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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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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물

1) 필암서원 문서

ο 지 정 번 호 : 보물 제587호
ο 소 재 지 :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7
ο 수 량 : 14책, 64매
ο 시 대 : 조선 중기
ο 지정연월일 : 1975년 5월 10일

필암서원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년∼1560)를 배향한 서원으로 서원내 건물 중에 장서각과 장판각이 있는데 이곳에 각종의 전적과 하서집의 판목이 소장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인종의 묵죽과 하서유묵 등이 보관되어 있다.

서원의 역대임원 명부인 [원장선생안(院長先生案)]1책, [필암서원 집강안(執綱案)]1책, 서원운영에 관계되는 [문계안(文契案)], 학생들의 명부인 [필암서원 서재유안(西齋儒案)]1책, [필암서원 원적(院籍)] 4책, [장성 필암서원 성책(成冊)] 등이다. 또한 서원에 소속되었던 노비들의 족보인 [노비안(奴婢案)], [전답안(田畓案)], 관련된 인사들의 방명록인 [봉심록(奉審錄)] 1책, 양자징과 관련된 품목(稟目) 등 모두 16책과 완문(完文)과 절목(節目), 상서문(上書文), 통문(通文)등 고문서류 64매이다.

필암서원 문서류와 고문서는 17세기 후기에서 20세기 초기에 이르는 지방교육제도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조선시대의 사회 경제사의 자료로서도 귀중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필암서원 문서 필암서원 문서

(2) 사적

1) 필암서원(筆岩書院)

ο 지 정 번 호 : 사적 제242호
ο 소재 지 :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7
ο 규 모 : 서원 일원(1,764평)
ο 시 대 : 조선시대
ο 지정연월일 : 1975년 4월 23일

필암서원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를 주향(主享)하고 고암(鼓岩) 양자징(梁子徵)을 배향한 서원이다. 하서 김인후의 자는 후지(厚之), 호는 담재(澹齋)이며 기묘사화 후의 도학 발흥기에 살았다.

모재(慕齋) 김안국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과 교류하면서 심성학을 연마하였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거쳐 정자·박사·부수찬 등을 지내다가 을사사화 후에는 퇴거하여 출사하지 않고 오직 성(誠)·경(敬)의 실천궁행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고, 그 외에도 천문·지리·율력에도 밝아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를 비롯한 저술과 그의 시문집인 ≪하서집≫을 남기고 있다.

필암서원는 1590년(선조 23) 장성읍 기산리에 창건되었다가 병화로 없어진 것을 1624년(인조 2)에 황룡면 필암리에 복원했다. 1662년(현종 3년)에는 필암(筆巖)서원이라 사액을 받았다.

이 서원의 문루인 확연루(廓然樓)는 정면 3칸, 측면 3칸, 상하 18칸의 이층 기와집으로 영조 연간에 두 번 중·개수되었고 문루의 편액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글씨이다. 문루를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의 단층 기와집인 강당 청절당(淸節堂)이 있는데 이 건물에는 9칸 대청과 좌우의 3칸 협실이 있고 대청에는 송동춘(宋同春)의 글씨로 된 편액이 있으며, 처마 밑에는 병계 윤봉구의 글씨로 된 필암서원이란 편액이 달려 있다. 그 뒷편 서측의 숭의재와 동측의 진덕재는 영조와 고종 때 중·개수된 것으로 서원의 동서재를 이루고 있는데 그 재호는 모두 동춘 송준길의 글씨이고 각기 6칸 13평이며 대청과 좌우에 협실이 있다. 서재 옆으로 3칸의 경장각이 있어서 인종의 어필묵죽(御筆墨竹)을 소장하였고, 액호는 정조의 어필이며, 청절당 뒷편 중앙에는 사묘로 들어가는 신문이 있는데 그 뒤에는 사묘인 4칸반의 우동사가 배치되었고 북벽에는 하서를 동벽에는 고암을 향사하고 있다.

필암서원 필암서원

2) 장성 대도리 백자도요지(長城 大都里 白磁陶窯址)

ο 지 정 번 호 : 사적 제377호
ο 소 재 지 : 장성군 삼서면 대도리 884번지 일대
ο 규 모 : 가마터 일원(1,980평)
ο 시 대 : 조선(16세기 중반∼17세기 전반)
ο 지정연월일 : 1992년 10월 10일

대도리 가마터는 삼서면 대도리 상무대 안에 있으며, 이곳에서는 가마 이외에 실패한 그릇을 버렸던 퇴적층과 그릇을 만들던 작업장이 함께 조사되었다. 가마는 산기슭 경사면을 이용하여 만든 반지하식 오름가마(登窯)로 길이 23.5m, 너비 2.8m 내외, 경사도 5∼7도 이다.

가마는 봉통부(燃燒室)와 몸체부(燔造室), 굴뚝부로 나누어지는데, 특히 봉통부가 제1몸체보다 높은 것이 특징이다. 몸체부는 4개 칸으로 나누어지는데 앞실의 윗부분이 뒷실의 아랫부분보다 높거나 거의 같은 높이를 이루고 있다. 또한 2실과 3실에는 가마 축조 후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보조 기둥을 세우고 있다. 제일 뒷칸인 4실은 초벌구이 칸으로 이용하고 있는데, 도요지도 일반적인 것과 달리 실패한 백자를 이용하여 같은 종류의 그릇을 그 위에 올려놓고 번조하도록 하였다.

작업장에서는 성격 미상의 종형 가마 3기와 흙을 다루는 연토장, 물로 정제한 백토를 저장하기 위한 구덩이 등이 조사되었다. 퇴적층은 모두 6개층으로 이루어 졌으며 층위간의 특별한 변화는 없다.

출토 유물은 백자와 가마 도구인 도지미가 대부분이며 청자와 흑자, 도기, 토기 등이 일부 출토되었다. 백자는 일상 생활 용기인 발과 접시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 외에 항아리와 향로, 약방망이, 묘지(墓誌) 등이 소량 출토되었다. 기형은 굽안 바닥을 깊게 곡면으로 깍아낸 오목 굽으로 입술 부분이 밖으로 벌어지며 그릇 안 바닥을 둥글게 깍아낸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대부분 굽바닥과 그릇 안 바닥에 바탕 흙 빚음을 받치고 포개어 구웠다. 그릇 안 바닥에 받침자국이 없는 것은 포개구이의 가장 위에서 구운 것으로 의례용 그릇과 그릇이 작아 큰 그릇 위에 놓고 구운 잔 등이 있다. 대도리 가마는 도자사 편년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장성 대도리 백자도요지 장성 대도리 백자도요지

3) 장성 입암산성(長城 笠岩山城)

ο 지 정 번 호 : 사적 제384호
ο 소 재 지 :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 산20∼2외
ο 규 모 : 1,308,429㎡
ο 시 대 : 고려시대
ο 지정연월일 : 1993년 11월 10일

갈재(蘆嶺)에 연해 있는 입암산성은 전라북도 정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해발 687m로 절벽이 많고 산세가 험준하여 예로부터 전략요새지로 알려진 산성이다.

산성의 형태는 산봉을 둘러싸듯 포곡식(包谷式)으로 된 전형적인 산성으로 총 길이는 약 15km쯤 쌓았으며 성의 높이는 3m이고 지금도 남문과 북문이 그대로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원래 이 성은 고려시대 1256년(고종조) 송군비가 남해안에 침입한 몽고군과 싸우면서 축성했다 하며, 그 후로 임진왜란 때에는 이 성의 별장 윤진이 순절하기도 했다.

{장성읍지}에 의하면 1593년(선조 26) 장성 현감 이귀(李貴)가 개축하였고, 또 1653년(효종 4) 현감 이유형이 성의 너비를 넓혔다. 1677년(숙종 3) 장성부사 홍석구가 다시 95파(1파:양팔의 길이)를 더 증축했다고 한다.

성내 건물로는 대관(大館)을 두고 그 동·서에 두각(頭閣), 그 좌우로 월곽(月廓)이 있었다. 이 외에 군기고·공남루 등이 배치되었으며, 성내 사찰로는 유상사·장경사·흥경사·인경사·옥정사·고경사 등이 있었다고 한다. 병사는 별장 1명을 비롯하여 군관 2명, 승장 1명등 총 900여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또한 이 성의 동원에 대비하고 있는 병력은 장성 778명, 고창 200명, 정읍 187명, 흥덕 157명, 태인 1,701명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소요되는 군량미는 총 17,094석이며, 벼가 1,048석, 콩이 988석인데, 이 군량미의 보급은 나주, 광주, 영광, 고창, 정읍, 태인 등지였다. 이 성에는 임란때 순절한 별장 윤진의 순의비가 남아 있다.

장성 입암산성 장성 입암산성

4) 황룡전적지(黃龍戰蹟地)

ο 지 정 번 호 : 사적 제406호
ο 소 재 지 :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신호리
ο 면 적 : 18필지 20,388㎡
ο 시 대 : 1894년
ο 지정연월일 : 1998년 6월 10일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전쟁)은 반외세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쟁취하려는 근대사의 서막이며 민족·민주운동의 원동력이었는데, 1894년 1월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제거하기 위해 전봉준 등 수천 명이 봉기한 농민항쟁이 계기가 되어 3월에 손화중·전봉준·김개남 등이 무장(茂長)에서 봉기하여 고부를 점령하고 백산에 모여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무장과 바로 인접한 장성 등 현재의 전남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이 참여하면서 호남인이 주축이 되었다.

백산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4월 6일 황토현(黃土峴)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하고 7일에는 정읍을 점령하고 연이어 인근 고을을 격파했고 4월 16일에는 함평까지 점령하였다.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1894년 4월 22일 장성으로 진군하여 전주에 주둔하였던 홍계훈의 경군을 유인하여 그 예봉을 꺾고 전주를 점령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웠는데 그 최적 장소로 장성 황룡을 택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4월 23일 황룡전적지를 중심으로 인근의 삼봉산과 황룡장터 등에서 이학승의 선봉대와 결전하여 관군(경군)을 참패시켰고(선봉장 이학승 사망, 대포 2문과 양총 100여정 탈취 등), 대나무를 원통형으로 엮어 만든 '장태'라는 신무기를 굴려 총알을 막으면서 관군에 육박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관군의 수는 300여명, 동학농민군은 6∼7천여 명이었으며, 관군(경군)이 패주한 이후 동학농민군은 경군 보다 먼저 전주로 들어가 전주를 점령하여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휴전을 성립시키고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통치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처럼 황룡격전지는 1894년 4월 23일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대장 전봉준)과 관군(경군·양호초토군, 선봉장 이학승)의 주력부대가 접전하였으며, 그 당시에 사용했던 '장태'라는 큰 무기는 큰 역할을 하여 동학농민전쟁(혁명) 초기에 가장 큰 역사적 의미가 있는 승전유적이며, 이곳 승전을 계기로 전주에 입성하여 우리 역사상 유래가 없는 집강소에 의한 농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던 곳이다.

동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조성된 '장성황룡동학농민군승전기념공원'과 관군 선봉장이었던 이학승의 순의비(1897년 건립, 최익현 찬, 높이 159cm, 21행 43자 음각됨)가 있어 동학농민군과 관군(경군)양측의 활동과 유적을 볼 수 있는 역사성 있는 전적지이다.

이 유적지는 1894년 4월 반봉건의 제폭구민과 반외세의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선 동학농민군이 이학승이 이끄는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를 무혈 입성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승전지로서 황토현전적지(사적 제295호)나 우금치전적지(사적 제387호)와 함께 동학농민사상 역사적 의의가 큰 곳이다.

황룡전적지 황룡전적지

(3) 천연기념물

1) 백양사의 비자나무 분포북한지대(分布北限地帶)

ο 지 정 번 호 : 천연기념물 제153호
ο 소 유 자 : 백양사
ο 소 재 지 :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ο 면 적 : 백암산 일원(900,000평)
ο 지정연월일 : 1962년 12월 3일

비자나무는 주목과에 속하는 난대성(暖帶性) 상록침엽교목이다. 우리 나라에는 제주도를 비롯한 남부 여러 섬과 남쪽 해안지방의 산에서 자라고 있다. 현재 제주도 송당목장 부근에는 원시림에 가까운 순림이 있다. 그밖에 전남 해남군 해남읍과 고흥군 금탑사 경내의 순림 등이 있으며 그 외 장흥군 보림사, 정읍시 내장사, 고창군 선운사 부근에도 이 숲이 남아 있다.

비자나무의 종자는 옛날부터 회충이나 십이지장충 등의 구충제로 널리 써 왔기 때문에 비교적 잘 보존되어 오다가 일제시대부터 물 통감, 또는 건축재로 베어 낸 까닭으로 없어져 버린 곳이 많다.

이 나무의 높이는 20m, 흉고 직경이 1m 정도까지 자라며, 수피(樹皮)는 매끌매끌하고 늙은 나무에서는 넓게 세로로 쪼개져서 떨어진다. 잎은 피침상선형(披針狀線形)이며 끝이 점차로 좁아져서 뾰쪽해지고 딱딱하다. 기부(基部)가 갑자기 좁아져 짧은 자루가 되고, 잎은 원래 나선상(螺旋狀)으로 배열되나 비틀려서 2열이 된다. 짙은 녹색인데 광택이 있고 길이 2∼3cm, 이면에는 2줄의 황백색인 기공 선이 있다. 암수 다른 나무이며 꽃은 4월에 핀다.

백양사의 비자나무 분포북한지대 백양사의 비자나무 분포북한지대

(4) 중요무형문화재

1) 소목장(小木匠)

ο 지 정 번 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ο 기 능 자 : 설석철(薛石鐵)
ο 분 류 : 공예기술
ο 소 재 지 :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대창동) 1276
ο 지정연월일 : 2001년 9월 6일

소목장이란 건물의 문, 창문이라든가 장롱, 궤, 경대, 책상, 문갑 등 목가구를 제작하는 기술과 그 기능을 가진 목수를 말하는 것으로 건축을 주로 하는 대목장(大木匠)에 대칭되는 말이다.

소목장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때부터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목장(木匠)이라고 하였으나 대목과는 구분하였던 것 같다. 조선 전기까지는 목가구가 주로 왕실과 상류계층을 위해 제작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고 종류도 많아져 지역적인 특성이 현저히 나타나게 되었다.

소목장은 무늬가 있는 나무로 자연스러운 미를 최대한 살린 한국 전통 목공예 기법으로 자연환경과 주택구조 등을 고려하여 한국적인 독특한 조형양식을 만들어 낸 민속공예로 가치가 높다.특히 남도지역은 나무의 무늬를 귀하게 여겨 옻칠을 하지 않은 민장롱을 주로 제작하였는데, 주로 먹감나무를 쓰는 것이 특징이다.

설석철은 부친인 설명진으로부터 장롱·반다지·뒤주·문갑·책장·서안·좌경·경상 등을 제작하는 기능을 전수받아 전통 짜임 기법과 마감칠이 우수한 장인으로 전통 목가구 제작방식을 충실히 계승한 장인으로 알려져 있다.

2. 지방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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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형문화재

1) 장성 원덕리 미륵석불(長成 院德里 彌勒石佛)

ο지 정 번호 : 유형문화재 제13호
ο소 재 지 :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563-1
ο규 모 : 높이 5m(1구)
ο재 료 : 화강암
ο시 대 : 고려시대
ο지정연월일 : 1972년 1월 29일

구전에 의하면 백제 때부터 이곳에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는 절터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미륵석불만 남아 있다. 국도 1호선과 호남선 철도가 지나는 길목으로 인근한 갈재(蘆嶺)를 사이에 두고 전남·북이 갈린다.

이 석불은 머리 위에 지붕 모양의 관을 쓰고 있으면서 몸체부분은 가운데서 따로 만들어 두개의 석재를 결구 하여 조각하였다. 지붕형 관의 형태는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신복사지 석불좌상(보물 84호)에서 보인 기법과 동일하여 지붕돌 상면이 팔각원형을 이룬다. 그 밑에 얼굴은 부처의 상호라기 보다는 석장생에서와 같이 눈이 크고 둥글며 코는 중간에 내려와 처리되었다.

또한 입술이 두툼하나 형식화되었으며 귀는 약식화 되어 장중함을 잃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U자형 옷 주름을 보였고, 몸 전체를 덮어 발밑까지 내려왔으나 겨우 옷을 걸쳤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목은 굵은데다 삼도는 뚜렷하게 표현되었으며, 여기서 이어지는 어깨는 그냥 괴석일뿐, 이러한 형태가 발끝까지 계속되어 사실적인 입체감이 없는 커다란 돌덩이로 바뀌고 말았다.

이 석불은 전체 모양이 우둔하며 일부 기법의 퇴화 등에서 볼 때 고려말 또는 조선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장성 원덕리 미륵석불 장성 원덕리 미륵석불

2) 백양사 극락보전(白羊寺 極樂寶殿)

ο지 정 번 호 : 유형문화재 제32호
ο소 재 지 :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26
ο규 모 :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1동)
ο시 대 : 조선시대
ο지정연월일 : 1972년 8월 7일

극락보전은 단층 맞배지붕으로 화려한 다포집이다. 건물구조를 보면 외부로 창방위에 다시 평방이 놓이고 공포는 내 3출목, 외 2출목으로 다포 전기 양식에서 중기 양식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양쪽 벽면에는 단색으로 된 벽화가 담담하게 그려졌다.

원래 백양사는 632년(백제 무왕 33) 여환조사가 백암사를 창건하였고 후에 정토사로 했다가 다시 오늘의 백양사로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 사찰 사료 백양사 극락전불량계존에 의하면 [문정왕후뢰향축열서]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당시 백양사 극락전을 짓는데 문정왕후가 참여하였음은 매우 큰 궁중의 후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현재의 극락전은 4중창으로 1574년(선조 7) 환응선사가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환응선사는 조선 말기 스님으로 주로 전북 선운사에 주석 했던 분으로 위 연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므로 4창자를 환응선사로 보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이 건물은 비교적 옛 건축양식의 원형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백양사 극락보전 백양사 극락보전

3) 백양사 대웅전(白羊寺 大雄殿)

ο지 정 번 호 : 유형문화재 제43호
ο소 재 지 :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26
ο규 모 :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1동)
ο시 대 : 조선시대
ο지정연월일 : 1974년 9월 24일

백양사는 632년(백제 무왕 33) 여환조사가 현 운문암 자리에 절을 짓고 백암사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백암산 정토사 사적(충혜왕 복위 2년; 1341년 간행)에 의하면 위 내용이 보이지 않을 뿐더러 백양사 [極樂殿佛糧己序]에 기록에도 [伽藍其名曰淨土炷於貞觀之七年歷羅麗千有餘載……]라 하여 633년(백제 무왕 34년) 초창 당시부터 정토사란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또 1849년(헌종 15년)에 노사 기정진이 쓴 사적기에도 [백암산 정토사]라 기록되고 있어 현 백양사란 이름이 언제부터 쓰여졌는지 알 길이 없다.
조선 사찰 사료의 [극락전불량계서]에 [문정왕후뢰향축열서]라는 내용에서 보면 당시 백양사는 왕실의 상당한 후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형식을 보면 높직한 장대석으로 다듬은 3단의 기단에 원형 주춧돌을 놓았으며 기둥은 5칸 모두 민흘림의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로는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그 위에 공포를 장식하였는데 출목수는 외 2출목, 내 3출목이며 각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 2구씩을 배치하여 장엄함을 더했다.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화려한 단청이 아직도 선명하다. 창문은 5칸 모두 사분합인데 네짝문이 빗살문이며 위에 교창을 두지 않았다.

조선후기 다포양식은 포작에 있어서 심히 장식적이며 또한 모든 절제를 벗어나 활달한 창작의 세계로 달리는 경향이 있으나, 백양사 대웅전의 경우는 첨차살미의 최상단은 예리한 삼각형 모양에서 익공계 모양으로 변화하였으며 쇠서도 매우 섬약해진 면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조선후기 사찰 건물들의 거의 공통된 특징이라 할 것이다.

현 대웅전은 1917년 한말 송만암대종사가 다섯 번째 창건한 것이라 전한다.

백양사 대웅전 백양사 대웅전

4) 백양사 사천왕문(白羊寺 四天王門)

ο지 정 번호 : 유형문화재 제44호
ο소 재 지 :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26
ο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1동)
ο시 대 : 조선후기
ο지정연월일 : 1974년 9월 24일

이 건물은 익공식과 주심포식을 병용한 절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정문 중앙은 사찰 통로이며 좌우협간은 사천왕 상을 안치하였다.

사천왕은 불국의 사방을 진호하여 국가를 수호하는 신으로 수미산의 중턱에 있다고 한다. 즉 동쪽에 지국천왕, 서쪽에 광목천왕, 남쪽에 증장천왕, 북쪽에 다문천왕이 각각 두 장군을 거느리며, 위로는 제석천을 섬기고 아래로는 팔부중을 지배하여 불법귀의하는 중생을 수호하고 있는 상징적 신이다. 또한 이들 신은 호세안국을 수행하면서도 모든 악귀와 잡신을 제압하여 정법도량을 수호하는 존엄한 위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이 사천왕문 건물 역시 한말 대웅전 증축과 함께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남지방의 사천왕문으로 구례 화엄사와 장흥 보림사에 뛰어난 작품들이 있어, 백양사의 사천왕문과 함께 사찰 문화재로서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백양사 사천왕문 백양사 사천왕문

5) 백양사 소요대사 부도(白羊寺 逍遙大師 浮屠)

ο지 정 번 호 : 유형문화재 제56호
ο소 재 지 :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16
ο규 모 : 높이 158cm(1기)
ο재 료 : 화강암
ο시 대 : 조선중기(1650년경)
ο지정연월일 : 1974년 12월 26일

이 부도는 조선조 범종과 흡사한 형식을 갖추었는데 팔각의 기단부와 그 위에 8잎의 아래를 향한 연꽃이 몸체를 받고 있다. 몸체부는 하부에 두 줄의 돌대가 있으며 돌대 안에는 뱀, 용, 거북, 원숭이, 개구리, 게 등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 중앙에 문짝모양을 조각하고 그 안에 '소요당'이라 음각 하였으며, 그 옆으로는 9개의 유두가 돌출되었고 이러한 유곽이 4면에 같은 양식으로 배치되었다. 또 유곽 바로 아래로는 하늘을 날으는 두 마리의 용을 장식하여 한층 장엄하게 보인다.
상륜부는 법종 양식을 모각하였는데 4마리의 용무늬와 그 사이에 구름무늬를 조각하고 그 위로 보주를 올려놓았다.

소요대사는 1562년(명종 17) 이 고장 담양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오씨로 13세에 백양사에서 삭발하였고 부휴에게 대장경을 배운 후 서산대사에게 선지를 깨쳤다. 만년에 구례 연곡사에서 노모를 모시면서 주석할 때에는 감로사(현 구례 천은사), 쌍계사, 정토사 등을 중건하는데 직접 앞장섰으며, 또한 정토사를 백양사로 고치고 조실로 있으면서 선풍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후에 고향인 담양 추월산 기슭에 있는 용추사로 돌아와 입적하니 이때가 1649년(인조 27) 세수 88이었다. 소요대사의 부도는 백양사 이외에도 지리산 연곡사와 담양 용추사에 있다.

백양사 소요대사 부도 백양사 소요대사 부도

6) 기옹영정(碁翁影幀)

ο지 정 번 호 : 유형문화제 제67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장성읍 안평리 668
ο규 모 : 가로 76cm, 세로 136cm(1폭)
ο재 료 : 한 지
ο시 대 : 조선(정조)
ο지정연월일 : 1977년 10월 20일

이 영정은 조선 왕조의 전형적인 영정과는 거리가 먼 이형적인 요소가 많다. 즉 영정 앞에 술병과 담뱃대, 바둑판이 있어 영정이라는 의미를 갖기 이전에 서사적 화면구성으로 풍류적인 면과 아울러 향토색마저 곁들인 특색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화면구성은 엷은 하늘색을 인물상 전면에 깔고 검정 사모를 그려 매우 단조로우며, 일부 원형에 손을 댄 흔적이 엿보인다. 영정의 주인공은 정조때 학자인 변종락으로 기옹은 그의 호이며 회갑때 어느 스님이 와서 그렸다고 전한다.

기옹은 장성읍 장안리(현 기옹정 소재지)에 거주하면서 동구 앞에 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정자를 짓고 당시 명인들과 함께 바둑과 술, 글로써 여생을 보낸 분이다.

기옹영정 기옹영정

7) 장성 향교(長城 鄕校)

ο지 정 번 호 : 유형문화재 제105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장성읍 성산리 110
ο규 모 : 일 원
ο시 대 : 조선시대
ο지정연월일 : 1985년 2월 25일

장성 향교는 1394년(태조 3) 북일면 오산리에 창건하였으나, 1600년(선조 33) 진원 향교와 통합하여 장성읍 장자동으로 옮겼다. 그 후 1658년(효종 9) 효종의 군비확장책으로 입암산성이 설치되면서 장성현이 도호부로 승격됨에 따라 장성읍 성산리 현위치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교의 규모는 대성전, 동·서무, 내삼문, 명륜당, 동·서제, 외삼문, 홍살문, 고직사 등이 있으며 명륜당 우측에 수령 약 300년된 은행나무와 계수나무가 있다. 건물의 배치를 보면 외삼문 밖 약 300여m 거리에 하마비가 있고 13m되는 곳에 홍살문이 있으며 외삼문, 명륜당, 동·서제, 내삼문, 동·서무는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전체 좌향은 서북향을 하고 있다. 명륜당과 외삼문 사이에 사각형 연못이 있는데 가운데 모임지붕의 6각 정자가 세워져 있다.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 10철 6현, 우리 나라의 18현 등 39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건축형식을 보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약 1m 높이의 기단을 쌓고 자연석 덤벙 주춧돌 위에 민흘림이 약한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가구는 2고주 5량이다. 공포는 소 혀 모양의 헛첨차에 소루를 얹어 외목도리의 행공첨차를 받치고 있는 주심포계의 외 1출목 2익공 양식인데 제공과 헛첨차는 촛가지가 앙혀과 수혀로 되어 있으며 내부는 보아지로 보를 받치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며 바람막이 판이 있다. 명륜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덤벙 주춧돌 위에 민흘림이 약한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공포는 2익공식이다. 평면을 보면 좌우퇴칸은 온돌방으로 이용하고 중앙 4칸은 개방된 마루이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동·서제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며 가구는 1고주 5량이다. 동·서무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며 3량가에 초익공 양식이다.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계단의 높이가 165cm로 높으며 2익공의 공포에 3량가이며 팔작지붕이다.

장성 향교 장성 향교

8) 장성 남문 창의비(長城 南門 倡義碑)

ο지 정 번 호 : 유형문화재 제120호
ο소 재 지 :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 714번지
ο규 모 : 총 높이 190cm, 비신높이 149cm,
ο두 께 31cm
ο재 료 : 화강암
ο시 대 : 순조 2년(1802)
ο지정연월일 : 1985년 2월 25일

이 비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해(1592년)와 이듬해(1593년) 5월, 그리고 정유년(1597년) 8월 등 3차에 걸쳐 장성 남문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단의 전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1802(순조 2)에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짓고, 황승원(黃昇源, 1732 ∼ 1807)이 썼으며, 전서는 김이도(金履度)가 썼다.

비의 형태는 108×56cm 크기의 사각형 비 좌석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의 옥개석(屋蓋石)을 올렸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을 만들었는데 비각의 지붕형태는 팔작(八作)으로 공포(蛋包)는 익공식(翼工式)이다.

비문은 4면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전면 중앙에 '호남오산남문창의비(湖南鰲山南門倡義碑)'라 비제(碑題)를 새기고 제현위차(諸賢位次), 자제종사(子弟從事), 동창(同倡), 의승장(義僧將), 사노(私奴) 등 의병단의 중요인물 77명의 직과 성명을 기록하였다. 여기에 새겨진 오산은 장성의 별호이다. 그리고 좌하단에 '만력임진이백십일임술(萬曆壬辰二百十一壬戌)'이라는 건립연대를 명기하였다. 이해는 1802년이다. 좌·우면과 후면은 비문인데, 상단에 '유명조선호남오산창의비(有名朝鮮湖南鰲山倡義碑)'라 하여 3면에 새겨져 있다.

이처럼 이 비는 1기의 비이면서도 전면과 좌우면·후면 명제가 서로 달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리고 비문 상에는 비 건립이후 추가로 새기거나 의도적으로 지운 흔적들이 보인다.장성남문 창의라 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문에 기록된 김경수, 김제민, 기효간, 김홍우, 윤진, 기효증 등이 전라도 일대에 격문들 돌려 의병을 모집하고, 당시 장성현감 이귀의 협력을 얻어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활동을 한 것을 말한다.

장성 남문 창의비 장성 남문 창의비

9) 장성 내계리 오층석탑(長城 內溪里 五層石塔)

ο지 정 번 호 : 유형문화재 제131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 51
ο규 모 : 높이 475cm
ο재 료 : 화강암
ο시 대 : 고려시대
ο지정연월일 : 1986년 2월 7일

이 석탑은 삼계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500여m 떨어진 내계리 천방마을 박동희씨 집 뒤뜰에 있다. 이 곳에 옛부터 천방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구전으로는 고려시대 이곳의 사찰 규모가 커서 방이 천개나 되므로 그 이름을 천방사라 하였고, 언젠가 알 수 는 없으나 어느 승려가 빈대가 많아 불을 질러 모두 불탔다고 한다.

석탑의 구조를 보면 여러 매의 지대석을 결구하고 그 위로 2단 괴임을 한 3단의 판석으로 기단부를 구성하였다. 1층 몸체는 2개의 석재를 올려놓았으며, 각 4면에는 모서리 기둥을 새겼으나 지극히 형식화되었다. 지붕 돌과 몸체 돌은 각 1석씩인데 1층에서 3층까지는 지붕 돌의 층급받침이 3단이며 4층에서 5층까지는 2단으로 줄었다. 또한 몸체 각 면의 모서리 기둥도 위로 올라갈수록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희미하게 각출하였다. 지붕 돌의 우동은 뚜렷하고 처마에 이른 전각의 반전이 심한 편이며 지붕돌 하면은 수평이다.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이 석탑은 일부 지대석이 교란되어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나 그 외의 부재는 완전하게 보존되고 있으며, 특히 초층 몸체가 두개의 석재로 결구된 점은 광주서5층석탑(보물 제109호)의 양식과 동일식이어서 이 지방 석탑 연구에 좋은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기단부가 단층 기단인데 2단 괴임으로 구성한 석재를 3개의 별석으로 하여 3단의 층계를 이룬 형식도 매우 특이한 수법이다. 조성시기는 고려후기로 추정된다.

장성 내계리 오층석탑 장성 내계리 오층석탑

10) 서능 정려비(徐稜 旌閭碑)

ο지 정 번 호 : 유형문화재 제162호
ο소 재 지 : 장성군 북일면 박산리 128
ο규 모 : 정려비각 1동, 비 1기
(높이 87cm, 너비 19.5cm,두께 7cm)
ο시 대 : 1578년(선조 11)
ο지정연월일 : 1988년 3월 16일

서릉의 정려비는 1578년(선조 11) 장성지방 사림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서릉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과 향유들이 건립하였다. 서능은 고려 고종 때 사람으로 하늘을 감동시킨 효자로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 『장성현』조에 기록이 나타난다. 현재의 북일면 작동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대방, 호는 오성, 시호는 절효공이다. 어려서부터 효심과 학문이 지극하고 뛰어나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느날 어머니의 목에 큰 종기가 생겨 의원에게 물으니 살아 있는 청개구리만이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다 하였다. 그러나 때는 한 겨울이라 구할 길이 없어 애통하게 흐느끼다가 하는 수 없이 의원과 상의하여 우선 약을 조제하여 집 앞 나무 아래에다 약탕관을 걸고 약을 끓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무 위에서 청개구리가 떨어져 약탕관에 들어갔다. 이를 본 의원은 하늘이 효성에 감동하여 내려 준 약제이며, 이로써 어머니의 병환은 완쾌될 것이라 하였다. 과연 약을 드신 서능의 어머니는 병이 낳았고 그로부터 그의 하늘을 감동시킨 효성은 온 나라안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를 알고 고종 때에 정려를 내려 포상하였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비가 세워진 뒤 1669년(현종 10)에는 변효 등 12인 유사들이 주동이 되어 비각을 중건하기 시작하여 1694년(숙종 20)에 완공시켰으며, 이때 동춘 송준길(1606∼1672년)이 정려각의 액편을 썼다. 1824년(순조 24)에 중수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13년에 중건하였다.
이 비는 절효 서능의 행적, 연대, 역사기록을 주목하여 볼 때 고려시대 호남지방 효행의 상징이라 하겠다.

서능 정려비 서능 정려비

11) 장성 죽림사 고문서 일괄(長城 竹林祠 古文書 一括)

ο지 정 번 호 : 유형문화재 제163호
ο소 재 지 : 장성군 북이면 만무리 376­1
ο규 모 : 17건 91점(1괄)
ο시 대 : 조선후기
ο지정연월일 : 1988년 12월 12일

죽림사에 소장된 문서로 이곳에 배향된 심은 이수(李隨: 1374∼1430년)와 관련된 서첩류와 후손인 사유당 이복원과 그 종자 기찬과 왕복하였던 서간, 부조묘, 사우창건에 관련된 자료, 그리고 전답 매매문기·의송·소장·원청·소지 등 고문서류를 포함하여 17건 91점이다.

문정공서첩 5책(① 궁: 42×35cm, 선풍장, 이시만·정대용 등 17인, ② 상: 35×42cm, 선풍장, 심조순·조진헌·오정원 등 10인, ③ 각: 35×42cm, 선풍장, 홍원섭·서장보·장성부사 이영경 등 16인, ④ 징: 35×42cm, 선풍장, 송익효·신위등 22인, ⑤ 우: 35×42cm, 선풍장, 조용진·홍석모 등 7인의 문정공에 대한 문장작품), 현동첩 4책(⑥∼⑨ 선풍장), ⑩ 이방첩(31×47.5cm, 선풍장 15장), ⑪ 회동서첩 1책(29×42.7cm, 선풍장 29장), ⑫ 동현첩 1책(28.5×38.5cm, 선풍장 23장), ⑬ 풍고외서첩(26.7×42.8cm, 선풍장 25장), ⑭ 액백서첩(1책 24×36cm, 선풍장 21장), ⑮ 밀암서첩(30.8×47.3cm, 선풍장 18장), 종애서첩(30×44cm, 선풍장 21장), 진선서첩(9책 선풍장), 종계안(32×32.7cm, 저지 필사본 18장, 1804년 심은 후손 득원의 서), 하기초출기(19.5×21cm, 저지 필사본 8장),?이문정공실기 (광곽 17.5×25cm, 저지 10행 18자 판제 상상화문어미 96장 순조임술 내각활자), 외손구청물재기 (19.7×16.7cm, 저지 필사본 33장), 외가보(16.8×31.8cm, 저지 필사 녹장 17장), 사유당유고(20×34cm, 저지 필사 선장 52장), 건륭사십육년 임인삼월육일오촌질이응화처명문(오촌숙재동) 등 매매문기·언정·의송·서장·통문·예상과 단자·늠의·늠목·제문·만시 등 고문서 60종이다.

심은 이수는 세종 잠저시 사부가 되었으며 41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이다. 1590년(선조 23) 호남유림이 진원현 죽림동에 죽림사를 창건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고 1814년(순조 14) 현지에 복건, 1868년(고종 5) 훼철 후 다시 1947년 복원하였다.

장성 죽림사 고문서 일괄 장성 죽림사 고문서 일괄

12) 장성 고산서원 노사선생전집 및 답문류편 목판(長城高山書院蘆沙先生全集및答問類編木板)

ο지 정 번 호 : 유형문화재 제214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 257
ο규 모 : 문집 653판, 답문 209판
ο시 대 : 조선후기
ο지정연월일 : 1999년 7월 5일

조선 고종때의 학자이자, 성리학의 6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노사 기정진(1798-1876)의 문집과 그의 저서 『답문류편』을 1902년(고종 39)에 목판을 새긴 것으로 문집은 653매, 『답문류편』은 209매이다.

기정진은 어려서부터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깨우쳤으며 경서 사서 등을 읽었다. 183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강릉참봉을 지냈으며, 그 후 여러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거나 어느 학파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사색에 의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1927년에는 고산서원에 6명의 다른 문인과 함께 모셔졌으며, 봄가을로 제사를 지낸다. 시호는 '문간'이다.

목판에 새긴 연대는 늦으나 빠진 목판이 없을 뿐 아니라 간행처인 신안사가 조선 후기 경상도 일원의 출판기능을 담당했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간행된 책자가 전하는 것이 없으므로 그 사료적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장성 고산서원 노사선생전집 및 답문류편 목판 장성 고산서원 노사선생전집 및 답문류편 목판

13) 장성필암서원 하서선생문집목판(長城筆岩書院河西先生文集木板)

ο지 정 번 호 : 유형문화재 제215호
ο소 재 지 :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7
ο규 모 : 문집 258판 외392판
ο시 대 : 조선중기
ο지정연월일 : 1999년 7월 5일

조선 인종때의 학자인 하서 김인후(1510-1560)의 문집을 새긴 목판이다. 김인후는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를 시작으로 홍문관의 박사와 부수찬, 옥과현감 등의 벼슬을 지냈다. 시문에 뛰어나 10여권의 문집을 남겼으나 도학(道學)에 관해 쓴 책은 많지 않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에 정통하였으며, 제자로 정철, 조희문 등이 있다. 그가 죽은 후 장성의 필암서원, 옥과의 영귀서원 등에 모셔졌고, 시호는 '문정'이다.

김인후가 죽은 8년만인 1568년(선조 1)에 처음 간행되어 1686년(숙종 12) 중간본과 1797-1802년에 걸쳐 세 번 간행되었다.
김인후의 저술로 내용도 중요하지만 판각연대가 올라가며 누락된 목판이 없다는 점에서 그 가치도 크다.

14) 장성필암서원 하서유묵목판일괄(長城筆岩書院河西遺墨木板一括)

ο지 정 번 호 : 유형문화재 제216호
ο소 재 지 :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7
ο규 모 : 초천자문 18판 외 38판
ο시 대 : 조선중기
ο지정연월일 : 1999년 7월 5일

1610년(광해군 2)에 새긴 『초서천자문』18판과 『해자무이구곡』18판, 1568년(선조 1)에 새긴 『백련초해』13판과 유묵 4판, 그리고 인종이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판 3판은 1770년(영조 46)에 새긴 것이다.
안진경체에 바탕한 김인후의 초서체 글씨는 당시 성리학자 특히 호남 학자들 사이에 전형적인 모범 글씨가 되었다. 『백련초해』는 100가지 싯구를 한글로 해석한 것인데 『백년초해』한글판 가운데 연대가 가장 앞섰고, 인종의 판체인 묵죽도판은 판각의 변천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장성필암서원 하서유묵목판일괄 장성필암서원 하서유묵목판일괄

(2) 기념물

1) 봉암서원(鳳岩書院)

ο지 정 번 호 : 기념물 제54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 19
ο규 모 : 서원 일원
ο시 대 : 조선시대
ο지정연월일 : 1981년 10월 20일

봉암서원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화차를 발명 전공을 세웠던 변이중 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1697년(숙종 23) 장성군내의 유림이 중심이 되어 변이중 선생의 출생지요 강학의 자리인 현재의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에 서원을 건립하고, 그를 추모함과 동시에 정유재란 때 입암산성에서 전사한 윤진(1548∼1597년)과 변이중 선생의 장자 경윤, 현손 휴(1765년 중수 때 추배)을 배향하여 왔으나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후 1976년 장성군 유림의 발·성원과 후손의 노력에 의하여 현재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변이중 선생은 1546년(명종 1) 현재 서원이 있는 장성읍 장안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언시, 호는 망암, 본관은 황주, 율곡 이이의 문인이며 1573년(선조 6)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모어사가 되어 병마·군기를 수습한 뒤 수원에 주둔하여 기호의 적을 대비하고, 같은 해 조도사가 된 후 양천에 주둔하여 누차 전공을 세웠다. 한편, 화차 300량을 제조하여 순찰사 권율에게 제공 행주대첩을 이룩하게 하였다. 조도사를 세 번, 독운사를 두 번 지내면서 군량 수십만석을 거두어 명군에 조달하였다. 1603년(선조 36) 함안군수로 부임하였으나 2년 후에 사임하고 장성으로 돌아와 후생들에게 강학을 하다가 1611년(광해군 3)에 서거하였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봉암서원 봉암서원

2) 장성 고산서원(長城 高山書院)

ο지 정 번 호 : 기념물 제63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 257
ο규 모 : 서원 일원
ο시 대 : 1927년
ο지정연월일 : 1982년 10월 15일

고산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6대가의 한 사람으로, 조선말기의 대표적 성리학자 기정진이 강학한 곳에 그를 추모 기념하기 위하여 문인 후학들이 1927년 건립한 것이다. 현재는 그의 문인인 조성가·이최선·김녹휴·조의곤·정재규·기우만·김석구·정의림이 배향되어 있다.
서원 경내의 부지면적은 484평으로 여기에는 7동의 건물이 있다. 특히 14평의 장서각에는 노사문집 목판 980매와 노사문집 12책(1질)을 비롯하여 많은 전적과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기정진은 1798년(정조 22) 순창군 복흥면 구수동에서 중추원사 건의 후손으로 출생하였다. 자는 대중, 호는 노사, 본관은 행주다. 8·9세에 이미 경사에 통했다는 천재로 1831년(순조 31)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1832년(순조 32) 강릉참봉을 초임으로 시작하여 1876년(고종 13) 호조참판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오로지 장성의 향촌에서 학문연구와 후생들에 대한 강학으로 일생을 마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자의 생활 중에도 1866년(고종 3) 병인양란이 발발하자 조정에 방비의 계책을 상소하여 시행하게 함과 동시에 몸소 의거하고자 군사를 모집하다가 소모어사의 권유로 부득이 중지한 일이 있다.
1879년(고종 16) 82세로 서거하고 1910년(순종 4)에“문간공"의 시호가 하사되었다. 저서로 『납량사의』, 『노사문집』이 오늘날 전하고 있다.

장성 고산서원 장성 고산서원

3) 요월정 원림(邀月亭 園林)

ο지 정 번 호 : 기념물 제70호
ο소 재 지 : 장성군 황룡면 황룡리 171
ο규 모 :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
ο시 대 : 조선시대
ο 지정연월일 : 1985년 2월 25일

조선 명종 때 공조좌랑을 역임한 바 있는 사복시정(증직) 김경우(1517∼1559년)가 1550년대에 산수와 벗하며 음풍농월하기 위하여 조영한 것으로 당대의 명사인 하서 김인후(1510∼1560년), 고봉 기대승(1527∼1572년), 송천 양응정(1519­1581) 등이 이곳에 와 시를 읊고 놀았다.

황룡강 북서안 상에 강쪽으로 동남향 하여 세워진 요월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형 건축물로 2개의 방과 그 동쪽의 마루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평면구조로 보아 정보다는 당에 가까운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25년에 중건한 것이다.

강건너에 옥녀봉을 대하고 있으며 좌에서 우로 흐르는 황룡강이 있어 자연의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외에 주변의 소나무 숲 사이에 중국 원산종인 자미나무가 60여 그루나 군식하고 있어 여름철이면 무릉도원을 연상시켜 준다. 자미나무의 크기로 보아 수령은 100여년으로 추측된다.

요월정 원림 요월정 원림

4) 조영규 정려(趙英圭 旌閭)

ο지 정 번 호 : 기념물 제78호
ο소 재 지 :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266-1
ο규 모 : 정면 2칸, 측면 1칸, 맞배지붕
ο 시 대 : 조선시대
ο 지정연월일 : 1985년 2월 25일

이 정려는 임진왜란 때 양산군수로 동래성을 수비하다 전사한 조영규(1535­1592)와 효자로 이름난 그의 아들 조정노를 표창하기 위해 1669년(현종 10) 국가의 명령으로 건립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정려 안에 걸려 있는 현판 "직산조씨충효정려중건기"에 의하면 1849년(헌종 15)에 중건한 것이다.

현재 정려 안에는 명정 표시의 두 현판이 있는데, 하나는 "충신 증가선대부호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 행통정대부 양산군수 조영규지려"라 되어 있고, 하나는 "효자 증선무랑 빙고별검 조정노지?quot;라 되어 있다.
무신 조영규는 1535년(중종 30)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에 출생하였다. 자는 옥첨, 음보로 등용되어 평안도 용천부사 등 여덟 고을의 원을 지냈으며 청렴결백의 목민관으로 유명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양산군수로 동래성을 수비하다 전사하였다. 호조참의에 추증되고 양산의 충열사에 배향되었다.정려는 4방으로 담장이 둘러서 있고 홍살문이 설치되어 외부로부터 차단되었다.

조영규 정려 조영규 정려

5) 장성 단전리의 느티나무

ο지 정 번 호 : 기념물 제170호
ο소 재 지 : 장성군 북하면 단전리 291
ο수 량 : 1그루
ο규 격 : 118㎡
ο시 대 : 수령 400여년
ο 지정연월일 : 1998년 8월 13일

느티나무(Zelkova sennata Makino)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써 황해도 이남에 자생하고 있으며 일본과 중국에도 분포한다. 수명이 길고 거목에 이르는 수종으로서 정자목이나 당산나무로 이용되고 있지만 그 목재는 가구재, 선박재, 공예재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장성군 북하면 소재지에서 장성읍 방면으로 국도 1호선을 따라 약 3km쯤 가면 도로 왼쪽에 단전마을이 위치하며, 이 마을을 조금 못 미치는 1호선 국도에서 오른쪽으로 20m 가량 떨어져 있는 정자 바로 옆에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는 임진왜란 이후 단전마을에 입향한 사람이 순절한 형을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고 하고 '장군나무'라고도 한다.
이 느티나무는 지상부 3m 부위에서 다섯 가지로 갈라져 있으며 동북쪽의 가지는 정자 위로 뻗어 있고 지표면에 노출된 남쪽의 뿌리 일부와 중층부 2군데, 하층부 1군데에 작은 동공(洞空)이 생겨 외과시술을 하였을 뿐 전체적인 생육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나무의 크기는 높이 20m, 가슴높이 둘레 10.5m, 수관폭 동 11.5m, 서 16.5m, 남 18.5m, 북 12m에 이르며 수령은 400年으로 추정된다. 나무 주위는 논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으로 10m 거리에 1m폭의 농수로가 있다. 이 느티나무는 정자와 함께 마을 주민들의 휴식처이며 도로에 인접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단전리 느티나무는 가슴높이둘레가 지상부 1.5m의 부위가 10.5m이고, 2m의 부위가 9m에 이르는 노거수로서 장성에서 조사된 140여 그루의 느티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이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여겨 매년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 의미 있는 나무이다.

장성 단전리의 느티나무 장성 단전리의 느티나무

6) 장성 영천리 방울샘(長城 鈴泉里 鈴泉)

ο지 정 번 호 : 전라남도 기념물 제186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1415-3
ο규 모 : 둘레 15m, 높이 2m,
심 1m, 면적 145㎡
ο소 유 자 : 공유(영천리)
ο 지정연월일 : 2001년 9월 27일

방울샘은 물이 방울처럼 솟아 오른다하여 방울샘 또는 방울 시암(鈴泉)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영천(鈴泉)이 행정지명이 되어 장성읍 영천리에 속해 있다.

방울샘에 대하여 지리지로서 맨 먼저 기록이 확인되는 것은 [대동지지](1865년, 김정호 찬)인데 소재처만 간략히 기록되고 있다. 이어 관찬 성격의 [호남읍지]에 포함된 [장성부읍지] 산천조에 2종(1872년, 1899년)에 "부(府)의 동쪽 5리에 있다. 물이 솟아 나오는 것이 방울과 같은데 영험과 이적이 자주 있다.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鈴泉 在府東五里 湧水如鈴 頻靈異 當旱祈雨祭)". 그리고 1927년에 간행된 [장성읍지] 이적조(異蹟條)에 영천 : 장성면 영천리에 있다. 샘의 맥이 드러난 곳의 모래 가운데에서 수많은 방울들이 떠 올라 끊이지 않으니 이름부르게 되었다. 물색깔의 적백(赤白)으로써 세상 일을 징험하고 청탁(淸濁)으로 1년 일을 점쳤다. 샘안에 물고기는 모두 오른 눈이 멀었다. 비록 다른 물에 있던 것도 한번 이 샘에 들어오면 또한 눈이 먼다. "사람들이 만일 고기를 잡으면 반드시 재해를 받게 되는 까닭에 서로 경계하고 침범하지 않았다.(鈴泉 在長城面鈴泉里 泉脈散出 沙中萬鈴 浮上不絶 故名之 以水之赤白 驗世事 淸濁 占年事 泉中魚族盡盲右目 雖他水所産 一入是泉則亦盲 人若釣取 必受災害 故相戒不侵)" 기록되고 있는데, 방울샘이 장성의 명소로서 자리를 잡아왔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은 1931년인데 샘 옆에 있는 빗돌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때 석축을 쌓았는데, 둘레는 15m이다. 1991년에 다시 정비를 했는데, 1931년에 쌓은 석축은 그대로 두고 그 윗 부분을 대리석으로 정비하였다. 샘에서 인근의 수로로 흘러나가는 배수로도 정비하였다. 이 시기에 자갈을 바닥에 넣었다고 한다.

이 샘은 500여년전 용이 승천한 쏘(沼)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며 동네 공동 우물이었다. 방울샘은 예로부터 신비스런 징후를 나타내며 많은 전설이 깃들어 있는 호남영천으로서 동학전쟁과 한국전쟁(6·25사변), 천재지변 등이 일어날 때에는 황토물이 솟아 나오고, 대풍년 같은 국가적으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뜬 물 같은 흰 물이 나와 앞날을 예고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오동촌 주민들은 마을 공동제의로서 샘제(鈴泉祭)와 당제를 지내 오고 있다.

방울샘은 지층 구조상 지질습곡대에 의해 지표 가까이 노출된 지하 대수층이 지표에 가장 근접한 지역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화학적 변화를 하면서 방울처럼 솟아 오르게 된 것이며, 석회암층에 집적된 철 성분들이 대수층내에서 수시로 풍화되면서 가끔씩 물의 색을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방울샘은 자연 현상에서 쉽게 나타나지 않은 특이한 지질구조로써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이 복합되어 있어 가치가 있다.

장성 영천리 방울샘 장성 영천리 방울샘

7) 박수량 백비(朴守良 白碑)

ο지 정 번 호 : 기념물 제 198호
ο소 재 지 :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33
ο시 대 : 조선시대
ο 지정연월일 : 2001년 12월 13일

이 비는 조선 명종때 의정부 우참찬이요, 청백리로 유명한 정혜공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이 서거함에 나라에서 하사한 것이다. 박수량의 묘 앞에 있는 이 비는 장방형의 대석 위에 호패형의 비신을 올린 석비로 비문 내용을 새기지 않아 '백비' 라고 불리운다.

박수량(1491~1544년)의 자는 군수, 호는 아곡, 본관은 태인이다. 종원의 아들이며 김개의 문인으로 장성 출신이다. 1513년(중종 8)에 진사와 이듬해 별시문과 을과 제2에 합격하였다.승정원 정자를 거쳐 중종 17년(1522) 지평이 되었다. 헌납·장령·함경도경차관, 나주 목사 등 내외 요직을 역임하고 좌찬성과 호조판서에 이르렀고, 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우연히 병으로 돌아가니 나이 64세였다. 벼슬길에 있은 지 38년 동안 가는 곳마다 치적이 크게 들리었다. 주세붕과 깊이 교류하는 등 유림간에 학자로도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두어칸 집 한 채도 없이 지냈고, 또 돌아간 뒤에도 남은 양식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초상마저 치를 수 없었다.

그때 대사헌 윤춘년(1514~1567년)은 "박수량은 청백한 사람이라 멀리 서울에 와서 벼슬을 하면서도 남의 집을 빌려 살고 있었으므로 그 고향인 장성으로 돌려보내 장사지내고자 하오나 도저히 그 자력으로써 할 수 없사오니, 만일 이런 사람을 국가에서 표창하여 주면 모든 청백한 관리들에게 크게 장려될까 하옵나이다”라고 즉시 이를 정부에 요청하여 근근이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면서, "수량의 청백한 이름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지 오래이다”하고 드디어 비를 하사하라고 명하는 한편, 그 비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게 하고 다만 그 맑은 덕을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을 백비라고 부르게 하였다.

박수량 백비 박수량 백비

(3) 문화재 자료(13종)

1) 청계정(淸溪亭)

ο지 정 번 호 : 문화재자료 제97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진원면 산동리 249­3
ο규 모 : 정면 2칸, 측면 2칸, 팔작지붕
ο시 대 : 조선시대(1546년)
ο 지정연월일 : 1984년 2월 29일

청계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 건물로 1546년(명종 1)에 박원순(朴元恂)에 의해 건립되었다. 박원순은 김인후의 문인으로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며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로 과거에 뜻을 끊고 이곳에 정자를 짓고 후진을 교육하며 지냈다. 정자의 경역내에 은행목을 심고 연못을 파서 그 위로 홍교(虹橋)를 가설하여 구곡수를 끌어들이는 등 그윽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박원순이 죽자 은행목과 샘물이 모두 말랐다가 3년 후에 다시 소생했다는 전설도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퇴락 됨에 13세손인 박정현이 앞장서서 이를 중수하였다. 김성갑, 김상현, 기정진 등의 기문이 있다.

벽돌과 시멘트로 근래에 축조된 낮은 기단 위에 커다란 덤벙 주춧돌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머리에는 경사지게 깎은 보아지를 끼워 주두를 받치고 있다. 주두 위에는 커다란 대들보를 통간에 걸쳐 단일부재로 얹었으며 직각방향으로 장혀받침 굴도리를 놓아 서까래를 받치고 있다.

기둥 사이에는 창방을 걸치고 그 위에 소로를 놓아 장식하였다. 가구 구조는 평5량가로 대들보 위에 낮은 동자주(童子柱)를 세우고 종량(宗樑)을 걸쳤으며 그 사이에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합각부분은 대들보 위에서 측면방향으로 충량(衝樑)을 설치하여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정면 2칸 중 왼쪽 칸을 방으로 만들고 나머지는 마루를 깔았다. 마루 주위는 평난간을 돌렸는데 호롱병의 장식이 아름답다. 예전에는 뒷면과 우측면에 문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또한 교창의 창살구멍이 이채롭다.

청계정 청계정

2) 만곡사(萬谷祠)

ο지 정 번 호 : 문화재자료 제98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삼서면 보생리 375번지
ο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ο시 대 : 조선시대
ο 지정연월일 : 1984년 2월 29일

만곡사는 본래 1791년(정조 15)에 송계 봉유례(奉由禮, 1354∼1419)·풍애 봉즙(奉楫, 1378∼1439)·묵헌 봉여예(奉汝詣, 1419∼1456) 등을 추모하기 위해 단(壇)을 설치하였던 곳이었다. 그 후 1793년(정조 17)에 현 사우인 만곡사를 건립하여 묵헌 봉여예만을 제향해 오다가 1862년(철종 13)에 송계 봉유례·풍애 봉즙·송탄 봉단의(奉端懿, 1538∼1592)를 추배(追配)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3년 봉준현(奉俊現) 등 3인이 다시 중건하였다.

1974년에 별묘를 건립하고 입향조(入鄕祖)인 백강(佰岡) 봉문(奉文)과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1417∼1456)을 추배하였다.
만곡사의 건물구조는 신실인 만곡사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며, 별묘, 강당인 숭절당(崇節堂)이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고직사, 내·외삼문이 있다. 이외에 만곡사 우측에는 1922년에 세운 만곡사유허단향비(萬谷祠遺墟壇享碑)가 있고, 강당 앞에는 1974년 세운 남강봉공준열기적비(南岡奉公峻烈記績碑)가 있다.

묵헌(默軒) 봉여예(奉汝詣)는 조선초기 학자로 본관은 하음이며 병조판서 봉즙의 아들이다. 일찍이 박팽년·성삼문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비상한 재주와 뛰어난 학문으로 사옹원별좌에 학행으로 특채되었다. 그러나 1456년(세조 2) 사육신의 단종 복위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한 혐의로 사형 당하였다.

만곡사 만곡사

3) 기영정(耆英亭)

ο지 정 번 호 : 문화재자료 제99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 산 560
ο규 모 : 정면 2칸, 측면 2칸, 팔작지붕·
ο시 대 : 중종 38년(1543)
ο 지정연월일 : 1984년 2월 29일

기영정은 용암천 위 높은 대지의 관수정 건너편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 건물로 바닥은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되어 있다.

1543년(중종 38) 당시 전라도관찰사 규암 송인수가 왕명을 받들어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을 위해 건립한 정자이다. 용암천 위의 경치가 아름다운 경승지에 자리잡고 있다. 송인수가 전라감사로 부임하려고 할 때 중종이 그에게 명을 내려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퇴관하여 고향에 머무르고 있는 송흠을 방문하여 중종 자신의 상회심(相懷心)을 전하고 또 동시에 그의 별업을 기영정이라 이름하도록 하는 소제기(所製記)를 전하도록 한 바, 송규암이 그 명을 받들어 부임하자 곧 12수와 함께 송흠을 방문하여 별업을 정자로 건립하여 주었다는 내력을 가지고 있다.

그후 시간이 지나고 병난과 화재를 당하여 폐허가 되었는데 다시 송규암의 10세 손인 송겸수(宋謙洙)가 영광군수로 부임하면서 철종 7년(1856)에 이를 중건하였다.

낮은 외벌대의 돌 기단 위에 큰 덤벙 주춧돌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각을 죽인 보아지와 주두를 놓고 굵은 대들보를 얹었다. 대들보 위에는 장혀받침 굴도리를 두어 서까래를 받치고 있다. 내부 가구 구조는 평5량가로 대들보 위에 낮은 부재를 놓고 충량을 통부재로 걸쳐 도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종량 위에는 다시 종량을 두어 장혀받침 종도리와 판대공을 얹어 가구를 구성하고 있다. 방이 없는 누정으로 벽이 없이 개방되어 있고 낮은 평난간을 돌렸다.

기영정 기영정

4) 관수정(觀水亭)

ο지 정 번 호 : 문화재자료 제100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 610
ο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ο시 대 : 중종 34년(1539)
ο 지정연월일 : 1984년 2월 29일

관수정이라 함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뜻에 의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에 전퇴인 골기와의 팔작지붕 건물로 겹처마를 돌렸다. 천방사와 용암천을 낀 아름다운 경치를 가지고 있다.

지지당, 혹 관수정이라는 호를 갖는 송흠이 1539년(중종 34)에 건립한 것이다. 송흠은 1459년(세조 5)에 나서 1547년(명종 2) 89세로 사망하였는데, 연산군 때 퇴직하여 후진교육에 전심했고 중종반정후에는 복직하여 내외의 여러 요직을 거쳤다. 특히 담양부사, 전주부사, 광주·나주목사, 전라도관찰사 등 이 지방에서 외직을 맡았다.

이는 101세를 산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효행으로 상을 받았고, 1538년(중종 33)에는 청백리에 녹선되기도 했다. 또한 효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정자의 내부에는 당시대 친우인 홍언필, 김안국, 성세창, 신광헌, 김인후, 임억령 등의 제영(題詠)이 다수 있다.근래에 새롭게 다듬어 쌓은 두벌대의 돌 기단 위에 복발형(覆鉢形)의 주춧돌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머리에는 경사지게 깍은 보아지를 끼워 놓고 주두를 놓은 다음 퇴량을 걸쳐 얹었다. 이 퇴보 위에는 장혀받침 굴도리를 놓아 서까래를 받쳤다.

가구 구조는 1고주 5량가로 양쪽에는 낮은 평주를 세우고 내진의 고주 끝과 대들보 위에 놓은 동자주 위에 종량을 두어 원형판대공으로 종도리를 지붕을 지지하도록 하였다. 오른쪽 2칸은 마루를 깔고 왼쪽 1칸은 방을 두었는데 3면을 4분합 들어 열개문으로하여 개방적인 면이 보인다. 좌우 측면에는 낮은 평난간을 돌리고 배면은 벽으로 처리하였다. 충량과 선자서까래, 기둥 사이의 소로 받침 등에서 가구미가 덧보인다.

관수정 관수정

5) 진원리 오층석탑(珍原里 五層石塔)

ο지 정 번 호 : 문화재자료 제101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 121-4
ο규 모 : 높이 5.2m
ο재 료 : 화강암
ο시 대 : 고려시대
ο지정연월일 : 1984년 2월 29일

이 탑은 원래 진원리 뒷산 탑동이라는 곳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불법반출해 가려한 것을 주민들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고 현 위치에 옮겨진 것이라 한다.

지대석은 4매의 판석으로 결구 하였으며 그 위로 기단부 면석이 이어지고 있다. 면석은 중앙의 탱주와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는데, 그 면은 벽판석이고 다른 2면은 따로 만들어 끼워 넣었다. 갑석은 2매 판석인데 상·하 수평이며 하면의 부연(副椽)이나 상면의 각형 괴임대를 생략하였다. 몸체부는 몸체와 지붕돌이 각 1석씩인데 현재는 4층 이상의 몸체와 지붕돌이 유실되고 없다. 1층 몸체는 각면에 모서리 기둥이 표출되었으며 2층부터는 체감을 보여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너비와 높이가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평박한 편으로 물 흐르는 면은 급경사이며 처마는 중앙에서 수평을 이루고 전각(轉角)에 가까워지면서 경쾌한 반전을 이루었다. 층급 받침은 각층마다 3단이다.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이 석탑은 옮기면서 각부재가 뒤틀리는 등 제대로 결구되지 않아 몸체부가 곧고 반듯하지 못하다. 또 갑석의 상·하면에서 일부 조각이 생략되었으며, 탑 전체가 가늘고 긴편으로 안정감이 없다.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진원리 오층석탑 진원리 오층석탑

6) 수산리 오층석탑(壽山里 五層石塔)

ο지 정 번 호 : 문화재자료 제103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장성읍 수산리 1427
ο규 모 : 높이 4.27m
ο재 료 : 화강암
ο시 대 : 고려시대
ο 지정연월일 : 1984년 2월 29일

이 석탑은 장성읍에서 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국도변 개인집 안마당에 있다. 기단부가 완전히 매몰된 상태로 현재는 기단부 갑석 상면과 몸체부만이 노출되어 있다.

기단부 전체가 지하에 매몰되어 기단부 구성을 알 수 없지만 갑석 상면을 보면, 갑석은 거의 수평인데 중앙으로 1단의 각형 괴임을 주어 몸체부를 받고 있다. 1층 몸체는 각 면에 모서리 기둥을 모각하였으며 다른 면에는 별다른 조각을 하지 않았다. 2층부터는 몸체가 급격히 그 높이를 줄였으며 역시 너비에 있어서도 체감을 보였는데 이러한 양식은 5층까지 같은 수법이다. 지붕돌은 평박하며 물 흐르는면은 급경사로 우동(隅棟)이 뚜렷하고 처마는 중앙에서 거의 수평이다가 전각에 이르러 반전하였다. 층급 받침은 1층에서 3층까지 4단이며 4∼5층은 3단으로 줄었고 지붕돌 상면에는 1단 괴임을 표출하여 윗층의 몸체를 받치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露盤)과 보주(寶柱)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석탑은 1879년 진원면 진원리 탑동에서 옮겨온 것이다. 구읍 성산의 터가 와우형국으로 곤방이 허하여 읍민이 가난하므로 이를 인력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1876년부터 1880년까지 곤방에 탑을 세우고 돌을 쌓고 2층 루각을 세우는 등 곤방의 허점을 보강한 사업을 펼쳐 읍민의 평안과 부흥을 기원했던 사항을 기록한 진곤비가 탑 옆에 있다.

기단부의 결구수법을 볼 수 없어 전체 조형미를 살필 수 없음이 아쉽기는 하나 현재 높이가 4.27m인 점을 감안하면 거의 6m가 넘는 석탑으로 추정된다. 탑의 균제미나 정교성은 광주시 광산구 신용동 5층석탑과 유사하며 그 조성연대 또한 고려중기를 내려오지 않을 것 같다.

수산리 오층석탑 수산리 오층석탑

7) 장성 진원리 진원성(長城珍原里珍原城)

ο지 정 번 호 : 문화재자료 제112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 97외
ο규 모 : 일 원
ο시 대 : 고려시대
ο 지정연월일 : 1984년 2월 29일

이 성은 진원현의 읍성으로 전해진다. 진원현은 백제때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이었고 신라 경덕왕때에 진원으로 고쳐 갑성군(현 장성)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나주에 이속(移屬)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정유재란의 피해로 읍 세력이 쇄잔함에 따라 선조 33년(1600)에 장성현에 합해졌다.

이 성은 표고 40여m의 작은 봉우리에 위치한 포곡형 산성이다. 정상에 오르면 대체로 낮고 평평한 분지형의 두 봉우리를 지형에 따라 연결하였다. 남아 있는 유구를 통해 볼 때 성벽은 내탁법에 의해 구축하였다. 성벽 안쪽은 내벽을 축성할 당시 삭토하여 내벽이 형성되어 있는데 물 빼기를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성의 기록상에 나타난 규모는 『신증동국여지승람』장성도호부조에 구진성이라 하여 길이 400자(尺) 높이 2자이다. 현존 성벽의 길이는 약 800m이다. 성아래 비석거리에는 진원현감 최희설 등의 선정비 6기가 남아 있다.
이 성은 고려시대의 문인인 김극기(1170∼1187년)의 시에 진원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12세기 이전에 진원현의 읍성으로 수축하여 장성과 통합 이전까지 치소의 성으로서 기능을 했다고 여겨진다.

8) 칠현유적지(七賢遺蹟址)

ο지 정 번 호 : 문화재자료 제119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223
ο규 모 : 7기
ο시 대 : 조선시대·
ο 지정연월일 : 1984년 2월 29일

절효공 서능 등 7위를 배향한 모암서원이 대원군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된 뒤 그 유지에 설단(設壇)하여 단비(壇碑)를 세웠다.

모암서원의 전신은 장성 출신으로 고려 고종때 효자로 명정된 절효공 서릉의 강학지소인 모암정사였다. 이 모암정사가 서원으로 창건된 유래는 1587년(선조 20) 장성현감 이계와 하곡 정운룡 등 향민들이 절효공의 효행과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삼면 모암리에 사당과 강당을 건립한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서원이 창건된 지 5년이 채 못되어 임진왜란에서 정유왜란으로 인하여 사우는 모두 불타 버렸으며, 1648년(인조 26)에 이르러 장성 유림들의 발의로 다시 사우의 중건이 시작되어 1649년 복설되었다.

복설된 이후 1667년(현종 8) 군수(郡守) 조영규(趙英圭, ?-1592)·처사(處士) 조정로(趙廷老, 1559-1612) 부자를 배향하였다. 1698년(숙종 24) 율정(栗亭) 최학령(崔鶴齡, 1512-?)·1758년(영조 34) 하곡(霞谷) 정운룡(鄭雲龍, 1542-1593)·추담(秋潭) 김우급(金友伋: 1574-1643) 등을 추향하고, 1788년(정조 12) 정혜공 박수량(朴守良, 1491-1554) 을 추향하여 7현을 모시게 되었다.

1868년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고 1909년 장성 유생 김학수·최봉석 등이 모암리 서원의 옛터에 단을 설립하고 춘추로 향사하였으며 1920년 [모암서원단기적비]를 건립하였다. 1932년 서후창 등이 주축이 되어 북일면 성덕리 용전동에 절효공만을 독향하는 단을 설치하였고, 1933년에는 해서·관동과 호남별읍의 협력을 얻어 모암서원에 배향된 칠현의 위패를 한 곳에 배향하고 용전단(또는 용전사, 모암사현단)이라 칭하였다. 그 뒤 몇 차례 사우건립을 도모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고 용전단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불탔다가 1962년 단이 복설되었다. 7위의 단비는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의 호패형(戶牌形)이다. (배향인물의 행적은 교육편 서원조 참조)

칠현유적지 칠현유적지

9) 금성나씨 삼강문(錦城羅氏 三綱門)

ο지 정 번 호 : 문화재자료 제128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삼서면 우치리 295-2
ο규 모 : 일 곽
ο시 대 : 조선시대
ο지정연월일 : 1985년 2월 25일

충신 나통서(羅通緖), 효자 진사 나봉서, 열녀 나덕전 처 옥천설씨, 열녀 나준서 처 공산이씨 등 충효열 삼강을 기린 정려각이다.

조선 선조때 나덕전과 부인 옥천설씨 사이에 봉서·통서·준서의 세 아들이 있었다. 설씨부인은 평상시 건강이 좋지 못한 남편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며 더욱 위독한 때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입에 넣어 생명을 연장하였고, 세 아들을 훌륭하게 기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일년 뒤 남편이 죽게 되자 설씨부인도 노환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큰 아들 봉서는 성균관 진사로 모친의 병환에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다. 둘째 아들 통서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강화유진으로 있다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고향에 내려와 있었는데 인조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청주까지 올라갔다가 화친으로 회군하였으나 울분을 참지 못하고 병을 얻어 죽었다.
셋째 아들 준서의 처 공산이씨는 남편이 병을 얻게 되자 시어머니에게 보고 배운 바 있어 단지주혈하여 남편의 병을 낫게 하였다.

삼강문내에는 3인의 명정 편액이 걸려 있는데 "충신 가선대부 행종성판관 동지중추부사 나통서지여", "효자 성균관 진사 나봉서지여", "열부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나덕규의 처 정부인 옥천설씨지여", "열부나준서처공산이씨지여" 등이다.
삼강문은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이며 각 칸에는 홍살을 달아 내부를 막고 있다.

금성나씨 삼강문 금성나씨 삼강문

10) 가산서원 소장 익재 영정(佳山書院所藏益齋影幀)

ο지 정 번 호 : 문화재자료 제164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삼서면 홍정리 488-2
ο규 모 : 가로 89.5cm, 세로 171.5cm
ο재 료 : 비단에 채색
ο시 대 : 조선시대
ο 지정연월일 : 1988년 3월 16일

이제현(1287∼1367년)은 고려말 문신이자 학문과 서화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본관이 경주이고, 자는 중사, 호는 익제 또는 역옹으로 벼슬은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안향의 제자인 백이정(白灑正)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공부하였고, 충선왕 때에는 원의 연경 만권당에서 조맹부 등과의 교류를 통하여 고려에 신학문과 사상, 서화풍을 소개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가산서원에 있는 이제현의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원화의 모습을 상당히 유사하게 옮겨 그린 모사본이다. 화면의 윗 부분에는 초상화에 대한 글이 적혀 있어 그 내력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원화는 1319년(충숙왕 6) 이제현이 왕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 그린 것인데 충선왕이 진감여를 불러 이제현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고 또한 초상화에는 당대의 석학 북촌 탕병룡(湯炳龍)이 글을 써넣었다. 그러나 당시 이제현은 귀국하면서 이 그림을 가져오지 못하였다가 31년 후에 우연히 이 영정을 다시 보게 되어 자신도 감회의 글을 써넣은 것이다.

가산서원의 영정은 의자에 손을 맞잡고 앉은 전신상으로 의자 뒤로 서책과 가야금 향로가 놓여진 탁자가 배치되어 있다. 옮겨 그린 것이지만 얼굴 처리나 옷주름 표현, 의자나 기물 등의 묘사가 상당히 원본에 가깝게 되어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눈동자나 수염, 입술 등은 더 후대에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다시 옮겨 그린 연대는 18세기 후반으로 추측된다.

가산서원 소장 익재 영정 가산서원 소장 익재 영정

11) 청류암 관음전(淸流庵 觀音殿)

ο지 정 번 호 : 문화재자료 제179호
ο소 재 지 :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112
ο규 모 : 정면 7칸, 측면 1칸, 팔작지붕
ο시 대 : 조선후기
ο 지정연월일 : 1990년 2월 24일

청류암은 백양사에 소속된 암자로 고려 1350년(충정왕 2) 각엄왕사(覺嚴王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곳 청류암은 마음을 청청한 맑은 물에 비유하여 청정무구한 심성으로 선에 들어라 하여 청류암이라 하였다 한다.이 암자에서는 백양사 제15대 주지 청수선사를 비롯하여 제25대 환양선사, 제26대 소요대사, 제35대 도암선사, 제43대 금해선사, 제47대 환웅선사, 제50대 만암대종사(1930∼1942년)에 이르기까지 백양사의 고승대덕 스님이 주석하여 선도를 이룩한 청정도량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백양사 경내에 들어서 왼쪽 계곡을 건너 가파른 산길을 2km 가량 오르면 청류암에 이른다. 계곡의 윗쪽에 경사면을 깎아 수개의 단을 쌓은 좁은 대지에 위치하며 관음전과 요사채 1동, 화장실 1동이 있다.
깬 돌을 허튼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커다란 덤벙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이 약하고 두툼한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머리에는 얇고 가냘픈 2익공을 얹었는데 익공 끝부분에는 연꽃 봉우리를 조식하였다. 익공과 기둥 사이에는 주두를 얹었는데 그 위에 2익공과 꽃받침 형식의 첨차를 다시 얹어 퇴량과 용머리를 받치고 있다. 기둥 사이에는 소로를 3기 두었고 맨 가운데에는 코끼리, 혹은 귀면 장식의 꽃받침을 놓고 그 위에 소로를 두었다.

가구형식은 평주와 고주를 둔 2고주 7량 형식이다. 지붕은 전면에는 2익공의 겹처마이나 배면은 홑처마에 몰익공이다. 단청도 전면에는 연목과 부연, 그리고 툇간의 부재까지 되어 있으나 뒷면에는 하지 않았다. 서까래가 굵고 촘촘하여 처마선이 길게 돌출되어 있다.

12) 손룡정사 소장 고문서 및 전적(巽龍精舍所藏古文書 및 典籍)

ο지 정 번 호 : 문화재자료 제199호
ο소 재 지 : 장성군 북하면 단전리 324­1 손룡정사
ο수 량 : 110종
ο 지정연월일 : 1997년 7월 15일

한국고문연구회 변시연 회장의 서재인 손룡정사에 소장된 고문서와 전적류이다.
고문서류는 1584년(만력 12) 예조에서 발급한 변철생(邊哲生, 慶胤)의 양자관련문서(繼後禮曹立案), 1886년(광서 12) 예조에서 발급한 김기태의 양자관련문서, 1875년 장성부 구폐완문(변상진 등), 1902년 흥덕군 삼남면 완문, 1714년 위토답 마련에 관한 문중완의 등 완문·완의·입안류 7건, 1553년(가정 32) 변처정(邊處楨)이 변제(邊濟) 등 5남에게 내린 허여문기, 1655년 이귀(李貴) 9남매의 화회문기(변경윤) 등 재산문서 5건, 1776년(건륭 41) 전답매매에 관한 문서 등 매매문기 3건, 1584년 여주목사 참봉 김의손에게 발급한 준호구 1매, 1672년과 1678년, 1699년에 각각 한성부에서 발급한 유학 변광재(邊光載)의 준호구 등 호적관련문서 39건, 변경윤의 문과시권(연대미상), 변명익(邊命益)의 시권(연대미상) 등 시권 2건, 1603년의 변경윤 홍패 등 교지와 임명장 2건, 변경윤 초배장씨신노비질 등 노비문서 2건, 노직에 관련된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의 관문초 1건, 1822년 변기태(邊基泰)가 전의현감에게 올린 단자 등 소지·상서문 21건 등이다.

전적류는 일기 3종이다. 이들 일기는 사료로서 중요성이 있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활자본)한 바 있다.

봉서일기(鳳棲日記, 邊相轍 記, 17행28자, 24×19.5, 사본1책)는 본래 1858년(철종 9)부터 1886년(고종 23)까지의 대략 29년 사이의 향사에 관한 전남 장성 변상철의 기록이다. 그러나 많은 부분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었고, 이 중 현존하는 것은 1873년(고종 10)에서 1877년 사이의 5년간의 기록만이 남아 있다.

봉남일기(鳳南日記, 邊萬基 記, 17행24자, 23.7×20.7, 사본 1책)는 1894년(고종 31)부터 대략 30여년 동안의 전남 장성 변만기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 역시 한국전쟁으로 많은 부분이 소실되고 지금은 1894년부터 1903년 사이의 10년간의 일기만 남아 있다.

회산일기(晦山日記, 邊昇基 記, 12행22자, 21×17.5, 사본 1책)는 1907년 1월에서 3월까지 3개월 간의 변승기의 기록이다. 비록 짧은 동안의 일기에 불과하다. 당시의 조세 및 화폐제도의 문제점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한말의 국채보상운동의 확산과 관련된 기록이 수록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그 당시의 경제상이나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장성 손룡정사에 소장된 고문서류와 필사의 일기 등 전적류는 조선시기와 한말의 향토사, 사회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13) 장성봉정사 석조여래입상(長城鳳停寺石造如來立像)

ο지 정 번 호 : 문화재자료 제208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삼계면 신기리 131
ο규 모 : 석불 1구
ο시 대 : 고려시대
ο 지정연월일 : 1999년 11월 20일

이 석불은 대좌(臺座)와 불신(佛身)을 각기 다른 돌로 만들었다. 일부에서 심한 파손을 보여주고 있으나 현 봉정사의 변천 과정을 말해주는 유일한 자료이다.높이 215cm, 어깨 폭 88cm, 얼굴 길이 45cm, 발 길이 28cm이다. 좌대의 직경은 74cm인데 가로·세로 각 34cm, 깊이 27cm의 홈을 파서 불상을 세울수 있게 하였다. 현재 눈썹·턱밑·어깨 아래에 가로로 파손되어 있는 것을 시멘트로 접합시켜 놓았다.

수인은 여원인과 시무외인을 하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약호같은 것을 들고 있어 약사불이 아닌가 한다. 이마에는 백호공이 있으며, 목에는 두툼하게 삼도를 가슴까지 형식적으로 조식해 놓았다. 법의는 통견이고 왼쪽 어깨에서부터 복부까지 띠매듭이 조식되어 있다. 머리에는 뚜렷하지는 않지만 커다란 육계가 있다. 얼굴 양쪽과 눈, 코, 손이 약간 결실되어 있는 상태이다.

두툼한 얼굴과 입술, 형식화된 삼도, 기타 의습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양식이나 전체적인 균형미로 봐서는 고려 중기로 여겨지며 인근에 있는 영광 신천리 3층석탑(보물 제504호)과 함께 당시의 조각사 연구에 참고자료가 된다.

장성봉정사 석조여래입상 장성봉정사 석조여래입상

14) 장성영천리고분(長城鈴泉里古墳)

ο지정번호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28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100
ο수량면적 : 1기, 1필지, 200㎡
ο시 대 : 백제시대(6세기)
ο 지정연월일 : 2001년 9월 27일

영천리 고분은 1984년 향토문화개발협의회에서 장성고등학교가 들어서게 됨에 따라 이 주변일대에 대한 지표조사 과정에 발견되었다. 이 고분은 일제시대에 이미 도굴되어 현실 천정부분의 앞과 뒤에 도굴갱이 있고, 그 내부는 퇴적토로 메워져 있어 이를 제거하고 현실구조만 확인하였다. 이 때에 출토된 유물로는 금제 귀걸이 1쌍, 토기 뚜껑, 접시, 굽다리 조각 등이었다.
1986년 보해양조주식회사 장성공장을 건설할 때 부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전남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하고, 고분은 공장내 부지에 석실을 해체 이전 복원하였다.
이 고분을 마을에서는 말뫼라고 부르는 고분이다. 분구의 평면형태는 원형이고 규모는 직경 17m, 높이 3m이다. 석실은 횡혈식으로 연도는 현실 남벽 중앙에 열려있다. 석실은 현실 북동벽이 분구의 중앙에 위치하고 남서쪽에 연도가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분구의 남쪽에 치우쳐 있다. 석실의 장축방향은 구릉방향과 직각을 이루는 북동-남서이다. 현실벽은 두께 10∼15cm의 판석을 20∼23단 쌓았는데, 90∼100cm까지는 수직으로, 그 위로는 들여 쌓았다. 현실의 규모는 길이 280∼290cm, 너비 220∼240cm, 높이 170∼200cm로 평면형태는 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이다. 천정석은 2매의 장대판석으로 덮었으며 바닥은 부식된 기반층을 평탄하게 한 후 잔자갈과 회색점토를 혼합하여 두께 15∼20cm, 직경 13m로 다졌다. 연도의 규모는 길이 320cm, 너비 130∼160cm, 높이 150cm인데 입구 양쪽에 장방형 석주와 판석형 석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는 자연석의 문지방석을 놓았다.

장성영천리고분 장성영천리고분

15) 장성유평리부귀동고분(長城柳平里夫貴洞古墳)

ο지정번호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29호
ο소 재 지 : 장성군 삼서면 유평리 441-1(부귀동)
ο수량면적 : 1기, 1필지, 600㎡
ο시 대 : 백제시대
ο 지정연월일 : 2001년 9월 27일

태청산(해발 593.3m)에서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해발 250m의 산봉우리를 형성하고 나서 급격하게 낮아져 해발 80∼50m에서는 북서-남동방향으로 길게 이어지는 구릉을 형성하고 있다. 부귀동은 고막천 상류역에 형성된 구릉지역에 자리하고 있는데 구릉의 남서쪽에 기대어 마을이 들어섰다. 북서에서 남동쪽으로 내려오던 구릉은 다시 약간씩 높아져 마을 뒤에서 정상부를 형성하고 있는데 고분은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고분은 주변이 밭으로 경작되면서 분구 남동쪽 끝자락이 높이 3∼4m 정도까지 깎여나갔고 분정에는 도굴되면서 파진 불규칙한 구덩이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구덩이의 서쪽에는 석실의 천정석으로 생각되는 판석이 노출되어 있고 파괴된 분구 동쪽에 석재가 노출되어 있어 입구가 동쪽으로 열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분구의 평면형태는 원형이며 현 규모는 직경 28m, 높이 4.5m에 달하지만 분구가 파괴된 부분에서 확인된 구지표를 감안하면 원래 분구의 규모는 직경 24m 내외, 높이 3.6m 내외로 추정된다. 분정에는 직경 10m 정도의 평탄부가 형성되어 있는데 도굴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장성유평리부귀동고분 장성유평리부귀동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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