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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현대와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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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족해방과 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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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방과 분단의 잉태

세계 제2차 대전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이때를 고비로 동아시아 여러 나라는 급격한 변화기에 돌입하게 되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갑자기 이 지역은 진공(眞空)상태로 접어든 것 같았다. 분쟁과 혼란이 뒤따랐고 행정기구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모든 면에서 무질서와 마비가 속출, 경제활동마저 무너져 내렸다. 일본이 패망하자 그 동안 국내와 해외에서 대일(對日) 저항운동을 펴온 독립투사들이 속속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는 공산주의자의 지휘를 받거나 그 세력 밑에 들어있는 인사들도 많았다. 따라서 동아시아 각 지역에서는 이들 공산계(共産系)와 민족주의 투사들이 대립 서로 정권을 잡으려 들었다. 중국에선 1946년 겨울부터 국공(國共) 내전이 시작됐고 인도차이나와 한반도에선 전쟁이 일어나 동족끼리 살상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여기에 미·소 양국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어 갔다. 1945년 9월 런던 5개국 외상회의(外相會議)때부터 전후처리 문제를 놓고 두 나라의 대립은 노골화했다. 세계는 미·소를 중심으로 자유, 공산진영으로 갈라져 그 두 세력이 부딪치는 지역에선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미·소의 대립과 냉전은 북위 38도선을 우리 민족의 분단선으로 바꿔버렸다. 원래 38선은 미·소 양국이 남북으로 분단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한 편의상의 군사조치였다.

(2) 해방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일본 천황(天皇)이 '중대방송'을 하자 36년만에 일제의 가혹한 압제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의 기쁨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흘러 넘쳤다. 민중의 환호 속에 독립투사들이 나타나 활발한 정치공작을 시작했다. 이들 혁명가나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는 민족주의자들이 있는가하면 공산주의자들도 있었다. '해방'이라는 급격한 변화 속에서 지도자도 민중도 행동방향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한발 앞서 일본의 패망이 임박한 것을 미리 감지(感知)한 조선총독부는 당시 우리 국민 사이에 큰 신망을 얻고 있던 온건한 민족주의자 송진우(宋鎭禹)에게 행정권 이양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송진우는 이 제의를 거절하고 중경(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통 정부로 맞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송진우와의 교섭에 실패한 조선총독은 여운형(呂運亨)을 다음 교섭대상으로 지목했다. 여운형은 1944년부터 '조선건국동맹'을 지하에서 지휘하다 해방이 되자 표면에 나타났다. 여운형은 송진우와 달리 행정권 인수에 응하기로 결심, 조선총독부와 일단 합의했으나 곧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은 불과 보름만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건준위(建準委)의 배후에는 조선공산당 박헌영(朴憲永) 등 급진파의 영향이 작용 좌익 세력의 집합체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미(美) 극동사령부는 9월 7일 남한에 군정을 포고하고 건준(建準)의 '인민공화국'을 부인해 버렸다. 그러자 여운형은 중간 좌파의 인민당(人民黨)을 조직했다. '건준'에 반대 '임정(臨政)'을 지지해온 송진우 등 민족주의자들은 이들에 대항해 '국민대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임정'지지파가 미(美) 군정과 제휴하여 실권을 잡게됨에 따라 '건준'측과는 대립이 깊어갔다. 여기에 미·소 양국의 군대가 38선을 경계로 남북에 동시 진주함에 따라 민족주의세력은 미국을 좌익은 소련을 각각 등에 업고 한반도 전체의 정권획득을 노리게 되었다.

해방 직후 북한의 민족주의자들은 조만식(曺晩植)을 당수로 하는 '조선민주당'으로 집결됐으나 그 활동은 제약을 받아 다음해인 1946년 2월부터 추방과 박해를 받고 대거 38선을 넘어 남으로 넘어오게 됐다. 미군정은 이에 앞서 좌익계인 '조선인민공화국'은 물론 '임정'도 부인했으며 맥아더 포고 제1호를 발표하여 ①군정실시 ②포고령 위반자의 엄벌 ③공용어의 영어화(化)를 선언했다. 이렇듯 국내가 좌우대립과 혼란으로 어지러울 때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 등 이름난 독립투사들이 귀국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채 대립만 깊게 만들었다.

(3) 민족분열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 모인 미·영·소 3개국 외상들은 ① 최장 5개년간 미·영·소·중에 의한 4대국 신탁통치를 의결하고 ②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한국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③ 그러기 위해 미·소군 사령부 대표로 공동위원회를 구성키로 결정했다. 또 ④ 전쟁이 끝나 일본인이 추방됨으로써 발생되는 시급한 문제를 처리할 긴급조치를 검토하기 위해 미·소 양군 공동회의를 개최키로 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한국문제의 처리방안은 대충 이러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이유는 ① 한국 지도자들이 어떤 형태의 신탁통치에도 완강하게 반대했고 ② 미·소의 대립이 격화됐으며 ③ 한국을 남북으로 분단한 군사지역이 존재했다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그 해 12월 29일에는 '임정(臨政)'이 중심으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했다. 서울 운동장에선 반탁국민대회가 열리고 신익희(申翼熙)는 전 국민에게 파업과 철시(撤市)를 지시 국민의 굳은 결의를 표시하는 등 일은 점점 확대되어 갔다. 38선 북쪽에서도 조선민주당이 반탁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당수 조만식은 그 선봉에 섰다. 그러나 46년 1월 3일부터 북한에서는 '한련(韓聯)'과 공산주의자들의 지령에 의해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는 데모와 집회가 벌어졌다. '임정'과 '인공(人共)'의 대립은 이때부터 반탁과 모스크바의 결성을 지지하는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고 1945년 12월30일에는 한국민주당 당수 송진우가 암살 당해 임정과 한국민주당간에도 틈이 벌어졌다. 송진우는 공산당과는 정반대의 정치적 입장에 있으면서도 찬탁측으로 기울다 반탁을 부르짖는 우익청년의 테러에 의해 요인암살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됐다.

좌우분열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 회의는 두 나라 사이가 이미 험악할 대로 험악해져 지엽적인 문제만을 가지고 2차에 걸쳐 10주 동안 시간만 끌다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제2차 미·소 공동위가 결렬된 직후인 1947년 7월 19일은 대낮에 서울 혜화동 4거리에서 근로인민당 당수 여운형이 피살되었다. 남북 좌우의 마찰도 컸지만 민족진영 내부의 압력도 이에 못지 않았다. 해방 후 나타난 국내지도자들 사이에는 여러 파벌이 생겼다. 당시 3영수로 불리던 이승만·김구·김규식(金奎植)은 제각기 노선을 달리했다. 좌익세력은 그들대로 '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을 중심으로 뭉쳐 반미 선동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1946년 5월 15일 공산당의 위조지폐 사건이 발각되면서부터 미군정은 공산당을 잡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공산당은 지하활동을 하면서 파괴활동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1946년 10월에는 철도파업이 대구폭동으로 확대되었고 광주, 전주 등 형무소 죄수들의 집단도주 또는 도주 미수사건이 벌어졌다. 1947년 12월 21일에는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가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이같은 사회혼란은 미군정의 정책이 투명하지 못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

(4) 국토분단

미·소 공동위가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자 미국은 38선 이남에 별도의 행정기관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그간 미군정은 공산계가 만든 '인공'은 물론 '임정'도 인정치 않고 총독부의 행정기구를 미군 정부 기구로서 그대로 존속시켜 왔다. 1947년 6월 3일 미군정은 한국인에 의한 삼권분립 기관을 갖추어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편하고 미국인은 비토권(부결권)만 갖는 고문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때 미군정과 이승만 사이에 반목이 생겼다. 미군정이 이승만, 김구 등 우익 정치가를 멀리하고 좌우합작에 의한 남북한 임시통일정부 수립운동을 지원해왔기 때문이었다. 사령관 하지중장은 이승만을 가리켜 '미국의 적'이라고까지 극언했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만 미 대통령은 대소(對蘇)봉쇄정책을 미국의회에서 선언했는데 이것이 소위 트루만독트린이었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은 기를 펴게 되었고 그의 남한자율정부 수립운동은 실현의 날이 가까워졌다. 그간 제 2차 미·소공동위는 열매없이 결렬되고 한국문제 처리방안은 결국 UN으로 넘어갔다. UN 정치위는 1947년 11월 13일 소련의 미·소 양군 철수안을 부결시키고 한국인 스스로가 남북한에서 다같이 자유·비밀선거에 의해 임시정부를 세우며 그 총선을 감시하기 위해 한국 위원단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UN 한국위는 소군의 거부로 북한에 들어가지 못해 결국 남한만이라도 총선을 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점령군의 군사분계선인 38선은 정치경계선으로 굳어졌고 민족분열은 심각해져 갔다. 이 무렵 김구, 김규식 등은 남한만의 총선에 반대 38선을 넘어 평양까지 갔다 왔으나 이 남북협상은 공산측의 기만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UN이 남한 단독총선을 결의하자 남노당의 방해공작은 치열해졌다. 5·10총선에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해와 파업활동을 벌였고 선거관계자, 경관, 입후보자에 대한 테러가 극심했다.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총선을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이 폭동을 시작으로 좌익세력의 단독정권 수립반대 움직임은 여순(麗順)반란에 이르러 정점을 이루었다.

어쨌든 이런 분위기 속에서 UN 한국위와 미군정당국을 설득하고 총선의 질서를 유지하여 민중으로 하여금 남한만의 총선거에 참여하도록 계몽해 정부수립까지 끌고 간 것은 이승만과 김성수(金性洙)의 세력이었다. 역사적인 5·10총선에서는 이승만의 독립촉성군민회와 한국민주당 등 이승만의 지지 세력이 압승했다. 이 선거에는 좌익은 물론 우익세력 일부와 증산세력도 참가하지 않았다. 한편 공산화를 목표로 독자적이고도 항구적인 정권수립을 서두르며 일련의 사회주의적 개혁을 단행하여 온 북한은 그들대로 단독정권 수립을 결정했다. 남한의 5·10총선에 대항하여 그들은 8월 25일 소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로 구성된 최고인민회의는 이른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고 김일성(金日成)을 수상으로 뽑았다. 이리하여 남과 북에는 각각 체제를 달리하는 분단된 정권이 탄생하였다.

2. 대한민국의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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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 정부와 양군철수

5·10총선을 거쳐 정식으로 제헌국회가 그 해 5월 31일 발족했다.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7월 20일 국회의원의 호선으로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을 부통령에 이시영(李始榮)을 뽑았다. 하지 사령관은 8월 15일 군정이 끝났음을 선언하고 맥아더 원수의 축복을 받는 가운데 대한민국이 마침내 독립했다. 해방 후 만 3년의 고난을 겪은 뒤 비록 반쪽이나마 40년 만에 주권을 되찾은 것이다.

UN총회는 한국위원단의 보고에 따라 48년 12월 12일 소련의 반대를 물리치고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함과 동시에 점령군은 가급적 빨리 철수하도록 의결했다. 대한민국 수립 후 미국의 한국에 대한 태도는 그리 적극적인 것은 못되었다. 여기에 반공을 부르짖는 정치가들 간에도 파벌이 형성돼 정부와 국회가 대립 정국은 안정되지 못했다. 국내외의 이 같은 정세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고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련은 북한을 점령한 후 시간이 지나자 한국 청년을 뽑아 인민군(人民軍)을 창설했다. 소련군은 48년 10월부터 12월 말까지 철수를 끝냈으나 3천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겨 계속 인민군을 훈련시켰다. 한편 남한은 북한에 비해 국방 면에서 너무도 뒤졌다. 육해공군이 차례로 창설됐으나 미약했다. 미군은 49년 6월 29일 철수를 끝냈고 5백 명의 군사고문단만을 남겼다. 이렇게 되자 한반도는 언제 내전(內戰)이 터질지 모를 상황이 되어갔다. UN한국위원단은 49년 1월 30일부터 활동을 시작했으나 소련과 북한의 비협조로 한국통일의 임무에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 불안정한 정국

정부 수립 후 2개월 만인 48년 10월 20일 제주도 폭동진압에 나서기 위해 여수에 집결해 있던 제14연대가 내부에 잠입해 있던 공산분자의 선동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이른바 '여순(麗順)사건'이었다. 이들은 순천·구례·보성을 점령하고 그 지방의 반정부분자와 합류하여 경찰관과 우익정당 단체의 지도자들을 많이 처형했다. 정부는 즉시 계엄령을 내리고 2개월에 걸쳐 이를 완전 진압했다. 반란군 주력은 지리산으로 도망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에선 폭동이 다시 일어나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각지에선 군대의 반란 민중의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리산에는 게릴라 근거지가 설치됐으며 강원도 오대산지구에서는 북한에서 잠입한 게릴라가 활동을 시작했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불순분자 숙청을 강화했으며 국회에서는 국가보안법이 통과됐다. 계속된 정부의 단속으로 50년에 들어서서 비로소 게릴라 준동은 잠잠해졌다.

한편 해방 후 계속 문제가 되어 온 반민족행위자 처벌은 정부수립 직후인 48년 9월 7일 국회에서 '반민행위처벌법'을 통과시킴으로써 검거가 본격화했다. 이 대통령은 원래 반민법의 엄격한 실시에 반대해 정부와 국회의 대립이 더욱 날카로워 졌다. 그러나 날카롭던 대립 관계는 49년 6월 하순에 일어난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점차 누그러졌다. 이는 국회부의장 김약수(金若水)를 비롯한 국회의원 10여명이 공산당과 통모(通謀)한 혐의로 체포된 사건인데 이때 소장파의원들은 미군철수 후 설치될 군사고문단에 반대하다 국가 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다. 정부와 국회의 대립이 사라짐에 따라 이 정권의 독재기반은 더욱 굳건해진 셈이다.

(3) 정치혼란과 북한의 야욕

정부는 수립 후 4개월 만인 48년 12월 10일 한미경제협정을 체결했으며 이 협정에 의해 미국은 장기적인 경제부흥계획에 관해 한국을 원조할 책임을 맡게됐다. 미국의 원조물자를 관리하기 위해 정부는 49년 1월 외자총국을 설치했으며 미국은 원조의 중점을 구제(救濟)에서 부흥(復興)으로 옮기고 한국의 경제자립을 위해 49년 6월 7일 3개년 계획까지 세웠다. 이러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국방과 치안에 소요되는 경비는 국가세출의 절반이 넘었고 주된 동력원인 전력을 북한이 끊어버려 타격을 받는 등 갖가지 불리한 조건으로 생산부진, 세입부족, 인플레이션 등이 현저하게 민간생활의 고통을 증대시켰다. 따라서 1950년 봄의 한국경제는 미 애치슨 국무장관이 "한국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지 못하면 미국원조는 삭감될지 모른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이 같은 경제불안은 정치위기를 불러왔다. 제헌국회에서는 당초부터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주장이 높았다. 한국민주당은 정부수립에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난 뒤 불만을 품고 이 대통령과 맞섰다. 민주국민당으로 개편한 한민당은 대통령중심제로부터 내각체임제로의 개헌운동을 벌였다. 이 투쟁에 맞서기 위해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당을 조직했다. 이 대통령의 독재화 경향이 차차 짙어가면서 이 개헌주장은 점점 높아가더니 50년에 들어서자 국회 안에서 표면화 했다. 민주국민당은 50년 1월 27일 이 개헌안을 국회에 내놓았으며 신익희(申翼熙) 국회의장은 이를 전적으로 지지했다. 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원내 여당세력은 물론 이를 반대했다. 표결결과 개헌안은 부결되고 말았으나 출석의원 197명 중 개헌 찬성자가 79명이나 돼 정국동요의 가능성을 남겨 놓았다. 헌법개정안 부결로 일단 민주국민당의 공세를 막는데 성공한 정부는 또 국회의원 총선일자를 결정하면서 난관에 부딪쳤다. 이 대통령은 총선일자를 여러 차례 바꿨으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총선거를 예정대로 실시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의에 따라 50년 5월 30일 실시하기로 방침을 굳혔다.

총선 결과 무소속이 현저하게 진출했고 대한민국당과 민주국민당의 2대 정당이 쇠퇴했다. 무소속으로 당선된 사람 가운데는 장택상(張澤相), 여운홍(呂運弘), 안재홍(安在鴻), 윤기섭(尹琦燮) 등 초대 의원선거에 불참했던 정치가들도 들어있었고 남북협상파인 사회당 조소앙(趙素昻), 민족자주연맹의 원세훈(元世勳)도 끼어 있었다. 제2대 국회는 6월 19일 개원해 의장에 신익희, 부의장에 장택상, 조봉암(曺奉岩)을 선출하고 국회운영에 들어가려 했으나 6·25가 터져 의원 27명이 납북되거나 사망했다.

한편 북한은 소위 인민공화국을 수립한지 7개월 뒤인 49년 3월 소련과 비밀군사협정을 체결했으며 다시 중공과도 비밀군사협정을 맺어 군비를 강화했다. 중국내전에 참가했던 한국인부대 5만명이 돌아오고 소련에 있던 한국인부대 5천여명이 돌아와 이들을 핵심으로 해서 2개 장갑사단을 포함, 24개 사단으로 인민군을 대폭 증강했다. 소련은 2개 장갑사단을 탱크 5백대로 무장시키고 4개 보병사단은 기계화부대로 만들었으며 소련제 함정 30척과 전투용 항공기 1백50대를 제공했다. 이로써 북한 전력은 소련의 온전한 지도와 지배 밑에 구축되어 갔다.

1950년 봄의 남한은 김일성의 눈으로 볼 때 무력적화통일을 달성할 절호의 기회였다.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그 해 1월 12일 내셔널 플레스클럽 연설에서 "방위선은 알류션, 일본, 유구(琉球), 비(比) 등을 묶는 선이며 한국은 이 방위선에서 명백히 제외되어 있어 한국에 군사적 공격이 생겨도 먼저 공격받은 국민이 저항하고 다음엔 UN헌장 밑에 전 문명세계가 조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미국이 남한에 대해 직접방위의 책임은 지지 않으며 최악의 경우 포기할 수 있다는 뜻으로 보였다. 김일성이 볼 때는 남침을 감행해도 미국의 개입은 있을 것 같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판단에 따라 전력을 강화한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고 스탈린에게 "대거 남침하면 남한에서 반란이 일어나 무력적화통일이 성공할 것"이라고 말해 스탈린의 찬성을 얻어냈다. 김일성은 남침준비를 감추기 위해 위장평화공세를 벌이면서 38선 일대에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위장공세를 보면 소위 '조국통일민주전선'을 내세워 ① 8월 5일부터 8일 사이에 남북한 통일선거를 실시하며 ② 거기서 선출되는 통일최고 입법기관을 50년 8월 15일 서울에서 소집하자고 제창하고 ③ 그 준비를 위해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북한 해주에서 남북한 정당사회단체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의한 것 등이다.

정부는 터무니없는 이 제의를 무시해 버리고 38선 경계를 엄중히 했다. 북한은 제의가 실패하자 6월 19일 ① 남북한의 현 입법기관으로 하나의 통일된 입법기관을 만들어 ② 헌법을 채택, 정부를 세우자고 제의했으나 이들 제의가 모두 위장 선전공세였다는 것은 6월 25일 새벽의 남침으로 입증됐다.

3. 6·25전쟁과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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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군의 전면남침

1) 북한의 침략동기 및 배경

6·25는 제 2차 세계대전 후 미·소간에 벌어진 냉전의 산물이다. 자유 대 공산주의 국가 간의 이념투쟁이 하나의 전쟁 형태로 세계 무대에 등장한 것이 바로 6·25라고 할 수 있다. 6·25의 원인을 정확히 가려내기는 어렵지만 여러 가지 사실(史實)을 참작해보면 다음 몇 가지를 그 배경과 동기로 들 수 있다.(한국전쟁사 제2권­국방부)

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전후(戰後)처리문제로서 한반도를 북위 38선에서 남북으로 분단하여 미소가 각각 점령함으로써 내전이 조성되었다.
② 소련은 그들의 괴뢰인 김일성 일당을 북한에 들여보내 적화의 기지작업을 탄압과 숙청으로 감행한 뒤 괴뢰정권을 만들어 국제회의에 의한 한국에서는 합법적인 통일정책수립을 방해하고 나아가서는 적화통일의 침략군을 급속히 양성했다.
③ 남한에 주둔했던 미군의 철수로 힘의 공백기가 조성됐고 당시 초창기의 한국군은 자위력이 미약했다. 그 뒤 미군이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적 원조에 있어서 소극적인 정책을 유지함으로써 호랑이 앞에 먹이를 던져준 인상을 공산주의 침략자들에게 주었다.
④ 중국대륙에서 국·공(國·共)분쟁으로 장개석(蔣介石) 정권이 중공군에 의해 대만으로 쫓겨나자 소련은 아시아를 석권해 확고한 위성권을 형성하게 됐고, 중공은 그들의 동북군(東北軍·滿州方面軍)에 속했던 한국인계의 의용군 3개 사단을 북괴군에 편입시켜줌으로써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한적화에 고무적인 야심을 품게 만들었다.
⑤ 미국은 극동 방위선을 태평양으로 후퇴시켜 한국과 대만을 방위권에서 제외시켰다. 이와 더불어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남한을 사수할 생각이 없다."고 성명함으로써 남한침략을 촉진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⑥ 북괴와 소련은 이승만 대통령이 부르짖은 태평양방위 공동문제가 더 이상 확립되기 이전에, 그리고 한국의 국방력이 강대해지기에 앞서 속전속결로써 남한을 점령하면 미국이 중국에서와 같이 한국사태를 방관할 것이라고 오판했다.
⑦ 남한에서 공포된 농지개혁법의 유상(有償)매수, 유상분배가 일반농민들에게 실리(實利)를 주지 못하리라고 억측했고, 5·30선거 결과 여당이 크게 패한데다 중간파인 무소속이 대거 당선된 것을 보자 이를 남한 국민의 반정부적인 표현으로 잘못 판단했다.
⑧ 남한의 국방력은 북괴에 비해 너무 미약한데다 군부 안의 적색반란으로 인한 토벌작전과 북한이 남파한 유격대 및 지방공비들의 도약으로 군·경부대가 과도하게 분산되어 있는 군사적 약점을 포착했다.
⑨ 남노당의 지하 당책 김삼룡(金三龍), 이주하(李舟河) 일당이 체포되자 그 잔당들도 대부분 개과천선해 보도(保導)연맹에 전향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박헌영(朴憲永)은 당 정책위원회 회의 때 김일성에게 아부하기를 "남노당의 지하당원이 남한에 50만명이나 건재하고 있으므로 남침만하면 남한 각 지방에서 폭동이 일어나 남한 석권은 시간문제"라고 허세를 부렸는데 김일성은 이 점에서도 큰 승산을 가지게 되었다.지금까지 열거한 여러 가지 배경과 조건들이 소련과 김일성 일당으로 하여금 남침동기의 원인을 조성케 하였는데, 그 첫 동기를 포착한 것이 49년 6월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한 후이며 구체적 계획이 이때부터 짜여지기 시작했다.

2) 한국군 수뇌부의 무사주의

국방부 수뇌부가 북괴의 남침 가능성에 대해 최초로 보고를 받은 것은 49년 12월 말 육본 정보국에서 작성한 연말통합정보보고서를 통해서였다. 이 보고서는 정부 요로와 미 당국에까지 보고됐으나 남침론이 회의론으로 바뀌어졌고 그 뒤 모든 새로운 정보보고는 반신반의 속에 낙관과 무사로 귀결지어졌다.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은 북괴의 침공위협이 임박했다고 내외기자들에게 발표까지 하면서도 이에 대한 대비책은 하나도 갖추지 않고 호언장담만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국민들로 하여금 국군에 대한 신뢰를 기대이상으로 갖게하여 경적(輕敵)사상을 심어주었다. 3월부터 38선 북측의 북한주민들이 소개(疏開) 당하기 시작했고 38경비대와 정규사단이 부대 교체를 하는 등 이동상황이 빈번했다. 6월 중순 이후에는 중포(重砲)가 진지를 점령하고 전차와 공병(工兵) 주정(舟艇)이 집결하는 등 공격 준비의 징후가 나날이 증가하기 시작하자 이를 군 수뇌부에 보고하면서 남침은 시간문제임을 경고했다.

그러나 육군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 소장, 신 장관 등은 이런 보고에 관심을 별로 갖지 않았다. 이들은 북괴군이 심리적 위협을 주기 위해 기동연습하는 정도로 치부했다. 이와 같은 안일한 사고방식을 갖게된 데는 군 수뇌부가 공산주의자들의 전략전술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데다 미국 의존도가 너무 깊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6월 24일 토요일 오전 중까지 육본 정보국 작전정보실에서 종합 분석한 결과 북괴군의 전면공세가 임박했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 시기를 판단할 만한 특수정보가 없었다. 따라서 정보국장이나 참모총장에게 일단 해제된 비상경계를 다시 펴자고 건의할 수가 없었다. 육본에서 비상해제조치를 내리자 일선 각 부대는 연대장 재량에 따라 주말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었다.

3) 6·25말기의 38선

25일 새벽 4시를 기해 북괴군은 38선 상의 전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준비 사격을 하며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아군 경계진지에 대하여 공격 해왔다. 24일 밤부터 38선 중부지대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포천(抱川) 북방 양문리(梁文里)에는 아군 제9연대 1개 전초(前哨)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 부대 정면 운천(雲川) 방면에서 적 제3사단은 전차부대를 선두로 포천군 영평면(永平面) 성동리(城東里)로 남하했다. 38선 북방 1km에 위치하고 있는 이 부락 주민 가운데는 전차소리에 놀라 방문을 열고 내다보다가 사살된 사람도 있었으며 새벽 용변을 보고 나오다 수상한자로 지목되어 죽기도 했다. 북괴군 전차부대가 영중교(永中橋)를 건너 단숨에 양문리 지서(支署)를 포격으로 분쇄하고 포천으로 내달았다. 양문리 경계초소에서는 3∼4대의 전차가 남하하고 있다고 연대 본부에 긴급 보고했다. 전군에 비상명령이 하달된 것은 25일 새벽 6시 30분 경이었다. 그러나 주말 외출로 전 장병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부대수습에 대혼란이 일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4) 무력(無力)한 작전지도

육본 작전국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후방에 있는 3개 예비사단(제2사단­대전, 제3사단­대구, 제5사단­광주)이 언제 서울에 도착하느냐였다. 명령은 밤 12시 안으로 서울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었다. 전선의 상황은 육군본부에서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특히 춘천(春川)의 제6사단과 강릉(江陵)의 제8사단, 옹진(甕津)의 제17연대 등의 상황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경비행기를 띠워 보내 대충 파악할 정도였다.

채병덕 육참총장은 적의 주공(主攻) 방향이라고 본 우리 제7사단의 현황을 알아보기 위해 미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와 함께 의정부에 있는 제7사단 사령부를 찾았다. 7사단은 예비연대도 없이 2개 연대 병력이라고 하면서도 사실상 2개 대대 병력 밖에 안 되는 숫자로 싸우고 있었다. 탱크를 앞세우고 남하하는 적을 막을 길이 없다고 하자 채 총장은 육탄공격으로라도 막으라고 명령했다. 로케트 포(砲)로도 막지 못하는 적의 탱크를 육탄으로 막으라는 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지만 다른 묘책이 없었던 것이다. 후방에서 올라오고 있는 병력을 투입하는 길 외에는 응급책이 없었다. 채총장을 보좌하는 참모들도 어떻게 조치를 해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며 기분내키는 대로 지시를 내렸다. 신성모 국방장관겸 국무총리는 채 총장의 보고를 받고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대통령은 신 장관에게 즉각 미국에 있는 장면(張勉) 대사에게 연락, 미국 정부에 긴급무기원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트준장은 그때 임기만료로 본국에 가 있었고 참모장인 라이트 대령이 단장대리직을 맡고 있었으나 그마저 주말휴가를 즐기러 일본에 가 있었기 때문에 고문단측과도 협의를 할 수가 없었다. 작전지도면에서 그들이 도와준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편 이날 긴급 소집된 국회에서는 국방장관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이 대통령도 참석해 사태를 시급히 수습하라고 유시(諭示)를 내렸지만 회의에선 어떤 결론도 도출해 내지 못했다. 채 총장은 신랄한 책임추궁을 받았는데 후방사단의 도착을 기다려 역습을 하겠다고 호언한 것 이외에는 전략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못했다. 38선에 배치된 우리 국군은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후퇴 일로에 놓여 있었다. 이날 밤 육본 작전국과 정보국 작전팀은 후방사단 도착을 기다려 26일 새벽을 기해 의정부 선에서 역습 하기로 결론을 얻었다. 채 총장도 저녁에 제7사단의 전황을 살피고 와 우선 대전에서 도착한 제5연대 병력으로 역습을 하려고 구상했다. 그러나 후방부대 동원과 열차의 긴급배차에는 상당한 혼란이 있었다. 유사시 수송계획이 교통부에 마련돼 있었으나 막상 선로 상에서 운행중인 열차를 빼돌려 배차하다보니 시간계획이 맞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 UN군의 참전

공산군의 남침이 있자 정부는 곧 미국에 무기원조를 요청했고 UN한국위원단도 이 사태가 종래와 같은 국지적 충돌이 아닌 북한의 전면적 침입임을 확인 25일 UN본부에 보고했다. 미국은 25일 새벽 3시(미국시각) UN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도록 요청, 그날 오후에 열린 이사회에서 '적대행위의 즉시정지와 북한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즉시철수'를 요구하고 UN가맹국에 대해 '이 결의의 실시를 위해 UN에 모든 원조를 제공'하도록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은 전쟁이 터지자 즉시 한국에 대한 무기원조를 결정했으며 맥아더 사령부는 25일부터 무기수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은 UN안보리의 정전(停戰) 요구와 미국의 원조개시에도 불구하고 남하를 계속, 28일 아침 서울이 공산군에게 점령됐다. 사태가 이처럼 긴박해지자 트루먼 미 대통령은 6월 27일 맥아더 장군에게 UN의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미 해군과 공군을 한국에 보내도록 명령하고 대만의 중립화를 위해 제7함대를 파견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또 6월 30일 UN안보리 결의에 따라 ① 미 공군의 북한 군사목표 공격 ② 미 해군의 한국연안 봉쇄 ③ 맥아더 원수의 미 지상부대 사용을 허가했다. 안보리 결의안에 의거해 영국, 오스트렐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네델란드 등 각 국이 해·공군 제공을 약속함으로써 미군을 주력으로 한 UN군이 실질적으로 형성됐다. 7월 7일에는 통일사령부 설치와 UN기(旗) 사용이 안보리에 의해 의결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결의에 따라 맥아더 원수를 UN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UN기를 사용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7월 25일에는 UN군 사령부가 동경에 설치됐다.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를 거듭했던 국군과 UN군은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켜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을 수복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내놓고 후퇴했다가 반격에 성공, 현재의 휴전선근처에서 교착상태가 이루어졌다.

(2) 6·25전쟁과 장성

1) 호남지방의 전황

서울을 함락시킨 북한군은 우세한 기동력을 발휘 천안(天安)을 손안에 넣고 남하했다. 7월에 들어섰을 때까지도 호남지구의 방비는 허술하기만 했다. 적은 제 105전차사단의 지원을 받으면서 남하한 제3·4사단과 최강부대인 제6사단이었다. 제3사단은 조치원(鳥致院)을 경유 대전(大田)으로 육박하고 제4사단은 전의(全義)에서 공주(公州)를 거쳐 대전으로 접근해 왔다.

제6사단의 일부병력은 온양(溫陽)과 예산(禮山)을 거쳐 장항(長項), 군산(群山), 이리(裡里), 전주(全州)를 차례로 점령하고 서해안 일대를 따라 계속 남하 목포(木浦)까지 진출해 호남지구를 석권하려는 것이 적의 기도였다. 또 공주에서 논산(論山), 강경(江景)에 진출한 적 제6사단 주력은 정예부대인 제4사단과 합세하여 대구(大邱)쪽으로 진출 호남지구를 제압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같은 적 제6사단의 동태에 대해 미8군과 한국군 사령부는 7월초까지도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다. 미8군은 소재불명의 예비대거나 금강(錦江) 서북쪽으로 이동하는 예비대 정도로만 판단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적 최고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특수임무를 부여받은 제6사단은 서해안을 따라 은밀히 전진하면서 무방비 상태에 있는 호남지구를 아무 저항 없이 빠른 속도로 석권할 계획이었다. 제3·4사단이 대전을 공격하고 있을 무렵 제6사단 일부 부대는 7월 13일 예산을 떠나 금강하류를 건너 장항, 군산에서 한국해병대와 경찰의 저항을 물리치고 점령한 다음 한국군 제7사단의 잔존부대의 저항을 받았으나 전주마저 쉽사리 손안에 넣었다. 여러 갈래로 나눠 남하한 적은 7월 23일 광주에 집결, 다시 북진했는데 제6사단 예하의 제13연대는 목포 방면으로 제14연대는 보성 방면으로 제15연대는 순천을 거쳐 여수방면으로 각각 향했다.

7월 25일 순천(順天)에서 일단 합류한 적은 동쪽으로 나가 진주(晉州)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적 제6사단장 방호산(方虎山) 소장은 진주와 마산(馬山)을 해방시키겠다고 큰 소리쳤다. 미 8군사령부는 적의 너무도 빠른 남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군사령부는 미8군이 남부의 위협에 대비하여 이동시킨 미 제24사단과 손잡고 적의 공세를 견제하는 작전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육본은 금강이란 천연방어선을 이용하여 적을 막고 전남경찰대의 증원을 받아 군산, 강경 사이의 요소요소에 포진함으로써 중부전선을 방어중인 미군과 균형 있는 전선을 형성하려 했다. 한국군 사령부는 이 같은 의도와 방침에 따라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당시 대전에 있던 육군본부는 호남지구에 산재한 한국군과 경찰대를 장악하게 하는 동시에 이 지역에서 소집하는 인원으로 전투부대를 편성하도록 신태영(申泰英) 소장에게 구두명령을 하달했다.

이리하여 호남지구에는 빈약하나마 한국 서남부를 방어하고 적이 서남부로 우회 전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됐으며 그 밑에는 전남(광주)과 전북(전주)에 각각 편성(編成) 관구(管區)사령부를 두었다. 서해안지구 전투사령관에는 신태영 소장이 취임하고 부사령관에는 원용덕(元容德) 준장이 임명됐다. 전주에 설치된 전북지구 편성관구사령관은 신 소장이 겸했으며 전남지구는 이응준(李應俊) 소장이 맡았다.

전북지구 편성관구사령부 산하에는 민기식(閔機植) 대령이 지휘하는 제7사단과 송덕준(宋德俊)대령이 지휘하는 오(吳)부대 및 김병준(金秉俊) 소령이 지휘하는 김(金)부대가 있었다. 한편 전남 편성관구 사령부 산하에는 이형석(李炯錫) 대령이 제5사단장으로 임명돼 제5사단의 제15연대가 여수(麗水)와 순천에서, 제20연대가 광주에서 각각 새로 편성됐다. 이밖에 해병대 김성은(金聖恩) 중령이 지휘하는 김부대와 전남경찰국장 김응권(金應權)이 지휘하는 경찰대가 있었다. 당시 제5사단에는 병기가 거의 없었는데 정일권(丁一權)참모총장의 명에 따라 병기를 전부 전방으로 차출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광주에는 제26연대가 이백우(李百雨) 중령 지휘 아래 실 병력 1개 대대로 편성되어 있었고 김병휘(金炳徽) 중령이 지휘하는 제15연대는 여수에 1개 대대, 순천에 2개 대대를 배치함으로써 실병력은 1,500명 정도였다. 이때 순천에 있는 순천고교에서는 신익희(申翼熙)국회의장, 이시영(李始榮)부통령, 이범석(李範奭)장군 등 정부요인들이 시국강연회를 가졌는데 연대장 김병휘 중령도 네번째 연사로 나와 열변을 토함으로써 5백여명의 학생이 지원 부족한 병력을 확보했다.

적이 서해안을 따라 남하, 정읍(井邑) 방면으로 침입하던 7월 20일께 광주에 있던 제5사단은 급히 이를 저지코자 제26연대 본부중대를 중심으로 한 학병 등을 보완하여 소총만의 1개대대를 편성, 장성방면으로 출동했다. 이때 조시형(趙始衡) 소령은 자원하여 이를 지휘하고 정읍으로 진출했다. 또 순천에 있던 제15연대는 남원으로 출동하라는 육본과 사단본부의 명령을 받았는데 연대장 김병휘 중령이 부상 지휘가 곤란했기 때문에 부연대장 이영규(李映奎) 중령이 이끌고 남원으로 출동했다. 정읍으로 나간 제26연대 일부 병력은 지연작전을 전개하면서 장성(長城)을 거쳐 광주로 철수했으며 제15연대 이영규 부대는 남원에서 구례를 거쳐 화개장터에서 일대격전을 벌였다. 광주에서 적의 공격을 받은 사단본부 및 남은 병력과 이응준 소장 등은 순천으로 이동, 순천우체국에 지휘소를 설치했다. 순천에서 다시 여수로 온 이 소장은 마산으로 갔다가 결국 부산에 합류했으며 이형석 대령도 욕지도(慾知島)를 거쳐 부산에 도착, 본대와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6·25가 터진지 1개월만에 전남지방은 완전히 적의 손안에 들어갔고 수복될 때까지 3개월 간 모진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2) 적치하(敵治下)의 장성

장성에 인민군이 첫발을 내디딘 것은 7월 23일 새벽이었다. 물론 아무 저항 없이 들어온 무혈입성이었다. 인민군은 장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전남지방에 첫발을 내디딘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장성지방 좌익분자들은 설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여순(麗順)반란사건 이후 입산했던 빨치산들이 고향이나 연고지를 찾아 내려와 합세하기 시작했다. 당시 장성경찰은 지원부대로 차출돼 있어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다. 호국군(護國軍) 3군(장성, 영광, 담양) 1개 중대는 사흘 전부터 노령산맥을 따라 진을 치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철수해 버린 뒤였다. 이들은 제5사단 이응준 사령관의 명에 따라 철수한 것이었다. 그 만큼 적에 대한 상황판단이 어두웠다는 걸 입증한 셈이다.

장성에 인민군이 들어온 것이 7월 23일 새벽 6시쯤이었는데 이들은 들어오자마자 경찰서를 점거 대담하게도 전남경찰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너희들을 때려잡으러 온 인민군이다. 2시간 뒤면 거길 갈테니 꼼짝말고 기다려!" 우리측은 적의 전화를 받고서야 전황을 알 정도로 정세판단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군이나 경찰 모두 무모한 작전계획을 세워 인적, 물적, 시간적으로 막대한 소모만 가져왔을 뿐이다. 이날 새벽 장성읍민들은 좌익청년들의 고함소리에 잠을 깨어 거리로 나왔다. 어깨에 완장을 두른 적색분자들이 거리를 누비며 "인민군을 환영하자"고 외쳐대는 등 하룻밤 사이 세상은 바뀌어져 있었다. 오래 전부터 남노당원(南勞黨員)으로 암약해 온 김모(金某)가 20여명의 청년을 이끌고 다니며 날뛰었다('광복 30년' 제3권 김석학 임종명 공저).

읍 내무서가 경찰서에 설치됐다. 소위 정치보위부는 대창동(大昌洞) 강(姜)병원에, 노동당 사무소는 충무동(忠武洞) 왕흥식당 자리에, 인민재판소는 등기소에, 유격대 사령부는 매화동(梅花洞) 천주교 건물에, 조국보위후원회가 충무동 민가(民家)에 각각 들어섰다. 그리고 남노당원과 투쟁경력이 많은 좌익분자들에게 감투가 안배되었다. 일명 '허사령(許司令)'으로 이름이 떨쳤던 유격 사령관 김모도 과거 빨치산 경력을 인정받아 서슬이 시퍼런 감투를 썼다. 성이 김인데도 '허사령'이라고 불리운 것은 그의 어머니가 허씨였기 때문이다. 김은 그의 애인을 여성동맹 위원장에 앉히기까지 했다.

이들은 조직을 대강 갖추자 바로 우익진영 색출에 들어갔다. 겁을 먹고 숨어버린 인사들에게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자수를 권유했다. 곳곳에 벽보를 써 붙이고 가족과 친지를 통해 스스로 걸어 나오도록 유도했다. 좌익폭도들의 달콤한 말에 속아 자수한 우익인사들은 3일만에 50여명이나 됐다. 살려준다니까 모두 제발로 걸어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자 50여명 중 하나 둘씩 불려나간 사람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개별조사를 받은 다음 처형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뒤늦게 눈치챈 나머지 인사들은 선무공작반에 자원하기도 했다. 저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체 하면서 달아나려는 속셈이었다. 이 계략은 들어맞아 내무서 유치장을 나와 돌아다니다 밤을 이용 잠적했다. 장성경찰서에 근무했던 박모 경위도 이같은 방법으로 달아났는데 그의 아내가 폭도들에게 모진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장성군수를 지냈던 하헌종(河憲種)은 가족들을 미리 대피시켜 놓은 다음 삼서면(森西面)에 사는 사돈집에 숨어있다 광주(光州)로 피신했으나 끝내 잡혀 처형당하고 말았다. 장성읍장 서기풍(徐基豊)은 조카집에 피신했고, 경찰서장 정소실(鄭小實) 경감은 경찰부대를 따라 후퇴했다. 거물급 우익인사들의 색출에 여념이 없는 폭도들에게 3군 호국군 대대장을 지낸 박남순(朴南淳)도 당연히 지목 대상이었다. 박은 일단 대원들과 함께 산으로 숨어들어 갔다가 광산군(光山郡) 임곡면(林谷面) 외가로 갔다. 그러나 그곳까지 냄새를 맡고 찾아온 폭도들 때문에 비아면(飛雅面) 어느 민가 안마당 짚더미 속에 숨어 지내다 발각되고 말았다. 그들은 박을 죽이지 않고 월북(越北) 시키려고 갖은 회유책을 쓰다 광주형무소로 넘겨버렸다. 광주형무소에서는 현준호(玄俊鎬), 최영욱(崔泳旭) 등 굵직한 우익인사들이 하나씩 불려나가 처형되곤 했는데 박은 순간적인 기지(機智)로 간수 호명에 응답하지 않고 버틴 끝에 형무소를 탈출 살아 나올 수 있었다.

(3) 장성의 반공투쟁

1) 태극(太極)결사대

좌익분자와 폭도들이 날뛰는 속에서도 우익청년들은 맨주먹으로 항쟁을 벌였다. 낮에는 주로 산 속에 숨어 지내다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활동했다. 그 좋은 예(例)가 장안리(長安里)에서 조직된 '태극결사대'였다.

태극결사대라는 이름의 반공청년단체는 변진일(邊鎭壹)이 주동이 되어 조직했다. 변은 국방부 문관으로 첩보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6·25가 터지자 단신으로 남하하여 7월 23일에 고향으로 왔다. 장안리는 봉암(鳳岩), 월봉(月奉), 장재(長在)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6백여호 대부분이 변씨 문중이었다. 고향에 온 변은 먼저 좌익들의 계보부터 파악했다. 남노당으로 암약해 온 청년들을 중심으로 머슴살이하던 청년, 일꾼 등이 죽창을 깎아들고 설쳐댔다. 이들이 80여명의 우익인사들을 색출해 처형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음을 알았다. 변이 고향에 내려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밤 벌써 마을 청년 8명이 잡혀가 희생당했다. 그들은 서삼면(西三面) 중동산 속으로 우익청년들을 끌고 가 죽창과 칼등으로 찔러 죽였다. 변은 먼저 20세 전후의 마을청년들을 비밀리에 모았다. 그리고 1대 1로 좌익세력과 싸우기로 결의 이름을 태극결사대라 붙였다. 8월 18일에 조직된 태극결사대는 모두 32명이었다. 모두 장성읍 장안리(長安里) 출신들이었다. 대원들은 각자 단도 한자루씩을 품고 다니도록 했다. 변은 일제때 중국에서 임시정부 유격대원으로 활약한 바 있었기 때문에 게릴라전에 훌륭한 솜씨를 발휘했다. 정보원까지 2명을 두고 밤에만 기습을 감행했다. 좌익폭도들이 한 두명씩 지나갈 때 갑자기 달려들어 해치우는 수법이었다. 변은 대원들을 산 속에 모아 기습훈련도 시켰다.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단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연습이었다. 변대장 자신도 기습을 감행, 어느날 밤 새벽 2시께 좌익 두목급인 고모(高某)를 살해하기도 했다. 흥양촌(興陽村) 언덕바지 버드나무 밑에 매복해 있다가 혼자서 총을 메고 지나가는 그를 일격에 해치운 것이다. 태극결사대원들이 이렇게 처치한 폭도들의 수효는 9월하순까지 모두 21명에 이르렀다. 집안에서 문 열어놓고 잠자다 죽었는가 하면 논두렁에서 밥 먹다 살해되기도 하고 밤길을 가다 목졸려 죽기도 했다. 이들을 그냥 놓아두었더라면 양민의 희생이 더욱 컸을 일이었다.

9월말이 가까워오자 폭도들은 한층 더 발악하기 시작했다. 수효도 더욱 늘어 14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자기네 편이 감쪽같이 살해당하자 면밀한 탐색을 한 끝에 태극결사대의 정체를 알아내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9월 29일 마침내 장안리 일대를 이잡듯이 뒤져 태극결사대원 16명을 잡아냈다. 폭도들은 잡은 결사대원들을 태봉(泰峰)이란 산 속으로 끌고 들어가 20여명이 차례로 돌아가며 칼과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좌익 폭도들에게 쫓기던 한 대원은 낫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기도 했다. 죽기 전 "대한민국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고 쓰러지자 좌익폭도들도 고개를 내저었다. 10월 6일 저녁 국군이 입성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장성 못재까지 이르렀다는 귓속말이 오가자 장안리 주민들은 모두 들떠 마을 앞 월봉 공회당에 모여들었다. 어린아이, 노인은 말할 것도 없고 태극결사대원들도 모였다. 얼굴에 환한 빛이 감돌고 모두 웃음꽃을 피웠다. 모여 앉은 주민은 50여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때 느닷없이 백명 가까운 숫자의 좌익폭도들이 몰려와 공회당을 포위하고 그 중 10여명이 마을사람 가운데서 소위 '악질반동분자'들을 가려내기 시작했다. 지목 받은 사람은 고개를 떨구며 걸어나갔다. 군중 맨 뒤쪽에 서있던 변대장은 느닷없이 두 손가락으로 폭도 한 명의 두 눈알을 찔러 쓰러뜨린 다음 결사적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에서 마구 총을 쏘아대 일부러 맞은 척 밭고랑에 쓰러져 있다가 기어서 숨었다.

폭도들은 변을 놓치자 더욱 분통이 터져 부녀자 12명을 포함 모두 42명을 가려내 태봉으로 끌고 올라갔다. 남자들은 대부분 태극결사대원이었고 부녀자들은 대원부인이거나 우익청년들의 아내였다. 폭도들은 얼마전 태극결사대원 16명을 처형한 바로 그 곳에서 양민 42명을 또 학살했다. 여자들을 정면으로 세워놓고 유방과 국부를 찔러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폭도들은 또 여순반란사건 때의 공비잔당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기산리(岐山里) 이온공(李溫公) 순경의 어머니를 비롯해 아내, 장남, 차남 등 일가족 7명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생후 7개월 된 아기도 죽였다. 이 순경은 그 전에 붙잡혀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 파옥(破獄)사건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이미 가족들은 몰살된 뒤였다. 적치하의 장성에서 반공투쟁을 한 단체는 태극결사대 이외에도 상당수 있었다. 북일면(北一面) 신흥리(新興里)의 광복형제단(光復兄弟團­단장 변대옥), 북상면(北上面) 용곡리(龍谷里)의 화랑단(花郞團­단장 변옥기), 서삼면(西三面) 봉연리( 鳳淵里)의 결사단(決死團­단장 이중석) 등이 맹활약했다. 좌익폭도들에 잡히기가 싫어 자결한 청년도 많았는데 태극결사대의 유지현(柳池鉉)은 쫓기다가 강변에서 낫으로 자신의 목을 쳐 자결했고 광복형제단은 발목에 돌을 매달고 북일면 저수지에 뛰어들어 죽었다. 진원면(珍原面) 적선리(積善里)의 김종원(金鍾元)도 쫓기다 방죽에 뛰어들었고, 태극결사대의 변석기(邊錫基)는 포위 당한 채 만세를 부르고 죽어갔다.

2) 잔인한 보복

장성군내에서 우익인사가 있는 집안으로 피해를 가장 크게 본 것은 북이면 사가리(四街里)의 강(姜)씨 집안과 북하면(北下面) 일대의 울산 김(金)씨들이었다. 국군이 입성할 무렵인 11월 3일 새벽에 좌익폭도들은 북이면 사가리 일대에 사는 강씨 집안들을 덮쳤다. 장성군 독촉 국민회 총무부장인 강민수(姜珉秀), 강권수(姜權秀) 집안이었다. 오래전부터 열렬한 우익진영인 강씨 집안을 박살내려고 계획해 온 폭도들은 이날 밤 갓난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강씨 문중 47명을 끌어냈다. 조사해서 죄가 없으면 돌려보내겠다고 꾀어 끌어낸 폭도들은 집에서 1km쯤 떨어진 속칭 흥꼬리 언덕배기에 이르렀을 때 본색을 드러냈다. 내무서로 향하지 않고 산으로 끌고 올라갔다. 반항하는 노인들의 입에 칼을 쑤셔 넣어 살해했다. 죽창과 칼 그리고 총으로 마구 학살했다. 이 같은 아비규환 속에서도 강대훈(姜大薰) 등 5명은 중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폭도들은 시체확인을 했지만 모두 피투성이어서 죽은 줄로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한편 북하면 약수리(藥水里)와 중평리(中坪里) 일대 울산 김씨 문중은 집안청년들이 '태극반(太極班)'이라는 반공단체를 만들었기 때문에 대상이 되었다. 태극반은 8월 초순 김병용(金炳龍)등 17명이 도착, 마을마다 다니며 '타도하자 빨치산' '몰아내자 공산당' 등의 표어와 포스터를 붙이고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이를 본 좌익폭도들은 비밀리에 태극반원의 명단을 파악 일거에 38명을 잡아냈다. 중평리장 김상완(金相完)을 비롯해 김병용(金炳龍)의 부친 김상선(金相善) 등도 포함됐다. 붙잡힌 38명 가운데는 부녀자도 10명이나 있었는데 태극반원들의 부인이거나 누나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중평리 뒷산으로 끌려가 칼과 죽창 세례를 받았다. 넓직한 구덩이를 파놓고 시체는 한꺼번에 묻었다. 잔인한 폭도들은 저희들 손으로 죽이기가 싫증났던지 아버지를 시켜 아들을 찌르게 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울산 김씨 문중은 태극반 조직에 대한 보복을 철저히 당한 셈이었다.

4. 휴전과 6·25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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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란의 결산(決算)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고 말렌코프가 소련 지도자로 등장하면서 휴전회담은 급속도로 진전됐다. 말렌코프는 평화공존을 내세우고 새로운 정책의 전개를 피력했다. 4월 6일부터 판문점에서 재개된 휴전회담 결과 포로교환협정이 체결되고 타결이 가까워졌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6월 9일부터 '굴욕적 휴전반대'를 부르짖는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8일 일방적으로 반공포로 27,000명을 석방해 버렸다. 우리 정부의 강경한 태도로 인해 한때 정돈상태에 빠졌던 휴전회담은 한미 양국 간의 상호이해로 7월 10일부터 다시 열려 7월 27일 마침내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이로써 3년 1개월 간 핵무기를 제외한 모든 중화기와 근대무기가 동원됐던 이 전쟁은 쌍방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끝났다.

국토는 황폐되었고 국민의 고난은 한마디로 비참 그것이었다. 쌍방의 군인 사망자만도 공산측이 약 50만명(북한 30만, 중공 20만), UN측이 약 20만명(국군 15만, 미국 및 기타 참전국 4만)이었다. 이 숫자는 부상자를 제외한 것이며 민간인 사망자는 군인보다 훨씬 많았다. 이 전쟁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그 후 10년 간에 걸친 이정권 독재의 길을 터 주었다. 세계적으로도 영향은 커 미국은 재(再)군비에 착수했고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립이 날카로워졌다. 한반도는 38선 대신 군사분계선이 허리를 갈랐다. 한편 이 전쟁동안에 국군은 놀랍도록 성장했다. 1952년 10월부터 징병제가 정식으로 실시돼 53년 6월 휴전 때까지 20개 사단으로 늘어 155마일 휴전선의 3분의 2를 담당하게 되었다.

(2) 동란중의 사회

전란의 경험은 국민들에게 북한 공산주의 체제와 남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놓고 선택하도록 하는 계기가 됐다. 이 전란 통에 국민은 완전히 좌우로 갈라졌으며 일찍이 보지 못한 인구의 지역적 대이동이 실현되었다. 이러한 인구의 지역이동으로 다른 지방 사람들끼리 접촉이 많아져 상호간 이해가 두터워지고 전통적인 관습과 사고방식이 바뀌어졌다. 북한으로부터 월남한 피난민에 의해 남북지방의 언어, 풍속들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또 피난생활은 사회계급의 해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됐으며 남녀간의 엄격하던 내외규율도 완화되고 사회의 민주화를 자극했다.

동란 중엔 정치세력에 편승한 경제범죄가 많이 생겨 국민방위군사건, 중석불(重石弗)사건 등이 일어났으며 공무원의 기강도 해이해져 부패가 싹트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처음엔 전쟁을 일으킨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오로 적개심에 불탔으나 전쟁이 오래 끌자 전쟁의 허무함, 생활터전을 잃은 절망과 불안 때문에 퇴폐적인 경향이 급속하게 늘고 사치풍조가 만연했다. 동란을 계기로 군(軍)세력이 사회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도 중요한 변화의 하나인데 모든 국가정책이 군 작전에 우선권을 두었고 군의 발언권이 급속히 높아졌다.한편 대도시에는 사창(私娼)이 격증했고 13만여 명에 이르는 전쟁 미망인이 직업전선으로 진출함에 따라 퇴폐풍조와 함께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5. 민권(民權)의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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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혼란과 사회상(社會相)

1) 부산(釜山) 정치파동

6·25로 인해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되자 정국은 정돈(停頓)상태에 빠졌다. 여기에 야당의 기세가 너무 높아지자 이 대통령은 자유당을 새로 만들고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내놓았다. 표면상의 명분은 국정을 신중히 다루기 위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국회 안에 야당세력이 강해 자신의 대통령 당선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 개정안이 국회에서 여지없이 부결돼 버리자 이른바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이(李)정권 지지파들이 연일 군중대회를 열었고 국회의원 소환운동이 벌어졌다. '민족자결단' '백골단' '땃벌떼' 등 관제데모가 일어났고 공산게릴라 소탕이라는 구실 아래 경남, 전남북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국회의원 50여명이 국제공산당 관련혐의로 헌병대에 연행됐고 이시영, 김성수, 장면(張勉), 조병옥(趙炳玉) 등 재야인사 60여명이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구국투쟁위원회를 결성 선언대회를 가지려다 괴한들의 습격으로 유혈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시현(金始顯)이 이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불발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정계가 혼란에 빠지자 장택상(張澤相)이 이끄는 신라회(新羅會)가 정부안과 야당안을 절충한 이른바 발췌(拔萃)개헌안을 제출 통과시킴으로써 정치파동은 계엄선포 후 40여일 만에 일단락 됐다. 이 개헌안에 따라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2) 한일(韓日)회담

1951년 10월 6·25동란이 장기전화(化)하고 있을 무렵 일본 도쿄에 있는 연합군사령부 외교국장 시볼트의 알선으로 한일교섭이 처음 시작되었다. 회담의 필요성은 서로 인정하면서도 견해차가 심해 많은 곡절을 겪어야 했다. 특히 한국은 전쟁을 치르느라 어려운 사정에 있었고 일본은 특수(特需)경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여서 시종 고자세로 비타협적이었다. 제1차 회담은 6개월 간 재일(在日) 한국인의 법적 지위, 선박문제, 청구권문제, 어업문제, 기본관계 등을 토의했으나 뚜렷한 진전을 보지 못하고 52년 4월 21일 막을 내렸다. 제2차 회담은 1차 회담 후 1년만인 53년 10월 6일 열려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 문제를 중심으로 어업, 청구권, 기본관계 등이 논의됐으나 일본측의 제의로 53년 10월 21일 무기휴회로 들어갔다. 제3차 회담은 일본측 제의에 따라 그 해 10월 6일 다시 열렸으나 소위 '구보따(久保田)망언'으로 2주만에 결렬되고 말았다.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따는 "일본이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한국이 독립한 것은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며, 36년 간에 걸친 한국통치는 한국민에게 유익했다"고 말해 한국 측을 크게 격분시켰다.

(2) 반(反)독재운동

1)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

자유당은 이승만의 영도아래 일단 통일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불충분한 점이 많아 3대 국회 때 한번 더 개헌을 하기 위해 개헌선 확보를 위한 전략에 돌입했다. 관권(官權)동원 등 혹독한 선거탄압 속에 실시된 1954년 5월 20일 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자유당은 114석을 얻었다. 그러나 이는 개헌선(원내 3분의 2)인 136석에 못 미쳐 갖가지 포섭 공작이 벌어졌다. 이 때 돌연 '뉴델리 회담'설이 터졌다. 뉴델리 회담이란 제2대 국회의장이던 신익희가 53년 여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인도(印度) 수도 뉴델리에서 6·25때 월북한 사회당의 조소앙(趙素 )과 몰래 만나 이른바 비(非)공산 비(非)자본의 제3세력이 규합하는 남북협상 추진을 협의했다는 것이다. 이는 민국당(民國黨)의 곽상훈(郭尙勳)이 폭로했는데 조사 끝에 허위조작임이 밝혀졌으나 자유당은 그 여세를 몰아 개헌통과 강행군을 시작했다. 137석을 확보한 자유당은 54년 9월 6일 개헌안을 제안했다. 개헌안 내용은 초대대통령에 한해 삼선(三選)제한을 철폐한다는 것이었다.

그 해 11월 27일 표결에 붙인 결과 총 투표수 202명중 가135표, 부 60표, 기권 7표였다. 최순주(崔淳周) 국회부의장은 "'한 표가 모자라 개헌안은 부결되었다."고 선포했다. 야당석에선 함성이 터지고 여당석에선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일단 부결된 개헌안은 하룻밤 사이에 가결된 것으로 뒤집히고 말았다. 28일 의원총회를 열어 원내전략을 숙의한 자유당은 29일 국회가 열리자마자 최 부의장이 "27일 부결됐다고 선포한 것은 착각이었으니 취소하고 가결되었다."고 선포했다. 사사오입을 하면 135표로 가결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국회에서는 난투극이 벌어졌지만 자유당은 방청석에 깡패까지 동원해 위협했다.

2) 야당세력의 대두

사사오입 개헌파동으로 야당의원들은 단일야당 구성을 지향하게 되었다. 신당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민국당의 김성수(金性洙), 신익희, 조병옥, 김도연(金度演), 윤보선(尹潽善), 김준연(金俊淵)을 비롯해 무소속의 곽상훈, 장택상(張澤相), 원내 자유당이었던 장면(張勉), 오위영(吳緯泳), 김영선(金泳善), 비(非)보수세력인 조봉암(曺奉岩), 서상일(徐相日), 대한부인회의 박순천(朴順天), 한민당의 한근조(韓根祖) 등 광범한 재야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유당 정권을 타도한다는 당면 목표는 같았으나 정치적 이념이나 성분이 각양각색이어서 신당운동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결국 보수야당인 민주당은 조봉암의 혁신세력을 받아들이지 않아 진보당이 따로 생기게 되었다. 민주당의 원내세력은 33석이었고 원외조직은 민국당의 지방조직과 가톨릭 계통, 흥사단 계통, 제2대 국회의 원내 자유당 계통 등 혼합으로 이루어졌다. 원내, 원외를 막론하고 민국당계와 비민국당계가 신구파로 나뉘어져 이것이 뒷날 민주당의 큰 내분으로 발전됐다. 한편 진보당은 당국의 압력 속에서도 끈기 있게 당세를 확장했고 특히 평화통일론, 수탈(收奪)없는 경제정책 등을 내걸어 젊은 학생, 지식층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더욱이 조봉암이 2대 대통령선거 때 이승만과 대결 만만찮은 지지표를 얻어 자유당과 민주당 모두 일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6. 암흑정치의 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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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차례의 선거

사사오입 개헌파동으로 이승만에 대한 삼선(三選)의 길을 터놓은 자유당은 그의 후계자로 등장한 이기붕(李起鵬)을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당선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방법을 썼다. 민주당은 이에 대항해서 신익회, 장면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했고 진보당은 조봉암, 박기출(朴己出)을 내세웠다. 이것이 56년의 5·15 정·부통령선거였다. 그러나 신익회 후보가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急逝)함에 따라 민주당은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대통령에 이승만이 당선되고 부통령에는 이기붕 대신 장면이 20만표 차로 당선됐다.

부통령으로 당선된 장면은 취임 1개월 남짓 만인 56년 9월 28일 서울시회관에서 열린 민주당 제2차 전당대회가 끝날 무렵 김상붕(金相鵬)으로부터 저격을 당했다. 다행히 오른편 손 관통상으로 끝났으나 김(金)의 배후에는 이기붕의 지시가 있었음이 4·19 뒤에 밝혀졌다. 정·부통령선거 2년 뒤인 58년 5월 2일에 실시된 제4대 민의원(民議員) 선거는 선거공영제를 채택한 협상선거법 때문에 선거운동이 극도로 제한되었다. 5·2 민의원 선거를 4개월 앞둔 58년 1월에는 간첩사건에 관련됐다는 이유로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을 비롯한 당 간부 전원이 체포됐다. 세칭 '진보당사건'은 대법원에까지 올라갔으나 조봉암은 끝내 다음해인 59년 7월 31일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졌다. 4·19 뒤에 고정훈(高貞勳)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조봉암의 사형은 이승만의 친필지령에 의한 것이었다고 폭로했으나 사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5·2 민의원 선거는 자유, 민주 두 보수정당의 공천제 영향을 받아 군소(群少)정당은 참패했다. "도시는 민주당, 농촌은 자유당"하는 식의 선거가 실시됐다. 이기붕 등 자유당 간부 몇몇은 무투표 당선 공작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2) 보안법(保安法) 파동

대권을 장악한 자유당 정권은 58년 8월 11일 신(新)국가보안법안을 국회에 내놓았다. 이 법안은 간첩죄를 극형에 처하며 간첩 방조에 대해 범죄 구성요소를 명백히 하고, 변호사 접견금지와 이심제(二審制) 폐지를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민주당과 무소속 의원들은 "간첩개념을 확대 규정한 것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언론의 활동을 탄압하려는 술책이며 변호사 접견금지와 이심제 폐지는 헌법위반이다."고 반대투쟁에 나섰다. 여야 간에는 험악한 공기가 감돌았는데 자유당은 점심시간을 틈타 날치기로 이 법안을 야당부재 중에 법사위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본회의 통과를 막기 위해 농성중인 야당의원들을 무술경위 3백명을 동원해 끌어낸 다음 12월 24일 기어코 통과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2·4파동이다.

7. 민권(民權)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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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혁명전야(前夜)

1956년 신익회, 장면과의 정권쟁탈에서 민중(民衆)의 이산(離散)을 깨달은 자유당은 60년 차기 선거를 위해 무리를 거듭했다. 먼저 조봉암을 제거했고 경향신문을 폐간했으며 보안법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을 장악했다. 국회에서는 정·부의장 3석과 상임위원장 자리를 모두 독점해 버렸고 행정부에서는 내무, 재무, 법무 등 주요 장관자리를 자유당계 인물로 바꿨다. 법관 연임법을 만들어 뜻에 맞지 않는 법관들의 연임을 거부함으로써 사법부마저 지배했다.

보성(寶城), 양산(梁山) 등지에서 실시된 재(再)선거는 3·15 부정선거의 예비훈련이나 다름 없었다. 부정선거를 위한 선거도구로 '반공예술인단'이라는 걸 만들어 전과 3범의 깡패 임화수(林和秀)가 경무대(警武臺) 곽영주(郭永周)를 등에 업고 날뛰었다. 국제사회에서는 자유당 정권이 고립되어 재일교포의 민단(民團)에서 불신임성명을 냈고 북송교포가 나와 이 정권의 위신을 추락시켰다. 세칭 '가짜 이강석(李康石)'이 출현할 정도로 사회가 썩었고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증인으로 법정에선 치안국장 김종원(金宗元)이 재판장에게 "일개 재판장이 무엇이냐?"고 고함을 칠만큼 자유당의 위세가 대단했다.

자유당은 59년 6월 29일 제9차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뽑았다. 민주당은 59년 11월 26일 조병옥이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 당의 실권은 신파의 장면이 잡았다.

그러나 조병옥은 신병치료 차 미국에 갔다가 그곳 병원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자유당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3월 15일을 선거일로 정해 맹렬한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반공청년단을 조직하고 군소정당의 정·부통령 후보등록을 방해하는 한편 전국 유권자 성분을 조사하여 3인조, 9인조로 세포조직을 형성했다. 이는 비밀경찰이 맡았는데 총지휘는 치안국장 이강학(李康學)이 맡았다.

2월 27일 대구에서 자유당이 연설을 하고 다음날 민주당이 하려하자 일요일인데도 대구시내 학생들을 전원 등교시켰다. 이에 불만을 품은 경북고 5백여명의 학생들이 이날 오후 1시쯤 "학생인권 옹호하라"고 외치며 거리에서 시위를 하자 다른 학교 학생들도 쏟아져 나왔다. 이같은 학생운동은 삽시간에 대전, 수원, 서울, 충주, 부산 등으로 번져 나갔다. 학생시위 속에서도 자유당은 ① 총유권자의 40%는 사전투표 시켜라 ② 나머지는 3인조 9인조를 동원 공개 투표하라 ③ 야당이 반대하면 유혈도 주저하지 말라 ④ 구(舊)진보당, 언론인, 족청계(族靑系), 국군 하사관, 요시찰인(要視察人) 등은 회유 포섭하라 ⑤ 경찰은 선거에 총동원하라 ⑥ 야당 선거자금 유입을 철저히 봉쇄하라는 등 부정선거 지령을 내렸다. 선거결과는 물론 이승만, 이기붕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2) 4·19혁명

참다못한 백성들의 분노는 가장 먼저 마산(馬山)에서 터졌다. 경찰의 발포로 수십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그래도 자유당은 백성들의 폭발을 얕보고 책임전가에만 급급하는가 하면 경찰력으로 능히 진압될 줄만 알고 있었다. 4월 11일 김주열(金朱烈)군의 시체가 마산 앞 바다에서 떠오르고 사인규명이 흐지부지되자 마산시민이 또 들고 일어섰다. 4월 18일 서울에서는 고대생 3,500여명이 궐기 "민주역적을 몰아내라"고 외치며 국회 앞에서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이 평화적인 시위에 자유당은 깡패를 동원 고대생 가운데서 10여명의 중경상자가 났다. 이에 격분한 서울시내 각 대학생들은 4월 19일 총궐기해 경무대로 몰려갔다. 경찰의 총탄에 수많은 학생이 죽고 다쳤다. 이 정권은 이날 오후 5시를 기해 대구, 부산, 대전, 광주 등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승만은 자유당과 일절 관계를 끊는다고 발표 전 각료의 사표를 받고 허정(許政) 등에 과도 내각을 수립토록 지시했다. 이기붕은 우물쭈물 시일을 끌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부통령 사퇴를 '고려'한다는 태도를 표명했으나 이미 사태가 그 정도로는 수습되기 어려워졌다. 정국이 수습되지 않고 있는 4월 25일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고 대학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채택 258명의 교수가 국회 앞에서 시위를 했다. 이를 본 수많은 학생 시민들이 재차 시위를 벌여 자정까지 계속됐다. 데모대들은 이기붕, 이정재, 임화수의 집 등을 습격해 파괴하거나 불을 질렀다.

4월 26일 시민들의 시위는 다시 시작됐고 계엄 하에 탱크가 거리로 나왔으나 "우리 국군만세"를 외치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날 밤, 시위대는 최인규(崔仁圭)집을 습격 방화했다. 부산에서도 5만여명의 시민들이 시위를 전개 자유당 청사를 습격해 불을 질렀다.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발표했다. 시민들은 "민권이 이겼다"고 외쳤다. 전국적으로 183명이 죽고 6,25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승만의 사표는 27일 국회에서 수리됐다. 이기붕은 28일 새벽 아들 이강석(李康石)이 쏜 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가족 전원이 집단 자살했다. 이로써 이 정권 12년 간의 폭정은 종말을 고했다. 국회에서는 야당이 여당으로 바뀌어 자유당 의원들은 민주당에 끌려 다녀야만 했다. 국회 정국 수습위는 ▲ 3·15 부정선거를 무효화하고 즉시 재선거를 실시한다 ▲ 과도내각 아래 완전 책임내각제로 한다. ▲ 개헌 후 민의원의원 선거를 바로 실시한다는 등의 결의를 했고 과도내각의 조각위임을 받은 허정은 조각을 발표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이승만은 60년 5월 29일 오전 8시 50분 전세기 편으로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만 동반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했다. 12년 간 독재자로 군림해온 그는 망명생활에서 귀국한지 15년 만에 다시 망명길에 오르는 신세가 됐다. 제4대 국회는 4년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6월 23일 해산했는데 그에 앞서 숙원의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물러섰다.

4·19뒤 자유당이 무너짐에 따라 유일한 보수정당은 민주당이 됐다. 혁신세력은 조직 정비를 하지 못하고 군웅할거(群雄割據)식이었다. 총선을 앞둔 정계는 보수·혁신 두 세력으로 크게 나뉘어졌다. 4·19 후 가장 먼저 당명(黨名)을 내건 것은 서상일(徐相日), 김달호(金撻鎬), 윤길중(尹吉重), 박기출(朴己出) 등을 중심으로 한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이었다. 그러나 당세(黨勢) 확장에만 너무 급급한 나머지 자유당계 인사까지 마구 받아들여 혁신이념에 흠을 남겼다. 그밖에 혁신정당으로 한국사회당(韓國社會黨), 혁신동지연맹(革新同志聯盟), 구국청년단(救國靑年團) 등이 등장했으나 당의 노선이 모두 구호(口號)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구국청년단의 고정훈(高貞勳)은 보수 정치인들의 지난날 흑막을 폭로하는 전술을 쓰다가 명예훼손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바라던 제5대 민의원과 초대 참의원 선거가 60년 7월 27일 실시됐다. 7월 29총선은 지금까지의 어느 선거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민의원 입후보자 총수는 무려 1,562명에 달했으며 참의원 입후보자는 214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무소속 중 3백명 가까운 민주당 낙천자(落薦者)가 신파 또는 구파의 지원을 받아 공공연한 경쟁을 벌여 7·29총선은 민주당의 신·구파 싸움판이 되었다. 투표는 표면상 조용히 진행 되었다. 그러나 개표가 시작된 지 몇 시간 후에 창령(昌寧)을 비롯한 각 선거구에서 난동사건이 벌어졌다. 투표함파괴, 소각(燒却) 등으로 당선자를 결정짓지 못한 선거구가 13개나 되었다. 특히 창령에선 입후보자를 발가벗겨 광장에 세워놓고 '인민재판'식으로 사형을 언도하는 난동을 저질렀다. 집권에 눈이 뒤집힌 민주당 신파가 저지른 소란들이었다. 이같은 난동으로 재선거를 실시한 선거구는 진도(珍島), 광산(光山)을 비롯해 대전갑(大田甲), 서천(舒川), 김천(金泉), 괴산(槐山), 고성(固城), 영양(英陽), 밀양갑(密陽甲), 남원갑(南原甲), 삼천포(三千浦), 산청(山淸), 창령 등이었다. 7·29총선 결과는 물론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3) 민주당 정권의 성립과 말로(末路)

민주당 신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장면을 국무총리로 밀기로 결의했으나 구파가 양직(兩職) 안배(按配)를 거부하고 윤보선, 김도연을 고집했다. 8월 12일 민·참 양원 합동회의에서 제 2공화국 대통령에는 예정대로 윤보선을 선출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윤 대통령은 신파측 요구를 거부하고 김도연을 지명해 버렸다. 그러나 국회표결에 부친 결과 부결되고 두번째로 장면을 지명해 가결됐다. 총리 인준에서 실패한 구파는 '건전 야당'을 표방하고 70여명의 의원이 신당 조직에 서명 입각거부도 의결했다. 정치 생리가 다른 신·구파는 10월 13일 마침내 결별을 선언하고 구파는 신민당이란 이름으로 창당했다.

이 정권이 무너지자 반(反)민주행위자들을 처단하라는 여론이 높아져 검찰은 3·15 부정선거관련자 및 반민주행위자를 구속하기 시작했다. 최인규, 이강학이 체포되고 이정재는 자수했으며 장경근(張暻根)은 병보석 중 일본으로 밀항(密航)했다. 기소된 13명 가운데 10월 8일 선고 공판에서 유충렬(柳忠烈) 한 사람에게만 사형이 내려지고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는 집행유예나 무죄 등이 선고돼 석방됐다. 그러자 서울, 부산, 마산 등지에서 데모가 일어나고 4·19 부상학생과 희생자 유가족들에 의한 의사당 난입사건이 10월 1일에 일어났다.

민의원 본회에서는 '민주 반역자 형사사건 임시처리법'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검찰과 경찰이 석방된 원흉들을 다시 검거하기 시작했다. 구속된 자들 가운데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꼴사나운 일이 많았으나 최인규는 자기 죄를 솔직히 시인하고 이승만에 충성하는 태도를 견지해 화제가 되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을 현행법으로 다스리기 어려워 혁명입법에 의해 탄생한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가 맡았다.

혁명입법 중 가장 말썽이 많았던 것은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 법안'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4·19 부상청년들이 두 차례나 국회의사당에 난입했다. 이 법안은 법사위를 통과한 지 한달 뒤인 12월 5일에야 본회의를 통과했는데 이처럼 심의기간이 길어진 것은 민·참의원 중에 그 대상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법안에 따르면 공민권 제한 자동 케이스는 3·15 당시 자유당 정·부통령 후보자 ▲ 중앙당 당무위원 ▲ 기획위원 ▲ 정무위원 ▲ 심계원장 ▲ 대통령 비서관 ▲ 민의원 의장 비서실장 ▲ 자유당 경찰 ▲ 중앙 및 지방 행정기관 ▲ 금융기관 ▲ 노총(勞總) ▲ 반공 청년단 등의 지도층 ▲ 3군 참모총장 등으로 하고 심사 케이스는 현저한 반민주행위자를 대상으로 했다. 61년 1월 4일 효력이 발생한 이 법에 따른 자동케이스 해당자는 전국적으로 658명이었다. 국회의원 가운데는 자동 케이스가 이재학(李在鶴·민의원), 박철웅(朴哲雄·참의원) 등 8명이었고 심사 케이스가 이정석(李丁錫·민의원), 황성수(黃聖秀·참의원) 등 8명이었다. 이들은 의원 자격이 상실되는 동시에 7년 혹은 5년 간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반민주 행위자로 판정되어 자동 케이스로 7년간 공민권이 박탈된 자는 전국적으로 666명이었으며 일반인으로서 심사 케이스 해당자는 14,000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는 경찰관 2,534명(경감 7, 경위 84, 경사 45, 순경 1,970여명)이 들어 있었다. 혁명입법 4개 법률 중 ▲ 3·15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 ▲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조직법 ▲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 등 3개 법률은 별 말썽없이 입법되었으나 ▲ 부정축재처리법안 만은 각파간 의견대립으로 입법이 지연되었다. 부정축재 처리위원회의 기능은 61년 5월 4일부터 발휘됐으나 집권당인 민주당 각파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5·16 때까지 단 한 건도 처리하지 못해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4·19의거의 덕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 내각은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 경제정책의 실패 ▲ 대(對)UN외교의 실패 ▲ 중석(重石)사건 ▲ 인사행정의 부패 등 무능과 부패로 일관돼 원성이 날로 높아갔으며 장 정권을 규탄하는 데모와 성토대회가 연일 곳곳에서 열렸다. 이에 당황한 장면 내각은 발족 후 8개월만에 대남간첩 단속을 강화한다는 구실로 '반공법안'이라고 이름 붙인 특별법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법안은 민의원에 제출하기도 전에 원내 야당의원들과 재야인사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이 정권 당시의 2·4 보안법파동 못지 않게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2·4 파동 때 극한투쟁으로 보안법을 저지하려고 나섰던 것이 민주당 신파였으나 자신들이 정권을 잡자 다시 2·4 파동에 못지 않는 정치적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혁명과업 수행에는 성의가 없고 실정(失政)을 얼버무리려는 처사라고 야당과 각계의 규탄이 높았음에도 민주당 정권은 입법을 서둘렀다. 더구나 이 법안과 함께 민주당 정권은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안' 도 만들어 민의원에 제안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격분한 신민당과 재야 인사들은 정부의 무능을 공포 분위기로 감추려는 계획이니 절대로 통과시킬 수 없다고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신민당 내 청조회(淸潮會) 회원들은 이 법이 악용되기 시작하면 건전한 노동쟁의도 불법화할 것이며 자유민주주의의 싹을 완전히 말살하고 말 것이라고 극한 투쟁을 선언했다. 또 민주당내 소장파인 신풍회(新風會)에서도 "우리는 이 법안에 관여한 바 없으며 공산당을 막기 위해서라면 국방 예비법으로도 충분하다."고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민주당 정권은 반공에 관한 입법이 어렵겠다고 느껴 제3의 시안(試案)으로 국가보안법 중 개정안을 내놓았다. 그 내용은 반공법과 거의 같았다. 이를 반대하기 위한 '반민주 악법반대 성토 대강연회'가 서울시청 앞에서 61년 3월 22일 오후에 열렸다. 이 대회는 혁신세력이 주동했는데 4개 반공단체는 반공법을 지지하는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이날 반대대회에 참석했던 학생들은 밤 9시까지 데모하다가 해산했는데 다음날 국회에서 용공성(容共性) 여부가 논의되기까지 했다. 어쨌든 보안법은 개정되지 못한 채 다음 국회로 넘어갔다.

장 정권은 대일(對日)외교, 대(對)UN외교에서 모두 무능과 실패를 드러냈다. 장 정권에 앞서 허정 과도(過渡)정부는 지나치게 급진적인 대일(對日)친선정책을 쓰다가 여론의 지탄을 받았는데 장 내각은 수립되면서부터 '지일(知日)내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조각(組閣) 직후 '외교쇄신 7개 원칙'을 발표했는데 그 중 하나가 '대일외교의 근본쇄신과 국교 정상화'였다. 정일형(鄭一亨) 외무부장관 초청으로 9월 6일 일본 외상의 방한(訪韓)이 수락됐고 61년 5월 6일에는 일본의 여당인 자민당(自民黨) 중의원(衆議院) 의원 8명과 일본 외무성 아시아 국장 등으로 구성된 자칭 '친선 사절단'이 내한(來韓)했다. 이들은 1주일 간 우리나라에 머물며 과분한 대접을 받고 돌아갔다. 그들은 돌아가서 ▲ 한국의 대일(對日)재산청구권은 일본의 대한(對韓)경제원조로 상계할 수 있으며 ▲ 김 외무차관과의 단독회견에서 잠정적 어업협정 체결을 약속 받아 사실상 일본 어선이 평화선(平和線) 내에서 어로작업을 할 수 있게 됐고 ▲ 불원간 주한 일본 대표부를 서울에 설치할 수 있게 됐다고 중의원에 보고했다. 이 무렵부터 터부시해 온 일본 노래가 다방에서 예사로 흘러 나왔으며 반일(反日)정책이 크게 완화된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4·19를 계기로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솟아난 것이 비(非)보수세력 다시말해 혁신세력이었다. 이 정권아래서 불법화한 진보당계와 결별한 최근우(崔謹愚), 유병묵(劉秉默) 등이 민족통일을 내세우고 사회대중당을 결성했는가 하면 전(前)진보당계의 김달호(金達鎬)계는 윤길중(尹吉重)계와 갈라져 한국사회당이란 신당을 만들었다. 윤길중계는 결국 혁신당 발족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사회당은 전진한(錢鎭漢) 의원이 중심이 돼 민족주의 민주사회당으로 존재했으나 60년 8월 4일 전 의원이 사퇴함에 따라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또한 김창숙(金昌淑), 장건상(張建相) 등이 혁신조직연맹을 만들어 14명의 공천자를 냈으나 모두 낙선돼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 뒤 일부는 독립사회당을 추진하고 장건상계 일부는 윤길중과 혁신당을 추진하던 중 5·16을 맞았다.

이처럼 혁신세력들은 군웅할거, 이합집산(離合集散)만을 거듭했다. 그것은 조직보다 구호로 규합보다 자리다툼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장 정권의 행정력이 무력함을 보고 자만한 나머지 사회대중당의 경우 ▲ UN과 제휴하고 민주주의 보루를 확보할 수 있는 조건 아래 국토의 평화통일을 기한다. ▲ 국토통일 문제에 있어서는 전 민족적인 초당외교가 수행될 것을 희망한다는 등의 통일방안을 내세웠다. 또 사회혁신당은 UN정신 및 정책에 입각한 자주적 민주통일을 내세우고 있다가 차츰 변화를 일으켜 서울대의 '민족통일 학생연맹'이란 단체가 남북통일을 위한 선행조건으로 남북학생회담이 필요하다고 제의하자 이에 호응하고 나섰다. 이처럼 남북학생회담 추진론이 표면화하고 일부 학생들이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오자 혁신세력의 군소정당들은 종래의 중립화 통일론을 내세우고 남북교류론을 들고 나오는 등 통일논의가 사분오열(四分五裂) 되었다. 이 북새통 속에서도 민주당 정권은 속수무책 방관만 하고 있다가 5월 16일 새벽, 군인들이 궐기하는 새로운 국면을 만들었다.

민주당 정권 당시 장성군수는 이해영(李海英)씨와 이시형(李時炯)씨였다. 담양군수로 있다가 60년 2월 8일 장성으로 부임한 이해영 군수는 4·19 직후인 그 해 4월 22일 4개월만에 영광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뒤를 이어 영암군수에서 장성으로 옮겨 온 이시형 군수는 5개월 간 근무한 뒤 그 해 10월말 의원면직했다. 후임으로 진도군수였던 김남권(金南權)씨가 60년 12월 8일 부임했다. 60년 한해 동안에 3명의 군수가 장성을 거쳐간 셈이다.

8. 5.16 군사쿠데타와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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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공화국

1) 혁명내각의 출범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朴正熙) 육군소장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군은 서울에 진입해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들은 곧바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그리고 장면 내각의 전 각료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와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이 합헌정부인 장면내각 지지성명을 냈지만 18일 장 내각은 총 사퇴하고 말았다. 육사생도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하자 미국도 군사혁명위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쿠데타 세력은 군사혁명위를 국가재건최고위원회로 개편하고 최고회의와 혁명내각을 조직했다. 각 도지사와 9개 시장도 현역 군인으로 임명했다. 군부통치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963년 1월 민간인의 정치활동 재개가 허용되었고 그 해 7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민정이양 일정을 발표했다. 박의장은 예편 후 새로 만든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10월 15일 당선됐다. 11월 26일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혁명주도세력이 만든 공화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12월 17일 대통령 중심제의 새헌법 아래 제5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및 제6대 국회 개원으로 마침내 제3공화국이 출범했다.

2) 3선개헌

박대통령은 1967년 5월 실시된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재선되었다. 그로부터 1개월쯤 뒤에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130석을 얻어 개헌선을 돌파했다. 1969년초 공화당은 대통령의 3선금지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 그리고 학생들이 3선개헌 반대투쟁에 나섰고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서울대에는 휴교조치가 내려졌다. 박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3선개헌 투표로 정부의 신임을 묻겠다."고 선언 3선개헌 추진을 본격화했다. 공화당은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 제3별관에서 새벽 2시에 야당의원들을 따돌린채 개헌안과 국민투표법안을 변칙통과 시켰다. 이로써 박대통령의 3선 출마의 길이 터졌다.한편 재창당된 신민당의 김영삼(金泳三) 원내총무가 40대 기수론을 내세우고 1971년 대통령후보 지명전 출마를 선언했다. 역시 40대인 김대중(金大中) 의원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 출마을 선언 전당대회에서 대결한 결과 김대중 의원이 후보로 지명되었다. 공화당도 박대통령을 후보로 지명 두 후보의 치열한 유세전이 펼쳐졌다. 투표 결과 박후보가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신민당은 이를 부정 불법 선거로 규정 규탄대회를 가졌다. 뒤이어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공화당이 113석으로 과반수를 확보했고 신민당은 89석을 차지했다. 박정권의 장기집권이 확고해진 반면 야당과 재야세력은 민주화 운동에 더욱 불을 붙이게 됐다.

(2) 제4공화국

1) 10월 유신

박정희대통령은 김대중씨에게 힘겨운 승리를 했지만 민심은 이미 박정권을 떠났고 그의 재집권 전망이 흐리자 유신쿠데타 음모를 추진하게 되었다. 박은 북의 김일성과 7·4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여 국민들에게 통일의 환상을 부풀리면서 그의 영구집권 음모를 추진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항의 비상조치를 포함한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비상조치를 보면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헌법 일부의 효력 정지 △비상국무희의가 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 수행 △비상국무희의는 평화통일 지향 헌법개정안을 공고하여 2개월 내에 국민투표로 확정 △새헌법에 따라 연말 안에 헌정질서 정상화 등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정치체제를 크게 바꾼 이른바 '10월 유신'이다. 이로써 제4공화국의 막은 올랐다. 10월 유신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배경으로써 박정권은 한반도 정세변화를 들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세력의 균형이 크게 흔들리고 있어 한국의 안보에 위험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남북한간의 관계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는 전제 아래 전쟁을 막고 남북대화를 진전시켜야 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 체제로는 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개혁을 통해 재정배해야 하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 비상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상의 주장이고 점차 국민의 지지를 잃어가는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을 위한 음모였다.

개헌안 제안 이유서가 밝힌 10월 유신 이념을 보면 국력의 분산과 낭비를 지양하고 이를 조직화하여 능률의 극대화를 기하며, 민주주의의 한국적 토착화를 가능케 하는 유신적 개혁을 단행하는 것만이 국가의 안전과 조국의 평화통일을 기약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되어 있다. 비상국무회의는 이 헌법 개정안을 10월 27일 공고하고 11월 21일 국민투표를 실시 유신헙법을 확정했다. 투표율 91.9%에 찬성 91.5%였다. 그러나 공포분위기와 협박과 공갈 속에서 국민을 위협한 국민투표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위한 요식행위였다.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출기구인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구성됐고 그 제1차 회의에서 박정희를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2월 27일 박대통령이 취임함으로써 유신체제의 제4공화국이 출범했다. 박대통령의 종신집권과 권력강화의 길이 열린 것이다.박정희 군사정권은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반대파를 억압하고 처형·투옥하면서 공포정치를 자행하는 한편 지역차별과 남북갈등을 증폭시키면서 그 종말의 날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2) 김대중 피랍사건

유신체제는 대통령을 간선(間選)하는데다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간선토록 되어 있다. 이는 말이 간선이지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또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박탈함으로써 민주정치의 근간인 국민의 선거권과 국정감독권을 제한하고 위축시켰다. 민주정치의 후퇴임은 말할 나위 없다. 더구나 10월 유신의 비상조치와 그에 따른 대통령의 특별선언 등에 대해서는 제소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새 헌법에 못박아 놓았다. 이같은 탄압에 대해 민주화 세력이 들고 일어난 것은 당연했다. 저항운동은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특히 해외에서 반정부운동을 주도한 김대중은 박정권에게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1973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는 일본 도쿄에서 납치되어 생사의 고비를 넘기면서 5일만에 서울에서 풀려났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김대중은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패했지만 민주화운동의 선봉장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경찰이 집중수사를 편 결과 이 사건은 한국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사건은 한·일, 한·미간에 중대한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약 3개월 뒤 이 사건은 한·일 정부간의 종결조치 발표에 이어 '유감 표명'으로 미봉(彌縫)되고 말았다.그러나 대학생들의 유신반대 시위는 그칠 줄 몰랐다. 개헌청원 1백만인 서명운동도 전개되었다. 박대통령은 개헌논의 금지와 비상군법회의 설치 등에 관한 대통령 긴급조치들을 잇달아 선포하면서 탄압을 강화했다. 언론계에서는 자유언론 실천선언이 터져 나왔고 민주회복국민회의도 발족되었다.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3·1 명동사건으로 김대중 등 11명이 구속되어 실형을 받고 복역 중 형집행정지로 석방되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지만 민주화 운동이 범국민적으로 결집된 시기였다.제3,4공화국 때 장성군수를 지낸 사람은 모두 11명이다. 지방자치가 실현되지 않을 때라 모두 관선이었다. 김남권씨에 이어 김성렬(金成烈), 김재호(金在鎬), 김남섭(金南燮), 양재범(梁在氾), 송언종(宋彦種), 송인섭(宋仁燮), 김연수(金鍊洙), 김세장(金世章), 오경석(吳京錫), 백주원(白柱元)씨가 장성을 거쳐 갔다. 백군수는 10·26이 일어난 바로 그 날 영광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9. 5·18 광주민중항쟁과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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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짓밟힌 '서울의 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숨졌다. 청와대 인근 안가에서 만찬도중 일어난 살해사건이었다. 5·16 쿠데타 이후 18년간 계속돼온 장기독재체제가 무너진 날이었다. 이 날 밤 긴급 소집된 비상국무회의는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의결,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사령관은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 사령관은 1979년 12월 12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全斗煥) 육군소장이 이끄는 '하나회' 중심의 이른바 신군부세력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 사령관을 지지하는 군 수뇌부와 신군부세력이 충돌 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것이 12·12 군사반란이다. 치밀한 준비를 한 신군부는 군 수뇌부를 제압 12월 24일 정 사령관을 내란방조혐의로 구속했다. 신군부는 12·12 사태가 박정희 대통령 살해사건 조사과정에서 불가피했던 조치라고 주장했다.(그러나 뒷날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일련의 사태가 대통령의 재가 없이 불법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군통수권이 지휘 계통을 벗어나 행사됐다고 지적 이를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박정권의 18년 장기독재가 무너지자 1980년 초부터 정치활동이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소위 '서울의 봄'이 시작된 것이다. 4월에는 사북탄광사태, 학원의 반정부활동이 이어졌다. 학생시위는 점차 격렬해져 전국으로 번졌으며, 5월 15일에는 30개 대학 10만여 명이 서울역 광장에 집결 절정을 이루었다. 5월 16일부터 이틀간 이화여대에서 열린 전국 55개 대학 학생회장단 회의는 22일까지 비상계엄령을 해제하고 이것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전국 규모의 가두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했다. 한편 박정희 정권에서 박해와 차별을 받았던 전남의 민주열기는 서울 못지 않게 뜨거웠는데 그 자세한 상황은 뒤에 따로 설명하겠다.

긴장감이 고조되자 정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 지역을 확대 제주도까지 포함시켰다. 계엄당국은 18일 새벽 1시를 기해 계엄포고 제10호를 발표 △모든 정치활동 금지 △집회 및 시위 금지 △전문대를 포함한 각 대학 휴교 등을 선포했다. 이 조치를 계기로 신군부세력의 정권장악이 본격화되었다.5·17 게엄확대 조치와 함께 계엄사령부는 김종필(金鍾泌) 공화당 총재, 이후락(李厚洛), 박종규(朴鍾圭)의원 등을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김대중 전대통령 후보, 한승헌(韓昇憲) 변호사 등을 사회혼란 조성 및 학생소요 관련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하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해서는 가택연금조치를 취했다. 주요 정치인과 민주인사들, 일부 언론인과 학생 대표들이 연행되거나 연금상태에 놓이면서 정국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서울의 봄'은 꽃봉오리를 미처 피워 보기도 전에 된서리를 맞은 셈이다.

(2) 광주 민주화 운동

1) 폭풍 전야

광주시내 대학생들로 구성된 연합 시위대는 5월 16일 밤에 횃불 가두시위을 벌였다. 3일째 계속된 시위로 학생들도 지쳐 토요일인 17일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서울에선 이틀전인 15일 시위를 끝내고 정부의 태도를 지켜보고 있었다.14일과 15일 전남대 총학생회가 주도하여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대성회'는 10·26 이후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 속에서도 한줄기 의문을 품고 있던 광주시민과 전남도민들에게 하나의 포럼 구실을 했다. 도청 앞 광장 분수대 주위에 모인 군중들은 박관현(朴寬賢) 등 학생대표와 재야인사들의 연설을 듣고 계엄하 언론이 전하지 못한 시국상황을 파악했다. 특히 14일의 대성회 때는 전남대 교수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금남로를 행진 학생·교수·시민이 어우러진 장엄한 행렬을 이루었다. 입에서 입으로 쿠데타 설이 퍼지자 시민과 학생들은 가투(街鬪)를 앞당긴 것이다. 저지하는 경찰도 긴장했다. 마침내 16일 오후 3시 도청 앞 광장에 모인 5만 인파는 제3차 민주화 성회를 가진 다음 횃불을 들고 광주의 밤거리를 누비며 행진했다. 두 갈래로 나눠진 질서정연한 시위였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감격적인 궐기였다.

그러나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는 이미 계획대로 진행 중이었다. 5월 17일 밤 10시께 김대중은 사면복권된지 2개월 반만에 다시 연행되었다. 계엄사는 18일 새벽 1시를 기해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했다. 일체의 정치활동을 중지시키고 전문대학을 포함한 모든 대학을 휴교조치 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영삼은 체포 대신 가택연금됐고 김종필은 부정축재자로 연행 당했다. 모두 26명이 연행됐는데 김대중 등의 혐의는 시위 배후조종이었다.

2) 광주민주화운동

계엄령 확대조치나 휴교령이 내리면 전남대 정문에 모이자고 약속하고 16일의 횃불시위를 성대하게 마친 전남대학생들을 비롯한 시민·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10시경부터 전남대 정문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모인 200여명의 학생들은 탱크에 중무장을 하고 지키고 있는 특전대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돌입하여 특전대원들과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금남로로 달려갔다.금남로로 달려간 시위학생들은 특전단원들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고서 일시적으로 주춤했으나 특전대원들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의 가세로 시위는 가열되었다.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밀고 밀리던 시위군중은 군인들의 난폭하고 발악적인 저지에도 불구하고 그 수가 증가하고 밤이 깊어서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시위는 19일에도 계속되어 특전대원들의 살상행위가 도를 더해가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을 서두르면서 방송국을 점령하여 MBC에 불을 질러 여론을 오도하는 언론에 응징을 가했다.

시위대의 자위를 위한 무기소지는 전남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특전단의 살상행위에 대항했으며 21일에는 도청을 접수하여 27일 새벽 20사단과 특전단이 탱크와 기관총을 앞세우고 광주를 수복할 때까지 시민이 다스리는 해방세상이 되었다.원로들의 수습노력과 도청을 중심으로 시민군이 조직되어 치안을 유지하면서 시민의 안정과 평화가 계속되었지만 신군부의 광주진격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증폭되었다. 광주시민과 전남도민들은 경찰과 군이 물러간 후 스스로의 힘으로 질서를 유지하면서 정부와 대화를 위한 노력도 계속했지만 정권찬탈에 혈안이 된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의 신군부 세력은 광주를 무력으로 점령하려 했다.

3) 마지막 절규

27일 새벽 3시 계엄군의 광주 탈환작전은 개시됐다. 새벽 공기를 깨고 낭랑한 목소리가 시가지를 울렸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 끝까지 싸웁시다."시민군의 호소를 비웃기라도 하듯 육중한 탱크를 앞세우고 콩 볶듯 소총을 난사하며 계엄군은 도청과 시내 요소 요소를 1시간 남짓 걸려 점령해 버렸다.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며 장렬하게 죽어간 젊은이들을 비롯해 시내 곳곳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수 백명이 연행되어 상무대 영창에 갇혔다. 폭도로 분류된 시민들은 등에 빨간 글씨로 '총기 소지' '실탄 소지' '극렬' 등이라고 써 붙인 채 붙잡혀갔다. 계엄군이 광주탈환을 완료한 뒤 당시 국방장관 주영복(周永福)이 도청에 들러 상황을 보고 받고 계엄군을 격려했다. 광주 시가지는 얼어붙은 듯 조용했다.

4) 전남의 5·18과 장성

21일 전남도청 앞 발포 이후 시위대는 광주 인근 지역으로 달려갔다. 무기고를 접수, 무장하기 위해서였다. 발포 이전에도 시위대는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서 접수한 차량으로 장성 방면을 향해 진출을 시도했다. 전국에 광주의 시위 현황을 알리자는 의도였으나 계엄군은 이를 철저히 차단했다. 특히 북상을 염려했다. 광주, 전남 이외의 지역에 이 불길이 확산되면 걷잡을 수 없다는 위기감에서 였다.

장성의 사남 터널은 계엄군의 사수 지역이나 다름 없었다. 만약 이 곳이 뚫리면 시위의 불길이 곧 바로 서울로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신군부는 이를 염려해 북상하는 길을 원천봉쇄했다. 따라서 장성은 전남 서남부 등 다른 지역과는 달리 5·18에서 비교적 초연할 수 있었다. 이는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신 목포, 나주, 화순, 영암, 강진, 영광, 함평 등지에는 시민군들이 진출하는데 큰 저항을 받지 않아 항쟁 초기 광주 상황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다. 특히 목포는 독자적이고 조직적인 시위를 벌였다. 영암 신북 청년들은 신북지서을 습격 무기를 탈취했고 나주 군민들도 시민군들을 파출소로 안내하는 등 지원에 앞장섰다. 도내 확산을 우려한 계엄군은 21일부터는 광주에서 외부로 통하는 7개 주요 도로를 봉쇄해버렸다. 나주에 모인 시위대는 광주 진입을 시도했으나 실패 23일 이후부터는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군부대들이 도로 곳곳을 차단해 움직이기가 어려운데다 광주가 고립돼 더 이상 움직일 동력이 소진되었기 때문이다.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장성군수는 강영기(姜英奇)씨였다. 한해 전인 79년 10월에 부임한 강군수는 80년 9월 내무부로 전출되었고 그 후임에 전라남도 기획관 안재호(安在祜)씨가 부임 1년 7개월 동안 재임했다.

10. 군사정부의 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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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10 민주항쟁

광주민중항쟁이 끝난 직후인 80년 5월 31일 정부는 대통령의 계엄업무 지휘·감독 자문보좌기관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했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보안사령관(계엄사 합수부장)과 중앙정보부 부장서리를 겸직하고 있던 전두환 장군이 맡았다. 의장직을 대통령이 맡긴 했으나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은 신군부의 핵심인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 집중되었다. 국보위는 대대적인 공직자 숙정, 폭력배 소탕, 과외중지 등 각종 숙정작업과 사회정화운동을 전개했다. 최규하 제10대 대통령은 그 해 8월 16일 대통령직을 내놓았다. 박충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최 대통령의 사임은 신군부 세력의 전면적인 등장을 예고한 신호나 다름 없었다. 뒤이어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이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뽑혀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전두환은 81년 2월 25일 대통령선거인단 간접선거에 의해 다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돼 임기 7년의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은 날로 확산되어 갔다. 야권 인사들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결성하는 등 가세했다. 민추협이 모태가 돼 탄생한 신한민주당은 85년 1월 18일 창당대회를 가졌다. 신민당은 선언문에서 "민중의 힘이 곧 국민의 힘이요, 민중이 국가의 주인임을 보여줄 것"이며 "난국을 타개하는 길은 민주주의밖에 없다."고 밝혔다. 신병치료를 이유로 억지 도미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가 2월 8일 2년여만에 귀국 김영삼과 함께 민추협 공동의장을 맡았다. 85년 2월 12일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화려하게 등장했다. 184석의 지역구 가운데 농어촌에서 많이 득표한 민정당이 87석을 얻었고, 신민당은 서울을 비롯한 6대 도시에서 거의 전부 당선해 50석을 확보했다. 나머지는 민한당이 26석, 국민당이 25석을 차지했다. 예상 밖의 선전을 한 신민당은 제1야당이 되었다. 85년 3월 6일에는 정치활동 금지가 전면 해제돼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이른바 3김을 포함한 모든 정치인의 규제가 풀렸다. 신민당은 총선 1주년을 기념해 86년 2월 12일 '직선제 개헌 1천만명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대학생과 재야단체, 종교단체 등이 신민당 집회에 대거 참여, 광주대회에는 10만명 이상의 군중이 모이기도 했다. 시민항쟁은 87년 1월 14일 서울대 박종철 군에 대한 경찰의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면서 그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건을 은폐 조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권력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폭발 민주화 욕구에 불을 붙였다.

전두환은 그 해 4월 13일 "일체의 개헌논의를 중단시키고 현행헌법으로 88년 2월 정부를 이양하겠다."고 선언 그 날부터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국민의 함성은 87년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살해 은폐조작 규탄대회'로 절정을 이루었다. 그 뒤 약 20일 동안 전국은 연일 대규모 시위로 들끓었다. 6월 26일에는 6월 항쟁 기간 중 최대 인원이 참가한 가운데 전국 33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이 벌어졌다. 6월 29일 아침 노태우(盧泰愚) 민정당 대표위원은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고 선거를 실시, 1988년 정부를 이양하며 국민적 화해를 위해 김대중씨를 사면복권 시킨다."는 것 등 8개항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전두환 대통령은 7월 1일 담화를 통해 "여야가 국회에서 개헌안에 합의하면 이를 국민투표에 부쳐 개헌할 수 있다."고 노태우 대표의 구상을 전폭 수용했다. 민주화를 위한 국민의 열망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 해 12월 16일 16년 만에 직선제로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36.5%를 얻어 당선됨으로써 제6공화국이 출범했다.

(2) 문민정부 출범

1) 민주주의의 출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출범은 민주화의 새 출발을 의미했다. 1993년 2월 25일은 광복 이후 한국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이 하나의 결실을 맺은 날이었다. 특히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부 지배 하에 놓였던 한국 정치가 종말을 고하고 민주화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딘 것이다.독재정권의 퇴장이 바로 민주정치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30여년 간 누적되어 온 사회적·경제적 갈등이 동시에 폭발하는 또 다른 혼란의 과정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3당 합당으로 정권창출에 성공한 김영삼 정부는 이같은 유산을 청산하고 민주화시대를 열기 위한 변화와 개혁의 추진을 떠 안았다. 권위주의 잔재를 없애는 일환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우선 청와대 앞길을 개방하고 공직자 재산공개를 제도화했다.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제거하는 등 대대적인 군 개혁도 단행했다. 93년 8월 12일에는 금융실명제를 실시, 검은 돈의 유통과 그에 따른 탈법과 비리를 막는 장치를 마련했다.

문민정부는 또 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루었던 주요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작업을 실시했다. 국외안장 선열들의 유해봉환, 상해 임시정부 청사 복원, 옛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등이 바로 그 것이었다. 4·19을 혁명으로 정의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문민정부 수립의 원천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12·12 군사반란, 5·18에 관련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핵심 주동자의 사법처리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을 받는다"는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나 문민정부는 한보사태를 시작으로 야기된 대기업의 연쇄부도에 속수무책, 외환위기를 초래하여 국가를 파산 직전까지 몰고 갔다. 이는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체제를 수용하는 초유의 경제난 속에 집권 5년의 막을 내리게 만들었다.

2) 지방자치제 실시

5·16 쿠데타로 중단되었던 지방자치제가 1991년 두 차례의 지방의회의원 선거를 통해 30년 만에 부분적으로 부활되었다. 시·군·구(기초)의회 의원은 3월 25일에 시·도(광역)의회 의원은 6월 20일에 선거가 각각 실시됐다. 기초의회는 전국 3,562개 선거구에서 4,304명의 의원을 선출했으나 유권자들의 무관심 때문에 전국 투표율은 55%에 지나지 않았다.

제1대 기초의회 의원의 임기는 4년에 무보수 명예직으로 하였으나 개정된 지방자치법에 따라 그 임기를 95년 6월말까지 연장하였다. 장성군에서는 11개 선거구에서 모두 13명의 군의회 의원이 당선되었는데 이는 장성읍에서 2명을 뽑았고, 남면에서는 임기 도중 사망한 의원으로 인해 보궐선거를 실시했기 때문이었다. 장성군의회의 전반기 의장은 기관서 부의장은 이만수였고 후반기는 의장에 조복래, 부의장에 김판근이었다. 기초의회와 달리 정당참여가 가능한 광역의회 선거는 여당인 민자당이 전국 15개 시·도 866개 의석 중 564석을 차지했다. 신민당은 165석, 민주당은 21명의 당선자를 각각 냈다. 이에 비해 무소속은 115명이 당선되는 강세를 보였다. 이같은 결과는 정치권이 14대 총선을 앞두고 야권통합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절름발이를 못 면했던 지자제는 95년 6월 27일 전국의 광역 및 기초단체장, 광역 및 기초의회 의원 등 4개 지방선거를 동시에 실시함으로써 명실공히 풀뿌리 민주주의를 만개하게 되었다. 이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은 서울을 포함해 4개 광역단체장과 84개 기초단체장을 장악하고 광역의원 352석을 차지했다. 기초단체장은 민주당 84명 이외에 민자당 70명, 무소속 53명, 자민련 23명 등이었다.세계 주요 언론들은 6·27 지방선거를 여당의 패배로 규정하고 선거과정에서 나타난 지역주의가 향후 정국구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관심을 표명했다. 특히 김대중씨의 정계복귀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일본 언론들이 내다봤다.

6·27 선거에서 장성군수로는 김흥식(金興植)이 당선돼 민선초대 군수가 되었다. 장성군으로서는 3년 임기의 제32대 군수를 군민의 손으로 뽑게된 것이다. 제2대 장성군의회 의원은 11개 선거구에서 12명을 선출했는데 임기는 95년 7월부터 98년 6월까지 3년간이었다. 전반기 의장은 최남호, 부의장은 이우규였고, 후반기는 의장에 조복래, 부의장에 김병관이었다. 당선무효 1명과 형 선고에 의한 자격상실 1명이 있었으나 그 중 서삼면은 보궐선거를 실시했지만 삼계면은 실시하지 않은 채 임기를 마쳤다.

98년 6월 4일 실시된 제2기 동시 지방선거는 비교적 공정하게 치러졌으나 전국 투표율은 52.6%로 1961년 이래 가장 낮았다. 두드러진 현상은 영남 쪽은 야당, 호남 쪽은 공동여당이 분점하는 지역 분할구도가 더욱 굳어진 것이다. 고질적인 지역감정이 기승을 부린 탓이다.6.·4 선거에서 김흥식은 다시 제2기 민선자치 군수로 재선되었다. 김 군수는 취임사를 통해 "무소속 전국 최고의 득표율인 63%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것은 지난 3년 간 벌여 놓은 사업을 마무리하고 앞으로 4년 간 장성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제3대 장성군의회 의원은 모두 11개 선거구에서 11명이 선출돼 임기 4년(1998년 7월­2002년 6월)의 의정활동을 펴고 있는데 전반기 의장에는 김종권, 부의장에는 변원이 각각 뽑혀 의회를 이끌었으며, 후반기 의장에는 최남호, 부의장에는 김상복이 선출되었다.

11. 국민의 정부 등장과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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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대중 대통령 당선과 여야 정권교체

세계의 주목 속에 1997년 12월 18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국민은 실질적인 '변화'를 택했다. 오랜 민주화투쟁을 통해 국민과 함께 호흡하고 성장한 김대중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사회전반에 희망을 소외당한 계층에는 밝은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98년 2월 25일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제15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국민의 정부'가 막을 올렸다. 김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오늘은 이 땅에 처음으로 민주적 정권교체가 실현된 자랑스러운 날"이라면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선언했다.김 대통령은 당선 이튿날부터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정부조직 축소와 공무원 감축을 단행 고통분담에 앞장섰다. 또 외자유치를 독려하고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조조정 등에 나섰다.

1) 국민역량 총 집결

취임 초 김 대통령은 IMF 체제 극복에 전념했다. 국민역량을 총 집결해 위기를 헤쳐 나가자는 호소를 했고 국민들도 기꺼이 이에 동참 효과를 거두었다. '금 모으기'운동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김 대통령의 리더십은 외환위기가 거의 평정될 무렵인 99년 5월 말 '옷 로비 사건'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 대통령은 이를 "마녀사냥식 여론재판"이라고 일축했지만 민심은 크게 이반(離反) 되었다. 김 대통령은 이를 느꼈는지 99년 11월 신당창당준비위원회 결성대회 치사에서 "국민은 하늘"이라면서 민심 최우선론을 천명했다.

2) 원군(援軍)으로 나선 시민단체

'99년 후반부터 김 대통령은 개혁 추진력을 강화하기 위해 시민단체를 외부 지원세력으로 끌어들였다. 2000년 4·13 총선 때 시민단체가 낙천·낙선운동을 벌인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정치개혁은 민주당과 자민련의 공동정권 내부에서부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조반유리(造反有理·모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는 의미로 중국 문화혁명 때 마오쩌둥이 내세운 구호)의 한국식 음모'라고 격하시켜 공동정권은 그 후 10개월간 흔들렸다.

3) 상생(相生)정치 추구

김 대통령은 4·13 총선 직후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를 직접 상대해가며 정치를 풀어 나가려했다. 그 같은 과정으로 2000년 4월 24일의 영수회담에서는 '건설적 협력'을, 6월 회담에서는 의료대란 해결을 10월회담에서는 '상생의 정치'를 각각 다짐했다. 그러나 8월말에 터진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은 정권의 도덕성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와 연관지어 박지원(朴智元) 문화관광부 장관이 퇴진함으로써 이는 대통령 권력주변의 변화로 이어졌다. 여기에 '정현준·진승현 게이트'라는 금융부정사고가 터져 국정혼란이 계속 되었다.'준비된 대통령'으로서의 김 대통령의 진가(眞價)는 뭐니뭐니해도 남북문제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2000년 6월 15일 민족분단 반세기만에 평양에서 김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만남은 민족사에 지울 수 없는 큰 획을 그었다. 금강산 관광길이 트였고,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개시되었으며, 경의선(京義線) 복원 사업이 진행되는 등 남북화해 무드가 상승기류를 탔으나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다.

4) 강력한 정부 표방

이렇게 되자 김 대통령은 2001년 신년사에서 "정치안정·경제회생을 위해 대통령이 확고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 이른바 '강력한 정부론'이 등장했다. 여권 안에서도 권력내부의 갈등 차단과 장악을 위해 강한 정부론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갔다. 이에 따라 흔들리던 공동정권(DJP) 복원이 이뤄졌고 의원 당적 이동이 단행돼 여소야대(與小野大)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뒤따랐다. 그러나 야당은 "야당 압박이나 언론사 세무조사가 강한 정부냐"면서 비난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여권은 "강력한 정부가 경제를 살리면 야당의 비판은 설득력을 잃는다"고 대응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김 대통령은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역사가 평가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신념을 피력했다.

(2) 민선자치 시대의 군정

제1기 민선자치 시대는 1995년 7월부터 3년간 이었다. 그리고 제2기는 98년 7월부터 4년간이다. 장성군민들은 이 7년 간의 군정 책임자로 김흥식 군수를 연이어 선출했다. 김 군수는 제1기 민선군수로 당선되자 취임사에서 4가지 시책을 밝혔다. 선거 때문에 생긴 군민간의 갈등 해소, 주민 본위 서비스 행정, 경영 마인드 도입, 4개 권역의 균형개발 등이다. 그리고 3년 뒤 다시 군수로 당선되자 향후 4년 간 이끌어 갈 군정 방향을 역시 4가지로 정리했다. 농업에 대한 집중투자, 문화·관광산업 개발, 삶의 질 향상, 사회간접시설의 확충 등이었다.

1) 21세기 장성 아카데미 운영

군정에 경영 마인드 도입을 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김 군수는 '21세기 장성 아카데미'를 창설했다. 국내외 석학들을 강사로 초빙 공무원과 주민이 수강토록 함으로써 의식 개혁을 위한 교육투자를 한 셈이다. 이 제도는 민선 2기 때도 계속돼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밖에도 선비대학, 자치여성대학 등을 개설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2) 홍길동 연구와 단풍 축제

장성군 아치실 마을에서 홍길동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학계에 연구를 의뢰했으며 일본에까지 연구진을 파견하고 또 그 곳 학자들을 초빙해 세미나를 갖기도 했다. 홍길동 생가 복원사업을 벌이고 홍길동 캐릭터 사업을 전개, 문화사업 이벤트로 정착시키기 위해 힘썼다. 그 과정에서 SBS 방송사 및 대기업인 LG 애드와 지적 재산권 분쟁이 벌어졌으나 자치권 확보 차원에서 강력 대처해 그들로 하여금 포기토록 하는데 성공했다.백양사를 중심으로 한 단풍 축제를 해마다 벌임으로써 보고, 즐기고, 머무르는 관광 개발에 행정력을 집중했다.

3) 사회간접시설 확충

호남권 복합 터미널, 국도 1호선(광주­장성간) 4차선 확·포장, 장성읍과 삼계면의 도시계획, 장성­고창 간 고속도로 건설 등 대규모 SOC 사업 13개 사업이 진행되고 있거나 진행될 예정이다.그러나 이 과정에서 개인과 집단 이기주의가 팽배, 이를 대승적 차원에서 이해시키고 설득하는데 곤란이 많았다. 모략·중상·음해가 만연했지만 다수결 원칙에 의거, 비판은 수용하되 원칙에 어긋나는 부당한 요구는 거절하였다.

4) 화려한 수상 경력

민선 자치 이후 장성군이 수상한 각종 상(賞)은 83개 분야에 상금만도 총 합계가 70억 원에 육박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만 몇 개 들어보면 민간단체인 한국능률협회가 선정한 지방자치 경영대상, 한국인 재개발 대상과 농협중앙회가 뽑은 전국 우수과실 품평회 단감부문 대상, 새마을운동 중앙협의회가 선정한 일하는 보람상 등이 있다.조선일보는 행정서비스분야에서 전국 최우수 군과 가장 살기 좋은 곳 우수 군으로 장성군을 각각 선정했다. 쌀 생산대책 종합평가에서는 전남 최우수 군으로 '96·'97, '98년 연속 3년 간 수상했으며 '97·'98년 2년 연속 수상한 것만도 소하천 정비 및 샛강 살리기 전국 최우수 군, 농림사업 종합평가 최우수 군, 지방행정 종합평가 최우수 군, 도로정비 전남 최우수 군 등이 있다. 이 밖에 지적(地籍)민원, 국토 대 청결, 민원행정, 학교폭력 근절, 퇴비증산, 행락 질서, 재난관리, 옥외광고 업무 등 각 분야에서 고루 수상했다. (조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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