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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호국과 민생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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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구한말의 치안제도
  • 2. 현 치안제도

1. 구한말의 치안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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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이전에는 장성부에 형방청을 두어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으나, 을사보호 조약 체결 이후에는 일본인으로 하여금 순금이 설치되었고, 경술합방 후 무단정치를 하기 위하여 장성헌병분대를 설치하여 사거리·삼계·명신 등에 파견분소를 각각 설치하여 치안의 명목으로 통치하였던 것이다. 3·1운동 이후 문화정치라는 미명아래 장성경찰서를 설치하고 각 읍면에 주재소를 두고 본서에 경무계·보안계·사법계·고등계 등을 두었고, 특히 고등계에서는 독립운동가를 검거하여 고문·투옥케하여 장성군 독립운동가의 다수가 희생을 당했다.

2. 현 치안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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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일본경찰이 해체되자 장성군에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인민위원회 산하에 치안대를 설치하고 대장에 임종웅(林鍾雄)이 치안을 담당하고 각 읍면에 치안분대를 두었다.
1945년 9월 15일 전남경찰건설위원회를 조직 동년 11월 7일 전남경찰부의 조직 장성경찰서가 설치되었으며, 동년 12월 27일 국립경찰로 완전 독립된 경찰로서 장성경찰서 초대서장에 변성연이 치안을 담당하였고 각 읍면에 분서를 설치하게 되었다.

1946년 4월 15일 전남경찰부가 제8관구 경찰청으로 개칭되어 장성경찰서가 제2구 경찰서로 개칭되었으며 경무과, 공안과, 수사과 등 3과를 두고 동년 7월 25일 기마경찰이 배치되었다.1947년 10월 5일에는 경찰서의 과를 계로 개칭하였고, 1949년 7월 23일 공비에 의거 관내 서삼지서가 소각되고 계속적으로 공비가 출몰됨과 동시에 1948년 10월 20일 여수순천지구 제14연대 군부반란사건이 발발됨에 따라 공비가 각처에서 출몰케 되자 치안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공비토벌작전에 여념이 없던 차에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오전 4시 38선 전역에서 불법남침 7월 7일 경기 충남을 거쳐 이리에 침입, 전북 경찰부대가 각선을 방위하였으나, 전북지국 계엄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7월 21일 오전 2시에 남원으로 철수하자 장성경찰부대는 전남북도계인 노령까지(갈재) 진격 최후까지 저지하다가 7월 23일 중과부적으로 장성경찰서를 적에게 넘겨주고 철수하게 되었다. 1950년 9월 3일 전남경찰국이 부산에 위치하고 각 서원이 집결되었으며 그후 전남경찰부대를 재편성하여 미군과 합동하여 진북 진동작전, 가야 법수작전에 참전하였다가 1950년 10월 3일 전남경찰국이 수복과 동시에 장성경찰서도 장성에 수복하게 되어 장성시내로 들어왔다. 다시 장성 광주간 문재까지 후퇴 대기중 장성경찰서 청사가 소각되었고, 그 다음날 김성득 서장이 지휘하는 부대가 완전 입성 재향군인회 건물을 가청사로 사용하였고 계속 9월 7일 삼계지서, 9월 8일 북이지서, 9월 28일 진원지서, 10월 16일 북상지서, 10월 17일 황룡지서, 10월 17일 동화지서, 10월 25일 북일지서, 10월 30일 삼서지서, 10월 30일 북하지서, 10월 30일 성산지서가 각각 소각되었다.

1950년 10월 본군 출신 전북 임실 경찰서장 기우대에게 본군 치안확보에 중화기 및 실탄부족으로 보급을 요청하였던 바, 기관총 1정, 60미리 박격포 2문, 쏘식경기 1문, 각종 실탄 1트럭분을 공급 받음으로써 치안확보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50년 10월 장성 학생의용대가 편성되어 김영석을 대장으로 하는 의용대원이 경찰과 합동작전에 참가하였고, 1950년 12월 14일 경비계가 신설되어 군내공비 소탕에 전담하였고, 1950년 12월 15일 면민부담으로 북상지서가 준공을 보았고, 1951년 9월 17일 기마대 본국으로 인상되었으며, 1952년 6월 23일 장성열차 피습사건 공비 120명이 철로 3개소에 폭발물을 매설하고 통과하는 대전발 목포행 열차를 습격하여 군경 55명을 살해하고 32명을 부상케 하는 동시에 총기 6정을 약탈 열차 9량을 방화 전소한 사건이 발생하여 이와 교전 끝에 공비 2명을 사살, 경기 1정, 소총 3정을 노획하고 그들을 격퇴시켰다. 1952년 3월 8일 오전 4시에 서장이 지휘하는 50명이 순창군 복흥면 꼭두재에서 적 40명과 교전하여 1명을 사살하고 박격포 1문, 실탄 38발, 60미리 박격포탄 41발, 카빈 1정, M1 15정, 수류탄 12개, 의류 20점을 노획하였다. 3월 25일 오전 2시에는 본서 대원 90명이 황룡면 와우리 탑정부락 뒤 계곡에서 적 24명과 교전하여 사살 19명, 60미리 박격포 2문, 카빈 2정, 99식 1정을 노획하였다. 3월 27일 23시에는 본서대가 관하문수사부근 일대에서 적 50명을 포위하여 21명을 사살하고 쏘식 경기 1정, 99식 1정, 수류탄 6개를 노획하였는데 이때 경찰 손실은 부상 2명이었다. 3월 31일 07시에 장성 경찰대 4명이 북하면 대악리 뒷산에 매복하던 중 수미상의 적을 발견 교전하여 3명을 사로잡고 쏘식 장총 1정을 노획하였다. 같은 날 13:30분경에는 서장 이하 3개 중대가 북상면 남창골 일대를 수색하여 적 408부대 20∼35명과 교전하여 사살 7명, 카빈 1정, 소총 1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4월 11일 22시에는 서삼 송현리 해평부락에 적 15명이 침습하였으므로 해당지역 서원이 급습 1명을 사살하고 M1 1정을 노획하였다. 같은 날 22:30분에는 북일분 신흥리에서 다시 적 80명이 침습한 바 지서원 20명이 출동하여 6명을 사살하고 99식 1정을 노획하였는데 이때 경찰 1명이 부상당하였다. 4월 25일 14시에는 적 노령병단 13대대 및 북부지구당 85명이 북일면 말덕부락 뒷산에 집결중이라는 정보에 따라 지서원 30명이 출동하여 교전 끝에 10명을 사살하였는데 이 전투로 경찰 2명이 실종되었다. 10월 16일 20시에는 황룡면 아곡리 한탄부락에 수 미상의 적이 잠거중이라는 정보에 따라 본서 파견원 10명이 출동 이를 급습하여 1명을 사살하고 수류탄 1개를 노획하였다. 11월 7일 02시에는 북하면 중평리 강선사에 침입한 소속불명의 적 7∼8명을 매복중인 경찰대가 급습 3명을 사살하고 소총 3정, 기타 불온문서 다수 노획하였다. 1953년 11월 30일 장성경찰서 청사가 준공되어 신청사로 이전과 동시에 장성군 황룡면 옥정리에 잠재한 노령병단 잔당 섬멸과 동시에 북부지구 사령관 김병억이 검거됨으로 장성의 치안상태는 평온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1일 성산지서의 청사가 준공되었고, 동년 5월 8일 직할파출소를 설치하였고, 55년 5월 30일 서삼지서, 56년 8월 20일 삼서지서, 59년 5월 19일 북일지서 등 청사가 각각 준공되었고, 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로 서울을 비롯 전국적으로 학생데모가 계속되자 드디어 4·19학생혁명이 발발하였으며, 당시 김정섭 서장이 경찰관이 소유하고 있는 무기 가운데 전부를 회수하여 무기고에 거두어두고 자중함으로 무사하였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당시 김기주 서장이 지휘하는 경찰은 본 면의 입무집행에 가일층 충실함으로써 치안에 혼란이 없었으며, 11월 8일 진원지서 청사가 준공되었고 1963년에 직할파출소를 역전파출소로 개칭, 65년 8월 30일 읍내파출소, 12월 24일 북이지서, 12월 25일 동화지서 청사가 준공되었고, 68년말경 부서 5계가 과로 승격되어 경무과·보안과·수사과·정보과·경비과로 개칭되었으며, 1970년 5월 10일 성산지서를 성산파출소로 개칭, 74년 9월 30일 삼계지서, 75년 8월 30일 삼서지서가 각각 개축 준공되었으며, 76년 7월 3일 남창지서 청사, 10월 26일 북일지서를 각각 신축 준공하였다.

1967년 7월 5일 무장간첩이 영광해안으로 상륙 장성 삼서 태청산을 경유 서삼면 추암리를 지나 송현부락 앞을 지나간다는 괴한 출현 신고를 접하고 장성경찰서 모든 직원을 비상소집 현장으로 출동하였으나 발견치 못하고 우천으로 인한 족적(이상한 농구화바닥)을 발견 족적을 수사 끝에 성산꽃매산으로 지나 담양 추월산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판단 꽃매산 능선을 타고 수색해 올라 가던 중 8시 10분 무장괴한을 발견 교전 끝에 남파 무장간첩 16명 중 1명 사살, 1명 생포하였으며, 아방 피해는 김인형 수사과장, 한광섭 경무계장, 오형열 정보과 형사가 부상(경상)당하였고 오형렬 형사는 1계급 특진하였다.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 당시 치안 상태는 김기주 서장 진두 지휘 아래 평온한 상태에서 치안이 확보되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항쟁 사태가 극도로 혼란하게 되어 장성경찰서 부대가 차출당하여 임영진 서장이 출동전 관내 고려시멘트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화약을 영광으로 이송케하고 본서 및 각 지서 무기고에 보유하고 있는 총기에 공이를 빼도록 조치 완료하고 부대를 인솔 출동 중 관내에 3차 침입하여 소총 4정을 탈취당하였으며, 다행이 공이를 제거한 사용불능 총기였고 전남도청과 경찰국이 점거당하자 경찰국장 명에 의하여 귀대 전관내 치안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1981년 12월 31일 0시를 기하여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자 남용호 서장의 지휘 아래 전서원이 단결하여 범죄예방에 노력한 결과 범죄발생 및 검거현황을 보면 폭력범, 도벌범, 교통사고 기타 범죄 발생 검거 단속 34건인 바 87년 37건에 비해 3건이나 감소되었다.
1914년 본 경찰서가 설치되어 현위치에서 현재까지 사무를 집행하고 있다가 1992년 11월 26일 현위치에 신청사를 건축 업무에 충실하고 있다. 장성경찰서의 위치와 규모는 다음과 같다.

ο 위치 :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1022-번지
ο 청사 : 766㎡
ο부속건물 : 66㎡
ο무기고 : 42㎡
ο차고 : 660㎡
ο창고 : 33㎡
ο관사 : 59㎡
ο숙직실 : 52㎡
ο구내식당 : 66㎡
ο통락정 : 15㎡
ο부지 : 2,410㎡

장성경찰사의 역대 서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대 서장 변성연, 2대 박인규, 3대 최용만, 4대 최익조, 5대 정순태, 6대 배일범, 7대 박형근, 8대 김준종. 9대 신상묵, 10대 김홍희, 11대 정소실, 12대 김쾌득, 13대 안종삼, 14대 이봉하, 15대 김성도, 16대 문광일, 17대 이주용, 18대 김영태, 19대 김쾌득, 20대 윤기석, 21대 손병표, 22대 유기태, 23대 차석태, 24대 최종섭, 25대 김필홍, 26대 장수기, 27대 김정섭, 28대 김관순, 29대 손우헌, 30대 김기주, 31대 이운영, 32대 김수동, 33대 심만섭, 34대 김종호, 35대 박명주, 36대 심만섭, 37대 양성우, 38대 김공환, 39대 한경석, 40대 박진석, 41대 현두영, 42대 임영진, 43대 양문창, 44대 남용호, 45대 김원주, 46대 최인영, 47대 김복규, 48대 정영철, 49대 김중원, 50대 이인동, 51대 나두현, 52대 최정길, 53대 이훈필, 54대 홍신의, 55대 박상철, 56대 김영조, 57대 오진선, 58대 천승범, 59대 김대식, 60대 류선문, 61대 조원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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