년에 전교 조종화, 유도회장 기형도가 정부의 보조금으로 대성전과 동서무를 보수하고,대제를 다시 2월과 8월 상정일에 모시도록 환원하였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전교 변동열, 유도회장 김한중, 부회장 김채수 등이 향론으로 전곡을 모금하여 논 10두락을 매입하고 명륜당과 서재 외삼문을 중수하고 담장 825척을 개축하였다.

1969년에 전교 김원익, 유도회장 김황중, 장의 김상진 등이 향중에 의논하여 7월 15일 공문 10철과 송조 4현 및 2현을 환원하여 모시고, 국가 보조금으로 대성전과 내삼문을 보수하고 제기 일체를 매입하였다. 이후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5. 서원(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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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은 1543년(중종 38)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의 명유인 안향(安珦)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祠宇)를 설립하여 봄·가을로 향례를 지내는 동시에 인재를 모아 학문을 가르쳤는데, 이를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이 그 시초이다. 1550년(명종 5)에는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백운동서원의 교화 사업을 왕에게 계문(啓聞)하는 동시에 보호를 청하여, 왕이 소수서원이라는 액을 내리고 전토와 노비, 서적 등을 하사하게 되어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서원의 설립목적은 유명·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함으로써 명륜(明倫)·양도(揚道)를 더욱 밝히며, 지방 유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강학연찬 함으로써 교화에 공헌하는 것으로, 나라에서도 이를 장려하게 되어 전국 각처에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다.

향교가 국립 기관으로 문묘 배향을 하는 곳이라면, 서원은 사설 교육기관으로서 한 사람 이상의 명유·공신을 제사하는 곳이었다. 또한 산수 좋고 조용한 곳에 위치하여 수양 및 자유로운 학문 탐구가 가능하였으며, 지방의 청년·자제들이 학문과 덕행을 연마하는 도장으로서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차차 서원이 남설(濫設)되어 유생의 학문 태도가 나태해지고 향교의 학생이 서원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많았으며, 군역을 도피하기 위한 청년들이 서원의 원복(院僕)으로 되는 등 폐단이 잇따랐고, 그 후기에는 서원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당파를 형성하여 질서를 어지럽히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745년에는 300개의 서원과 사우를 철폐하였으나 정조 때에 조사된 전국의 원우는 650여개에 달했다고 한다. 그 뒤 1868년(고종 5)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47개의 원사만 남기고 모두 철폐되었다.

장성에는 6개의 서원이 있었으나 필암서원만이 사액을 받았고 나머지는 일반 서원이었다. 여기 서원은 전고대방을 기준으로 하였고, 다만 훼철 이후에 정식 서원으로 신설한 고산서원은 추가로 실었다.

(1) 필암서원(筆巖書院)

소재지 :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8∼379 (사적 242호)
연 혁 :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배향한 서원으로 1590년(선조 23)에 문인들에 의하여 장성읍 기산리에 창건되고, 1786년(정조 10)에 하서의 사위인 고암(鼓岩) 양자징(梁子生)을 추배하였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발생 병화를 입어 소실되어 1624년(인조 2)에 황룡면 필암리 증산동에 복설하였다. 1658년(효종 9)에 전라도 유생들의 중건 상소로 그 이듬해에 [필암]이라는 액호가 내려졌으며, 선액은 3년후인 1662년에 이루어 졌다. 그후 1672년(현종 13)에 현재의 소재지로 재차 이건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향일은 매년 2·8월 중정일에 행한다.

배향인물의 행적

김인후(1510­1560) 조선중기의 성리학자,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담재(澹齋)라 하였으며, 본관은 울산이다.

1519년 김안국 문하에서 "소학"을 배웠고, 1531년 성균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를 가르쳤고, 특히 기묘사화 때 화를 입었던 제현들의 신원을 주장하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낙향한 후 관직에 여러번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다.현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96년(정조 20)에 유생 홍준원의 상소로 문묘에 배향,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필암서원과 옥과 영귀서원 등에서 제향하고 있다. 저서로 [하서집]·[주역관상편]·[서명사천도]·[백년초해] 등이 있다.

양자징(1523­1594)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중명(仲明), 호는 고암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제주이다. 산보(山甫)의 아들로 창평 출신이다. 어려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성장하여 하서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다. 효자로 천거되어 사관(祀官)에 발탁되었다. 이어 거창현감을 거쳐 석성현감을 지내다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하서집의 가장을 썼으며, 1786년 장성 유림의 발의로 필암서원에 배향되었다.

(2) 모암서원

소재지 :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223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9호)
연 혁 : 모암서원은 고려말에 절효공(節孝公) 서능(徐稜)이 이곳에 초당을 짓고 강학하던 곳에 1587년(선조 20) 장성현감 이계가 사당과 강당을 건립하여 절효공 서능을 주향하고 학문을 수련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648년(인조 26)에 중건하고, 1667년(현종 8) 군수(郡守) 조영규(趙英圭)(?­1592)·처사(處士) 조정로(趙廷老: 1559­1612) 부자를 배향하였다. 1698년(숙종 24) 율정(栗亭) 최학령(崔鶴齡: 1512­?)·하곡(霞谷) 정운룡(鄭雲龍: 1542­1593)·추담(秋潭) 김우급(金友伋: 1574­1643) 등을 추향하고, 1788년(정조 12) 정혜공 박수량(朴守良: 1491­1554)을 추향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고, 1909년에 최학수·최범석 등이 이 터에 유허비와 7현 단비를 세웠다.

배향인물의 행적

서능(생졸년미상) 고려말기의 문신·효자, 자는 대방(大方), 시호는 절효공, 본관은 이천이나 후손은 장성으로 하고 있다. 관직은 문하시중을 지내고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하루는 어머니가 목에 종기가 나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의원을 불러 진찰한 결과 약제에 산 개구리가 있어야 치료될 수 있다고 하였다. 겨을에 개구리를 구할 길이 없어 나무 아래 약탕관을 걸고 약을 달이는데 나무에서 약탕관 안으로 산 개구리가 떨어져 어머니 병을 고쳤다. 이 일이 나라에 전해져 절효공의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거가십훈이 전한다.

조영규 (?­1592)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옥첨(玉瞻), 본관은 직산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용천부사를 거쳐 양산군수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동래부사 송상현을 찾아가 왜적과 끝까지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송상현과 함께 죽었다. 1669년(현종 10) 송준길의 장계로 그의 효행과 충절이 알려져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동래 안락서원, 양산의 충열사, 장성의 모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조정로 (1559­1612) 조선 중기의 효자, 자는 선우(善遇), 본관은 직산이다. 조영규의 아들로 임진왜란에 양산에서 할머니를 난중에 장성으로 모시는데 한달이 걸렸다. 그러나 아버지 조영규는 동래에서 전사한 뒤였다.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동래에 갔으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초혼장을 하고 3년상을 정성을 다하며 할머니를 섬겼다. 송준길의 장계로 효자로 명정되었으며, 모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최학령 (1512­ ?)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운노(雲老), 호는 율정, 본관은 탐진이다. 어려서 진실한 삶을 부모님께 배웠으며, 향시와 생원시 그리고 문과에 차례로 합격하였으나 부모님을 모시기 위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어머니를 정성으로 섬겼으나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자 3년 시묘를 정성을 다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모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정운룡 (1542­1593)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경우(慶遇), 호는 하곡(霞谷), 본관은 하동이다. 고봉 기대승의 문인이다. 학행으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학문에 정진하였다. 정여립사건으로 선조의 신임을 받고 왕자 사부와 고창현감 등을 지냈다. 장성현감 이계가 학교를 세워 그를 선생으로 초빙하였다.

김우급 (1574­1643)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사익(士益), 호는 추담, 본관은 광산이다. 의리를 중시했던 선생은 정유재란에 부모를 모시고 관동으로 피난시 명나라 군사의 약탈을 시정케하였다.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있을 때 이이첨의 패모상소에 반대하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여 후진 양성에 힘써 선비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 추담집 8권 4책이 있다.

박수량 (1491­155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군수(君遂), 호는 아곡(莪谷), 시호는 정혜공(貞惠公), 본관은 태인이다. 김개의 문인으로 1513년(중종 8) 진사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합격하여, 광주향교 훈도로 시작하여 승문원부정자·성균관전적·예조좌랑·충청도사·사헌부지평 등을 거쳐 호조판서·우참찬·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30여년의 관직 생활에 집 한 칸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결백하여 청백리에 뽑혔다. 저서로 아곡집이 있다.

(3) 봉암서원(鳳岩書院)

소재지 :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 19 (전라남도 기념물 제54호)
연 혁 : 봉암서원은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 1546­1611)을 주향한 서원으로, 1697년(숙종 23)에 향중 유림들의 발의로 창건하였다. 1707년에 자하(紫霞) 변경윤(邊慶胤)을 배향하였고, 1728년(영조 4) 율정(栗亭) 윤진(尹軫)·청유당(聽流堂) 변휴(邊烋)를 추배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76년에 현재 위치에 복원하고, 1984년 휴암( 巖) 변윤중(邊允中)·1989년 명산(明山) 변덕윤(邊德胤)·1994년 묵포옹(墨逋翁) 변치명(邊致明) 등을 추배하였다. 제향일은 매년 2월 20일과 8월 20일이다. 1981년 10월 20일 전라남도 지방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고, 변이중의 화차를 복원하고 유물 전시관을 서원 앞에 건립하였다.

배향인물의 행적

변이중(1546­1611) 조선 선조 때의 공신, 자는 언시(彦時), 호는 망암, 본관은 황주이다. 율곡 李珥의 문인으로 1568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소모사가 되어 병마와 무기를 갖추어 수원에 주둔, 경기도 지방에 침입한 왜적과 싸웠다. 한편 화차 300량을 만들어 순찰사 권율에게 나누어 주어서 행주대첩을 이룩하게 하였다. 세차례 조도어사가 되고, 두차례 독운사가 되어 군량미 수십만석을 조달하였다. 1603년에 함안군수가 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생들을 강학하였다. 선무원종 1등공신이 되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변경윤(1574­1623)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자여(子餘), 호는 자하, 본관은 황주이다. 우계 성혼의 문인으로 160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하게 되자 윤기의 대변을 통열하게 논박하고 정인홍, 이이첨 등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여 상소하였다.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국문코자 하였으나 상신 박승종의 주청으로 중죄를 면하였다. 공은 입암산성 아래 자하동에서 제자들과 강론하다 여생을 마쳤다. 뒤에 예조참의에 추증되고, 저서로 자하집 4권이 있다.

윤진(1548­1597) 조선 선조 때의 의병장, 자는 계방(季邦), 호는 율정, 본관은 남원이다. 효행으로 선공감봉사로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장성에 있는 서재의 별업에 돌아와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입암산성 수성장에 임명되자, 당일 처 권씨와 아들 운구를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왜적은 성에 육박하였고, 4읍의 군수는 모두 도망치고 없었다. 일단 피했다가 다시 전략을 써서 싸우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가 있었으나 뿌리치고 끝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하고, 처 권씨도 같이 순절하니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변휴(1640­1699) 조선 인조 때의 학자, 자는 미경(美卿), 호는 청유당, 본관은 황주이다. 망암의 현손으로 일찍이 학문에 밝아 명유인 동춘 송준길, 현석 박세채, 명재 윤증, 구천 이세필 등 제공과 종유하였다.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변윤중(? ­1597)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는 공신(公信), 호는 휴암, 본관은 황주이다. 학행으로 상의원직장에 임명되어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향리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장안 뒤 휴암에서 황룡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이때 처 함풍이씨·며느리 장성서씨가 같이 순절하여 삼강정려를 내렸다.

변덕윤(1593­1655)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황주이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병자호란 때 나통서 유집 등과 같이 의병을 모집 청주까지 올라갔으나 치욕적인 강화조약으로 의병을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였다. 최명길이 천거하여 사옹원봉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변치명(1693­1775) 조선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묵포공, 본관은 황주이다. 1722년(경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750년(영조 26) 성균관시에 장원급제, 이듬해 전시병과로 합격하였다. 이어 승정원주서·승문원정자·이조·예조·병조의 좌랑·정랑 등을 지내고, 1753년 사헌부지평·세자시강원보덕·한성부우윤·승정원승지 등을 거쳐 1769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저서로 묵포집이 있다.

(4) 추산서원(秋山書院(址))

소재지 : 황룡면 장산리 하사마을
연 혁 : 추산서원은 1677년(숙종 23) 정무공 기건(奇虔: ?­1460)을 주향하고, 기묘명현 복재(服齋) 기준(奇遵: 1492­1521)·금강(錦江) 기효간(奇孝諫: 1530­1593)·송암(松巖) 기정익(奇挺翼: 1627­1690)·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 1572­1631) 등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 이전(연대 미상)에 이미 훼철되었다.

배향인물의 행적

기건(?­1460) 조선 초기의 문신, 호는 청파(靑坡), 시호는 정무(貞武), 본관은 행주이다. 학행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 때에 포의로 발탁되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그 뒤 연안군수·제주목사·형조참의·이조참의를 거쳐 전라도관찰사·호조참판·대사헌이 되어 단종의 유약함을 기화로 권력을 농간하던 도승지 강맹경을 탄핵하였으며, 이어 황보인, 김종서의 횡포를 논박하였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세조가 즉위하자 관직을 버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세조가 다섯 번이나 불렀으나 절개를 버리지 않았다.

기준(1492­1521)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 시호는 문민(文愍), 본관은 행주이다. 조광조의 문인으로 1513년(중종 8)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합격하였다. 사관을 거쳐 홍문관정자·박사를 거쳐 사가독서를 하였다. 1519년 응교가 된 뒤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를 위시하여 김식·김정 등과 함께 하옥되고, 이어 아산으로 정배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 사건으로 유배지에서 교살되었다. 저서로 복재집과 무인기문·덕양일기 등이 있다.

기효간(1530­1593)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백고(伯顧), 호는 금강(錦江)·인재(忍齋), 본관은 행주이다. 김인후, 이항의 문인으로 학문에 전념하고 후진 양성에 주력하여 호남의 은덕 군자로 불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 남문에서 김경수와 함께 의병청을 개설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기정익(1627­1690)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자양(子亮), 호는 송암(松巖), 본관은 행주이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여 경전에 밝았으며 천문 지리와 복서 의약에도 달통하였다. 팔순 노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송시열의 천거로 제능참봉과 효능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 [송암문집]과 [사의정전]등이 있다.

조찬한(1572­163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선술(善述), 호는 현주, 본관은 한양이다. 1601년(선조 34) 생원시에 합격, 1606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학유에 임명되어 이어 형조·호조의 좌랑·사간원정언·영암군수 등을 거쳐 삼도토포사가 되어 호남·영남 지방에 도적의 무리를 토평, 그 공으로 예조참의로 승진하고 동부승지가 되었다. 광해군의 정사가 문란하여 외직으로 상주목사가 되었다. 인조반정 후 좌승지를 거쳐 선산부사가 되었다. 말년에 서도를 즐겨 왕희지의 글씨에 비유하였다 한다. 저서로 현주집이 있다.

(5) 학림서원(鶴林書院(址))

소재지 : 진원면 학림리
연 혁 : 1718년(숙종 44)에 학천(鶴川) 김은(金隱)을 주향하고, 맹암(孟巖) 김영열(金英烈: 1370­1421)·위남(葦南) 박희중(朴熙中: 1364­1446)·서수헌(逝水軒) 김응두(金應斗)·기양 박준철 등을 배향하였다. 뒤에 청계(淸溪) 박원순(朴元恂)·기호(岐湖) 이문룡(李文龍)·환암(喚庵) 김희서(金羲瑞) 등을 추향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83년 유허비와 재실을 건립하였다.

김은 :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이정(而正), 호는 학천(鶴川), 본관은 울산이다. 고려말에 문과에 합격하고 덕행으로 이름이 났으며, 조선에 들어와 4개 군의 수령을 지냈다. 개국원종공신으로 여산군에 봉하였다. 만년에 관직을 그만 두고 황룡면 맥동마을에 정착하였다.

김영열(1370­1421) 조선 초기의 무신, 자는 열지, 호는 맹암, 시호는 양소, 본관은 의성이다. 1394년(태조 3) 전서로 있을 때 경기우도수군절제사가 되었다. 1395년 수군절제사·지삼군부사가 되었다.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익대좌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표리를 하사 받았다. 의성군에 봉하고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박희중(1364­1446)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 본관은 진원이다. 생원으로 1401년(태종 1) 문과에 합격 군자감정·전라도경차관·세자부좌정자·이조좌랑·점마별감 등을 지냈다. 통진고양포 제방 수축과 김제 벽골제를 수축하였다. 1416년(태종 16) 동궁서연관·예문관지제교·영암군수·예문관직제학·남원부사를 지냈다. 좌명공신에 록선되고 진원군에 봉하였다. 해동 명필로 [초서팔첩]이 전한다.

김응두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추(子樞), 호는 서수헌, 본관은 울산이다. 1522년(중종 17) 문과에 합격하여 순천부사·홍문관응교 등을 지냈다. 문장이 뛰어나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광주목사가 되어 노모를 섬기다 상을 당하여 관직을 버리고 진원면 수촌에 집을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박준철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희순(希舜), 호는 기양, 본관은 진원이다. 1597년 정유재란에 왜적을 피하여 노모를 모시고 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왜적을 만나 피해를 당하고 종신토록 사모하여 효자로 천거하였다. 1605년(선조 38)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621년(광해군 13) 정철과 성혼·고경이 등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박원순 :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청계, 본관은 진원이다. 하서 김인후의 문인으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고향에 청계정을 짓고 학업에 정진하며 후학을 길렀다. 정자에 연못과 은행나무가 있어 홍교를 놓고 아홉골 물을 집수하여 절경을 이루었다. 문인으로 변이중과 이문룡 등이 있다.

이문룡 : 조선 중기의 학자·충신, 호는 기호, 본관은 청안이다. 박원순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이경룡과 같이 의병을 모집하여 선조를 의주까지 모셨으며 6년 동안 왜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록선되고 감찰에 임명되었다.

김희서 :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환암. 본관은 울산이다. 김창흡의 문인으로 학문을 좋아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여 저서로 [격물치지설]과 [향약] 등이 있다.

(6) 가산서원(佳山書院)

소지재 : 장성군 삼서면 홍정리 가산
연혁 : 가산서원은 조선초의 문신으로 장수현감을 지낸 정헌(靜軒) 이재인(李在仁)이 연산군때의 무오사화로 종손자 이원(李 )이 화를 입자 익재(益齋)의 영정을 모시고 장성군 삼계면 백산에 은거하여 정자를 짓고 화초를 기르면서 후학들을 교육했는데, 그의 후손 대정(大貞)이 1559년에 그곳에 백산사(白山祠)를 짓고 조상들의 제사를 받든데서 시작되었다. 왜란을 겪으면서 집이 퇴락하자 후손 언경(彦慶)이 1776년에 낭월산 남쪽 가산에 옮겨 지으면서 가산서원이라 부르고 익재 이제현(李齊賢)을 주벽으로 모시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배향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영정만을 모신 영당으로 남았다가 1960년에 중건하였으며, 1998년에 장성향교의 발의로 이재인을 추가 배향했고 익재의 영정은 전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제향일은 음 8월 10일이다.

배향인물의 행적

이제현(1287­1367) : 호는 익재, 본관은 경주로 고려말의 성리학자며 정치가인데 네번이나 수상을 역임했고 고려를 원나라의 성으로 편입시키려는 간신들의 음모를 막아 고려사직을 보전했다. 일찍이 충선왕을 따라 원의 연경에 가서 만권당을 중심으로 조맹부 등 세계적인 학자들과 학문을 연찬했고 고려국사를 편찬한 역사가며 공민왕을 즉위시켜 고려의 자주정책과 원에 아부하는 권문세족들을 제거하여 사대부 중심의 개혁정책을 추진하게 했다. 학자이면서 시(詩)와 서예 및 그림에도 뛰어나 삼절(三絶)의 명성을 지녔다. 공민왕 사당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익재난고(益齋亂藁) 역옹패설(?翁稗說) 익재집(益齋集) 등이 있다.

이재인(1415∼?) 조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며 호는 정헌이고 이제현의 5세손으로 김종직과 도의를 강론했고 장수현감을 지냈다. 연산군의 무오사화로 종손이며 제자인 이원이 화를 입자 삼계면 백산에 은거하여 익재의 영정을 모셔놓고 화초정, 관개정을 지어 제자들을 길렀는데 아들로 순천부사를 지낸 공신(公信) 이조정랑을 지낸 공형(公衡) 그리고 이유인 남주 등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 했으며 딸은 단종복위 거사로 살해된 봉여해의 아들과 결혼시켰다.

이항복(1556-1618) 호는 백사, 본관은 경주로 이제현의 일족인데 선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왜란때 도승지로 국란극복에 공헌했으며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광해군의 패륜을 비판하다가 함경도 북천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는데 시호는 문충이며 저서로 백사집(白沙集) 북천일록(北遷日錄) 등이 있다.

(7) 고산서원(高山書院)

소재지 :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 고산
연 혁 : 고산서원은 1878년 노사가 담대헌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인데 제자들이 1926년 성리학자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주벽으로 하고, 그의 제자인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 1825­1883)·신호(莘湖) 김록휴(金祿休: 1827­1899)·동오(東塢) 조의곤(曺毅坤: 1832­1893)·노백헌(老栢軒) 정재규(鄭載圭: 1843­1911)·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문인들이 1926년에 사당과 거경재·집의재를 건립 고산서원이라 하였다. 1984년에 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 1835­1885)·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 1845­1910)을 추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향일은 3월·9월 중정일(中丁日)

배향인물의 행적

기정진(1798­1879)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 초명은 금사(金賜).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행주이다. 7세에 이미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깨우쳤고, 10세에 경서·사서 등을 통독하였다. 1828년(순조 28) 향시에 응시하고, 1831년(순조 31)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로써 1832년 강능참봉·1835년 현능참봉·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42년 전설사별제로 임명되어 취임 6일만에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뒤에 다시 평안도도사·무장현감·사헌부장령·사헌부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임술의책]을 써서 삼정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을 방략을 제시하려 했고,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 세력의 침투를 염려한 끝에 그해 7월 [육조소]라 불리는 첫 번째 [병인소]를 썼다. 이는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하여 당시의 통상거부와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 나타나는 위정척사의 사상은 이 소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 소로 사헌부집의·동부승지·호조참의·동지돈령부사·공조참판·경연특진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말년에 고산리 담대헌에서 제자들과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노사집" 22권과 "답문유편" 15권이 있다.

조성가(1824­1904) 한말의 유학자, 자는 직교(直敎), 호는 월고(月皐), 본관은 함안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1883년(고종 20) 선공감감역에 제수되었고, 1902년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성리학적 처지에서 노사의 이일분수설을 적극 지지하여 많은 연구를 거쳐 노사에 질문하자, 노사는 81세 때 이에 대한 답설로 [외필] 1편을 지었는데, 그 뒤 간재학파와 연재학파로부터 성리학적 논쟁이 되기도 하였다. 월봉산 아래 취수정사를 짓고 후진 교육에 전념하면서 최익현·정재규·기우만 등과 교유하였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지리산에 들어가 두문불출하고, 한말의 급변하는 과정에서 유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 [부정척사론]을 지어 외세의 압력에 저항하였다. 저서로 "월고문집" 20권이 있다.

이최선(1825­1883)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樂裕, 호는 석전(石田)·경인(耕人), 본관은 전주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1859년(철종 10)에 중광시에 합격하였으나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가슴 아파하여 필마로 돌아왔다. 1862년(철종 13)에 삼정에 관한 구언이 있자, [삼정 책]을 지어 올렸으나, 담양부사 때문에 조정에 전달되지 못하였다. 병인양요 때는 호남의 종친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1874년(고종 11)에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과거의 폐단을 보고 출사를 단념하였다. 1876년(고종 13)에 호남에 흉년이 들자 가산을 기울여 빈민을 구하였다. 노사 기정진의 사상이 담긴 [외필]의 정신을 더욱 발전시키고자 [독외필]을 써서 인간 본성속의 이를 절대적 가치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주리설에 바탕하여 척사위정을 실천한 문인이라 할 수 있다. 저서로 "석전집" 4권이 있다.

김록휴(1827­1899)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자는 치경(穉敬), 호는 신호(莘湖), 본관은 울산이다. 어려서 형인 김경휴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세부터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 되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선공감감역에 제수되었다. 학문에 뜻을 두어 고향에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노사 기정진의 상에 호상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저서로 [신호집]이 있다.

조의곤(1832­1893)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자는 사홍(士弘), 호는 동오(東塢), 본관은 창령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여 경학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효자로 널리 알려졌으며, 노사선생과 강상차록(江上箚錄)의 문답에서 학문의 심오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저서로 [동오유고]가 있다.

정재규(1843­1911)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자는 영오(英五)·후윤(厚允), 호는 노백헌, 본관은 초계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벼슬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1860년(철종 11)에 김홍집이 청나라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정부에 제출하고 개화를 주장하자, 이에 대하여 조선은 아직 약한 상태이므로 일시적인 고식책에 불과하다 하여 척사위정론을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친일파의 개혁에 거의통문을 내기도 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호남·영남에 포고문을 내어 세계 여러 나라에 호소하여 일본과 담판하기를 촉구하는 한편, 노성에서 최익현과 같이 의거하기로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학문적으로는 [납양사의기의변], [외필변변]등을 지어 전우의 기정진에 대한 반박을 변론하여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저서로 노백헌집 49권이 있다.

기우만(1846­1916) 조선 후기의 유학자 의병장,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 본관은 행주이다. 1896년 광주향교에서 의사들을 모아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의논하니 며칠 안에 모여드는 의병의 형세가 매우 성대하였다. 이때 장성의 기삼연이 장정과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와서 군무를 자원하였다. 이로써 사실상의 호남창의 총수가 되었다.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모든 의병진은 광주로 모이도록 하고 광주의 광산관을 본영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종으로 부터 의병해산을 위해 파견된 신기선의 설득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호남의 마지막 유학자로 저서로 "송사집"이 있다.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석구(1835­1885)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자는 경범(景範), 호는 대곡(大谷), 본관은 김해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평생을 선생의 유리론을 옹호하는데 힘써 노백헌 정재규, 일신 정의림과 같이 노문 삼자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저서로 대곡유고가 있다.

정의림(1845­1910)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자는 계방(季方), 호는 일신재(日新齋) (學者稱 日新), 본관은 광산이다. 어려서 무사재(無邪齋) 박영주(朴永柱)에게 사서를 배우고,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 되었다. 1873년 형질기질설로 노사선생과 변론하였으며, 1875년에 대곡 김석구·노백헌 정재규·일신 정의림 등을 노문 삼자(三子)라 일컬었다. 1879년에 [납양사의]와 [외필]을 대곡·노백헌·일신제 등과 같이 보며 어떠한가를 토론하였다. 1888년 일지록을 저술하여 주자의 태극도설과 음양대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1896년 송사와 같이 나주 금성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광주 광산관에 본영을 두고 의려를 모집하는데 참여하였다. 1904년 학문적으로는 [변전우소저노사선생납양사의기의]·[변전우소저노사선생외필변] 등을 노백헌과 같이 전우의 기정진에 대한 반박을 변론하여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30년 광주 금곡사와 1946년 영귀사·1952년에 삼산사·1984년 고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일신집 22권이 있다.

6. 서당(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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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당의 기원

서당교육의 역사적 기원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뚜렸한 정설이 없다. 논자에 따라서는 고구려시대의 경당( 堂)과 같은 민간교육제도를 서당교육의 출발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는 신라의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교육기관인 동시에 청소년들의 결사조직체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지닌 맹점은 경당의 사회적인 역할이 과연 어느 정도 서당의 사회적 역할과 일치하였는가를 명확히 해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앞으로 경당에 대한 정밀한 성격 규명이 있은 다음이라야 서당과의 상호 동질성과 이질성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신라에서도 경서를 이두로 풀어서 모든 사람을 가르쳤다고 하였으니, 그 가르친 곳이 사숙일 가능성이 짙고 이 또한 서당교육의 연원의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라는 서당형태의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도경》에 "여염집들이 있는 거리에는 경관과 서사들이 두셋씩 마주 바라보이고 이곳에 백성들의 자제들이 무리로 모여 스승에게 책을 배우며, 조금 장성하게 되면 뜻이 맞는 사람끼리 벗을 택하여 절간으로 가서 글을 익힌다. 그리고 아래로는 어린이까지도 역시 향선생에게 배운다"라고 하였다. 이같은 기록은 고려시대에도 이미 조선시대의 서당제도와 같은 민간교육기관이 존재하였음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2) 서당의 발달

서당의 사회적 의미가 증대한 것은 16세기 향촌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명문 사족출신인 대토지소유자였다. 당시 서당설립의 주도세력의 신분은 입사 이전의 생원·진사들이 주류였고, 설립의 명분은 대체로 반상 구별을 비롯한 유학적 질서율를 정착시키려고 하는데서 찾고 있다. 17세기에도 사족이 연합하여 서당이 설립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서당설립과 운영은 다음 18세기적 양상과 같이 혈연위주의 폐쇄적인 양상이 대종을 이루지는 않았다. 다수의 씨족이 몇개의 자연촌을 대상으로 서당을 설립하였던 사례들이 이 시기에 나타난다. 당시 서당설립의 목적 중의 하나는 사회신분제의 동요를 억제하고, 엄격한 신분적 차등윤리를 향촌사회에 정착시키는 데 두는 것이었다.

한편 18세기 후반기에 들어 동족부락이 서당설립의 가장 주요한 주도세력으로 자리잡자 서당의 성격에도 뚜렸한 변화가 나타났다. 동족부락은 서당의 운영을 위하여 문중 중심의 화수회를 만들기도 하고, 이에 서당은 종중의 공동관리 하에 두게 되었으며, 강학기능 이외에 문중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집행기능도 동시에 수행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설립된 동족부락 중심의 서당은 문약·동약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운영됨으로써, 부락 단위에 의한 경제적 지원을 확고하게 보장받을 수 있었다. 동족부락이 중심이 되어 서당을 자치적인 경제권하에 편입시키자 서당운영에 대한 관권개입이 전반적으로 퇴조하고, 서당의 역할은 혈연중심의 폐쇄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소규모의 자산으로도 운영이 가능한 서당계의 등장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던 평민층이 대거 서당을 운영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여, 직업적 고용 훈장이 등장하는 등 서당교육의 일대 변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 서당의 종류

서당은 사림의 초등교육기관으로서 설립에 필요한 기본 재산이나 법적인 인가를 요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존폐가 자유로웠으며, 필요에 따라 뜻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서당을 유지, 경영할 수 있었다. 서당의 종류를 크게 네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사숙 또는 독서당의 유형이다. 대개 문벌가나 유력가가 훈장을 초빙하고 교육경비를 부담하는 형태이다. 이들 훈장은 퇴관 지식인이거나 낙방거사들로서 지식 정도나 경륜이 높은 경우도 있었다. 둘째는 동계서당의 유형이다. 양반 계층이나 유력 자산가의 문중에서 학계 또는 학전을 조직, 경영하면서 마을에다 서당을 짓고, 그들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문중서당이다. 훈장은 직업적인 유랑지식인이거나 마을의 유식한 촌로 가운데서 초빙 또는 선택하였으며, 대우는 양식으로 쌀과 땔나무, 그리고 의복 정도였다. 셋째로 훈장의 자영서당이다. 훈장 자신이 집에서 생계유지나 소일을 위하여 개설한 서당이다.
이는 이름난 고관이나 학자들이 만년에 자연을 벗하면서 후진을 가르치는 서당 또는 정사와는 구별된다. 넷째 문중연합서당이다. 이는 문중(동계)서당의 확대형으로써 지체가 비슷한 마을끼리 그 향촌사회에서 덕망과 학식이 뛰어난 스승을 모시고, 각 마을의 유능한 청년 자제를 선택하여 교육시키는 고급서당이다. 교육장소로는 주로 인근의 서원을 이용하여 서당교육과 서원교육이 연결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 양반사회 진출을 위한 일종의 예비학교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4) 서당의 구성

서당의 인적 구성은 훈장·접장·학도로 이루어진다. 훈장은 그 자격이 천차만별이었으며, 학식의 표준도 일정하지 않았다. 접장은 일종의 보조교사로서 훈장 한사람으로는 많은 학생을 일일히 가르칠 수 없을 경우에 학도 가운데서 나이와 지식이 많은 자를 뽑아 접장으로 세웠다. 학도는 7­8세에 입학하여 15­16세에 마치는 것이 보통이나 20세가 넘는 경우도 많았다. 성별로는 남학생 위주의 교육이었다.

(5) 교육방법

서당의 교수방법은 강이 주된 것이었다. "강"이란 이미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그 뜻을 질의응답하는 전통적인 교수방법이다. 강은 일강·순강·망강·월강 등으로 나누어 지지만 서당에서는 일강이 위주였다. 강에는 배강과 면강이 있다. 배강은 암송낭독이고 면강은 교재를 보면서 읽는 임문강독이다. 서당의 교육 과목은 《천자문》《학어집》《사자소학》《동몽선습》《통감》《소학》《대학》《중용》《논어》《맹자》《시경》《서경》《역경》《사기》《당률》등을 배웠는데, 이는 사학이나 향교의 예비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서당교육의 특색으로 계절학습이 있다. 예를 들면 겨을에는 경사와 같은 어려운 학과를 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율과 같은 흥미본위의 학습을 하였으며, 봄·가을에는 사기나 고문과 같은 글을 읽게 하여 선비로서의 뜻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글을 읽고 난 다음의 오후에는 서예를 익히게 하여 졸음과 게으름을 쫓아버리도록 배려하였다.

(6) 장성의 서당

장성에 조선시대의 서당은 각 마을마다 수 없이 있었을 것이나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알 수없다. 앞에서 서당의 종류에서 보았드시 관직에서 물러나와 후학을 길렀다는 정사형태와 사숙 및 정사를 기록에 의거 유현의 연원과 강학하였던 곳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 개천초당(介川草堂) : 일명 개천정사라고 하는데, 북일면 월계리 23 오정마을에 있는데, 하곡(霞谷) 정운룡(鄭雲龍: 1542-1593)이 후진을 강학하던 곳이다. 하곡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오자 장성현감 이계가 서삼면 모암리에 학교를 세워 그를 선생으로 초빙하여 선비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2) 정이암(鄭李菴) : 장성읍 유탕리 서골 불대산(하청)에 있었다. 석탄(石灘) 이기남(李箕南)·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 등이 이곳에서 강학하던 곳으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이름을 정이암이라 하였다.
3) 청계정(淸溪亭) : 진원면 산동리 245-1에 있다. 진사 박원순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정자로 1572년(선조 5) 건립 하였으며, 그뒤 1875년에 중건하고, 1950년에 중수하였다. 1984년 2월 29일 문화재자료 제97호로 지정되었다.
4) 면학정(眠鶴亭) : 남면 마령리 내마에 있었다. 참봉 심준붕(沈俊鵬)이 후진을 강학하던 곳이다. 이 터를 면학동이라 한다.
5) 하곡서실(霞谷書室) : 북하면 신성리 정자동에 있었다. 하곡 정운룡(1542-1593)이 선비들과 강학하던 서실이다. 자하 변경윤의 글에 나의 스승의 수도하던 곳에 돌에 하곡석문이라 각하였는데 몽계폭포 입구를 후인들이 그곳을 정자동이라 하였다.
6) 문암초당(文巖草堂) : 북일면 문암리 광암에 있었다. 양심당(養心堂) 정지핵(鄭之 : 하곡의 손자)·효우당(孝友堂) 정원표(鄭元杓: 하곡의 증손자) 등이 강학하던 곳이다. 이곳을 후인들은 서당동이라 한다.
7) 계봉정사(桂峰精舍) : 삼서면 금산리 죽산후 서당등에 있었다. 계봉(桂峰) 나통서(羅通緖)가 후진을 강학하던 곳이다.
8) 동리재(東里齋) : 북일면 문암리 광암에 있었다. 동리(東里) 정학명(鄭學明)이 강학하던 곳이다. 송성담의 문인으로 성담이 말하기를 문필천과 도덕봉이 다 동리의 소유라 하였다.
9) 청음정(淸音亭) : 황룡면 관동리 보룡산에 있었다. 입재(立齋) 기재선(奇在善)이 강학하던 곳이다.
10) 담대헌(澹對軒) : 진원면 진원리 고산에 있다. 노사 기정진의 강학하던 곳이다. 뒤에 고산서원을 설립하여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1) 취헌정(醉軒亭) : 삼서면 삼산하에 있었다. 취헌(醉軒) 한정리(韓正履)의 강학하던 곳이다.
12) 약포재(藥圃齋) : 황룡면 아곡리에 있었다. 약포 박동수(朴東洙)의 강학하던 곳이다.
13) 삼희재(三希齋) : 황룡면 장산리 수산아래 있었다. 동노(東老) 김명현(金命鉉)의 강학하던 곳이다.
14) 삼산재(三山齋) : 진원면 삼성산에 있었다. 송사 기우만이 은거 강학하던 곳이다.
15) 몽계당(蒙溪堂) : 삼서면 유평리 유정에 있었다. 몽계 임익채(林益采)의 강학하던 곳이다.
16) 취미정(翠薇亭) : 서삼면 외현에 있었다. 진사(進士) 반행도(潘行棹)의 강학하던 곳이다.
17) 근수정(近水亭) : 삼서면 유평리 유정에 있었다. 몽계 임익채의 강학하던 곳이다.
18) 문향정(聞香亭) : 황룡면 신호리에 있었다. 신호(莘湖) 김녹휴(金祿休)가 자질(子姪)들의 교육을 위하여 건립한 정자이다.
19) 연호재(然好齋) : 남면 삼태리 서태에 있다. 연호재 임병학(林炳學)의 강학하던 곳이다.
20) 향포정(香圃亭) : 남면 분향리 분향에 있다. 향포정 천락호(千洛鎬)의 강학하던 곳이다.
21) 기산정사(岐山精舍) : 장성읍 기산리 기산에 있었다. 진사(進士) 기산 이승환(李升煥)의 강학하던 곳이다.
22) 율재정(栗齋亭) : 북이면 만무리에 있다. 율재 공상원(孔商源)의 강학하던 곳이다.
23) 오봉정사(梧鳳精舍) : 장성읍 영천리 오동촌에 있었다. 사문 나원종·오천 김규현과 마을사람들이 청년들의 교육을 위하여 건립하여 강학하던 곳이다.
24) 회산정사(晦山精舍) : 남면 삼태리 중태에 있었다. 참봉( 奉) 강상운(姜商雲)이 강학하던 곳이다.
25) 세운정(世雲亭) : 북하면 대악리 세운동에 있었다. 운초(雲樵) 서상현(徐相睍)이 강학하던 곳이다.
26) 삼성재(三省齋) : 진원면 상림리에 있었다. 야은(野隱) 정홍엽(鄭洪燁)이 강학하던 곳이다27) 봉래재(鳳來齋) : 북하면 단전리에 있었다. 봉래재 김재기(金載基)가 강학하던 곳이다.
28) 문암정(問庵亭) : 북하면 단전리 신촌앞 옥여봉 아래 있었다. 문암(問庵) 김용술(金容述)이 강학하던 곳이다. (이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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