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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장성문화권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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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절효공 서릉(節孝公 徐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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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효공 서릉은 본관이 장성으로 고려 고종조 때 희팔(希八)의 둘째아들로 북일면 작동에서 태어난 정치가이며 효자인 유학자이다. 그는 부모님 초상을 당하여 시묘막에 있을 때(1232∼1233) 친척들의 자제를 가르쳤다. 이때 나이어린 이들이 예의와 제도를 알지 못함으로 거가십훈을 지어 가르쳤다. 첫째는 삼강을 바로 세울 것 (扶植三綱), 둘째는 오륜을 돈독하게 펼 것 (惇敍五倫), 셋째는 관대한 마음으로 아랫 사람을 아낄 것 (寬以御下), 넷째는 예의로써 윗 사람을 섬길 것(禮以事上), 다섯째는 초상을 당하여서는 슬픔을 다할 것 (臨喪致哀), 여섯째는 제사를 당하여서는 공경을 다할 것 (當祭致敬), 일곱째는 마음 가짐을 공평하게 할 것 (持心以公), 여덟째는 일 처리는 의롭게 할 것 (處事以義), 아홉째는 아들 교육은 정의롭게 할 것 (敎子以正), 열째는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대접할 것(待人以恕) 등이다. 이 거가십훈은 하늘이 감동하여 청개구리를 떨어뜨려 주었다는 감천추와도(感天墜蛙圖)와 함께 1975년에 간행된 절효공실기에 실려 있다.

2. 손암 김신덕 (遜菴 金愼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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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조의 충신인 손암 김신덕 선생은 1400년에 황룡면 맥동에서 태어났다. 10세에 경전을 통달하였는데, 특히 춘추에 밝고 주역에 정통하였다. 관직은 장악원 주부(主簿)를 시작으로 송화현감, 청암 찰방(察訪) 등을 역임하였으나 단종이 양위하자 관직을 버렸다. 선생은 손암유고(遜菴遺稿)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이 문집에는 시·율·부·잡저·부록 등이 수록되었다. 그 작품 가운데에는 채미유감(採薇有感), 명월시(明月詩), 효귀음(曉歸吟), 답가질복양재시(答家姪復陽齋詩) 등이 있는데, 이들 글에서 선생의 애틋한 충절을 읽을 수 있다.

3. 지지당 송흠 (知止堂 宋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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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문신인 효헌공(孝憲公) 송흠(1459∼1547) 선생은 본관이 신평으로 삼계면 주산리 정각마을 출생으로 효자이며 청백리이다. 선생은 1480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2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어 옥당(玉堂)에 들어갔다가 연산군대의 정치혼란에 따라 고향에 내려와 면앙정 송순, 학포 양팽손 등 쟁쟁한 제자를 양성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다시 관직에 나아간 선생은 홍문관 박사, 수찬, 사간원 정언, 헌랍, 병조정랑, 전라도사 사헌부 지평 등을 지내다가 노모의 봉양을 위해 외임(外任)을 자원하여 보성·옥과·순천·여산 등의 수령을 지냈고, 다시 조정에 들어가 사헌부 장령, 의정부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다시 전주부윤·나주목사·광주목사를 하고 승정원 승지를 지냈고 이어 병조판서, 이조판서, 좌참찬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선생은 공명정대하였기에 주위의 추앙을 받았으며 청렴성실하여 관직생활 중에 재산을 모으지 않아 청백리로 뽑혔으며, 임금의 신임을 받아 7번이나 포상을 받았다. 이 때문에 80세가 넘도록 관직에 있었다. 이렇듯 조야에 덕망을 떨쳤기에 노모의 봉양을 위해 휴가를 얻어 귀향할 때에는 삼공육경(三公六卿) 이하 많은 인사들이 한강가에 나아와 전송하였는가 하면, 규암 송린수(宋麟壽)는 감사로 와서 어명을 받아 선생을 위해 기영정을 지어주고 열 고을의 목사와 군수,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축하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선생은 지지당유고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이것은 7세손 명현(1659∼1743)이 처음 편찬하였고 10세손 휘좌(徽佐)가 재간하였다. 이어 17세손 성기(成基)가 국역본을 간행하면서 왕조실록 및 기타 문집 등에서 지지당과 관련된 자료를 함께 모았다. 1·2권에는 지지당 및 당시 선비들의 차운(次韻)·원운(元韻) 등 한시(漢詩)를 실었고, 3권에는 선생의 생전 자료를 모아 부록으로 꾸몄고, 4권에는 후학들이 남긴 묘비문·행록(行錄)·청시장(請諡狀)·기영정(耆英亭) 연회록 등을 모았으며, 5권에는 향사(享祀) 관계를 남겼다.

4. 아곡 박수량 (莪谷 朴守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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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면 아곡리에서 종원의 둘째로 태어난 아곡 박수량(1491∼1552) 선생은 본관이 태인으로 효자이며 행정가이다. 김계의 제자로 1502년 12세 때 관찰사 앞에서 망해부(望海賦)를 지었던 선생은 1513년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9월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분교인 광주주학(廣州州學) 교수를 시작으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이후 충청도 도사(都事), 춘추관 기주관, 형조정랑, 사헌부 지평, 병조정랑, 고부군수 등에 발령되었다. 37세에 부상(父喪)을 입은 선생은 잠시 관직생활을 쉬다가 상기(喪期)를 마친 즉시 사간원 헌랍에 나아갔고 다시 사헌부 장령, 봉상시 첨정, 사간원 사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간신들의 죄상을 탄핵하였는가 하면 외방여자(外方女子)의 궁중출입 엄금을 주장하였다. 41세에는 성균관 사성(司成)에 있다가 노모의 봉양을 위해 보성군수로 나왔으며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 내섬시 시정, 군기시 시정,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좌승지, 호조참판, 함경도 관찰사, 한성부윤, 호조참판, 공조참판, 예조참판,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56세에는 상호군에 발령되었다가 청백리로 선임되었고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 호조판서, 의정부 우참찬 겸 지경연 지의금부사 지춘추관사 등을 지냈다. 선생은 중종실록과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64세에 임종하였다. 임종을 맞은 선생은 "내가 죽거든 시호도 청하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라"는 말씀을 남겼다. 부음이 조정에 알려지자 명종은 조회를 2일간 멈추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모시는가 하면 백비(白碑)를 보내어 선생의 청백을 기렸다. 순조는 1805년에 정혜(貞惠)라는 시호를 내렸다. 위와 같은 사적은 명종의 어찰(경(=박수량)을 만나지 못한 것이 오래 되었소. 건강상태는 또한 어떠한지 궁금하오. 듣건데 경의 집 부엌에서 연기가 나지 않은 때가 한 달동안에 곧잘 반이나 된다니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오. 나라 동산의 벼가 막 익었음에 몇 말을 타작하여 보내노니 비록 물품은 빈약하되 담긴 뜻이 크다는 점을 그대는 어찌 여길런지. 애오라지 마땅히 궁궐에 들어와 나를 보좌할 것을 간절히 바라고 바라오)에 잘 드러난다. 선생의 문집은 선생의 14세 종손인 봉구(鳳求)에 의해 1권 1책으로 편찬되었으며, 15세손인 래욱이 1985년에 국역본으로 '아곡박선생실기'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5. 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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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1510∼1560) 선생은 본관이 울산이며 참봉 영(齡)의 아들로 황룡면 대맥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6세에 시를 써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신재 최산두와 모재 김안국에게 배웠다. 1532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퇴계 이황과 함께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성균관에서 공부한 후 고향에 돌아간 퇴계는 "내가 성균관에서 벗 한 사람을 사귀었으니 곧 하서 한 사람 뿐"이라고 했는가 하면, "하서의 도학은 짝할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선생은 인종대왕이 동궁(東宮)일 당시 가르쳤으며, 동궁은 묵죽을 그려주어 불변의 뜻을 밝혔다. 선생은 중종에게 기묘명현인 정암 조광조 등의 복권 상소를 올려 선비정신을 보이는 한편, 저하된 사기(士氣) 진작에 힘썼다. 인종이 승하하자 옥과현감을 마지막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선생은 명종의 계속된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인종을 그리며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내며 많은 글을 남겼다. 총 19권 10책으로 엮여진 선생 문집의 권수에는 어사재문을 비롯 문묘종사교서와 문묘종사반교문, 문묘승배축문, 그리고 송시열·조희문의 서문을 실렸으며, 1권에는 부(賦) 14편, 2권에는 한시(漢詩) 82편, 3권에는 한시 95편, 4권에는 한시 68편, 5권에는 한시 292편, 6권에는 192편, 7권에는 한시 268편, 8권에는 한시 134편, 9권에는 한시 126편, 10권에는 한시 244편, 11권에는 차(箚)가 1편, 서(書)가 6편, 서(序)가 2편, 기(記)가 1편, 발(跋) 2편 등이 수록되었고, 12권에는 찬(贊) 1편, 명(銘) 1편, 송(頌) 1편, 전(箋) 3편, 계(啓) 1편, 상량문 1편, 제문 4편, 묘지명 5편, 잡저 5편 등을 수록하였고, 부록 1권에는 가장(家狀)을 비롯한 5편을 수록하였으며, 부록 2권에는 서술(敍述) 65조를 비롯하여 발문에 이르기까지 38편을 기록하였으며, 부록 3권에는 선생의 세계(世系), 연보(年譜)를 수록하였다. 속편에서는 시를 비롯하여 잡저에 이르기까지 32권을 수록하였다. 선생께서 타개하신 뒤, 선생에 대해 율곡 이이는 '청수부용(淸水芙蓉) 광풍재월(光風霽月)'이라고 하였으며, 송강 정철은 '동방에 출처가 올바른 분이 없는데 오직 담재 선생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우암 송시열은 "도학·문장·절의를 겸비한 분은 오직 선생 한 분이라"하였으며, 정조께서는 "하서의 도학은 동방 제일로 위로는 정자·주자의 밝은 학문을 보았고 아래로는 이퇴계·이율곡의 대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극찬하면서 문묘배향(文廟配享)을 윤허하였다. 이로써 하서 김인후 선생은 호남 유일의 선정(先正)이 되었으며, 전라도는 파벽(破僻)하게 되었다.

6. 하곡 정운룡 (霞谷 鄭雲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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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곡 정운룡(1542∼1593) 선생은 북일면 성덕리에서 태어나 회재 박광옥으로부터 학문과 의리를 배웠다. 18세에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으며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고봉 기대승에게 배울 때 고봉선생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선생의 학문은 사서(四書)를 근본으로 하였으되 논어를 가장 많이 읽었으며 심경·근사록·소학 등을 손에서 놓지를 않았다. 박사암·성우계·노옥계·조남명·고제봉·정송강 등과 깊이 교유하였으나 정여립과는 일찍이 절교하였다. 장성부사 이계를 모암서원 원장으로 추대하여 후진양성토록 하였으며, 자신도 만년에 계천정사를 지어 강학하다가 박사암의 추천으로 왕자사부에 특채되었다. 임진왜란을 당한 선생은 본도감사 이광을 탄핵하였고 고창현감에 부임하여 관사에서 순직하였다. 선생의 문집은 5권 1책으로 간행되어 전해지고 있다.

7. 망암 변이중 (望菴 邊以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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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읍 장안에서 태어난 망암 변이중(1546∼1611) 선생은 본관이 황주로 13세에 청계 박원순에게 백우당 박상의와 함께 배웠고 20세에 성우계를 22세에 이율곡을 만나 성리학의 길을 터득했다. 23세에 성균관 생원시, 27세에 문과 초시에서 문과 1등, 28세에 문과 병과(丙科) 1등으로 합격하여 권지교서관정자(權知敎書館正字)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32세때 부상(父喪)을 당하자 지극으로 예를 다하였다. 선생은 지나친 슬픔으로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는가 하면, 묘소의 남쪽 봉우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초하루·보름이 되면 서쪽 대(臺)위로 올라 묘소를 바라보며 곡(哭)을 하였다. 이 암자를 망암(望菴)이라 불렀는데 이를 아호로 삼았다. 선생의 나이 47세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왕명으로 전라도초모사가 되어 이 지역에서 의병과 의곡(義穀)을 모으는 한편, 화차를 개발하여 도원수 권율에게 40량을 보냈다. 이 화차는 행주대첩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1세에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하곡 정운룡, 추담 김우급 등 여러 유학자와 경전을 토론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더욱이 향헌(鄕憲) 10여조목을 만들어 봄·가을로 강습하게 하여 향약의 토착화에 기여하였다. 66세로 삶을 마치자 왕은 왕명을 내려 가선대부이조참판 겸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홍문관제학세자좌부빈객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증직을 내렸다. 이어 전라도 유림은 1620년 선생을 기리기 위해 봉암서원(鳳巖書院)을 세웠다. 이 서원에는 1707년 자하(紫霞) 변경윤, 1728년 율정(栗亭) 윤진, 청류당(聽流堂) 변휴 등이 추배되었다. 문집은 6권 1책으로 간행되었다. 1권 한시 31편, 2권은 상소 3편, 편지 33편, 3권은 잡저 5편, 서·발·축이 각 1편, 제문 3편, 묘갈명 1편 등이 수록되었고, 4·5·6권은 모두 부록이다.

8. 자하 변경윤 (紫霞 邊慶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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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 변경윤(1574∼1623) 선생은 본관이 황주로 망암 변이중의 아들로 장성읍 장안에서 태어났다. 우계(牛溪)와 사계(沙溪)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선생은 28세에 향시에 30세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였기에 관직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광해군이 등극한 첫해에 "현재(賢才)를 등용하고 간신을 물리치며 조정을 맑게 하고 궁금을 근엄히 하여야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은 이를 읽고 "윗 사람에 대들어 어지러운 말을 했으며 임금을 업신여기고 부도(不道)하다"고 하여 죄를 주려했다. 이에 선생은 다시 상소하여 끝내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광해군은 "내가 법률에 따라 처리하고자 했지만 하는 것을 보니 망인(妄人)에 지나지 않다"고 하고 5일간 감옥에 가두었다가 벼슬을 삭탈하고 방면하였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시키자 개탄을 이기지 못했으나 연이은 부모님 상으로 6년 동안 상중(喪中)에 있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상(喪)을 마치자 곧바로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매우 격절하여 박승종(朴承宗)은 이 상소를 광해군에게 올리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상소한 많은 유생들이 죄를 받았으나 자신만 죄를 받지 않음을 부끄러이 여기고 호(號)를 치제(恥齋)라 하였다. 이 일이 있고난 후 선생은 백암산 자하동에 들아가 세상을 등지고 후진양성에만 매진하였다. 후에 제자들이 마을 이름을 따라 자하선생이라 하였다. 선생의 문집으로 5권 2책으로 1958년 초간되었고 2000년 국역본이 발간되었다. 1·2권은 부(賦)·사(辭)·시(詩)를 3권에는 소·책(策)·서(書)를, 4권에는 잡저를 비롯 서·발·고유(告諭)·제문(祭文) 등을 실었고, 5권은 부록으로 연보(年譜), 유사(遺事) 등을 모았다. 당시 문학계에서는 차오산(車五山) 권석주(權石州)가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차오산은 선생에 대해 "이때 문장을 용(龍)에 비유한다면 여장(汝掌)은 머리이고 덕여(德餘 : 선생의 初字)는 허리이며, 나는 꼬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세평(世評)으로 보아 선생의 출사는 늦은 감이 없지 않다.

9. 추담 김우급 (秋潭 金友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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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담 김우급(1574∼1634) 선생은 본관이 광산으로 황룡면 황룡리에서 대진(大振)의 아들로 태어나 대성(大成)에게 양아들로 입적되었다. 특별한 스승이 없이 학문을 닦은 선생은 25세에 정유재란을 만나 어머니를 모시고 관동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이 피난 와중에 부녀자를 약탈하는 명의 군사를 보았다. 이에 선생은 장검을 빼들고 명의 장수를 찾아가 "명의 군령이 이처럼 엄중하지 못한데 어찌 우리나라를 지원하겠는가"하니, 명의 장수는 놀라 사과하며 즉석에서 해당 병사를 처형하였다. 35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때 광해군 조정을 장악했던 인물들이 인목대비를 폐출하기 위해 중지첩(重持帖)을 돌리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선생은 분개하여 "어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의당 여기에 호응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선생의 이름을 유생명부에서 삭제하였는가 하면 문과에 장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명단을 삭제하여 방목에서 빼버렸다. 선생의 관직생활은 인조반정 이후 사림의 추천으로 목릉 참봉에 잠시 부임한 것이 전부였다. 선생은 사후에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는가 하면 서릉(徐稜)을 모신 모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선생의 문집은 8권 1책으로 1929년에 초간되었고 2001년에 국역본이 나왔다. 1권에는 한시 109편, 2권에는 기문과 한시 32편, 3권에는 한시 244편, 4권에는 한시 366편, 5권에는 한편 234편, 6권에는 한시 401편, 7권에는 한시 192편, 8권에는 서 1편, 계(啓) 1편, 책(策) 1편, 서 2편, 명(銘) 3편, 상량문 1편, 제문 2편, 묘표(墓表) 1편, 그리고 부록으로 선생의 행장, 묘지명 등이 수록되었다.

10. 명산 변덕윤 (薇山 邊德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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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 변덕윤(1593∼1655) 선생은 본관이 황주로 복중의 아들로 장성읍 장안에서 태어나 사계 김장생의 제자가 되었다. 선생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의병과 의곡을 모아 상경하고 있었는데 항복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백암 명정산 속에 은둔하여 자호를 명산이라 부르고 독명헌(獨明軒)이라는 세 글자를 문지방 위에 걸어놓고 "다행하게도 소화국에 태어나, 저 대명(大明) 하늘을 바라보니, 해와 달 마침내 어두움이 없어, 숭정 연호 만만년 가리라"라는 시를 지어 자신의 모화사상을 보였다. 최명길의 추천에도 불응하였고 사옹원 봉사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만년에 어버이 묘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여남처사(廬南處士)라고 불렸다. 문집은 후손 변시연에 의해 1993년에 2권 1책으로 간행되었다.

11. 미산 김여옥 (薇山 金汝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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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 김여옥(1596∼1662) 선생은 본관이 광산으로 추담선생의 아들로 황룡면 황룡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추담선생과 우계선생에게서 수학한 선생은 인조 2년 문과에 급제한 후 효종 10년 평안감사를 끝으로 사직하였으므로 중간에 휴직기관을 참작하더라도 37년간 관직에 있었다. 관직에 있을 당시 선생은 종각에 물이 흐름을 보고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것을 주청하였는데 과연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 아울러 1651년에 조정에서 대동법을 강론하였으므로 선생에 의해 합격하지 못한 사람들은 벼슬을 내놓아야 했다. 평양감사로 부임할 때 효종은 선생에게 5개 벼슬을 함께 내린 것은 북벌정책에 있어 막중한 책임을 부여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며, 편지에서 여여(與予)라는 문구를 써서 군신간에 깊은 교분을 보였다. 선생이 죽자 현종은 예관(禮官)이 대신 읽은 제문에 선생의 관직생활을 언급하면서 가장 청백한 신하였다고 했다.

12. 송계 변우익 (松溪 邊友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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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 변우익(1601∼1670) 선생은 본관이 황주로 희윤(希胤)의 아들로 장성에서 태어나 자하(紫霞)선생에게서 배웠다. 향시 또는 문과초시에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는 실패하였다. 당시 병조판서 이시백이 그의 학식과 덕망을 조정에 천거하여 사산감역(四山監役)에 발령되었으며 사도시 주부에 이르렀는가 하면 만년엔 많은 명사(名士)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문집은 전라남도가 향토문화연구자료 제9집으로 펴냈다.

13. 랑옹 김현 (浪翁 金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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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옹 김현(1606∼1683) 선생은 시주(時柱)의 아들로 나주 회진의 오사마동에서 태어나 성장한 뒤 삼서면 소룡에 이거하였다. 선생은 기상이 청순하고 자질이 뛰어나 명필로 세상에 알려졌다. 나이 겨우 7세에 금성관 현판을 썼으며 1624년에 진사가 되었다. 문장과 학문은 당시의 사표가 되었고 효우와 덕망은 향당의 표준이 되었기에 그 문하에서 수업한 제자들은 모두 세상에 이름난 큰 선비들이었다. 그러나 벼슬따위는 뜬 구름으로 여기고 자연을 노래하며 자호를 부구자(浮 子) 또는 랑옹이라 했다. 선생의 문집은 4권 1책으로 전해오다가 1998년에 국역본이 간행되었다. 이 문집은 축사문(逐蛇文)이 유명하다.

14. 창암 변명익 (滄巖 邊命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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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 변명익(1610∼1660) 선생은 본관이 황주로 자하 변경윤의 아들로 장성 북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학문을 닦고 김청음, 권석주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식견을 넓혔다. 벼슬길에 나아가 다섯 고을 수령을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병자호란에는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모셨다. 그가 남긴 문집 3권 1책은 1958년에 간행되었다.

15. 송백당 이실지 (松栢堂 李實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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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백당 이실지(1624∼1704) 선생은 규명(奎明)의 아들로 동화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아름다운 자품으로 소학을 익히 읽어 몸소 실천에 옮겼으며 우암선생의 제자가 되었는데 우암은 그의 학문을 호남에 거벽(巨擘)이라고 극찬하였다. 선생은 송동춘·김문곡과도 많은 학문을 강론하였는가 하면 나응소·강이주 등과 상소하여 우암을 모함한 나위·이의·김회 등의 죄상을 논박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하서선생과 우암선생 두 분을 위한 사업에 삶을 바쳤다. 문집은 3권 1책으로 1982년에 간행되었는데 그 중에 회천일기(懷川日記)가 유명하다.

16. 송암 기정익 (松巖 奇挺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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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 기정익(1627∼1690) 선생은 본관이 행주로 진탁의 아들로 황룡면 관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송우암의 제자로 성리학에 깊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박행중 등 사우(師友)와 함께 학문을 강론하면서 문집 5권 2책을 남겼다. 1권은 시문 32편, 2권은 편지 56편, 3권은 제문 8편, 행장 5편, 4권은 묘지 2편, 서문 1편, 설(說) 1편, 기타 잡저(雜著) 42편, 5권은 속집으로 시 34편, 상소 2편, 서 19편, 서문 1편, 기문 1편, 상량문 3편, 행장문 3편, 묘갈명 2편, 제문 2편, 전문(箋文) 1편 등이고, 6권은 논문이 1편, 잠(箴) 1편, 책(策) 4편, 의(擬) 7편, 그리고 선생의 묘표(墓表)와 만장 등 61편을 수록하고 있다.

17. 청유당 변휴 (聽流堂 邊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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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유당 변휴(1640∼1699) 선생은 본관이 황주로 통덕랑 세기의 아들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조부모에 의해 양육되었다. 조부 송계공에게 수학하여 학업이 대성하였다. 초시에 십여차례 합격하여고 숙종 기사년 전시(殿試)에 나아가 답안지를 작성하였으나 마침 인현왕후가 폐위되었다는 소문이 있자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고 퇴장하였다. 송동춘·박현석·윤명재·이구천 등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경학과 성리학에 더욱 정진하였다. 박현석·유약재의 천거가 있었고 암행어사와 감사의 주청도 있었으나 왕명은 얻지 못하였다. 송계공이 편찬한 오산명인록을 목각 간행했고 모암서원 청액소를 올려 윤허를 얻었으며 조양산 부자(父子)에게 충신정려를 내리게 하였다. 전라남도가 그 문집을 향토자료로 간행했다.

18. 매헌 박행중 (梅軒 朴行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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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박행중(1641∼1689) 선생은 본관이 태인으로 참봉 윤감의 아들로 황룡면 하남에서 태어났다. 기송암의 제자로 경학에 깊었으며 실천적 선비가 되었다. 벼슬에는 관심없이 매실 마을터를 닦아 고매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당시 제현들의 문집에서 읽을 수 있다. 1989년에 한국고문연구회가 그 문집을 간행했다.

19. 범호정 변광식 (泛湖亭 邊光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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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호정 변광식(1648∼1679) 선생은 본관이 황주로 금산군수를 지낸 명익(命益)의 아들이다. 부친의 학문을 이어받아 일찍이 시·서·화 삼절로 항계 임영, 농암 김항협 등과 함께 명성이 높았다. 진사로 통선랑이 되어 서장관을 따라 중국에 갔는데 중국에서도 선생의 학문을 극찬받았다. 문집은 2권 1책으로 간행되었는데 1권은 시 408편, 범호정상량문 등 문(文) 3편, 2권은 부록편이다. 전라남도는 이 문집을 [향토문화연구자료] 제2집으로 간행하였다.

20. 각재 김기하 (覺齋 金器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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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재 김기하 (金器夏 : 1649∼1701) 선생은 본관이 울산으로 황룡면 맥동에서 형지의 아들로 태어나 형우의 양아들로 입적되었다. 총명한 자품으로 빙부(聘父) 유세익에게 배웠고 다시 송우암을 사사하면서 성리학에 전력하였으며, 김수항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당대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하서선생 천양사업과 우암선생 추모사업에 혼신을 다했으며 이조판서 이세백의 천거로 후릉참봉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선생께서 죽은 뒤 좌승지에 추승되었고, 연호사(硯湖祠)에 배향되었다. 매헌 박행중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 등 37편과 기타 시문을 수록한 문집이 1940년 1권1책으로 간행되었다.

21. 원관헌 김극광 (遠觀軒 金克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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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관헌 김극광(1653∼1724) 선생은 여석의 아들로 황룡면 황룡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품행이 독실한 선비로 제례에 밝았다. 임창계와는 도의적 교우였으며 문곡·단석 두분이 선생의 시문을 읽고 "호남에 이러한 큰 문장이 있다니"하며 극찬하였다. 그리하여 명성이 전국에 알려졌으며 그 시문을 송전한 이들이 많았다. 군수로 부임했던 승지 김진옥, 판서 조평만, 평운군 신성하, 목사 이성좌 등도 재임중에 어려운 일이 있을 경우에 선생과 의논하였다. 문집은 9권 2책으로 1962년 편찬되었다. 1권은 시 140편, 2권은 시 145편, 3권은 시 203편, 4권은 시 199편, 5권은 시 154편, 6권에는 146편, 7권에는 편지 22편, 8권은 편지 30편, 9권은 제문 10편을 실었으며 부록으로 발문을 남겼다.

22. 옥강 송명현 (玉岡 宋命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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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강 송명현 (1659∼1743) 선생은 본관이 신평으로 지지당의 7대손이요 세형의 아들로 삼계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부귀엔 뜻이 없고 학문에 전력하여 윤명재의 제자가 되었는데 명재가 한 번보고 크게 칭찬하였는가 하면 두 아들을 시켜 노자돈을 주도록하였다. 박세채·최석정 등과 교분이 깊었으며 김사계를 문묘배향하는 일, 지지당이 시호를 받는 일, 용암사와 수강사를 세우는 일 등에 앞장섰다. 문집은 9권 1책으로 편찬되었는데, 전라남도가 1986년에 향토문화연구자료 제3집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글 가운데 많은 것들이 전하지 않고 있다. 즉 역대촬요(歷代撮要)·방두잡록(方頭雜錄)·하락변해(河洛辨解)·경훈요편(警訓要編)·소학석의(小學釋疑)·심경석의(心經釋疑)·근사록석의(近思錄釋義) 등 큰 작품이 전하고 있지않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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