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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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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원과 옛길

우리의 옛길은 두 지점간 가장 가까운 곳 즉 지름길로 발달하였다. 고려 때까지는 국가 주도의 육로 관리체제는 그 기틀이 마련되었지만, 운영시스템이 완벽하지 못해 사찰같은 곳에서 역원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도성에 이르는 장거리 육상여행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특히 세곡을 비롯한 화물운송은 대부분 강과 바다길을 이용한 조운에 의존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역원제도가 강화되고 한성을 중심으로 9대 간선도로가 관리되기 시작했다. 장성은 당시 제7로인 한성­제주간 '제주로(濟州路)' 의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임암산성이 있고 찰방도인 청암역이 위치한 장성이야말로 이 도로에서 요충지로 꼽힐만한 곳이었다.

장성지역에 대한 기록으로는 단엄역(丹嚴驛)과 영신역(永新驛)이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온다. 나주 청엄도 관할 9개 역에 속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57년 각도 역의 관할을 조정하고 정역찰방(程驛察訪)을 두면서 청엄도 소관인 장성의 단엄역은 진원의 영신역(永申驛)과 함께 삼례도(蔘禮道)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1462년 관할하는 역이 많고 길이 멀리 떨어져서 찰방이 두루 살피기가 어려워 대, 중, 소로 역로를 나누고 거리의 원근을 고려하여 그 전의 역승을 각 역로에 차견(差遣)하여 1찰방마다 역승 1명을 더 두게 하자는 병조의 건의를 받아드릴 때 단암역(丹巖驛)과 영신역은 청엄도 찰방관할 12개역에 속하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장성현과 진원현에 현 남쪽 13리에 단엄역과 현 서쪽 10리에 영신역이 있고 나그네의 시까지 언급되어 있다. 당시 역의 풍경을 짐작할 수 있는 명시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 소리 베갯머리에 들리는 것은 꽃 사이의 새요/몇 점 누각에 마주 선 것은 대숲 밖의 산이로다./해가 가도록 돌아다니는 나같은 이 또 있을까/누에 올라 한가한 틈을 잠깐 만드네(丹嚴에서 成任). 졸졸 시냇물 마을 안고 흐르고/골짜기 가득한 솔과 대에 땅은 더욱 그윽하네/잔들고 권하는데 풍설이 차구나/소리 낮춰 읊조리며 중선루에 기대었네(단엄에서 鄭昌孫). 가을 강물은 맑고 아침 산은 푸르네/보이는 것마다 쓸쓸하여 객정을 흔드네/물가의 학과 오리는 물이 좋아 깃들이고/들 고라니 산 사슴은 아지랑이와 어울려 가네/회포를 읊조리매 부질없이 천승을 가볍게 알고/취흥은 어찌 평생토록 마다하랴/저녁에 역정에 잠깐 들려서 몇 잔을 기울이며 벗과 즐기네(영신에서 金克己).

19세기 전라도 지도 중 장성부 지도에 보면 단암역에 청엄도(靑嚴道)란 표기와 함께 여섯 채의 건물이 그려져 있고 담도 쳐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강 건너 동편의 우지(芋枝)촌에는 역면(驛面) 사창(社倉)도 표기되어 있다. 이밖에도 별관(別館)을 비롯하여 방동(方洞), 하목(下木), 우동(牛洞), 복암, 백계(白鷄), 대사(大寺), 남양(南陽), 중흥(中興), 신흥(新興), 동산(東山), 상오(上蜈), 사천(蛇川), 호산(湖山), 야은(野隱)마을이 관할로 되어 있다. 역관아를 중심으로 역에 속한 역리와 역졸 및 노비들이 살던 마을로 추정된다.

1895년 청암역이 폐쇄될 때 서(徐)찰방이 만든 『청암역지』에는 이 역에는 진원 영신역, 광산 선암역, 나주 청암과 신안역, 남평 광리와 오림역, 영암 영보역, 영광 녹사역, 함평 가리역, 무안 경신역, 무장 청송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 11개 역에는 역리 527명을 비롯하여 역노비 87명, 역전답 585결, 공수답 63결, 부장전 111결, 급주전 25결, 보인수 792명, 역졸 396명, 상등마 17필, 중등마, 28필, 하등마 29필 등이 있었다.

청암역도의 단암역터는 장성댐 휴게소 자리로 동헌(역간, 사방 4칸), 내동헌(4칸), 작청(5칸), 공고(3칸), 창고(9칸), 형발청(3칸), 서자청(6칸), 급장청(4칸) 사령청(4칸) 하관청(6칸), 내삼문(3칸), 진청루(3칸) 등 12채의 집이 담장에 둘러 쌓여 있었다. 댐 설치전에 이정옥씨가 내동헌의 행랑채였던 하관청에 살고 있었고, 용강리 108번지 강기주씨 집 밭에 원두표관찰사비가 있었다. 현재 장성읍 상오마을 청암가든에 청암이란 표싯돌과 성산리 동산 앞에 서있는 강일철 찰방선정비 만이 종 6품이 관할한 옛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아직까지 청암역 찰방이 언제 나주에서 장성 단암역으로 옮겨졌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모두 뒷자를 암과 엄으로도 쓰였던 단암과 청암찰방역은 1682년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여비고에는 나주에 청암찰방역이 있음을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1759년 『여지도서』장성부 지도에는 건물과 함께 청암역이 그려져 있는 반면 나주목 지도에는 표시가 없다. 그리고 단암역이 지금 청암역으로 연결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함께 종 6품에 역리 527명, 역노 58명, 역비 29명, 말 15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점으로 보아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중엽에 찰방역이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765년 4월 전라도의 청암역과 충청도의 연원역의 두 찰방을 6품 자리로 승격시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나주에서 장성으로 찰방을 옮기고 그 중요성을 한층 강화한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신역터는 진원면 율곡리 영신마을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80여호에 200여명이 살고 있는 제법 큰 마을로 역사터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마흥마을과 사이의 밭에서 영신이란 글자가 박힌 기와가 나왔으며 김봉환씨 논머리에 말에 물을 먹였다고 전해지는 귀양샘이 남아있다. 이밖에도 점촌 사이에 '원무동골'과 마을 서남쪽 길목 차종술처 선씨절효비터(289­9번지)에 '원태갈'이란 땅이름이 남아있다. 『여지도서』에는 영신역의 역리는 62명, 역노 48명, 역비가 17명, 말이 14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서찰방의 청암역지에는 이졸보가 448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역에는 역둔토가 있게 마련이고 한일합병이후 이러한 토지들은 일본인의 소유가 된 경우가 많다. 영신마을에도 '오노'라는 일본인이 살다가 죽어 몇 년 전 그 후손이 찾아왔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원(院)도 기록되어 있는데 장성현에는 동쪽 18리에 가정원(可亭院), 남쪽 4리에는 보등원(寶燈院), 남쪽 15리에는 득량원(得良院), 북쪽 21리에는 미륵원(彌勒院)과 진원현에는 남쪽 3리에 선원(禪院), 서쪽 10리에 행인원(行人院), 서쪽 15리에 목호원(木號院) 등 7개나 된다.

가정원은 오늘날 북하면 덕재리 원동마을로 추정된다. 북일면 오산리 고장성터에서 바라보면 방향과 거리가 일치되고 있다. 보등원터는 북일면 박산리 작동마을로 추정된다. 마을 남쪽 아연이재 서편골에 오복저수지 근처에 '원골'과 '군마바탕'이란 땅이름이 남아있고 일제 때 제작된 지형도에는 마을 바로 북편에 '원동'이 표기되어 있다. 『여지도서』에 고장성원(古長城院)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원터를 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득량원은 한국지명총람에는 남면 월곡리 덕촌을 득량원터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곳은 진원현 영역임으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거리로 보아서는 장성읍 상오리와 야은리 황룡교 주막거리로 추정된다. 이 거리 동편골 우지촌에 '원갓'이라 지명이 남아있다. 미륵원은 북이면 원덕리 원덕마을에 있었다. 실제 원덕리 564번지에는 고려 때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2기의 미륵불이 서있다.

선원터는 남면 월곡리 덕촌 호남고속도로가 난 다리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곳에 원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득량원터라고 『한국지명총람』에 기록된 곳으로 추정된다. 『여지승람』거리로 보아 이곳은 멀고 선원은 진원현터에 거의 붙어 있을 가능이 높다. 실제 진원리 고산서원 동편에 하고마을이 있는데 이곳 바로 동편에 상여집 근처가 산울안 오리정 터였다.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산울안'이란 지명과 더불어 하고에서 서원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미륵고개'라 부르고 있어 선원터의 가능성이 높다. 행인원터는 남면 행정리 승가장터 근방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선암역과 영신역의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목호원은 남면 마흥마을 1967년에 축조한 저수지 제방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목호원은 마량부곡을 넘는 주요고개라는 의미로 마재(馬峙)가 못재로 변하고 그 밑에 있는 원터를 한자화하면서 목호원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속도로 바로 서편 신흥마을 북쪽에도 '원골'이란 지명이 남아있어 이 일대가 주요한 길목이었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외에 삼서면 두월리 두동에는 냉촌역이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까지 장성의 옛길은 제주에서 해남 관두량이나 강진 탐진을 거쳐 나주에 이른 다음 정읍에 이른 전라 우도에 통하는 요로였다. 그 지름길은 나주 청암역-광산 선암역-남면 행인원-못재 목호원-득량원-단암역-우동 흑암치-북일 보증원-원덕 미륵원-갈재-정읍 천원역 코스이다. 이 노선은 현재 고속도로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광주에서 못재구간만 다른 뿐으로 남면 월정리 불정마을 남쪽 장성군 영내에서 북이면 원덕리 갈재까지는 29km로 도보로는 7-8시간 정도면 통과할 수 있는 거리이다.

장성은 산밑에 있는 고을이라 고개가 많고, 그 명칭에 있어 장성 지방의 특징을 담고 있다. 노령을 갈대 노(蘆)자로 풀어 갈대가 많은 고개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우리 토박이 이름인 갈재를 풀어보면 갈라지는 고개, 즉 사이나 분수계를 알려주는 부르기 편한 자연스런 이름이다. 이 고개 밑에 갈애바위나 기생노아 전설 또한 갈재에서 한자로 옮겨진 표현들이다. 어디나 큰 고개는 넘는데 사연이 많게 되어 있다. 고비마다 그 얘기들을 모아 덕담으로 전한 바 목란마을에 지금도 구전되고 있는 갈재에 대한 지형적인 여론들이다. 임암산성 동편의 새재(鳥嶺), 고창 넘는 양고살재, 진원에서 장성읍으로 넘는 사라치, 황룡 통안에서 고창 고수로 넘는 사리재(殺牛峙), 삼계 추동에서 상금으로 넘는 가래재 등도 사이재란 의미가 한자로 변했을 뿐이다. 그리고 못재를 미롯하여 삼서에서 영광으로 넘는 마치재, 삼계에서 대마로 넘는 몰치재, 북하면의 곰재 등은 큰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2) 일제시대의 도로와 철도

1) 도로교통

일제는 1910년 이전 우리 국토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시행하고 대축척 지형도를 제작하여 침략의 기틀을 다졌다. 갑오경장이후 조선시대 즉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상들은 일제에 의해 급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옛 역원터는 의병들을 토벌하기 위해 헌병초소가 설치되고,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말 그대로 새 길인 신작로(新作路)를 내기 시작하였다.

1928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토목사업지에는 1907-1911년 사이 광주-목포 86.9km와 광주-송정리 34.5km를 설치하고, 1917-1920년 사이 제2차 치도사업 때 정읍-광주간 47.1km를 5.5-7.3m의 폭으로 건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부여된 도로이름이 국도이고 목포에서 경성을 거쳐 신의주에 이른 노선을 1호선이라고 했다. 이 노선은 조선시대 제주도가 광주를 거치지 않고 지름길을 택하였으나 광주가 도청소재가 됨으로써 국도 1호선도 우회하여 광주를 경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장성에 이른 길도 광주 북구 동림동 불공마을을 거쳐 오늘날 호남고속도로와 비슷한 길을 따라서 나게 되었다. 이 도로는 옛 청암역에서 검바우재(黑巖峙)를 넘는 가는 옛길을 접어두고 바로 북진하여 지금 장성호 수몰지역이었던 북상면 수성리를 거쳐 수리재를 거쳐 오월리를 경유 사가리 동편 묘동으로 잇는 노선으로 건설되었다. 결국 이 노선은 1973년 장성댐 건설로 덕진리 구신재를 거쳐 약수리를 도는 코스로 변경되었다. 이 길은 대악천가를 굽이도는 일명 솔룡골 노선으로 1930년대 임도로 개설되었던 것이다.

담양에서 장성을 거쳐 함평으로 연결되는 국도 24번 도로는 1910년대부터 황룡, 동화, 진원 구간이 개통되다가 1930년대에 삼계 사창을 거쳐 함평까지 개통되었다. 1920년 쯤 담양-고창을 연결하는 도로 중 약수리에서 사거리 구간이 개통되어 몇 년 뒤 사거리­고창구간이 건설되었다. 1923년께 6명 정도가 타는 소형버스(차주 : 吉岡)가 장성읍­광주와 사거리­약수리간 운행되었고 1935년에는 담양까지 연장되고 고창간에도 하루 2회 버스가 다녔다. 차부는 백양사역 역전 금강식당 자리에 있었고 차주는 전동섭씨였다. 장성과 사거리 구간에는 히노데(日出) 회사 버스가 운행되었다. 이 회사는 1936년 장성에서 사창과 장성­약수리간도 하루 1회 왕복운행했다. 약수리 노선에는 일제 말엽 이풍호씨가 정류소를 운영하고 이현천씨가 운전수였던 전남여객 목탄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장성에는 영광자동차부에서 10인승 목탄차가 사창을 거쳐 장성까지 하루 2회 왕복 운행을 했고, 정읍의 세이유버스도 신흥을 거쳐 하루 4회 왕복 운행했다. 임계에서 사창을 거쳐 깃재를 넘어가는 816번 도로는 1930년대 개설되었다. 1936년께에는 서삼에서 신흥리가 철도 옆을 따라서 사설도로도 놓이게 되었다. 한편 서삼면 사람들은 황룡강으로 인하여 장성읍까지는 나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2) 철도교통

일제가 호남지방의 수탈을 위해 건설한 호남선 철도는 장성 지역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12년 정읍까지 개통되고 이듬해는 목포­송정리간이 개통되었으나 갈재터널의 난공사로 장성구간은 1914년 1월 1일에 준공되었다. 이후 장성관내의 철도역으로는 대전기점 148.6km에 사거리역, 154.3km 신흥리역, 160.1km 안평역, 163.8km 장성역, 169.6km 옥정역 등이 설치되었다. 이 중 1914년 1월 11일에 개통한 장성역과 신흥리역, 1919년 12월 20일 간이역에서 정식역이 된 사거리역이 큰 역으로 장성의 세력권 판도를 변화시킨 요처가 되었다. 즉 장성역은 성산리 중심의 읍터를 역전통인 영천리로 옮기게 했으며 사거리역은 담양과 고창간을 연결하는 십자로에 놓이면서 신흥역 중심권을 쇠락시겼다.

신흥리역은 옛 장성의 텃골이었던 오산리 잔등 끝인 169번지에 설치되었다. 바로 북쪽의 철로는 북창마을과 양막마을 등성이를 가로질러 놓이게 되었고, 이때 많은 유물들이 파괴되었던 것으로 주민들은 전하고 있다. 이 역은 6년간 사거리역을 간이역으로 관할하였다. 이 두 역은 북이, 북일, 서삼, 북상면과 고창군 주민들이 주로 이용했는데, 특히 임산물과 곡물 등을 서울과 목포로 수송하였다. 당시 화물 운반으로 두 역에는 소나 말수레(구루마)가 20여대 이상 영업을 했고, 식당을 비롯하여 술집, 여관 등 상가가 형성되는 등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 열차 이용 현황을 사거리역에 보관된 역사자료를 통하여 살펴보면 1919년 쌀 401톤, 장작 1,684톤, 목재 281톤, 콩 56톤이 발송되었다. 1931년에는 쌀 1,174톤, 장작 2,030톤, 목탄 304톤, 목재 94톤이 발송되었고, 1940년에 이르러서는 장작 8,469톤을 비롯하여 14,280톤의 화물이 발송되고, 도착화물은 생필품 1,228톤, 소금 365톤을 비롯하여 11,125톤이었다. 여객이용객은 1919년 33,499명, 1927년 52,859명, 1940년 67,730명이었다.

(3) 광복 이후의 도로와 철도

1) 도로교통

1950년대 장성­광주를 연결하는 국도 1호선에 전남, 중앙, 대한, 광주여객이 1일 4회 운행했다. 1950년 사창­상도선이 개설되고 1954년 북하면 곡두재길이 면민들에 의해 착공되었다. 그해 장성-사창-삼서-문장을 잇는 노선에 남일여객이 운행했고 대한여객은 전주-광주간을 운행할 때 장성의 여러 지역을 경유하였다. 1956년 광주여객은 광주-장성-사거리-고창노선을 운행했고, 1958년에는 중앙여객이 광주-담양-사거리-고창을 잇는 노선을 운행했다. 그해 사창-고창 성송면 노선이 개설되었다. 또한 전남여객과 중앙여객은 장성-동화-영광 해리와 함평 문장-사창노선을 운행했다.

1960년 광일여객은 광주­장성­사창노선을 운행하다가 영광까지 연장했고 금성여객도 광주-영광간을 운행하다 1970년 중단했다. 1960년대 중반 사거리에 직행버스가 생기고 광주여객은 서울까지 운행하였다. 1966년 광일여객은 광주-장성-삼서 석마리 노선을 운행했고 이듬해 백양사 도로의 확장공사가 시작되었다. 1968년에는 서삼교가 준공되어 4년 전에 설치한 서삼면도선위원회(위원장 반성환)의 주도로 운영되었던 나루운영이 1971년 중단되고 광일여객이 광주­주암간을 1일 3회 서삼교를 통하여 운행되었다. 1969년에는 장성-남면-진원-광주를 통한 국도 1호선구간에 광성여객이 1일 8회 운행했다.

1970년 임곡-임정-구봉-사창을 잇는 노선에 광신여객이 1일 2회 운행되었고, 사창-염치-내계 노선이 개설되었다. 그해 장성-대악-백양사 구간에 광신여객이 운행했고, 광주여객은 장성-고창노선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또한 사창­함평문장, 사창-고창, 사창-네계, 사창-상도 구간에 광성여객이 1일 2회 운행했고, 광신여객은 사창­문장간 1일 3회 운행했다. 1971년 1월부터 대악리 도로 이설공사가 시작되어 1973년 12월 완공되어 국도 1호선이 되었다. 1973년 광주-임곡-삼서 보생리-삼서소재지를 잇는 노선에 광신여객이 운행했고 이듬해 약수-백양사 간 도로가 포장되고 3년 뒤에 2차 포장되었다. 1974년에는 장성 뿐만 아니라 전라도 일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2차선 호남고속도로가 완공된 것이다. 회덕기점 154.5km지점에 장성톨게이트가 설치되었다. 여기서 광주 서광주 인터체인지까지는 16.3km에 불과하다. 1975년 장성-남면-마산-적성-남면사무소 간에 광일여객이 하루 2회 운행하가가 6회까지 증차했다. 이 회사는 같은 해 장성-진원-담양을 잇는 노선에 1일 4회 운행을 하기도 했다. 1977년 장성-동화-송계 구간에 광일여객이 1일 2회 운행했고, 사거리-약수 구간이 포장되었다. 1979년에는 장성-동화-삽치 구간에 버스가 운행되었다.

1980년 임곡-임정-구봉-사창 구간이 확포장 되었고, 1983년에는 필암-와우선도 확포장 되었다. 1984년부터는 군내버스가 운행되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이 버스는 국도 1호선 구간에 1일 13회, 군도 2호선에 1일 10회, 동화구간에 3회 등을 운행했다. 그러나 1986년부터 101번 광주시내버스가 월곡-선적리-산정리-수촌까지 운행되면서 위축되기 시작했다. 남면 행정리 검정에서 월곡리를 경유하여 진원 고산까지 1일 4회 운행하던 남광버스도 1988년 중단하고 말았다. 1984년에는 호남고속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 운행되었다. 이 도로에서 장성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곳은 서울 깃점 289.6km 서광주 깃점 47.1km인 백양사, 서울 깃점 322.7km 서광주 간 7km 비아, 서울 간 306.6km 장성톨게이트 등이다. 1985년부터 광주-사창까지 운행하던 광성여객은 광주고속으로 노선을 넘겼다. 1986년 약수리-대흥리간이 포장되었다. 이 해 11월 14일자로 유영선이 대표가 되어 장성교통 유한회사가 영천리 1511-8번지에 허가를 냈고 2001년 현재 22대의 버스가 등록되어 있다. 1988년 덕진리-대방 앞까지도 포장되었다. 1989년부터는 삼서소재지에 광주운암동에서 시내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표1-14] 장성군 도로망

[표1-14] 장성군 도로망 - 노선번호, 노선명, 기 · 종점, 총연장을 나타낸 표
노선번호노선명기 · 종점총연장
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남면 삼태리북이 원덕리29.51
국도1호목포 ∼ 신의주남면 삼태리북이 원덕리44.726
국도24호지도 ∼ 울산삼서 수해리진원 상림리30.459
지방도15호담양 ∼ 고창북하 대흥리북이 죽청리12.205
지방도49호해남 ∼ 원주동화 월산리북하 중평리10.84
816호영광∼ 장성삼계 부성리황룡 월평리19.93
893호삼계 ∼ 고창삼계 수옥리삼계 생촌리9.4
898호장성 ∼ 고창북하 월성리북일 문암리19.17
군도1호상림 ∼ 학림진원 상림 382진원 학림 449-13.3
군도 2호선적 ∼ 율곡진원 선적 443-3진원 율곡 46811.9
군도 3호남평∼송계동화 남평 254-3동화 송계 689-29.5
군도 4호수옥 ∼학성삼계 수옥 424-15삼서 대도 569-113.9
군도 5호대곡 ∼금산삼서 대곡 178-1삼서 금산 968-13.8
군도 6호용정 ∼ 내계동화 용정 669-4삼계 내계 541-510.1
군도 7호우치 ∼ 죽산삼서 우치 563-14삼서 수해 482-41.4
군도 8호월평 ∼ 통안황룡 월평 21-6황룡 통안 산 4111.7
군도 10호필망∼와우황룡 필암 687황룡 와우 3116.1
군도 11호영천 ∼ 사가장성 영천 1473-1북이 사가 685-1016.5
군도 13호영천∼성덕장성 영천 1473-3북일 성덕 652-111.9
군도 14호박산 ∼오월북일 박산 463북이 오월 605-15
군도 15호필암 ∼ 문암황룡 아곡 98-5북일 문암 83114
군도 16호상오∼백양사장성 야은 291-1북하 약수 1812.5
군도 17호용강 ∼남창골장성 용강 44-8북하 신성 460-112.6
군도 18호장산 ∼ 신흥서삼 장산 214-1북일 신흥 1698.2

[자료] 장성군청 2001. 4. 현재

1990년 월평-통안선이 확포장되었고, 이듬해 신흥리를 경유한 광주-고창노선을 광신고속이 운행하기 시작했다. 1992년 101번 광주시내버스는 남면 사무소를 거쳐 덕성리 자풍까지 1일 29회를 운행했다. 그해 825번 지방도가 확포장 되었다. 1994년에는 농어촌버스로 개편 장성-영신-비아-광주 노선에 1일 17회, 장성-마령-비아-광주 노선에 10회, 장성-마령-비아 노선에 3회, 장성-영신-비아 노선에 6회, 사창-진원-월곡- 광주 노선에 3회를 각각 운행하였다. 이해 2월 8일에는 송병열이 군민운수 주식회사를 1,273-213번지에 허가를 내고 2001년 현재 12대의 버스를 보유하고 있다.

2001년 4월 현재 장성관내 도로현황을 보면 고속도로 1개 노선에 29.5km, 일반국도 2개 노선에 75.2km, 국가지원지방도 2개 노선에 23km, 지방도 3개 노선에 48.5km, 군도 16개 노선에 152.4km를 합쳐 24개 노선 328.6km이다. 이밖에 농어촌도로를 보면 면도 18개 노선 67.2km, 리도 49개 노선 138.4km, 농도 126개 노선 230km를 합쳐 193개 노선 435.6km이다. 따라서 장성군내의 모든 도로의 총 노선은 217개이고 총연장은 764.2km이다. 각 구간 별 국도와 지방도 및 군도현황은 위의 [표 1-14]와 같다.

장성의 다리에 대하여 살펴보면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황룡강을 건너는 큰 다리는 상오리에서 청암역으로 건너는 현 황룡교 부근에 있었던 대천교(大川橋)가 있었다. 1927년 장성읍지에는 남면 송강교를 비롯하여 진원 선적교, 삼계에 사창교 합천교, 황룡에 황룡교 조포교 봉덕교 필암교, 서삼에 용흥교 외현교 죽림교, 북하에 약수교, 삼서에 수해교 남계교, 북일에 신흥교 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장성대교는 호남권 복합화물 터미널 등 지역발전을 위하여 장성읍 기산리에 건설한 교량이다. 연장은 202m이며, 사업비는 접속도로 2.6km(폭 8.0m)를 포함 4,950백만원을 들여, 1996년 12월 31일 착공·1998년 5월 24일 준공하였다. 현재 장성관내에 있는 교량현황 보면 다음 [표 1-15]와 같다.

현재 장성관내에서 광주와 연결되어 있는 버스는 장성교통이 운행하는 100번 버스와 광주시내버스 101번, 114번이 있고 11번은 비아까지 32번은 오룡까지 운행되어 장성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이 버스들의 노선과 운행시간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00번: 장성, 진원, 상무대, 사창, 마산 각 방향-산정-비아-수연동-신창동-동림동-경신여고-무등경기장-일신방직-천변로-양동시장-대인시장-롯데백화점(1,300원)-대인광장(장성 첫차 오전 5시 45분부터 막차 호후 8시 29분까지 44회, 진원 첫차 오전 6시 50분 막차 오후 5시 25분 11회, 상무대 첫차 오전 8시 15분 막차 오후 5시 15분 6회, 사창 첫차 오전 6시 15분 막차 오후 6시 15분 8회, 남면 마산(마령) 첫차 오전 6시 10분 막차 오후 4시 45분 9회)

101번: 장성 남면 마산(1,040원)-녹진-덕성-자풍-선평장입구-마령리-회룡-평산리(700원)-승가마을-남면사무소-분향리-남면중-월곡-부대입구-월정-호반아파트-비아농협-비아동-자동차매매단지-수완동-신창동-전남공고입구-보건대입구-산동교-산동교-동림주공-복지회관-우미아파트-운암중-운암3단지-운암1단지-문화예술회관(중앙여고)-동운육교(어린이대공원후문)-경신여고-무등경기장-전남고-일신방직­임동사무소-북성중-아세아극장-양유교-발산교-전남방직(62분거리 배차시간 53-55분 3대 운영)

114번: 산정(1,020원)-수촌-진원초교-산정-매화동-남계-중앙교회-진원면사무소-평촌-덕촌-작동-상림(710원)-학산-진원동초등(940원)-월정-월정입구-대촌교-용두교-용두-본촌동-제일제당-거진-신흥택시-연초제조창후문-연초제조창-롯데제과-해태제과-청소년회관-마당고개-박물관입구-체육고-문화예술회관(중앙여고)-동운육교(어린이대공원후문)-경신여고-태봉새마을금고-신안동사무소-용봉사거리-광주역-순복음교회-시청-광주고-대인시장-대인파출소-동부소방소-대인광장-중흥시장(60분거리 배차시간 75-80분 2대 운행)

다음은 1990년대 중반의 교통량 현황이다.

[표1-15] 장성군 교량 현황

[표1-15] 장성군 교량 현황 - 교량명, 위치(읍면, 리동), 교량규모(연장, 총폭원, 설계하중), 준공연도를 나타낸 표
교량명위 치교량규모준공연도
읍면리동연장총폭원(유효폭)설계하중
선적교 진원 선적 87.5(6.0)13'73
산정교진원산정2210.2 (8.6)18'90
분향교분향127 (6.0) 18'84
평산교평산189 (8.0) 24'98
환교교동화남평148 (7.0)24'94
임정교동화월산309 (8.0)24'97
능성교삼계능성129 (8.0)24'95
죽탄교삼계상도428 (6.6)18'90
상도교삼계상도289 (8.0)24'95
남계교삼서두월428 (6.5) 18'90
소룡교삼서소룡189.4 (9.0)18'92
발향교삼서석마1257.5 (6.0)13.5'77
동계교동화동화128 (7.0)18'91
덕산교삼계덕산2710.4 (9.0)18'92
구석교황룡필암548 (6.5)18'93
와우교황룡와우168 (7.0)18'90
장성 제일교장성장안18012 (7.2)24'99
조양교북이조양148.2 (6.7)18'91
장성대교장성기산20212 (7.0)24'98
대재교서삼용흥148 (6.5)18'90
장산교서삼장산328 (7.5)18'94
대덕교서삼대덕288 (6.5)18'90
운곡교북일성덕229 (8.0)18'92
송계교서삼추암148.2 (7.2)18'76
상오교장성상오216.5 (6.0)13.5'89
북두교북하약수2010.2 (8.6)13.5'87
명정교북이달성206 (5.6)24'98
송산교북이오월554 (3.7)8'86
서양3교동화서양53.4 (3.4)58
가정교동화용정325.4 (5.0)3213.5
산성교북하신성459 (7.0)24'96
염보교북일성산9812 (8.0)24'99
유탕교장성유탕246 (5.8)8'75
부흥교장성부흥905 (4.5)13.5'76
구산교장성영천6.25.2 (5.2)8'75
단광교장성단광104.5 (4.0)8'90
유탕2교장성유탕635.5 (5.0)18'90
하오교장성상오165.7 (5.2)8'76
학전교진원선적7.58.4 (7.1)18'95
청룡교진원용산294.5 (4.0)13.5'90
모천교진원학림94.5 (4.0)13.5'90
평춘교진원학전105.5 (5.1)13.5'90
평춘2교진원학전7.25 (5.0) 13.5'90
덕촌교월곡157.3 (6.9)13.5'93
월계교월정443.5 (3.0)13.5'90
승가교행정2410 (9.0)24'99
신평교평산8.25.5 (5.0)13.5'90
월정교월정144.5 (4.0)13.5'90
월곡교월곡214.9 (4.3)8'72
월산교월정14.64.5 (4.0)13.5'90
죽분교분향143.5 (3.2)13.5'90
평산2교평산204.3 (3.9)13.5'90
구산교동화구림166.6 (5.0)13.5'76
조산교동화동호304.5 (3.0)8'76
서양1교동화서양73.7 (3.7)8'75
서양2교동화서양63.4 (3.4)8'75
용동교북하성암493.5 (3.5)8'81
만평교동화구림196.5 (6.0)13.5'84
수침교삼서대도234.5 (4.5)13.5'76
하죽1교삼서수해304.4 (4.0)13.5'86
우치교삼서우치103.4 (3.0) 13.5'76
하죽교삼서수해328 (7.2)24'98
남계1교삼서두월605 (4.5)13.5'75
합동교삼서수양183 (2.7)13.5'89
우치1교삼서우치183.3 (3.0)13.5'89
우치2교삼서우치123.3 (3.0)13.5'89
인지교삼서대곡9.53.3 (3.0)13.5'89
월곡교삼서수해284.4 (4.0)13.5'89
외동교삼서홍정504 (3.6)13.5'74
우봉교삼계사창244.5 (4.0)13.5'85
우봉1교삼계사창405.4 (5.0)13.5'90
신기교삼계신기169 (8.0)13.5'90
자초교삼계수산349 (8.0)24'97
우봉3교삼계사창144.8 (4.3)8'88
성산교삼계능성558 (7.2)24'98
수각교삼계수옥364.5 (4.0)13.5'90
능성1교삼계능성385.4 (5.0)13.5'81
월곡2교삼계발산6.53.5 (3.0)8'76
월곡교삼계발산405 (4.6)8'80
월곡3교삼계수옥75 (5.0)8'76
숙호교삼계죽림104.9 (4.5)8'66
청림교삼계죽림55 (5.0)8'66
봉덕교황룡황룡244.5 (4.0)13.5'89
방곡1교황룡와룡165.5 (5.0)8'72
거르메교황룡아곡244.5 (4.1)8'76
관동교황룡관동364.5 (4.5)8'85
원덕교북이원덕364 (3.5)8'70
수도교북이백암244.5 (4.1)13.5'94
복룡교북이사기53.6 (3.6)13.5'89
하죽2교삼서수해13.54.4 (4.0)13.5'86
원황룡교황룡황룡158 (7.0)24'98
난산교황룡맥호214.6 (4.1)13.5'89
여절교황룡금호113.5 (3.5)13.5'90
필암2교황룡필암485.5 (5.0)18'90
장산교황룡장산565.4 (5.0)13.5'90
필암교황룡필암506.8 (6.0)13.5'90
동정교황룡맥호405 (4.6)13.5'85
주암교서삼모암155 (4.6)13.5'89
모암교서삼모암55 (5.0) 13.5'89
덕평교서삼대덕325.5 (5.0)13.5'89
증암교서삼추암217 (6.0)24'95
구해교북일성산55 (4.6)8'78
장두교북일성덕116.7 (6.3)13.5'89
율리교북일월계408 (7.0)24'99
매남교북일문암53 (3.0)8'79
오정교북일월계244.6 (4.0)13.5'87
안정교북일월계324.4 (4.0)13.5'90
계광교북일월계283.5 (3.5)13.5'90
신광교북이신월347.5 (6.6)13.5'91
신월교북이신월35.57 (6.0)13.5'86
중산1교북이죽청40718'94
금양1교북이죽청407.4 (7.0)18'94
금양2교북이죽청407.4 (7.0)18'94
홍산교북이신월244 (47.0)8'73
평춘교북이모현213.3 (2.8)8'73
월하교북이신월405 (4.6)8'81
송산1교북이오월55 (4.6)8'86
송산2교북이오월73 (3.0)8'86
대정교북하대흥435 (4.0) 24'98
119개소

[표1-16] 장성군내 주요도로 교통량

[표1-16] 장성군내 주요도로 교통량 - 도로별, 구간, 연장, 계, 승용차, 버스, 화물차를 나타낸 표
도로별구간(노선)연장(km)승용차버스화물차
고속도로정읍 ∼ 백양사18.333,17717,6745,28510,158
백양사 ∼장성16.933,75418,0165,38410,354
장성 ∼ 광산9.636,55420,8184,75510,986
일반국도광주 ∼ 장성23.7210,3637,0762143,073
장성 ∼ 북하19.663,4502,349139962
북하 ∼ 정읍30.654,1302,7511431,236
해보 ∼ 사창11.364,9363,2201071,609
사창 ∼장성12.155,5603,4433591,758
장성 ∼ 담양12.122,9771,37401,243
국가지원 지방도북하 ∼ 담양1611,5135,5321,4824,465
북이 ∼ 고창9.443,8782,1537061,071
북하 ∼ 농암5.778,1475,7481,2381,161
고속도로북평 ∼ 북일11.69,1154,2941,2953,519
북일 ∼ 도암14.912,5075,1051,9755,418
대마 ∼ 삼계16.46,4782,9921,4151,985
삼계 ∼ 황룡13.28,5754,1121,8132,650
장성 ∼ 고창15.962,170999364807

[자료] 건설부, 2001, 도로교통량 통계연보(2000년)

2) 철도교통

1950년 한국전쟁 때 사거리와 신흥역이 피해을 보아 1957년 역사를 새로 지었고 1951년 5월에는 북일면 점골에서 열차가 폭파 전소되는 일도 있었다. 1955년 광주­사거리간 통학열차가 운행되었고, 1960년에는 통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옥정, 안평역이 신설되었다가 1989년 폐지되었다. 1967년 1월 13일에는 사거리역이 백양사역으로 개칭되었고, 1980년부터는 특급열차가 정차하게 되었다. 1987년에는 호남선 철도의 복선화공사가 장성 구간에 준공이 되어 신흥리역이 오산리 죽남 45­10번지로 이설되었다.

영천리 1273-5번지에 있는 장성역은 1972년 12월 21일자로 4급역에서 3급역으로 승격되었고, 1973년에는 고려시멘트 전용선을 개통하면서 역구내가 확장되었다. 1987년 12월 4일 복선철도 개통으로 장안리-안평-구암-용암마을 앞으로 지나던 노선이 장안리-안평-복굴재-신흥으로 변경되었다. 다음은 2001년 현재 장성에서 서울까지 새마을호는 22,400원이고 무궁화호는 15,400원이다. 목포까지의 통일호 열차는 2,500원이다. 역세 현황은 아래와 같다.

장성역 현황

① 부지: 56,375평방미터
② 건물구조
역사: 811평방미터 건물양식: 철근콘크리트 슬라브 2층
③ 구내현황(선로길이)
본선: 상본선-1,191미터, 하본선-1,292미터, 측선-1,553미터
포용량수: 총 190량, 입환가능량수: 133량
④ 승강장 및 하치장 규모
여객승강장: 2개(300미터×9미터)-5,400평방미터
화물홈: 1개(45미터)-하치장(상옥: 675평방미터, 야적장: 200평방미터)
⑤ 열차횟수: 총 75회
여객열차: 64회(새마을호 16회, 무궁화호 44회, 통일호 4회)
화물열차: 11회
⑥ 수송현황(2000년 일평균)
승차인원: 608명 강차인원 646명 화물

2.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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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신의 역사

수백만년 전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후로 인류는 수많은 방법을 동원하여 서로간의 정보를 교환하여 왔다. 최초에 그들은 그림과 빛, 소리 등으로 정보전달을 하였는데 말이 교신수단이 되어오다 그림문자가 설형문자로 발달함에 따라 문자 중심으로 오랜 기간 이어져 왔다.

매체의 측면에서 볼 때 전기통신은 문자와 인쇄술 다음에 등장했지만 정보의 전달, 저장·가공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현대 인류사회를 지구촌 시대로 만들어 가고 있다.

전기통신은 1837년 미국의 S.F.B.Morse(1791-1872)의 전신기기 발명에 이어 1876년 Alexander grahamBell(1847-1922)이 전화를 발명하고 2년후 T.E.Edison에 의해 탄소 송화기가 발명되고 유도코일이 이용되면서 통화거리가 연장되었으며, 같은 해 훅크 스위치의 발명에 이어 1880년에는 수화기만 들면 곧바로 교환원과 연결되는 공전식 전화기가 제작되고 1891년에는 A.B.Strowger에 의해 자동식 다이얼 전화기가 발명되기에 이른다. 이를 개량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전화기가 빛을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통신의 시초는 서기 487년 신라 소지왕 9년 우역제도로 알려져 있으며 기본적 통신수단은 역참제와 파발, 그리고 시각적 통신방법으로 봉수제를 두어 공문서 등을 전달케 하고 변란 등의 위급상황을 속달케 하였는데, 장성에는 나주에 있던 청암역이 장성 단암역(현 장성댐밑)에 옮겨졌으며 11개의 역과 45개의 원이 산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호남지역의 관문으로써 중앙의 정보가 먼저 도착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또한 봉수(烽燧)는 전국에서 다섯개로 구분된 거준(炬準)중 5거준에 속해 있었으나 우정총국의 설치를 기점으로 1884년 우정총국이 설치되면서 각 지역에 우체사와 전보사가 개설됨으로 역참 봉수가 사리지게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10여년 중단되었으나 1895년 신식 우편제도의 도입으로 제기 되었으며, 일제치하의 온갖 수난의 과정을 겪으면서 1945년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우리의 손으로 운영하였다. 그 후 미약하였던 통신은 5·16 군사혁명이후 두 차례에 걸친 통신사업 5개년 계획으로 기간통신의 틀을 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장성군에도 각 면마다 우체국이 설립되고 교환시설을 완비하는 문명의 이기를 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을 이루던 통신은 80년대부터는 각 가정에 전화를 보유하게 되고 '90년대말 부터는 이동통신과 P·C통신에 이어 인터넷에 의한 통신으로 괘를 달리하게 되었다.

장성군에 통신시설이 시작되기는 광복 40년전인 1905. 6. 6(성고시 제442호 8. 10일자)에 읍서면 상초리(현 성산리 520, 성산국교 교정터)에 장성 임시 우체소를 설립, 우편위체 및 우편저금을 실시하고, 이 이듬해인 1906. 12. 1.(통감고시 제101호 9. 23일자)에는 장성 우편취급소로 개칭하여 가격표기 통상우편물을 현 광주우체국으로부터 위탁받아 배달하던 중 의병의 습격으로 일시 폐쇄되었으나 1907. 9. 15일자 복구된 바 있다.

행정구역 개편과 더불어 성산리에서 영천리 매화동 1029번지에 이주하였으며, 장성역이 개통됨에 따라 1909. 12. 16.(통감고시 제123호)에는 장성 우편취급소를 장성우편·전신취급소로 개칭함과 동시 철도전보 및 전신 사송업무 취급을 개시하다가 청사를 영천리 청운동 1045번지에 자리를 잡고 1910. 10. 1일 장성우편국으로 개칭하여 당시 시설로서의 각종 업무가 시작되었다.1915년 장성-광주 및 장성-임곡-송정간 전화 회선이 처음으로 신설되었으며, 1924. 12. 6.(고시 제244호 12. 3일자)에 사가 우편소를 북이면 사거리에 설립하고, 장성우체국에서는 1925. 12. 16.(고시 제334호 12. 14일자)에는 전화가입 신입서를 수리하여 그 이듬해인 2. 16.(고시 제38호 2. 10일자)에는 자석식 교환 20회선이 신설되어 전화교환 및 탁송전보 사무취급이 개시되었다.

그후 청사를 영천리 청운동 1038번지에 건물을 신축 이주하였으며, 1944. 10. 27일 당시 일본인 우편국장 소도광차(小島廣次)가 사망하자 부국장으로 재직하던 김종길(金鍾吉)씨가 자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우편국장에 취임하였으며, 1949. 8. 13.(법률제47호) 장성우편국을 장성우체국으로 개칭하였으며, 그해 다시 방화로 청사가 소실되어 가청사인 영천리 청운동 1033­1번지로 이전한 후 가옥주의 명도 요청으로 영천리 대창동로 이전하였으나 6·25사변으로 청사 및 비품이 전소(全燒)하고, 9·28수복 후 '52. 10. 24일 아군 진주로 말미암아 통신업무를 재개코자 귀속재산으로서 청사규격에 맞는 것을 물색중 '54. 6. 27일 영천리 945의 1번지를 인수하여 업무를 수행하다 '60. 3. 1일 영천리 충무동 1026에 소재하는 구 조흥은행(현 위치)을 매수, 이전하고 '65. 6. 26일 공사비 2백여만원으로 건평 56평에 달하는 증축공사를 한 후 '76. 8. 28자 동측청사를 신축하고 본청사를 '84. 11. 14일 3층으로 개축사용하여 오다 2000. 12. 10. 관내집배 업무통합에 따라 청사를 4층으로 증개축(1,268.8㎡)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체국으로서 면모는 '71. 12. 15일 직제개정으로 사무관국으로 승격된 이듬해에 전화교환의 증설등으로 인원이 증가되어 '72. 4. 10일에 서무계와 업무계로 분리 운용되다, '73. 9. 1일 전신전화계가 1977년도에는 기술계 등 4계의 직제로 운용중 '82. 1. 1일 통신공사 발족으로 서무·지도·업무계로 개편 후 1986년도에 예금보험계로 '97년도에 업무과, 관리과, 지도실로 개편 운용중이다.

통신업무중에서도 우편을 상징으로하는 우체국의 취급업무가 많이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중요부분만을 요약하면 '82. 7. 1일 민원우편제도와 '83. 7. 1일 체신예금·보험업무, '95년부터 은행지로 수납, '98년부터 꽃배달제도·항공권예약·주유권판매 '99년도에 서적직배써비스·전자상거래서비스 등 경영이 다각화 되고 있으며, 특별취급업무로는 방문소포접수, 국제특급우편, 전자우편, 경조우편카드, 우편주문판매 등 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도의 우편취급 물수는 접수우편물이 전년도 대비 12.2%가 증가된 4,320천통으로 취급요원당 1인당 평균 1,028통이며 배달우편물이 15% 증가된 6,891천통으로 1인당 728통이 된다향인으로서의 관리자는 7대 박남규(61-62), 16대(72-76)·21대(88-89) 정진욱, 25대 기명도(97-98) 등이 역임했다.

[표 1-17]통신공사 이전의 교환시설

통신공사 이전의 교환시설로 교환대, 종별, 대수, 설치년월일, 비고를 나타낸 표
교환대종별대수설치년월일비고
20회선단식126.02.16-
100회선단식250.11.026·25로 인해손실
20회선자석식156.10.01-
100회선자석식160.03.14고시 제1168호
500회선공전식666.10.04300회선 증설
700회선공전식472.07.25200회선 증설
시외교환대274.12.31증설
900회선공전식276.07.31200회선 증설
1,300회선공전식477.08.13400회선 증설
1,600회선공전식379.09.16300회선 증설

(2) 읍면소재의 통신

1) 읍 내

① 야은리 전신전화 취급소
1971. 11. 5일 장성읍 야은리 291-1번지에 김양배가 야은리 전신전화 취급소를 설치 운용중 '73. 5. 30일 김남숙에게 양도한 후 전화시설 확장에 힘입어 폐지되었다. 또한 '89. 1. 20일 우편취급소를 개설 운영하다가 '90. 4. 3일로 해지된 바 있다.

② 상오리 전신전화 취급소
1976. 3. 2일 장성읍 상오리에 김명수가 전신전화 취급소를 운영하다 가입구역 확장으로 폐지되었다.

③ 장성성산 우편 취급소
1986. 12. 30일 성산리에 우편업무만을 취급하는 우편취급소를 개설 운영하다 '91. 9. 30일 취급인의 희망에 따라 해지된 바 있다.

2) 면 소재지

① 사가우체국
1924. 12. 6일 사가우편소가 사거리 639-5번지에 설치된 후 '26. 2. 16일 자석식교환 20회선을 신설하고 전화 및 탁송전보를 취급하다가 6·25동란 때 소실된 후 '55. 1. 4일 대지 199평, 건평 55.7평 벽돌조 단층으로 건물을 신축, 우편업무를 수행하다 '65. 8. 16일로 가입전화 100회선 자석식 교환시설한 후 '76. 7. 31일 100회선을 증설하여 통신수단을 이용하였다.

② 삼계우체국
1931. 3. 24일 삼계면 사창리 275-2에 삼계우편소를 설치한 후 '55. 8. 17일에 청사가 소각되어 사창리 408-2에서 가청사를 지어 우편업무를 취급한 후 '65. 11. 22일 사창리 276-3에 대지 208평, 건평 40평 연와조 건물을 신축 '69. 1. 25일 자석식 50회선으로 시작한 후 '71. 5. 31일 100회선으로 증설 79명의 가입자가 당시의 통신을 이용하였다. 또한 '86. 12. 30일 수옥리 435번지에 수옥우편취급소가 개설 '88. 12. 31일 해지되었다. 박남규(朴南圭)가 18년간 당해 국장으로 재직한 바 있으며, '92. 12. 22일 청사를 개축완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③ 동화우체국
1965. 12. 20일 동화면 용정리 668-2에 대지 150평 건평 20평 연와조 건물을 신축하고 장성우체국 동화분국을 개국한 후 '70. 7. 1일 동화우체국으로 승격되고 '75. 12. 17일 자석식100회선이 설치되었다. '88. 12. 31일 벽돌조 슬라브 건물로 개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1.1월 현재 장한기(張漢起)가 13대 국장으로 있으며, 김련(1,4,7代)이 16년간 재직하였으며, 전경오(8代)·기용준(9,11代.)·박영호(10代)가 국장을 역임한 바 있다.

④ 남면우체국
1965. 12. 31일 남면 분향리 624-21에 대지 100평, 건평 17평 벽돌조 건물을 신축하고 장성우체국 남면분국을 개국하고 초대국장으로 성신효가 부임한 후 '70. 7. 1일 장성남면우체국으로 승격되었고, '73. 12. 18일 자석식 50회선과 7개 리·동단위 농어촌 취급소가 개통되고, '74. 10. 23일 100회선 교환설비가 설치되고 '87. 12. 30일 분향리 105­6번지에 분향우편취급소가 개설된 후, '89. 2. 27일 해지되었으며, '91. 4. 8일자 대지 612m에 2층 시멘스라브조의 건물을 신축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2001. 1. 현재 유상철(劉相哲)이 13대 국장으로 있다.

⑤ 약수우체국
1962. 10. 15일 북하면 약수리에 사가우체국 북하분국을 설치한 후 '63. 8. 1일 북하분국을 폐쇄하고 약수리 392-1에 대지 200평 건평 21.5평의 연와조 건물을 건축하고 김재완이 별정우체국을 설립한 후 '71. 8. 23일 100회선의 교환시설이 개통되었고, '90. 1. 10일 김기채에 이어 '97. 4. 25일 서정광이 운영하고 있다.

⑥ 삼서우체국
1963. 8. 10일 삼서면 대곡리 824-4에 대지 194평 건평 21.6평에 단층목조건물을 개축하였고, 심재화가 별정국을 설립한 후 1969년 심상호가 인수한 후 '74. 11. 25일 11개리·동단위 농어촌 전신전화 취급소와 100회선의 교환시설이 설치되었으며, '97. 6. 30일 심승민에게 승계된 후 '99. 5. 6일 최작훈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⑦ 신흥우체국
1964. 10. 15일 북일면 신흥리 203에 대지 107평 건평 25평 별돌기와조 건물을 구축하고 전진홍이 별정우체국을 설립하고, '72. 2. 21일 4개리의 농어촌 취급소와 100회선의 교환시설을 설치한 후 '72. 4. 7일 백근기가 인수한 후 '86. 6. 24일 김현중에 이어 '94. 7. 1일 정환구가 인수 후 당년 12. 2일 청사를 개축하였다.

⑧ 진원우체국
1964. 12. 22일 진원면 선적리 124­2에 대지 437평, 건평 30평 연와가 건물에 이계방이 별정우체국을 설립한 후 '75. 12. 16일 10회선의 자석식 교환기가 설치되고, '77년도 이훈범, '79년도 이종화, '94년도 이맹철, '97년도 이공철 등이 승계하였다.

⑨ 서삼우체국
1966. 12. 20일 서삼면 장산리에 대지 35평, 건평 24평, 부록건물을 신축하고 최성복이 별정우체국을 설립한 후 '71. 1. 17일 이복규가 인수한 후 '75. 12. 12일 가입전화 100회선 자석식 교환시설을 하였으며 '89. 10. 18일 주재경이 인수하여 운영중이다.

⑩ 북상우체국
1965. 11. 15일 북상면 덕재리 722-1에 대지 132평 건평 23.5평 연와조 건물에 변수연이 별정우체국을 설립하고, '66. 7. 25일 전신전화가 개통되어 통화 및 전보업무가 개시한 후 '75. 10. 1일 북상면 수몰에 따라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북하면 신성리에 건물을 신축하고 우체국을 이전하여 업무 수행중 '88. 1. 1일 변동화에게 승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⑪ 황룡우체국
1962. 8.1 5일 황룡 전신전화취급소를 개설하고 '66. 6. 3일 황룡취급소가 시내전화 280번으로 변경된 후 월평리 139에 대지 71평, 건평 22평 벽돌조 건물인 전 양약방을 개수하여 신봉섭이 별정우체국을 설립한 후 '70. 5. 16일에 장군암이, 동년 12. 5일에 고재근이 인수하고, '71. 12. 20일에 황룡면내 각 리동단위 농어촌 취급소가 설치되었으며, '87. 8. 12일 청사를 확장 개축하고 당해년 12. 30일 황룡리 27­3번지에 원황룡우편취급소가 개설된 후 '91. 1. 10일 해지하였다. '98. 12. 31일 고재근의 정년으로 설동석이 추천국장으로 되었다.

⑫ 제75군사 우체국
1994. 12. 21일 상무대 통신업무 지원을 위해 삼서면 학성리 612-1번지에 75군사 우체국이 이전되어 감독국 관할이 서광주우체국에서 장성우체국으로 변경되었다(관리93211-1880.94.11. 19.)

(3) 전기통신공사

1982. 1. 1일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발족하여 국민에 미치는 통신에 대한 체감은 급속도로 확산되어 갔다. 당해년도 4월에 전자특수서비스와 12월에 무선호출써비스가 시행되고 83년도에는 공중통신망이 개방되는가 하면 국제자동전화(IDD)가 개시되었다. '84년도에 시외자동전화망이 완성되고 '87년도에는 국가적으로 1,000만 회선이 돌파되는 등 희망하면 전화를 가설할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해 갔다. '82. 12. 5일 장성사업소로 발족한후 '84. 1. 1일 영천리 1485-1에 대지 3,361㎡의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연건평 2,418㎡)규모의 국사(局舍)를 신축하고 장성전신전화국으로 승격된 후 '90. 1. 5일로 국명이 장성전화국으로 변경되었으며, 같은 해 2. 12일 114안내가 북광주로 이관되고 '98. 12. 31일 전화국의 관장권한이 북광주전화국 장성분국으로 편제되었다가 '99. 7. 1일 광산전화국 장성전화국으로 변경되었다.

'97년 이전까지만 해도 137명의 사원이 영업과를 중심으로 교환과·전송과·지원과등 4과 편재에서 '98. 8. 1일 영업과를 마케팅과로 교환·전송을 시설운용과로 통폐합하여 고객위주로 통신서비스를 제공하였으나, 북광주로 통합한 후에는 인원은 58명으로 줄고 마케팅과와 시설운용과의 2과 편제에서 송정전화국으로 귀속된 후에는 인원은 40명으로 감축하면서 고객서비스과와 시설운용과의 편재로 변경 운용되고 있다.

공전식 1,600회선을 운용하면서 전화 1대 가설한다는 것이 하늘의 별따는 것보다 어려운 시설을 겪어오다 전국 광역화 사업 추진에 힘입어 우리나라가 자체 생산된 전자식 교환기종인 TDX 1-A가 장성에 시설된 것은 '87. 6. 11일 4,700회선으로 읍·면에 설치되어 있는 전화 취급소가 일반가입전화로 면모를 달리 하게 됐다. 시설이 9,244회선으로 증가되여 이를 392국으로 수용하고 393국 및 394국은 TDX-1B기종으로 '90. 5. 30일 1,160회선과 이듬해인 '91. 2. 1일로 6,400회선을 증설되고 매년 증설하여 2000년 말 17,500회선으로 확장되었다. 또한 395국은 TDX­1B의 시설로써 '98. 7. 1일 700회선을 낙후시설 지역인 삼계면 일원과 동화면 서양리의 가입자에게 대체시켜 좀더 원활한 소통이 되도록 하였다.

2000년 말 장성전화국의 전화시설 규모는 4개 국번으로 27,296회선의 시설을 보유하면서 수용율이 83.9%로써 22,761가입자로 100인당 보급율은 40.2대에 이른다.

분지국사(分岐局舍)는 전화국에 거리상 기계시설을 다량보유하기 어려움으로 이를 분산 수용하기 위한 국사로써 '84년부터 시작으로 각 읍면 요소요소에 간이 국사(局舍)를 신축하여 운용하여 왔다. 현재로써는 19개의 국사내에 15,875의 가입자 시설이 운용되고 있는 내역은 [표 1-18]과 같다.

전화국의 특별상품과 이용회선은 한국통신이 운영하는 인터넷인 KORNET 281회선과 다양한 서비스를 하나의 전화기를 통하여 제공받을수 있는 ISDN(종합정보통신망) 53회선을 유지하고 있다.

시외,국제통화를 제공하는 사업자로서는 1994도에는 DACOM과 1998연도부터 ONSE통신과 경쟁하고 있으나 한국통신을 이용하는 고객이 시외전화가 98.15% 국제전화가 89.3%를 점유하고 있어 사실상의 독점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표 1-18]자국 분기국사 시설(2000말 현재)

[표 1-18]자국 분기국사 시설(2000말 현재) - 국사명, 교환시설수, 위치, 건축 연월일, 대지면적, 건축면적, 모국과거리를 나타낸 표
국사명교환시설수위치(주소)건축 연월일대지면적 (㎡)건축면적 (㎡)모국과거리 (km)
남면1,324남면 분향리334­2886.12140488.4
신흥968북하면 박산리341­184.07994811.6
약수932북하면 약수리 361­384.07984819.7
진원972진원면 선적리 393­184.07165487.7
삼계3,508삼계면 사창리 240­1386.121864814.6
삼서1,904삼서면 대곡리 842­1086.121576017.5
덕산384삼계면 덕산리 298­293.111794015.5
동화776동화면 월산리 37793,103665210.9
상림512진원면 용산리 290­1693.123125212.1
북이2,068북이면 사가리 641­289.0632110718.3
장산616서삼면 장산리 32191.09179526.9
서양1,216동화면 용정리 619­590.09311528.7
필암648황룡면 아곡리 403­390.1327529.1
덕성504남 면 덕성리 374­190.12228527.3
신성240북하면 신성리 14195.122584021.9
문암256북일면 문암리 30095.124074013.8
성산1,302장성읍 성산리 240­192.08357523.9
화산408삼계면 화산리 928­1093.14025221.6
대악424북하면 대악리 246­593.13312511.9

(4) 공중전화관리 장성영업센터

서민의 통신에 크게 기여한 바 있는 공중전화 부문에 있어 무인공중전화 유지보수 업무 수탁을 위해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자회사로 공중전화관리 주식회사가 '80. 1. 1일 창설된 후 '81. 8. 1일 전라지사가 설립되고 '96. 7. 1일 영천리 1273-189번지에 공중전화 장성영업센터가 발족되었다.

'97. 6. 22일 자급공중전화기 유통업 지정에 따라 2001년 현재 장성군 관내 550대의 자급제 공중전화 및 부스 설치업무와 아울러 시내외 겸용 3대, 카드사용 274대, 주화카드겸용 28대, I·C공중전화기 3대의 유지보수에 임하고 있다.

(5) 미래의 통신상

통신의 변화는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에서 정보교환으로 변하면서 무선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터넷 및 이동통신의 비약적인 성장과 서비스의 자유화가 실현되면서 Globle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기존의 유선(전화)을 중심으로 한 통신 사용방식을 무선 위주의 사용방식으로 변화시키고 있어 1999. 10월에는 이동통신 가입자수가 유선통신 가입자수를 앞질렀다.

앞으로 IMT-2000의 등장으로 이동통신이 광대역화될 전망으로 유무선사업자의 합병이 이루어지고 있는바 SK 텔레콤과 신세기 통신, 한국통신 프리텔과 한솔 M.COM 등이 좋은 예이다.IMT-2000은 인터넷과 이동통신이 결합된 무선 인터넷으로 통신이 앞장서서 지방과 도시 아울러 세계가 장성의 농촌마을과 함께 공존공영할 것이라고 믿는다. (김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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