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군 로고

국가상징 국무회의 알아보기

제5장 문화재

  • 트위터
  • 페이스북
  • 구글
  • 현 페이지 엑셀로 다운
  • 현 페이지 워드로 다운
  • 현 페이지 인쇄
4차 메뉴 정의
5차 메뉴 정의
  • 1. 서원 및 사우
  • 2. 누정 및 정각
  • 3. 묘·영당
  • 4. 충·효·열 정려·비
  • 5. 불교 유적
  • 6. 관방유적
  • 7. 금석문
  • 8. 회화
  • 9. 공예품

1. 서원 및 사우

원본파일 다운로드

(1) 현존하는 서원·사우

1) 양계사(良溪祠)

남면 마령리 349번지 내마마을에 있다. 1834년(순조 34)에 청송백 심덕부(沈德符)를 주향하고, 심계년·심연 등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57년에 중건하고 복설하였다. 제향은 매년 9월 20일에 행한다.

2) 가산서원(佳山書院)

삼서면 홍정리 487번지 가산마을에 있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유풍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498년(연산 4)에 향내 유림의 발의로 삼계면 주산리 백산촌에 창건하고 백산사(白山祠)라 하였다. 1766년(영조 42)에 현 소재지로 이건하였는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을 추배하였고 가산서원이라 칭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어 영정만 영당에 모셨다가 1957년 현지에 중건하였다. 1998년부터 이재인(李在仁)을 추배하고 향사하고 있다. 제향일은 매년 9월 상정일에 행한다.

3) 두동사(斗洞祠)

삼서면 두월리에 있다. 1860년(철종 11)에 감사 이손수(李孫秀)를 주향하고, 이조·이분 등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70년 복설 하면서 이양·이삼언 등을 추배하였다. 1992년에 전체 사우를 중건하였다. 제향은 매년 10월 9일에 행한다.

4) 표의사(彪義祠)

삼서면 유평리 373 부귀마을에 있다. 의병장 심우신을 모신 사우로, 1713년(숙종 39) 학성리 장천사에 주향되었는데 1868년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03년 유허비를 세웠으나 그 터가 상무대 편입부지로 들어가자 1989년 이곳에 복설하고 이름을 표의사라 하였다.

5) 수산사(首山祠)

삼서면 수양리에 있다. 1967년 향내 유림의 발의로 중봉 조헌(趙憲)을 주향하고, 김형진을 배향하였다. 제향은 매년 3월 6일에 행한다.

6) 도산사(道山祠)

삼계면 능성리에 있다. 1974년 향내 유림의 발의로 양헌공을 주향하고, 고합·고협·고운·고경이·고문두·고순후·고유후·고부천 등을 배향하였다. 제향은 매년 3월 9일에 행한다.

7) 수산사(水山祠)

황룡면 신호리 302­2 신촌마을에 있다. 본래 장산리 수산마을에 1836년(헌종 2) 돈재 박연생(朴衍生)을 주향하고 김개를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77년 현지에 중건하고 복설 하면서 박수량·박상의·박상지 등을 추배하였으며, 1986년 박자온을 추배하였다. 제향은 매년 2·8월 25일에 행한다.

8) 옥산사(玉山祠)

황룡면 옥정리 80 대해마을에 있다. 맹암(孟巖) 김영열(金英烈)의 영정을 모신 사우로 일명 맹암영당(影堂)이라 부른다. 1530년(중종 25) 경기도 장단에서 옥정리 맥정마을에 이건하여 세종대왕의게 하사받은 영정을 모셨다. 1643년(인조 21) 영당을 중수하고, 1661년(현종 2) 진원면 학림사에 배향한 김영열을 이곳에 모시고 옥산사로 바꾸었다. 그 뒤 1812년(순조 12) 사우를 와룡리 와곡으로 옮겼다. 이때 영정을 새로 모사하고 구영정은 땅에 묻었다. 1861년(철종 12) 지금의 대해마을로 옮기고 1998년 사우를 중수하였다.

9) 용전사(龍田祠)

북일면 성덕리 226 용전마을에 있다. 1976년에 향내 유림의 발의로 모암서원에 주향하였던 절효공 서능(徐稜)을 주향하였다. 제향은 매년 3월 10일에 행한다.

10) 죽림사(竹林祠)

북이면 만무리 376번지에 있다. 심은(深隱) 이수(李隨: 1374­1430)를 주향하고, 1590년(선조 23)에 향내 유림들의 발의로 장성군 진원면 죽림동에 창건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에 병화로 소실되었다. 그 뒤 1814년(순조 14)에 본손이 북이면 부동에 이거하면서 이곳에 이건하면서 정재(靜齋) 윤홍(尹泓: 1655­1731)을 추배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나, 1946년 현재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다. 제향은 매년 3월 4일에 행한다.

11) 송계사(松溪祠)

북이면 오월리 690­1 송산 마을에 있다. 문희공(文僖公) 유창(劉敞: 1352­1421)을 주향하고, 1492년(성종 23)에 진원현령인 유세분(劉世 )이 북일면 성덕리 사동에 사우를 건립 향사해 오다가, 1545년(인종 1) 향내 유림들의 발의로 현재의 자리에 사우을 창건하였다.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어 1798년(정조 22)에 다시 건립하였으나,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24년에 재차 중건하고, 1950년에 문숙공(文肅公) 유사눌(柳思訥: 1375­1440)·은재(隱齋) 유한량(劉漢良: 1548­1597)·술재(述齋) 유덕문(劉德文: 1524­1607)·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 등 4현을 추배하였다. 제향일은 매년 3월 15일이다.

12)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

북이면 모현리 303번지에 있다. 1794년(정조 18)에 창의비를 건립하고 설단 제향해 오다가 직도리에 사우를 건립하고 17위를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32년에 이 곳에 복설하면서 충정공 이귀를 주향하고, 김경수·김제민·기효간·김홍우·윤진 등 67위를 합향하였다. 1982년 남문창의 390주년을 맞이하여 74위를 합향하였다. 제향은 매년 9월 15일에 행한다. (도 유형문화재 장성 남문 창의비 참조)

13) 사산사(泗山祠)

북이면 만무리 505번지에 있다. 1511년에 건립하였다. 그 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훼철되었다가, 1912년에 공자(孔子) 구(丘)를 주향하고, 안자·증자·자사·맹자·주자 등을 배향하였다. 1957년 강당을 건립하였다. 제향은 매년 2월 18일과 8월 27일에 행한다.

14) 서림사(書林祠)

북이면 만무리에 있다. 1970년 향내 유림의 발의로 송사 기우만(奇宇萬)을 주향하고, 공학원을 배향하였다. 제향은 매년 2월 24일에 행한다.

15) 삼일사(三一祠)

북이면 모현리 모현마을에 있다. 삼일사는 모현리를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지사 신경식, 유상능, 유상설, 고용석, 정병모, 신상우, 신태식, 신국호, 유상학, 유상순, 박광우, 오상구, 신종식 등 13인을 제향하는 사우이다.유림들의 뜻을 모아 사거리에 3 1운동 의적비를 건립하고, 3 1계를 조직 3 1절에 지사들의 위령제를 지내 오다 1990년에 삼일사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현존하지 않는 서원·사우

1) 동산서원지(東山書院址)

장성읍 성산리 동산마을에 있었다. 충정공 김시찬(金時燦)을 주향하고, 김천록·김필의 등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2) 학림서원지(鶴林書院址)

진원면 학림리에 있었다. 1718년(숙종 44)에 학천 김온(金穩)을 주향하고, 김영열·박희중·김응두·박준철 등을 배향하였다. 뒤에 박원순·이문룡·김의서 등을 추배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83년 유허비와 재실을 건립하였다.

3) 장천사지(長川祠址)

삼서면 학성리 원촌 마을에 있었다. 1713년(숙종 39)에 심우신(沈友信)을 주향하고, 임두춘·이재형·이단석 등을 배향하였는데 1837년 임두춘은 계산사로 이배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03년에 유허비를 세우고, 1989년 유평리 373번지에 표의사(彪義祠)를 짓고 심우신을 주향하였다.

4) 계산사지(桂山祠址)

삼서면 삼계리 계동 마을에 있었다. 1806년(순조 6)에 수옹 임두춘(林逗春)을 주향하고, 임수춘·임흥진·임화진 등을 배향하는 사우이다. 1837년 임두춘을 장천사에서 이배하여 모셨는데,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03년에 유허비를 세웠는데 2000년 4월 유허비를 복원하고 그 터를 정화하였다.

5) 용암사지(龍岩祠址)

삼계면 사창리 용암마을에 있었다. 1694년(숙종 20)에 팔송 윤황(尹煌)을 주향하고, 윤선거·윤증 등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 이전에 이미 훼철되었다.

6) 수강사지(壽岡祠址)

삼계면 수옥리 163­2 수각마을에 있었다. 1702년(숙종 28)에 효헌공 송흠(宋欽)을 주향하고, 이만영·이장영 등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869년에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7) 부연사지(釜淵祠址)

삼계면 월연리 부연마을에 있었다. 김덕생과 김우생·김석천을 모신 사우로 건립연대는 미상이며 1868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었다. 마을 뒷산에 사우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8) 사선사지(四仙祠址)

삼계면 신기리 76 사선마을에 있었다. 김무진과 김태·김약용·김겸·김양손을 배향한 사우로 1816년(순조 16) 세웠으나 1868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었다. 1888년(고종 25) 그 자리에 단을 건립하여 안장단이라 하였다. 현재 사우터는 상무대에 수용되었으며 후손들이 매년 음력 10월 10일 단향제만 지내고 있다. 대신 1990년 삼서면 삼계리에 어랑사(漁浪祠)를 건립하여 김겸과 김선정·강항·김정발·김중려를 배향하고 있다.

9) 추산서원지(秋山書院址)

황룡면 장산리 하사마을에 있었다. 1677년(숙종 23)정무공 기건(奇虔)을 주향하고, 기효간·기정익을 배향하였다. 다음에 기준·조찬한 등을 추배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0) 덕천서원지(德川書院址)

서삼면 대덕리 418­1 대곡마을에 있었다. 1822년(순조 22)에 충선공 문익점(文益漸)을 주향하고, 기효근·이실지·최철윤 등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85년에 유허비를 세웠다.

11) 연호사지(硯湖祠址)

서삼면 장산리 외연마을에 있었다. 1815년(순조 15)에 현실 송구(宋耉)를 주향하고, 김명하·김기하 등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2) 회계사(晦溪祠(址))

북하면 중평리 58 회촌에 있었다. 1832년(순조 32)에 손암 김신덕(金愼德)을 주향하고, 김처리·김수로·이귀·김인혼·김남중·김경수·김익휴 등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2. 누정 및 정각

원본파일 다운로드

(1) 현존하는 누·정

1) 기옹정(碁翁亭)

장성읍 장안리 97 장안마을에 있다. 기옹 변종락이 만년에 세운 정자로 1850년(철종 1) 세웠으며 1869년(고종 6)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으며 1937년과 1988년 중수하였다. 6각 지붕과 6개의 기둥으로 된 육각정으로 천장에 연화가 장식되어 있으며 [원운](변종락), [기옹정기](1935, 김동수)·[기옹정기](1947, 변만기)·[기옹정중수기](1937, 김원필)·[기옹정중수기](변승기) 등 5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2) 영사정(永思亭)

장성읍 장안리 장안마을에 있다. 변정(邊靜)과 변이중, 변경윤, 변윤중, 변치명(邊致明), 변득양(邊得讓) 등이 강학하던 정자로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마을 입구 산 위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이름이 산정(山亭)이었는데 1930년경 후손들이 중건하며 선현을 사모하는 뜻에서 영사정(永思亭)이라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주위에 담장이 쳐져 있으며 정자 아래 변취강(邊就康)의 처 영천이씨의 정려가 있다.

3) 오천정(梧泉亭)

장성읍 영천리 오동촌 방울샘 옆에 있다. 1930년에 오천 김규현(金奎鉉)이 건립하였다. 정내에는 이강(李堈)·윤용구(尹用求) 등의 시가 현판되어 있다. 1980년에 중수하여 옆에 있는 방울샘(鈴泉)과 같이 경승을 이루고 있다.

4) 기은정(岐隱亭)

장성읍 기산리에 있다. 1900년대에 기은 오일규(吳鎰圭)가 건립하였다. 정내에는 김요익(金堯益)·김봉기(金鳳基)의 시가 현판되어 있다.

5) 야은재(野隱齋)

장성읍 백계리 남양촌에 있다. 1868년(고종 5) 감역 김칠환이 건립하였다. 이 집은 서원 훼철령에 의해 북하면 회촌에 있던 회계사(晦溪祠) 강당을 이곳에 이건한 것이다. 현감 이용중(李容中)이 말년에 서식하던 곳이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우진각 지붕을 한 초가집이다.

6) 추원제(追遠齋)

남면 행정리 334번지 검정마을 뒤에 있다. 암계(岩溪) 이증(李增)의 묘각인 바 정조(1776­1800)연간에 건립하였다. 1894년(고종 31)에 현지로 이건하였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주위에 담장이 있으며, 정문은 소슬삼문형의 대문이 있다.

7) 향포정(香圃亭)

남면 분향리 분향마을에 있다. 천락호(千洛鎬)가 1900년(광무 4)에 세운 정자이다. 이 정자는 본래 분향마을 안에 있었으나 소실되었고 1919년 그의 아들인 천봉근과 손자인 천세욱이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 [향포자설](1900, 千洛鎬)·[향포정운](1900, 千洛鎬)·[향포소기](1909, 기우만)·[향포정중수기](1920, 吳駿善書) 등 4개의 현판이 남아 있다.

8) 둔벽정(遯碧亭)

삼서면 두월리 두동마을에 있다. 임찬인(林燦仁)과 임찬직(林燦直) 형제가 부친 임락하(林洛夏)의 유지를 받들어 세운 정자로 건립연대는 미상이다. 1905년과 1952년 두 차례 중수하였으며 1993년 복원하였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푸른색 기와이며 내부에는 [둔벽정중수기](1970, 宋在晟)·[둔벽정복원기](1993)와 [둔벽정원운]등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9) 죽하정(竹下亭)

삼서면 수양리 253 중수마을에 있다. 이규헌(李圭憲)이 세운 정자로 건립연대는 미상이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아들인 이계방(李啓昉: 1912­1986)이 1955년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개량기와이다. 내부에 [죽하정기](1937, 李炳觀記)와 [죽하정후기] (1961, 李啓昉識)·[근차죽하정운]·[원운죽하제]등 5개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가운데에 이규헌의 초상을 모셔 놓고 있어 영당의 성격도 지녔다.

10) 유유정(悠悠亭)

삼계면 주산리 155 백산 마을에 있다. 김조원(金調元)이 1564년(명종 19) 세운 정자로 본래 내계리 구시동에 있었다. 이후 쇠락했던 것을 1899년(광무 3)과 1912년 두 차례 중건하였으며 1960년 김조원의 묘가 있는 이곳 주산리로 이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는 [추차유유정수창운](김인후)·[유유정중건상량문](1899)·[유유정중건기](1899, 金在淇識)·[유유정중수기](1902, 朴魯烈記) 등 8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11) 백화정(百花亭)

황룡면 맥호리 196 맥동마을에 있다. 하서 김인후가 거처하던 정자로 1552년(명종 7) 건립하였으며 생가가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하였으며 그 뒤 손자인 김남중이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961년 후손인 김연수, 김봉수 등이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3칸 대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12) 개천정사(介川精舍)

북일면 월계리 23 오정마을에 있다. 하곡 정운룡이 강학하던 정자로 1568년(선조 1)에 건립하였으며 이후 쇠락했던 것을 1959년 후손들이 다시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는 [하곡초당기](성혼)·[개천정사중건기](1960, 정홍채)와 고경명·박순·이정구·김제민·이의록·이우신 등의 시 현판 9개가 걸려 있다. (정운룡 교육편 모암서원 참조)

13) 양심당(養心堂)

북일면 문암리 19 광암마을에 있다. 정지한(鄭之翰)·정지융(鄭之融)·정지핵(鄭之 ) 삼형제가 강학하던 정자로 1662년(현종 3) 세웠으며 쇠락하자 1960년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슬레트 지붕이며 뒷편에 양심당처사하동정공묘정비(1997, 李相鏞書)가 서 있다.

(2) 현존하지 않는 누·정

1) 서능초당지(徐稜草堂址)

서삼면 모암리 모암마을에 있다. 서능이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초당이다. 현재 모암마을 용소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축대가 일부분 남아 있다. 후손인 서용호(徐龍鎬)가 1919년 세운 비 앞면에 '절효서선생초당유허비'라고 새겨져 있다.

2) 취미대지(翠薇臺址)

서삼면 장산리 외연마을에 있다. 마을 뒷산 정상에 있었던 석대(石臺)로 마을에 세거하였던 진천 송씨가 대대로 시가(詩歌)를 읊던 장소이다.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지금은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고 그 자리에 대신 무덤이 있다. 양쪽에서 흘러오는 내가 대(臺) 아래에서 합쳐지고 팔경(八景)을 갖추었으며 대(臺) 위의 반송(盤松)이 하늘을 버티고 해를 가려 경관이 주변에서 제일 빼어나다는 평가를 일찍부터 받았다. 1812년 홍경래 난이 일어났을 때 송구(宋耉)의 후손인 송창(宋昶)이 매일 밤 대 위에서 축천문(祝天文)을 만들어 기원해 부사가 조정에 보고까지 하였다. 대 위의 반송은 비바람에도 끄떡 없어 석송(石松)이라 불렀는데 송영순(宋榮淳)이 자신의 호로 삼고 기우만이 석송기(石松記)를 썼다.

3) 연체당(聯 堂址)

서삼면 장산리 30 외연마을에 있다. 반응도(潘應濩)가 1770년(영조 46) 경에 동생 반응린(潘應潾)과 함께 마을 한가운데 세운 정자이다. 이후 쇠락한 것을 후손들이 1949년 복원하였으나 이듬해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현재는 그 터를 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 동쪽 입구에 후손들이 1991년 연체당유허비를 세웠는데 변시연이 비문을 짓고 이병현이 글을 썼다.

3. 묘·영당(廟·影堂)

원본파일 다운로드

(1) 묘(廟)

1) 박수량 부조묘(朴守良不 廟)

황룡면 아곡리 468 아곡마을에 있다. 청백리 정혜공 박수량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최초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며 1941년 중수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청백당 뒤에 위치하고 있다. 청백당은 명종이 박수량에게 하사한 99칸 집으로 본래 아치실에서 하남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었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빈터에는 유허비만 남아 있고 생가터였던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집을 짓고 청백당이란 현판을 걸어 놓았다. 유허비는 크기가 높이 133cm, 넓이 43cm, 두께 17cm로 앞면에 '정혜공아곡박선생유허'(碑字는 보이지 않음)라고 새겨져 있으며 옆에 하마석(下馬石)이 같이 서 있다.

2) 이수 부조묘(李隨不 廟)

북이면 만무리 376번지 죽림사 안에 있다. 세종대왕의 스승인 문정공(文靖公) 심은(深隱) 이수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1590년(선조 23) 진원면에 건립하였는데 정유재란에 소실되어 1791년(정조 15) 이곳에 복원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3) 김온 부조묘(金穩不 廟)

북이면 신평리 신평마을에 있다. 태조 개국원종공신이며 좌명공신으로 여산군에 봉한 학천(鶴川) 김은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북하면 중평리에 있었는데 1964년에 이건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주위에 담장이 있으며 정문은 소슬대문형의 대문이다.

4) 김인후 부조묘(金麟厚不 廟)

북하면 중평리 582 중평마을에 있다. 하서 김인후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1832년(순조 32) 북하면 용두리에 세웠으며 이후 옥과, 창평을 거쳐 황룡면 장산리에 모시다가 1957년 현재의 중평리로 이전하여 다시 세웠다. 유적은 내삼문인 집성문(集成門)과 사당인 문정묘(文正廟)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정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인종이 친히 그려 하사했다는 묵죽도와 연방계회도, 동호계회도, 그밖에 다수의 고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2) 영당

1) 기옹영당(碁翁影堂)

장성읍 안평리 668 안평마을에 있다. 변종락(邊宗洛)의 영정을 모셔 놓은 영당으로 1852년(철종 3) 세웠으며 1986년 중수하였다. 기옹영정은 1852년 회갑 때 어떤 승려가 와서 그렸다고 한다.(영정 내용은 문화재편 참조) 영당은 전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둘레에 담이 쳐져 있다.

4. 충·효·열 정려·비

원본파일 다운로드

(1) 정려(旌閭)

1) 황주변씨 삼강정려(黃州邊氏三綱旌閭)

장성읍 장안리 320 장안마을에 있다. 충신 변윤중·열여 함풍성씨·효부 장성서씨의 총·효·열 삼강정려로 1893년(고종 30) 나라에서 정표를 받아 세웠다. 변윤중의 호는 휴암, 학행으로 상의원 직장에 임명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정유재란 때 향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휴암 아래 황룡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처인 함풍성씨와 며느리인 변형윤의 처 장성서씨도 따라 순절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내부에 각각 [충신증통정대부이조참의행상의원직장변윤중지려](1893), [열녀증통정대부이조참의변윤중지처증숙부인함풍성씨지려](1893), [효부선무랑변형윤지처의인장성서씨지려](1893)와 조종필의 [정려기]등 4개의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1983년 중수하며 현판의 내용을 새긴 비 3개를 새로 세웠다.

2) 영천이씨정려(永川李氏旌閭)

장성읍 장안리 장안마을에 있다. 열여 영천이씨의 열행을 기린 정려로, 1636년(숙종 22) 나라에서 정려를 받아 세웠다. 영천이씨는 변취강(邊就康)의 처로 정유재란 때 남편과 함께 바위 동굴에 숨어 있다가 일본군에 의해 발견되어 남편은 피살되고 겁탈당하려 하자 황룡강 물 속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영사정(永思亭) 아래 위치하고 있다. 내부에 [고선무랑변공취강처열녀의인영천이씨지려](1636)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3) 광산김씨정려(光山金氏旌閭)

삼계면 내계리 842 아계마을에 있다. 열부 광산김씨의 열행을 기린 정려로 1887년(고종 24) 나라에서 정표를 받아 세웠다. 광산김씨는 노득좌(魯得佐)의 처로 남편이 병이 나자 정성껏 간호했으나 세상을 떠나자 수절하면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자식들이 모두 성장하자 평소 생각했던 대로 남편의 기일(忌日)에 약을 먹고 남편의 뒤를 따랐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며 내부에 [유명조선국효열여참봉노득좌지처의인광산김씨지려](1887)와 [정려기](1888, 沈東臣記) 등 2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처마 밑의 앞과 뒤에 도깨비 문양이 있다.

4) 수성최씨효열정려문(隋城崔氏孝烈旌閭門)

삼계면 부성리 560 부성마을에 있다. 최기필(崔基弼)의 효행과 함평이씨의 열행을 기린 정려로 1892년(고종 29) 나라에서 정표를 받아 세웠다. 최기필(1819­1869)은 모친이 병석에 눕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했는데 모친이 고기와 물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호랑이가 노루를 물어다 주고 얼음 위로 물고기가 튀어 나와 이를 가져다 봉양했다고 한다. 함평이씨(1860­1905)는 최기필의 손자인 최윤호(崔潤湖)의 처로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병이 나자 뒷뜰에 단을 쌓고 매일 빌었으며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낫게 하였다. 정려각은 일반적인 형태와는 달리 솟을 대문의 형태이며 안쪽에 [증동몽교관최공정려후적기](1895, 김도중), [서효자증동몽교관최공행장록후](1921, 이종택서), [수성최씨효열정려기](1921, 유확윤서) 등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5) 경주이씨효열정려(慶州李氏孝烈旌閭)

삼계면 사창리 우봉마을에 있다. 한양조씨와 여양진씨의 효행과 열행을 기린 정려로 1907년(융희 1) 나라에서 정표를 받아 세웠다. 한양조씨는 이은영(李殷榮)의 처로 남편의 병환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몇 일을 더 연명케 하였다. 남편이 죽자 따라죽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여양진씨는 이병우(李秉雨)의 처로 남편이 일찍 죽었으나 배속에 있는 아이를 잘 교육시켜 훌륭하게 키웠으며 시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정성껏 간호하였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 [고학생이은영지처겸효열여한양조씨지려](1907), [효열부여양진씨정려기]등 2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6) 경주엽씨효열정려(慶州葉氏孝烈旌閭)

삼계면 생촌리 성암마을에 있다. 효자 엽장권과 열여 인동장씨의 효열행을 기린 정려로 1875년(고종 12) 나라에서 정표를 받아 세웠다. 1916년 중수하였으며 1998년 다시 중수하였다. 엽장권은 본관이 경주로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병석에 눕자 정성껏 간호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3일을 더 연명케 하였으며, 부친이 죽자 3년 동안 시묘하며 집에 한번도 내려오지 않았다. 인동장씨는 엽장권의 아들인 엽도동(葉都東)의 처로 남편이 병이 나자 좌측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고 차도가 없자 우측 허벅지 살까지 베어 먹였으며 남편이 죽자 3년상을 정성껏 지냈다. 정려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내부에 [효자증통정대부경주엽장권지려], [열녀유인인동장씨지려](1882), [효열정려서](1916), [발](1875, 申佐謀書)등 4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7) 서산류씨정려(瑞山柳氏旌閭)

황룡면 맥호리 산25 맥동마을에 있다. 열여 서산유씨의 열행을 기린 정려로 1839년(헌종 5) 나라에서 정려를 받았다. 1983년 정려 앞에 철도가 부설되자 현재의 맥호리로 이전하였다. 서산류씨(1807­1831)는 진사 김응휴(金膺休, 1806­1830)의 처로 남편이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자 고향으로 옮겨와 3년상을 정성스럽게 지내고 상을 마친 다음날 자결하였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며 내부에 '열녀성균생원김응휴처서산유씨지려'라고 새긴 정려비(1839)가 서있고, [명정기](1839), [정려기](奇正鎭撰), [정려이건기](1983, 金冠洙記) 등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8) 울산김씨이열부정려(蔚山金氏二烈婦旌閭碑閣)

황룡면 맥호리 186 맥동마을에 있다. 열부 태인박씨와 행주기씨의 순절을 기린 정려로, 1683년(숙종 9) 나라에서 정표를 받아 건립하였다. 태인박씨는 참봉 김중청(金仲聰)의 처로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정유재란 때 피난을 가다 일본군을 만나 피하지 못하자 황룡강 물 속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기대승의 딸인 열부 행주기씨는 김인후의 손자인 선교랑 (金南中, 1570­1636)의 처로 정유재란 때 친정에서 남편 집으로 가다 일본군을 만나 손목을 잡히자 팔을 잘라버리고 황룡강물 속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내부에 "참봉김중청처태인박씨지려", "선교랑김남중처행주기씨지려"라고 새긴 정려비(1683)가 있다. 옆에 김인후선생유허비(1929)가 같이 서있다.

9) 완산최씨정려비(完山崔氏旌閭碑)

서삼면 송현리 산142 내연마을에 있다. 열부 완산최씨의 열행을 기린 정려로 1614년(광해군 6) 나라에서 정표를 받아 세웠다. 완산최씨는 첨사 반계수(潘繼洙)의 처로 정유재란때 가족들은 모두 피난 갔으나 홀로 남편의 무덤을 지키며 시묘살이를 하다 일본군이 다가오자 소지하고 있던 단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본래 취미대 아래에 정려각을 건립하였는데 퇴락하여 정려각 아래 바위에 '첨사반계수처정열부인완산최씨정려유허선묘명정'이라고 새겼다. 현재는 바위에 새긴 이 유허비만 남아 있다.

10) 서산류씨정려(瑞山柳氏旌閭)

북일면 문암리 115 광암마을에 있다. 효부 서산유씨의 순절을 기린 정려로 1615년(광해군 7) 나라에서 정표를 받아 나주에 세웠으나, 쇠락하자 1874년(고종 11) 현재의 문암리로 옮겨 세웠다. 서산유씨는 정성일(鄭聖一)의 처로 시부모를 친부모처럼 모셨다. 1597년(선조 30) 나주 친정 집에 갔다가 정유재란을 만나 모친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하자 시체를 끌어 앉고 일본군을 꾸짖다가 함께 순절하였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내부에 [통덕랑정성일처효녀공인서산유씨지려]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옆의 큰 바위에 '문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11) 고흥류씨정려(高興柳氏旌閭)

북일면 문암리 147­2 제암마을에 있다. 열여 고흥유씨의 열행을 기린 정려로 1798년(정조 22) 나라에서 정려를 세웠다. 고흥유씨는 승지 조찬한(1572­1631)의 처로 정유재란 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집에 있다 일본군을 만났는데 일본군이 가슴에 손을 대자 스스로 가슴을 자르고 자결하였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내부에는 [유명조선열녀좌승지조찬한처증숙부인고흥유씨지려]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2) 창령조씨효열정려(昌寧氏曺孝烈旌閭)

북이면 백암리 266­1 백암마을에 있다. 장흥고씨의 열행과 조석주의 효행을 기린 정려로 1893년(고종 30) 나라에서 정표를 받아 세웠다. 장흥고씨(1798­1841)는 조석우(曺錫宇)의 처로 일찍이 남편이 죽자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늙은 시어머니와 어린 아이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뒤에 시어머니가 죽자 예를 다하였으며 아이 또한 요절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13일만에 죽어 정표를 받았다. 조석우의 동생인 조석주(1805­1841)는 효성이 지극하여 상을 당해서는 예를 다하였으며 형이 병이 들자 힘을 다하여 간호하여 역시 정표를 받았다. 정려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내부에 [열녀증조봉대부동몽교관창녕조석우지처공인장흥고씨지려](1893), [효자학생창녕조석주지려](1893)와 [창녕조씨효열정려기](1935, 정봉시기) 등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13) 직산조씨충효정려(稷山趙氏忠孝旌閭)

북이면 백암리 263 백암마을에 있다. 충신 조영규·효자 조정노의 충·효를 기린 정려로 1669년(현종 10) 나라에서 정표를 받아 건립하였다. 지금의 정려각은 1918년에 세웠다. (문화재 도기념물 78호 참조)

14) 여주이씨정려(驪州李氏旌閭)

북하면 대악리 대방마을에 있다. 여주이씨의 효행을 기린 정려로 1900년(광무 4) 나라에서 정표를 받아 세웠다. 여주이씨는 양종기(梁鍾麒)의 처로 남편이 병이 나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했으며 그럼에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다시 마음을 고쳐 잡고 연로한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 [효열증동몽교관조봉대부양종기처증숙부인여주이씨지려](1900)와 [정려기](기우만) 등 2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2) 비각·비

1) 호남창의영수기삼연선생순국비(湖南倡義領袖奇參衍先生殉國碑)

장성읍 영천리(장성공원)에 있다. 기삼연(1851­1908)은 구한말의 의병장으로 자는 경노(景魯), 호는 성재(省齋),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어려서 한말의 대유학자인 노사 기정진(奇正鎭) 선생 밑에서 수학하였다.1907년 9월 장성 수연산 석수암에서 여러 의사들과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고 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 수백명을 이끌고 고창 문수암 전투를 비롯하여 영광, 법성포, 부안, 정읍, 나주 등 전남 서부와 북부 지역을 휩쓸며 일본군을 공격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담양추월산에서 적의 습격을 받고 다리에 부상을 입어 순창 복흥에서 치료를 받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광주로 압송되어 온 이틀 후인 1908년 1월 2일 광주시장(市場)에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함으로써 구국의 생애를 마쳤다. 정부는 19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고 1966년 장성공원에 "호남창의영수기삼연선생순국비"를 건립하여 선생의 충정을 기리었다. 비문은 이선근이 지었다.

2) 공필장 효행비(孔弼章孝行碑)

남면 녹진리 201 마산마을에 있다. 효자 공필장(1631­1713)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비각이다. 공필장의 호는 효겸. 효성이 출천하여 부친의 병에 손가락을 잘라 수혈 연명케 하였으며 모친의 상을 당한 후에는 부모의 묘소를 아침 저녁으로 찾아가 살폈다. 묘소 나무에 벌레가 일어 묘에서 통곡을 하니 홀연 새들이 벌레를 잡아먹었다 한다. 1725년 향인이 효행을 관찰사에 장게를 올리고 비를 세웠다. 비각은 전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비문은 판서 기언정이 짓고, 글씨는 김필의가 썼다. 1980년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석조 비각으로 개축하였다. 공필장효자비 옆에는 '효자공도기지비'와 '효자공도형지비'가 있는데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3) 심능문효행비(沈能文孝行碑)

삼서면 수해리 하죽마을에 있다. 심능문의 효행을 기린 비로 1899년(광무 3) 후손인 심상한, 심길채 등이 주동이 되어 세웠다. 크기는 높이 161cm, 넓이 63cm, 두께 22cm 이며 앞면에 '증지평묵헌심공효행사적비'라 새겨져 있다. 송재성이 비문을 짓고 임만수가 글씨를 썼다. 심능문(1819­1868)의 호는 묵헌(묵헌)·본관은 청송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위독 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3일간 더 연명케 하였으며, 아버지가 병환이었을 때는 산비둘기가 집으로 날아들어 이를 잡아 약을 지어 드렸더니 나았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1883년(고종 20) 사헌부 지평에 증직하고 정표하였다. 이 비 주변에는 풍양조씨효열비(1978), 심제심공효행실기비(1978), 통정대부숙암심공유허비(1978), 열부함양박씨기적비(1978), 용사심연섭순의비(1978), 청죽청송심공홍택기적비(1986), 효자해산심상봉행적비(1986) 등 청송심씨 문중의 효열비 7개가 같이 서 있다.

4) 이학승순의비(李學承殉義碑)

황룡면 장산리 산54­1 외장산마을에 있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동학군과 싸우다 전사한 이학승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1897년(광무 1) 세웠다. 크기는 높이 160cm, 넓이 65cm, 두께 23cm 이며 앞면에 '증좌승지이공학승순의비'라 새겨져 있다. 최익현이 비문을 지었다. 이학승은 초토사 홍계훈의 막하로 참여하여 200여 명의 군사를 데리고 4월 24일 황룡면 장산리 구싯등과 까치골 등지에서 동학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좌승지로 추증하였으며 송영순, 박만승 등 향촌의 유림들이 발의하여 비를 세웠다.

5) 전일귀효행비(全日貴孝行碑)

북이면 사가리 사남마을에 있다. 효자 전일귀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1790년에세워 원덕리 원덕마을 원덕저수지 아래 옛비각이 있는데, 파손되어서 장성유림이 1977년 현재의 사가리에 새로 세웠다. 옛비는 윗부분이 잘려져 나가 앞면에는 '日貴之碑'라는 글씨밖에 보이지 않으며 유명천이 비문의 글씨를 썼다. 동학농민전쟁때 전봉준이 이곳을 지나다 비의 내용을 읽어보고 그 효행에 감복하여 제사를 지내 주었는데 뒤에 관군이 이 사실을 듣고 전봉준과 전일귀의 성과 본관이 같다 하여 불을 질렀다고 한다. 새비의 크기는 높이 156cm, 넓이 49cm, 두께 21cm 이며 앞면에 '효자전공일귀지비'라 새겨져 있다. 변시연이 비문을 짓고 이병현이 글씨를 썼다. 전일귀는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의 병환에 사람의 고기를 써야 한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산사에서 공부하는 아들을 데려다가 삶아서 드렸더니 그는 아들이 아니라 산삼이었다고 하며 모친의 병이 완치되었고, 모친상에 시묘를 살고 있을 때 큰 호랑이가 호위하였으며, 함정에 빠진 호랑이가 전일귀의 꿈에 현몽하여 호랑이가 구출하여 타고 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6) 윤진순의비(尹軫殉義碑)

북하면 신성리 산25 입암산성 안에 있다. 윤진의 순절을 기린 비로 1742년(영조 18) 장성부사 이현윤이 국가의 명을 받아 세웠다. 크기는 높이 118cm, 넓이 58cm, 두께 20cm 이다. 윤진(1548­1597)의 자는 계방(季邦)·호는 율정·본관이 남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여 활약했으며 전라감사 이정암에게 입암산성 수축을 건의하여 허락 받아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정유재란 때 입암산성 별장에 임명되자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가족과 함께 들어가 일본군과 싸우다 성이 함락되어 순절하였다. 처인 권씨도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고 아들 윤운구는 칼을 맞아 절벽으로 떨어졌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조정에서는 입암산성에 순절비를 세우도록 하고 쌍여문(雙閭門)을 내렸다.

5. 불교 유적

원본파일 다운로드

(1) 사찰

1) 백양사(白羊寺)

북하면 약수리에 있다. 백양사는 632년(백제 무왕 33)에 여환조사가 백암사를 창건하였다 한다. 이 절의 역사는 5차례의 중창을 거치면서 1,300여 년을 이어오고 있다. 즉 1032년(고려 덕종 3) 중연선사가 재창하면서 절 이름이 정토사로 개칭되었다. 그 후 1350년(고려 충정왕 2) 수선사 제13세인 각진국사(1270∼1355)가 3창하면서 사세는 더욱 확장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1406년(태종 6) 의정부 계서에 의해 폐사의 위기를 만났으나 다행히 장성현의 자복사로 남게 되었다. 이후 백양사는 서산대사(1520∼1604)의 고족인 소요태능(1562 ∼1649)이 이곳에서 출가하여 서산대사의 계서 선지를 일깨우고 정토사를 백양사로 고치고 조실에 있었다. 휴정의 4세 법손인 환성지안(1664∼1729)의 문손인 설파상언(1707∼1797)과 연담유일(1720∼1799)이 이곳에 주석 하면서 그들의 문손들이 주지를 하면서 백양사는 더욱 탄탄한 도량으로 자리를 잡아 1864년(고종 1)에는 도암선사가 4창을 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 백양사는 송광사, 선암사, 대흥사와 함께 전라남도 지역의 본산으로 지정되었다. 그후 1912년 12월 환응탄영(1847∼1929) 선사가 초대 주지를 맡게 되었고, 이어서 1917년에는 만암종헌선사가 2대 주지로 있으면서 대웅전과 사천왕문을 건립하는 등 백양사를 5창하여 그 면모를 일신시켰다. 그는 또 산내 암자인 청류암에 광성의숙이라는 민족 교육의 산실을 마련하는가 하면 1947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총림인 고불총림을 결성하여 식민지 불교의 청산·민족정기의 함양·승풍의 진작을 도모하였으나 안타깝게도 6·25로 인하여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백양사 출신으로 1974년 대한불교 조계종 제5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던 서옹상순(1912∼현재) 스님이 주석한 이후 80년대부터 추진해 온 불사 끝에 총림의 요건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96년 3월 31일 제120회 조계종 임시 중앙종회에서 고불총림을 승인함에 따라 초대 고불총림 방장으로 취임한 서옹스님이 '참사람 수행결사'를 제창하면서 수행 도량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백양사의 산내 암자로 운문암(1350년 창건)·약사암·물외암·영천암(이상 1351년 창건)·청류암(공민왕 원년, 1352년 창건) 등은 모두 각진국사의 창건이고, 천진암은 1644년(인조 22) 백곡선사의 창건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폐사된 금강암은 1892년(고종 29) 경암선사가 창건하였고, 서양암은 1915년 비구니 치호수좌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2) 봉정사(鳳停寺)

삼계면 신기리 산 131번지에 있다. 1972년 12월 16일 태고종(제08­1730호)에 등록된 이 사찰은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구전으로는 1402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마점산에 있다". {장성읍지}에는 '삼계면 봉정산에 있는데 지금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아 있는 석불입상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후에 창건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다시 중건하였는데 6·25 때 또 다시 소실되어 재차 복원하였다.

그러나 봉정사는 3공화국 때 임야 내에 불법 건립된 종교단체들의 시설을 철거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어 철거 날자 하루 전에 불상을 사선동 봉경구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마을에서 회의를 열어 봉정사는 전통사찰로 보존시켜야 한다고 주민 전체와 법해스님, 삼계면장이 진정해 인가를 받았다. 당시의 기록은 1960년에 [봉정사 정화불사 방명록]이라는 목판(세로 30cm, 가로 255cm)으로 새겨 요사채에 걸려 있다.현재 봉정사의 규모는 대웅전·삼성각·요사채 등이 있고,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불입상 2기 및 석종형 부도 대좌 1기, 맷돌 3기 등이 남아 있으며, 요사채 오른쪽에는 주초석이 산재해 있다.1963년 법당을 수리할 때 1643년(숭정 16 계미) 5월에 개간한 {금강경}이 발견되었으나 몇 해 전에 도난 당하고 현재는 그 복사본이 남아 있다.

3) 묘현사 (妙玄寺; 舊 觀佛菴址)

서삼면 추암리 취령산에 있다. "1927년에 간행된 {長城邑誌}에 [在西三面鷲靈山奇巖在後巖間有名泉味甚淸爽其重量倍於他水病人飮此得效有遺址]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기존의 관불암은 이미 폐사되고, 이 후에 새로 관불암을 창건하였으나 누가 언제 창건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나마 6·25사변 때 소실되고, 그 후 1967년에 그 자리에 법화경 행자 묘련이 묘현사를 창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4) 석수암(石水庵)

황룡면 관동리에 있다. 고려시대 때 창건하여 1908년(무신) 호남창의회맹소로 인해 소실 된 것을 1926년(병인)에 김형록이 중건하였다. 그 뒤 6·25동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원하였다. 이 곳에서 하서 김인후, 매헌 박행중, 노사 기정진, 기옹 변종락, 봉서 변상철 등 명인들이 공부하였다고 한다. 암자 옆 석벽에서 샘물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석수암(일명, 물골 절터)이라고도 한다. 한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9월 이곳 석수암에 호남창의맹소를 차리고 크게 활약한 성재 기삼연의 구국 혼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2) 사지(寺址)

1) 하청사지(下淸寺址)

장성읍 유탕리 157번지 서골마을에 있었다. 언제 누구에 의해서 창건되었는지 그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신라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고, 조선시대의 기록으로는 김시습의 시와 하서 김인후(1510∼1560)의 시에 하청사가 나타나 있다. 그 후의 기록으로는 자운선사(1817∼?)가 이 하청사에 머물면서 옛 모습으로 복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834년에 제작된 김정호의 {청구도}에 하청사가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언제 어떻게 해서 폐사 되었는지 알 수 없다.

2) 인월사지(印月寺址)

장성읍 유탕리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원현 불우조에는 "불대산에 있다"고 하였다. 인월사를 방문한 김시습이 [인월사]라는 편액과 시를 같이 남겼다.

3) 흥법사지(興法寺址)

삼계면 사창리 금성 마을에 있는 흥법사지는 현재 뚜렷한 흔적을 찾을 길 없다. 6·25때 마을 전체가 불에 타 버리고 그 후에 다시 형성된 마을이어서 이 무렵에 흥법사지는 더 많은 훼손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을 여기저기에는 석탑재를 비롯하여 사천왕상과 불상 등의 유물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사천왕상과 불상은 일제 말엽에 누군가가 어디로 옮겨가 버렸고, 석탑재들은 1981년 겨울에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수습해 갔다. 국립광주박물관은 1985년 이들 탑재에 새로 탑재를 보강하여 3층 석탑으로 복원하여 야외에 전시 중이다.흥법사지가 있는 금성 마을의 동명 유래에 의하면 "고려 중기 신억 마을에는 관음사라는 절이 있었고, 이곳에는 흥법사라는 절이 있어 불법이 흥할 것이라고 하여 마을 이름을 '흥법'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호구총수}에도 '흥법리'로 나와 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당시 면장으로 있던 송정수씨가 이 마을에 있는 야산이 비단성 같이 마을을 두르고 있어 인심이 비단결 같다고 하여 지금의 이름인 금성으로 변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서나 읍지에도 전혀 언급이 없다.

4) 관음사지(觀音寺址)

삼계면 사창리 신억 마을 뒤 동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창건 연대와 폐사 시기를 알 수 없다. 일제 때 이 곳을 개간할 당시 높이 50cm의 7층 석탑이 출토되어 이를 일본인에게 판 돈으로 마을의 종, 풍고, 저울, 말 등을 샀다고 한다. 이 곳에 있던 불상은 영광 불갑사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 관음사지는 밭으로 개간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5) 천방사지(千房寺址)

삼계면 내계리 천방마을 뒤에 있다. 천방사 5층석탑이 있는 곳이 아닌가 한다. 이 절은 백제 말기에 세워졌다고 전하나 문헌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다. 사명은 이 마을의 동명유래와 관련이 있다. "백제 때는 마을이 배(舟)의 형국이라고 해서 선방(船房)이라 했다"고 하며, 또한 마을에 방이 천 개인 천방사가 있어 천방이라 했다고도 한다. 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천방(川房)으로 나와 있다. 이 절의 폐사 원인에 관련된 전설은 이렇다. 어느 날 처녀가 방에 들어가자 한 스님이 그 처녀를 잡기 위해 쫓았으나 처녀는 천 개나 되는 방을 옮겨 다니며 도망을 했다고 한다. 처녀를 잡지 못한 스님은 홧김에 방에 불을 질러 천방사 절이 불에 타 망했다고 한다.

6) 연선암지(蓮禪庵址)

황룡면 와우리 탑정이 서쪽에 연소암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에는 제비집(燕巢)처럼 생긴 명당이 있다고 한다. 또 산 전체를 연소암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장성읍지}에 기록된 연선암이 이곳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7) 율봉사지(栗奉寺址)

황룡면 와우리 물골에 있었다는 절이다. 이 곳에서 생산되는 밤(栗)은 한 톨이 대접에 가득할 만큼 커서 임금한테 진상했기 때문에 임금이 절 이름을 율봉사라고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율봉사 스님들의 세력이 너무 커 나무한 짐, 풀한 짐도 마음대로 채취하지 못하던 마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스님들을 몰아 냈다고 하며, 스님들이 도망칠 때 불상을 묻어 놓고 갔기 때문에 지금도 어디엔가 불상이 묻혀 있다고 한다.

8) 취서사지(鷲棲寺址)

서삼면 추암리 백련마을에 있다. 이 마을의 기관서씨 집 일대가 취서사지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 사지에는 몇 가지 석조물과 주초석 등의 유물만 남아 있다.

취서사는 어느 때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에 "취령산에 있는데, 석탑과 석종이 있다. 송나라 때에 중 운묵이 있었는데, 중국에 외유하였고 글씨를 잘 써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가 죽으매 제자가 탑과 종(浮屠)을 세워서 유해를 안치하였다"라는 짤막한 기록이 있다. 고려 후기의 인물인 운묵이 이 취서사에 주석했다는 점에서 적어도 고려 중·후기 무렵에 창건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은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취서사(鷲棲寺)'가 아닌 '취서사(鷲栖寺)'로 적고 있고, 후대의 {범우고}에는 또 '취서사(鷲棲寺)'라고 되어 있는 것은 '棲'와 '栖'는 同字로 혼용하기 때문이다.

1927년에 간행된 {장성읍지} 사찰조 취서사를 보면 이 절에는 동암·대원사·두솔암 등의 부속 암자가 오래 전부터 있었고, 상선암·가섭암·백련암·원적사·망월암 등은 폐사되고 그 터만 남아 있다고 하였으며, 옛날에는 석탑과 석종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제시대에 이미 이 절은 폐사되었고 몇몇의 암자만이 명맥을 유지한 듯하다.

(2) 석불

1) 유탕리 마애불(磨崖佛 一名 懶翁大師 石佛)

장성읍 유탕리 서동마을 위 하청산 중간 나옹암터 뒤 석벽에 있다. 나옹대사 석상으로 불려지는 이 마애불은 1371년에 공민왕의 왕사가 된 나옹혜근(1320∼1376)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이 마애불은 거대한 자연 암벽에 입상으로 음각 하였는데 현재는 석태가 끼어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전체적인 상호는 비만형에 가깝다. 다른 부분에 비해 머리 부분이 깊게 음각되어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있고 의습 및 수인은 알아보기 힘들다.

2) 장안리 석불(長安里 石佛)

장성읍 장안리 뒷산 바위굴에 있다. 이 바위굴은 범이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어서 예로부터 이 마을에 호환이 많았다고 한다. 어느 스님의 권유로 이 석불을 세운 후로는 호환이 없어졌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이 석불은 봉암 석불, 혹은 장안리 미륵불로 불려지는 이 좌불은 높이 54cm, 어깨폭 26cm, 무릎폭 33cm이다. 나발에는 육계가 희미하게 나타나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가 크고 뚜렷하며, 이목구비가 완연한 동안에 법의는 통견이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인데 전체적인 느낌은 단아하다.

3) 선적리 불상(善積里 佛像)

진원면 선적리 북방 선적 저수지에서 500m 가량을 가면 진원성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 숲속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 진원면 면장 김용대씨와 석불의 위치를 잘 알고 있다는 김동선씨(66세)의 안내로 현장을 찾아갔으나 도난 당하고 없음을 확인하였다.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불상은 6·25 때 탱크 사격으로 목이 부러진 상태였다고 한다.고려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는 선적리 불상은 도난당하기 전의 유구를 볼 때 원형의 대좌 위에 세워진 입상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높이는 2m 정도이고 대좌에는 형식적인 앙련이 음각 되어 있으며 기타의 양식은 판별하기 어렵다고 한다.

4) 봉정사 석불(鳳停寺 石佛)

삼계면 신기리 131번지 봉정사에 있다.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석불과 나란히 있는데, 원래 봉정사 앞산에 도괴되어 있던 것을 몇 해 전 현 위치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크기는 높이 150cm, 폭 88cm, 두께 36cm인 면석에 음각 되어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다.큰 귀와 코를 가진 것과는 달리 눈과 입은 왜소하며 형식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목에는 형식적인 삼도가 있으며 통견에는 군상이 발목까지 덮고 있다.

5) 덕산리 미륵불(德山里 彌勒佛)

삼계면 덕산리 조산 산 69번지에 있다. 근처의 절터에서 주민들이 현 위치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크기는 높이 140cm, 어깨폭 33cm, 얼굴 길이 36cm인데 전면폭 45cm, 측면폭 30cm인 대좌와 일매석이다.이 미륵불은 현재 목 부분이 부러진 것을 그대로 올려놓았다. 눈은 왕방울 눈으로 감은 상태이고, 귀는 약간 짧으며, 입은 형태를 알 아 볼 수 없을 정도이다. 머리에 커다란 육

계가 있고, 가슴에는 문패 같은 것을 두 손으로 잡고 있으며, 의습은 큰 고기 비늘 모양이다. 손 모양이 문인석인 점으로 보아 불상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주민들이 미륵불로 불리고 있다.6) 신호리 미륵불(莘湖里彌勒佛)

황룡면 신호리 미륵불은 원래 마을 동쪽 누룩징이에 있었다고 한다. 수구막이를 위해 마을 앞으로 옮겨 세웠다가 1992년 장성백이로 옮겼다고 한다. 형상이 미륵불이라기 보다는 장승이나 동자석에 가깝다.

7) 장산리 미륵불(長山里 彌勒佛)

서삼면 장산리 임곡마을 미륵등에 있다. 불두(佛頭)가 떨어져 나간 채 넘어져 있으며, 주위에 기왓장이 많이 흩어져 있으며, 미륵불의 갓은 김영호씨 집에 있다.

8) 박산리 미륵불(泊山里彌勒佛)

북일면 박산리 75번지 호암사에 있다. 고려말 오산리(縣의 소재지)에 매년 섣달 그믐날만 되면 호환으로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도승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 도승은 박산리 작동의 뒷산인 호암봉에 있는 호랑이 바위가(虎岩) 호식을 하기 위해 오산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형국이라서 호환이 있다고 하였다. 그 바위 아래에다 미륵불을 조성하면 호환이 없어진다고 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호암 앞에다 이 미륵불을 세웠더니 더 이상의 호환은 없었다고 한다.

현재 이 미륵불은 호암사 법당에 봉안되어 있다. 이 법당은 6·25직후에 변씨 할머니가 지은 것으로 미륵불은 개금(改金)을 하여 석불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개금(改金)할 당시 훼손된 팔은 새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 미륵불의 크기는 높이 120cm, 폭 30cm이다. 높은 육계에 귀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며, 눈은 반쯤 뜬 상태이며, 큰 코에 비하여 입은 작은 편이고, 얼굴에 비해 동체가 왜소해 전체적인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의습은 뚜렷하지 않으나 양어깨로부터 긴 띠 모양의 줄이 양각되어 있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팔은 반쯤 치켜올린 상태이다.

(3) 석탑

1) 흥법사지 석탑(興法寺址石塔)

삼계면 사창리 금성 마을 흥법사지에 있던 5층으로 추정되는 석탑이다. 기단부와 2층 옥개석 등의 양식으로 보아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석탑 바로 옆에 있던 옥개석 부재의 양식으로 보아 앞의 석탑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흥법사지에는 최소한 2기 이상의 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옥개석에는 상면에 2개의 구멍이 있는 것이 특이하며 층급받침은 3단이다.

1981년 겨울 국립광주박물관은 이 탑재들을 광주박물관으로 옮겨와 복원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유실된 탑재가 워낙 많고 2기 이상의 탑재가 섞여 있어서 복원에 어려움을 겪다가 1985년에 높이 3.5m의 3층 석탑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이 때 유실된 적심석 4개, 지대석 1개, 기단면석 1개, 갑석 4개, 그리고 1층 탑신석 등을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여 현재 국립광주박물관 입구 좌측 야외전시장에 전시하고 있다.

이 석탑은 지대석이 4매이며 1단의 큰 각형 받침이 모각되어 있다. 기단면석은 4매인데 1매는 새로 보충한 것이다. 면석의 중앙에 탱주가 하나 있고 양 모서리에는 우주가 있다. 갑석은 4매 모두 새로운 부재인데 하면에 각형의 1단 부연이 있고 상면에는 각형 1단 받침석을 만들어 1층 탑신을 받치고 있다. 1층 탑신석도 유실되어 1석으로 새로 만들었다. 1층 옥개석은 마을 사람들이 연자방아로 사용하던 것이라서 상면의 파손이 심하였으나 다시 보존 처리하여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층급받침은 5단이며 옥개석이 두터워 둔중한 감을 준다. 2층의 탑신과 옥개석은 본래의 것으로 옥개석 모서리 일부분이 깨졌으며 층급받침은 5단이다.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한 편이고 전각의 반전이 약간 있어 경쾌하게 보인다. 3층 탑신과 옥개석은 2층 이하의 각 부재와 비례가 맞지 않고 석질도 달라 이 탑의 부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2) 와우리 석탑(臥牛里石塔)

황룡면 와우리에 있다. 이 탑은 신라시대(미상)에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는 3층탑이었으나 왜정 때 2층은 일본으로 반출해 가고 현재는 단층(基壇)만 남아 있다.

3) 백양사 팔층석탑(八層石塔 - 一名 佛舍利塔)

일본의 홍법(774∼835)대사가 천축(天竺)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봉안한 8층의 탑으로 백양사 대웅전 뒤쪽에 있다. 백용성(1864∼1940)스님이 모시고 있던 것을 1924년 만암스님이 백양사에 이를 봉안하여 세운 탑이다.이 탑은 방형의 하대석 위에 연꽃을 장식한 엔타시스형의 석주로 중대석을 삼아 상대석을 받쳐 기단부를 구성하고 있다. 아무런 조식이 없는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별석으로 되어 있으며, 옥개 받침은 3단이고 상륜부에는 보주만 올려 장식하고 있다.

(4) 당간지주(幢竿支柱)

1) 추암리 당간지주(鷲岩里 幢竿支柱)

서삼면 추암리 백련마을에 기관서씨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 우측에 있다. 축서사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1987년 현 위치에 세우기 전에는 계곡에 도괴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당간지주는 상면에 간구(竿口)가 없이 둥근 편이고 지름 13cm의 간공(竿空) 2개가 있으며 기둥의 바깥 면 중간에 한 단의 굴곡을 주어 상·하부로 나눈 형태이다. 크기는 높이 150cm, 폭 60cm, 두께 상 25cm·하 46cm이다. 기단부는 땅에 묻혀 있어 보이지 않고, 지주에 장식이나 명문도 없어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2) 사가리 당간지주(四街里 幢竿支柱)

북이면 사가리 남산동 앞에 있다. 백양사역에서 광주 쪽으로 약 300m 지점 철로 아래쪽에 화강암으로 된 높이 약 3m의 이 유적은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죄인을 형벌하던 형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모습은 석당간지주이다. 현재 2개중 1개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나 나머지 1개는 원형의 구멍이 있는 밑 부분에서 부러져 하단부만 남아 있고 윗 부분은 일실되었다.

규모는 높이 300cm, 폭 64cm, 두께 35cm이나, 하단부의 폭이 약 66cm, 상단부의 폭이 55cm이다. 상하 2개의 간공이 있는데, 위쪽에 있는 네모진 간공은 꼭대기에서 85cm 아래에 가로 세로 각 12cm의 크기로 완전히 뚫려 있다. 아래쪽에 있는 것은 지상에서 38cm, 위쪽 간공에서 아래로 149cm 지점에 지름 15cm의 원형으로 된 간공이 반쯤만 뚫려 있다. 파괴된 1기는 지상에 드러난 높이가 47cm, 폭 70cm, 두께 40cm이다.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나 돌의 표면이 너무 깨끗한 점으로 보아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5) 부도

1) 부도(浮屠) 및 탑비(塔碑)

① 백양사 부도전(白羊寺 浮屠殿)

북하면 약수리 백양사 쌍계루 뒤쪽에 있다. 3단으로 구획된 이 곳의 부도전은 주로 역대 고승들의 비나 부도들로 맨 윗단에 6기, 중단에 15기, 아랫단에 6기, 그리고 담장 밖에 2기가 더 있어 모두 29기나 된다. 그런데 이미 도난 당했거나 글자의 마멸이 심해 판독이 어려운 것도 5기나 된다. 도난 당한 부도 중에는 서산당·사명당, 그리고 백양사 21세 주지를 역임한 벽송당 지엄(1464∼1534)의 부도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벽송당의 부도는 "6개의 별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8각의 하대석 위에 복련무뉘를 새긴 원형의 중대석 받침 위에 앙련무뉘를 새긴 원형의 중대석이 놓여 있고, 탑신은 원형이며 옥개석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비와 부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만암당(曼庵堂) 2. 소요당(逍遙堂) 3. 일실(逸失) 4. 일실(逸失) 5. 불명(不明) 6. 묵담당(默潭堂) 7. 금해대선사비(錦海大禪師碑) 8. 화담선사비명(華曇禪師碑銘) 9. 대공덕주학산선사기념비(大功德主鶴山禪師紀念碑) 10. 양악선사비명(羊岳禪師碑銘) 11. 연담당대사비명(蓮潭堂大師碑銘) 12. 백양사기적비명(白羊寺紀蹟碑銘) 13. 대종정만암대종사사리탑비(大宗正曼庵大宗師舍利塔碑) 14. 지백당(知白堂) 15. 영월당(影月堂) 16. 벽허당(碧虛堂) 17. 모운당(慕雲堂) 18. 무가당(無價堂) 19. 불명(不明) 20. 불명(不明) 21. 서운당영골탑(棲雲堂靈骨塔) 22. 석파당상만화상비(石坡堂尙曼和尙碑) 23. 대종정만암대종사사리탑비(大宗正曼庵大宗師舍利塔碑) 24. 봉하당대종사행적비(峰霞堂大宗師行績碑) 25. 봉하당(峰霞堂) 26. 석산당상현대선사부도비(石山堂尙玄大禪師浮屠碑) 27. 석산당(石山堂) 28. 천장선사원적비(天藏禪師圓寂碑) 29. 천장당임풍(天藏堂林風)

6. 관방유적(關防遺蹟)

원본파일 다운로드

(1) 읍성지

1) 진원현읍성지(珍原縣邑城址)

진원면 진원리 고산마을 대절봉에 있다. 진원현읍성은 북쪽의 불태산을 배경으로 그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읍성의 남쪽으로는 넓은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다.

진원현은 백제시대 구사진혜현 통일신라시대 진원현으로 당시에는 장성군의 영현으로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나주목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1143년(명종 2)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그러나 임진·정유재란때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극심한 피해로 1600년(선조 33) 장성현에 합병되기 전까지 독립된 행정 체계를 이루고 있던 곳이었다.

진원현의 백제시대 명칭인 구사진혜현의 약칭으로 보이는 '구진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규모만 기록하고 있을 뿐 축성연대와 폐성연대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못하다. 둘래는 약 800m 정도로서 현재는 동벽의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성벽이 파괴되어 윤곽만이 남아 있다. 가장 잘 남아 있는 동벽은 부분적으로 높이가 2m에 이르는 부분도 있지만, 앞서의 {신증동국여지승람}(1531)의 '반(半)이 퇴락 되었다'거나 {장성부읍지}(1871)의 '모두 퇴락 하였다'는 기록을 통해서 성벽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파괴되어 읍성으로써의 기능이 상실되면서 오래 동안 방치되어 온 관계로 파괴의 정도가 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6·25동란 당시 빨치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경찰서 주변의 방호벽 설치와 주민들이 논둑과 밭둑을 쌓는데 성돌을 이용하면서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은 마치 토루처럼 보인다.

그리고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현터와 부속 건물 터가 일부 확인되는데 모두 성 밖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헌 터는 광안마을 조원익씨댁이었으며, 객사 터는 창촌마을의 소로변에, 옥터는 대절봉의 남동쪽 아래에 있었다 한다.

2) 삼계현읍성지(森溪縣邑城址)

삼계면 사창리 우봉마을 우봉산에 있다. 삼계현은 본래 백제의 소비혜현이었는데 신라에서 삼계현으로 고쳐서 장성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때 영광에 내속시켰다. 1524년(중종 19) 사창을 설치하였다. 관찰사 이사균이 군에 마점고개가 있어서 동서로 막히고 돌 길이 험준하여 현민이 미곡을 내고 들이기에 고생함으로 사유를 갖추어 신청해서 설치하였다. 1914년 행정개편 때까지 줄곧 영광군에 속해 있었다.

삼계현 읍성의 존재와 축성 재료만이 언급되어 있을 뿐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축조 연대와 규모 등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못하다. 다만 일제시대 조사 기록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삼계면 우봉리에 소재하는 삼계성으로 보고되어 있는데 '영광읍의 동쪽 4리 소구릉상에 있는 토축으로 둘레 약 200칸이다'고 조사되어 있다.

삼계현읍성은 앞서의 기록과 성안에서 수습되는 토기편 및 기와편 등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초축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까지 사용되다가 고려 때인 940년(태조 23) 영광군에 내속되면서 폐성된 것으로 본다.
유적 현황은 사창리 우봉마을 뒷산인 우봉산(169.9m)은 작은 산이지만 정상부는 평탄하고, 대체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산봉형에 가까운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산 정상부 8부능선에 위치한 퇴뫼식 산성이며, 평면 형태는 원형에 가깝다. 전체 길이는 약 360m로 산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바깥쪽 경사면을 깎아내어 삭토법으로 쌓은 토루이다.

현재는 서벽과 북벽을 제외하면 민묘와 헬기장 및 경작 등으로 파괴되고 부분적으로 윤곽만이 남아 있다. 가장 잘 남아 있는 서벽과 북벽의 경우 외벽의 높이가 2∼3m에 이르며,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데 폭 10여m에 이르는 내환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남벽과 동벽은 1987년 조사시에 이미 헬기장 축조와 민묘 등으로 인하여 훼철된 상태였다.

(2) 산성지(山城址)

1) 이척산성지(利尺山城址)

장성읍 유탕리 유탕마을 불암산(이재)에 있다. 이척산성은 수습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성된 산성으로 보이며, 조선 초기에 폐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척산성은 불대산 서쪽의 해발 500여m의 봉우리로 동·서·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남고북저형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성벽은 동·서의 두 구릉과 북쪽의 계곡의 상단부를 연결하여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내탁법에 의해 쌓았다. 그러나 기록에는 '불대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 520척, 높이 3척으로 성안에는 우물 4개와 6개의 계곡이 있다. 지금은 퇴락 하였다'는 내용이다. 석축성으로 나타나지만 현재 750m 정도의 토루가 잔존하고 있는데, 성돌이 파괴된 때문인지, 아니면 축조 당시부터 토루로 쌓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석축의 길이는 650m로 전체 길이는 1,400m이다. 이성에는 동·서·북문지 등 3문이 남아 있으며, 상당수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다.

2) 삼성산성지(三聖山城址)

진원면 진원리·선적리 삼성산에 있다. 삼성산은 송사 기우만이 삼산재를 짓고 의병열전을 썼던 곳이 삼성산으로 표기하고 있어 불태산에 있다.
기록에 의하면, '돌로 쌓았으며 둘레 550척, 높이 7척으로 성안에 3개의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일제시대 조사 기록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진원리와 선적리에 소재한 산성으로 보고되어 있는데 '장성읍의 동남 2리 반에 있으며 산복부의 높은 곳을 점하고 있는 석축으로 둘레 약 600칸이다'고 조사되어 있다. 현재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3) 고성산성지(古城山城址)

삼계면 부성리 고성산에 있다. 고성산성은 인근의 부성리 복산마을에 소재한 삼국시대의 고분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의 축성되었으며, 폐성년대는 조선 초기의 세종대로 추정된다. 성의 기록은 일제시대 조사 기록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가 유일하다. 이에 의하면 '영광읍 동북 3리에 있고 산정부를 점하고 있는 석축으로 둘레 약 200칸, 고분과 같은 것이 있는데 주천자묘라 일컫는다. 또 사지가 있는데 태조암이라 한다'고 조사되어 있다.

고성산성은 바위로 이루어진 고성산을 배경으로 그 남쪽의 하록부에만 성벽을 쌓아 일반적인 산성과는 구별되는 특이한 양상을 보인다. 다시 말해 북쪽의 산 정상부와 정상부에서 갈라져 나온 동·서쪽의 산줄기는 험고한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고, 오직 남쪽에 면한 5∼6부 능선의 계곡부만을 가로질러 성벽을 축조하고 있다.

축조 방법에 있어서도 외견상으로는 외면만을 쌓은 내탁법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안과 밖을 모두 돌로 쌓은 후 안쪽의 석축을 흙으로 되메꾼 협축법으로 쌓았음이 단면상에서 확인된다. 성벽은 기저부는 1m 내외의 장대석을 가로 방향으로 눕혀서 수평을 유지하고 있고, 그 위로는 50×40cm, 50×30cm 정도의 잘 다듬은 돌로 수평을 유지하며 쌓아 올리고 있다. 단면은 5∼10cm정도 안쪽으로 되물려 쌓아 사다리꼴이다. 현재 높이 3m, 폭 5m로 대부분은 무너져 있다.

이 산성에서는 남문지와 건물지, 수구 등이 확인된다. 남문지의 규모는 폭 11m로 성벽 중간지점에 위치하며, 건물지도 중앙부분에서 2개소가 확인되고 있다. 수구는 성벽의 중간부분과 동쪽의 절암마을쪽의 계곡부에 남아 있다. 중간부분의 수구는 폭 40cm, 높이 30cm로 성벽의 최하단부에 개설되어 있으며, 절암마을쪽에 있는 수구는 2개의 수구가 나란히 붙어 있어 특이한 양상을 보인다. 규모는 2개 모두 폭 1m, 높이 170cm으로 2개 1조로 수구를 배치한 것은 계곡의 물이 대부분 이 곳을 통해 성밖으로 배출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수구는 성 안쪽의 계곡부를 판석형의 돌로 10m 정도 덮고 있다.

4) 벽오산성지碧梧山城址(一名 萬洞民堡城)

북이면 죽청리 만동, 전북 고창군 신림면 반룡리 즉 방장산 정상의 남쪽 봉우리인 벽오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벽오산성은 방장산 최고봉의 남쪽 벽오산(일명 속초봉) 정상에 위치한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벽오산 정상부와 그 동쪽의 9부 능선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지형에 따라 축성법을 달리하고 있다. 즉, 벽오산 정상부가 위치한 서쪽부분은 외면만을 돌로 쌓은 내탁법으로, 그리고 능선부를 가로지르고 있는 동쪽부분은 안과 밖을 모두 돌로 쌓은 협축법으로 축조함으로서 구간에 따라 특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체 길이 730m, 폭 3m로 기저부는 1m 내외의 장대석을 사용하고, 그 위로는 50×20cm, 50×30cm 크기의 판석형 할석재로 축조하였다. 평면 형태는 원형에 가까우며, 직경은 200m 정도이다. 현재는 서벽의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로 성벽의 통과 선만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양호한 서벽의 높이는 2m 내외이다. 이외에 성문이나 건물지, 우물지 등은 확인할 수 없으며, 수습 유물 또한 없다.
같은 지역에 장성읍지의 기록에 만동민보성이 보이는데 속초봉이 벽오산이라면 두성이 동일한 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나 읍지에 명칭은 다르게 만동민보성은 북이면 죽청리 반등산 속초봉에 벽오산성은 북이면에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일제시대 조사 기록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벽오산 위에 있는데 고창군에 걸쳐 있다. 둘레 약 400칸의 석루로 대부분 붕괴되었다'고 조사되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종합하여 보면 두 성의 위치가 동일한 점도 없지 않다.

5) 망점산성지(望岾山城址)

북이면 수성리 수성마을 성미산에 있다. 망점산성은 수습 유물로 볼 때 삼국시대에 초축되었으며, 조선 초기의 세종대에 폐성된 것으로 본다. 망점산성이 위치한 성미산(388m)은 산 정상부에 오를수록 경사가 매우 급한 산이다. 그러나 산 정상부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약간 낮은 2단의 분지형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성벽은 서쪽의 산 정상부와 이보다 낮은 동쪽의 8부 능선을 따라 협축법으로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다. 평면형태는 타원형에 가깝다. 전체 길이 800m, 폭 5m, 가장 잘 남아 있는 부분의 높이 2m로서 서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무너져 있다. 성돌은 기단부는 1m 정도의 대형 할석을 사용하고 위로 올라 갈수록 50cm 정도의 할석으로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다. 성 내부의 높은 쪽(서쪽)의 대지상에는 30×10m 규모의 건물지의 축대가 남아 있으며, 낮은 쪽(동쪽)에는 연못지가 남아 있다. 이들 유구의 주변에는 곳곳에 토기편과 자기편이 흩어져 있다.

(3) 보성지(堡城址)

1) 노(위)령군보성지(蘆(葦)嶺軍堡城址)

북이면 원덕리 구목란마을 노령고개 마루에 있다. 노령군보는 장성고읍치 ­ 미륵원 ­ 노령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정읍현 등과 연결하는 주요한 통로이다. 따라서 이곳 고개 길이 호젓하고 험해서 도적이 떼로 모여 대낮에 사람을 죽이고 약탈을 하므로 나그네가 지나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여행객의 안전을 위해 1520년(중종 15)에 보를 설치하여 지켰다.

현재 호남선 철도의 터널 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는 철수하고 없지만 군부대의 초소가 이곳에 있었던 까닭에 대부분 파괴되고 북벽구간에서 부분적으로 성벽의 윤곽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보성지는 현재 남아 있는 유구 상태를 통해 보면, 둘레 200m 정도의 석축성으로 테뫼식 산성이다. 성돌은 50×20cm 정도의 자연 할석재를 이용하여 내탁법으로 축조하였다. 1917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오만분지지도}에는 타원형의 평면 형태를 갖는 석축성으로 표기되어 있다. 기타 다른 유구나 유물은 수습되지 않는다.

(4) 역원지(驛院址)

1) 단암역지(丹巖驛址)

장성읍 용강리 장성호 제방 밑 주차장 옆에 있었다. 단암역은 고려 성종년간(982∼997)에 설치되어 나주 청암역의 속역으로 있다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찰방역으로 승격되되면서 청암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895년(고종 32) 우체사가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전근대 사회에 있어서 교통과 통신 수단으로써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곳이 역이었다. 주요 교통로에는 대략 30리마다 역을 두고 마필과 역정을 갖추어 공문을 체송하는 이외에 공무시행자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하며 그 밖에 진상 등 관물의 수송도 담당하였다. 또 이러한 원칙은 공용이나 공용에 준하는 사용에 적용되기도 하였다.

7. 금석문(金石文)

원본파일 다운로드

(1) 신도비(神道碑)

1) 고경명신도비(高敬命神道碑)

장성읍 영천리 오동촌마을 앞에 있다. 고경명의 묘소 입구에 있는 비로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크기는 높이 238cm, 넓이 88cm, 두께 41cm 이며 윤근수가 비문을 짓고 7대손인 고정헌이 글씨를 썼다.
고경명의 자는 이순(而順)·호는 제봉(霽峯)·시호는 충렬·본관이 장흥이다. 1558년(명종 14) 문과에 장원을 하여 형조좌랑,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으며 왕의 교서를 작성하는 지제교를 겸하였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 성균관 사예, 동래부사를 역임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에서 창의하여 6천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여 금산의 일본군을 공격하다 교전 중에 순절하였다. 차남 고인후도 같이 죽었으며 장남 고종후는 이듬해 진주성싸움에서 순절하였다. 기대승, 정철, 이이 등과 교유하고 문장으로 특히 시에 능하였다. 저서로『제봉집』이 있다.

2) 김덕인신도비(金德麟神道碑)

삼서면 석마리 석령마을에 있다. 김덕인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1860년(고종 17) 세웠다. 크기는 높이 222cm, 넓이 68cm, 두께 33cm 이며 앞면에 '유명조선국가의대부전사헌부지평증예조판서대명처사삼외재김선생신도비명' 라고 새겨져 있다. 기우만이 비문을 짓고 이범석이 글씨를 썼다. 1980년 후손 김용필이 주위에 담장을 쌓았다. 김덕인(1585­1689)의 호는 삼외재(三畏齋)·본관은 경주이다. 관직이 사헌부 지평에 이르렀다. 명이 멸망하자 단을 쌓아 종일 망곡하고 돌아와 사람들이 대명처사(大明處士)라 하였으며 효종이 죽자 매년 5월 4일 기일에 통곡하고 남산에 배향하기를 30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3) 송흠신도비(宋欽神道碑)

삼계면 내계리 천방마을에 있다. 송흠 신도비는 1683년 세웠으며 관수정 옆에 위치하고 있다. 크기는 높이 134cm, 넓이 56cm, 두께 23cm 이며 윤증이 비문을 짓고 윤추가 글씨를 썼다. 송흠(1459­1543)의 자는 흠지(欽地)·호는 지지당(知止堂)·시호는 효헌·본관은 신평이다. 1492년(성종 23)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정자, 순천부사, 전주부윤, 광주목사, 담양부사 등 지방관을 많이 역임했으며 가는 곳마다 청백리로 표의를 하사 받는 등 별명이 삼마태수로 유명하다. 1538년(중종 33) 청백리에 뽑혔으며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낙향하여 관수정이란 정자를 짓고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문인으로 양팽손, 안처겸, 송순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지지당집}이 있다.

4) 조희유신도비(曺喜有神道碑)

삼계면 생촌리 성암마을에 있다. 조희유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1880년(고종 17) 세웠다. 크기는 높이 170cm, 넓이 67cm, 두께 34cm 이며 앞면에 '통훈대부행사간원사간경은조선생신도비' 라고 새겨져 있다. 정봉시가 비문을 짓고 고손인 조병채가 글씨를 썼다. 조희유(1742­1814)의 자는 광보(光甫)·호는 경은(耕隱)·본관이 창녕이다. 1771년(영조 47) 문과에 합격하여 병조좌랑, 사간원 헌납, 사헌부 장령, 서산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801(순조 1)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락계산에 은거하면서 당시의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저서로 {경은집}이 있다.

5) 김인후신도비(金麟厚神道碑)

황룡면 맥호리 25 맥동마을에 있다. 김인후의 생애를 기록한 비로 1742년(영조 18) 묘역 입구에 세웠다. 크기는 높이 218cm, 넓이 95cm, 두께 40cm 이며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이재가 글씨를 썼다. 1983년 이 비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 새로 신도비를 세웠는데 본래의 신도비의 내용에다 그 이후에 변경된 내용을 덧붙였다. 크기는 높이 300cm, 넓이 105cm, 두께 73cm 이다. (김인후의 인적 사항은 교육편 서원조 참조)

6) 박수량신도비(朴守良神道碑)

황룡면 금호리 호사마을에 있다. 박수량의 행적을 기록한 비이다. 크기는 높이 220cm, 넓이 60cm, 두께 20cm 이며 송병선이 비문을 짓고 최익현이 글씨를 썼다. 박수량(1491­1554)의 자는 군수(君遂), 호는 아곡(莪谷), 시호는 정혜·본관은 태인이다. 김개의 문인으로 1514년(중종 9) 문과에 합격한 뒤 의정부 우참참, 호조판서,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다. 38년동안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집 1칸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하여 1546년(명종 1) 청백리로 뽑혔다. 명종이 백비를 하사한 것은 청렴결백의 내용을 비에 새기는 것이 오히려 그의 청렴함을 잘못 알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고 한다.

(2) 유허비(遺墟碑)

1) 김선정유허비(金善貞遺墟碑)

삼서면 삼계리 어랑마을에 있다. 김선정의 행적을 기린 비로 어랑사 들어가는 입구에 1860년(철종 11) 세웠다. 크기는 높이 133cm, 넓이 46cm, 두께 29cm이며 앞면에 '유명조선징사어은김선생유허비'라 새겨져 있다. 김흥채가 비문을 짓고 오준선이 글씨를 썼다. 김선정(1446­?)의 자는 정숙(正淑)·호는 어은(漁隱)·본관이 진주이다. 동부참봉, 군기시 직장, 상의원 주부, 형조정랑 등을 지내다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삼서면 홍정리에 있는 외숙인 승문원 교리 고습의 집으로 낙향하였으며 이어 삼계리 어랑마을에 은거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직후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아 사람들이 어은처사(漁隱處士)라 불렀다.

2) 반행도유허비(潘行棹遺墟碑)

서삼면 송현리 내연마을에 있다. 반행도의 행적을 기린 비로 1864년(고종 1) 후손들이 세웠다. 크기는 높이 183cm, 넓이 53cm, 두께 22cm 이며 앞면에 '고성균관생원미재남평반공유허비'라 새겨져 있다. 오준선이 글씨를 썼다.
반행도의 호는 미재(薇齋)·본관은 남평이다. 1786년(정조 1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효행과 문장을 겸비하였다. 외연마을 서쪽 입구인 천세봉과 만세봉 아래 시내 옆에 취미정(翠薇亭)이란 정자를 건립하고 사류들과 강학하였는데 뒤에 쇠락해지자 그 자리에 후손들이 이 유허비를 세웠다. 비 뒷면에는 반행도가 생원시에 합격했을 때 대책의 질문과 답안문이 실려 있다. 1956년 수해가 나자 현재의 내연마을로 옮겼으며 그때 옛비 뒷편에 '성균생원남평반공유허비'라 새긴 비를 새로 하나 더 세웠다. 새비의 크기는 높이 142cm, 넓이 52cm, 두께 22cm 이며 후손인 반랑환이 비문을 짓고 김용체가 글씨를 썼다.

3) 변이중유허비(邊以中遺墟碑)

서삼면 송현리 상평마을 구봉산에 있다. 변이중이 망곡하던 터의 비로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크기는 높이 153cm, 넓이 55cm, 두께 25cm 이며 앞면에 '망암변이중선생거려유허비' 라 새겨져 있다. (변이중의 행적은 교육편 서원조 참조)
1576년과 1577년 부모의 喪을 연이어 당하자 묘소 남쪽 구봉산(九峯山) 중턱에 여막을 짓고 매월 삭망(朔望) 때 황룡강이 범람하면 그곳에 올라 망곡(望哭)하여 후손들이 효행을 기리기 위해 그 자리에 비를 건립하였다.

4) 김명유허비(金銘遺墟碑)

북일면 문암리 제암마을에 있다. 김명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1893년(고종 30) 후손들이 세웠으며 기우만이 비문을 지었다. 크기는 높이 115cm, 넓이 37cm, 두께 17cm 이며 앞면에 '화곡선생김공유허비'라고 새겨져 있다. 옛비로부터 큰 길 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후손들이 1937년 새로 비와 비각을 세웠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비각 속에 '화곡김선생유허비'라고 새긴 새비가 있다. 크기는 높이 199cm, 넓이 71cm, 두께 84cm 이며 내용은 옛비의 것에다 약간 추가한 정도이다.
김명의 자는 여신(汝新)·호는 화곡·본관은 부안이다. 학행이 뛰어나 이이, 기대승과 도의지교를 맺었으며 변이중과 서신으로 학문을 논하였다. 임진왜란을 만나 문암리에 은거하였다. 이헌국이 방문하여 집 뒤의 암석에 '지행효우돈학장후'라 새기자 자손들이 인멸될까 우려해 유허비를 세웠다 한다.

(3) 선정비·불망비

1) 선정비군(善政碑群)

장성읍 수산리 동산마을에 있다. 장성읍에 흩어져 있던 이 지역 관찰사나 수령의 선정비, 불망비를 모아 놓은 것이다. 선정비나 불망비는 백성들이 수령의 치적과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우는 것이다. 현재 관찰사권상공엄도애민불망비(1816), 관찰사서공상정혜휼영세불망비, 관찰사이공헌직영세불망비(1889), 관찰사김공문현영세불망비, 부사임공세량몰세불망비(1720), 부사최공종주흥학휼민선정비(1723), 부사임좌원청덕선정비, 부사김후윤현영세불망비(1884), 부사김후재홍청백선정비(1878), 행군수민공영복청백선정비, 직지사이공면상영세불망비(1891), 관찰사윤공웅열유혜불망비. 찰방강후철일청백선정비, 부사김후헌수청백선정비, 부사김후오현영세불망비, 부사서후신보영세불망비, 부사김후소영세불망비, 부사성후정호영세불망비, 부사정후우용청덕선정비, 부사이후병예휼민선정비, 부사김후진교흥학비, 부사김후진교청백선정비, 부사심후의복영세불망비, 부사김후조연영세불망비, 부사김후조연청백선정비, 부사김후이정청덕선정비, 부사권후익청덕선정비, 부사이공낙수거사비, 부사박공시경청덕선정비, 부사박후증휘청덕선정비, 현감공신청덕선정비 등 31개의 비가 성산공원 올라가는 입구에 좌우로 나란히 서 있는데 주로 19세기에 세워진 것들이다.

2) 원두표선정비(元斗杓善政碑)

장성읍 백계리 백계마을에 있다. 전라도 관찰사 원두표의 선정을 기린 비로 옛비가 훼손되자 고손인 원경순이 전라도 관찰사 재직시인 1762년(영조 38) 새로 비를 세웠다. 크기는 높이 135cm, 넓이 49cm, 두께 22cm 이며 앞면에 '겸순찰사원후두표선정비'라고 새겨져 있다.
원두표(1593­1664)의 자는 자건(子建)·호는 탄수(灘 )·시호는 충익(忠翼)·본관이 원주이다. 박지계의 문인으로 인조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정사공신 2등 원평부원군에 봉해졌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전주부윤에 임명되고 이어 나주목사,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어영부사로 남한산성을 지켜 형조판서로 승진하고 경상도 관찰사, 호조판서 등을 거쳐 1662년(현종 3)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정치적으로는 서인 가운데서도 공신 세력으로 활약하고 뒤에 가서는 김자점과 갈라져 원당의 영수가 되었다.

3) 김진교 흥학비(金晉敎興學碑)

장성읍 성산리 182번지에 있다. 장성부사 김진교의 흥학비로 1842년(헌종 8)에 건립하였다. 1840년(헌종 6) 9월 12일에 부임 1842년 8월 1일까지 재임중 학문을 일으키는데 공을 치하하기 위해 군민이 흥학비를 세웠다.

4) 최희설선정비(崔希說善政碑(群))

진원면 진원리 고산마을에 있다. 진원현감 최희설의 선정을 기린 비로 1583년(선조 16) 세웠다. 크기는 높이 130cm, 넓이 41cm, 두께 30cm 이며 앞면에 '현감최후희설청덕선정비'라 새겨져 있고 뒷면은 반반하게 깎지 않아 볼록한 형태이다. 현재 고산마을 비석거리 진원성 입구에 다른 선정비 5개와 함께 서 있다. '부사이후병례청덕선정비'는 크기가 높이 135cm, 넓이 47cm, 두께 20cm 이며, '부사이우영세불망비'는 크기가 높이 92cm, 넓이 48cm, 두께 21cm 이며, '부사정후우용청덕선정비'는 크기가 높이 160cm, 넓이 45cm, 두께 25cm 이며, '부사김후조연영세불망비'는 크기가 높이 105cm, 넓이 45cm, 두께 20cm 이며, '현감오후효안○○선정비'는 크기가 높이 150cm, 넓이 40cm, 두께 20cm 이다.

5) 이승례선정비

남면 월정리 불정마을 뒤에 있다. 부사 이승례의 선정을 기린 비로 1849년 세웠다. 현재는 바로 옆에 도로가 나면서 땅 속에 윗 부분만 남기고 파묻혀 있다.

6) 김윤현불망비(金胤鉉不忘碑)

황룡면 관동리 304 관동마을에 있다. 1881년부터 1883년까지 장성부사를 역임했던 김윤현이 다리를 세워 폐해를 제거한 것을 마을민들이 잊지 못해 세운 비로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크기는 높이 114cm, 넓이 49cm, 두께 23cm 이며 앞면에 '부사김후윤현교량거폐불망비'라고 새겨져 있다.

(4) 기타

1) 천복철망곡단비(千福喆望哭壇碑)

남면 분향리 분향마을에 있다. 효자 천복철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1890년(고종 27) 후손들이 세웠다. 크기는 높이 151cm, 넓이 61cm, 두께 16cm 이며 앞면에 '천효자망곡단비'라 새겨져 있다. 천양근과 천봉근이 비문을 짓고 민방호가 글씨를 썼다. 현재 분향초등학교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왼쪽으로 있는 과수원 옆 구릉 자락에 평야를 바라보며 서 있다. 천복철은 순조 때 사람으로 호는 와송당(臥松堂)·본관은 영양이다. 부모를 극진히 공경하고 국상 때에 망곡단을 세워 곡을 하는 등 효행으로 인근에 칭찬이 높았다.

2) 난산비·망곡단(卵山碑·望哭壇)

황룡면 맥호리 105 맥동마을에 있다. 난산비는 김인후가 매년 인종의 기일인 7월 1일 맥동마을 난산에 올라 북망통곡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크기는 높이 192cm, 넓이 76cm, 두께 40cm 이며 윤행임이 비문을 짓고 이익회가 글씨를 썼다. 난산 정상에 있는 망곡단은 김인후가 인종의 국상 때 북향 재배하였다는 제단으로 한국전쟁 이후 새로 보수하였다. 크기는 가로 163cm, 세로 163cm, 높이 74cm 이다.

3) 진곤비(鎭坤碑)

장성읍 수산리 석탑 옆에 있다. 1880년에 세워진 비이다. 구읍 성산의 터가 와우형국으로 곤(坤)방이 허하여(풀밭이 멀리 있음­용진산) 읍민이 가난하므로 이를 인력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1876년부터 1880년까지 곤 방에 조산을 만들고 탑을 세우는 등 곤 방의 허점을 보강한 사업을 펼쳐 읍민의 평안과 부흥을 기원했던 사항을 기록한 비로 옆에 5층석탑과 같이 서 있다.

비문에는 "하늘이 이그러진다 하여 여화씨는 돌로 받쳤으며 땅이 기울어진다 하여 오(鰲)란 사람은 기둥으로 진압하였으며 척주(陟州) 땅 퇴조비는 고을 백성들을 위하여 재앙을 방비하였고, 담주땅 옹중돌은 지형의 허점을 바느질한 것이니 말하자면 하늘과 땅도 부족한 점이 있으면 인력으로 완전히 하였으니 이것은 천지를 간섭하여 조화를 부침이다. 우리 장성고을로 말하면 본래 두 고을이었다. 남으로는 진원 고을이요, 북으로는 오산고을이었는 바 옛날 임진왜란 후에 합하여 한 고을로 되었으니 즉 장성고을이다. 수 백년이 지나자 읍민들은 빈곤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감여가(풍수)의 말인즉 산은 숲이 성하고 물은 곧게 달아남에 수구가 무너진 이유이니 반드시 산을 쌓고 탑을 세우면 부읍이 되리라"하니 비로소 부의 남쪽에 산을 만들고 탑을 세울 계획을 하여 병자년(1876) 봄에 재물을 거두고 장정들을 합하여 한편은 산을 만들고 한편은 탑을 운반하니 탑은 옛 진원 땅에 서 있는 것이다.

사업을 마치지 못하고 대흉년이 들자 사업은 중간에 그치고 말았다. 다음 3년 후 기묘년(1889) 가을에 다시 인민들에게 책임을 주어 돌을 쌓고 흙을 쌓게 하고 높게 하기를 여러 번 하여 평지에 산봉우리를 만들어 한 주먹의 돌이며 흙이 이렇게 많아졌다 하겠다. 부민들이 또 각기 나와 운반하지 못했던 탑을 운반하여 사업을 마치니 산은 두어 질이 되었고 들은 층을 이루어 부중에서 바라보면 고을을 넘어 날아오는 봉우리 같도다.

기묘하도다 인민들의 정성에 천지도 반드시 감응할 것인즉 부민은 평안하고 부흥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물건이 국가를 흥창한 이치도 꼭 알 수 없거니와 어찌 몇백년 동안 어두운 세월 속에서 구렁텅이에 떨어져 있는 돌이 오늘날 공탑이 될 수 있으랴. 그러나 선정을 산쌓듯하고 덕행을 탑과 같이 높이 하면 갈수록 이지러지지 않을 것이요, 오랠수록 무너지지 아니하여 또한 가히 영세토록 완전하리라. 1880년 9월 일"

4) 가경팔년비(嘉慶八年碑)

삼계면 화산리 화산마을에 있다. 화산마을의 지세가 좌청룡, 우백호의 자락이 있는데 좌청룡 자락이 짧아 그 자락을 보강하기 위하여 흙을 돋우고 나무를 심은 자리에 비를 전주이씨가 세웠다. 크기는 높이 107cm, 넓이 46cm, 두께 16cm 이며 건립 연대는 비 앞면에 '가경팔년'이라는 기록이 있어 1803년(순조 3)에 건립하였다.

8. 회화

원본파일 다운로드

(1) 영정

1) 맹암영정(孟岩影幀)

황룡면 옥정리 80 대해마을에 있다. 맹암(孟巖) 김영열(金英烈)의 영정은 1401년에 그린 것인데 훼손되어 그 뒤 1812년(순조 12) 사우를 와룡리 와곡으로 옮기면서 이때 영정을 새로 모사하고 구영정은 땅에 묻었다. 1861년(철종 12) 지금의 대해마을로 영당을 옮기고, 1998년 사우와 영당을 중수하였다.

(2) 회화

1) 묵죽(墨竹)

황룡면 필암리 필암서원에 있다. 인종대왕이 하서 김인후에게 하사한 친필 그림이다. 필암서원 경장각에 목판으로 보관되어 있다.

2) 동호계회도(東湖契會圖)

북하면 중평리에 있다. 조선 중종때 작품으로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금호 임형수 등 명인들이 동호에 계모임 하는 진경을 그린 것이다. 규격은 가로 143cm 세로 78cm 이다.

3) 연방계회도(蓮榜契會圖)

북하면 중평리에 있다. 1531년(중종 26)에 그린 것으로 하서 김인후, 임당 정유길, 행촌 민순 등 여러 명인들이 같이 진사에 합격한 기념으로 계모임을 하는 진경을 그린 것이다. 규격은 가로 146cm 세로 79cm 이다.

9. 공예품

원본파일 다운로드

(1) 수공예

1) 앵무배(鸚鵡盃)

황룡면 아곡리 468번지 박종현이 소장하고 있다. 명종 임금이 1560년(명종 15) 정혜공 박수량에게 하사한 술잔으로 타원형으로 되어 있고 한쪽에 손잡이가 있다. 색깔은 조개껍질과 같이 빛깔이 변하며 오색이 영롱하다.

2) 보궤

장성읍 성산리 장성향교에 소장되어 있다. 향교의 제기로 본래 진원향교에서 1578년에 제작한 것이다. 당시 전라감사 심의겸이 열읍에 명하여 성균관 제기와 같이 청동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이때 진원현감 이경온이 만들면서 제기 후면에 진사 조억세의 글과 연대를 기록하여 주조하였다.

3) 정토사주직인(淨土寺主職印)

북하면 약수리 백양사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 덕종때 정토사를 중창한 증연선사가 정토종풍을 크게 떨치고 절 이름을 정토사라 했는데 당시 사용했던 철인으로 정토사주직인(4.4cm 정방형 사각 鍮製)과 정토사주직장(2.6cm 정방형 사각 鍮製) 인장이 보존되고 있으며, 1350년경 고려 충정왕 때 각진국사가 주로 사용한 것으로 전래되고 있다.

4) 임암산성승장인(笠岩山城僧將印)

북하면 약수리 백양사에 소장되어 있다. 입암산성승장인은 규모가 가로 4.7cm 세로 6.8cm로 장방형 사각으로 유제(鍮製)이다. 입암산성에는 유상사·장경사·흥경사·인경사·옥정사·고경사 등이 있었고, 입암산성의 군제에 별장 1, 군관 2, 승장 1, 아전 1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승장도 직인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종일)

QR CODE
  • 왼쪽 정보무늬 사진을 휴대전화에 인식시키면 자동으로 이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 이 정보무늬는 『제5장 문화재 179번』의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제5장 문화재 페이지 바로가기 주소(https://www.jangseong.go.kr/q/ezIzMDR8MTc5fHNob3d8fQ==&e=M&s=3), QRCODE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