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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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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부민중봉기와 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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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은 역사의 주체인 농민대중이 안으로는 탐관오리의 착취와 탄압에 저항했으며 밖으로는 정치적·경제적 침략을 자행한 외국세력을 물리치자는 근대사의 서막이요 민족·민주운동의 원동력이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이 전라도에서 일어난 것은 곡창지대인 전라도가 탐관오리의 야욕을 채우는 곳이었고, 신라의 삼국통일이후 역사에서 소외받고 차별받으면서 주인의식을 길러왔으며 대의명분을 중하게 여기는 정의감이 어느 곳보다 강했기 때문이었다.

전라도는 농산물이 풍부하여 국가재정의 절대적 기반으로 전국 조세수입의 51.7%를 부담했고 탐관오리들의 집중적인 수탈대상이 되었으니 이를 매천 황현은 다름과 같이 기록하였다.

근세에 이르러 탐묵이 날로 심하였는데 호남은 재물이 풍부하여 그 욕심을 메꾸어 줄 수가 있었다. 대체로 벼슬하는 자들은 이에 백성을 마치 양이나 돼지처럼 마음대로 묶고 베이고 일생동안 종처럼 치고 북처럼 두드려서 모두 제 마음대로 재물을 갖다 썼다. 그리하여 요즘 서울의 동요에 이르기를 자식을 낳아서 호남에 가서 벼슬하는 것이 소원이라 했다.

그런데 1862년에 장성을 비롯해 호남지방을 휩쓸었던 임술농민항쟁은 농민들로서는 생사를 건 절규였지만 그것은 지방분산적이었고 한시적인 민중봉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까닭은 못죽어서 사는 농민들이 몸을 내던져 저항은 했지만 역사의 주인공으로 의식화되거나 조직화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60년에 경주의 몰락양반인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은 그 속에 평등사상과 반외세사상은 물론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개벽(開闢)사상까지 깃들어 그것이 절망에 빠지고 의지할 곳 없는 농민들 속으로 파고 들어 가자 급속히 전파되었고 농민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 했다. 동학은 신앙이라기 보다는 사회를 건지고 반봉건과 반외세까지 추구하는 사회사상이었다.

경주에서 시작된 동학은 정부의 탄압을 받았으나 경상도는 물론 강원도, 경기도를 거쳐 충청도·전라도에 파급되면서 농민대중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동학이 충청도를 거쳐 1890년 초에 전라도에 전파되면서부터 각지에 급속도로 퍼져 농민들속에 침투하여 농민들을 의식화시키고 조직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이제까지 무지렁이 같은 농민들이 평등의식과 반외세의 자주정신 그리고 혁명사상인 개벽사상으로 무장하여 역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동학농민들은 동학사상으로 의식화되자 시위운동을 전개하면서 자신의 의식을 심화시키고 역량을 축적하였으니 1892년 11월의 삼례집회나 1893년 2월의 복합상소와 함께 전개되었던 척왜양괘서운동(斥倭洋掛書運動) 그리고 1893년 3월의 보은집회와 금구 원평집회가 모두 그러한 의미에서 개최되었던 것이다.그런데 장성에 동학이 전래된 것은 1880년대 말부터 1890년 초로 볼 수 있으니 그것은 동학이 극성한 무장이나 정읍, 그리고 고창에 인접한 지역이며 1862년의 농민봉기도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성의 동학농민이 3차에 걸쳐 전개된 집단시위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참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장성 출신인 이춘영은 그의 [동학약사(東學略史)]에서 자신이 1886년 2월 10일에 남원에서 최시형으로부터 직접 도를 전수받았으며, 포교에 전념하여 신도수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 한다. 이러한 사실과 장성 인접지역이 정읍, 무장, 고창으로 동학세력이 성했던 곳이며 전남에서 삼례나 서울, 그리고 보은으로 올라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집회시위에 참여하였으리라 보는 것이다.

1892년 11월에는 전라도 삼례에서 수천명이 모여 동학교조신원운동과 이서 군교의 동학농민침탈방지를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호소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때의 시위군중은 전라도 일대의 동학농민이 중심을 이루었다. 또한 1893년 2월에 수만의 교도가 서울에 운집했다는 소문과 함께 광화문 앞에서 40여명의 교단대표가 3일 3야 동안 벌인 복합상소도 비록 무마책이긴 하지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고, 이와함께 전라도의 동학농민들이 주도했으리라 보는 왜와 서양세력을 배척하는 괘서운동(掛書運動)에도 장성인을 비롯한 호남인들이 참여했으리라 본다.

그리고 수만명의 동학농민이 척왜양(斥倭洋)의 기치아래 모인 보은 집회는 전라도에서 최소한 6,270명이 참여했다는 사실로 보아 장성의 동학농민들도 참여하였으리라 본다. 그런데 장성의 동학농민이 언제 얼마쯤 참여하였다가 언제 해산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전체 참여자의 51%가 호남인이며 가장 열성적인 시위활동을 하였고 끝까지 남은 사람 중에서 호남인이 70%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호남의 교통로이며 일찍부터 동학이 전파되어 신도수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는 정황으로 보아 장성의 동학농민들도 참여했을 것이다. 또한 장성의 동학농민들은 남접계통의 만여명이 참여해다는 금구 원평집회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은 고부의 농민봉기에서 부터였다. 희대의 탐관오리인 고부 군수 조병갑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농민을 수탈했으며 이를 탄원한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매를 맞아 장독으로 죽고 말았다. 전봉준 등은 몇 차례의 시위운동이 한계에 부딪치자 동지 20여명과 함께 1893년 11월에는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해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전주로 향하여 서울로 올라가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고부군수 조병갑의 임기가 끝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으나 조병갑의 연임운동으로 다시 군수직을 맡게 되자 드디어 봉기하였다.

1894년 1월 고부의 농민들은 말목장터에 모여 횃불을 들고 죽창을 마련하여 고부관아로 진격하니 그 숫자는 1000여명이나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고부를 점령했으나 군수 조병갑은 미리 도망쳐버려 전봉준 등은 무기고를 부수고 감옥을 파괴하여 죄수를 방면했으며 악질적인 아전들을 벌준 후 만석보를 헐고 쌓아논 수세미(水稅米)를 나누어 주었다.전라감사 김문현의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파직시키고 광주인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했다 군수 박원명은 지방사정에 밝아 촌로들을 방문하여 위무하며 민심을 수습했으나 안핵사 이용태는 늦게 부임하여 백성들이나 아녀자에게 농민봉기에 가담했다고 책임을 물어 탄압과 수탈을 일삼았으며 집에 불을 질러 포악무도하기 짝이 없었다.

2. 동학농민혁명의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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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핵사 이용태의 탄압과 수탈을 지켜보던 전봉준과 김개남은 무장으로 달려가 손화중 접주를 설득해 혁명의 불길을 들었다. 손화중, 전봉준, 김개남 등은 무장의 동학농민군 수천명을 거느리고 3월 하순에 봉기하여 고부를 점령한 후 백산(白山)에 집결했다.

백산에 모인 전라도 33개 고을의 동학농민군들은 전열을 정비하여 4대강령(四大綱領)을 발표해 동학농민의 봉기가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임을 분명히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함부로 사람이나 생물을 죽이지 않는다.(不殺人, 不殺物)
둘째, 충과 효를 함께하여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忠孝雙全, 濟世安民)
셋째, 왜와 서양오랑캐를 축출하여 우리의 도를 드높인다.(逐滅倭夷, 澄淸聖道)
넷째, 병력을 휘몰아 서울에 들어가서 권신과 귀족들을 모두 없앤다.(驅兵入京, 盡滅權貴)

백산에 모인 만여명은 전남의 17개 고을에서 동학의 접주나 두령들이 동학농민군을 인솔하고 집결한 것인데 장성에서는 김주한, 기우선, 기동도, 박진동, 강성중, 강서중 등이 인솔하였다.이 소식에 접한 정부는 전라병사로 임명된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삼고 경군(京軍) 800명과 야포 2문을 주어 군함과 선박에 실어 군산으로 출동시켰다. 그리고 농민봉기에 직접·간접으로 관련된 조병갑 고부군수는 물론 안핵사 이용태와 전운사 조필영 그리고 균전사 김창석을 파면 조치했다.전라감사 김문현은 휘하의 영군을 출동시켜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게 했는데 4월 6일부터 7일 새벽까지 전개된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은 영장 이경하(곤양군수를 역임하여 李昆陽이라 부름)이하 대부분이 동학농민군에 살해되었다.

그런데 동학농민군은 곧바로 전주로 향하지 않고 정읍을 점령한 후 흥덕을 점령하고 고창으로 진격하였다. 그것은 비록 홍계훈의 경군이 도망쳐 버려 470여명 밖에 안되지만 전주성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정면으로 승부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3. 장성 황룡싸움과 전주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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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에서 전주감영군을 대파한 동학농민군은 전주로 향하지 않고 반대방향으로 진격하였으니 정읍, 흥덕을 거쳐 손화중의 본거지요 혁명의 발상지인 무장을 점령하여 투옥 중인 동학교도들을 석방한 후 이서와 군교들을 살해하여 응징한 후 성밖에 주둔하였다.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고창을 거쳐 무장을 점령한 후 영광을 지나 4월 16일에 함평을 점령하여 시가행진을 하는 등 위세를 떨치다가 홍계훈의 경군이 영광에 도착하는 것을 알고 함평을 출발하였다.동학농민군은 22일에 부대를 양로로 나누어 나주와 장성으로 향하게 했는데 나주로 향한 구체적인 이동상황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추격하는 홍계훈의 경군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인 것 같다. 그런데 전봉준의 주력은 22일에 장성으로 향했지만 별동부대를 미리 장성으로 보내 철저한 준비를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희대의 전략가요 혁명가인 전봉준은 전주에 주둔하였던 경군이 계획대로 유인되자 어느 곳에서든지 격파하여 그 예봉을 꺾고 전주를 점령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한 작전계획에서 최적장소가 장성이었으니, 그것은 장성이 전주로 가는 직행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별동부대를 장성으로 보내 경군과 결전을 준비했는데 부대의 배치와 지형정찰 그리고 신무기인 장태를 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군이 사용했다는 수십개의 장태는 22일에 장성에 와서 하루만에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미리 수십개의 장태를 만들어 요로에 비치하고 대비하였을 것이다.

한편 영광에 주둔하고 있던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4월 22일에 대관 이학승, 원세록, 오건영에게 정병 3백명과 대포 2문을 주어 장성으로 출발시킨 다음날인 23일에 장성 황룡에 머물고 있는 동학농민군을을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때마침 동학농민군은 삼봉산에서 적의 동정을 살피고 요소요소에 군을 배치한 후 주력은 장성 월평의 황룡장터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이학승의 선봉대가 황룡강 강변에서 황룡장터를 보니 엄청나게 많은 동학농민군이 장터에 있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대포를 발사하여 약간의 사상자를 냈다. 이에 동학농민군이 협공하여 경군은 참패하였는데 대관 이학승과 병정 5명이 죽었고, 크르프포 1좌와 회선포 1좌 등 대포 2문과 많은 양총을 동학혁명군에게 빼앗기고 30리나 후퇴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관변측 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출전 장병이 당황하여 달려와 말하기를 관군이 장성 월평에 닿았을 때 그들 무리(동학농민군)이 마침 황룡촌에 이르러 서로 접전하여 죽이는데 크르프포 1방을 쏘니 맞아 죽은 자가 가히 수백이라 그들 만여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돌격해와 30리 지경까지 추격해왔다. 그들의 수는 많고 우리는 적어서 피곤하여 자빠지며 창황히 본진으로 돌아와, 대관 이학승은 칼을 휘드르며 뒤에서 싸우다가 병정 5명과 함께 그들에게 죽었다. 그리고 크르프포 1좌와 회선포 1좌 및 탄환을 잃었다.한편 황현은 장성 황룡싸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3일 홍계훈은 경군 200명(300명을 잘못 파악)을 선봉으로 삼아 영광으로부터 적을 뒤쫒다가 다시 월평에 도착하여 적진(동학농민군)을 바라보니 적진은 채 정열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다른 사람에 앞서 공을 세우고자 후원병을 기다리지 않고 멀리서 대환포를 쏘았다. 적은 병기를 거두고 조금 물러났다가 곧바로 삼봉 위로 올라가 진을 배치했는데 마치 학(鶴)의 모양과 같았다. 적은 위에서 아래로 관군을 내려다 보고 있다가 잠시 후 홀연히 커다란 대나무로 만든 통을 밀고 나왔는데 둥그스럼한 닭의 집(장태)과 비슷한 것이 수십개였다. 밖으로 창과 칼이 삐쭉하게 꽂은 것이 고슴도치 같았고, 아래에는 두 개의 바퀴를 달아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왔다. 관군은 총탄과 화살, 돌 등을 쏘았지만 대나무통에 차단되어 버렸다. 적은 대나무통 뒤에서 총을 쏘며 따라오다가 고함을 지르며 뛰어 들었다. 초토군의 진영은 멀리 빤히 바라보면서 도와주지 못한 채 그들이 사방으로 달아나도록 방임하였다. 적은 더이상 추격하지 않고 병력을 수습하여 돌아갔다. 이날 관군을 7명이 죽었으며, 대환포 2대를 빼앗겼고, 적은 서로 밟아서 많이 죽었고 혹은 대환포에 맞아서도 죽었다. 죽은 자들을 모아 무덤 17개를 만들었는데 각각 4∼5구의 시체를 묻었다.또한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황룡싸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학농민군 영솔장 오하영, 이방언 등이 수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영광읍으로부터 협로로 빠져 장성 지계에 도달하자 홀연 산북편 길에서 홍장(홍계훈) 후군 1대의 병을 만나 싸우게 되었다. 홍장군 1대는 원래 고부로부터 우편길로 들어 장성갈재를 넘어 동학군의 앞길을 막고저 내려오는 차 장성 황룡강가에서 양군이 서로 접촉하게 되었다. 동학진중에서 미리 준비하였던 대로 만든 장태 수십대를 산지 정상으로부터 내리 굴리며 관군을 사격함으로 관군은 미쳐 정신을 수습할 사이도 없이 참살을 당하여 홍진의 장군 이효응, 배은환 등 3명과 관병 100여명을 몰살시키고 대포 3문과 양총 100여정을 빼앗았다. 대장태라고 하는 것은 청죽(靑竹)으로써 얽어 닭의 장태와 같이 만든 것으로써 그 밑에 차바퀴를 붙인 것이며, 그 속에는 군사가 앉여 총질을 하게 된 것이며, 이 장태를 만든 사람은 장흥접주 이방언으로 그의 별호를 이장태라고 불렀었다.

그리고 광산구 삼도리 출신의 이병수가 쓴 [금성정의록]에서는 황룡싸움과 장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전봉준이 함평에 있을 때 대를 베어다가 장태를 만들었는데, 하나의 둘레가 몇 아름이며 길이가 몇 10발이나 되는 장태를 여러개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주로 들어오려다 장성 월평으로 나가 경군과 싸우게 되었다. 전봉준은 군중에 영을 내려 청을(靑乙)자를 써서 등에 붙일 것이며, 수건으로 머리를 싸메고 입은 앞 옷깃을 물고 엎드려서 장태를 굴려나가는데 옆을 돌아보지 말 것이니 이렇게 하면 적군의 포환이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군이 바라보니 어떤 커다란 물체가 굴러오는데 뒤에 보졸(步卒) 수천명이 엎드려서 몰아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경군측에서 포를 쏘아데니 죽은 자가 무수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를 싸멘 사람들이 일어나서 포를 쏘고는 다시 엎드렸다. 그들은 좌우를 돌아보지 않으니 옆에서 죽고 사는 것은 모른 채 달려드는 바람에 경군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패주하게 되었다. 실은 청을(靑乙)자는 아무런 뜻이 없고 앞 옷깃을 입에 물고 있으니 허리를 펴 일어나기가 어려워 좌우의 죽고 사는 것을 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한편 장성의 동학접주인 이춘영의 [동학약사]에는 황룡싸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춘영 접주는 대거 접전계획을 하고 접전 전구로 사용하기 위해 광주군 임곡면 가정리 송영직씨가 헌납한 대청죽 약 450본으로 대형 죽장태 7개를 만들어 장태속에다 볏집을 쌓아서 전투에 사용하였다. 장태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제품의 높이는 5척(尺)이고 길이는 15척이 되어 있는데 이 장태를 전지에서 궁굴려 전진하며 동학군은 이 장태에 몸을 의지하고 적군의 총탄을 방어하여 전투에 사용할 전구(戰俱)를 만든 것이다. 전쟁준비를 완료하고 전남도내 각처 접주를 소집하여 동학군 만여명을 동원하기로 결의하고 장성황룡강 월평접전을 대규모 전투 태세를 갖추어 마침내 월평접전에 승전하였다. 월평접전의 승전은 오로지 이춘영접주의 고안인 장태를 사용함으로써 가져온 것이다. 전쟁터에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장태를 궁굴려 전진하며 아군은 장태에 몸을 의지하고 적을 사살하며 적의 총탄을 장태로 방어하며 대승전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세인(世人)이 속칭하여 장성황룡강 월평대접전이라 부르고 있다.또한 전봉준은 그의 공초에서 장성 황룡싸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장성으로 가서 경군(홍계훈초토사)과 더불어 접전했는데 아군이 취식할 때 경군이 대포로 사격하여 아군이 4∼50명이 죽자 아군은 일제히 추격하여 쫓으니 경군을 패주하여서 대포 2좌와 탄환을 탈취하여 왔다. 그때 경군의 수는 7백명이고 아군은 4천명이었다. 경군이 패주한 후 아군은 발걸음을 두배로 빨리하여 경군보다 먼저 전주에 들어가 수성(守城)하였다.위의 여러 기록들은 주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하여 서로 일치하지 않고 있는데, 이상을 종합하여, 장성 황룡싸움의 실체를 설명하여 보기로 하겠다.

첫째, 전략가요 혁명가인 전봉준은 홍계훈의 경군을 유인하여 그냥 버려둔 채, 전주를 점령하는 것보다 전략적인 어느 곳에서 일대 타격을 주어 동학농민군의 사기를 북돋아 전주를 점령하고 경군의 사기를 꺾고자 했는데, 그 적지가 바로 장성 황룡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주로 달려가는 지름길이 바로 장성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전봉준의 주력이 4월 22일 함평에서 장성으로 향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전봉준은 별동부대 혹은 장성접주들에게 장성에서의 대회전을 위해 미리 치밀한 준비를 상당한 날짜를 두고 했을 것이다. 상대방인 홍계훈의 경군은 대포와 양총 등 신무기로 무장하였으며, 당시의 최정예부대였기 때문에 경군과의 싸움은 힘겨운 상대였다. 그러므로 대형 장태를 만들기 위해 많은 인력과 시일이 소요되었고 지형정찰과 요소의 군대배치를 위해서는 사전에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을 것이다.
셋째, 전봉준의 주력군 수와 관군의 숫자는 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동학농민군 수는 6∼7천명에서 만명정도로 볼 수 있고 전봉준의 공초에서 4천명으로 진술한 것은 그 수를 약간 줄인 것이며 관군은 양호초토등록의 기록인 300명이 정확한 기록일 것이다.
넷째, 이학승 등이 거느린 경군과 동학농민군의 싸움은 경군이 황룡강가에 이르러 보니 건너편 월평장터에 엄청나게 많은 수의 동학농민군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중과부적이라 생각하여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자 대포를 쏘아 상당한 사상자를 냈다. 동학농민군은 처음에 당황하여 건너편 삼봉산 쪽으로 일시 후퇴하다가 삼봉산에서 적을 감시하던 척후병이 관군의 수가 소수라고 소리질러 반격을 개시했다. 그때 대나무로 만든 장태를 굴리며 그것의 엄호를 받으며 육박하니 경군은 퇴로를 따라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사방에서 대기중이던 동학농민군이 일제히 공격하니 경군은 패주하였고 선봉장인 대관 이학승과 5명의 병정은 전사했으며 경군은 대포 2문과 양총 100여정 그리고 많은 탄환을 빼앗겼다.
다섯째, 장태의 모형과 그 제작자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장태의 모형에 대해서 황현은 바퀴를 달았으며 겉에는 창과 칼을 박아 고슴도치 모양 같다고 했으며 오지영은 바퀴를 달아 그 안에 군사가 들어갔다고 했는데 이병수와 이춘영은 크고 둥글게 만들어 그 안에 짚을 넣어 탄환을 방지하게 하여 군사들이 그것을 굴리면서 그에 의지하여 총질하며 돌격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이병수는 나주 공격전에도 대장태를 이용하였는데 이를 실제로 목격하였고 이춘영 자신이 장태를 고안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바퀴를 붙이지 않고 그 안에 짚을 넣어 총탄을 막으면서 그것을 의지하여 굴리며 공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 대장태의 제작자에 대해서 오지영은 장흥접주 이방언이라고 하였고 이춘영의 기록은 자신의 지시를 받아 장성인 최경호가 제작했다고 하고 최현식씨는 담양인 이용길이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옛부터 장태는 닭을 잠자게 하는 둥지로 둥그렇게 만들어 처마 끝에 메달아 그 안에 훼를 넣어 닭을 잠자게 하는 것인데 거기에서 착상하여 크게 만들어 그 안에 짚을 넣어 탄환을 막고 그것을 군사들이 굴리면서 그것에 의지하여 적에게 육박하니 적은 당황하여 패퇴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창안자가 누구인지는 별다른 의미가 없으며 그것을 사용하여 경군을 물리쳤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여섯째, 이학승이 거느린 경군 선봉대와 동학농민군의 접전과정에 관한 문제인데 대체로 전봉준이 공초에서 진술한 내용을 따르고 있으나 우리는 조사과정에서의 진술내용이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느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전봉준은 싸움의 발단을 동학농민군이 황룡장터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경군이 강건너에서 대포를 쏘아 4∼50명이 죽자 아군은 일제히 공격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그런데 싸움의 발단은 경군의 대포발사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많은 사상자가 나오자 즉흥적으로 반격을 가하였으니 경군의 대포공격만 없었다면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전략가요 혁명가인 전봉준은 홍계훈의 경군을 유인하여 어디에서든지 타격을 주고 전주에 입성하겠다는 전략지점으로 장성을 택하였으며 사전에 수십개의 장태를 만들고 요지에 부대를 배치하여 놓고 적을 대기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봉준이 진술한 우발적이요 즉흥적인 충돌이었다는 내용은 법정진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봉준은 수일전부터 장태를 만들어 놓고 그 사용법을 훈련하였을 것이며, 삼봉산에는 척후병을 배치하여 경군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고 요소요소에 군을 배치하여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장성 월펑 장터에서 점심을 먹다가 충돌을 일으켰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 곳에서 전사한 대관 이학승과 병정 5명에 대한 처리는 장성 향리 박전성이 사재 500냥을 들여 장례를 치루었다가 전주화약 후 5월 9일 서울로 다시 운구되었다. 박전성은 이로 인하여 동학농민군의 보복이 두려워 동학에 입도했다가 그해 12월에 관군의 관대한 처분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학승은 좌승지로 추증되었으며 전사지인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에 증좌승지이공학승순의비가 세워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 비의 건립은 장성의 유력씨족들이 문중별로 자금을 염출하였고 그 비문은 면암 최익현이 썼는데, 1897년에 세워졌다. 이학승의 정확한 전사지는 비가 있는 곳으로부터 50여보 떨어진 곳인데 현재의 위치에 비를 세우게 된 것은 장성에서 영광으로 가는 큰 길 옆에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비록 초라하게 밭 언덕에 세워진 대관 이학승의 순의비이지만 국가를 위해서 순국한 그의 업적은 충분히 표시되었는데 동학농민혁명에서 가장 빛나는 동학농민군의 승전을 기념하는 뜻은 아무 것도 남겨져 있지 않고 있어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여 왔다.그리하여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전국적으로 활발한 역사의 재조명이 이루어져 이제까지 반란으로 취급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이 이 나라 근대의 서막이요 민족·민주운동의 원동력으로 재평가되었으며 그날의 역적이요 반란자들이 위대한 농민혁명의 선각자로 빛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에 발 맞추어 광주·전남의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광주·전남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여러 사업을 전개했는데 특히 이곳에 동학농민혁명군 승전 기념공원을 조성하기로 하였으니 그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인 것이었다.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장성 황룡의 이학승 전사지 주변의 대지 약 4,000평을 구입하여 승전기념탑을 세우고 그날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하려 하였으며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많은 사람들의 역사교육장으로 가꾸기로 하였다.

[사진 2-1] 장성 황룡동학농민군승전기념공원 전경: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 [사진 2-1] 장성 황룡동학농민군승전기념공원 전경: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 [사진 2-2] 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 소재 [사진 2-2] 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 소재> 광주·전남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전라남도와 장성군의 보조를 받고 뜻있는 사람들의 협찬을 받아 동학농민군 승전기념탑을 건립하였고 조경사업을 서둘러 동학농민군 승전기념공원을 조성하였고 정부에서는 국가사적 제406호로 지정했는데 기념전시관은 차질을 빚어 미완성의 상태로 남아있으나 전남도와 장성군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결실을 맺으리라 본다.

우리는 이러한 산역사를 주위 사람들과 후손들에게 공부하게 하여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역사발전에 가장 많은 생명과 재산을 바쳤던 조상들의 업적을 기리고 계승하여 나라와 민족의 발전을 이끌고 나가는 주인공이 되게 하자는 것이다.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은 동학농민군의 주무기였던 죽창(竹槍)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탑신의 높이가 30m요, 지름이 2.5m이고 탑의 전면에는 3m×8m의 부조물이 있는데 청동의 조각은 장성 황룡승전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였으며 탑의 좌우면은 동학농민군의 4대강령과 승전을 기리는 시가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장성 황룡싸움의 역사적 의의와 이 탑을 세우는 뜻이 새겨져 있다.

한편 장성 황룡싸움에서 서울의 정예부대를 격파한 동학농민군은 곧바로 전주를 향하여 달려갔으니 4월 23일에 경군을 격파한 후 신흥리 사거리를 거쳐 장성 갈재로 향했다. 그런데 전봉준이 행군하다가 갈재에 이르기 전 북이면 원덕리의 길가에 전일귀효자비(全日貴孝子碑)를 보고 그곳에서 멈추고 자신의 무운(武運)을 빌고 그 부근에서 하루밤을 쉬었다한다. 전봉준은 장성 황룡싸움의 감격을 안고 전주를 향하면서 유숙할 장소를 찾다가 길가에 있는 전일귀의 효자비를 보고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고 자신의 구국일념이 성사되기를 기원하였을 것이다.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에 있는 전일귀 효자비의 유래와 그 비가 입은 화를 [장성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 정조 14년(1790)에 전일귀의 효행이 지극하여 조정에서 명정(銘旌)을 내리고 향중 유림들이 비각을 건립하여 그 효행을 기록하였는데 …… 동학농민혁명 때 전봉준이 이 비에 치성을 다하여 제사를 올렸는데 혁명군이 패퇴하고 관군이 남하하면서 이 비를 습격하여 비신은 절반만 남아있고 비각은 소실되어 현재 반비신과 비각의 기단부만 남아있다. 그런데 이 비의 주인공 전일귀는 모친이 중병에 걸렸는데 인육(人肉)을 써야 치유될 수 있다고 하자 절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을 데려다가 삶아서 드렸더니 그것은 아들이 아니라 산삼이었다고 하며 모친의 병이 완쾌되었다. 그후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侍墓)할 때 큰 호랑이가 그를 호위하였는데 그 호랑이는 꿈에 현몽하여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항상 일귀를 보호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사진 2-3] 전일귀효자비: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소재 [사진 2-3] 전일귀효자비: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소재 장성 황룡에서 서울의 정예부대를 격파한 동학농민군은 곧바로 전주로 향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정읍·금구·원평을 거쳐 4월 27일에 전주성을 공격하니 전주성은 4월 18일 자로 파직당한 전감사 김문현과 판관 민영승 그리고 홍계훈에게 수뇌들이 처형 당한 수십명의 영군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의 수부요 이씨왕조의 발상지인 전주성을 거의 무혈점령하다시피 했다.

한편 전봉준의 뒤를 따라 홍계훈의 경군은 비록 영광에서 300명의 증원군을 보충했지만 장성 황룡에서 그 선발대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채 길을 재촉하여 28일에 전주성 외곽에 도착하여 성안의 동학농민군을 향하여 대포를 쏘아 쌍방간에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 뒤 한차례 공방전이 있었으나 소강상태에 빠진 뒤 새로 김학진이 전라감사에 임명되어 전봉준과 화의를 진행시켜 나갔다.그런데 조정에서는 전주점령의 소식을 듣고 김병시 등의 원로대신이 외국원병을 반대했지만 민비의 독촉을 받은 세도가 민영준과 이홍장의 대리인 원세개가 청에 원병요청을 합의해 청군이 출동했다. 한편으로 정부는 청군에 구원을 요청해 놓고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에는 휴전을 추진하는 이중 태도를 자행하면서 빨리 전주를 회복하려 했다.

동학농민군의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이 실학자 김성규의 중개로 전주화약을 맺어 동학농민군이 전주에서 철수하는 대신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농민통치를 실시해 폐정을 개혁하고 민원을 해결하며 군사와 병마의 조달 및 전도를 추진하기로 했다.
한편 위정자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불러들인 청군을 따라 많은 병력을 서울에 진입시킨 일본군은 조선에 압박을 가하다가 드디어는 궁궐을 점령하고 친일내각을 구성하여 침략을 자행하는 한편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청군을 공격하면서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려 했다.
전주에서 철수한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각자의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해 농민통치를 추진하는 한편 전봉준은 각지를 순례하면서 이를 독려하였다. 전라도 전역에 설치된 집강소는 동학농민군의 혁명정권으로 폐정을 개혁하는 한편 신분철폐·민원처리·군사와 병마조달은 물론 동학의 전도 등을 담당하여 전라도 전역은 물론 경상도 일부와 충청도 일부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갔다.

집강소는 각 고을에 설치되어 수령의 임무를 수행하는 집강과 농민의 의사결정을 위해 의사원 약간명 그리고 감찰임무를 수행하는 성찰 등의 관원을 두어 지방의 행정과 군사·민원처리 등을 관장했는데 집강소에서 추진한 폐정개혁 12개조는 다음과 같다.

1. 도인(동학도)과 정부사이에는 서로 미워하지 말고 서정에 협력할 것.
1.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하게 다스릴 것.
1. 횡포한 부호들은 그 죄목을 엄하게 다스릴 것.
1.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엄하게 다스릴 것.
1. 노비문서를 소각할 것.
1. 칠반천인(신분은 양민이면서 천역에 종사하는 7가지 직업인)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의 머리에 쓰는 평양립을 없앨 것.
1.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가할 것.
1. 무명잡세는 일체 부과하지 말 것.
1. 관리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 왜와 간통한자는 엄하게 다스릴 것.
1.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빚을 모두 없앨 것.
1. 토지는 평균하여 경작할 것.

전라도 전역에 설치한 집강소는 농민통치를 실시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 있었지만 청군을 따라 대규모의 병력을 서울에 진입시킨 일본군이 궁궐을 점령하여 조선군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친일내각을 세워 조선을 침략하는 한편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려 했다. 이에 전봉준은 구국항왜를 위한 재봉기를 서둘러 북접의 협조를 받아 공주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이 주축이 된 방어군에게 패하여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장성의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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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이 장성 황룡에서 서울의 정예부대를 격파하고 곧바로 전주를 점령하여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휴전을 성립시키고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통치를 하기로 합의했다.장성에 언제 집강소가 설치되었으며 집강에는 누가 임명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전봉준이 5월중에 수십명의 호위군을 거느리고 장성을 순회하였음을 볼 때 장성의 집강소 설치는 다른 고을보다 빨랐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 신빙도에 문제가 있지만 이춘영의 [동학약사]에 의하면 "집강소를 장성군 황룡면 토말 이춘영의 집에 설치하고 별첨의 동학군 포부문, 장성 동학당 포고문과 동학군 집강소 폐정개혁 12개조를 낭독하고 ……" 라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별첨 동학군 포부문과 장성동학당 포고문, 그리고 폐정개혁 12개조를 기록하고 있는데 장성동학당 포고문은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이 3월의 무장기포때 발표한 내용이고 폐정개혁은 오지영의 동학사에 나오는 폐정개혁안인데 동학군 포부문은 처음 접하는 것이기에 인용하고자 한다.

동학군포부문(東學軍抱負文)구국동맹(救國同盟)

위왈(謂曰) 대장부 의기범절이 염중(廉中)에서 난 것이니 의뢰심은 전무일체키로 하고 민권은 평등주의며 제폭구민 척양척왜하며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 지상천국 건설 목적을 끝까지 달성할 것……누가 장성의 집강에 임명되었든지 장성에 설치된 집강소는 전라도 전역에 설치 운영된 집강소와 대동소이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집강소는 "모든 것을 일제히 혁청(革淸)하는 바람에 이른바 부자와 빈자라는 것과 양반, 상놈, 종놈, 적자, 서자 등 모든 차별적 명색을 그림자도 보지 못하게 했다."장성에 설치된 집강소도 집행기관으로 집강, 서기, 성찰, 집사, 동몽이 있었고 약간의 의사원으로 구성된 의사기관이 있었으며 집강소를 호위할 호위군 그리고 향리들로 구성된 방조기관으로 조직되었을 것이다. 집강소의 혁신정치 추진과정에서 물의도 없지 않았을 것이니 전봉준은 집강소에 폐단을 없애는 공문을 하달하여 중지시키기도 했다.

지금 우리의 행동은 오로지 백성들을 위하여 폐해를 없애고자 하는 것이므로 교묘하게 속이고 못된 짓을 하는 무리들이 함부로 설치며 백성들을 괴롭히고 마을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행동은 비록 하찮은 의혹이나 잘못이라도 반드시 보고하도록 하라. 이들은 바로 덕을 배반하고 선을 해치는 무리일 뿐이니 각 읍의 집강들은 명확히 살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글의 뒷편에 적은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一. 이미 수거한 총, 창, 칼, 말과 이미 관처에 반납한 것은 각 접주에 통보하여 총, 창, 칼, 말의수효와 소지하고 있는 사람의 성명과 주소를 자세하게 기록하여 두 개의 책으로 엮어 순영의 관인을 받은 다음 하나는 감영에 보관하고 나머지 하나는 각 집강소에 돌려보내 보관토록하여 나중에 참고하도록 할 것.
一. 역참에서 쓰는 말과 상인들의 말을 각각 본래의 소유자에게 돌려 줄 것.
一. 지금부터 총과 말을 거두어 들이는 일은 일체 금하고 돈과 곡식을 강제로 요구하는 자들은이름을 적어 감영에 보고하여 군율에 따라 조치토록 할 것.
一.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과 사적 채무를 받아내는 일은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일체 행하지 말 것
-. 만약 여기에 열거한 것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감영에 보고하여 법대로 처리하도록 한다.

또한 당시의 상황은 기득권자들이 생각하기에는 상당히 심각했으니 황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무렵 어리석은 백성들의 못된 자식들은 날마다 적(동학농민군)을 따라 나섰고 구실아치들은 그들의 수령을 잡아서 주리를 틀고 노비들 또한 그들의 주인을 잡아 주리를 트는 일이 일어났다. 마을에 들이닥쳐 협박하고 강제로 총과 말을 빼앗았는데 이런 것이 없는 사람은 대신 돈을 냈다. 말이 있으면 안장을 찾고 총이 있으면 화약을 찾았는데 이런 것이 없으면 또한 대신 돈을 내야 한다.한편 집강소의 농민통치가 본격화되자 천인들의 신분상승이 두드러졌으며 수천년 묵은 울분이 토로되어 혼돈이 연출되었는데 이것은 유림이나 양반에게는 비통한 상황으로 비쳤을 것이다.

대개 적(동학농민군)은 천한 노비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양반들을 가장 미워하였다. 길에서 갓을 쓴 사람을 만나면 갑자기 달려들어 너도 양반이냐 하며 갓을 빼앗아 찢어버렸는데 간혹 어떤 놈들은 자기가 쓰고서 거리를 쏘다니며 모욕을 주었다. 무릇 남의 집 종으로 적을 추종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비록 적을 추종하지 않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적을 끌어다 대며 주인을 협박하여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면천해 줄 것을 강요했다. 이들 중 몇몇은 주인을 결박하여 주리를 틀고 곤장을 때리기도 했다. 이 무렵 노비가 있는 집안에서는 이런 소문을 듣고 노비문서를 불태워 화를 피하기도 했다. 노비 중에 착실한 사람은 더러 노비문서를 태우지 말아달라고 하였다. 간혹 양반 중에는 주인과 노비가 함께 추종한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 접장(接長)이라고 부르면서 적의 법도를 따랐다. 백정이나 재인들 또한 평민이나 양반과 더불어 평등한 예를 행하여 사람들은 더욱 이를 갈았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집강소가 농민통치를 수행하여 수천년간 지탱해 오던 신분체제나 폐단들이 모두 제거되어 평등세상이 되었으니 양반이나 기득권자들에게는 비참했으며 말세라고 보일지 모르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강조되었으며 악습과 폐단이 제거되었던 것이다. 특히 유림이나 지방의 토호세력이 강했던 장성지방에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했음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러한 가운데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전봉준은 구국항왜의 재봉기를 서둘렀다. 농번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신병을 요양중이던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일본의 야만적 침략을 좌시할 수 없어 9월 중순에 재봉기의 격문을 전라도 각지에 보내어 삼례에 모이게 했다. 이보다 앞서 전봉준은 장성 백양사에 본부를 두고 장성의 향반세력인 광산김씨, 울산김씨, 행주기씨, 황주변씨 등의 문중대표들을 모이게 하여 돈과 식량의 조달에 협조하게 했다. 그리고 전주의 병기와 각 고을의 병기를 집강소를 통하여 수집하게 하고 병마와 군량을 준비하였다.

전봉준의 재봉기 통문을 받고 전라도 각지에서 병력을 인솔하고 삼례에 모였는데 전남지방에서는 장성, 영광, 무안, 장흥 등 12개 고을에서 참여했다. 장성에서는 기우선이 1천군을 거느리고 참여하여 삼례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가 10만이 넘었다.

구국항왜의 재봉기에는 교단측의 북접도 가담하여 서울진입을 위한 공주북상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군과 그들의 지휘를 받는 관군에게 공주에서 참패하여 후퇴하면서 몇 차례 대항해 보았으나 연전연패했다.동학농민군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원평에서 전봉준은 수만명의 농민군을 모집하여 11월 25일에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였으나 이곳에서도 쓰라린 참패를 당하고 태인으로 퇴각했다. 전봉준은 고향인 이곳에서 김문행, 유공만, 문행민과 같이 5,000명의 병력으로 11월 27일에 최후의 방어전을 시도했다. 관군 230명과 일본군 60여명을 상대로 벌인 이 싸움에서도 대패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장성의 노령(갈재)으로 퇴각했다.

희대의 혁명가요 전략가인 전봉준은 태인 싸움을 마지막으로 군을 해산하였으니 손병희의 북접은 북으로 피하여 교단의 명맥을 유지하였고 전봉준은 동지 몇 사람과 29일에 장성의 입암산성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산성별장 이종록과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을 먹은 후 경군의 추격소식을 듣고 30일에 백양사로 향하여 이곳에서 1박하고 12월 1일 오전에 담양방면으로 향했다. 일본군은 입암산성의 별장 이종록이 적장과 동식동숙하고도 체포하지 않았으며 고발하지 않았으니 전라감사에게 즉시 체포하여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전라병사가 입암산성의 별장 이종록을 체포하여 일본군에 이송했으나 처벌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반봉건의 민주화와 반외세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은 29일에 장성 입암산성에서 별장 이종록과 하루밤을 지내고 같이 밥을 먹고 30일에 유서 깊은 백양사에 들려 하룻밤을 지낸 후 내래오면서 백양사의 속사인 청류암(淸流庵 : 북하면 약수리 가인부락 부근)에서 맑은 샘물을 먹고 그 맛에 감탄하여 남천감로(南泉甘露)라고 글을 썼다 한다. 그 후 그를 쫒는 일본군과 관군을 피해 12월 1일 동지 김개남이 은신하고 있는 태인 산내로 가는 도중 12월 2일 해질 무렵 왕년의 동지인 김경천을 찾아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로 갔다. 그런데 김경천은 지난날의 동지인 전봉준을 안심시켜 놓고 전주감영 퇴교로 이웃에 살고 있는 한신현에 밀고하자 한신현은 김영철, 정창옥 등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을 체포했으니 1894년 12월 2일이었다.

한편 김개남은 남원에서 전봉준과는 달리 청주방면으로 진격하였다가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배하여 태인에 숨었다가 체포되었고 손화중, 최경선 등은 전봉준의 특명으로 광주, 나주에 남아서 일본군의 해상공격에 대비하고 있다가 전봉준의 패배소식에 접하자 광주에서 군을 해산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 해산한 장흥의 이방언은 장흥으로 남하하여 벽사역을 점령한 후 장흥을 점령해 기세를 떨치자 동학농민군은 3만명으로 증가했다. 이방언은 강진과 병영(전라도의 육군본부)을 점령한 후 영암까지 넘겨보다가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체포되었다. 이로써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이었던 장성을 비롯한 전남의 동학농민군도 장흥 전투를 최후로 일본군과 관군 그리고 기득권자들의 살육과 약탈을 당하고 말았다.

5. 장성의 피해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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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을 추격하면서 내려 온 관군과 일본군은 12월 1일 갈재를 넘어 장성으로 들어와 전봉준을 수색하는 한편 동학농민군 소탕에 여념이 없었다. 전봉준이 입암산성과 백양사에서 일박씩 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관군은 백양사 부근 마을을 수색하면서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으니 북하면 용두리 궐전마을을 완전히 불태워 버리고 전봉준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전술한 바와같이 11월 29일 입암산성에서 1박하고 30일에 백양사에서 1박한 후 태인을 향해 순창으로 떠난 뒤여서 그 화풀이로 궐전마을 전체를 불살라 버렸던 것 같다.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관군은 북이면 원덕리에 있는 전일귀효자비에 전봉준이 제사를 지내고 무운을 빌었다고 하여 그 보복으로 비각을 불태우고 비신을 두동강 냈다.

또한 동학농민군토벌의 총사령관인 이규태는 장성이 무장, 영광, 광주, 담양, 장흥, 무안, 함평, 동복, 흥양, 고부 등과 같이 동학농민군의 큰 소굴이어서 설사 전봉준이나 김개남이 체포된다 하더라도 그밖의 거괴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말하여 장성의 동학농민군 활동을 짐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피해도 컸던 것이다.장성은 동학농민혁명의 본거지인 정읍이나 동학조직이 가장 성했던 무장과 인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에 가담했던 사람도 많았고 장성 황룡싸움터가 있는 곳이라 동학농민혁명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고을이다. 그리고 이춘영이 일찍부터 장성의 접주로 활약했던 지방이며 유수한 향족들이 세를 떨치며 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항심도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다른 지역보다 피해가 컸으니 장성부사 민상호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3월 19일에 부임하여 9월에 엄찰사 엄세영으로부터 동학농민군 관계로 금구현령 김명수, 고부군수 박원명, 정읍 오학영, 부안 이철화와 함께 파면당하고 그들의 죄를 해당 부서에서 다스려 줄 것을 품의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하여 군수로 이병훈이 12월 12일에 부임하였으니 3개월 이상이나 수령이 없는 상태에서 장성의 행정은 마비되었고 공백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장성에서 3월 봉기에 참여했던 김주환, 기우선, 기동도, 박진동, 강성중, 강서중 등이나 장성 접주로 활약했다는 이춘영 등이 어떤 활약을 했고 어떻게 피해를 입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박내원과 김복환, 김진환 형제의 활동은 기록이나 증언을 통해 약간은 알 수 있다.

박내원은 1859년에 장성군 황룡면 관동에서 출생했는데 본관은 밀양이며 일찍이 동학에 입교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다가 11월에 관군에 체포되어 형사했다.김복환, 김진환 형제는 장성군 서삼면 금계리 신평출신으로 장성에서 동학접주로 활약하다가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였는데 공주패전 후 남하하면서 관군과 일본군의 살육작전에 맞서 함평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특히 이 마을은 울산김씨 자가일촌으로 전동네가 동학농민혁명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는데 김진환, 김복환 형제가 전쟁에 참여하여 전사했던 것이다.다음으로 [순무선봉진등록]에서 장성지역의 동학농민군 피해상황을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12월 2일 장성에 주둔하면서 방을 붙였는데 그 내용은 병정들이 혹 폐를 끼쳤다면 눈비로 추워서 그랬으며 아직 안정되지 못한 때문이니 앞으로 단속을 잘 하여 폐가 없게 할 것이니 관속들이나 백성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군에게 먹을 것을 잘 공급해 달라고 했다.
12월 5일 선봉진에서 첩보한 것에 의하면 각 부대를 인솔하여 별 폐단 없이 장성에서 밤을 지냈다. 정읍의 동학거괴 손덕수는 손화중의 일가인데 고을사람들이 잡아왔다. 그는 용이 그려진 큰 깃발과 손깃발 1개씩을 가지고 손화중의 곤장수 정정칠과 장성 아곡에서 붙잡은 이봉학 등 3인을 어제 점심때쯤 장터에서 군민을 모아놓고 효수시켰다.
12월 14일 좌선봉의 첩보에 의하면 장성 한 고을은 이미 군기를 잃었으며 4개월이나 수령이 부재중이어서 동학군이 만연하여 소굴이 되었으므로 사상자가 많았고 마을마다 당을 이루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본진이 주둔한 후 방을 붙이고 효유하여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고 각 면리에 독촉하여 동학거괴들을 붙잡아 경중에 따라 처리중이다. 장성부의 동면 용두리는 본래가 동학의 소굴로 이민(吏民)이 접근하지 못해 병정과 별군관 이재화, 황범수 등을 파견하여 동학거괴 3인을 체포하여 민원에 따라 현장에서 죽였다. 별군관들이 깊은 소굴에 들어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분전하였으니 가상하므로 포상하는 것이 좋겠다.
12월 19일 장성 수성별장의 첩보에 의하면 장성부의 북일면 금곡접주 한덕일과 김사문 등을 현봉호가 잡은 과정을 보고하였으니 그 처리를 지시해 달라 했다.
1895년 1월 2일 장성부사의 첩보에 의하면 군무와 창고의 관리가 막중한 일인데 본 읍의 장리(掌吏) 이양구의 부정행위를 심문하기 위해 구속수감했다.
1895년 1월 2일 장성부사겸 소모사 첩보에 의하면 본부의 경내에 강일음은 본부의 동학거괴인데 읍내를 지킨다고 하면서 관장을 위협하고 본부의 군기를 빼앗아 민간의 전곡을 겁탈하여 빼앗았다. 손의영 포 무리들은 다른 고을에까지 가서 백성들의 재물을 겁탈했으며 정하표는 접사로서 민간에게 폐를 끼쳤고 기강을 문란시켰으며 강유음은 강일음의 동생으로 접사가 되어 그 형의 횡포에 빌붙어 불의하게 행패하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고 손홍모는 본부 북하면 신촌 접주로 또한 행패가 많았는데 관을 속여서 자수했으나 그 일당들을 숨기고 총과 창을 반납하지 않은 것이 드러났다. 공치선은 본부 북이면 상곡 접주로 이 또한 크게 나쁜 놈인데 곡성현의 군기를 빼앗아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으며 본부 북이면 목란리의 유광오는 정읍 등천접주로 두 고을에 출몰하면서 많은 폐를 끼쳤고, 추영시, 손기환은 태인현에 사는 접주 유복만의 접솔로 흉폭하고 패륜하여 용서할 수 없다. 백태일, 오영기는 본부 북일면 재암접솔로 횡패한 것이 그 수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달 27일 장날 거리에 모든 사람들을 모아놓고 강일음은 효수하고 손의영, 정하표, 강유음, 손홍모, 공치선, 유광오, 추영시, 손기환, 백태일, 오영기 등 10명은 죽여 대중에게 경종을 울리겠다.
1895년 1월 2일 장성부사겸 소모사의 첩보에 의하면 본부 장내에 공기노, 김종익, 이기주, 공치환, 남나구, 이궁궁, 한덕일, 김사문 등은 모두가 동학의 악질로 군기를 빼앗고 국가의 공납을 방해하여 군수로 사용했으며 백성들의 부담을 없애고 남의 도조를 늑탈하고 겁략하기를 노소나 남녀를 가리지 않았으므로 부사 도임하는 날 듣고 해괴하고 패악하게 생각하여 모두 심문하여 공기노, 김종익 등 양인은 효수하고 이기주, 공치환, 남나구, 이궁궁, 한덕일, 김사문 등 6인을 죽여셔 대중에게 경고하였으며 나머지 잡지 못한 사람은 체포하여 그 결과를 보고하겠다.
행 장성도호부사 겸 소모사의 첩보에 의하면 본부 경내에 머물러 있는 충청인 황범수는 순무영별군관이라 칭하고 두루 마을에 돌아다니며 죄인을 잡는다고 하면서 돈과 재물을 토색하고 소를 빼앗고 곡물을 약탈하는데 근거할 공문도 없고 지방관에도 통지하지도 않은 채 마음대로 행동하며 폐단을 일으켜 기강이 크게 무너졌다. 북하면 용두리에 사는 김낙주는 또한 군관이라 칭하면서 같은 무리들과 함께 평민들을 체포하여 돈과 곡식을 약탈하여 백성들의 동요를 걷잡을 수 없으니 그 하는 행위를 생각하면 심히 통탄한다. 참모 군관 유회(儒會) 상사(商社)의 이름으로 함부로 날뛰는 자들을 엄하게 금지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미 순무영의 전령으로 민보(民堡)나 의병(義兵)을 모두 없애어 엄금하게 했는데 이것을 하부까지 하달하여 다시 되풀이해서 옛날의 폐단을 저지르지 않게 하여야 하며 이러한 무리들을 즉시 처단하게 하여 무고한 생민(生民)들은 안심하게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황범수와 김낙주를 우선 엄하게 구속하고 그 사유를 보고한다.
행 장성도호부사 겸 소모사의 첩보에 의하면 본 읍은 큰 길이 되어 경군(京軍)이 왕래할 때 군대나 마필이 왕래하는 날 그 급식에 어려움이 언제 그칠는지 모르겠다. 병정이나 짐을 싣고 다니는 말. 그리고 금군(禁軍) 8·9명, 말들이 6·7마리가 이 고을에 이르러 백성들을 침략하여 많은 폐단을 낳는데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쉽게 죽임을 당하여 그대로 따르게 되니 이렇게 계속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매번 병정의 횟수나 병마의 인원과 마필 수를 공문으로 적어 공급하게 하면 그에 따라 지급하게 되어 자연히 갈등이 없어지고 민폐를 막을 수 있다.
또한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급장령성명병록성책(全羅道各邑所獲東徒數爻及將領姓名 錄成冊)에서 장성지역의 피해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장성의 동학도 신석만은 1895년 1월11일에 잡혀 우진영에 압송되어 심문하게 됐다.
한편 당시대를 살면서 비교적 상세하게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변만기의 [봉남일기(鳳南日記)]에서 동학농민혁명과 관계있는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1894년 10월 26일 오후에 동학도인 4·5명이 말을 타고 왔다. 그들은 군수전 100냥 표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노략질을 하려 하여 동학본부에 사람을 보내 물침령소(勿侵令書)를 얻어다가 피해를 면했다.
10월 28일 고창접주가 본부에 와서 점심 4상을 본촌에서 갖다 바쳤다. ....... 각리 면에서는 소위 쌀과 군수전을 자기 마음대로 내게 하거나 또는 개인감정으로 약탈하는 폐가 많아서 원망의 소리가 높다. 석양에 고창접 1,000여명이 황룡장터에 옮겨 진을 쳤다.
10월 29일 오후에 고창접주 신정옥은 손화중의 급한 기별을 받고 월평으로부터 돌아갔다고 한다. 많은 왜선(倭船)이 법성포에 정박한다고 하는데 일전에 왜병과 경병이 최시형의 소재지에 불을 질러 도인들이 많이 죽고 다쳤다한다. 아침에 들으니 홍대장이 경군과 왜병을 거느리고 나주에서 동학군과 접전하여 동학도인이 많이 다쳤다고 한다. ........ 인심의 소요는 갈수록 심해가고 있다.
11월 6일 본도의 도백 이도재가 선무사를 겸하여 나주목사에게 글을 보냈는데 경군 1,000여명이 이미 본도에 왔으니 나주 역시 군대를 발동하여 동학농민군을 소멸할 것이며 그러나 귀화자는 속죄(贖罪)할 것이라는 윤음이 왔다고 한다. 지금은 도순무사는 신정희요 우초토사는 나주목사 민종익으로 13고을의 군대를 거느리고 좌초토사는 순창군수 이성렬이며 소모사는 장성 원님 이병훈이라 한다.
11월 7일 우리 고을과 인근 고을에서 동학도인을 피하여 온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정을 나누면서 잠을 잤다. 나주목에서는 속인(俗人)의 명단을 작성했는데 귀화자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친 자에 대하여는 용서하여 준다고 한다. 수성군 4·5천명을 지휘하여 성루를 수축하고 루에 막을 치고 성벽에 포를 묻었다 한다.
11월 9일 광주에 갔더니 동학도인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버려 적적했다. 어제 나주의 오중문이 황룡장에서 자고 광주로 갔다고 한다.
11월 10일........ 밤에 사람을 급히 보내 당숙댁에 동학도인의 토색폐가 있다하여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가서 구해 주었다.
11월 13일 나주 수성군이 어제 나주에서 출진하여 북창근처의 접주집에 불을 질렀다. 새벽에 오중문을 쫓아 용진산 아래에서 대한포를 쏘아 뇌성같은 소리가 그치지 않았는데 오중문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거처를 알 수 없다 한다.
11월 14일 황룡장터를 돌아보았더니 인심이 뒤숭숭하다. 광주와 나주의 경계지역은 연기가 구름 같아서 물어 보았더니 집을 불태우는 연기라 한다. 그곳 남녀들은 산으로 올라가고 들로 도망을 가는데 꼭 냇물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본읍 동학도인들이 성을 지킬 뜻이 있어 모여서 잠깐 황룡장터를 거쳐 곧 부내로 들어갔다.
11월 15일 나주목사가 영장을 보내 수성군의 방화죄를 엄하게 다스리고 돌아왔다. 정읍 등내의 접주가 와서 우리 읍 북면에 자리잡아 그곳의 작폐가 있을 것 같다하여 우리 고을의 동학도인이 모두 부내의 도회소에서 밤 늦게까지 경비를 하여 부근 마을에서 밥상을 나르느라고 분주하였다.
11월 16일 원근의 마을에서 포 소리와 군대 움직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제 새벽에 이생원이 동학도인에게 화를 입고 마침내는 스스로 목을 졸라 죽었다 하니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이날 고창 칠암 도인과 우리 고을의 재암접 수백명이 모여 있다한다. 영신의 동학도인 수십명이 저녁밥을 먹은 후에 도착하여 다시 밥을 지어 바쳤는데 닭이 울 때 쯤되어 어떤 사람이 제각 비탈길에 올라가 나주 수성군이 방금 광주 비아산에 이르러 죽이겠다고 하자, 영신의 동학인들이 모두 가버렸다.
11월 17일 근읍의 동학도인들이 황룡장에 모였는데 만 여명이라 한다. 우리 마을에서 아침 저녁 400상을 바쳤다.
11월 18일 우리 면의 면임이 동학도소의 명령문을 가지고 경내에 통지하기를 집집마다 쌀 한 말, 콩 한 되, 짚신 2켤레씩 거두어 보내자 하였다. 본래의 동학도인 역시 대접의 명령을 감히 어기지 못하고 황룡본부에 갔다고 한다.
11월 19일 동학도인은 짚으로 어치(소의 추위를 막기 위해 짚을 엮어 만든 것)를 만들어 입고 또한 종이연을 만들어 각기 고춧가루를 연에 숨겨 뿌렸다한다. 영광 사창장(현재는 장성군 소속) 광주 아산장, 본 읍의 황룡장 세 곳에 모인자가 몇만 명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11월 21일 어떤 이가 고창에서 와서 말하기를 무수한 왜선이 법성포에 이미 정박해 상륙하였다 한다. 그곳 남녀들이 흩어져 피난민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사창장과 황룡장의 동학도인 역시 일제히 철거했다 한다.
11월 22일 고창 임천서가 기포하여 함평으로 갔다한다 장터를 돌아보니 장은 서지 않고 장사꾼이 드문 별 같고, 동학도인만 운집하여 모두 창을 가진 사람과 포수뿐이다. ........ 앞 가게에는 읍 사람들이 소를 잡았다.
11월 23일 식전에 동학도인 6·7명이 갑자기 사랑에 들이닥쳐 요기를 시켜보냈다. 전봉준이 4차 패전했다 한다.
11월 24일 저녁때 고부의 동학도인 300여명이 깃발 일곱 개를 세워 우리 마을에 들어와 음식을 제공하는데 감당할 수가 없었다. 고부사람들에게서 들어보니 전봉준이 여섯 번 패전했다고 하고, 일곱차례 패전했다고도 하는데 부하들은 거의 죽고 간신히 몸만 죽음을 면했다 한다.
11월 25일 동학도인이 나주에서 패망하여 분주하게 움직이니 근읍에 몇 만명인지 알 수 없고 마치 봇물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고창 신정옥이 이달 15일부터 황룡장에 도소를 설치하고 쌀을 억지로 거두어 들여 각 면·리 사람들의 원망소리가 높다.
11월 27일 그제 경군이 원평으로 왔다고 한다. 광주에서 온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손화중이 수만명을 이끌고 덕산에 진을 쳤다한다. 최경선과 이씨는 나주에서 혼이 빠져 다른 고을로 달아나서 본 고을의 남쪽 4개 읍에서 민폐를 끼치고 있다한다. 나주에서 삼덕이가 와서 말하기를 박산(박뫼)의 일촌은 남녀가 하나도 없이 전부 비어 있다고 한다.
11월 29일 태인에서 패전한 동학도인의 말에 의하면 27일 새벽에 경군과 왜군이 전주에서 와 조반 때 원평에 있던 동학도인과 접전하여 동학도인이 죽고 다친 사람이 수백명이요 살아남은 자가 수만명인데, 봇물처럼 흩어져 태인읍으로 갔는데, 그날 경군이 추격하여 접전하니 동학도인이 또 패하여 다친 사람이 무수하고 사방으로 도망하여 전봉준은 겨우 몸만 살아 났다 한다.경군은 불과 100명으로 지나는 고을마다 폐를 끼치지 않고 가마솥을 지고 자취하여 밥을 먹는다 한다. 전주 밖 송접주집을 불태우고, 원평도소를 불태우고 태인 동동에서 사람을 죽인 것 외에는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패전한 동학도인 수백명이 거의 과거에 본읍에서 살던 사람이요 경기와 호남의 전주인이 탄환을 맞아 싸메고 다니는 자가 수를 셀 수 없이 많은데 그들은 광주 덕산의 손화중 진중으로 갔다고 한다.
11월 30일 그저께 28일에 경군은 태인읍에서 식사를 끝내고 29일 정읍으로 행군했다고 한다. 부내 동산 손오위장 집에 갔는데 이방 손경숙과 호장 손윤홍 등이 때마침 왔기에 경군이 지연된 까닭에 대해서 몇마디 이야기 하고 나와서 들으니 어제 전봉중이 갈재를 넘어 입암산성으로 들어갔다가 이어서 왼쪽 골자기로 도주하였다 한다. 경군이 정읍의 등내촌을 불지르고 새재를 넘어 황룡강에 유숙하였고 후군은 천원역에 유숙했다 한다.
12월 1일 감사는 이도재로 연안인이요 군수는 이병훈으로 광주이씨이며 선봉장은 이규태인데 덕수이씨이다. 본리 동임이 이방의 사신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경군의 선진이 방금 읍으로 왔다고 하였다. 땔감과 짚신을 걷어 보냈는데 오후에 도착한 경군은 모두 1,000명에 가깝고 그 가운데는 왜인이 100명이라 한다. 이날밤 군량과 군전 말먹일 콩을 걷어 오라는 지령이 있어 밤 늦게까지 걷어보냈다.
12월 2일 본부의 관속과 본관 이병훈은 새해 인사차 이른 새벽에 전주로 갔다. 초토선봉 이규태가 군대를 이끌고 유식하면서 전령을 보내 효유했다. 부내의 접주집 3동을 초토소에서 군대를 풀어 각처의 죄인을 잡아 들였다. 본읍의 장교가 군수품의 준비차 나와서 본읍의 농우를 끌고 가려 하므로 좋은 말로 사정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날 밤 군량미와 콩을 보내라는 지령이 또다시 내려 즉시 보냈다.
12월 4일 경군과 왜군 100여명이 마을을 떠나 사창으로 갔다고 한다. 접주 3인을 붙들어 본부 시장에서 죽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손덕수라 한다. 경군 10여명이 신평김씨가에 들어가 소와 말을 끌고 갔으며, 돈과 재물을 뒤져 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내동에다 땅을 파고 막을 쳤는데 10여명은 충분히 숨을 수 있다고 한다.
12월 5일 경군과 왜군 수백명이 영광으로 가고 다만 선봉대장만 100명정도를 거느리고 유숙했다고 한다. 수일 전에는 나주 수성군이 광주 서창에 출진하였고, 광주 선봉 수성군이 후진하여 총을 쏘아 동학당은 흩어졌다한다. 스스로 기포했다는 접주들을 촌락을 뒤져 잡아갔다고 한다. 광주 수남접주 정지학이 남평관아에 들려 남평원님은 사경에 이르렀다 한다. 경군 한 사람이 본리에 들어와 짐끄는 소 한 마리를 끌어갔고 경군은 또한 각 접주집의 소를 뒤져다가 부중에 팔아 소 값이 지극히 헐값이라고 한다.
12월 7일 오후에 향교에 가는 길에 시가를 지나다가 경군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시장에서 죄인 세 사람을 불태워 죽였다 한다. 향교에 이르러 보니 향중의 선비들이 유생대회를 하는데 대청과 양사재에 가득 차 있고, ...... 관군의 식사와 왕의 군대를 올리고 동학도를 숙청하는 일을 의논했다.
12월 8일 북에서 선비 한 사람이 소 한 필, 쌀 두 섬을 대장에게 바쳤고, 경내의 사민은 모두 밥을 지어 바쳤다. 각 고을의 죄인은 이제 잡혔고, 전봉준은 순창 현지에서 잡혔다고 한다. 이날 밤 수성군이 영광댁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고 갔다. 김몽치가 잡혀갔다고 한다.
12월 9일 향교에서 소 한 필과 쌀 3섬을 선봉장에게 바쳤다고 한다. 고산리 기참봉은 그 문생들을 거느리고 군사들이 먹을 쌀과 소를 바치고 갔다고 한다. 향교 사람들이 모두 돌아갔고, 선봉장이 군대를 거느리고 나주에 갔다 한다.
벽사(장흥) 찰방이 어제 본부에 와서 말하기를 장흥 원님과 찰방이 동학도가 쏘는 총에 맞아 빨리 관군이 와주기를 청하므로 급히 떠나면서 분부하기를 수성장이 죄인 세 사람을 시장에서 태워 죽였는데, 그 중의 하나는 북일면 구해의 김선오로서 기선달 우제이 동생이 칼을 뽑아 목을 치고 배를 갈라서 쓸개를 싸가지고 갔다 한다. 석양에 집으로 돌아오니 수성군 2명이 갑자기 두암댁에 와 돈을 토색질해 갔다 한다.
12월 10일 금곡 한덕일과 김명달 공기노가 모두 현지에서 잡혀갔다고 한다.
12월 11일 통내의 김백명이 현지에서 잡혀갔다 한다.
12월 15일 마을에서 수탉이 한 마리도 없어 읍촌에서 수탉 한 마리를 빌려와 새벽과 저녁을 분간하기로 하고 일관문부를 주었다. ...... 왜대인이란 자가 일인을 거느리고 모든 공청과 동헌을 주장하고 나주 목사는 노반청(奴斑聽)에 물러나 있었다. 일본인이 4대문을 지키고 있었고, 수성군은 울분만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12월 15일 어제 한덕일과 김명달을 시장에서 총을 쏘아 죽였다 한다.
12월 22일 시장을 지나는데 원님이 수성군 수백명을 거느리고 위엄을 떨치면서 죄인 6명(말무정 공치선 형제, 오현 전접주, 그 밖에 3인은 누군지 성명을 모르겠다.) 중 김.공 두 사람은 참수하고 네 사람은 총을 쏘아 죽여 불태웠다.
12월 23일 수일전부터 고을의 전령이 내려와 각 면임·서원·하유사·이동임에게 병기를 수집하여 관가에 가져 올 것이며, 소위 접주 역시 각자의 병기를 빠짐없이 바치라 했다 한다.
12월 27일 본 고을 원님이 경군과 수성군 그리고 육방관속을 거느리고 사장에서 무위를 갖추었는데 군인은 칼과 총을 소지하였고, 노령(奴令)은 깃대를 잡거나 쇠북을 울려 자못 엄숙했다. 병정을 좌우로 나누었는데 왼쪽 앞에는 수성군이고 뒤에는 삼반을 점고하여 관속은 땅에 엎드렸는데 3반 가운데 죄인을 골라내어 법을 집행하였다. 강계중은 목베어 효수하고 강서중, 손경숙, 정별장의 조카, 손학모, 공치선 등 16인을 총으로 쏘아 죽여 모두 17인을 법대로 처리했다.
1895년 1월 4일 지난 초하루 일인 30여명이 고개에서 동학군을 붙들어와서 본부에서 자고 나주로 떠났다고 한다. 지난 초이튿날에는 경군 100여명이 동학군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홍낙관과 수성장 박문달과 함평원님은 문을 열고 적을 맞은 죄로 이들을 데리고 나주로부터 올라와 본 읍에서 자고 서울로 떠났다고 한다.
1월 5일 매 8호에 장정을 한 사람씩 차출하여 성을 지키게 하겠다는 면임의 전령이 왔다.
1월 13일 본부의 5거리 병정과 수성군은 밤까지 지키기를 세전부터 지금까지 하룻밤도 쉬지 않았다고 한다.
1월 14일 선봉장 이규태가 경군을 이끌고 나주로부터 올라 왔는데 일인이 전진으로 본부에 왔다고 오후에 곧 서울로 갔다. 오늘밤 마을에서 일곱집이 뗄감을 향청에 갔다 주었다.
1월 17일 길에는 일인과 경군이 광주로부터 인접된 담양 쑥다리 30리에는 만여명이 끊이지 않고 위로 올라 갔다고 한다. 본 읍에 잡혀 있는 죄수들이 많이 풀려났다 한다.
1월 18일 초토선봉 이규태가 일인과 경군 1,000여명을 거느리고 오전에 본부에 왔는데 각 동리에서 짐을 지려고 다투는데 줄을 지어 있거나 빈 지게로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군인의 짐도 지면 경군으로부터 한 사람에게 5전씩을 받는다고 한다. 호남일성이 갑오년 봄부터 겨울을 지날 때까지 동학당들의 소동에 놀래고 겁을 내어 가뭄에 땅은 거칠어지고 밭갈고 씨뿌리지 못하여 제 시기를 잃고 모두 굶주림 때문에 이제 위로부터 은총이 내린 것이다. 본 읍의 지난해 미수금도 따라 정한 각 면유원(面儒員)에 걷우어 들이고 서리의 손을 가까이 못하게 하고 근년 도결을 걷는 것도 읍에는 향원, 면에는 면원이 걷되 역시 그 사이는 이서배가 간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월 25일 그제부터 본 읍 수성군 300명을 채우려고 점검을 하는데 오늘까지 3일동안 일을 했다고 한다.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정에 동학에 가담하였는데 살려달라는 장성 북일면 오산부락의 변창연과 이문현 등의 호소문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장성부에 내린 공문에 정정국, 국오묵, 정석원, 이영진, 이달용, 백만조, 정찬문, 박준명, 정성삼, 김일순 등 10명을 부에서 염격하게 가두어 취조를 한 후 제반조치를 전후의 지시나 명령에 따라 처리하라는 내용도 보인다.
그리고 장성 북이면 금량리에서 백성들이 저녁에 진정했는데 어떤 동학도인 수백명이 마을에 들어와 밥과 돈을 빼앗아 가지고 도망갔는데 그들의 말 7필을 버리고 갔으니 처리해 달라고 했다. 그밖에 동학의 소란시 어쩔 수 없이 가담했거나 불안했는데 이제 경군이 와서 평안해 졌으니, 지난날을 모두 용서해 달라는 수많은 진정서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장성읍 월평의 문초계댁 종 춘광이 자기주인이 주관하는 명례궁전의 토지세 조세 32석을 사음집에 쌓아 놓았는데, 병정들이 동학의 곡물로 오인하여 본 읍으로 가져갔으니 돌려달라고 진정하기도 했다.

6. 동학농민혁명의 영향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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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월부터 근 1년 동안 거의 전국을 휩쓸면서 수백만명이 참여했고 수십만의 사망자를 냈으며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냈다. 장성을 비롯한 호남의 농민들은 반봉건의 민주화와 반외세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어섰으며 집강소를 설치해 농민세상을 만들기도 했으나 위정자들과 그들이 불러들인 일본세력에 의해 좌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의 영향을 매우 컸으니 안으로는 갑오경장을 통해 수천년간 지속되어 온 전근대 사회가 붕괴되었고 밖으로는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청군을 불러들였고 이에 따라 일본군이 진입하여 조선의 국권을 좌우하는 한편,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동양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계속적인 침략을 자행하여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까지 물리치고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했다. 그러므로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일본의 침략성을 알게 된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항쟁을 치열하게 전개했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이 호남지방인 것이다.

또한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컸으니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반봉건의 민주화와 반외세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어선 것이며 이것은 후일 민족운동과 민주운동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농민혁명은 역사의 발전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했으며 이를 앞장서서 추진한 전라도의 농민들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주도하면서 역사발전에 견인차역을 담당했다. 근대사의 서막을 연 동학농민혁명에서 앞장 선 호남인들은 한말의 의병항쟁이나 일제시대의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이후의 반분단·반독재운동을 주도하면서 역사발전을 주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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