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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장성문화권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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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메뉴 정의
5차 메뉴 정의
  • 1. 서설
  • 2. 향토 문화 운동의 전국 확산
  • 3. 미래 사회와 장성 문화권

1.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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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문화가 문화의 한 형태로써 존재하고 미래 사회의 문화 창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논의의 주요 과제가 된다. 우리는 장성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이상의 세계를 열기 시작했으며 인생관, 세계관을 배태하였다. 고향·향토라 하면 작게는 마을 시·군 단위, 시·도 단위로 넓게는 호남 한반도의 남부지방으로까지 탄력성 있게 확대 또는 축소되기도 한다.

그러나 향토 문화, 향토사 연구의 중요성과 의의를 확인하면서도 아직 일반 개념과 연구 대상·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정립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는 지방 분권적인 봉건제의 발달로 지방자치가 일찍 형성되어 자연적 조건에 있어서나 역사적 조건에 있어 지방의 다양성이 매우 풍부하여 개성적인 지역 공동체가 발달되어 왔고 거기에 상응하는 향토사·지방사의 서술도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중앙 집권제의 성립으로 향토사와 지방사의 개념조차 분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따라서, 역사 기술도 정치·외교·군사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조선 전기에는 현(縣) 이상이 540여 개(동국여지승람)이며 그 중 지방관이 파견된 곳은 330여 개였으며 그 나머지는 면(面)으로 개편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군현제도(郡縣制度)의 행정구역의 개편에 있어 500여 개의 면리(面里)로 다시 개편되면서 면리제가 확립되었으나, 비교적 구역 자체의 변화는 상당히 적어서 명칭은 그대로 내려 올 수 있었다. 현 이상에는 자치 규약을 향규(鄕規)·향약이라 하고 동 단위에서는 동계(洞契)·동규·동약이라 하여 지역의 특수성을 상당히 유지해 온 것으로 보인다. 장성군도 진원현, 오산현, 삼계현이 합하여 오늘날의 지역과 지역 특성을 잠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감안하더라도 향토 문화의 존재와 당위는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역사학자요 문명 비평가인 토인비는 문화는 탄생·번영·쇠퇴·몰락의 과정을 되풀이한다고 했다. 생성과 원인을 파악하면 문명을 구출할 수 있으며 문명사회는 때로는 그 발전 과정에서 거듭 복지와 그 생존조차 위협에 당면하며 그 도전에 대한 응전이 사회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했다. 문명은 소수의 엘리트의 지도 아래 도전에 성공함으로써 세상에 등장 할 수 있으며 창조적인 대응이 멈추었을 때 몰락한다고 했다.

21세기는 지식 정보화 사회의 디지털 혁명으로 인류 문명의 전환기에 서 있으며 문화도 국가나 개인의 부와 행복의 핵심요소로서 권역화(지역화)와 산업화의 구조 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지역문화, 향토문화의 자산 원형을 밝혀 미래 사회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일은 이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하다.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는 학문의 전통을 오늘에 살리고자 민간 자생의 70년대 향토문화개발협의회의 창립과 전국적인 선구적 활동 등 향토 문화 운동의 본산을 이루었음은 이런 뜻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미래 사회를 밝혀갈 문화원형을 추스르는 가운데 새 문화 창출을 위한 방향제시에 좋은 단서가 될 것이다.

2. 향토 문화 운동의 전국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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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호남 유학의 본산을 이룬 장성은 영광·함평·담양·고창·정읍·나주·광주를 포함하여 전통적인 장성 문화권이 형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 전통이 1970년대 초 향토문화개발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향토 문화 운동으로 발화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지식 정보화 사회와 지방자치 시대에 그 가치와 역할은 새롭게 재조명되어야 할 내용이기도 하다.

(1) 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70년대 초 28명의 장성의 청년이 향토문화 운동의 기치를 내걸고 향토문화개발협의회를 창립하였다. 이 시기는 외래 문화의 압도적인 영향 속에 서울 중심의 도시 문화가 전통문화를 쇠락시키고 향토의 맥(脈)도 희미해져 도시화·산업화·획일화가 판을 치기 시작했고 물량 위주의 새마을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던 때이기도 하였다.

1970년 1월에는 개교 기념으로 장성여자종합고등학교에서 『향토문화』창간호(지도교사 김연수)를 발간하였다. 고 1년생들이 내 고장 문화에 대한 현지 답사에 나서 학문과 사상·민속·구비문학·산업경제 등을 정리한 것으로 지역사회의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향토문화 개발 협의회는 내 고장 문화 전통을 찾아 가꾸어 긍지를 가지고 내 고장의 사회 경제적인 향상으로 살기 좋은 고장을 이룩하자는 데 뜻이 모아졌다. 향문회 구성은 28명으로 회장(金炅株) 1인, 총무 1인, 문예부, 사회 연구부, 생활 개선부, 문화재부를 두고서 활동하였다.

농촌의 특성과 실정에 맞는 생활 양식의 보급, 문화재 조사 및 보호, 연구지 출판과 청소년의 문예 창작 의욕을 고취하는 임무와 과제를 분담하고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학계와 연계를 맺는데 유의하여 초창기에 사랑방식의 연구 발표 자리를 마련하고 학자들을 초청 연구 모임을 가져왔는데, 전남대 홍순탁 교수의 향토 문화와 혈연화 과제, 지춘상 교수의 한·일 간의 민속 비교 등의 주제는 향토문화 연구에 대한 의욕을 높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장성 출신의 김종수(전남대) 이상보(명지대) 교수의 학술 강연회와 이을호 박사(국립광주 박물관장)의 전남의 3대 문화권 성격 규명 등이 이 모임의 방향 정립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79년에 사단 법인화하여 광주·전남 일원으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1985년부터는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산파역의 일원으로 참여 향토문화 운동의 전국화에 앞장섰다. 창립 이후 지난 20년 간 한국 향토문화 운동의 위상을 몇 가지로 검토해 볼 만하다.

첫째, 향토문화 운동의 이념과 방향 정립에 노력하였다. 초기의 사랑방식 연구 발표 모임의 성과를 바탕으로 도 규모, 전국 규모의 학술 대회를 열었다. 1981년 향토문화 진흥 방안(박성봉, 최인학, 정채균 발표)에 이어 향토문화 개발 전략(이을호, 최몽룡), 향토사 정립 방안 학술대회(이현종 : 국사편찬위원장, 정구복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광주에서 큰 성과를 거두며 진행되었다.

둘째, 애향운동으로 지역 사회의 사회 경제적인 발전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수몰지구인 장성호의 관광개발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와 모형을 작성(김경주 회장)하여 개발 안을 정부와 재계에 제안 투자를 권유하였으며, 1985년 7월 9일에는 창립한 장성애향운동본부의 산파역을 맡았다. 재경·재광 향우회와 정·관·학계의 인사들이 장성군민과 손을 잡았다. 김택주 조선대 총장, 김태규 광주 교육대학장, 김은주 재경향우회장, 반상진·김계윤 원장, 백인호 매경 전무이사 등이 참여했고, 김태규 학장을 본부장으로 추대하였다. 민간 중심의 전국 규모의 백양제 개최, 장성군내 인문고 설립 제안 등 지역사회 개발에 앞장섰다.

셋째, 문화유산 현지조사 연구 과정에 전문가들이 양성되었다. 1973년 5월 입암산성을 답사하여 산성의 구조와 현지인의 삶을 소개하여 중앙언론에 보도되는 등 문화재 답사에 관심을 환기시켰다. 1975년 장성호 지석묘 발굴조사(경주박물관 한병삼)에서 야외 토론, 이 회가 발굴한 유탕동제를 중심으로 한 민속조사 현장에서 다께다 사꾸라히(동경교대)와의 현장 토론 등을 통해서 회원들의 자질을 높여갔다.

사단법인화 이후에는 전남 문화유적 조사에 나서 영암, 장흥, 보성, 영광, 고창, 화순 등 마을을 중심으로 한 문화유적 조사를 시행하여 학계에 조사 보고하였다. 1987년에 광주광역시의 용역을 받아 무등산 지표조사를 실시 『무등산』이라는 보고서를 냈고, 『광주의 문화유적』, 『광주의 불적』등을 발간하였다. 장성고교 주변 백제 고분 조사, 어린이 대공원 지표조사, 1991년에 문흥 지구 지표조사도 실시 조사 보고서를 냈으며, 문화유적 조사의 길라잡이로서 『문화유적 조사 요람』유형편과 무형편을 편찬, 연구자들의 지침서 역할을 하게 하였다.

넷째, 내 고장 인물에 대한 학술 조명으로 그 업적을 체계화하였다. 1979년 노사선생100주년기념 학술대회·1982년 장성남문창의390주년기념 학술대회(나종우: 원광대, 송정현:전남대, 박성봉:경희대)·1990년 고봉철학사상 학술대회·1991년 제봉사상과 구국정신 학술대회·1992년 눌제 박상의 문학과 의리사상 학술대회·1993년 하서 김인후 도학과 문화사상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연구지를 발간 그 파급력을 높였으며 연구지 『향토문화』20집도 출간하였다.

다섯째, 지역사회 학생들의 향토문화 교육을 지원하였다. 1973년부터 장성 관내 문예·그림 발표를 중심으로 한 문향축전을 개최하고 장성 문화원 사업으로 정착시켰으며, 1984년에는 전남(광주포함) 도내 교육감기 애향 문예상 시상을 통해 학생들의 애향 정신을 고양했다. 장성 교육청의 『장성 선비의 얼』·『장성 전통 문화』등의 향토교재 편찬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여섯째, 향토사 마을사 편찬의 체계를 정리하였다. 1980년 『장성군사』추진 위원회를 구성하고 당시 김원 전교를 추진위원장으로 추대, 강영기 군수의 지원에 의해 발간 추진이 본격화되고 광범위한 사료 수집과 체제와 내용의 일관성을 기하기 위해 당시 정채균 회장을 중심으로 학계를 비롯한 권위있는 집필진을 구성하였다. 이종일 부회장은 『장성읍지』영인본을 편집하고 김연수는 주간을 맡아 편집 간행을 추진하였다. 이 『장성군사』(1982년 간행)는 전국 향토지 콘테스트(한국문예진흥원)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그 상금인 50만원을 기금으로 『장성군 마을사』발간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2) 전국 향토문화 운동으로 확산

향토문화개발협의회는 장성군민의상 대상·금호학술상을 수상하는 등 학술 수준의 전문 단체로 성장하였고, 1991년 9월에는 서울신문이 주최하는 향토문화 대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향토문화 운동 확산의 구체적인 사례는 아래와 같다.

1대 김경주 회장은 사비를 들여 장성호, 백양사 관광 종합개발(안)과 모형도를 제작하였다. 2대 정채균 회장은 1970년대 말 강진 군수로 재직하면서 고려 청자 재현 사업, 전국 최초인 {강진 마을유래지} 간행, 다산학 연구 사업, 강진읍 도시 개발 계획 등을 추진하였고, 광주 부시장으로 재직시 많은 문화인과 협의, 미술·연극·무용 등 어려운 재정 여건에서 문화 광주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3대 반상진 회장은 광주 사무실을 대여하고 회 운영을 지원하면서 집필 활동으로 문화적인 업적을 남겼다. 4대 이종일 회장은 광주광역시청 문화예술과장으로 재직시 광주문예예술회관, 광주민속박물관, 무등도서관 건립에 추진 실무를 맡았고, 광주민속박물관장으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김계윤 이사장은 1981년 호남 출신 화가·서예·조각·사진작가 등이 참여한 문향 초대작가전을 광주·장성·서울 신문회관에서 전시하는데 일선에서 이끌었으며, 광주민속박물관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안진오교수는 학문적인 지원을 담당 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고, 이상식 이사장은 동학농민운동 100주년기념사업을 주관하여 황룡에 동학농민군 승전기념탑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광주광역시 문화재위원으로는 이상식, 이종일, 박내경이 위촉을 받았으며, 변범석 회원은 1997년에 홍길동 관련 사업을 장성군에 제안하였다.

1987년 5월 대우재단 지원으로 한국향토사연구협의회가 서울에서 18개 단체가 모여 창립되었다. 임원은 회장 김택규(영남대) 부회장 이강오(전북대) 김연수(향문회)가 선출되었는데 상임이사가 있는 향토문화개발협의회가 본부로 정해졌다. 이후 김연수는 회운영의 실무 책임을 맡았고, 부회장·회장직무대리를 역임하면서 한국 '오대강 유역사' 연구 추진, 한국 전통마을 '촌락 문화 실태조사'를 교육부와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 2000년 1월 본부가 서울로 이전하기 전까지 향문회가 전국화를 주도하였다. 전국협의회는 정·준회원 97개 단체의 협의체로서 향토사 연구의 대표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3) 장성 마을사 편찬과 장성 문화원 활동

1) 장성 마을사 편찬

1982년에 간행된 『장성군사』가 우수 향토지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향토문화개발협의회 마을사 연구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을 이병직 회원이 맡고, 이어 장성 문화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장성군 지원이 확정되고 이 사업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마을사는 장성군 465개 마을의 역사를 읍·면 단위로 묶어 발행한 지식 기반 사업으로써 그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마을 조사 내용과 방법을 제시하고, 군 문화 공보실이 87년 군내 전 마을에 조사위원을 위촉 기본 양식을 배부 교육 후 작성하게 하고, 문화원에서 확인 및 보충 조사를 실시 원고 작성 후 주민에게 공람시켰다. 1989년 북하면, 1990년 북이면, 1991년 삼계면, 1992년 삼서면, 1993년 북일면, 1993년 서삼면, 1995년 남면, 1997년 황룡면, 1998년 진원면 등이 연이어 발간되었고, 2002년에는 장성읍 편이 완결 예정이며, 향토사 연구의 새 이정표가 마련되었다. 수록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 마을사는 자연 마을을 위주로 하였으나 행정상 통합된 마을은 함께 처리했으며 한 마을에만 포함시키지 못할 사항은 면과 리의 총괄편을 두어 기술하였다.

① 총괄편 지리·역사

② 마을편

1) 마을 전경 사진 2) 일반 현황 3) 위치 및 자연환경 4) 마을도 5) 유래 6) 풍수설과 지명 7) 산업 8) 생활 9) 인물 10) 유물 유적 11) 민속 12) 전설

2) 장성 문화원 활동

장성 문화원은 장성 마을사 편찬과 아울러 향토사 조사 연구와 향토 문화 전승에도 노력해왔다. 1982년 백암산 국기제·1992년 장성 민속놀이 한마당·1997년 홍길동 추모제 등 연례 행사와 『문향의 얼』, 『장성의 맥』등의 향토지 발간·향토작가 초대전·문향 축전을 통해 향토 문화 진흥에 이바지했다.

회원 중심의 유적지 순례행사는 중국·일본 등 해외 교류 행사로 발전하였고, 국악교실 운영의 결실로 농악 해외공연(일본 초청 4회)의 성과를 올렸다. 문화원 활동은 문화 교실·유학 강좌로 진행해 오고 있으며, 장성향토사연구소(회장 이병직)는 장성 향토사 연구 활동을 이끌고 있다.

(4) 한국 고문 연구회와 고문 연구

유학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장성문화권에서 전통의 맥을 이어 변시연(邊時淵)을 대표로 한국고문연구회(文苑編刊所)가 1957년 창립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회는 신라 이후 역대 명인들의 명문명작(名文名作)을 중심으로 광범한 수집과 정리·편찬을 하여 각 분야의 연구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그간 『문원(文苑)』을 간행하여 외국 대학과 국내 대학에 배부하고 역대 명인들의 사적들을 왕조실록 등 문헌에서 조사 발굴 편찬해오고 있으며, 교육부 학술지원금·대통령 격려금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5) 예술 활동

장성군은 광주와 인접해 있어서 광복 이후는 뚜렷한 독자적인 활동을 보일 수 없었다. 1950년대까지는 명절 때면 각 마을 청년 중심으로 연극·콩클대회들이 성행하였고 각급 학교의 학예 발표 등이 전부였을 정도였다.이후 장성중.농고 재학생을 중심으로 [황룡동인회]가 활발히 활동하여 동인지 5회 발행과 시화전을 크게 열기도 하였으며, 문화원(원장 김영수)에서는 『향토』라는 인쇄판의 책을 2회 간행하였고 기자단에서는 군민축제를 중앙극장에서 열기도 하였다. 1964년에는 박내경·김연수·서화자 등이 중심이 되어 『향토문학』을 순문예동인지로 선보였으며 같은 해, 김연수·천갑자 시화전도 궁전다방에서 있었다. 이후 대학생연합회의 시화전, 그밖에 인사들의 미술·서예발표전 등이 있었다.

장성 출신 문인들로서는 평론의 큰 산맥을 이룬 김상일을 들 수 있고, 이어 김병욱이 중앙활동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미술·서예활동은 활발하다. 현당 김한영·석성 김형수는 장성 출신으로 동양화의 우뚝한 봉우리를 이루었고, 우계 오우선·호정 서영수도 크게 돋보이며 김상중과 작고한 김인규 교수는 원로 서양화가로서 미술 교육에 공헌하였다. 서울의 송룡·여운은 화단의 비중이 높고 도전추천작가 김신석과 서울의 신종섭이 의욕적인 활동을 보였다. 특히 조각가 김영중은 미협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작품 세계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채균·김일수는 도전 추천작가 및 국전 입선 작가로서 붓을 가다듬었다.이러한 미술·서예계의 저력을 바탕으로 향토문화개발협의회에서는 1981년 10월 호남 출신 작가들이 참여하는 문향초대작가전(동양화·서양화·서예·사군자·조각·공예·사진)을 열었는데 57명이 94점을 내놓아 광주(남도예술회관), 장성(군청회의실), 서울(신문회관) 등으로 장소를 옮기며 대 성황리에 행사를 마치기도 하였다.

1989년 이후 장성군내 문학 활동은 '장성 문학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장성문학회(회장 김병효)는 매년 『장성문학(長城文學)』을 간행하여 11호가 발간되었으며, '장성 문학의 밤', '세미나' 등의 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아동 문학가 백민과 수필가 기일혜 등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미래 사회와 장성 문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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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지식 정보화 사회로서 인류 문명의 대 전환기로 이제 문화가 국가·지역사회· 개인의 부와 행복을 창출하는 핵심요소가 되어있다. 문화도 권역화(지역화) 산업화 추세이며 지방자치시대에 이미지 제고와 경쟁력을 확보하여 지역 경제를 발전시켜야 함이 당면과제이다. 그러나 새 문화 창조는 기상천외한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문화 유산과 원형을 소재로 부가가치를 더하여 새로운 문화와 상품을 창출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장성군이 추진하고 있는 홍길동 관련 사업은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다. 예전부터 홍길동은 실존인물로 황룡면 아치실 출신이라고 민간에 전해 왔는데 1974년 변시연 선생 제보로 연세대 설성경 교수가 중앙일보에 공개했고, 변범석이 홍길동 마을 아치실을 관광자원화하자고 제안했다. 홍길동 관련 사업 추진 경과는 아래와 같다.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변범석의 공무원 제안이 채택되어 1997년 홍길동 복원사업추진위원회(의장 김흥식 군수)가 위원 35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어 홍길동이 실존 인물이라는 고증에 용역을 맡겼고 출생시기, 활동상황, 홍길동 유적 고증자료의 용역 결과로 홍길동은 가상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라는 확증을 얻었다. 홍길동의 해외 활동에 대한 답사, 홍길동 학술토론회(1997, 서울 전경련회관), 홍길동 국제학술세미나(1998, 장성군청회의실), 홍길동 국제 학술심포지엄(2001 장성군청 회의실)을 열어 이를 뒷받침했다.장성군은 홍길동 테마파크를 조성하고자 생가 터 복원 등의 연차 계획을 세워 추진하고 있으며 일본 유구의 홍길동 관련 사적 발굴을 실시하여 보존 방안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장성군은 5월에 홍길동 축제를 거행하고 있다.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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