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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메뉴 정의
5차 메뉴 정의
  • 1. 불교의 전래와 백양사
  • 2. 역사속의 고승기행 및 행적
  • 3. 불교의 활동 및 포교

1. 불교의 전래와 백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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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침류왕 2년(384)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시기는 백제의 수도가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자리잡고 있던 때였다. 백제의 수도로부터 거리가 먼 장성지역까지 불교가 전래되기에는 기나긴 세월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백제는 문주왕 때(479년) 웅진(현재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기었고, 다시 성왕 때는(538년) 사비성(현재의 부여)으로 도읍을 옮김으로써 백제의 수도에서 장성 지역까지의 문화 전파 경로가 상당히 단축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불교문화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단계에 이르렀고 특히 사비천도 이후에는 백제의 불교가 크게 융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5방제(方制)가 실시되고 남방(南方)의 경영이 본격화되면서 불교문화의 전파가 장성 지역에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장성 지역은 비록 백제의 변방이기는 하나 이미 커다란 고을을 형성하였으므로 늦어도 백제말기에는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다. 북쪽으로 이웃하는 정읍과 김제 지역에서 백제의 불상이 발견되어 조사된 바 있어 장성 지역 역시 백제 불교문화의 유물이 확인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러나 현단계에서는 아직 이것을 검증할 만한 증거가 없으므로 고대사회에서 비교적 왕도(王都)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자리잡은 장성 지역은 지리적인 여건으로 말미암아 불교문화의 접촉이 상대적으로 더디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전남지역에서는 가장 북쪽에 위치한 장성 지역은 인접한 정읍과 김제 지역에 전파된 불교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지리적인 유리한 여건으로 전남의 다른 지역에 비해 우선하였을 것으로 상정된다.

장성지역의 불교와 관련된 문헌 기록은 비록 후대의 것이지만 백양사가 가장 먼저이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에 여환선사(如幻禪師)가 사찰을 창건하고 절 이름을 백암사(白岩寺)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데서 비롯된다. 백암사는 고려 덕종 3년(1034) 중연조사(中延祖師)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고쳐 정토사(淨土寺)라 불렀다. 고려 충정왕 2년 진각국사 (覺眞國師) 복구(復丘)가 3창 하였으며, 정조 10년 환성선사(喚惺禪師)가 중창하였고, 조선말기 고종 원년 도암선사(道巖禪師)가 4창 하였다. 조선 개국 526년(1917) 만암선사(曼庵禪師)가 5창 하였다. 이후 백양사는 자비와 지계의 엄정함을 이은 환응탄영의 맥을 이어 교편을 잡고 치문의 경책을 부지런히 펴 석전한영선사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 고불총림(古佛叢林) 백양사로 우리나라 5대 총림의 하나로 사격을 유지하고 있다.

백양사의 사찰 명칭의 변화를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7-1] 백양사의 사찰 명칭 변화

백양사의 사찰 명칭 변화 - 사찰명, 시기, 관련스님, 출전 제공 표
사찰명시기관련스님출전
白巖寺창건­1034(?)異僧/ 如幻[白巖山淨土寺橋樓記]
淨土寺(淨土禪院)1034(?)­14세기 [白巖山淨土寺事蹟
白巖寺15세기 [白巖寺轉藏法會당사방
淨土寺16세기­19세기중반 {新增東國輿地勝覽}
白羊寺19세기 후반曼庵[重修板刻記]
古佛叢林 白羊寺1996년西翁, 智詵

백양사에 소속된 암자의 초창연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운문암(雲門庵) 초창 고려 충정 2년 각진국사(覺眞國師)
약사암(藥師庵) 동 3년 동
물외암(物外庵) 동 동 동
영천암(靈泉庵) 동 동 동
청류암(淸流庵) 동 공민 원년 동
천진암(天眞庵) 동 조선 인조 22년 백곡선사(白谷禪師)
금강암(金剛庵) 동 고종 29년 만암선사(曼庵禪師)
서양암(西陽庵) 동 41년 치호수좌(致浩首座)
쌍계루(雙溪樓) 동 고려 공민 19년 청수선사(淸 禪師)
2창 조선 고종 37년 금해선사(錦海禪師)

장성지역의 불교나 사찰은 백양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백양사를 살펴 봄으로써 장성불교를 흐름을 짚어 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토사로 불리우던 절이 백양사로 불리우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이어져 온다.
조선 선조 7년(1574) 환양선사(喚羊禪師)가 백양사라 개칭하였다. 환양선사는 법화경을 독경하며 기도하였는데, 백학봉 밑에 사는 흰 양이 암자로 찾아와 무릎을 꿇고 스님의 독경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돌아가곤 했다. 그러기를 몇 달, 어느 날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스님의 독경소리에 깨달음을 얻어 축생의 몸을 벗고 이제 사람의 몸으로 환생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하며 절하고 물러났다. 스님은 이를 이상히 여겨 다음날 아침 뒤산을 산책하던 중 흰 양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꿈을 이해하였다. 그 후로 스님의 높은 법력에 의해 축생인 양을 제도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백양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백양사 근처에는 숱한 외적과 전쟁을 치루어 민족의 한이 서려있는 입암산성이 있다. 이 산성에서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1592년 7월 20일 장성 남문(현재의 북일면 오산)에서 김경수(金景壽), 기효간(奇孝諫), 윤진(尹診) 등이 격문을 각 고을에 보내어 의병을 일으켜 김경수를 맹주로 추대하고 김제민(金齊閔)을 의병장으로 삼아 북으로 진군하여 직산, 진성, 용인 등지에서 왜군을 격파한 남문창의 의병항쟁을 일으켰다. 이 남문창의에 의승장(義僧將)으로 처능(處能), 자혜(慈惠), 의관(義寬), 계묵(啓默), 덕인(德忍), 처한(處閒), 학인(學仁), 계한(戒閒), 혜인(惠仁) 등 9명의 승려가 참여했다. 또한 동학농민전쟁 당시 백양사 스님들이 다수 참여해 농민군과 함께 싸워 순절하여 역사와 민족과 함께 해온 백양사의 의절과 기개의 전통을 이었다.

백양사의 또 하나의 소중함은 가장 엄격하고 전통적인 불교 재의식(齋儀式)이다. 관조부, 전경부, 정근부, 송주부, 범음부가 독립된 의식으로 집전되며 여기서 정근, 송주, 범음은 거의 독보적인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는 유일무이한 전통 불교의식이다.

백양사는 예로부터 훌륭한 선지식인 큰스님들이 백양사 입구에 줄지어 있는 고목나무들처럼 끊이지 않았으며, 백양사의 운문암은 고려 각진국사를 비롯 조선시대 소요태능, 편양언기, 연담유일 등 조선말기 불교를 이끌어 왔던 백파, 학명스님, 그리고 용성, 인곡, 석전, 만암, 고암스님 등 암울했던 일제시대 우리나라 불교법통을 이어온 고승 선덕 스님들이 상주수행하여 수행근본도량으로 자리하고 있다.
백양사에는 산내에 12암자가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소되었다가 최근 대부분 복원되었다. 다만 묘련암만 빈터로 지금도 남아 있는데, 이곳에는 장서각이 있었다고 한다. 전란으로 소실되었던 쌍계루를 1985년 복원하였다.

백양 12경으로 쌍계루, 운문암, 영천암, 약사암, 감로천, 대웅전, 비자림, 비림, 용수탕, 천진암, 청류암, 봉황대가 있다.

백양사 12암자는 운문암, 청류암, 물외암, 약사암, 영천암, 천진암, 묘련암, 백련암, 서양암, 금강대, 지장암, 청량원이다.

백양사는 13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면서 숱한 고난과 전란 속에서도 민초들과 함께 해 온 호남불교의 요람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백두대간이 남으로 치달려와 그 신령스러운 기운이 백암산에 치솟아 학이 날개를 편듯한 백학봉의 수려하고도 장엄한 기상의 품에 안겨 자리잡고 있다. 백양사 경내에는 고풍을 자랑하며 단아하게 지어진 극락보전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맛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대웅전, 사천왕문 등 지방 유형문화재가 있어 선조들의 빛나는 문화의 숨결을 직접 느낄 수 있다. 또 천연기념물 제153호인 비자나무숲과 차밭이 펼쳐져 있어 부드럽고 온화한 기품이 있다.

백양사는 1996년 3월 31일 열린 제120회 조계종 종회에서 고불총림으로 승인됨에 따라 이 지역 불교계의 활성화는 물론 수행도량으로서의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백양사의 총림지정 배경은 개혁종단 출범이후 여러가지 법과 제도를 제정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본 말사의 자치권이 약화된데다 왜색 서구문화범람과 더불어 타락한 승풍을 진작하고 민족정기를 함양하기 위한 것이다. 총림이란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 등을 구비해야만 자격요건에 해당되며 명실공히 백양사가 종합수행도량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 셈이다.

2. 역사속의 고승기행 및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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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백양사와 대흥사, 선운사는 한 문중으로서 한국불교 전통을 이어왔다. 근대 종정스님을 다섯 분이나 배출한 전국 제일의 선불장이며, 또한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한국불교의 법맥을 이어온 만암스님, 지금도 전 종정이신 서옹대종사가 수행근본도량인 운문암에 주석하면서 끊임없이 후학에게 가르침을 펼치고 있다. 이와같이 수행과 교육을 으뜸으로 화두삼아 정진하면서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면 크나큰 법력을 펼쳐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한 역대 대선사들은 수행과 실천의 장을 펴는데 주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백양사의 오늘을 있게 하는 데는 조선후기 이래 백양사를 이끌었던 환성지안(喚醒志安: 1664­1729), 설파상언(雪坡尙彦: 1707­1791),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 양구계선(羊岳桂璇),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 한양용주(漢陽龍珠), 설두유형(雪竇有炯: 1824­1889), 금담서관(錦潭瑞寬: 1824­1904), 환응탄영(幻應坦泳: 1847­1929) 등의 승려들이 주목된다.

또한 영각(影閣)에 모셔진 여환, 각진, 중연, 연담, 심송, 해운, 덕운, 경허, 경담, 화운, 응운, 취운, 보경, 금해, 인담, 성담, 혜은, 천경, 호암, 양악, 인암, 문곡, 도암, 한양, 덕송, 청계, 봉성, 학산, 만암종헌, 봉하장조, 묵담 스님과 부도밭에 모셔진 만암, 소요, 묵담, 지백, 경월, 서산, 모운, 무가, 서운, 봉하, 석산, 추강, 해담 스님과 비석으로 남겨진 금해, 화운, 학산, 양악, 연담, 봉하, 학산, 석만, 탑을 남긴 취운선사 등도 백양사에서 손꼽히는 승려들이다.

또한 근래에 백양사에서 배출된 한국불교를 이끌었던 고승들을 살펴보면, 대한불교조계종 제2대교정 송만암,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 이서옹, 한국불교태고종 초대종정 국묵담, 총화종 초대종정 최추강 스님들이 백양사 출신으로 종정을 지낸 스님이다.
이 가운데 특히 만암종헌(曼庵宗憲: 1875­1957)은 오늘날의 백양사를 있게 한 장본인이다. 그의 활동과 사상을 살펴 보기로 하자.

"우선 중이 되라. 중이 되기 전에 부처를 말하지 말라."
이것은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지낸 백양사 출신 송만암(宋曼庵) 스님의 말씀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머리를 깎았다고 다 스님이 아니요, 먹물 옷을 입었다고 모두 승려일 수 없다. 겉껍데기만의 승려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완전한 인격을 갖추어 속알맹이가 승려가 되어야 비로소 명실상부한 스님이라는 것이다.

송만암은 일제시대와 해방, 한국전쟁과 불교분규 사태의 격동기에 한국 불교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숨막히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수행 위주의 산중불교 본래의 면모를 되찾으려는 노력과 함께 대중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을 계몽하려는 교육사상을 지닌 참다운 보살정신의 실천가였다.
송만암은 이름이 종헌(宗憲), 호가 만암으로 고종 13년(1876) 1월 17일 전북 고창군 고창읍 중거리에서 아버지 송의환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성장한 시기는 나라가 안팎으로 소용돌이에 휩싸여 가던 어려운 때였다. 이러한 시대적 격동기에 만암은 개인적으로도 커다란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어머니마저 열한 살 때 돌아가셔서 고아의 신세가 된 것이다.

그가 절에 들어간 것은 열한살 때였다. 그의 허약한 몸과 수명이 짧을 것이라는 어느 스님의 관상담에 걱정이 된 어머니가 그를 백양사에 맡긴 것이다. 그는 백양사 취운도진(翠雲道珍) 선사를 은사로 머리를 깎게 되었다. 열여섯 살 때 순창 구암사의 불교전문강원에 들어가 당대의 대강백 석전 박한영 스님 문하에서 경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후 백양사에 돌아와 운문강원에서 환응 강백에게도 수학해 일대 교학을 두루 섭렵했다. 이러한 이력으로 스물 다섯에 환응 스님에게 강석을 물려받아 이로부터 강사로 나서게 되었다. 특히 합천 해인사에서의 특강은 그 이름이 전국에 널리 알려져 많은 학인 스님들이 일부러 해인사를 찾기도 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이 단행되어 조선왕조가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자, 낙심한 만암은 음울한 심정으로 다시 백양사로 돌아와 사찰에서 대중교육을 실시했다.

일제하의 한국 불교는 크게 두 흐름으로 나누어진다. 그 중 하나는 일본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현실에 적응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통불교를 수호하기 위한 호법투쟁과 함께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것이었다. 한일합병이 이루어지던 무렵 시세를 재빠르게 간파한 이회광(당시 해인사 주지)과 그의 일파들은 조선 불교의 장래를 위해서는 일본불교와 연합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당시는 왜색불교의 영향이 이미 침투하여 승려들 중에는 긴 머리에 양복을 입고 개화장을 짚으며 여자와 동거하는 등의 행동을 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일부 승려들이 이회광의 주장은 조선불교를 일본에 팔아 넘기는 행위이며, 태고보우 이래 임제계통의 법맥을 뒤바꾸는 반종교적 행위라고 하면서 반대하게 된다. 당시 호법을 주장하는 세력에는 선암사의 장금봉, 김학산과 화엄사의 진진응, 범어사의 오성월, 한용운 등과 함께 만암의 스승인 백양사의 박한영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1911년 6월 3일 조선사찰령 전문 7개조를 제정하고 같은 해 7월 8일 사찰령시행규칙 8조를 반포했다. 이리하여 조선불교는 선교양종 30본산제로 바뀌게 되었다. 전남에서는 처음에 장성 백양사, 순천 송광사와 선암사, 해남 대흥사에 본산이 인가되었고, 나중에 구례 화엄사가 추가되어 5본산이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만암은 불교가 시대적 조류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교학진흥과 교육이 중요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백양사 내 청류암에 광성의숙을 설립했다. 청류암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 시기에 전봉준이 하룻밤 묵어 가기도 했고, 구한말 항일의병 활동기에는 의병들이 드나들기도 하는 등 백양사 내 사회운동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이곳에 의숙을 개설한 만암은 50­100명 단위로 학인 스님을 모아 선(禪)·교(敎)·율(律)의 겸수와 함께 외전(外典)도 가르쳤다. 이 때 외전으로는 구한말의 역사와 지리, 측량법 등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민족주의적이라고 하여 일제 관헌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교육에 대한 만암의 열정은 이후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는 승가교육에 대한 원력으로 1929­1932년까지 4년간 불교계에서 세워 운영하는 중앙불교전문학교(현재의 동국대학교 전신)의 교장을 맡았으며, 1947년부터는 육영사업을 목포에서 시작하여 송정리에 정광중·고등학교를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만암은 중창불사의 가람수호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일제치하에서 퇴락한 백양사의 중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는 1917년에 백양사 중건을 위한 모연에 들어가, 그 이후 40여 년간 이곳에 주석하면서 무려 여섯 차례의 중건불사를 일으켰다. 그의 사찰 중건불사는 당시 다른 사찰의 불사와는 사뭇 달랐다고 한다. 그는 늘 사찰의 자급자족을 주장했는데 그 방편으로 양봉을 강습하여 꿀을 제조했고, 짚신을 만들었으며, 죽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수익을 모두 중창불사에 보태게 했던 것이다. 뒷날 문도들이 이것을 '반선반농(半禪半農)'이라고 불렀다.

사찰의 도량불사나 대중생활을 통해 보여 준 만암의 수행하는 자세는 오늘날까지 백양사에 이어져 내려온다. 그는 늘 운력이나 공양을 대중과 더불어 했다. '반선반농'으로 표현된 대중노동은 그에게는 수행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또한 조석예불과 함께 뒤이어 참선을 하도록 한 백양사의 전통도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 외에도 일반적으로 새벽에만 하는 도량석을 저녁에도 하도록 한 것은 그에게서 비롯된 백양사의 전통으로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만암은 1947년 부처님 성도일에 호남 일대 20여 개의 사찰, 암자, 포교당을 규합하여 백양사에 한국 불교 최초로 [호남고불총림]이라는 종합적인 수행도량을 결성했다. 그는 엄격한 계율과 법식을 되찾아 변질된 한국불교를 바르게 회복하여 불타의 위대한 광명과 고승들의 행적을 계승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고불회(古佛會)'를 조직했는데 호남권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다.

8·15 해방 이후 한국 불교계도 새로운 변화의 추세 속에서 좌우익의 대립으로 점차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48년 당시 교정(敎正)이던 박한영 스님이 입적하자 뒤를 이어 만암이 교정에 취임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 불교는 왜색불교의 잔재로 말미암아 많은 문제와 과제를 안은 채 개혁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선 종명을 '조계종'으로 환원하고, '교정'을 '종헌'으로 바꾸었다. 종헌의 내용도 대폭적으로 개정했다. 그는 평소의 소신대로 승가를 교화승(대처승)과 수행승(비구승)으로 구별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비구측의 다소의 긍정적인 반응이 있었으나 대처승측의 반발은 거셌다. 그리하여 1952년 양측이 모인 가운데 통도사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회의를 갖게 되었다. 만암은 이 회의에서 "그동안 사찰에서 소외되었던 수행승에게 일부 사찰의 운영을 맡기자"고 제의하며 "적어도 3대 사찰(해인사, 통도사, 송광사)만이라도 비구승측에 넘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만암의 제의는 비구승측의 환영과 대처승측의 거부로 합의점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 뒤 불국사에서 또 한 차례 회의를 가졌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와중에 1954년 5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 유시는 비구승측에게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비구측은 이를 계기로 '불교정화'의 기치를 높이 들고 연일 승려대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학원에서 같은 해 9월 28­29일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가 열려 종정에 송만암, 부종정에 하동산, 도총섭에 이청담, 총무원장에 박성하 스님을 선출했다. 그런데 당시 이들은 '정화 방법'을 둘러싸고 다소간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즉 만암과 효봉 스님 등은 '정화는 비구승들이 수도할 수 있는 수행도량을 얻는데 그 목적이 있으므로 점진적으로 이 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청담 스님 등은 이와 같은 좋은 기회는 다시 없으므로 강경하게 이끌고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양측은 점차 극단적인 대립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에 조계종의 종조(宗祖)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것은 불 속에 기름을 부은 셈이 되어 버렸다. 이불화, 이종익을 앞세운 비구측이 조계종 종조를 보조국사(普照國師)로 해야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정화운동은 단순히 대처승측의 절 몇 개를 할애받거나 또 이들을 절에서 물러나도록 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잘못된 종통(宗統)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조계종조는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知訥)이며 태고보우 법통은 조선중기의 중관해안(中觀海眼)이 위조했다는 것이다. 이에 이효봉, 하동산, 이청담 스님 등이 보조국사종조설을 지지하고 나섰다. 당시 총무원장 이청담 스님은 이에 대해 성명까지 발표하여 보조종조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전통적인 태고보우 법통을 따르는 만암 스님은 "이것은 환부역조(換父易祖)"라면서 정화운동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고 백양사로 내려와 버렸다. 그리하여 같은 해 비구승측은 만암 스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동산 스님을 종정으로 선출했다. 비구승측과 결별한 만암 스님은 그 후 백양사에 주석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1957년 1월 10일(음력 1956년 12월 15일) 세속 나이 81세, 승려 나이 71세로 만암은 열반에 들었다. 떠나시기 7일 전에 문도들에게 후사를 당부했다. 입적하던 날에 작설차를 마시고 손발을 씻고 새 옷을 갈아입고 11시 30분 "눈이 많이 내려 올해는 풍년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 가셨다. 다비 후에 사리 8과가 출현하자 이를 거두어 백양사와 제주도에 봉안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억불책 속에서 민간에서만 신앙되던 불교,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닥쳐온 이민족의 식민지 지배 속에서 스스로를 재정립해야만 했던 불교, 해방 직후 혼란의 와중에서 스스로도 혼란과 대립에 빠져들었던 불교, 그 모든 시기에 만암은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으며, 또 수행승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불교가 발전하려면 이판(理判, 修行僧)과 사판(事判, 敎化僧)을 분명히 하고 이판은 선리(禪理)를 탐구하고 사판은 교화활동에 힘써야 한다"고 한 그의 말은 오늘날의 불교계에서도 되새겨 볼 만한 말이다.

3. 불교의 활동 및 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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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6월 3일 일제에 의해 조선사찰령이 반포되면서 우리나라 불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큰 절의 주지를 조선총독이 임명하고, 본말사제를 시행하는 등 일제 식민지 불교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백양사는 제1세 주지로 김환응이 1912년 12월 19일 인가되었다. 1915년 이후 제2차로 30본산주지가 인가되었다. 백양사도 이때 인가되나 주지명, 인가연월일 등은 밝히지 않고 있다.
1913년 당시 각 본말사 별 승니수를 표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표 7-2] 본말사 별 승니수

본말사 별 승니수 - 본말사명, 승니수 제공 표
본말사명승니수
선암본말사140
송광본말사297
백양본말사193
화엄본말사102
대흥본말사160
천 은 사70
전국 총합계6,656

1915년 3월 30본산연합사무소 상치원 제1회 총회에서 중앙학림 설치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학림학생은 각 본말사의 등급을 따라 모집하기로 한바 백양사는 6등지로 1인, 경비분배도 본말사의 등급에 따랐는데 백양사는 6등지로 31원 50전씩 분배되었다. 1917년 당시 백양사 본말사 승니 및 신도수는 아래 표와 같다.

[표 7-3] 백양사 본말사 승니 및 신도수

백양사 본말사 승니 및 신도수 - 사찰, 승, 니, 남신도, 여신도, 비고 제공 표
사찰남신도여신도비고
백양본말사18553424791
30본산합계5,87486881,48636,413

1920년 승려의 자각과 교육의 발전을 위해 각 본사에서 단독 혹은 연합으로 중등정도의 교육기관 즉 지방학림을 설립하게 되었다. 백양사는 백양사지방학림을 설립하였다. 각 본산에서 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초등교육을 시행하였는데 백양사에서는 광성의숙(廣城義塾)이 그것이었다.
1930년 당시 백양사의 사유재산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토지

답 77,766평 12,462엔13
전 23,951평 609엔03
대 1,356평 137엔53
계 110,543평 13,208엔

2) 산림
면적 1,321정4반6무
이밖에 백양사는 아래와 같은 특산물에 의하여 1년에 상당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비자수(연산액 20여석. 500엔)
자하다(연수입 100엔)
락피=참나무껍질(연평균수입 3 400엔)
죽재(연평균수입 100여엔)
시목(연수입 100엔)
은행(연수입 4 5석. 100여엔)
복분자 = 딸기(수입 100여엔)
기외 산영 ·도리·한매·목환자 ·양예 ·목단·국약 등

1945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불총림 백양사'란 현재의 사격을 있게 한데는 1947년 '호남고불회'의 활동이 중요하다. 호남고불회의 취지와 규칙과, 강령, 참여대중 등을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호남고불회취지서
대범 바다는 백천의 흐름을 얻어 그 깊음을 이루고 태산은 흙덩이의 모임을 인하야 그 높음을 얻나니, 나라도 또한 그러하야 만백성의 정신과 노력과 모든 업무가 아니면 그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 명확한 사실인 동시에 일본의 도적이 물러간 오래된 금일까지 아직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이루지 못함을 생각컨댄 안으로 골수에 맺히는 원한과 밖으로 다른 나라의 민족을 바라볼 때에 그 부끄러움을 가히 머리를 들 수 없는 경우라. 우리의 어느 직업의 장소거나 어느 실업하는 방면이거나 무슨 교 무슨 교를 막론하고 소위 체면을 살필만한 정도에는 밥과 잠을 달게하기 어려울 시기라. 이러함으로 우리 부처님의 평등하며 광대하신 정신과 또한 일백번 꺽어도 굴치 않는 강력한 힘이 구족하옵신 아래에 이 고불회를 발기함은 우리 조선이 고국의 강토를 회복하여 완전한 나라를 경영하는 가운데 또한 우리 불교의 새정신의 힘을 들어 완전한 나라를 성립할 정신으로 한 가지 나아갈 취지를 의미한 바라. 옛날에 혹 불교와 유교간에 불화함이 있었고 요새는 신구의 생각이 같지 못함이 있으나 우리 조선의 금일 정세로 앉아 볼 진댄 가위 한 가지 배에 올라 폭풍을 만난 격이라. 서로서로 손을 잡고 힘을 모아 이 풍랑을 면할 한 마음 한 뜻 뿐일지라. 친소와 원근을 생각지 마시고 우리 조선 나라를 속히 이루어 많은 행복을 쌓는 것이 곧 불제자의 의무며 또한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원력이오니 불제자 되시는 여러분은 등한히 생각지 마시고 많이 참예하여 주심을 바래고 바래옵니다.

불기이구칠사년정해납월성도재일
호남고불총림
목양산인 종헌근서

* 규칙
고불회에 입회하시는 분은 첫째에 명예회원이니 다만 회를 찬성하고, 둘째에 특별회원이니 일시에 보조하며, 셋째는 통상회원이니 매년 백원씩 의무가 있습니다.

장성군 서삼면 봉련리 마우송화 금 천원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 정보광명 금 천원 상
장성읍 영천리 윤홍련 상 금 오백원
리은화 상 금 오백원 리대원경 상 금 오백원
장성군 삼서면 홍정리 리현산 금 오백원
순천읍 김룡현 금 오백원
장성읍 단광리 정광명장 금 오백원 상
광주부 사정 최성덕화 금 오백원 상
광주부 금동 림헤국 금 오백원 상
동부부동동 정혜숙 금 오백원
김대지행 장성군 장성면 일평리 금 오백원 상
장옥연 본읍 단광리 금 오백원 상
장성읍 영천리 김홍중 상 금 삼백원
리안옥 상 금 삼백원
장성읍 영천리 김보남 금 삼백원 상
오성순 금 삼백원 상 천복순 금 삼백원 상
권희숙 금 삼백원 상 김숙자 상 금삼백원
문영님 금 삼백원 상 김영례 금 삼백원 상
고대원행 상 금 삼백원 리복전 상 금 삼백원
김은수 상 금 삼백원
정읍군 입암면 구면리 김봉현 금 삼백원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김현자 상 금삼백원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 김요춘 금 삼백원
장성읍 영천리 전호영 금 백원 상
리범례 금 백원 상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 송헤헌 금 백원 상
경성부 사직정 진보각심 금 백원 상
천짐암 김성렬 금 백원 상
최성율 금 백원 상 김성림 금 백원 상
김상명 금 백원 상 리진원 금 백원 상
리영신 금 백원 상 김영수 금 백원 상
김성인 금 백원 상 김상주 금 백원 상
박경흔 금 백원 상 김행심 금 백원 상
최상법 금 백원 상 리경법 금 백원 상
김상덕 금 백원 상 조성연 금 백원 상
정경신 금 백원 상 전경봉 금 백원 상
신경남 금 백원 상 권도영 금 백원 상
장성군 장성면 일평리 리복순 금 백원 상
장성군 북이면 신평리 박귀용 금 백원

② 호남 고불총림 결성성명

이 결성성명은 백양사 문건에서는 확인하지 못한 것이나 1967년에 간행된 『만암문집』과 『고불총림백양사』그리고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추대식』팜프렛에 소개되어 있다.

우리 나라가 이조 말의 폐정을 틈타 제국주의자의 침략을 받아 마침내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나라가 식민지가 된 상황 속에서 우리 민족혼까지 거의 소멸되기에 이르렀으며, 또한 불교도 식민지 불교가 되어 우리 나라 전통의 형식과 정신이 말살되어 나라가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차에 다행히 천리의 순환을 얻어 일제가 물러간 뒤 강토를 되찾아 건국의 기운이 짙어가는 가운데 한갓 불교는 이제까지도 먹구름이 끼어 새벽 빛을 보지 못하므로 오직 부처님의 대위덕 광명과 우리 나라의 모든 고승선덕의 빛을 이어받아 한 등이 백천 등에 불을 당기듯 마음 속 가득 크게 서원하는 정신으로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더불어 납월 8일 부처님 성도일을 기하여 고불총림 결성식을 거행하고 그 이름 아래 새롭게 발족하는 바이다.

백양산인 종헌

한편, 고불총림 백양사의 현황을 1995­6년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보기로 하자.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에는 공 사찰을 합해 33개의 말사가 소속되어 있다. 또한 백양사에는 운문암, 천진암 등 8개의 산내 암자를 거느리고 있어 실로 많은 대중이 원융살림을 이루고 있다.

[표 7-4] 백양사 본 말사 현황

백양사 본 말사 현황 - 계, 본사, 말사 제공 표
본사말사
42소계본사산암내자소계공사사암
918332112

대중은 본사에만 25명이 상주하고 있고 여기에 강원 선원을 합해 100명이 넘는 스님들이 청정수행도량을 지키고 있으며, 종무원 11명을 더하면 인력구조만으로도 가히 총림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표 7-5] 대중 현황

대중 현황 - 총계, 본사, 말사 제공 표
총 계본 사말 사
비구비구니비구비구니비구비구니
6855132520543348

[표 7-6] 강원 선원 대중 현황

강원 선원 대중 현황 - 계, 강원, 고불선원, 운문선원 제공 표
강원(4년제)고불선원운문선원
85252040

[표 7-7] 1995년도 불사 추진 실적

1995년도 불사 추진 실적 - 사업명, 규모, 총사업비, 도비, 군비 제공 표
사업명규모총사업비도비군비
대웅전 보수55평367,000,000150,000,00088,000,000
요사체 신축25평88,000,000
종 울림통 이설2개15,000,000
주지실 이실방사 개조(5개)16,000,000
담장 설치길이100미터18,000,000
높이 1.6미터
폭 60센티미터
지붕번와설선당 외9동14,000,000
담장 보수300미터4,000,000
칠성전 기단 정비길이 40센티미터1,500,000
높이 70센티미터
수련원 후보지 조성800평14,000,000
9건537,500,000

[표 7-8] 1996년도 불사 현황 (단위 : 천원)

1996년도 불사 현황 - 사업명, 사업내용, 사업비, 비고 제공 표
사업명사업내용사업비비고
담장 설치길이 155미터65,000,000국비 30,000
높이 1,70미터도비 15,000
폭 0.80미터군비 15,000
자부담 5,000
쌍계루 주변
정비 사업
극락보전2,698,900,000도비 100,000
사천왕문군비 100,000
쌍계루 보수자부담 69,900
중화당 및 공양소 신축중화당 75평350,120,000자부담 350,120
공양소 18평

백양사는 1947년 총림설치 3년후 6 25 전란으로 소실됐으나 1980년이래 복원을 시작, 지금은 완전 원상 회복돼 총림으로서의 면모를 두루 갖췄다. 현재 조계종 전종정 서옹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며 상선원에 20여명, 하선원에 10여명, 강원에 20여명의 수행납자들이 정진하고 있다. 백양사에 고불총림이 설치됨으로써 척박한 호남불교에 승풍진작의 새 지평을 열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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