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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미사변과 장성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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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에 도취하여 정신이 없을 때 러시아 등의 3국간섭을 당하여 러시아 등에게 굴복을 강요받자 미국·영국에게 도움을 청해보았으나 일본의 성장에 불안을 느낀 영국과 미국까지도 일본의 요청을 외면해 버렸다. 일본은 어쩔 수 없어 러시아 등의 3국간섭에 굴복하게 되자 그 위상이 크게 흔들렸으며 조선에의 입지가 심히 동요되었다. 이에 눈치빠른 민비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와 접근하기 시작했으며 웨베르는 미국공사 알렌을 동원하여 왕과 민비에게 접근하여 친러배일정책을 세우게 했다.

평양승전의 여세를 몰아 우리나라에 부임한 자칭 거물정객 이노우(井上馨) 공사는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500만원 차관이란 부도수표까지 발행하면서 왕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차관약속이 부도로 밝혀지자 본국으로 돌아간 이노우에 공사의 후임으로 군인출신이며 이노우에 공사의 동향인 미우라(三浦)공사가 부임했다.미우라공사는 자칭 참선승으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듯 공관에 박혀 있어 민비는 그를 가리켜 금강산의 한 승려라고 놀려댔지만 공사는 왕비를 시해하기 위한 음모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틈을 이용해 민비는 각료를 친미파나 민씨척족으로 바꾸고 일본인이 육성했던 훈련대를 해산하려 했다. 그리하여 미우라공사는 해산당한 훈련대 병사의 반란인양 꾸며서 일본인 낭인(浪人)과 일본인 군·경을 동원하여 1895년 8월 20일 미명을 기해 궁중으로 침투하였다.

일본인들은 궁중에서 난동을 부리면서 왕을 위협하고 왕세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민비를 찾아 죽여서 석유를 뿌려 불태워 버렸으니 이것을 을미사변이라 한다. 이렇게 야수와 같은 만행을 저지른 일본공사는 왕을 위협하여 친일내각을 구성하여 단발령을 내리고 양력을 시행하는 등 을미개혁을 추진했다.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미우라 공사는 뒤늦게 달려온 웨베르 러시아 공사와 미국 대리공사 알렌의 추궁을 받고 궁중의 시위를 맡았던 시위대장 다이장군의 증언으로 만행이 탄로났다. 러시아와 미국의 공사들은 개경외교사절회의를 열어 일본인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규탄하고 친일군대인 훈련대를 해산한 후 시위대에게 궁중의 시위를 전담시켰다.

국제적 비난에 직면한 일본은 미우라 공사 일행을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하여 근신하는 척 했다. 러시아공사와 미국공사는 왕을 보호하고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빼돌리려는 춘생문사건을 일으켰다.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 계획을 추진했던 구미파 대신들은 몸을 피하고 다시 세력을 얻은 개화파 대신들은 을미개혁을 추진했으며 일본은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된 미우라 공사 일행을 석방했다. 일본인의 민비시해와 단발령 강요에 반발한 의병봉기가 시작되었으니 고종과 왕세자가 개화파 대신들에게 머리를 짜르고 거리마다 남자들의 상투를 강제로 삭발해 국민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민비시해와 폐후 조칙이 발표되자 서울에서는 창의소고시의 벽보가 나붙어 모든 신민과 8도의 백성들은 하늘을 보고 통곡하여 만대 후에도 잊지 못할 이 원수를 두고 두고 잊을 수 없다고 적혀 있는 등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민심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을미년의 마지막 날인 11월 15일(음)에 내려진 단발령은 대신들의 반발은 물론이고 전국을 완전히 분노의 도가니로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분노는 보수적인 유생들을 중심으로 선창되어 생명을 걸고 국모를 시해한 원수와 일본에 붙어 단발을 강요하는 친일 각료들을 처단하자고 일어섰다. 각 지방의 의병은 1896년 1월 20일 경부터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앞장 선 것은 충청도 홍주(홍성)지방에서 전 관료였던 김복한, 이설과, 안창식, 안병찬 부자 등이었다.의병항쟁은 충청도를 선두로 강원·경상·경기·전남 등지로 번져 정부에서는 각지에 진위대를 설치해 이를 대비하게 했으나 그것으로 부족하여 서울의 친위대까지 파견되어 그 진압에 부심했다. 그런데 전남 지방의 의병봉기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늦었으니 그 이유는 동학농민혁명의 상처가 채 가시기 전이었고 보수적인 유생층이나 동학농민군을 집압시켰던 향리들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농민대중의 참여가 저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와 민족을 구출했던 호남인들이 국모시해와 단발령 강요를 좌시하지 않고 의병봉기에 일어섰으니 그 중심은 위정척사운동을 처음으로 주장했던 노사 기정진의 제자들이었다. 노사의 친손자요 제자인 송사 기우만과 노사의 족질인 성재 기삼연, 노사의 제자인 녹천 고광순 등이 전남 의병의 주동자들이었다.의병장 송사 기우만은 장성인으로 을미사변의 국모시해와 단발령이 강요되자 여러 고을에 통문을 보냈다. 그는 국모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는데 있을 수 없는 단발령까지 강요하니 이 이상 더 왜족의 폭거와 군왕을 협박 강제하는 무리들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격동하였으며 한편 상소하여 위에 그 뜻을 말하려 하기도 했다.그런데 건양 원년(1896) 1월 20일 경부터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기세를 떨쳤고 2 월에 들어서는 특히 제천의 의병대장인 유인석의 격문이 이곳에도 전달되어 의거의 기운이 무르익어 갔다. 이때 송사 기우만은 인근 각 고을에 격문을 돌리고 궐기를 호소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존께서는 피난을 하였으니 시일을 더디할 수 없으며 역당이 망명하였다. 하지만 그 뿌리를 아직 제거하지 못하였다. 어안의 한 방울 눈물자국은 천만 신하가 간뇌도지(肝腦塗地)하여도 속죄할 수 없으며 임금의 두어 발 걸음 외출은 억조창생이 분골쇄신하여도 따를 수 없는 일이다.이 격문에서 아관파천해 있는 임금을 궁중으로 모셔오고 친일파들을 토벌하여 복수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격문을 받은 각지에서는 호응하는 기미가 보이자 장성 향교에 의병 본부를 정하고 의사들을 모아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의논하니 그 기세가 충천했다.그런데 기우만의병에 가장 먼저 참여한 사람은 성재 기삼연으로 그는 노사의 족질이며 문하이면서 의리가 강하고 우국충정이 넘친 장성출신인데 3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와서 스스로 선봉장을 맡았다. 그리고 담양출신이며 노사의 문인이고 임진왜란때 의병장이였던 제봉 고경명의 후손인 고광순이 참여했고 노사의 문인인 담양인 이학승, 그리고 장성인들인 기주인 양상태 등이었다. 이들은 전열을 정비한 후 먼저 나주로 달려갔다. 왜냐하면 나주에서는 향리 출신인 정석진 등이 의병을 일으켜 친일관료였던 참서관(부지사) 안종수를 죽이고 관찰사를 축출하여 인심이 격앙되었으며 의병들의 불안심리 또한 높았기 때문이였다.

나주의 소식을 들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등의 장성의병은 그곳으로 달려가서 나주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제단을 마련하여 의병활동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또한 장성의병과 나주의병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해 진주성에서 순국한 김천일의 사당을 참배하고 금성산에 제사를 올려 신의 도움을 빌고 민심을 안정시켰다.그런데 나주의 의병들은 기우만 대장에게 나주에 의병본부를 두자고 건의하였다. 그들은 나주가 전통적으로 전남의 중심지요 행정과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이곳에 의병본부를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우만대장은 광주가 호남지역의 중간지역이고 처음부터 광주를 본부로 선언한 곳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설득하여 광주에 본부를 정했다.

기우만의병대는 광주 향교에 창의소의 중앙본부를 두고 호남의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2월 30일을 기하여 일제히 광주에 모이도록 하였다. 이때 서울의 친위대 대장인 이겸제는 친위대를 이끌고 진주의병을 해산시키고 전라도로 들어와서 의병에 가담한 해남군수 정석진을 잡아 죽이고 담양군수 민종렬을 잡아 가두어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또한 남로선유사로 지방을 순회하면서 의병의 해산을 설득하고 다니던 신기선이 전주에 도착하여 지방관원을 보내여 의병해산을 선유했다. 그는 또한 기우만 대장에게 은근히 말하기를 왕의 뜻이 처음에는 의병봉기를 기다렸지만 지금은 국가의 질서유지가 필요하니 군대를 해산하여 왕에게 충성하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선유사 신기선은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유림간에도 신망이 두터운 인물로 내부·법부·학부 대신을 역임한 사람으로 기우만 대장은 이러한 신기선의 선유를 받게 되니 호남의병진은 동요하기 시작했다.이에 대장 기우만은 여러 참모들을 모아놓고 의논하다가 목메인 소리로 지금 세력을 잡은 무리들의 마음이 음험하고 불측하니 정말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적을 토벌한다는 것이 도리어 우리 임금의 해를 재촉하는 길이 되기에 알맞은 일인즉 자수하여 우리들의 의리나 밝혀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통곡하며 해산의 명을 내리고 말았다. 이때 성재 기삼연 선봉대장은 이러한 해산논의에 대하여 분노하며 "선비들과는 일을 같이 할 수 없다. 장수가 밖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령이라도 받지 않는 일이 있는 것인데 더구나 임금을 위협하여 강제하는 것이요 우리 임금의 본심에서가 아님에랴, 이 군사를 한 번 해산하면 우리들이 다 생포를 당한다."고 반대했다.

이렇게 하여 장성의병이 주축이 된 호남의병은 평화로운 해산을 하였지만 송사 기우만 대장은 체포되어 교수형을 언도 받았다가 감등되어 유배당했고, 기삼연은 체포되었다가 탈옥하여 은신했다가 후기 호남의병의 맹주가 되었으며 담양의 고광순도 계속적인 의병활동을 했다.국모시해의 원수와 부모가 주신 머리털을 자른다는 불충과 불효에 대한 응징의 제1차 의병활동 중에서 호남 의병이 차지하는 의미는 자못 큰 것이다. 그것이 이 고장 장성에서 시작하여 나주를 거쳐 광주향교에 거점을 두어 전남지역의 의병들을 소집하여 전남의 13개 고을을 휩쓸었으며 참서관과 군수 1명이 살해되었고 관찰사는 도망쳤다. 호남의병의 중심은 장성의병이었으니 대장 기우만 뿐만 아니라 선봉장 기삼연의 의병이 핵심요원이었고 의병을 인솔했던 지도급이 모두 노사 기정진의 제자들이었다.

이러한 을미의병은 그들이 내세웠던 것을 모두 달성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당시의 조선정국에 안팎으로 큰 파문을 남겼다.첫째, 의병의 위세가 크게 떨치자 23부에 50명씩 밖에 되지 않는 진위대의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의병을 진압할 수 없게 되어 자연히 중앙의 왕실경비를 담당했던 친위대의 주력이 지방에 파견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왕실경비가 소홀한 틈을 이용하여 고종의 러시라 공사관 탈출(아관파천 : 俄館播遷)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아관파천 후 단발령이 강요되지 않아 단발령 반대의 뜻이 관철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갑오경장의 개혁들이나 을미개혁들이 모두 아관파천 후 친일내각이 축출되어 취소되거나 과거로 환원되었다는 면이 강하지만 의병봉기의 직접적인 발단이 단발령 강요였으므로 그것이 중단되었다는 것은 의병봉기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셋째, 많은 친일 관료들이 피해를 입었고, 일본인들이 살해되어 국민의 울분을 조금이라도 씻을 수 있었으며 친일 분자들에 대한 응징을 통해서 민족정기를 과시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의병 봉기로 인해 관찰사의 피살이 3건, 관찰사의 체포, 모욕이 4건, 참서관의 피살이 2건, 지방군수의 피살이 11건, 일본인의 피살이 43건이었다. 특히 일본인의 피살 중에는 1896년 3월 9일에 황해도 출신 김구(김창석)가 대동강 하류 시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우에다(土田讓高)를 살해한 사건이 유명하다. 그리고 나주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참서관 안종수가 의병에 의해서 살해되었는데 그는 일찍부터 개화정책에 앞장섰고 단발령 강요에서도 솔선하다가 피살된 것 같다.

2. 을사조약과 애국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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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으로 왕비를 잃은 고종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웨벨 공사와 친구미파가 주도한 고종 탈출극인 춘생문사건이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소심증이 심한 고종의 불안은 날고 가중되어 드디어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왕이 궁녀의 교자에 몸을 싣고 탈출에 성공하여 아관파천이 이루어졌다.그러나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파천은 불안한 고종의 심신은 안정시킬 수 있었지만, 독립국의 체모가 크게 손상되었으며,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나라의 이권침탈 등으로 각계 각층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친러파인 김홍륙, 이범진, 이완용, 이윤용 등에게 좌우된 고종은 김병시를 비롯한 원로대신들이나 미국에서 돌아와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자주 독립과 민권신장을 위해 활동하는 서재필 등의 환궁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을미사변을 자행에 국제적으로 비판을 받아 온 일본은 국왕의 아관파천으로 기습을 당하였지만, 러시아와 끈질긴 협상을 통해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켰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1900년에 청에서 일어난 의화단 사건에 많은 병력을 파견해 기세를 떨치면서 구미 열강들의 인정을 받으려 노력했다. 이때 일본에 힘을 실어준 것은 영국이었으니 그것은 러시아의 남하에 가장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으로 일본과 공동전선을 구축하여 러시아에 대비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902년에 제1차 영일동맹을 체결하니 일본은 용기가 백배하여 러시아에 정면으로 대항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드디어 1903년에 조선의 용암포를 조차한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일본은 영국, 미국의 뒷받침을 받아 러의 용암포점령을 무효화시키는 열국회의를 개최하여 러시아에 강경대응 하였으니 이것이 다음해의 러·일 전쟁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일본은 1904년 2월 4일 극비리에 어전회의를 열어 러시아에 대해서 전쟁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2월 6일에는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일본의 기득권과 정당한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유행동을 취한다는 최후통첩을 러시아에 보냈다.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2월 8일에 요동반도의 여순입구에서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고, 다음날인 9일 미명에 인천에 상륙하여 그날로 서울에 진군했으며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대 2척을 격침시켰다. 그리고 2월 10일에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그들의 군대가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하야시(林權助)공사는 고종을 알현하고 개전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한·일간의 협력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조선의 조정은 1904년 1월 21일에 중국의 산동성 지브(芝盃)에서 전세계에 향하여 한국의 중립을 선언했다. 이 중립선언은 이용익과 현상건 등이 비밀리에 추진하여 전격적으로 중국의 현지에서 발표했는데 21일부터 29일 사이에 영국, 독일, 이탈리아가 각각 본국을 대표하여 이 성명을 수락하게 되자 일본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중립선언은 일본군의 서울진격으로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하고 1월 23일에 반일의 핵심인물인 이용익을 일본으로 압송한 채 일본의 강요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던 것이다.

한일의정서의 주요내용은 조선의 내정 간섭, 외교권 제약, 군사요충지 점령 등인데, 이 의정서로 침략의 제1보를 내딛은 일본은 이어서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그들이 파견한 고문들이 국정을 좌우하게 했다. 이렇게 한국침략의 2단계까지 끝낸 일본은 러·일 전쟁의 추세를 보아가면서 조선을 완전히 그들의 손아귀에 넣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즉 안으로는 일본침략에 동조하는 괴뢰세력을 형성하는 것이고 밖으로는 그들의 우방인 영국과 미국의 협조를 얻는 일이었다. 일본의 괴뢰로 활약한 대표적인 사람이 송병준과 이용구였는데 그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가면서 일제의 침략에 전위적인 역할을 해 친일각료인 이지용이나 이완용과 경쟁을 벌였다.

송병준은 일찍부터 일본을 유랑했던 사람으로 일본어 통역이 되어 일본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는데 그는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다가 일진회로 이름을 고쳤다. 송병준은 정부의 탄압에 시달리다가 친일파로 전락한 이용구에게 접근하여 그의 조직인 진보회를 일진회에 통합하게 하여 손을 잡고 친일행각을 벌였다. 송병준과 이용구는 예하 조직들을 동원하여 러·일 전쟁에서는 일본군에게 협조하게 했고 머리를 깎아 일본에 아부하는 결의까지 보였다.

이들은 을사조약에 앞서 매국(賣國)적인 여론의 조성에 앞장섰으며 일본을 등에 업고 온갖 비행을 서슴치 않더니 드디어는 을사조약의 체결에 전위적적인 역할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들은 한국민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성명을 내고 노골적으로 매국전선에 나섰던 것이다. 한편 일본은 1905년 7월 27일에 미국과 가즈라·태프트 협약을 맺어 미국이 필리핀을 경영하는 대신 일본은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기로 양해를 받았고 영국과는 1905년 8월 12일에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조선독점을 양해 받았다. 그리고 러·일전쟁의 승리를 몰아 친일적인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주선으로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독점적 지배를 확인했다. 1905년 9월 5일에 조인된 포츠머스조약은 15조의 본 조약과 2개조의 추가 약관으로 되었는데 이것으로 일본은 요동반도의 조차권과 사할린 남부를 할양 받았으며 조선에서의 우월권을 확보함으로써 독점적으로 조선을 지배하게 되었다.일제는 미국·영국의 양해와 러시아의 우월권 인정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조선을 요리할 수 있게 되자 노골적으로 한국병합계획을 차례로 추진하게 되었다. 즉 4월 8일 각의에서 한국의 보호화를 결정하고 10일에는 그들 천왕의 결재까지 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에 대한 시설은 기정의 방침과 계획에 따라 실권을 장악할 견지에서 점차 제2보를 나아가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고 한국의 대외 관계는 우리의 장악에 들어가게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한국정부와 아래와 같은 취지로 보호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한다.

제1. 한국의 대외관계는 오로지 일본이 이를 담당하고 재외 한국신민은 일본의 보호에 돌아오게 할 것.
제2. 한국은 직접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지 못하게 할 것.
제3. 한국과 다른 나라들과의 조약은 일본이 그 책임을 맡을 것.
제4. 일본은 한국에 주차관(駐箚官)을 두어 한국시설의 감독 및 일본 신민의 보호를 맡게 할 것.
또한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는 귀국하여 수상 가즈라와 함께 보호조약체결에 관한 협의를 끝낸 뒤 다시 10월 27에는 일본 각의에서 보호조약안을 확정했다. 이 조약안에는 조약체결의 방법, 순서 등을 구체적으로 정하였는데 그 8항에는 한국정부가 동의하지 않을 때는 보호권의 확립을 일방적으로 통고한다는 강도적인 조치까지 강구하고 있었음을 다음에서 볼 수 있다.

8. 착수할 때 도저히 한국정부의 동의를 얻을 가능성이 없을 경우에는 최후의 수단으로 한국에 대해서 보호권이 확립된 뜻을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열국(列國)에 대해서는 일본정부가 이 조치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아울러 한국과 열국과의 조약을 유지하여 한국에서의 열국의 상공업상의 이익은 이를 손상하지 않을 뜻을 선언할 것.이러한 철저한 대책을 세워놓고 일본은 한국의 보호국화를 추진할 시기를 11월 초순으로 정해놓고 하야시 공사의 지원을 위해 칙사를 파견키로 했으며 주한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에게 무력동원을 명령하고 경성 주둔군의 증파를 서둘렀다.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하야시 공사는 1905년 11월 2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일진회를 시켜 보호조약 찬성의 선언을 발표하게 하여 민의를 가장하고 칙사인 이또오(伊藤)는 이완용 등 내외귀빈 300여명의 환영을 받으면서 11월 9일에 손탁호텔에 여장을 풀었다.을사조약체결의 사령탑인 이또오는 이튿날인 10일에 고종을 알현하고 일황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1차적으로 위협을 가했고 15일에는 좌우를 물리치고 단독으로 협박과 공갈을 자행하면서 조약체결을 강요했으나 고종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이또오 칙사는 황제가 이 안건을 대신들과 상의하라고 분부하셨다 하고 선언한 다음 회의에서 대신 각자의 찬성과 반대를 물었다. 이에 참석한 대신은 참정 이하 8명인데 참정 대신 한규설과 탁지부 대신 민영기는 극력 반대하였고 법부대신 이하영은 온건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외부대신 박제순은 자기는 반대하나 어명이 있으면 거행하겠다고 했고 탁부대신 이완용이 자구의 수정을 가하여 찬성한다고 하자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은 이완용과 같은 의견이라 했다.사태가 이렇게 되자 이또오는 참정대신 한규설에게 다수결에 의해서 5 : 2로 가결되었으니 황제에게 아뢰라 하고 고종의 윤허도 받지 않을 채 자기들이 외부에 가서 옥새를 강탈하여 박제순에게 주니 박제순은 옥새를 들고 떨고 있는데 이또오가 박제순의 손을 잡아 날인시켰다. 이때가 1905년 11월 18일 새벽 2시였으며 이렇게 하여 한국은 외교권 마저 빼앗기고 일본인 통감에게 외교업무를 맡기게 되었다.

일제의 악랄한 침략정책에 희생의 제물이 된 한국은 수천년의 역사가 단절되고 수천만의 백성들이 노예가 되는 형편이 되었으니 을사조약 체결에 반항하는 각계 각층의 애국활동이 전개되어 민족정기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러한 애국운동의 대강을 보면 상소에 의한 활동, 순국항쟁, 언론에 의한 반항운동, 의병항쟁, 밀사파견을 통한 을사조약의 무효화 운동, 매국노의 암살활동, 그리고 국채보상을 위한 거국적인 모금운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애국항쟁 중에서 특히 이 고장 장성과 관계있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의병의 항거와 매국노의 암살활동 등을 들수 있다.

먼저 장성을 포함한 호남지방의 의병봉기는 면암 최익현과 낙안군수와 태인군수를 역임한 임병찬의 합세로부터 시작되었다. 최익현은 을사조약 후 상소를 올려 오적을 토벌하자고 역설했고 한 몸을 바쳐 국권을 회복하자는 포고문을 8도사민(八道士民)에게 보내기도 했다. 최익현은 화서 이항로의 제자로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으며 대원군을 탄핵하여 하야시킨 당대의 가장 명망있는 유학자였지만 그와 함께 의병을 전개할 마땅한 장소와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구국의 뜻을 품고 있으면서 재력도 있던 전 군수 임병찬은 의병봉기를 계획하면서 일찍이 전기의병을 주도했던 장성의 기우만에게 연락을 하면서 뜻을 모아가고 있었다. 임병찬은 면암 최익현이 의병봉기의 뜻이 있음을 알고 뜻을 합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 최익현은 일찍이 임피에서 강회를 연 일도 있고 많은 제자들이 호남에 있었으며 위정척사파의 거두인 노사 기정진의 제자들이 포진한 호남지방을 봉기장소로 적합하게 생각했다. 그는 뜻을 정하고 호남으로 내려와 곡성에서 장성의 기우만 등 호남유생들과 대책을 논의한 후 1906년 윤 4월 13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열고 의병봉기를 선언했다.

최익현과 임병찬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호남의병은 전국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즉시 임금과 전국에 의병봉기를 알리고 행동에 들어갔다. 최익현, 임병찬의 호남의병은 정읍을 점령하고 순창, 곡성을 점령한 후 전남동부의 각 고을에 글을 보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어서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장성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오니 그 수가 900여명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전주, 남원 및 광주의 진위대들이 압박하여 들어오자 최익현 등은 동포끼리 싸울 수 없다고 의병을 해산하고 최익현, 임병찬, 최승희 등 13명은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일체의 식음을 폐하여 순국해 그 시체가 귀환하는 길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호남의병에 대한 전국의 관심을 드높였다. 최익현의 호남의병에 끝까지 참여하여 대마도까지 유배되었던 사람으로 최승희는 장성인으로 대마도에서 귀국해 울분으로 날을 보내다가 뒤에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하여 활약했다.

한편 전기 의병 때 호남의병을 거느렸던 장성 출신 송사 기우만은 을사조약이 있은 직후부터 역적의 무리를 베고 망국조약을 폐기하는 일을 벌일 것을 의논했다. 그는 상소투쟁을 전개했고 유림 등의 회합궐기를 계획하기도 하였지만 일본군이나 그들의 앞잡이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1906년 봄부터 이항선 등과 같이 최익현, 임병찬 등과 연락해 가면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할 계획을 의논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송사 기우만은 광양의 백낙구와 의병봉기를 공모한 혐의로 구속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국모를 시해한 적을 토벌하지 않고는 장례를 치를 수 없으며 장례를 않고서는 그 복(服)을 벗을 수 없다고 하면서 10년이 지나도록 백립(白笠)을 쓰고 다녔다. 기우만은 "또한 붓을 들어 손에는 촌철(寸鐵)이 없지만 가슴 속에는 항상 1만 군사를 간직했다. 강물 소리를 들으면서도 갑옷을 떨치고 동쪽으로 나가 정벌할 것을 생각하고 산의 나무를 볼 때마다 의병이 되어 오랑캐를 쫓아 주었으면 하였다. 늙고 병든 몸이 가족을 이끌고 차일산(遮日山) 속으로 들어가서 죽는 날만을 기다렸는데 문득 백낙구가 토역복수(討逆復 )를 계획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대의를 천하에 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낯은 모르지만 마음으로 서로 통했다. 이제 내가 시킨 것이라고 하여 불러내어 집안에서 일 없이 누워 죽을 것을 면하게 하니 정말 은혜다..."라고 써 주어서 그의 항복하지 않는 뜻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면암 최익현과 임병찬의 호남의병에 호응한 의병으로 담양의 고광순, 고제량 등의 의병과 장성의 성재 기삼연 의병을 들 수 있다. 기삼연은 을사조약의 소식이 전해지자 이러고도 구차히 살기만을 생각할 수 있느냐고 분개하면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일본군경의 감시가 심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후 1907년 가을에야 장성의 수연산에서 이철형, 김봉수 등과 함께 호남창의회맹소 의병을 일으켜 후기 호남의병의 총수가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 장에서 자세히 서술하겠다.

다음으로 이 고장 장성출신으로 오적 암살활동을 전개한 기산도가 있다. 그는 의병장 고광순의 사위로 기독학교 교사를 하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 원흉의 하나인 이근택을 암살하려 했다. 기산도는 성재 기삼연의 종손이기도 했는데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5적을 암살하기 위해 1905년 11월 18일에 결사대 동지인 박종섭, 박경하, 안한수, 이종대 등과 권총 3자루와 예리한 단도 4자루를 준비하여 거사하려다가 사전에 동지가 검거되어 피신했다.

그후 1906년 2월 16일 하오 7시경 퇴궐한 이근택이 그의 첩집에서 방문객과 이야기를 끝내고 밤 1시경에 첩과 잠자리에 들어갔다. 이때 동지 등 3인이 뛰어들어 이근택을 찔렀는데 첩이 촛불을 꺼버려 적중되지 않아 죽이지 못하고 중상만 입혔다. 기산도는 뒤에 체포되었고 동지였던 전 경무사 구완희와 경계관 이세진은 도망쳤는데 기산도는 모진 형벌을 받고 나온 후 불편한 몸으로 유랑하다가 고흥 녹동에서 서거했는데 지금의 양자인 기노달에 의해서 고흥군 도화면에 묘비가 건립되었다. 기산도의 암살활동과 달리 강진출신인 오기호, 낙안출신인 나철, 구례거주인 이기 등이 호남출신인사로 자신회를 조직하여 5적을 분담암살하려는 활동도 있었다.

3. 군대해산 이후의 장성인의 애국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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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1905년의 을사조약이 부당하게 강요된 조약이기 때문에 그것의 무효를 주장하려고 1907년 6월에 화란의 수도인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다. 그런데 일제침략자와 그에 동조하는 미국과 영국의 방해로 그 목적은 실천되지 못했으나 일본의 악랄한 침략성을 세계에 호소하여 그들을 국제적으로 망신시켰다. 이에 분격한 일본의 통감 이또오는 한국이 을사조약을 위반했다 하여 이것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강요하여 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일본은 7월 20일에 반일의 황제 고종을 퇴위시키고 무능한 순종을 즉위시켰으며 7월 24일에 정미 7조약(한일신협약)을 체결하여 통감이 정무일체를 장악했고 비밀각서를 교환하여 한국군대를 해산키로 했다.

1907년 8월 일본침략자들은 그들의 무력통합에 장애가 되는 한국군을 해산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으나 시위대 제1대대장 박성환의 자결을 신호로 한국군의 무력저항에 직면하여 치열한 시가전이 전개되었으며 이 소식에 접한 지방의 진위대들도 강화, 원주 등지에서 저항전을 전개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은 철저한 탄압을 가해 궁중을 호위할 837명의 군대만을 남겨두고 3,441명의 군대를 해산시켰는데 해산당한 한국군은 일본이 바라는 대로 귀농하여 양같이 순한 농민이 된 것이 아니라 거의 의병대열에 참여했다.해산군인들은 의병봉기의 선봉이 되거나 의병의 주축이 되어 치열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으니 [독립운동사]에서는 군대해산 이후의 의병운동의 변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첫째, 반일항전의 범위의 확대를 들 수 있으니 군대해산 전에는 6도 58군에 그쳤던 의병봉기가 전국 각도의 각군이나 만주의 간도 및 노령의 연해주까지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의병항쟁에 있어서 전술의 향상과 무기의 확충을 들 수 있다.
셋째, 의병대열의 변화와 그 대열 편성의 변화를 들 수 있다.
넷째, 의병운동의 성격이 변화되었으니 충군애국(忠君愛國)이란 이념도 있지만 대중성을 띤 민족적 항쟁으로 변모했다. 즉 납세거부, 수탈거부, 악질부호 응징, 친일파 숙청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광범위하고 보다 조직적이며 본격적인 의병활동인 3차 의병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던 것은 연합의병의 서울탈환작전이었다.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여 전라창의대장 문태수에 인솔된 전라의병을 포함한 13도 의병연합부대 약 1만명은 군인출신이 3천명이나 되어 상당한 기대를 안고 양주에 집결했다. 그런데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해 치상을 위해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떠나버림으로 부대상호의 연락이 잘 안되어 허위의 선발대 300명이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방어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후 의병은 다시 각 지방으로 흩어져 각 부대별로 의병 본래의 특징인 지리를 이용한 게릴라전을 전개해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1908년부터 전국의 의병은 일제침략자와 그에 야합한 친일세력들을 타도하기 위해 처절하고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했는데 각도별 의병교전 횟수와 교전 의병수를 보면 다음 [표 2-29]와 같다.

[표 2-29]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고장 전남은 중앙정계와 멀리 떨어져 정치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지는 못했으나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데 언제나 앞장서 온 전통을 살려 의병항쟁을 주도했다. 1908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전남의병은 1909년을 기하여 절정에 달했으니 교전횟수로 전국의 31.5%, 교전의병수로 전국의 46.6%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한말의병의 중심인 3차 의병에서부터 전남의병은 의병의 핵을 이루었으니 한말의병은 전남의병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표2-29] 각도별 의병교전횟수와 교전의병수

[표2-29] 각도별 의병교전횟수와 교전의병수 - 횟수및병수(연도도별), 교전횟수(1908, 1909, 1910), 교전의병수(1908, 1909, 1910), 교전횟수비(1908, 1909, 1910), 교전의병수비(1908, 1909, 1910)를 나타낸 표
횟수및병수교전횟수교전의병수교전횟수비(100%)교전의병수비(100%)
연도도별190819091910190819091910190819091910190819091910
경기도78165311,4533,4534024924.2 1.8921.9
충청북도1136646,815832385.73.83.182.22.1
충청남도21713827,6661,003611.0 7.91.69.22.50.3
전라북도21927359,9605,5763611.115.83.91214.52
전라남도274547110,54417,579513.931.50.812.746.60.3
경상남도15361143,3289347.73.642.4
경상북도158161205,7023,6671857.99.3116.99.510.1
강원도2731243118,5992,46834313.87.21522.56.418.7
황해도232111141,9982,14847811.76.424.29.75.526.1
평안남도108611,3915401155.53.610.91.71.46.3
평안북도41172,5901232.10.53.10.3
함경남도991466,43827022450.94.77.80.712.2
함경북도11280 0.6 0.3
합 계1,9761,73812882,76738,5931,832100100100100100100

그런데 3차 의병의 중심인 전남의병은 이 고장 장성출신인 성재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가 선도하였으며, 장성은 전남과 전북의 경계지역이고 산악지대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기에 입지적 조건이 좋기 때문에 의병항쟁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장성 출신인 성재 기삼연은 위정척사운동을 처음으로 전개했던 노사 기정진의 제자이며 족질로 일찍이 을미의병에서 호남의병의 선봉장으로 참여했고 송사 기우만 의병대장이 의병을 해산하려고 하자 이에 불복했으며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탈옥하여 창평에 은신하며 살던 중 고하 송진우를 교육시키기도 했다.성재 기삼연은 김용구, 김준, 이철형 등과 함께 의병봉기를 준비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1907년 9월에 장성 삼계의 수연산 석수암에 모여서 호남창의회맹소를 발족하니 전남북의 유명한 의병장들과 많은 의병들이 모였다. 기삼연은 다음과 같이 의병대열을 편성하여 의병활동에 들어갔다.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통령: 김용구
참모: 김익중, 김봉수
종사: 전해산, 이석용, 김익중, 서석구, 김치곤, 박영견, 정원숙, 성경수, 박도경
선봉: 김 준(김태원)
중군: 이철형, 김봉규 후군: 이남규
군량: 김태수 총독: 감효인 감기: 이영화 좌익: 김창복
우익: 허경화 포격: 김기순 호군장: 이기창 우포장: 고동진
위와 같은 부대편성을 끝마친 호남창의회생소의 기삼연 의병대장은 격문을 사방에 돌려 국민대중의 협력을 촉구하고 적에게 부역하는 자는 처단하여 그 재산을 몰수할 것이라 경고했다.

기삼연의병대는 주로 무장, 고창, 영광, 법성포, 장성 등지에서 활약했는데 법성포 작전을 끝내고 소단위의 유격전으로 바꾸어 활동하게 했다. 기삼연의병대는 전남의 수도인 광주를 공격하기 위해 담양의 추월산에 집결했다가 1907년 12월 27일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격전 끝에 발에 부상을 입어 그 통솔권을 통령 김용구에게 인계하고 순창의 친척집에 은신했다. 그곳에서 부상을 치료하면서 설날 아침상을 받다가 적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어 담양을 거쳐 광주에 압송되었다가 다음날 광주 서동에서 처형당했다. 이에 선봉장 김태원은 대장의 체포 소식을 접하고 별동대 30명으로 추격전을 전개하여 광주 경양호까지 진출했으나 구출에는 실패하였다. 성재 기삼연은 1962년에 정부에 의해서 국민장이 추서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는 장성공원에 우뚝 서 있으며, 정부에서는 2001년 1월의 독립투사로 기삼연 대장을 지정하여 그 공을 기리기도 했다.

그런데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 의병대는 거의가 이 고장 장성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니 참모인 김봉수, 종사인 김익중, 호군장 이기창, 좌포장 고동진, 중군 이철형 등이 모두 장성 출신이며 추월산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하거나 공을 남긴 저명인사들로 많은 사람들이 이 고장 출신들이었다. 추월산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운 김봉훈은 참모인 김봉수의 친동생이며 김봉훈의 처남인 박준기(그 후 계속 의병활동을 하다가 1909년 7월 20일 남면에서 전사함), 임헌규(포사장으로 토천 전투에서 전사), 섭영모(전사), 임철주(행방불명), 선승규, 선동규(탑동진에서 전사), 박천용(합병후 병사), 서기초(전사), 이영신(호산에서 전사), 고세진(전사) 등이 있다.

기삼연 대장이 이끈 호남창의회맹소 의병대는 한말의병의 중핵이었던 3차 의병의 중심인 전남의병을 선도하였으며, 그러한 의병활동은 전남의 서북 지방을 휩쓸어 일본군경이나 일제의 앞잡이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기삼연 대장이 체포 처형된 후에도 그에 영도되었던 호남창의회맹소의 의병대는 김용구, 박도경 등에게 지휘되어 계속적인 활동을 하였고 선봉장인 김준과 그의 동생인 김율 그리고 김준 의병대를 이끌었던 전해산 등의 활동으로 전남의병은 놀라온 활동을 했다. 그 밖에 조경환, 양진여, 양상기 부자의 의병활동이나 강사문, 이기손 등의 의병활동이 모두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와 관련을 가졌던 것이다.

특히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이었던 김준과 그의 동생 김율은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는데 가장 빛나는 싸움은 창평의 무동촌 싸움이었다. 이들 형제는 함평출신으로 일찍이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했다가 의병에 투신하여 장성을 비롯해 영광, 함평, 담양, 나주, 광주 등지를 휩쓸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장성 출신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한 사람으로 김준 선봉대에서 활약하다가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한 김봉요, 사창에 주둔한 일본군을 습격해 총검을 탈취하여 전해산 부대의 포사대장으로 활약하다가 묵동에서 전사한 박병엽, 김준부대에 종군하여 어등산에서 전사한 조덕관 등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 고장 장성에서는 많은 의병장이나 의병들을 배출하였고 장성의 산하(山河)는 어디나 격전장이 아닌 곳이 없었으니, [한말호남의병전투사]의 총설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본도 장성의 낡은 사상을 가진 선비들이 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운 자들을 규합하여 최(최익현)의 주장에 따르기로 하였고 야간에 칼쓰기와 조총을 연습을 하는 자가 있어...또한 이 고장 출신으로 의병항쟁에 큰 업적을 남긴 의병장으로 김영백과 강사문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업적을 따로 서술해 보겠다. 그리고 끝으로 이 고장 출신들로 의병항쟁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 애국자들의 명단을 표로 작성하겠다.

(1) 김영백 의병장

김영백(金永伯)은 장성군 북이면 달성리 출신으로 1907년 10월에 고향을 중심으로 의병 약 1천명을 규합하여 총 200정을 준비하여 장성, 고부, 광주, 정읍, 태인, 부안, 흥덕, 고창 등지를 휩쓸면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특히 그의 활동 가운데 뛰어난 것을 들면 1908년 3월 정읍군 단곡리에서 수비대 기병을 습격하여 피해를 주었으며 7월에는 흥덕에서 수비대 보병과 충돌했고, 9월에는 흥덕의 방장산 백락동에서 기병·헌병 및 순사대와 교전했으며, 10월 상순에는 북이며 신기리에서 헌병과 격전했고, 11월 상순에는 북이면 오현에서 수비대 기병과 충돌했다. 또한 1909년 1월 말에는 북이면 상곡리에서 수비대 기병과 충돌했으며, 2월 중순에는 북일면 동산리에서, 2월 말에는 흥덕군 세속리에서, 4월 11일에는 흥덕군 일동면 구수장에서, 4월 중순에는 고부군에서, 4월말에는 흥덕군 일남면 유점리에서 각각 헌병과 충돌하여 상당한 사상자를 냈다. 그리하여 체포되어 1심에서 교수형을 언도 받았고 2심에서 공소를 기각 당했으며 3심에서 상고를 기각 당해 처형당했다. 그는 비효율적인 화승총을 개조하여 뇌관식 총탄발사기로 개조하여 의병의 전술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2) 강사문(판열) 의병장

강사문(姜士文:일명 姜判烈)은 장성군 진원면 학림리 옥동 출신으로 본래 대장간업과 산포수 노릇을 하다가 1908년 1월 29일에 의병장 김준의 부하로 들어갔다. 2월 14일에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3월부터 의병활동을 본격화했다. 그는 장성을 비롯해 창평, 광주 일대에서 주로 활약했는데 1909년 3월 14일 새벽에 창평군 연천에서 광주 순사대와 격전을 벌여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그의 활동 중 뚜렷한 것을 들면 1908년 9월에 의병 100여명을 거느리고 출동해 활동했다. 그런데 1909년 7월 고향인 진원면 학림리 옥동에서 광주 분견소의 헌병에게 급습을 받아 체포되어 동년 12월 17일에 광주옥에서 순국했다.기삼연 의병장이 불을 지른 3기의 전남의병은 동남부지방의 양회일, 이백래가 주도한 호남창의소의 의병활동, 담살이 의병장인 안규홍, 호남제일의 의병장이라는 심남일 의병장 그리고 임창모 의병장들의 활동으로 전남전역을 휩쓸었고 전남인들 대부분이 의병으로 활약했거나 그 지원세력이 되었다.그리하여 일제침략자들은 3차 의병의 중심지요 극성을 보인 전남의병을 토벌하지 않고서는 한국을 병합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전남의병을 전멸시키려는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했다.

일제침략자들은 그간에 여러차례의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전남의병을 토벌했으니 이른바 기삼연 부대 토벌작전이나 지역별 토벌작전을 펴 많은 병력을 투입했지만 게릴라 활동을 벌이는 의병들의 뿌리를 뽑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전남의병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전개한 대규모의 토벌작전인 남한대토벌작전을 추진했던 것이다.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40일간에 걸쳐 보병 2개 연대 2,260명과 해군 수리정대 그리고 현지의 헌병, 경찰 빛 보조원을 총동원하여 전북남부와 경상도 하동 이서, 해상봉쇄작전을 총동원하여 전남의병을 소탕하려 했던 것이다.

작전방법은 제1경비대가 포위선을 형성하고 소요의 지점을 수비했으며 제2행동부대는 포위선 안에서 수색, 토벌, 검거를 하기로 하여 이미 명부를 작성하여 20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를 조회, 조사하고 가옥을 일일이 수색했다. 그야말로 물샐틈 없는 철저한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의병의 씨를 말렸으니 일본 침략자들의 무도하고 포악한 야만성을 십분 발휘안 셈이다. 그런데 매천 황현은 남한대토벌작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이 길을 나누어 호남의병을 수색하니 위로는 진산, 금산, 김제, 만경으로부터 동으로는 진주, 하동, 남으로는 목포로부터 4방을 포위한 것이 마치 그물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순찰병을 파견하여 촌락을 수색하며 집집마다 모조리 조사하여 조금만 의심해도 문득 죽이니 이에 행인들은 자연적으로 끊어지고 이웃마을과 왕래하지 못하니 의병들은 셋, 다섯 도망하여 사방에 흩어지며 가히 은신처가 없게 되었다. 강한 자는 적진에 돌진하여 싸우다 죽고 약한 자는 꾸무럭대다 칼을 받았으며 점차 쫓겨 강진, 해남 땅에 이르러 갈 곳이 다하니 죽는 자가 무려 수천명이나 되었다. 고제홍, 심남일 등은 선후에서 결박되었다.

일제침략자들은 예정된 성과가 오르지 않자 그 후 다시 토벌기간을 10월 25일까지 연장했던 것이니 남한태토벌작전은 55일간에 걸쳐 자행된 일본군의 의병도륙작전인 것이다. 이러한 작전을 통해서 일본군에게 항전하다가 103명의 의병장이 피살되거나 체포되었고, 2천명의 의병들이 생포되었던 것이다. 일제침략자들은 그들의 한국병합에 마지막 걸림돌이 되었던 전남의병을 소탕하고 나서 그들의 목적인 한일합병을 자행할 수 있었으니 전남지방은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고 의병으로 활동하거나 의병을 지원한 전남인들은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파숫꾼이 되었다. 그리하여 체포되었다거나 자수한 사람들은 석방되었거나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재판을 받은 장성 출신의병들의 명단은 다음 [표 2-30]과 같다.일제침략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 한국인의 항일투쟁을 저지시키면서 그들의 야욕을 달성하였다. 그런데 그들과 야합한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는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을 체결해 한국이 외교권을 빼앗기자 이를 탄원하기 위해 찾아간 많은 한국인과 헐버트 특사의 한국지원요청을 거절하면서 우리를 경멸한 말을 했다. "한국인은 자신들의 방위를 위하여 단 한번의 반항도 하지 않은 국민"이라 말하면서 우리의 호소를 외면했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일찍부터 일제의 한국침략에 동조한 인물로 무책임하고 모멸적인 태도로 한국인이나 한국을 폄하했다. 우리민족은 미국 대통령의 말과는 판이하게 1907년 7월 에서 1908년 말까지 1년 6개월간에 처절한 투쟁을 전개해 일본측 사상자는 456명이고 의병은 14,500명이나 사망자를 냈다고 일본의 외무성 및 육·해군성 문서는 발표하고 있다.이러한 통계는 일본침략자들의 공식 집계이고 집계되진 않은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와 심지어는 일가족을 집단학살 당한 민간인의 경우까지 합치면 그 사상자는 엄청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지키기 위해 수만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집과 재산을 바치면서 최후까지 투쟁했고 그러한 투쟁이 한계에 부딪치자 만주나 시베리아의 연해주에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여 무장 투쟁을 계속했던 것이다. 일제 침략자와 야합한 위정자들은 1909년에는 기유각서를 맺어 사법권을 빼앗기고 1910년에는 경찰권까지 넘겨주더니 드디어 1910년 8월에는 나라까지 일제 침략자의 것이 되고 말았다. 일제침략자들은 한국 황실을 우대하고 그들과 협력한 관료나 지식인들에게는 훈작과 은사금을 주어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해주면서 한국민을 노예적 상태로 통치하고 수탈했던 것이다.

1876년 일본에 의해 개국된 이래 위정자들이 대오 각성하여 개화와 자주독립의 두 바퀴를 잘 굴리면서 나라와 민족을 보전하고 역사를 발전시켜야 하였지만 그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외세와 야합하고 민중을 탄압하여 수탈했던 것이다. 충성과 의리를 소중하게 여겨온 장성을 비롯한 호남인들은 1894년에는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고 한말에는 일제침략에 끝까지 항쟁한 한말의병의 주축이 되었다. 그러나 악랄한 일제 침략자들에게 짓밟혀 나라를 빼앗기고 2천만 백성들은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우리는 한말의 비극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 후손들에게 부끄러움 없는 우리가 되기 위해서 자각하고 역사의식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되어 자랑스러운 역사를 꾸며 나가야 할 것이다.

[표 2- 30] 장성출신 의병들의 재판기록

[표 2- 30] 장성출신 의병들의 재판기록 - 성명, 주소, 형량, 활동내용을 나타낸 표
성 명주 소형 량활 동 내 용
심수근삼계면 이곡리징역 5년의병장 조정인의 부하로 김태원과 연락, 각지에서 활동
김순오진언면 작동징역 5년박준학, 김재구 등과 총기휴코 창평 정도사집 습격기도
채봉선북상면 학림리종신징역국호남의 부하로 30여명과 함께 총기휴대코 일인 살해 및 강도
차경수북이면 백암리징역 10년4명이 총기휴대하고 2차에 걸쳐 금품갈취
마신업북하면 약수정징역 2년신보현 의병대의 부하로 의병활동
정정학북상면 채약동징역 1년유종지 의병대에 소속되어 60여명과 함께 활동
박판기북하면 성암리징역1년6개월신보현의병대에 소속, 30여명과 총기휴대하고 활약
이태우북하면 동구징역 5년의병장 신보현을 은부하여 일본군의 체포방해
김선옥북상면 수성리징역 3년이성화 의병대에 가담, 일당과 함께 동장가 습격 약탈
변각원북일면 당청리징역 1년김영백 의병대에 가담, 60여명과 함께 총기휴대코 활동
최동이북이면 달천징역 15년국호남의병대에 가담, 일본인 습격, 총기 약탈
조문섭진원면 학림리징역 5년강사문 의병에 가담, 40여명과 함께 총기휴대코 식사겁탈
김요랑장성읍 월평리징역 7년국호남부대에 가담, 40여명과 함께 총기휴대코 식사겁탈
윤수봉진원면 여운리징역 3년김율부대에 가담, 170여명과 함께 활동
이운선동화면 북사징역7년김태원, 조경환 부대에 가담, 활동
서우범진원면 야동징역 5년강사문 부대에 가담, 30여명과 함께 활동
오성현서삼면 증암리징역 10년기삼연, 유종여부대에 가담, 뒤에 김영백 부대가담 활동
이중백서삼면 외현리교수형기삼연 부대의 종사로 활약, 재물약탈, 박도경, 김여회 부대에 가담 활동
이범진삼서면 대도교수형조경환 부대, 전해산 부대에 가담하여 살인, 수비대 기병 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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