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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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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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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사회변동과 문화변동은 선교사의 도움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게 하였다. 그런데 자발적인 신앙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초기교회를 형성시킨 각 개개인에게 새로운 사상이 그만큼 크게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1784년 말경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는데 초기부터 심각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당시의 신자들이 기존의 권위와 전통에 대해 도전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가장 중요한 권위는 왕권이었는데 신자들은 왕권보다 더 높은 천주의 존재를 인정하고 선언하였다.

전라도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와 1866년의 병인(丙寅)박해로 경상도와 충청도의 신자들이 피신하면서 부터였다. 이때 장성군에도 북이면·북일면·북하면·황룡면 일대에 신자들이 옮겨와 살기 시작하였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71년 장성 삭별리에 살았던 유문보(일명 유작객)가 나주포교 김용운에게 체포되어 나주진영으로 끌려가 고문당하고 염병에 걸려 1871년 11월경 약 50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따라서 그는 장성 출신의 첫 천주교 순교자가 되었다.

1891년 장성군 서이면 탑정리(長城郡 西二面 塔亭里, 현 장성군 황룡면 와우리) 연선암에서 천주교신자 추방 사건이 발생하였다. 1890년 겨울, 전라도 남부지역의 선교를 담당한 베르모렐(J. Vermorel, 張若瑟) 신부가 공소 방문을 하고 떠나간지 얼마 안되어, 마을사람 박수성(朴秀成)이 천주교신자 안흥서(安興瑞)를 찾아가 베르모렐 신부가 공소를 방문하였을 때 신부를 유숙시킨 것을 두고 시비를 걸며 안흥서와 신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서양인을 접대한 자는 죽어도 죄가 안되고, 서양인은 백 번 죽여도 마땅하다는 등 폭언을 하였다. 다음해 음력 2월 어느날 안흥서의 처(妻)가 동리 우물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박수성의 처가 쫒아와서 외국인과 내통하는 자와는 한 우물을 먹을 수 없다며 안흥서 처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정신을 잃도록 구타하였다. 안흥서의 처는 이 사실을 어사(御使)에게 읍소하였고 어사는 담양관장에게 이 사건을 맡겨 명령대로 박수성의 처를 구속하였다.

그러나 장성부사(長城府使)가 관아에 돌아오자 박수성의 지친(至親)인 박의경(朴義景) 등 5명과 리(里)의 우두머리인 유사(有司), 면의 책임자인 풍헌(風憲) 등이 돈으로 부사를 매수하였다. 부사는 박수성의 처를 석방하는 한편 안흥서와 다른 천주교신자 4명을 체포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래서 안흥서는 피신하였고, 그의 처는 4살 된 딸과 함께 옥에 갇혔다. 박수성 일당은 안흥서와 4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이면 1명당 현상금 100냥을 주겠다고 포졸들과 약속하였다. 그러나 잡지 못하면 신자들을 몰아내고 12호를 모두 불태워 버리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보리 수확을 목전에 두고 뿔뿔이 흩어져야 할 처지였다.

사태가 긴박해지자 탑정리 신자들은 조선천주교회의 최고 통치권자인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진정서를 띄우고 조속히 안흥서의 처를 석방시키고 신자들을 귀가시켜 보리를 추수할 수 있도록 조처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다.

뮈텔 주교는 7월 6일 프랑스공사에게 선교사와 신자들을 보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고, 프랑스공사는 외무독판에게 사건의 중재를 요청하였다. 독판은 프랑스공사의 공문을 접수하고 장성부사에게 관자(關子)를 시달하였다. 관자에서 독판은 관찰사에게 "박수성, 박안동, 김양서를 조속히 체포하여 엄히 징계하라"며 공범자의 처벌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였다. 11월 7일이었다. 전주로부터 '칠윤'이라는 두 글자의 전보를 받았다. '칠'은 11월 7일자로 문제의 관자가 전라감사에게 전달되었다는 뜻이고, '윤'은 윤(보두네) 신부를 가리킨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장성사건은 완전히 수습되었다. 결국 조선정부와 프랑스정부의 외교적인 차원에서 해결을 보게 된 것이다. 정부당국이 천주교회의 손을 들어준 이 사건은 천주교회에 의지하여 힘을 행사하려는 사례를 낳기도 하였다.

장성은 1896년 신설 수류본당, 1900년 정읍군 내장면 신성리본당, 1904년 노안 양천리본당 등 신설본당의 관할지역이 되었다. 국권이 강탈당하기 전 선교사들이 작성한 [교세통계표]에 나타난 장성지역의 천주교 신자마을로는 수도, 만골, 매남이, 대악리, 입석골, 내인동, 죽림동, 서당골, 물바라기, 공근이, 점골, 되야동, 개백이, 무등골, 대기, 윙골, 무내미, 갈재, 신사동, 연선암, 물토골, 중기, 감나무골, 신수동, 탑정이, 소록동, 상목동, 백년동, 나미래, 원갓, 세운암, 깊은골, 시내골, 만골 등이 있다.
1933년 조선에 진출하여 전남지방의 선교를 담당하게 된 골롬반회 선교사들에 의해 1935년 6월 40평의 목조 성당이 사거리에 신축되었고 사거리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사거리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퀸란(T. Quinlan) 신부가 장성읍 본당의 설립을 추진하다 1937년 전임되고 후임 신부가 부임하지 않아 사거리본당은 공소로 되었다. 그리고 김익진(金益鎭)이 기증한 만여평의 부지에 그리스머가 기부한 건축기금으로 장성읍에 성당 건립이 시작되었다. 1937년 10월 4일 성당이 완공되고 골롬반회의 제라티(B. Geraghty)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장성본당이 설립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2대 주임 우즈(F. Woods) 신부가 적성국 국민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44년 3월 조선인 김창현(金昌鉉) 신부가 부임하였는데 일본경찰들은 수시로 교회를 순찰하고 성직자들의 행동을 감시하며 교회활동을 방해하였다. 또한 사제관과 성당을 강제 점령하여 군대의 창고로, 청년들의 훈련소로, 군견을 기르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1945년 8·15 해방으로 종교의 자유를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성당은 인민군 북부지구 사령부가 되었고 신부는 피신해야만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골롬반회 신부가 다시 장성본당에 부임하여 구호양곡 등 외부지원을 받아 전쟁으로 황폐화된 본당을 재건하였다. 신자가 급증하자 1954년 4월 25평의 성당을 증축하고, 8월에는 한국전쟁 중 불타버린 사거리공소를 40평 규모로 신축하였다. 또한 하오리 호산공소, 북하 월성공소, 용두리공소, 삼서공소, 사창공소 등을 신축하거나 개축하였다. 1961년 10월에는 포항예수성심시녀회 수녀들이 초빙되어와 선교에 협력하였다. 1966년 성모유치원을 설립하여 유아교육에 관심을 기울였고, 같은 해 6월 24일 장성지역의 경제적 협동과 신앙 전파를 위해 신용협동조합 설립하였다. 1982년 6월 성당을 신축하였고, 1987년 『장성 천주교 50년사』를 간행하였으며, 1997년 본당 설립 90주년을 맞았다. 1996년 말 장성 천주교회는 2,764명의 신자수를 기록하였는데 1951년부터 장성지역의 천주교 신자수는 다음과 같다. 인구대비 천주교신자 비율은 약 3%이다.

[표 7-9] 한국전쟁 발발 이후 장성지역의 천주교 신자수

한국전쟁 발발 이후 장성지역의 천주교 신자수 - 연도, 1951, 1952, 1953, 1954, 1955, 1956, 1957, 1958,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제공표
연도1951195219531954195519561957195819591960
신자수588768768773831901 1,7972,1502,382
연도1961196219631964196519661967196819691970
신자수2,3312,3672,0612,1402,0702,1022,2252,2192,2632,564
연도1971197219731974197519761977197819791980
신자수2,1182,7362,4632,4521,9981,9703,0222,8612,8803,570
연도198119821983198419851986198719881989
신자수3,5793,6943,7753,8293,0433,1773,4543,533

출전 : 천주교 광주대교구, {광주대교구 50년사}, 1990.
비고 : 1965년 인구대비 2.6%. 1977년부터 공소신자 포함. 단 1985년과 1986년은 본당신자만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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