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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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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원군의 등장과 왕권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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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모순을 안고 등장한 조선왕조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쇠망의 길을 치닫고 있었다. 특히 1860년대에 이르러서 안팎의 위기에 직면했으니 안으로는 변태적인 양반관료정치인 세도정치의 폐가 극에 달했으며 밖으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침략에 종주국인 청이 유린되고 그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팎의 상황에서 조선의 왕권에 큰 변화가 일어났으니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속에서 술과 색으로 나날을 보내던 철종의 병이 깊어 후사도 정하지 못한 채 급서하고 말았다. 안동김씨의 선책을 받아 왕위에 오른 철종은 강화도령으로 왕업은 모르고 옥녀와 숨박꼭질이나 하고 살았던 나뭇꾼이었다. 그는 5남 6녀를 생산했지만 1녀만 성장하여 박영효의 아내가 되었고 모두 병사하였다. 그런데 왕실의 사정도 말이 아니었으니 유능한 왕족은 영구집권을 노리는 안동김씨에 의해서 제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아무런 대비책도 세우지 못한 채 철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세도가인 안동김씨에게는 청천의 벽력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선조의 후손으로 사도세자의 셋째 아들인 은신군(恩信君)에 입양한 남연군의 넷째 아들인 흥선군(興宣君)은 안동김씨의 시퍼런 칼날을 피해 미치광이 주정꾼·도박꾼 행세를 하고 궁도령(宮道令)이란 조소도 감수하면서 세도가댁의 잔치마당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흥선군은 남다른 포부와 야망을 가지고 왕실의 어른인 조대비(趙大妃)와 접근하고 조정의 원로인 정원용이나 안동김씨 중 온건파인 김병학 형제에게 접근하여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었다.

1863년 12월 8일 철종의 급서를 당한 궁중의 어른인 조대비는 옥새를 안고 후사를 결정하기 위한 시원임(時元任) 재상회의를 주관했다. 누구를 후사로 삼았으면 좋겠느냐는 조대비의 해명에 긴장과 침묵만이 감돌다가 조대비에 의해 원상으로 임명된 정원용이 대비의 처분만을 기다릴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대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흥선군의 둘째인 명복(命福)으로 익종(조대비의 남편이며 헌종의 아버지)의 대통을 잇게 하라고 했다.

아무런 준비와 대책을 세우지 못했던 안동김씨는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으니 그것은 고종이 파락호인 흥선군의 아들이란 점과 철종의 후사가 아닌 익종의 대를 잇는다는 점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있는 왕이 역사상 없었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안동김씨는 흥선군의 예우 문제에 시비를 걸었으나 고종의 생부인 흥선군은 조대비의 위탁을 받아 흥선대원군으로 국정 전반에 걸쳐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대원군은 불우한 생활을 했고 중농주의 실학사상에 관심이 많았으며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지향하는 왕도정치의 원리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대원군은 집권하자마자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난맥에 빠진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대원군은 집권기간 10년동안에 누적되어 온 폐단을 시정하고 안동김씨의 세도를 뿌리 뽑아 인재를 고루 등용했으며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하여 국정전반과 서민생활의 밑바닥까지 잘못을 바로 잡았으니 서원철폐·세제개혁·국방강화와 군제개혁 그리고 풍속교정 등을 중점적으로 추진했다. 그의 업적 가운데 이 고장 장성과 직접 간접으로 관계 있는 점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데 먼저 관리의 부정과 부패청산에부터 열거하겠다.

첫째, 고종 원년(1864) 4월에 전 전라감사 김시연이 재임했던 임술년(1862) 봄 환곡미의 착복분 16,042 섬을 추징하기 위해 그의 하인들을 구금시켜 돈으로 48,126량을 전주관찰부에 납부한 사실이 보인다.또한 고종 원년(1864) 11월에 전라우도 암행어사인 이돈상이 올린 보고에 의해 전 장성부사 민세호·익산군수 이풍재·금산판관 장석봉 등을 죄주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힘으로도 향리의 폐단은 뿌리 뽑지 못했던 것 같아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전주 아전의 폐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원군 이하응이 집권당시 일찍이 전주 아전들의 습성을 세가지 폐단 중의 하나라고 말한적이 있다. 대개 전라감영 밑에 있는 자들은 평소 모질고 교활하며 호탕하고 거만하다고 말해왔다.이 밖에 대원군의 내정개혁으로 국민생활과 관계 깊은 것은 환곡을 폐지하고 사창제(社倉制)를 부활시켜 요지에 사창을 설치해 지방민을 자체적으로 양곡대여업무를 수행하게 했는데 장성 삼계에 사창이란 지명도 양곡저장창고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또한 군포를 호포(戶布)로 바꾸어 신분에 따라 부과하던 제도에서 집에 부과하여 집을 가진 양인은 물론 양반 천인에게 모두 부과시켰다.

2. 대원군의 서원철폐와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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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은 선유의 봉사와 지방 교육기관으로의 역할을 하면서 전국 각처에 엄청나게 많이 설치되어 긍정적인 역할도 했지만 많은 폐단을 끼쳤고 당쟁의 소굴이 되었으며 토지와 노비를 사유하여 국가재정을 좀먹었고 양민을 부역에 종사시키거나 물질적 부담을 강요하였으며 각종 월권을 자행했다. 그 중에 청주에 있는 화양동서원과 만동묘는 묵패(墨牌:서원에서 발행하는 문서)를 발행하여 그 권력이 국가기관을 능가하기까지 했고 각종 이권에 간여하여 민폐가 매우 컸다. 그리하여 매천 황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만동묘(萬東廟)는 청주 화양동에 있는데 이것을 창건하게 된 것은 우암 송시열의 뜻이었다. 그러므로 그 옆에 송시열의 사당을 세웠는데 이것이 세칭 화양동 서원이다. 서원의 책임을 맡은 자가 도내의 무단자제(지방세력가)들을 이끌고 묵패로서 평민을 잡아다가 때리는 일이 많았는데 폐단이 많아서 그들을 가리켜 가죽을 뚫고 골수를 빨아 먹는 남방의 좀이라고 불렀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나도록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수령들은 두려워서 감히 죄책을 묻지 못했다. 대원군이 소시적에 이 서원에 들렸다가 서원의 유생에게 모욕을 당해 심히 한스럽게 여기다가 집권하자 그 유생을 죽이고 드디어 그 서원을 철폐하게 했다.

또한 이 고장 출신인 노사 기정진도 앞에서 서술한 임술의책에서 "서원의 유생은 금일의 큰 문제거리가 되어 풍류나 즐기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성낸 말을 몰아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대원군은 국가나 국민에게 해로운 서원을 철폐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고종 3년부터 철폐되기 시작한 서원은 대개 5년까지에 끝을 맺었고 고종 8년 3월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전국적으로 47개의 사액서원만을 남기고 다른 서원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대원군은 서원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서원철폐를 단행했다.

그런데 47개의 존치서원 속에는 전남에서 장성의 필암서원과 광주의 포충사가 있는데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와 제자이며 사위인 양자징을 모신 서원으로 선조 23년(1590)에 건립되어 효종 3년(1652)에 사액을 받았는데 현재 황룡면 필암리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선비의 고장인 장성에는 많은 서원과 사우가 있었는데 필암 서원을 제외하고는 고종때에 철폐되었는데 당시의 서원현황은 다음 [표 2-27]와 같다.그런데 전국에는 사액서원만도 276개 였으며 전남에는 서원의 총수가 139개였고 사액서원은 48개 였는데 그 중 서원이 68개소였고 사우는 71개로 파악되고 있지만 실제는 그 수가 훨씬 많은 형편이었다

[표 2-27] 장성지방의 서원 및 사우의 존폐 상황

[표 2-27] 장성지방의 서원 및 사우의 존폐 상황 - 서원명, 소재지, 배향인물, 존폐여부, 비고를 나타낸 표
서원명소재지배향인물존폐여부비고
필암서원황룡면 필암리김인후, 양자징존치
가산서원삼서면 홍정리 가산이제현, 이항복고종5년 철폐
모암서원서삼면 모암리서능, 박수량 외 5인효종대 사액
양계사남면 마령리심덕부, 심계년, 심엽
만곡사삼서면 보생리봉유래, 봉집, 봉여해
두동사삼서면 두월리 두동이조, 이분
봉암사장성읍 장안리변이중, 변경윤 등 4인
추산사황룡면 하사리기건, 기준 등 5인
학림사진원면 학림리김온, 김영렬 등 8인
덕천사서삼면 대덕리문익점, 기효간 등 4인
동산사장성읍 성산리김시찬, 김천록 등 3인
수산사황룡면 수산리박연생, 김개
회계사북하면 회촌김신덕 등 7인
연호사서삼면 외현리김명하, 김기하 등 3인
죽림사북하면 부동이수
송계사북상면 송산리유창 등 6인
영당북이면 백암리신말주
장성읍 장안리변종락
황룡면 대해리김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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