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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현대와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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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식민정책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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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정치의 표방

일제침략자들은 식민통치의 책임자인 총독을 현역대장으로 임명하여 정식군복에 각종 훈장을 패용하여 한국민을 위협하는 살벌한 분위기 마저 느끼게 했었다. 그러나 문화정치기에는 총독을 민간인도 임명 가능하게 개정했으며 군인총독이더라도 민간인 복장에 미소까지 띠면서 유연한 표정으로 총독으로 부임했다.

3·1운동 이후에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또(齋 )는 부임하면서 조선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고 문화적 제도의 혁신으로 조선인을 유도하여 그 행복과 이익의 증진을 도모한다고 천명했다. 그는 해군대장이였으며 이후 임명된 총독으로 민간인 출신은 한 사람도 없었으니 총독을 민간인으로 임명할 수 있다는 규정이 얼마나 허구였는가를 보여 주었다.다음으로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경찰에게 치안을 맡겼다는 점이다. 헌병대신 경찰로 대체하여 치안을 맡겼다는 것은 우리 국민을 군대식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경찰은 번쩍거리는 칼을 차고 위압적으로 국민을 대했으며 치안과 위생 및 질서를 유지한다고 하여 국민들을 위협하고 엄중하게 다스렸다.그리고 관리나 교사들이 제복을 입고 칼을 차던 제도를 그만두었다. 또한 한국인에 대한 대우에 있어서는 교육수준을 일본인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고 표방하여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으나 학생의 대부분은 일본인이 차지하고 조선인은 친일지주나 일본의 앞잡이들의 자손들이었으므로 조선인의 입학은 극히 제한되었다.그리고 총독부의 관리에 한국인도 등용했으나 극소수에 그쳤고 면에나 군에 서기로 한국인을 채용하여 그들의 통치에 활용하였으며 한글신문도 허가했으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발행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글신문이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느냐 그렇지 않으면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조했느냐 하는 문제는 언제나 논의의 대상이며 시각의 차에 의해서 평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제침략자들의 문화정치는 몇 가지 달라진 내용도 있지만 그것은 결코 식민통치의 완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유를 통해 한국인의 반발을 줄이고 보다 철저한 탄압과 수탈을 위한 기만정책에 불과하였다. 총독에 민간인을 임명할 수 있다는 규정은 한번도 지켜지지 않았고 헌병대신 치안을 맡은 경찰은 그 조직과 인원이 대폭 증가하여 한국인에 대한 감시와 억압이 더해졌고 이에 따라 감옥이 증설되고 사상범도 증가하였다. 한국인의 총독부 관리 임용도 형식에 불과했고 학교가 증설되었지만 3개 면에 1개의 보통학교가 개설되었다. 이것도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하수인을 양성하기 위해서였고 일본인과의 차별교육도 여전했으며 민족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극심한 언론통제로 기사의 삭제, 압수, 정간, 폐간 등이 계속되었다.결국 일제의 문화정치는 기만적 탄압정책으로 일본통지의 본질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오히려 더욱 그 심도만 깊어갔던 것이다.

(2) 식량의 약탈

일제침략자들의 식민통치 제2기는 산미증산계획을 추진하여 한국에서 쌀을 증산하여 일본으로 유출시켜 일본인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어 갔다. 일제는 쌀을 증산한다는 명분 아래 산미증산계획을 시행하고 자기들이 필요한 만큼의 쌀을 증산량에 관계없이 수탈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던 것이다.이러한 쌀의 강탈은 곧 우리농민생활의 파탄을 가져 왔다. 식생활에서 쌀 소비량을 보면 일본인은 1인당 년 1.2석을 소비하는데 반하여 한국인은 0.4석에 불과하여 일본인의 쌀 소비량에 비하여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한 식량부족을 메꾸기 위해 만주로부터 옥수수, 콩, 등의 잡곡을 들여 왔으니 자기가 생산한 양질의 쌀은 일본인에게 빼앗기고 만주에서 생산된 옥수수, 콩, 조 등의 잡곡으로 굶주린 배를 채웠던 것이다.

이와 같은 농민생활의 급격한 궁핍화에 따라 많은 농민은 영세한 자작겸 소작농이나 소작농으로 전락되어 갔고 한편으로 많은 토지가 일본인에게 점탈되어 갔다. 가령 장성의 경우만 하더라도 1931년 현재 일본인으로서 50정보 이상의 대토지 소유자는 다음에 든 바와 같이 일곱이나 헤아릴 정도였다.

장성에서 5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일본인 명단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
세천농장(細川農場), 덕천농장(德川農場), 고교농장(高橋農場)
전중농장(田中農場), 길전직량(吉田直良), 부등(富藤)
한편 장성군의 농민이 얼마나 영세화되어 갔는지 1931년 현재 계층별 농가호수를 살펴보면 다음 [표 2-31]과 같다.
[표 2-3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순 소작이 전체의 약 60%에 이르고 있고 자작겸 소작까지 합치고 보면 전체의 약 92%나 된다.

[표 2-31] 장성군 계층별 농가호수

[표 2-31] 장성군 계층별 농가호수 - 지주, 자작농, 자작겸 소작농, 소작농, 합계를 나타낸 표
지주자작농자작 겸 소작농소작농합계
3929414,8549,11315,200

위와 같이 격증된 소작농들은 생산고의 50%가 넘는 소작료 외에도 비료대, 수세, 지세, 곡물운반비 등을 부담하였으니 그 생활은 파탄상태가 될 것이다. 이에 일부는 화전민 또는 유이민이 되었지만 많은 농민들은 살기 위해서 싸워야만 했다. 즉 일본인 지주들의 횡포나 수탈에 대해서 일방적인 소작권 이동을 반대하고 소작료의 경감을 요구하는 소작쟁의를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소작쟁의는 농민들의 생존을 위한 심각한 투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항일민족운동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러한 농민의 항일운동은 비단 소작농만이 아니라 지주들에 의해서도 전개되었다. 가령 장성군의 경우를 보면 일제침략자들이 주민의 의사에 반하여 수리조합을 만들고 조합이 일방적으로 수세를 결정한데 대하여 장성 황룡면 수리조합관계 지주들은 황룡면사무소에서 총회를 열고 수리조합의 해산과 조합비 거부를 결의한 후 끝까지 저항했던 것이다.한편 장성읍의 독립운동지도자 정선유도 수세불납운동에 참여 한 바 있거니와 또한 농민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인촌의 방직공장에서 생산한 광당목이라든가 별표 고무신 등을 공장도 가격으로 매입해다가 염가로 농민에게 제공하는 가운데 농민운동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3) 산업의 침투와 자원의 약탈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대외무역은 급격히 증가하였는데 그것은 일본에 의한 무역독점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1910년의 경우 수출의 77% 수입의 64%가 일본과 교역한 것이었으며, 1919년에는 수출의 90% 수입의 65%를 대일무역이 차지했다. 1920년대에는 한일관세제도 마저 철폐함으로써 일본과의 무역량이 더욱 증가하였고 따라서 무역의 대일의존 역시 더욱 심했다.
그 뿐 아니라 무역의 내용에 있어서도 수입품은 일본에서 제조된 일용품이 수출품은 한국에서 생산된 원료나 식료품이 각각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이는 한국이 일본의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로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한편 1차 대전의 전쟁경기가 지나가자 일본 자본가들은 한국을 투자 시장화하는 가운데 불경기를 타개하려했다. 장시간 노동과 저렴한 임금이라는 노동조건과 값싼 자원은 유리한 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자본의 진출이 차츰 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침략자들은 1910년에 내렸던 회사령을 1920년에 폐지하여 회사설립이 허가제에서 계출제로 고쳐서 일본자본의 진출과 일본인 회사설립을 활발하게 했다. 장성군의 1931년 현재 일본인 회사를 살펴보면 다음 [표 2-32]와 같다.

[표 2-32] 장성군의 일본인 회사

[표 2-32] 장성군의 일본인 회사 - 소재지, 회사명, 사장, 사업내용, 자본금을 나타낸 표
소재지회사명사장사업내용자본금
장성읍 영천리장성합동운송주식회사길전(吉田)운수, 창고, 금융, 자동차10만원
사거리사거리 합동운수합자회사유생(柳生)운송, 보험대리, 금융중개물품위탁매매1만원
장성읍 영천리주식회사 환육상점진전(津田)장유, 양조 판매, 금융, 물품판매, 보험대리업5만원

반면 한국인에 의해서 설립된 회사를 들면 다음 [표 2-33]과 같다.

[표 2-33] 장성군의 한국인 회사

[표 2-33] 장성군의 한국인 회사 - 소재지, 회사명, 사장, 사업내용, 자본금을 나타낸 표
소재지회사명사장사업내용자본금
장성읍 영천리장성곡자주식회사유인수곡자제조판매, 곡자원료구입판매,금융, 토지임대2만원
사거리남선흥업주식회사성진영토지개간, 수리사업, 금융50만원
사거리오가식산주식회사전동섭동산 및 부동산 매매, 영농, 금융, 운송, 보험대리업10만원

이와 같은 일본자본의 계속적 침투는 필연적으로 민족자본의 성장을 저해하고 일본자본주의의 한국지배는 한국인 노동자들은 장기간 노동으로 혹사하고 저렴한 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노동쟁의를 전개하기도 했다. 장성에서는 1925년 6월 13일에 장성노동조합을 창립하고 같은 해 12월 9일에는 장성정미노동조합이 창립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노동시간의 단축이라든가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는 노동쟁의를 전개하면서 자본가의 횡포에 끈질긴 저항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생존권투쟁인 동시에 항일민족운동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4) 민족실력양성운동

거족적인 3·1운동의 전개는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여 새로운 민족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게 하였으니 그 하나가 민족실력양성 운동이었다. 1920년대에 들어와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소위 문화정치라는 기만적인 유화국면으로 접어드는 틈을 이용하여 우리민족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움직임이 사회, 문화, 경제의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한글신문인 동아일보과 조선일보는 언론을 통해 국민교육과 민족계몽에 앞장섰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를 내세우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각종 문화, 체육행사를 주최하여 사회, 문화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들 신문들은 1933년에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국민들에게 홍보하여 한글 보급에 압장섰다. 그리고 1936년에 동아일보가 베를린 올리픽의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살하여 보도한 사건은 당시 언론기자들의 민족적 항일자세를 엿볼 수 있게 하였다.

한편 민립대학설립운동은 1920년에 이상재 등이 일제의 차별교육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의 대학을 세우기 위해 설립했는데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으나 총독부의 방해로 결국 실패하였고 오산학교,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을 대학으로 승격시키려 했으나 당국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또한 종교계의 민족운동도 활발했으니 천도교에서는 제2의 3·1운동을 계획하여 1922년 3월 1일에 자주독립선언문을 발표했고, 문화운동에도 참여하여 1919년에 개벽사(開闢社)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인 [개벽]과 [부인], [어린이], [학생] 등을 발행하여 민중의 자각과 근대문물의 이해에 이바지했다. 불교계에서는 한용운이 불교개혁운동을 전개하여 친일승려의 배척과 일본불교의 침투저지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근대적 교육기관(동국대의 전신)을 설립하기도 했다. 기독교계는 민족교육운동과 각종 문화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신사참배에 저항하여 폐교되거나 순교하는 성직자들도 많았다. 그 밖에 대종교는 만주 등지에서 전개된 독립군투쟁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원불교는 장성의 이웃인 영광에서 창시되어 개간사업과 저축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역량을 배양하는 데 노력하였다.

경제계에서도 한국 경제인들에 의해서 민족산업의 육성과 민족자본의 형성을 통한 경제자립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한국인이 경영하는 기업들이 생겨났는데 그 가운데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찬했던 대기업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영세기업들이었다. 당시의 민족자본은 일본의 재벌들에 대항할 수 없는 미약한 것이었고 민족적 뒷받침이 없이는 성장하기 어려웠다. 이에 민족산업의 육성과 경제자립을 위한 대중운동으로서 물산장려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한말의 국채보상운동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1923년에 조직된 조선물산장려회가 중심이 되어 자급자족, 국산품애용, 소비절약 및 금주, 금연 등의 운동을 전개했다.

2. 민족문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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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족문화수호운동

일제침략자들의 기만적 식민통치인 문화정치는 한민족으로 하여금 적극적인 투쟁에 의한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합법적으로 인정된 문화운동의 방향으로 전환하게 함으로써 자연히 현실과 타협하게 하였다. 또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한다는 구실로 일제침략자들은 한국학을 연구하게 유도하였으나 그 목적은 한민족의 실태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여 식민지배에 도움을 얻기 위안 것이었다. 또한 일제의 한국문화 연구는 한민족을 회유하여 친일세력으로 양성하고 이를 통해서 한국의 문화를 왜곡하고 한민족을 이간시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정책으로 도리어 한국문화의 내용을 왜곡하고 바르지 못한 문화인식을 주입시켰으므로 이를 저지하고 대항하기 위해 민족문화수호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문화수호운동은 1930년대의 민족운동의 한 방법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국어와 역사연구에 많은 노력이 집중되었다.3·1운동 이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한글로 간행됨으로써 한글보급에 이바지하였고 특히 1921년에 대한제국시대의 한글연구기관인 국문연구소의 후신으로 조선어연구회가 발족되어 국어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다. 이들은 강습회, 강연회 등을 통해서 연구와 보급에 노력하였으며 1927년에는 동인지 [한글]을 간행했다. [한글]은 재정난으로 그 발간이 곧 중단되었지만 1931년에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그 이름을 바꾸면서 속간되었다.

조선어학회는 한글교육에 힘써 사립학교에 국어교재를 보급하기도 하고 회원들이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한글을 보급하는데 노력하였다. 조선어학회의 큰 성과 가운데 하나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이었다. 이 한글맞춤법은 1933년에 이희승, 최현배 등을 중심으로 연구를 거듭해 제정한 것으로 조선어학회에서는 이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신문사와 협의하여 국어강습회를 가졌으며 야학운동을 통해 전국적으로 우리글 공부가 성행했다. 조선어학회는 1929년부터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했으나 총독부의 방해로 중단되었으며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가 민족운동단체라 하여 회원들을 체포하고 조선어학회는 해산당하고 말았다.

한편 한국사를 왜곡하고 한국사의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켜 타율성, 사대주의, 정체성 등을 강조하는 식민주의사관(황국사관)에 대하여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민족의 기원을 밝히고 민족문화의 우수성과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을 강조하는 일련의 연구작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한국사를 연구하였던 박은식과 신채호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직접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그러한 속에서도 한국사 연구를 진척시켰다.

박은식은 상해에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한국통사]를 서술하여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서술했고 신채호는 주로 고대사 연구에 치중하여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했다. 국내에서는 남궁억, 이능화, 최남선, 문일평, 정인보, 장도빈 등도 민족주의 역사학을 계승, 발전시켰다. 한편 1934년에는 실증사관을 표방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진단학회를 조직하여 [진단학보]를 발행했고 유물사사관에 입각한 세계사적 발전법칙에 따라 한국사를 체계화 하려는 사회경제사학회가 대두하여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했다.

1920년대에는 국학 뿐 아니라 문학 부문에서도 민족문화운동이 일어났다. 이미 1919년에 동인지 [창조]가 발간되어 자연주의 문학이 일어났으며 3·1운동이 실패한 이후에는 퇴폐와 허무를 주제로 한 퇴폐주의 문학이 동인지 [폐허](1920)를 중심으로 나타났고 한편에서는 염세주의적이며 현실도피적인 낭만주의 문학이 일어나 동인지 [백조](1922)가 발간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민족주의, 사회주의 문학은 모두 위축되고 대신 정치적 현실과 사회적 경향을 떠난 소위 순수문학이 대두하였으나 그나마도 일제말기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하여 탄압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상황에서 민족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한국적 정서를 살리고자 연극, 영화의 활동은 활발하게 되었다. 연극에 있어서는 김우진 등의 극예술협회(1921)와 박승희의 토월회(1922)에 의해서 신극이 개척되었다. 그 가운데 김우진은 장성출신으로 한말에 장성군수와 목포감리를 하였으며 동학농민혁명때 전봉준과 전라감사 김학진을 연결시켜 전주화약을 성립시킨 김성규의 아들이었다, 그는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많은 시와 희곡을 썼는데 그 작품으로 [정오], [산돼지] 등이 유명하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동지들과 [극예술협회]를 만들고 신극발표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김우진의 활동에 이어 1931년에 서항석 등이 극예술 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신극은 보다 크게 발달했다.영화에 있어서는 나운규 등이 민족적 전통과 정서가 담긴 영화를 제작하여 민족의 저항의식을 크게 고무시켰는데 그 대표적 작품이 아리랑이었다.

(2) 민족교육의 추진운동

일제침략자들은 3·1운동으로 무단독재를 바꾸어 유화정책인 기만적 문화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교육면에서는 많은 변화를 초래했으니 교원의 제복과 대검(帶劍)을 폐지하고 교육령의 개정등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2년에는 제2차 조선교육령이 제정되었는데 얼핏 보기에는 우리민족을 위한 교육으로 진일보한 것 같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겉치레요 실직적으로는 보다 교활한 기만적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교육정책인 것이다.

먼저 한국인과 일본인의 교육을 동일하게 한다 하였지만 실제는 차별을 두었다. 즉 1925년 현재 한국인과 일본인의 취학률을 비교하면 초등학교는 1 : 6으로 월등하게 일본이 앞섰으며 남자중등학교는 1 : 35로 엄청난 격차가 나며 여자중등학교는 1 : 337로 그 격차가 더욱 벌어졌고 대학예과는 1 : 131이었다.취학뿐만 아니라 행정적 통제나 재정적 차별대우가 심각했다. 예를 들면 장성의 경우 1931년 현재 한국인의 공립보통학교가 9개교였는데 일본인의 심상소학교가 1개교였다. 8개 공립보통학교의 교장은 일본인이 임명되었고 공립보통학교의 한 학급 평균 경상비가 1,308원인데 비하여 일인학교나 심상소학교의 경비는 1,840원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6년으로 하게 되었지만 지방에서는 4년제도 많았다. 장성군과 전라남도의 수업 연한제 보통학교를 보면 다음 [표 2-34]와 같다.

또한 보통학교에선 조선어를 정규과목으로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조선어를 부과하여 민족의 불만을 해소한 듯 하였지만 그것은 사탕발림의 형식에 불과했다. 보통학교의 경우 주당 총 수업 시수 26∼27시간 중에서 일본어 시간이 평균 10시간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표2-34] 장성군및 전라남도의 수업연힌제 보통학교수

[표2-34] 장성군및 전라남도의 수업연힌제 보통학교수 - 지역, 연도, 공립보통학교(6년제, 4년제, 계), 사립보통학교(6년제, 4년제, 계)를 나타낸 표
지 역연 도공립보통학교사립보통학교
6년제4년제6년제4년제
장성군1931639 11
전라남도1928102841861910

보통학교는 일본어 전문학교나 다름없이 일본어를 중점적으로 교육하였다.한편 일본인과 대등하게 대학교육의 기회를 준다 했지만 한국 유일의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은 한국인의 입학을 극히 제한하였다. 그리하여 경성제국대학의 국적별 취학율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비율이 무려 1 : 131이었다.

이와 같은 총독부의 제2차 조선교육령은 개선이 아니라 오히려 기만적인 식민지교육의 강화를 위한 개악이었고 그러한 그들의 정책의지는 날이 갈수록 가중되어있다. 1927년에 부임한 우원(宇垣)총독은 '교육 즉 생활, 생활 즉 교육'이라 하여 실과를 강화하고 일본정신교육을 철저히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면서 실과교육에 전념하여 일제의 침략에 동조하는 외에 다른 생각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일제침략자들의 식민지교육이 강화되어 감에 따라 항일독립의 기조로써 우리민족의 자주성과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한 민족교육운동이 추진되었다. 그것은 조선교육회의 조직이며 조선인의 민립대학설립운동이었는데 민립대학설립운동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조선교육회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조선교육회는 민족의 앞날을 좌우하는 교육문제를 연구, 해결하고자 1920년 6월 20일 민족주의적 의식을 가진 교원에 의해서 발기되었는데 그 발기취지문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금일 조선의 교육문제는 이것이 결코 한가한 사람의 한담재료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장래 소장(消張)에 관한 분기점이며 사할에 관한 문제이다... 근본의 문제를 등한에 부치고 민족의 부활이니 사회의 개선이니 아무리 절규하며 아무리 기대할지라도 필결 도래할 기(機)가 없을 것이다.이러한 민족주의적 교육이념에 따라 6월 26일에 그 창립을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민족교육의 연구를 위한 중심기관으로서 자주적 기풍과 독립적 자각 아래 민족 사회의 발전을 추구하는 근본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하는데 큰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한편 관립학교를 통한 식민지교육에 반발하는 민족교육운동으로서 민간교육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하나는 곧 사학의 설립과 민족교육운동이었다. 1920년 3월에 사립학교 규칙이 개정되어 통제가 약간 완화되면서부터 사립학교가 다소나마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3·1운동 때 폐교되다시피 되었던 정주의 오산학교가 다시 일어났고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가 명실상부한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새로운 발족을 했으며 그밖에 경향 각지에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전남의 중심지인 광주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의 발상지인 광주고등보통학교가 1920년 5월 1일에 지방 유지들의 적극적 참여로 개교하게 된 것도 그러한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장성에 인접한 전북 고창에도 고창고등보통학교가 등장하여 호남의 양대 사립학교로 많은 인재를 배출했으며 민족역량의 축적에 큰 공헌을 했다. 광주고보나 고창고보에는 이 고장 장성출신을 비롯해서 호남의 인재들이 모여들어 민족혼을 배우고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운동에 많은 이바지를 하였다.한편 장성의 경우는 일찍이 1906년에 사립 장명학교(長明學校)가 설립된 바 있었다. 이 학교는 유림들이 장성 향교의 명륜당 자리에 세운 사립학교로 향교의 변진걸이 중심이 되어 민족교육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 고장 사람들에게 민족정신을 함양시켰으며 학생들의 항일사상을 고취시켰는데 1908년에 이 학교는 장성보통학교로 바뀌었으며 그것이 오늘날의 성산초등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온 정선유가 장성읍내에 3·1운동 이전에 숭실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함양시켰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정선유는 학생 100여명을 만세 시위에 참여시켰는데 정선유는 뒤에 3·1학교로 학교 이름까지 바꾸고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다가 일제의 압력으로 8개월 만에 민족사상학교라 하여 폐교당하고 말았다.또한 모현리 3·1 만세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었던 신경식, 유상순 등이 사거리에 오북학숙(鰲北學塾)을 세워 민족혼을 고취하였음은 이미 서술한 바 있다.한편 1920년 9월에 월평보통학교가 사립으로 설립되었는데 그것을 소상하게 보도한 당시의 동아일보 보도를 대략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월평 김씨(울산 김씨) 일문이 동교 유지회를 조직하고 회원이 유지비를 부담하기로 하였으며 설립 대표자 김시중이 자기 소유가옥 5동 90평과 대지 697평을 교사 신축까지 무료 대부하고 설립자금 600원도 현금으로 기부하였다. 유지회의 주된 역원은 회장에 김은중, 총무에 김시중 그리고 이사에 김요현과 김요극이었다. 1921년 7월 이후에 동교 유지에 있어서는 설립자 김시중 4,000원 교주 김요중 2,800원을 비롯한 김씨 5명의 출연이 있었고 나아가 설립자 김시중, 교주 김요중의 연부출자 그 밖의 수업료 등으로 경비에 충당하게끔 하였다. 그리고 이과 실험 기구 구입을 위해서 지방유지 및 김씨 여러분의 의연이 있었다.

이렇게 설립된 사립 월평보통학교는 꾸준히 민족교육에 이바지 하였는데 일제의 강압에 의해

1924년에 공립학교로 흡수하여 현재의 월평초등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1924년 9월에는 강만회가 북하면에 손룡보통학교를 사립으로 설립했는데 당시는 1학급에 생도가 32명이었다.다음으로 민간교육활동으로 당시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서당이었다. 일제침략자들은 선각자들이 세운 사립학교에 대해서는 심하게 사찰하고 감시하였지만 서당에 대해서는 그 보수성을 보존시키기 위해서 심하게 통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당교육은 위축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거의 마을마다 서당이 운영되어 신식교육을 거부하거나 받지 못한 사람들의 교육장이 되었다. 그런데 일제침략자들의 식민지교육이 강화되자 많은 서당들이 종래의 보수적인 한문교육을 탈피하고 근대적 초등교육에 접근하면서 문맹을 퇴치하고 민족의식을 촉구하게 되었다. 이에 일제침략자들의 탄압이 있게 되었는데 1931년 현재 장성군과 전라남도의 서당의 상황은 다음 [표 2-35] 와 같다.

[표2 -35] 장성군및 전라남도의 서당

[표2 -35] 장성군및 전라남도의 서당 - 지역, 서당수, 직원수, 학생수를 나타낸 표
지 역서당수직원수학생수
장성군7071663
전라남도4441,52720,195

그런데 [표 2-35]의 통계에 많은 서당수가 누락되었음을 감안한다면 민족교육에 공헌한 서당의 역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한편 민족교육활동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은 노동야학이었다. 그것은 본래 박은식의 [서우] 15에 실린 글 '노동동포의 야학'에서 유래된 것이며 한말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러한 노동야학이 1920년대에는 대중적 민족교육활동으로써 보다 광범위하고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나 농민을 대상으로 하여 조선어, 조선역사 등의 과목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드높히며 농업, 과학, 산술 등 과목을 통해서 기술을 습득시키는 교육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노동야학으로서 남자야학, 여자야학 할 것 없이 전남에서도 많이 설치 운영되었는데 장성의 경우는 1925년 6월에 장성여자야학이 설립 운영된 바 있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장성의 정선유는 조선일보 장성지국을 운영하면서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는 한편 각면과 각 부락에 야학을 설치하여 문맹퇴치에 크게 공헌했다.

이러한 야학이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일제 침략들은 탄압을 하였고 마침내 1930년대에는 야학을 강제로 폐쇄시켜버렸다. 다른 한편에서는 Y.M.C.A가 방방곡곡에 농민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어, 산술, 보건 등을 교육하여 민간교육활동에 크게도움을주었다.일제침략자들의 식민교육이 강행되자 각계 각층에서는 끈질기게 민족본위의 교육을 주장하게되었다. 직접 민족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자들도 강경하게 주장했거니와 피교육자인 학생들 또한 민족본위의 교육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3·1운동 이후 격화된 전국적인 학생들의 동맹휴학에 있어서는 민족주의와 독립사상에 입각한 요구조건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서는 두드러진 것이 민족본위의 교육이었다. 그 실례로 1928년 6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면서 내건 요구조건 가운데 하나가 '한국인 본위의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인 교원을 다수 채용하는 동시에 한국역사와 한국어문법을 교수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제당국에 의해서 묵살되었고 그로 인한 학생들의 분노는 마침내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폭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민족운동 단체 신간회도 전국 각지에서 활동할 때마다 한국인 본위 교육제의 실시와 교수 용어의 한국어 사용을 역설하였다.

또한 언론기관에서도 민족교육을 주장하였으니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1∼13자 사설에서 한국인 교육용어를 일어로 강제함을 폐지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같은해 4월 20∼23일자 사설 '조선인과 조선역사'와 1927년 11월 27일자 사설 '조선인 교육제'에서 한국어와 한국사 교육을 강력하게 주장했다.이러한 민족본위의 교육요구를 일제침략자들은 거부하고 기만적 식민지교육을 강행하면서 만주를 점령하고 대륙을 침략하는 제국주의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3. 항일민족운동과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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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10만세운동

3·1운동에서 민족의 집결된 역량을 국내외에 과시한 우리 민족은 사회주의의 유입과 함께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력소가 생기었다. 그리고 정열과 정의감에 불타 있던 학생들은 새로운 사상을 탐구하면서 민족의 해방을 위한 길을 찾아 나섰으며 농민들은 소작쟁의를 일으키고 노동자들은 노동쟁의를 일으켜 그들의 생존권을 지키고 나라의 독립을 추구했다. 특히 장성을 포함한 전남지역은 소작쟁의가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어 그 열기가 뜨거웠다.

그런데 1926년 4월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서거하자 반일감정이 극도에 달하고 인산일을 기해 3·1운동과 같은 만세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만세계획은 사회주의계열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과 이와는 별도로 학생들 중심의 두 갈래로 추진되고 있었는데 사회주의 계열은 일본 경찰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어 수포로 돌아갔다.전문학교와 중학교의 학생들이 각각 독자적으로 추진한 만세시위가 실현되었으니 순종의 장례행렬이 창덕궁 앞을 지날 때 민중들의 통곡이 진동하자 학생들은 만세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1926년 6월 10일 전개된 6·10만세 시위는 비록 일본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3·1운동에 이은 대규모의 민족운동이었고 학생이 중심이 되었다는 면에서 큰 뜻이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학생 210여명이 검거되어 47명이 수감되었는데 그 가운데 장성군 황룡면 황룡부락 출신으로 연희전문학교 문과 1학년이었던 김영하도 들어 있었다.

(2) 신간회 활동과 장성

1920년대∼1930년대 초의 민족해방운동은 대체로 두 갈래의 큰 흐름으로 파악 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사회, 공산주의 운동이요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 운동이다. 그러나 이 두 갈래의 큰 흐름은 민족운동의 이념, 방법, 주도세력에 따라 여러 갈래로 세분되었으니 1926년말 현재 조선내에 350여 개의 사상단체가 존재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주의자들과 사회, 공산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창립된 것이 신간회였다.1927년 2월에 결성되어 1931년 5월까지 존속했던 신간회는 본부를 서울에 두었지만 시기에 따라 120∼150여개의 지회를 가졌으며 회원수는 4만명에 이르렀다. 신간회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하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합법적인 민족운동단체로 일각에서 진행되고 있던 자치운동을 기회주의로 철저히 규탄하는 한편 착취기관의 폐지, 특수취체법의 폐지, 교육차별의 금지, 한국어 교육의 실시, 과학사상연구의 자유 등을 주장했다.

신간회는 자매단체인 근우회와 같이 학생운동, 노동자와 농민운동을 지원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고 강연회를 개최하여 민족역량을 축적했으나 일제의 간부체포와 사회주의계열의 탈퇴로 1931년에 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신간회 활동에 앞장섰던 전남의 여러 지회와 함께 장성지회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신간회 장성지회는 1927년 12월에 결성되었고 계속적이고 꾸준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1929년 1월 4일에는 부회장 송종근이 출판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으며, 2월 1일에는 장성지회에 배포된 유인물 사건으로 구속된 김시중 등 5명의 언도공판이 있었는데 송종근은 금고 6월 나머지는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이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장성의 신간회 활동은 계속되다가 1931년 2월 26일 오후 4시 30분에 장성역전 갑자청년회관에서 집행위원장 김시중의 사회로 제4회 정기대회가 열렸는데 그 진행상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임시집행부로 의장 임대규와 서기 김 옥을 선출하고 전회의 회의록을 낭독 통과하고 경과보고 회계보고 일반정세 보고 등을 한 다음 임원과 대표회원을 선거하였다. 피선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집행위원장 -김시중
집행위원 -이혁구, 이영구, 임종국, 김규환, 김옥, 김기형, 변동갑
동 후보 -유긍희, 송종근, 김장환
검사위원장 -신경식
검사위원 -임대규, 고형주
대표회원 -김시중, 송종근, 김규환

위와 같이 임원이 선출되자 건의안의 건과 예산안은 신임 집행위원회에 일임하기로 했다. 이어 경성지회 문제로 들어가 위원장 김시중이 경성지회에서 온 통의문을 낭독하고 본부의 경과보고가 있자, 회중은 경성지회의 경솔함을 통론하고 해산문제에 대해서는 신간회보다 더 진보적인 조직형태의 출현기까지 이를 거부한다고 의결하고 오후 8시 40분에 폐회하였다.이렇게 눈부신 활약을 한 신간회 장성지회에서 정선유는 문화부장으로 활약했고, 장성군 삼서 출신이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확산에 공헌한 나승규는 1927년 12월에는 장성지부의 서기를 맡았고 1929년 6월에는 신간회 복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 후보에 선출되었다.

(3)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장성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들의 독립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194개교의 54,000여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중시위였으며 민족의 전위대인 학생들이 한말의 독립협회시위, 3·1운동 그리고 6·10만세운동에 이어서 또다시 역사발전의 견인차역을 담당했다는 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이다.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상지인 광주고보는 1920년 4월에 인가를 받아 설립된 사립인문중등학교로 광주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세웠는데 일제 당국은 1922년에 관립으로 흡수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의 자제들이 다니는 광주중학과는 달리 광주고보는 광주의 한국인은 물론 전남일대의 농민의 자식들이 다녔는데 이 지방은 일찍부터 일본의 토지약탈과 소작인 수탈로 소유권쟁취운동이나 소작쟁의를 활발하게 전개했던 것이다.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그리고 광주사범학생들은 일제 당국의 차별교육과 식민통치에 분노하여 일찍부터 동맹휴학을 벌였고 1926년 11월에 성진회를 결성하면서부터 학교의 맹휴를 지도하고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성진회는 광주고보의 장재성, 왕재일과 농업학교의 박인생이 주도하여 광주고보, 농업학교, 사범학교 학생들과 함께 조직한 의식써클이나 이것은 뒤에 독서회로 발전하여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의 학교별 독서회와 광주여고보의 소녀회가 학생운동을 추진했다.광주고보를 비롯한 광주의 학생들은 1929년 11월 3일 일제의 차별교육과 억압정책에 항의하여 시위를 벌였고, 장재성, 나승규, 장석천, 강석원 등과 긴밀한 연락을 통해 서울로 확산시켰고 광주의 학생시위는 신간회와 그 자매단체인 근우회 그리고 사회주의 단체인 조선학생전위동맹의 노력으로 전국으로 확대되어 전국의 194개교 54000여명의 학생들의 만세시위로 전개했다.

이러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장성 출신으로 적극적인 참여와 지도를 한 사람들이 많으니 그 활동을 살펴보겠다.먼저 성진회 활동에 참여한 장성출신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김기주 서삼면 장산리 훈도 23세 1심(징역 2년) 2심(징역 1년)
김승규 삼서면 대곡리 농업 31세 1심(징역 1년 6월) 2심(징역 1년)
김종선 서삼면 금계리 훈도 24세 광주지법예심종결(면소)
송종근 서삼면 송현리 농업 39세 광주지법예심종결(면소)
독서회활동에 참여한 장성출신 은 다음과 같다.
송동식 장성면 영천리 학생 24세 1심(징역 4년) 2심(징역 2년)
이영백 장성면 영천리 학생 23세 1심(징역 3년) 2심(징역 1년)
김병기 북상면 덕재리 학생 18세 1심(징역 2년 6월) 2심(징역 1년)
김종기 북삼면 백계리 학생 20세 1심(징역 2년 6월) 2심(징역 1년)
최달봉 동화면 용정리 학생 21세 1심(금고 6월: 5년간 집행유예)
박중진 진원면 진원리 학생 21세 1심(금고 4월: 5년간 집행유예)

성진회와 독서회의 비밀결사와 더불어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맹휴투쟁이 계속적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중 가장 격렬했던 것은 1928년 6월 26일의 맹휴였다. 그 맹휴에서 주동적 역할을 한 사람이 장성출신인 변진설이었다. 그는 맹휴를 주동하여 퇴학처분을 받았지만 동지들과 꾸준히 활동했다. 그가 동지들과 함께 작성한 격문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용사들이여! 결사적으로 싸우라! 우리의 승리는 맹휴중인 우리들 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피압박 백의민족해방의 초보가 되고 소생의 원천이다. 용감한 투사여! 우리들의 생명이 계속할때까지 싸워라! …… 우리는 자유에 굶주린 자들이다. 자유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라. 학교 당국으로부터 여하한 불온문서가 도래(到來)할지라도 단연히 거부하라. 그 문서야말로 우리들을 주구화시키고 노예교육장으로의 입장권에 불과하다. 노예가 되는 것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자는 단연히 이를 거부하라.위와 같은 격문을 학생과 학부형에게 돌리면서 완강하게 맹휴투쟁을 벌이다가 8월에 검거되었는데 이때는 이경채 학생이 이른바 불온문서를 전주와 집에 첨부하고 전남도내 중학교와 경찰서에 발송하여 검거되어 퇴학처분 되자 이에 항의하여 학생들이 맹휴를 벌인 사건이 있었다. 맹휴투쟁에 이어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수많은 학생들이 참여했고 많은 희생자를 냈는데 이에 적극 참여한 장성인들은 김병기, 기회준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광주고보 학생들로 학생독립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김병기는 북상면 덕재리 출생으로 당시 광주고보 3학년생인데 11월 3일 광주고보 학생들과 같이 농기구실로 들어가 몽둥이를 들고 다른 학생들은 장작개비, 곤봉, 괭이자루, 죽도(竹刀), 야구배트를 모두 나누어 든 후 교정에 집합하여 세를 돋구어 오후 1시경에 열을 지어 교문을 나섰다. 거리에 나온 학생들과 교가, 응원가를 부르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면서 시내를 시위행진했다. 이에 경찰이 출동하여 학생들을 제지했으나 학생들은 계속 시위 행진을 하다가 3시경에 해산했다. 이러한 시위항쟁 끝에 김병기는 경찰에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또한 장성면 덕성리 출신인 기회준도 독립만세시위에 앞장서서 시위항쟁을 지휘하였는데 퇴학처분을 당하고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장성출신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학생은 학교 맹휴사건의 변진설을 필두로 해서 만세시위의 김병기, 기회준이 있는데 이들의 재판결과는 다음과 같다.

변진설, 장성면 장안리 학생, 맹휴 사건, 1심(징역8월) 2심(징역6월 집행유예4년)
김병기 북상면 덕재리 학생, 광주학생독립운동만세시위, 2심(징역4월, 5년간 집행유예)
기회준 장성면 덕성리 학생, 〃, 예심종결공판의 판결, 금고 4월, 5년간 집행유예
그 밖에도 광주고보의 맹유 및 시위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학교 당국으로부터 정학에서 퇴학처분을 당한 사람이 많은데 그 가운데 장성 출신으로 광주고보생인 김천기(장성면 영천리), 김일중(장성면 역전), 김관수(황룡면 월평리) 등이 있다.

그런데 11월 3일의 1차 시위로 많은 학생이 검거되고 탄압이 거세어지자 성진회의 조직에서부터 학생들을 지도했던 장재성은 장석천, 나승규 등 사회인사들과 회합하여 민족적 차별관념에서 조선학생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하였다고 판단하여 지도자들로 학생지도부를 설치하여 학생운동을 전국화 하기로 했다.이때 운동자금 조달을 맡았던 나승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삼서면 대곡출신으로 1927년 12월에 신간회 장성지회의 간사를 맡았으며 1929년 6월에는 신가회 복대표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후보로 선출된 바 있고 성진회 활동에 참여하여 독서회 중앙회가 운영하는 소비조합에 자금을 출연하기도 했다.

광주에서 불붙은 학생들의 항일투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파급되어 전국의 194개교(초등학교 54개교, 중등학교 91개교, 전문학교 4개교)가 궐기했으며 참가 학생들은 무려 54,000여명에 달했다. 이 운동으로 인하여 실형을 받은 학생은 광주에서만도 180여명에 달했으니 전국적으로 수백명에 달할 것이나 그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또 학교에서는 가혹한 처벌을 가하여 퇴학 533명, 권고퇴학이 49명, 무기정학처분이 2,330명, 강제전학이 298명, 자진퇴학이 352명에 달했다.

1929년 11월 3일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전개된 민족운동으로 3·1운동 다음의 최대 민중운동이며 예리하고 타협하지 않으며 용감한 학생들이 또다시 민족의 나아갈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했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러한 민족운동에 장성 출신 학생들이나 사회인들이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1943년에 일어난 제2학생독립운동에서도 장성출신이 주도적 역할을 했는데 다음 항에서 자세하게 서술하겠다.

4. 민족말살정책과 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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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족말살정책

세계로 향한 일제침략자들의 전쟁도발은 한국을 전쟁수행을 위한 통치체제로 전환하였다. 우선 일제침략자들은 한국을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아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했다. 경공업이나 상품시장으로 육성했던 한국의 공업을 금속, 기계, 화학공업을 주축으로 하는 군수공업체제로 전환하였고 철, 석탄, 중석 등 군수자원을 약탈했다. 뿐만 아니라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쌀, 육류 등을 징발했으며 한국의 고철, 놋그릇, 수저까지 강제로 거두어 갔다.

일제침략자들은 물적자원 뿐 아니라 인력의 수탈에도 박차를 가했으니 처음에는 징용으로 노동력을 동원하더니 징병제, 학도지원병제, 소년항공대는 물론 조선의 소녀들까지 징발하여 종군위안부로 끌고 갔다. 이러한 인력수탈로 1939년부터 해방까지 징발된 한국인의 수는 100만이 훨씬 넘었다. 일제침략자들은 한국인을 그들의 침략전쟁에 강제 동원하면서 민족말살정책을 써서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 했다.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 일선동조론(一鮮同祖論)을 내세워 한민족 자체를 없애 버리려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여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하였으며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제창과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일제침략자들은 한국을 병참기지로 전락시키고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어 그들의 침략전쟁에 활용하는 한편 식민통치를 강화하여 언론과 문화를 탄압했다. 언론기관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던 조선중앙일보를 1937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1940년에 폐간시켰고 모든 집회와 결사를 허가제로 바꾸어 국내의 조직적인 민족해방운동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리고 1941년 4월에는 우리글로 된 잡지인 [문장], [인문평론] 등도 폐간시켰으며, 1939년 4월에는 조선어학회를 폐지하고 1942년에 조선어학회사건을 조작하여 이윤재, 한징, 최현배, 이희승 등을 투옥했고 한국사 연구 기관인 진단학회도 폐쇄시켰다.

(2) 한민족의 항일운동

일제의 무자비한 식민통치와 세계를 향한 침략전쟁에 저항하는 한민족의 항일투쟁은 국내외에 걸쳐 끈기있게 전개되었으니 만주에서의 독립군 투쟁이나 상해임시정부의 독립투쟁이 중심을 이루었고 국내에서 민족혼을 과시하는 애국투쟁들이 계속되었다. 만주에서의 봉오동 전투, 청산리 싸움은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혀주는 빛나는 승전이었고 윤봉길 의사, 나석주 열사, 이봉창 의사 등의 일제 원흉들에 대한 응징은 한민족의 분노를 대변했다.정의감이 투철하고 애국심이 강한 장성인들도 국내외에서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는데 대표적으로 만주에서 활약한 이만준과 중국에서 활동한 변극 그리고 연해주에서 활약한 서진순에 대해서 살펴 보겠다.

이만준(1891∼1943)은 장성 출신으로 만주 길림성의 애국단체인 흥업단(興業團)에서 회계서기로 근무하면서 민중계몽과 독립기지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1919년 3월 단장인 김호의 지지에 의해 국내를 탈출한 애국청년 4∼5백명을 모집해 백산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는 또한 독립자금모집을 위해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다가 경상도 군위에서 체포되어 징역 5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변극(1903∼1980)은 장성출신으로 상해 동제대학에 재학중인 1923년 10월 24일에 상해 교민단 동구의원으로 선출되어 상해서 유학생 300명을 규합하여 한인청년동맹을 조직하였고 중국인 학생들과 함께 상해역에서 조계(租界)의 회수, 제국주의의 타파, 치외법권 철폐 등을 내세우며 시위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1926년 10월에는 중국에 있는 한인단체를 통합하여 한인학우회를 결성했고 그의 집행위원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28년 4월에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서진순(1885∼?)은 장성출신으로 서초라고도 부른데 소련의 연해주로 망명하여 블라딕보스톡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특히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맹하여 활약했다.

한편 국내의 항일운동은 농민, 노동자, 학생, 사회인들의 각계 각층에서 전개되었는데 일일이 거론 할 수 없고 장성 출신의 학생들의 주도한 제2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보겠다.1929년 광주는 물론 전국을 뒤흔들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고보가 중심이 되었고 광주농업학교, 사범학교, 광주여고보 등이 합세하여 벌인 애국항쟁이었다. 그런데 그 중심인 광주고보는 1938년에 학제변경으로 광주서중학교로 바뀌었지만 서중학교의 학생들간에는 민족적 저항정신이 꾸준히 계승되어 왔다.1938년경 장성출신의 기항도, 나금주 등은 유봉룡, 강한구, 주만우 등과 같이 독서회를 조직했으며 이 독서회운동은 광주농업학교의 송흥호, 광주여고보생들도 각각 독서회를 조직했으니 이것은 1929년 6월경에 조직된 학생운동추진체를 본딴 것이다. 서중학교의 독서회는 많은 교양서적을 읽고 발표하여 의식을 심화시켰는데 1940년 3월경에 그 이름을 무등회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하다가 학교 당국의 감시와 마찰로 많은 애로를 겪었다.

그런데 무등회를 계승 발전시킨 것은 장성출신인 기영도였는데 그는 조병대, 신균우, 박하주 등과 더불어 중학교육을 받은 우리가 독립지사가 되어야 하고 교련도 받아두면 쓰게될 것이고 본래 일본보다 선진국인 한국은 독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무등회의 동지들을 의식화시켰는데 그의 사상을 재판기록을 통해서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내선인(內鮮人)은 그 조상을 달리하고 있다. 따라서 동일민족이 아니다. 금일 내선일체를 외치고 있지만 내선인에는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 점에서 차별대우를 하고 있다. 이것을 철저하게 해결하는 길은 조선의 독립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② 조상의 유산인 성씨를 폐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것은 조선의 전통을 파괴하는 것이다.
③ 대동아 전쟁은 제국의 침략전쟁으로 제국은 동양의 적이요 제국의 무력은 우세하지만 군수물자와 과학방면에서는 도저히 미·소에 대항할 수 없다. 장기전이 되면 제국의 패배는 필연적이며 그때야말로 조선독립의 절호의 시기다. 만일에 제국이 승리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때에는 제국은 피폐하고 있으므로 그 기회를 이용하여 동족이 일제히 궐기한다면 용이하게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요, 독립할 때에는 전조선 각 중등학교 3학년생 이상의 학생과 다소의 군사교육을 받은 자를 동원한다면 대략 35∼6만의 병력을 얻을 수 있어 최소한도의 군사력은 가능하다.
당시 일제침략자들은 세계를 상대로 침략전쟁을 도발하여 발악적인 조치로 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해 내선일체, 내선동조론을 강조하고 징병제, 학도병제, 소년항공대, 부녀자정신대로 한국인을 내몰고 있었기 때문에 기영도는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사상을 정리했었다.기영도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무등회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1941년 10월에 신병으로 휴학했으나 남은 동지들은 계속적으로 항일운동을 했다. 그후 그는 1943년초에 일본에서 돌아와 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항쟁을 지도했다.

그런데 이들의 항일투쟁을 이해하지 못하는 극소수의 4학년 학생이 있었기 때문에 1943년 5월 10일에 5학년생의 동지인 신균우 등이 그 몰지각한 학생들을 응징하다가 발각되어 무등회의 회원들이 검거되었다. 이에 서중학생들은 ① 학병지원 반대 ② 창씨제도 반대 ③ 일어상용 반대 ④ 징병제 반대 등을 내걸고 1943년 5월 21일부터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 맹휴는 6월까지 계속되었고 거기에 따라 350여명이 검거되었는데 이 중 180여명이 집중적으로 고문수사를 받았고 그중 80여명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은 모진 고문을 자행했는데 기환도는 1944년 1월에 억울한 고문치사를 당하고 말았다. 기영도는 1944년 9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단기 2년 장기 4년의 판결을 받았고 그 후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으나 다음해인 1945년 8·15 해방으로 석방되었다.

무등회의 활동은 해방직전 광주·전남지역의 학생들과 주민들의 항일정서와 민족해방에 대한 염원을 고취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해방직후 친일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자주적 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과 직접 연결되고 있었다.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이 되는 날 광주서중학교에서 회장단이 결성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이고 무등회 사건으로 구속된 기환도를 고문 치사시킨 친일경찰 10여명을 재판하고 태형을 가한 사실은 이점을 잘 시사해 주고 있다.이러한 제2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장성출신인 기영도가 주도적 역할을 했고 기환도는 고문치사 당했으며 나금주 등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정의감과 애국심이 충만한 장성인의 기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이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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