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군 로고

국가상징 국무회의 알아보기

제2장 종교

  • 트위터
  • 페이스북
  • 구글
  • 현 페이지 엑셀로 다운
  • 현 페이지 워드로 다운
  • 현 페이지 인쇄
4차 메뉴 정의
5차 메뉴 정의

제4절 그밖의 종교

원본파일 다운로드

1860년 동학의 창시를 시작으로 남학(南學)과 정역(正易), 증산교와 대종교, 원불교가 큰 시차를 두지 않고 조선사회에서 기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당대를 위기상황으로 규정한 시대인식의 논리, 시천주(侍天主)로 표상되는 인간중심신앙, 운세론과 후천개벽을 골간으로 하는 운도주의(運度主義) 지향, 그리고 기왕의 종교사상 내지 이념을 비판적으로 포용하여 새로운 체계로 재편성하려고 한 점이 특징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전라도의 동학도들은 1차 봉기 때부터 참여하였고, 그 수와 치열성에서 다른 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시 장성에서는 기우선(寄宇善)의 주도로 1,000명이 일어났다. 당시 장성지역은 광주·나주지역과 함께 손화중·최경선·오권선의 세력권에 속하였다.

1905년 동학을 기반으로 천도교가 창건되었다. 1914년 7월 장성에는 천도교 장성군대교구가 있었고, 장성군과 담양군·광주군·곡성군 창평·나주군 남평·고창군 무장 교구가 속하였다. 장성의 천도교 교구장은 전북 임실 출신의 박준승(朴準承)으로 1917년 12월까지 활동하였다. 1914년 8월 총인원(叢仁院)이 구성되었을 때 장성에서는 송연섭(宋年燮)이 평의원으로 선정되었다.

3·1운동기 전남지역의 천도교인들은 다른 지역의 천도교인들에 비하여 늦게 시위운동을 전개하였고, 크게 두드러진 활동을 벌이지도 못하였다. 활동이 부진하였던 이유는 동학농민전쟁 때 전남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놀랐던 일제측이 감시와 첩보수집 활동을 철저히 한 때문이었다. 또한 동학농민전쟁 때 일본의 진압으로 심각한 희생을 당했던 동학교도들이 다시 그러한 피해를 겪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장성에는 정읍, 순창 등지의 천도교인들을 통하여 서울에서의 3·1운동의 소식이 접하여졌고, 남원군에서 유태홍(柳泰洪)이 사람을 보내어 천도교인들의 거사를 권고하였다. 그러나 주목할만한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1916년 영광에서 박중빈(朴重彬)에 의해 개창된 원불교는 일제강점 초기의 사회상황에서 경제활동과 기도운동을 시작하였다. 장성에 원불교가 포교된 동기는 박중빈의 탄생지며 대각지(大覺地)를 순례하는 원불교신자들이 장성지역의 포교를 위해 1970년 3월 작은 법당을 마련하면서부터였다.

해방과 남북분단, 곧이어 일어난 한국전쟁은 한국사회를 다시 한번 격랑의 파고 속에 몰아넣었다. 한국전쟁은 수많은 이재민을 발생시켰으며, 모든 사회 영역을 황폐화시켰다. 그 결과 신종교가 대거 부활하거나 새롭게 출현하였다. 일제가 해산시키거나 강제로 복속시켰던 기성 종교들이 재건된 것과 함께 신종교도 역시 재건되거나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기 시작하였고, 한편으로 새로운 신종교도 성립하였다. 이 시기 새롭게 성립한 신종교는 혼란한 시대에 새로운 세계 즉 신천지를 대망하는 민중의 원망(願望)을 담은 것들로, 개신교의 말세와 재림(再臨)사상, 불교의 미륵하생사상, 정감록의 정도령 출현신앙, 정역(正易)의 운도(運度)사상 등을 중심 메시지로 제시하였으며, 각 신종교 교조들은 그러한 민중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카리스마적 귄위를 지닌 현세 구원자로 출현하였다.

1957년 7월 20일 통일교 본협회에서 파견된 전도사 조정희·김옥희를 통하여 1954년 문선명(文鮮明)이 서울에서 창시한 통일교가 장성에 알려졌다. 1960년 3월 15일 장성읍 상오리에 전도사 유봉상이 통일교 장성 선교거점을 마련하였다. 1964년 제8대 목사 양옥교에 의해 장성역전 철도관사로 교회를 이전하면서 전군에 선교가 시작되었다. 북일면 신흥교회·성산교회, 북이면 모현교회, 삼계면 생촌 덕산교회, 진원면 작동교회, 남면 마령교회, 삼서 우치교회, 서삼 대덕교회 등 각 면단위에서 통일교회가 설립되었다. 1970년 제14대 목사 유한섭에 의해 장성읍 대창동의 목조건물을 구입하여 장성에 정착 10년만에 자립의 터전을 닦았다. 1972년 제27대 목사 김경옥에 의해 기존 대지 위에 A형 건물을 신축하였다. 1979년부터 가정기지는 천국기지라는 표어 아래 한 식구가 360가정을 방문하며 예배드리는 가정을 이루는 활동을 전개하여 신자 증가에 주력하였다.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전국의 신종교를 조사한 이강오 교수는 전남지역에서 창교된 신종교는 거의 없다고 하였다. 또한 국내에서 창교된 각종 신종교가 전남지역에 지부와 같은 포교 전담소를 설치하였으나 다른 지역에 비해 전남지역에서는 활발한 포교가 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남지역에서 신흥종교가 크게 발전하지 못한 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 발전을 한다거나 전남지역에서 제대로 포교활동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전남지역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수용성이 적은 때문이 아닌가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는 백양사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세력이 오랜 역사를 지니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데에서 이유를 찾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천주교나 개신교를 보아도 장성지역에서는 인구대비 신자비율이 전국 평균을 훨씬 밑도는 수치를 보여준다. (윤선자)

QR CODE
  • 왼쪽 정보무늬 사진을 휴대전화에 인식시키면 자동으로 이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 이 정보무늬는 『제2장 종교 170번』의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제2장 종교 페이지 바로가기 주소(https://www.jangseong.go.kr/q/ezIzMDF8MTcwfHNob3d8fQ==&e=M&s=3), QRCODE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