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군 로고

국가상징 국무회의 알아보기

제3장 조선시대

  • 트위터
  • 페이스북
  • 구글
  • 현 페이지 엑셀로 다운
  • 현 페이지 워드로 다운
  • 현 페이지 인쇄
4차 메뉴 정의
5차 메뉴 정의

1. 조선왕조의 성립

원본파일 다운로드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에 이르는 시기는 동아시아 역사에 있어서 일대 전환기였다. 원·명 교체라는 국제정세의 변동에 따라 국내적으로는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민족자주권을 확립하려는 개혁 정치가 추진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신흥사대부의 정치적 진출이 두드러졌다.

여말의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수용하여 새로운 정치 사회질서의 수립을 모색하면서 사회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명실상부하게 사회개혁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한 위화도회군 이후의 일이었다. 공민왕 때의 개혁에서 실패한 신흥사대부들은 이성계의 신흥 무장세력과 제휴함으로써 개혁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위화도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개혁파들을 차례로 제거하는 한편, 공양왕 4년(1392)에는 고려말의 문란해진 전제의 개혁을 단행하여 권문세족의 경제기반을 무너뜨리고 지지기반을 크게 확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성계 일파가 새왕조 개창을 민심과 천심에 순응하는 역성혁명이라고 감히 자처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이성계는 드디어 1392년에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도평의사사의 승인을 얻어 새 왕조를 개창하게 되었다. 도평의사사는 고려의 고관의 합의기관이자 최고정무기관이었으므로 공양왕의 양위와 이성계의 즉위도 이 기관의 의결을 거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정통성을 얻은 것이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건국 초기에는 태조를 추대한 사대부 출신의 개국공신들이 도평의사사라는 회의기관을 중심으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사대부들은 유교적인 이상정치를 표방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개국공신들의 정치는 마치 고려의 귀족정치의 재현과도 같은 양상을 자아내었다. 이에 위로는 국왕과 밑으로는 다른 많은 사대부들이 불만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로 일어난 것이 왕자의 난이었다.

왕자의 난이라는 골육상쟁을 겪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세자로 책봉되면서부터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을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 그는 먼저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국왕에게 집중시키는 한편, 관제를 개혁하여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세웠으며, 중추원을 폐지하고 그 직무를 의흥삼군부에 소속시켰다. 이렇게 의정부와 의흥삼군부를 중심으로 정치기구를 개혁함으로써 정부와 군부를 완전히 분리시켰다. 새로 설치한 의정부는 정치의 실무를 대폭 6조에 위임하여 도평의사사에 비하여 그 권한이 크게 축소되었다. 태종 14년(1414)에는 6조가 각각 담당 직무를 의정부를 통하지 않고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6조직계제가 실시되어 의정부의 권한은 더욱 축소되었다. 이러한 고관들의 합의기구의 해체와 문무 직무의 분리는 상대적으로 왕권의 강화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안정된 왕권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문화를 융성하게 하였다. 그는 한글을 창제하였으며, 공법을 실시하여 전세를 낮추고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하는 등 민생을 넉넉히 하는데 힘썼다. 세종은 이러한 정치를 이끌어 나가기 위하여 집현전을 설치하고 우수한 학자들로 하여금 고전과 고제를 연구하게 하여 이를 토대로 국가체제를 정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집현전 학자들의 정치적 발언이 커졌고, 세종 사후 정치의 실권은 다시 이들 관료에 의하여 좌우되는 느낌이었다. 세조의 반발은 이에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부 불평 사대부들의 도움을 받아서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하여 왕위에 오른 세조는 정치의 기본이 되는 법전인 {경국대전}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이 {경국대전}은 그 뒤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쳐 성종 16년(1485)에 반포, 시행되었다. 이리하여 회의기관에서보다는 국왕과 그 신료들에 의하여 국정이 운영되는 조선왕조의 통치체제가 일단락 되었다.

2. 조선 초의 정변과 장성

조선왕조의 개창 이후 태조에서 제9대 성종에 이르는 15세기 약 백년 간은 새 국가의 이념과 정치사회구조의 틀이 잡혀가던 시기로 정치적인 격변이 많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에게 밀리거나 또는 새로운 정치 질서에 순응하지 못하는 세력은 숙청되거나 정치에서 밀려나 낙향하여 지방에 은거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

우선 여말의 정치적 혼란과 조선 건국 과정에서는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의 온건개혁파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숙청된 인사들은 죽음을 당하거나 정계에서 제거되었다. 숙청되지 않은 인사들 중에는 스스로 정치에 뜻을 잃고 정계를 은퇴하여 낙향하거나 은거하는 인사들이 많이 나왔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이성계 일파에게 협력을 거부하고 고려에 충절을 지킨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이른바 두문동 72현의 고사는 고려와 조선왕조의 교체과정에서 협력을 거부하여 그만큼 많은 인물들이 숙청되거나 제거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들은 후세에 유교적 덕목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충절을 행한 인물들로 추앙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많은 정변이 뒤따랐다. 조선 초기의 정변은 왕위계승과 밀접히 관련되어 일어났다. 태조 때에 일어난 1, 2차 왕자의 난과 단종 때 수양대군이 실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일으킨 계유정난이 그러하다.

제 1차 왕자의 난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조선건국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방원이 건국공신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정도전 등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가 세자 책봉문제를 기화로 일으킨 난이다. 조선 건국에 커다란 공을 세운 바 있는 이방원은 이복 동생인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데 불만을 품고, 방석을 후원하고 있는 정도전, 남은 등이 자기 형제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이들을 살해한 다음 자기와 배가 다른 형제인 방석과 방번 형제마저 살해하였다.

제 2차 왕자의 난은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장악한 방원에게 그의 셋째형인 방간(芳幹)이 도전하여 일어났다. 이 난은 제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이 많이 있으면서도 1등공신에 오르지 못한 박포(朴苞)가 방간을 부추겨 일어났다. 양측의 군사적 충돌에서 방간이 방원에게 패하여 유배당하고 박포가 주살됨으로써 이 난은 평정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자들 간의 싸움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개국공신들이 이방원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이 때에도 많은 인사들이 숙청되거나 죽음을 당하였으며 정치에 뜻을 잃고 낙향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골육상쟁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관제를 재편하여 문하부를 폐지하고 사간원을 신설하였으며, 육조직계제를 실시하는 등 육조의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외척을 철저히 탄압하여 제거하였다. 특히 왕실의 외척인 여흥민씨 집안에 대한 숙청은 가혹하리 만치 철저하였다.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변은 단종 때에도 일어났다. 세종 때에 비롯된 집현전 학사를 중심으로 한 유신들의 정치권 진출은 세종 말년에 집현전이 간쟁기관·정치기관으로 변모함으로써 더욱 현저해졌다. 집현전 학사 출신의 발언권은 문종이 즉위한 이후 이들의 일부가 대간으로 진출하는 등 요직을 차지면서 더욱 증대되었다.

집현전 학사들의 정치적 진출은 문종이 죽고 단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절정에 달하였다. 문종의 고명을 받은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세종 때부터 재상직에 있던 중신들과 집현전 학사출신의 관료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의정부의 권한이 강화됨으로써 상대적으로 국왕권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에 수양대군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정변을 일으켜 자신이 직접 영의정 및 이조·병조판서와 내외병마도통사의 관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이를 계유정난이라 한다. 이후 얼마 안 있어 수양대군은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가 세조이다.

세조는 계유정난과 단종 폐위를 전후하여 정계의 원로인 황보인·김종서 등과 동생인 안평대군 그리고 후세에 사육신이라고 불리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등을 살해하고, 뒤이어 폐위된 단종마저 살해하였다.

계유정난과 단종의 폐위 그리고 복위운동과 관련되어 숙청된 인사들도 많았지만 이 때에도 단종에 절의를 지켜 세조의 조정에서 벼슬을 단념하고 낙향한 인사들이 많이 있었다.

이와 같이 조선 건국 후 일어난 수 차례의 정변으로 중앙에 진출한 인물들의 상당수가 유교적 대의명분을 앞세워 벼슬을 단념하고 낙향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호남 지방으로 낙향한 인사들도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광산의 충주 박씨, 담양의 문화 유씨와 홍주 송씨, 고흥의 여산 송씨와 고령 신씨 등이 그러하다. 물론 장성에도 상당한 수의 인사들이 낙향하여 자리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유력한 가문에 소장된 족보나 가승 또는 각종 문집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되어 많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를 모두 확인하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확인하였다 하더라도 그 모두를 사실로 단정하기도 어렵다. 후세에 가문을 빛내거나 선조를 미화하기 위하여 날조하거나 과장한 예가 많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장성으로 낙향한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가문으로 울산 김씨 가문을 들 수가 있다.

울산 김씨 가문은 흥려군(興麗君) 김온(金穩) 대에 장성으로 낙향하여 터를 잡았다. 흥려군은 개국원종공신과 좌명원종공신에 녹훈된 인물로 태종의 처남인 민무구·무질의 옥사에 연루되어 화를 입게 될 처지에 놓이자 화를 피하여 장성으로 낙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온은 부인 여흥 민씨가 태종의 왕후인 원경왕후(元敬王后)와 사촌간이어서 민무구 형제의 옥사에 연루될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이에 민씨 부인이 앞장서 아들 삼형제를 이끌고 남하하여 장성 맥동에 터를 잡았다. 이 가문에서는 단종 때에도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이밖에도 많은 인물들이 정치적 격변기에 절의를 지키거나 화를 피하여 장성으로 낙향하여 터를 잡았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로는 이를 확인할 자료가 없어 그 개연성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QR CODE
  • 왼쪽 정보무늬 사진을 휴대전화에 인식시키면 자동으로 이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 이 정보무늬는 『제3장 조선시대』의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제3장 조선시대 페이지 바로가기 주소(https://www.jangseong.go.kr/q/ezIyODF8fHx9&e=M&s=3), QRCODE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 평가하기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