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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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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국세력의 침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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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상품도 국내에 많이 유입되어 천주교의 성행과 함께 위정자들의 경계심이 높아졌으며 "적을 알고 사교(천주교)가 잠행하며 서양문물이 유통되고 있으니 서양 오랑캐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는가"라는 위정자들의 논의가 보인다.

또한 "우리나라의 포백(布帛)은 아름다워서 원래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서쪽으로는 연경(북경)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왜에 이르러 이미 유무를 상통하여 무역하고 있은즉 이 밖의 상품이란 모두 나라의 재물을 소모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근일에 서양물품이 거의 전국에 퍼져 이미 식자들이 근심하고 한탄한지 오래다. 그러므로 서양인의 교역요청을 수상히 생각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는 다면 후일의 무한한 염려가 될 것이다. 그래서 비단이나 기물을 막론하고 서양물품은 모두 금지할 것이며 그 위반자는 효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기도 했다.

다음으로 서양인들의 선박들이 우리나라의 바다나 연안에 자주 접근하면서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고 외교수립을 교섭하기도 했는데 통상을 가장하여 상륙하여 무리한 요구를 하다가 침몰 당한 것이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다. 즉 미국상선이 고종 3년(1866) 5월 평양에 상륙하여 약탈준비를 추진하면서 통상을 요구하자 감사 박규수가 철수를 요구했으나 거절하고 침략을 자행하다가 대동강물이 빠지자 배가 움직이지 못해 아군의 공격을 받아 소각되고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

그후 대원군의 천주교인 살해와 프랑스 선교사 살해사건인 병인박해에 항의해 고종 3년(1866) 9월에 프랑스는 군함 7척과 600여명의 해병으로 침략하여 강화도를 유린하였으니 그것이 병인양요였다. 이때 프랑스의 극동함대는 강화도를 점령해 많은 보물과 서적을 약탈해 본국에 보관하여 현재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다.

한편 고종 5년(1868) 4월에는 유태계 독일인인 오페르트가 주도하여 통상을 요구하여 거절당하자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그것을 담보로 통상을 체결하려는 사건이 발발했다. 본래 남연군의 묘는 충청도 덕산면 가야동에 있는데 오페르트 일행이 접근하여 도굴을 시도했으나 묘가 견고하여 실패하고 퇴각했다. 오페르트는 이 사실을 대원군에게 통고하고 통상을 요구하다가 물러갔는데 이 일이 있는 뒤부터 대원군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은 서양인들을 더욱 증오하게 되었고 쇄국의 의지를 더욱 굳히게 되었다.

또한 앞에서 살핀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 소각에 대한 책임을 묻고 통상을 요구한 신미양요가 고종 8년(1871)에 일어났다. 그란트 대통령으로부터 통상조약체결이나 전쟁발발을 일임받은 로우공사는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통상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로저스 제독은 5척의 군함으로 초지진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이어서 통진, 광성진까지 점령하면서 조선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48시간만에 퇴각했다.

2. 위정척사운동과 노사 기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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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동점의 물결을 따라 중국과 일본에 뒤이어 우리나라도 서양의 파도가 세차게 밀려들어서 통상요구나 무력침략까지 서슴치 않았음을 이미 살폈다. 천주교 사상과 서양물품을 배격하고 동양의 전통사상을 지키고 검소한 생활을 주장하는 관료나 지식인들의 주장이 자못 날카로왔다.

위정척사사상이란 바로 이러한 전통수호의 주장으로 정통사상인 주자학을 지키기 위해 사학(천주교)을 배척하자는 운동인데 서양물품 속에는 천주교사상이 숨겨져 있다고 보아 서양물품의 배격도 겸했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중화(中華)가 양이(洋夷)에 무릎을 꿇고 일본이 미국에 문호를 열었으며 우리나라에도 프랑스·미국의 침입과 서양세력들의 다양한 충돌이 있는 판이어서 이러한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위정척사 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단순히 배타적이고 보수적이란 의미 이상으로 그 의의를 크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형편이었다.

그러한 위정척사운동은 흔히 화서 이항로를 그 원조로 들고 이항로의 나라를 집처럼 사랑하고 임금을 아버지처럼 사랑하자(愛國如家, 愛君如父)는 교육이 그 제자들에게 감화를 주어 이 운동의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화서의 척화론을 주장하는 위정척사주장은 9월 12일의 첫 상소에서였고 이어서 10월 3일에 이르러 재상소에서 내수외양론(內修外攘論)을 주장하고 있어 노사 기정진이 척화론을 주장한 것보다 상당히 뒤떨어진 것이었다.

노사 기정진은 이 고장 출신으로 화서 이항로보다 1개월 정도 앞인 8월 16일 그의 1차 병인소(丙寅疎)에서 체계있고 논리적이며 명확한 위정척사주장을 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정척사운동의 선창자는 바로 노사 기정진인 것이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급박한 외침의 상황이 여러 면에서 나타났으니 5월에는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서 소란을 피웠고 정월부터 시작한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로부터 선전포고를 경고 받고 있는 처지였다. 그리고 9월 12일에는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이 군함 3척을 보내어 전쟁을 위한 사전 측량을 서두르면서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랑스 함대는 정탐을 계속하면서 서울의 입구인 인천 앞바다를 항해하는 등 노골적인 도발을 자행하고 있었다. 더욱이 노사의 상소가 있었던 9월 12일 직후인 16일에는 프랑스 전함들이 통진부 경계를 지나 한강 상류로 향하여 올라오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때 노사 기정진은 약 3천자에 달하는 상소를 하여 6개항에 걸친 건의를 했는데 그 내용은 첫째 국가의 정책을 한번 정하여 절대로 바꾸지 말 것이요 둘째 선수사령(先修辭令)하여 정령의 난맥을 바로 잡으며 셋째 지형을 잘 살펴 서양 오랑캐의 방어책은 지리를 이용할 것이요 넷째 군사훈련을 부지런히 하여 강한 병사를 육성할 것임며 다섯째 국가에서 조야인사들에게 좋은 말을 구할 것이고 여섯째 내수외양(內修外攘)의 정신으로 내정을 잘하고 부국강병하게 하여 외국의 침략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다. 노사의 투철한 애국사상을 살피기 위해 1차 병인소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듣자오니 요사이 양호(洋胡)가 창궐하고 흉한 기도가 낭자하여 심지어 북경에서 온 글도 그 뜻이 수상하여 절반은 공갈이고 절반은 조정입니다. 또한 선박들이 서해에 범하니 모두 저들이 우리나라에 나쁜 마음을 품은 것이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지만 해안선이 얕고 산들이 험준하여 감히 상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저 사람들을 죽인 것(병인사옥때 프랑스 신부살해 사실)을 말하더라도 그들이 잘못하면 처벌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보전할 것이며 저들이 우리를 범하고 나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고 믿을 수 없는 바에 조정에서는 계획을 잘 세워 중요한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臣)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몇가지 방안을 올리겠사옵니다.

첫째 조정의 정책을 반드시 먼저 정하여야 합니다. 자고로 국가는 반드시 일정불역(一定不易)의 방침이 있어 임금과 재상의 마음을 정해 놓은 후라야 만인의 정신을 귀일하게 할 수 있고 이럴까 저럴까 하는 것은 가장 큰 병폐입니다. 중국에서 글이 온 후 뒤숭숭한데 신은 이것을 요망스러운 말이라 생각합니다. 외국과 상종하면 결국은 우리나라를 그들에게 부속시키며 우리의 처자를 산과 밭에 묻어버리고 우리의 의관을 노복의 것으로 만들며 우리들의 어린애와 늙은이를 고기잡이나 사냥꾼으로 만들고 우리의 생령을 금수로 만들게 됩니다. 만일 교통의 통로가 열리면 2∼3년 안에 전하의 적자는 서양인이 안된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 확실합니다. 요사이 너그럽게 호화경박하여 서양물품 비축하기를 좋아하고 양포(洋布)입기를 탐하니 가장 상서롭지 못한 일이옵니다. 중외의 관리들에게 명하시어 시장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서양물품을 조사하여 거두어 거리에서 불사르고 이후 무역하여 오는 자는 왜구와 통하는 법률로 다스리시옵소서.
둘째 먼저 사령(辭令:정령)을 닦으십시오. 옛날에 두 나라가 서로 공격할때 병사들간에 명령이 바로 서지 않으면 군대를 철수하여 물러갔다고 합니다. 저들이 함부로 죽였다고 우리에게 문책한데 우리의 답변이 만일 떳떳하고 바르지 못하면 문책하는 자는 기(氣)가 펴질 것이고 그 대답하는 자는 기가 죽을 것이니 기의 펴고 죽음이 바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이 대의에 합당하게 말하여 우리가 외국인 대하기를 본래 박하게 하지 않아 배고프지 않게 먹을 것을 주었고 병이 들면 약을 주었으며 배가 세면 재목을 주었으니 긍휼히 여기고 구해주는 뜻은 멀고 가까운 구별이 있으리오. 혹 지방관에게 고하지 않고 변장 잠입하여 성내나 항간에 출입하면 이것은 간첩행위요 적을 앞장서서 인도하는 것이니 처벌되는 것은 어떤 나라의 법에도 있는 바이니 어찌 의심하리오. 하물며 이 사람들은 이미 그 죄를 범하고 또 무뢰배를 모아 임금과 부모를 배반하는 종교로 유혹하고 남녀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며 돈을 걷우어 추악을 겸비하니 이는 비단 우리의 죄인만이 아니라 당신 나라의 수치니 저희는 대답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용강현(평양)의 문답내용을 보면 저희는 추한 처지에서 문책하고 우리는 대답이 없으니 우리의 기가 얼마나 저상되었는가를 상상함직 합니다. 사령을 잘 만드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변서를 한통 작성하여 연해의 진읍(鎭邑)에 배포하게 하십시오.
셋째, 지형(地形)을 잘 살피게 하십시오, 물에 이로운 자는 육지에 불리한 것이니 이들을 제압하는 방법은 거험요격(據險邀擊) 4자 밖에 없습니다.
넷째, 군사훈련(鍊兵)을 잘 하게 하십시오.
다섯째, 구언(求言:조정의대신이나 재야의 선비들에게 의견을 발표하게 함)을 잘 하십시오.
여섯째, 내수외양(內修外攘:안으로 정치를 잘하고 밖으로 외적을 물리침)하도록 하십시오.
조목들이 심히 번거로운 것 같사오나 요점을 말씀드리면 결인심(結人心) 3자에 귀결되오니 인재를 쓰시고 정치를 행함에 있어서 결인심 3자로서 하여 자주 되새기면 다행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고종은 비답을 내려 말하기를 올린 여러 조목들이 명백하고 통쾌하여 양추(洋醜)로 하여금 간담을 파하게 할 수 있으리니 너희는 더욱 좋은 계책을 진언하여 이런 지극한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고 했다.

노사 기정진에 의해 시작된 위정척사운동은 약 1개월 뒤인 9월 12일에 화서 이항로의 상소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화서는 양이와 싸워 이 나라를 지키며 토목(土木)의 역을 없애고 염민( 民:백성을 착취함)의 정치를 금하며 서양물품을 쓰지 않는 검박한 생활을 할 것을 상소하였다.화서 이항로는 노사 기정진과 같이 독학으로 진리를 탐구하여 30대에 이미 명성을 떨친 학자로 그의 두 번째 상소인 10월 3일의 호군 이항로 진소시사조(陳疎時事條)에서 서양물품의 사용과 매매를 중형으로 다스리고 내정을 잘하여 외적을 물리치자는 내수외양론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매천 황현은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 양인은 학술과 문장이 당시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처지였기에 그들의 척사주장은 그 영향이 컸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서 이항로는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애국여부·애군여가(愛國如父, 愛君如家)의 교훈으로 그의 제자들을 교육하였으므로 위정척사론의 이론가와 실천가들이 대부분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그의 제자들로 유명한 사람은 성재 유중교, 중암 김평묵, 면암 최익현, 홍재학 등을 들 수 있는데 유중교는 구법수호( 法守護)와 척왜척양(斥倭斥洋)을 열렬하게 주장하였으며 그의 제자인 의암 유인석은 한말 의병의 대표자라 할 수 있다. 또한 김평묵은 이만손의 만인소(萬人疏)를 보고 그들의 상소로 우리들이 천하 후세에 말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극찬한 후 소청의 여러 유생들에게 격려사를 보냈으며 뒤에 격렬한 척화소(斥和疎)와 현실비판의 상소로 처형된 홍재학의 상소문을 대필하여 유배에 처해지기도 했다.면암 최익현은 고종 13년(1876) 1월 23일의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유명하다 그는 화서의 제자로 일찍이 2차의 대원군 탄핵상소로 대원군을 물러나게 해 명성을 떨쳤는데 이번에는 일본의 강요로 체결된 강화도 조약의 부당성을 날카롭게 파해친 상소로 지식인들의 공감을 샀다.

위와 같이 노사와 화서에 의해서 제기된 위정척사운동은 비록 중화(中華)의 그늘에서 소화(小華)로 만족한다는 한계성과 근대 지향적이 아닌 보수 배타적인 것이었고 전국민이 일체가 되어 주장한 것이 아닌 일부 유학자들의 선각적인 주장에 그쳤다고 비판하는 면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의 민씨척족정권이 부패와 무능을 계속하면서 외압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여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어디로 끌고 갈는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우리를 지키고 스스로를 존속시키려는 몸부림이었던 것이다.그런데 위정척사운동이 그런대로 우리역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외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했으며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떨쳐 일어나 의병항쟁을 전개하거나 외국침략을 저지하는데 솔선수범하였기 때문이었다.

화서의 제자들이 충청도, 강원도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하였던 것과 같이 노사 기정진의 제자들인 송사 기우만이나 성재 기삼연, 녹천 고광순 등이 호남 의병을 주도하였던 것이다.또한 위정척사운동을 추진했던 유생들의 일부는 유학을 개혁하여 개신유학파로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을사조약에 반항하여 상소활동을 벌이거나 자결하여 우국충정을 살신성인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3. 문호의 개방과 개화 보수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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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와 풍양조씨 그리고 양반·유생들로부터 타도의 대상이 된 대원군은 민비의 사주를 받은 최익현이 2차에 걸쳐 올린 상소로 물러나 양주의 직곡산장으로 은거하게 되니 집권 10년 만의 일이었다. 쇄국정책의 지주였던 대원군이 하야함으로써 굳게 닫혔던 나라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명치유신을 단행하여 국력을 비축한 일본의 도전 때문이었다.

1876년 1월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일본의 강요에 의해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전문 12조로 된 병자수호조약은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지만 일본의 침략성이 내포되었고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조선은 자주국가라 규정했지만 이것은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을 용이하게 한 것이며, 치외법권을 인정하여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한 내용이고 이로 인해 부산을 비롯해 원산과 인천이 개방되었다.

굳게 닫혔던 문이 일본의 무력적 위협 속에서 열리자 일본을 통해서 개화의 물결이 물밀듯이 흘러 들어왔다. 먼저 김기수가 1차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와서 일본의 발전상과 새로운 문물에 대해서 경이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2차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김홍집은 일본에서 청의 외교관인 하여장과 황준헌을 만나 국제정세의 안목을 넓혔다.

특히, 김홍집은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져와 왕에게 바치자 왕과 조정대신들은 탐독하여 큰 관심을 가졌고 개화에 반대하는 보수유생들을 무마하기 위해 인쇄하여 배포해 주었다. 그런데 유생들은 이에 대해 날카롭게 반발하였고 왕과 조정대신들이 추진하고 있는 개화정책에 결사적인 저항을 했다.

이때 불평에 가득 찬 구식군인들이 무력 거사하여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일으켰고 이를 조종하여 다시 집권한 대원군은 손을 써보지도 못한 채 출동한 청군에게 납치되어 천진으로 압송되었다. 1882년의 임오군란에 개입하여 청은 군사력을 출동하여 대원군을 잡아가고 고문관을 배치하여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이에 대해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을 들락거리면서 일본식의 개화를 추진하여 청으로부터 독립하자고 나섰다. 이들은 개화당을 조직하고 신문을 발간하고 도로를 개설하여 우정국을 설립하고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개화정책을 추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실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선각자들인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강위, 승려인 이동인, 탁정식 등은 스스로의 힘으로 개화정책은 추진하자고 주장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이들 선각자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일본의 군사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으려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1884년 10월에 유대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으로 많은 보수파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아 혁신정강을 발표하여 근대화를 추진하려 했던 개화당은 원세개의 청군이 개입하여 개화당정권은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나고 조선은 청의 지배와 보수 반동세력의 천지가 되었다. 쿠데타를 통해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은 한성조약을 맺어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청의 간섭은 여전했고 이와 결탁한 민씨척족정권의 반대파 탄압과 보수화경향은 철저했다.그런데 비록 청군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을 진압했지만 원세개가 주도한 청의 간섭이 노골화되고 청·일 간의 견제가 심해지자 민비 등이 주도한 친러반청(親露反淸)의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다. 1885년부터 끈질기게 나도는 한러밀약설(韓露密約說)의 난무 속에 청·일의 간섭은 심화되었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워 영국은 전라도의 거문도를 점령하여 2년 동안 지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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