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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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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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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가 희생과 좌절을 반복하고 있을 무렵인 19세기 몇 차례에 걸쳐 유럽 계통의 선교사가 조선을 찾았다. 1832년 충남 홍주만의 원산도를 찾은 독일인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 목사와 1865년과 그 이듬해에 조선에 왔다가 순교한 영국인 토마스(R. Thomas) 목사이다. 1876년 조선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할 즈음, 조선 주변에 와있던 외국 선교사들과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만주지역과 일본에서 이 접촉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전남지역에는 1891년 12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가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장성에는 광주에서 전파한 선교사 배유지(Eugene Bell, 裵裕祉)가 1903년 장성군 삼서면 보생리 산 16번지에 보생리(寶生里)교회를 설립하였다. 장성 최초의 개신교회였다.

보생리교회는 5개월 후에는 30여 명, 1년 후에는 50여 명, 2년 후에는 150여 명으로 신자수가 증가하였다. 보생리교회에 이어 1903년 황룡리(黃龍里)교회가 설립되었다. 봉덕(奉德)에 거주하는 김도인(金道仁)이 지원근(池元根)의 전도를 듣고 믿어 영광군 하나리(河羅里)교회로 다니며 전도한 결과 이문영(李文英)·박경칠(朴敬七)·김경수(金景洙)·양대중(梁大仲)·김성태(金成台)·박문칠(朴文七)·강윤칠(姜允七)·백경삼(白敬三) 등 7명이 믿고 예배당 6칸을 신축한 후 선교사 배유지·권대선(都大善), 조사(助師) 변창연(邊昌淵)·김문삼(金文三) 등이 선교를 담당하였다.

이후 1905년 소룡리(小龍里)교회, 1906년 대악리(大岳里)교회, 1907년 신호리(莘湖里)교회, 1910년 월평교회 등이 설립되어 장성지역에 개신교 선교를 하였다.({朝鮮예수교長老會史記 (上)} 참조)한편 천주교보다 30년이나 늦게 장성지역에 선교를 시작한 개신교회는 개신교회의 특징인 교육선교에도 관심을 쏟았다. 보생리교회는 장려학교를 설립·운영하였고, 율곡리 영신(永信)교회는 1907년 사립영선학교(私立英選學校)를 설립하여 5년간 운영하다가 경영난으로 사립 의숙(義塾)으로 변경하였다. 1908년 영신교회는 변창연(邊昌淵)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堂會)를 조직하였다.

일제의 강점 이후에도 교회 설립과 선교는 계속되었다. 1912년에는 장성읍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920년 두월리(斗月里)교회·화평리(華坪里)교회, 1922년 역전(驛前)교회가 설립되었다.({朝鮮예수교長老會史記(下)} 참조)

한편 대부흥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1907년 광주·전남은 장로교 전남대리회(全南代理會) 소속이 되었고, 일제 강점 이후인 1911년 전남노회(老會)가 되었으며, 1917년 전남노회로 독립하였다. 이러한 교회 조직의 변천과 함께 장성지역의 개신교회들도 당회(堂會)가 조직, 폐지되었다. 1918년 보생리교회는 이재현(李載炫)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목사 백용기(白容基), 선교사 도대선(都大善), 장로 김문삼(金文三)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소룡리교회는 백용기를 초빙하여 선교사 남대리(南大利) 함께 활동하도록 하였다. 1919년 신호리교회는 김명안(金明安)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고, 1921년 영신교회는 장로 변창연이 다른 지역으로 이거하자 당회가 폐지되었다.

1919년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3·1운동이 일어났다. 광주·전남에서 3·1운동이 시작된 것은 3월 10일 광주·장성에서부터였다. 장성군 삼서면 소룡리교회 경영 소학교 교사 송주일(宋柱一)이 신자 70여 명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송주일은 3월 8일 은사인 숭일중학교 교감 송홍진이 보낸 만세운동 권유 편지를 받고 사전에 탄로날 것을 염려하여 혼자 준비하였다. 3월 10일 정오를 기하여 학생을 통해 신자들에게 모이게 하고 송홍진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낭독하였다. 편지의 내용은 "조선은 이제 독립되었으니 너는 면사무소와 거주지 이장은 물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민중에게 이 길보(吉報)를 알리게 하라. 광주에서는 벌써 각 학교생도 기타 노유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집합하여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결정하였다"는 것이었다. 당시 교회에 모인 신자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갔다. 3월 17일 송주일은 좀더 조직적으로 만세를 부르기 위하여 소룡리 청년 조병렬·조병권·조병철 등과 함께 의논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송주일은 그해 4월 11일 광주지법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5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3월 21일 정선유(鄭善瑜)가 자신의 학생들과 개신교신자, 읍내청년들을 모아 만세시위를 단행하고자 계획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시위 계획은 실패하였지만 그날 저녁 각 면 동지와 연락하여 봉화를 올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를 하였다. 정선유는 장성 출신으로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성산부락에 야학을 세워 신자 150명을 모아 선교하였다. 또한 숭실의숙(崇實義塾)을 설립하여 야학을 가르치고 100여 명의 학생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사상을 가르쳤었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 장성지역의 개신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21년 영신교회는 신자수가 500여 명에 달하였으나 울산 김학규(金學圭) 3형제의 핍박으로 인하여 400여 명이 교회를 떠났다. 또한 월평교회에서는 비신자 김주환(金胄煥)의 방해로 교회가 불탔으나 교회를 재건하여 신자수가 100여 명을 헤아렸다. 1922년 장성읍교회는 선교사와의 불화로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학교가 폐지되었으나 선교사 도대선, 조사 고시중(高時仲)과 광주에서 이주한 문태원(文泰元)이 합심 노력한 결과 교회가 재건되었다. 1923년 월평교회에는 조선야소교자치회(朝鮮耶蘇敎自治敎)와 집사교(執事敎)가 백용기(白容基)·정선진(鄭善珍)·손동선(孫東鮮)의 주창으로 발생하여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등 큰 영향을 받았다.

1945년 해방이 되던 날 조재원·이오산·정영모·김형수 등이 북이면에 사거리교회를 설립하였다. 이후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장성에는 20여 개의 개신교회가 설립되었고, 신자수는 1,9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교회들은 징발당하고 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보생교회 전도사 이광연(李光連)과 그의 아내 및 가족들이 전북 고창 태산에서 사망하였고, 9월 18일 소룡리교회 신자 김종수 부부, 김장보 부부, 김상순, 김유순, 김영규, 김귀선 부부, 김길환 부부, 김영환, 김정체, 최정남, 조영자, 조민태, 조만기, 조만순, 조병권, 조병철, 조병휘, 조상근, 오대원, 오봉용, 최주일, 임중호, 임진호 등 28명이 사망하였다.

휴전이 성립되고 장성의 개신교회들은 청소년 지적 향상과 정신교육, 성인교육에 관심을 쏟았다. 사거리교회는 노령중학원을 설립하여 1954년까지 3회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전도교육에 주력하였다. 농한기를 이용하여 부흥사경회로, 밤은 전도집회 낮은 성경공부에 노력하였다. 신자들은 고아원·탁아소 등을 설립하여 사회에 봉사하였다. 장성의 개신교 신자수와 교회수는 다음과 같다.

[표 7-10] 장성의 개신교회 현황

장성의 개신교회 현황 - 연도,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제공 표
연도1970197119721973197419751976197719781979
신자수1,8182,1282,0712,4572,4572,8042,956
교회수33373341413534333333
연도1980198119821983198419851986198719881989
신자수
교회수333333363647475250
연도199019911992199319941995199619971998
신자수 6,709
교회수606066697771737476

출전 : 『장성통계연보』1970­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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