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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현대와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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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의 식민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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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침략자들은 그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장렬하게 저항하는 한말의병을 소탕하고 1910년 8월에는 한국을 병합하였다. 그들의 식민통치는 의병을 토벌한 무력을 뒷받침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무단독재를 자행했다. 무력을 동원해 그들에게 저항하는 한국인이나 비협조적인 한국인을 제압했다.일제침략자들은 한국을 통치하는 중심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총독은 행정권, 군사권은 물론 입법권과 사법권까지 장악하여 절대적인 독재권을 행사했다.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육군대장 테라우찌(寺內)는 치안을 담당할 최고직인 경무총감으로 조선주차일본헌병사령관을 임명하여 헌병경찰제를 활용했다. 그러므로 총독과 경무총감은 모두 현역군인 출신으로 군대식으로 한국을 통치하겠다는 것이다. 경무총감 밑에 각도마다 헌병대장으로 보임되는 경무부장을 두었으며 그 밑에 경찰서를 대신해서 헌병분대를 두었으니 1914년까지에 헌병대 사령부(중앙) 밑에 헌병대 13개소, 헌병분대 78, 헌병 분견소 99, 헌병파견소 317, 헌병출장소 528 개소를 설치해 헌병 경찰제를 실시했다.

이들 헌병경찰이 첩보, 독립운동탄압, 검찰, 즉결처분, 징세독려, 세관업무, 집단 업무, 산림감시, 도로개수, 우편호위, 일어보급 등 만능의 기능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들 헌병의 뒤에는 2개 사단의 군대와 조선형사령, 보안법 등의 악법이 뒷받침하고 있어 철저한 헌병경찰제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일제침략자들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철저한 무단정치를 하면서 조선인을 탄압하고 협박하여 그들에게 순종하게 하는 한편 그들에게 협조하거나 온건한 지배층이나 유림들에게는 작위를 주거나 은사금을 수여하여 회유정책을 쓰기도 했다. 뜻있는 지식인이나 망국의 한을 품고 분노한 지식인들은 작위를 거절하고 은사금을 수령하지 않아 많은 고초를 받은 사람들도 많았으며 어떤 사람들은 대한제국의 선비가 어찌 은사금을 받으리오 하면서 자결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제침략자들은 그들에 협조하는 왕족과 고급관료 그리고 지방의 유력자들로 중추원을 구성해 정무총감을 의장으로 하여 약간의 고문과 참의들을 임명해 국정의 자문기구로 활용했는데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한 번도 소집되지 않은 정도였다.그러나 을사조약 이후에 최익현과 함께 호남의병을 일으켰던 임병찬을 중심으로 1912년에 고종의 비밀교지를 받아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항쟁을 기도하였던 사건이 있었는데 이의 중심은 장성 등지를 포함한 호남지방이었다. 그리고 1915년에 박상진, 김좌진 등이 군대식 조직을 통해 국권회복을 위해 결성한 대한광복단활동, 1915년에 서상일, 이시영 등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활동 등은 한민족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교육을 강화하여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한국인을 교육시키기에 전념했다. 조선인을 교육하는 기관은 조선인 통치의 하수인으로 이용하기 위한 보통교육이나 실업교육을 실시했으며 고등교육기관이나 사립학교는 억제했다. 그리고 교사는 정복을 입고 칼을 차고 위압적이며 복종을 강요하는 군대식 교육을 시행했고 일본어의 보급에 주력했으며 조선역사 대신 일본역사를 가르쳐 조선인의 정신을 뿌리뽑고 충실한 일본황제의 신민(臣民)교육에 치중했다.

한편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정책은 토지의 약탈과 민족산업의 억제 그리고 일본경제로의 편입정책을 주로 했으며 한국의 산업자원을 점탈했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토지의 약탈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해 모든 토지를 지주가 신고하고 신고하지 않은 토지나 신고할 수 없는 토지(국공유지 문중토지 주인불명토지)는 모두 총독부의 소유로 삼았다. 그리하여 한국농토의 40%를 일본이 차지했으며 산림이나 기타의 국유지도 모두 총독부 소유가 되어 전국토의 50%가 일본의 소유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소유한 막대한 토지를 동양척식회사나 일본인 토지회사 그리고 본토에서 이주한 일본인들에게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동양척식회사는 한국농민의 토지를 수탈하는 국책회사로서 그 소유지는 경지면적이 1921년까지 99,480정보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동양척식회사가 주관한 일본이민이 1917년 현재 전남만도 526호가 들어와 대지주가 되어 갔다. 한국에서의 최대지주인 동양척식회사는 5할이 넘는 소작료 강징을 비롯해서 얼마나 혹독하게 농민을 수탈했는가는 다음의 동아일보 사설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민족의 경제적 생활의 흡혈귀가 되며 교수대가 되는 동양척식회사의 철폐를 주장한지가 한, 두차례에 그치지 아니 하였다. 그러나 완명추악(頑冥醜惡)한 동양 척식회사는 독한 이빨을 펼치며 나쁜 마음을 품어 악극흉국(惡極凶極)한 모든 수단으로써 반만년 동안이나 대대로 전하여 오던 우리의 전토(田土)를 함부로 침탈하여 2천만 대중의 생명을 시각으로 위협하여 조금도 기한이 없으며 자축(自縮)이 없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심장과 간이 얼마나 떨렸으며 우리의 피, 눈물이 얼마나 흘렀던가

이러한 일제침략자들의 토지 강탈과 수탈에 따라 일본인이나 소수의 양반지주는 그 소유권을 인정받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대다수의 농민들은 대대로 누려오던 경작권(소작권)을 잃고 매년 지주들의 눈치나 처분만을 기다리는 영세농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런데 1916년의 농지분포상황을 보면 지주는 전체인구의 2,5%에 불과하고 자작농이 20%였지만, 그들도 영세농이 절대적이어서 지주의 땅을 소작하여 소작겸 자작농이었다. 그러므로 자작겸 소작농이 40.6% 소작농이 36.8%로 전체 농민의 77.4%가 영세농민이 되었으며, 많은 농민은 토지를 잃고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유랑을 떠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해 온 한국인은 일제침략자에 의해서 땅을 빼앗기고 경제권이나 각종 이권을 박탈당한 채 총독부나 불량 일본인이 날뛰는 그들의 안방이 되자 마음 속으로 분노를 씹거나 생존을 위해 남부여대하고 만주나 시베리아의 연해주로 유랑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민족정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한민족의 자긍심을 살린 것이 1919년의 3·1운동인 것이다.

2. 3·1운동과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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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1운동의 추진과 전개

1919년의 3·1운동은 돌발된 독립만세운동도 아니요 일시적이거나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아니라 오랜기간 동안 축적된 민족역량의 표출이요 그 원인은 일제 침략들의 악랄한 탄압과 수탈이었다. 여기에 여러 가지 요인들이 결합되어 거족적인 3·1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 그러면 3·1운동의 배경을 살펴보자.

첫째 민족역량의 표출로 가깝게는 한말의병항쟁의 연속이요. 더 나아가서는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정신의 계승인 것이다. 한국은 일찍부터 오랜 역사와 선진문화를 꽃피웠는데 위정자들의 탄압과 수탈 그리고 정권싸움에 정신이 없어 1854년에 미국함대에 무릎을 꿇고 문호를 개방하여 서구문화를 수용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러나 한국인은 이를 인정할 수 없었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일제침략에 대항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하여 국권을 회복하려했고 민족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민족역량을 결집시켜 전국민이 참여하게 이끌어 갔다.

둘째, 일제침략자들의 무단독재와 악랄한 수탈정책으로 한국민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의병을 진압시켰던 무력을 그대로 활용하여 한국인을 짓눌렀고 토지의 탈취와 어업, 광업, 금융업과 다른 산업을 독점하여 한국인의 생존권을 박탈했기 때문에 전국민의 봉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셋째, 민족지도자들의 대거 참여와 대동단결 및 천도교, 기독교, 불교제가 동참하여 그들의 조직망을 쉽게 활용할 수 있었고 학생층의 주도적 참여로 전국민의 역량이 집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자극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것은 3·1운동이 외세의존적이었다는 가치 폄하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며 전국민의 참여와는 깊은 관계가 적은 것이다.3·1운동의 전단계 민족운동으로 2·8독립선언이 있는데 이것은 동경유학생들이 전개한 독립운동으로 이광수, 김도연, 최팔용 등이 주도하여 조국의 독립을 일본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주장했다는 것으로 큰 의미가 있으며 3·1운동의 선구가 된 것이다.천도교의 손병희가 주도면밀하게 추진한 3·1운동계획에 송진우, 김성수도 가담하여 독립선언문과 공약 3장을 인쇄하였고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가 각각의 연락망을 통해 전국적인 봉기를 계획했다.

1919년 3월 1일 정오에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후 곧바로 만세시위에 들어갔으며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 3창을 끝마친 후 일본관헌에게 연락하여 구금되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방방곡곡에 번져 나갔으며 4월 말에 이르기까지 계속 되었다. 전국적으로 참가인원은 200만을 넘었고 시위운동 횟수는 1500여회에 달했고, 전국의 218개군 가운데 211개군의 시위가 있었는데 전남은 선상시위와 산상시위가 특징적이었다.일제침략자들은 거족적인 만세시위에 경악하여 방관하다가 이윽고 무력을 동원해 잔인한 진압에 나섰는데 피살 7,509명, 부상자 15,961명 체포된 사람이 46,948명이며 파괴 소각 당한 교회당이 47개소, 학교가 2동, 민가가 715호에 달하였다. 특히 수원 부근의 제암리에서는 주민들을 모두 교회에 가두고 총격을 가하여 살해하고 불을 질러 몰살시켰다.

(2) 장성의 3·1운동

서울에서 시작하여 전국의 방방곡곡을 울린 만세시위인 3·1운동은 충의의 고장인 장성에서도 어느곳 보다 더 강하게 전개되었다. 장성에서는 3·1 운동 이전에 이미 만세시위가 계획되었으니 그 추진자들은 진원면 산동리의 박일구와 북이면 백암리의 김기형이었다. 고창고보를 졸업한 박일구는 1918년 2월 김기형 최한영 등과 자주 접촉하여 토론을 가져 반일사상을 굳히어 왔다. 그런데 1919년 2월에 이르러 동경 2.8독립선문을 가지고 정광호, 최정두가 광주에 와서 최한영 박일구 등은 이 선언문을 인쇄 배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2월 5일부터 6일 사이에 북이면 백암리에 있는 김기형의 집에서 2.8독립선언문을 국문으로 700매 일본문으로 50매를 인쇄하여여 일부는 서울로 보내고 일부는 광주 최한영의 집에 보관하였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3·1 운동이 시작되자 박일구는 최한영과 함께 최한영의 집에서 3월 7일부터 기미독립선언서와 독립가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만들면서 3월 10일 장날을 기하여 광주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광주의 독립만세운동에 일본관헌은 만세운동의 주모자를 검거해 재판에 회부했는데 박일구는 징역 3년에 김기형은 1년 6월의 형을 언도받았다. 그 후 1922년에 출감한 박일구는 병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일 운동을 계속하다가 1930년에 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장성읍에 거주하는 유명한 학자 변순기는 3·1운동의 주동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서울이나 광주의 3·1 만세시위 소식이 곧바로 장성에 전해졌다. 3·1운동의 소식을 장성에 전한 것이 남원의 유태동이라거나 광주의 송흥진이었다는 주장들이 있으나 의리의 고장인 장성에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광주에 이웃해 있으며 사람의 왕래가 잦았으므로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장성 출신인 박일구와 김기형 변순기등이 전남의 중심인 광주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 것과 아울러 장성지역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살펴보겠다. 장성에서의 만세 시위는 크게 세곳의 만세운동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는데 삼서면 소룡리의 만세시위와 장성읍의 만세시위 그리고 사거리의 모현리 만세시위인 것이다.

먼저 삼서면 소룡리의 만세운동은 소룡리에 거주하는 송주일에 의해서 주도되었는데 그는 1919년 3월 8일 광주시 양림동에 사는 송흥진으로부터 장성에서의 만세시위를 촉구하는 서신을 받았다. 송주일은 3월 10일 광주의 만세시위와 같은 날에 마을의 예수교 예배당으로 가서 교인 약 70명이 모인자리에서 그 서신을 읽어주었다. 송흥진의 편지내용은 '조선은 이제 독립하게 되었으니 그대는 면사무소와 동내 이장은 물론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이 서신을 알리어라 광주에서는 이미 각 학교의 학생과 남녀노소의 시민들이 함께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들은 교인들은 모두 크게 감동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며 이어 17일에 송주일은 마을의 큰 길에서 조병렬 조병철, 조병권에게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는데 송은 드디어 체포되고 1년간이나 옥고를 치르었다.

한편 3월 10일에 있었던 광주의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돌아온 삼계면 사창리의 김응현은 같은 마을의 임춘열, 정길언, 나상철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시위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두 번째, 장성읍내의 만세시위에 대해서 살펴 보겠다. 본래 3월 15일에 장성의 예수교인들이 만세시위를 계획했으나 헌병대분대의 삼엄한 경계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정선유에 의해서 만세 시위는 계속 추진되었는데 그는 장성읍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의 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평양의 숭실학교를 마친 후 고향에 돌아와 장성읍 성산부락에 예배당을 세워 150여명의 교인이 예배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사립 숭실학교를 설립하여, 100여명의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리하여 정선유는 많은 교인들과 학생 100여명 그리고 읍내의 청년과 군중 수백명을 이끌고 3월 21일에 장성읍내를 휩쓸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헌병대가 출동하여 무력으로 탄압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그날 저녁 9시에는 각면의 동지들과 연락하여 봉화를 올리면서 끈덕지게 독립만세시위를 계속했다.

그 뒤 장성읍의 애국지사들은 3월 25일 밤에 산마루에서 올리는 봉화를 신호로 각 면에서도 산위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군내 각 면의 동지와 연락했다. 그리하여 그날 밤 9시경부터 군내의 각 산위에서 일제히 봉화가 타오르고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울려 퍼졌다. 이에 각 부락에서도 온 마을을 돌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나 산발적으로 전개된 만세시위로 왜적들은 어쩔 수 없었다. 험준한 산이 많은 장성군의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산위에서 그리고 밤에 전개하는 만세시위 만큼은 간악한 헌병들도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가장 격렬하게 전개된 모현리의 3·1만세시위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광주와 장성에서 전개된 3·1 만세시위는 3월 한달 동안 계속되었지만 그칠 줄 모르고 4월까지 이어졌으니 4월 3일의 북일면 모현리의 3·1운동이 그중의 하나였다.

4월 3일은 모현리 사람들이 매년 즐겨오던 음력 3월 3일의 화전놀이가 있는 날인데 이를 가장하여 마을의 유지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만세시위에 돌입한 것이다. 모현리의 유지들은 주막인 박승화의 집앞 냇가에서 환담하는 가운데 화제가 광주와 장성의 만세시위로 모아지자 유상설, 고용석 등이 1차 대전후에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었다는 세계정세와 피압박민족의 독립운동에 장성에서도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문선생인 정병모가 만세시위의 결행을 주장하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동조했다.

그리하여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대형 태극기를 만들고 많은 동네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유상설, 고용석, 정병모, 신태식, 유상학, 신상우, 신국홍 등이 앞장서고 20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모현리 일대를 행진하니 어느새 시위 군중은 수백여명으로 늘어났고 마을에 남은 사람들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의지를 높인채 평화롭게 시위를 끝마쳤다.

4월 3일 모현리의 만세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사거리 헌병주재소의 헌병대가 몰려와 마을 사람들을 다그치더니 유상설, 고용석, 유상학, 신진식 등을 주동자라 하여 체포해 가자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유상순, 신국홍, 신경식 등은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다짐했다. 이들은 다음날 아침에 오상구, 박광우 등 약 200여명과 더불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태극기를 흔들고 사거리 헌병주재소로 몰려 갔다. 11시경에 헌병주재소에 도착한 이들 중 정병하, 신태식, 신상우 등이 주재소로 달려들어가 전일의 검거자 석방을 요구했으나 헌병들은 오히려 이들에게 억압적으로 대응하면서 해산을 강요했다. 때마침 장성읍 헌병분대에서 증원헌병들이 들이 닥치더니 무력으로 시위군중들을 강제해산시키고 그 자리에서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신국홍, 정상순, 오상구, 박광우 등을 검거했다.

이러한 탄압하기도 불구하고 모현리 사람들의 투쟁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그러한 불굴의 투쟁의식은 장성군내 각 마을로 확산되어 갔다. 즉 4일밤부터 삼서면, 진원면, 남면, 동화면에서는 산마루에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황룡면, 삼계면, 서삼면, 북일면, 북이면, 북상면, 북하면에서도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시위를 했던 것이다.장성의 3·1만세운동은 수그러지지 않고 계속 되었지만 일제침략자의 주구인 헌병대는 갖은 악랄한 탄압을 서슴치 않았다. 장성에서는 대규모 시위만 하더라도 삼서면 소룡리 교회의 시위를 비롯하여 장성읍의 만세시위 그리고 가장 격렬했던 모현리 만세시위 등 6차의 시위가 있었고 참가인원 약 1500여명 사망자 19명 부상자 15명 검거자 15명이나 되었다. 그것은 확고한 사상적 무장과 견고한 조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 양상이 격렬했고 당당했다.

일본의 헌병사령부가 전남의 만세운동상황을 보고하는 가운데 '발생 당시에 있어서 폭민(暴民: 운동에 참여했던 애국동포)의 심정은 자기의 행동을 크게 과장하여 의기는 앙연(昻然)하여 경찰관이 체포하려고 오른 손을 잡으면 왼손을 들어 만세를 부를 정도로 열광적이어서 경관이 오는 것을 보고 도주하는 것 같은 일은 거의 없다.'고 한 것을 보더라도 이 고장 장성의 만세 시위가 얼마나 격렬하고 당당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당당하고 격렬한 만세운동에 대해서 일제침략자들은 그들의 헌병경찰을 통해 무력을 동원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 장성에서는 그 주력이었던 장성헌병분대가 장성군의 책임을 맡고 그 밑에 장성읍의 월평출장소를 비롯하여 진원면에 영신리 파견소를 두고 있었다. 이렇게 장성군의 요소에 배치되어 있었던 헌병경찰은 무력과 폭력으로 시위군중을 탄압하고 그 대표들을 검거했다.

헌병경찰은 시위 군중 가운데 주동자를 목격한 데로 구속하거나 추종자를 색출하기 위해서 사복으로 변장하고 시위군중 속으로 잡입하여 붉은 색의 표시를 해두었다가 체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동자를 찾아내기 어려우면 군중들을 협박하고 고문하여 기어이 색출하여 혹독한 구타와 악랄한 고문을 가하여 조서를 작성하여 재판에 넘겼다.그러나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애국지사들은 거의 광주지방법원의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이들은 우리민족이 자기나라를 찾겠다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항거하면서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여 일제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애국지사의 항변가운데 신상우와 유상설의 주장을 들어보겠다.모현리 만세운동으로 구속된 신상우는 주장하기를 '본인은 4천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민족의 한 사람이다. 만국평화회의에서 각 민족의 자결을 결정하고 조선민족도 각처에서 크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른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만세를 부른 것이 무슨 죄이냐'고 당당하게 주장했다.또한 모현리 만세운동으로 구속된 유상설은 아래와 같이 대들었다.

본인은 조선민족중의 한 농민으로 시골에 묻혀 있어서 세상일을 잘 모른다. 그러나 타고난 양심은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며 나라에 대한 의리도 대강 짐작한다. 지금 민족이 평화회의를 열고 민족자결을 행하여 조선도 독립할 희망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양심이 발동하여 기쁜 마음에 잠시 조선 독립만세를 불렀다. 사실인즉 자기 나라의 독립을 축원한 것 뿐인데 이것이 왜 죄가 되느냐

1919년 3월 1일 정오부터 울려 퍼지기 시작한 대한독립만세소리는 전국의 방방곡곡을 울렸고 그것은 의리와 충성심이 강한 장성에서도 힘차게 진행되었다.장성 출신으로 만세운동에 관련되어 구속된 사람은 광주의 만세운동에서 박일구, 김기형이 있고 장성에서의 만세시위로 구속된 삼서면 소룡리의 송주일 외에 나머지는 모현리 만세운동에 관련된 사람들이다. 그들의 명단과 형량을 살피면 아래와 같다.

박일구 (22세) 장성읍 징역 3년 광주만세운동 관련
김기형 (25세) 북이면 징역 1년 6월 광주만세운동
송주일 (28세) 삼이면 징역 1년 삼서면 소룡리 만세운동
유상설 (30세) 북이면모현리 징역 2년 북이면 모현리 만세운동
고용석 (25세) 〃 징역 2년 〃
정병모 (39세) 〃 징역 1년 6월 〃
신태식 (30세) 〃 징역 1년 6월 〃
신상우 (31세) 〃 징역 1년 6월 〃
신국홍 (20세) 〃 징역 1년 6월 〃
유상학 (38세) 〃 징역 1년 〃
유상순 (38세) 〃 징역 1년 〃
오상구 (29세) 〃 징역 6월 〃
박광우 (51세) 〃 징역 6월 〃

일제침략자들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다 죽은 줄 알았던 우리 민족은 1919년의 3·1운동을 통해서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정의의 고장 장성에서도 3·1운동의 열기가 거세었으며 여러차례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비롯해 산 위에서 봉화를 올리고 산발적이며 간헐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쳐 일제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며 우리민족의 위대함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3·1운동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그것이 우리나라 민족운동의 갈길을 제시했고 민족의 단결을 촉진시켰으며 세계에 대해서 한민족의 위상을 정확하게 알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의미와 영향은 매우 크다.

3·1운동의 의미로는 3·1운동은 모든 계층이 총망라되고 직업의 귀천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이 하나의 목표 아래서 하나의 방법으로 전개한 운동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3·1운동을 통해서 민족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3·1운동의 전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민족운동에서도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뭉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3·1운동 이후 건립된 상해임시정부의 정체를 민주공화국으로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준 셈이다.다음으로 3·1운동은 일제의 통치방법을 바꾸게 하였으니 일제침략자들은 총칼에 의해서 무단정치를 자행하여 한민족을 통치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는데 3·1운동은 그것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한민족을 통치할 수밖에 없었다.

끝으로 3·1운동은 세계 여러나라에 일제침략자들의 비인도적이고 야만적인 식민통치를 인식시키는데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동양사회에 별로 관심이 없거나 무지한 구미 여러나라에게 한국식민지화의 합리성과 당위성을 역설하였고 한국을 근대화시켜 주며 한국민의 행복과 번영을 주는 길이 식민통치라고 선전했다. 특히 미국과 영국은 일제의 한국침략에 동조한 나라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3·1 운동시위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일제히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을 보고 세계의 이목들은 한국민의 우수성과 용감성을 새로 인식하게 되었고, 3·1 운동의 무력진압과정에서 야만적인 일제 군경의 살상행위는 선교사들이나 다른 정보계통을 통해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일본인의 폭압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한편 3·1운동이 일시적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을 결정하였다는데 끝나지 않고 많은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르고 나서 민족운동의 핵심세력으로 활동하였다.

광주의 경우만 하더라도 최한영, 서정희 등의 민족활동과 광주청년회의 핵심요원들이 모두 3·1운동의 관련자들이었으며 이것은 뒤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배후세력이 되었다.장성의 상황도 비슷하였으다. 박일구의 계속적인 활동과 모현리의 3·1운동가인 신경식·유상순 등이 민족운동을 계속하였으니 그들은 오북학숙(鰲北學塾)을 설립하여 민족지도자를 양성하였다.한편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국내외의 우국지사들과 연락하면서 해외의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계속적으로 활동하였다. 즉, 황룡면 금호리 출신인 김영식은 1919년 4월에 서울에서 독립운동 단체인 애국단(愛國團)에 가입하여 활약하던 중 삼계면 상도리 출신인 이기화에 접근하여 가입토록 하여 서로 협력하면서 독립투쟁을 했다. 그리고 고창군 성송면의 강대선과 유희영을 애국단에 가입하게 하여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면서 부호인 강대선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해임시정부와도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계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했던 것이다.

또한 장성출신 기동연은 상해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 상해임시정부가 본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조직하기 위해 설치한 비밀연락망)에서 전라남도의 책임자(督辦:독판)로 크게 활약했다. 그리고 의병항쟁에 관련 있는 의사들과 신예 예수교 출신의 지사들이『국민대회』를 조직하여 상해 방면과 연락해 가면서 전라도 일대의 독립자금조달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자 장성출신으로 황희연이 여기에 참여하여 크게 활동했다.전국민이 참여하여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던 3·1운동이 뿌린 씨앗은 독립운동에 새로운 좌표를 설정하여 이후 민족운동의 방향을 제시했고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작용하여 위축되고 억압된 우리민족을 크게 고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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