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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지방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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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자치행정의 시작
  • 2. 행정기구의 변화

1. 자치행정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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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회는 1948년 건국헌법의 제정으로 "지방자치단체에 각 의회를 둔다."는 헌법상 설치가 보장된데 이어 1949년 지방자치법이 제정·공포됨에 따라 근대적 의미의 지방의회제도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그러나 건국초기 극심하였던 사상적 갈등과 정치적·사회적 혼란, 그리고 6·25동란으로 인하여 그 실현이 지연되어 오다가 1952년 4월에 시·읍·면의회 의원선거가 동년 5월에는 도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됨으로써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로 민주적 지방의회제도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6년에는 제2대 지방의회 의원선거가, 1960년에는 제3대 지방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되어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지방의회가 구성·운영되어 왔으나, 1961년 5·16과 함께 지방의회가 해산된 채 30여년 간의 긴 휴면기간을 거친 후 1991년 3월과 6월에 각각 시·군·구 의회의원과 시·도의원을 선출하여 다시 지방의회가 부활되었다.

(1) 제1대 의회(1952∼1956)

최초로 민선 지방의회가 구성된 1952년 4월과 5월은 정부가 임시수도 부산에 피난중인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켜줄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여 줄 세력으로 지방의회를 구성하여 키우고자 하였던 것이다.그러나 이때는 아직 전시 중이었기에 한수이북의 미수복지구와 지리산주변의 치안이 불안한 일부지역이 유예 또는 제외된 채 1952년 4월 25일, 17시·72읍·1,308면에서 시.읍.면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되고, 그 다음 달 4월 10일에는 서울, 경기, 강원이 제외된 7개 도의 도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이 때에 치안 불안으로 일시 연기되었던 전북의 완주, 남원, 순창 및 정읍 등의 4개 군 8개 면에 있어서의 면의회 의원선거는 다음 해인 1953년 5월 5일에 실시되고, 이 지역에서의 도의회 의원선거는 그해 5월 10일에 실시되었으며, 서울시와 경기도 및 강원도의 의회는 1956년 제2대에 접어들어서야 최초로 구성이 되었다.지방자치제도는 권력분립주의를 원칙으로 하면서 의원내각제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지방의회에 자치단체의 장에 대한 불신임권을 부여하는 한편, 자치단체의 장에게는 의회해산권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도지사와 서울특별시장은 대통령이 이를 임명하는 임명제였으나, 시.읍.면장에 대해서는 간선제를 취하여 당해 시·읍·면의회에서 선거하도록 되어 있어 시.읍.면의 경우에는 지방의회 우위의 일면이 없지 않았다.

(2) 제2대 지방의회(1956∼1960)

제2대 지방의회는 제1대 지방의회 운영 4년 동안 표출되었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많은 논란과 정치적인 이유까지 겹쳐 제2회 지방선거는 1956년 2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친 지방자치법의 개정이 이루어진 뒤에 실시되었다.이에 따라 ① 시·읍·면장의 선거방법이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뀌고, ② 시·읍·면장 불신임의결권과 시·읍·면장의 의회해산권이 폐지되었으며, ③ 시·읍·면장과 의원의 임기가 4년에서 3년으로 단축되고, ④ 의원정수가 축소조정되는 한편, ⑤ 의회의 회기일수도 제한이 되었다.이와 같은 개정을 거쳐 시행된 제2회 지방선거는 1956년 8월 5일 시·읍·면의회 의원선거가, 같은 달인 8월 13일에는 제1회 지방선거에서 제외되었던 서울, 경기, 강원이 포함된 시·도의회 의원선거가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되었다.그런데 제1대에 비하여 4년간의 경험이 축적되고 제도의 개선을 거쳐 출범된 제2대 지방의회의 경우도 크게 발전된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집행기관과의 갈등과 마찰 의회운영의 비능률적인 요인을 극복치 못했을 뿐 아니라, 자치단체에 따라서는 의회가 새해 예산을 통과시켜 주지 않음으로써 무예산상태로 방치되기도 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의사를 지연시키거나 의안을 부결함으로써 행정이 마비되기도 하였다.

(3) 제3대 지방의회(1960∼1961)

제3대 지방의회는 4·19이후 제2공화국이 발족된 뒤에 구성되었다. 제2차 지방자치법 개정 때에 3년으로 단축된 의원의 임기가 다시 4년으로 환원되어 제2대 지방의회의원의 임기가 1960년 8월까지 연장되었던 것인데, 1960년 4·19가 일어나 헌법이 개정되고 국정전반에 걸친 대개혁이 단행됨에 따라 지방자치법도 1960년 11월 1일 대폭적인 개정을 보게 되어 제3대 지방의회 선거는 개정된 법률에 따라, 시·도는 동년 12월 12일에 시·읍·면은 12월 19일에 실시되었던 것이다. 제3대 지방의회는 우리 사회전반에 민주화의 열기가 팽배해 있을 때 구성이 되었다. 지방자치법도 이러한 분위기가 반영되어 개정되었기 때문에 종래의 반관치적 요소를 배제하고 민주적인 요소가 대폭 강화되면서 시·도지사와 시·읍·면장은 물론 동리장에 이르기까지 주민에 의한 직선제로 바뀌게 되었다.이에 따라 1960년 12월에 지방의회의원과 자치단체의 장의 선거가 완료됨으로써 우리나라 지방자치사상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직선된 자치단체의 장과 의회와의 불화와 반목, 의회의 파생적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민주적 지방자치의 이상을 살리지 못하였고, 1961년 5·16으로 인하여 제3대 지방의회는 불과 5개월의 단명으로 문을 닫게 되었으며, 그 뒤 우리나라 지방의회제도는 30여년간 긴 휴면기에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4) 제4대 지방의회(1991∼1995)

제4대 지방의회는 5.16에 의해 지방의회가 해산된 이래 여러 난관을 거쳐 30년만에 다시 부활되었다. 그러나 부활된 모습은 30년전 제2공화국시대와 비교하여 볼 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제2공화국시대의 지방의회는 시·도와 시·읍·면으로 구분되어 구성되었으나 제3공화국에서 `군(郡)`이 자치단체로 되고 읍·면은 하부행정기관으로 변모되었으며, 이후 제6공화국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종류를 특별시·직할시(후에 광역시)·도와 시·군자치구로 하는 2계층으로 통일하여 그에 대응하는 지방의회를 두게 되었다.1991년 3월 26일에 시·군·자치구 의회의원선거와 6월 20일 시·도의회 의원선거를 실시하여 시·군·자치구의회는 4월 15일, 시·도의회는 7월 8일에 역사적인 개원식을 가짐으로써 한 세대의 긴 휴면을 깨고 새로운 지방자치발전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그러나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1990년 12월 31일 공포된 지방자치법에 의하여 1992년 6월 30일 이내에 실시하도록 되었고, 이후 또 한번의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1995년 6월 30일 이내에 실시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따라서, 제4대 지방의회 기간에는 주민에 의하여 선출된 지방의회와 중앙정부에 의해 임명된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지역 주민의 복지와 지역시책을 결정·집행하는 과도기적인 지방자치의 한 유형을 남기게 되었다.

제4대 지방의회는 지방자치의 경험이 일천하고 오랜기간 동안의 단절로 말미암아 제대로 정착될 수 있을까하는 우려속에서 출발하였다. 지방자치단체의 자주권과 자율권이 크게 신장되었고 주민의 자치행정에의 참여기회가 확대되었으며, 자치의식을 드높이는 계기와 지역자치 발전에 확고한 기틀을 마련하였다.반면에 지방의회와 집행기관과의 상호이해와 협조 부족으로 대립과 마찰이 많았고, 의정활동 경험 부족으로 의회운영에 차질을 빚는가 하면, 지역개발을 둘러싸고 지역이기주의가 노정되었고, 일부의원들은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어 주민과 언론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을 뿐만아니라, 제도적, 환경적 여건의 미비와 의회운영의 일천한 역사로 인해 기대하는 만큼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하기에는 미흡하였다.

(5) 제5대 지방의회(1995∼1998):민선 자치단체장 1기

제4대 지방의회기간과 달리 자치단체 장을 주민에 의하여 직접 선출하게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제도적인 지방자치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1995년 7월1일 제1기 민선자치 군수가 취임하고 지방의회가 출범함으로써 의회와 집행부가 균형과 견제를 실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행정에 있어서 기존의 하향식 관료행정체제에 익숙한 공무원과 주민을 상대로 아직 주민 중심 중심의 자치행정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 이론에 따른 지방자치행정을 수행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어려움도 참 지방자치를 향한 귀중한 과정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장성군은 다행이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에 대한 확고한 가치관을 가진 군수를 선출한 덕분에 다른 자치단체보다 빠른 속도로 의회와 합의아래 행정조직을 개편하면서 자치행정시대를 열어갔다. 이 기간동안 장성군의 자치행정의 기반이 구축되었고 정부 또한 자치행정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의회 또한 민선 자치단체 장과의 합리적인 관계 설정을 이루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할 수 있다.

(6) 제6대 지방의회(1998∼2002)

1998년 7월 1일 제2기 민선 자치단체 장의 취임과 함께 지방의회 의원의 임기와 자치단체 장의 임기가 4년으로 똑같이 확정된 최초의 지방자치행정이 시작되었다.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제5대 지방의회기간 즉 제1기 민선자치단체 장의 자치행정에 대한 평가가 제2기 민선자치단체 장을 선출하는데 반영되어 주민과 함께 하는 지방자치행정의 실질적인 출발이 이루어졌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위를 보는 지방행정이 주민 즉 군민을 뜻을 존중하여 하여야 하는 지방자치행정의 본연의 자세 확립의 계기가 된 것이다. 이렇게 앞으로 몇 번만 지나면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 지방자치행정의 꽃이 우리 나라에서도 필 것이다. 장성군은 제1기 민선자치단체 장이었던 김흥식 군수가 다시 군수로 선출되어 지속적인 장성군의 행정을 추진해 나가게 되었다.

2. 행정기구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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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군의 행정조직의 변화를 1961년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1961년 10월부터 1실(室) 3과(課) 2소도(所導)(공보실, 내무과, 산업과, 건설과, 지도소, 보건소)로 군 행정을 수행해 왔으며, 1967년 2월 11일 산업과가 농산과와 식산과로 분리되었고, 그해 11월 30일 산림과가 신설되었으며 1972년 1월 18일 새마을과가 신설되었다. 새마을사업이 활기를 띄게 되자 1975년 1월 10일 새마을과가 부군수실로 바뀌고 이때부터 부군수제도가 도입되었고, 1975년 7월 1일 민방위과가 신설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 새마을과가 부활되고 사회과가 신설되었다. 1981년 8월 1일에는 1실 9과 2사업소 1읍 10면으로 개편되었고, 본청에 1민원실과 31계 두 사업소에 6계가 있고 장성읍에는 6계 다른 면에는 4계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군 행정조직은 종합적인 평가 없이 전국 획일적으로 그때 그때마다 땜질식으로 이루어져 중복과 관료화 그리고 비효율성이 노출되고 있었다.

이러한 행적조직을 지방자치시대에 맞게 개편한 것은 새로운 민선자치시대가 시작된 1995년 7월 1일 이후 "행정조직의 균형과 규모의 적정화를 기하고 급변하는 지방행정환경에 대처하기 위하여" 지금까지의 관리형 행정조직을 기업경영방식을 도입한 1차 행정조직 개편을 1996년 2월 7일 시행하고 1998년 9월 24일에는 4개 실·과의 통폐합과 공무원정원 13% 감축을 이룬 제2차 행정조직개편을 단행하였다. 1999년도 장성군 경영진단을 반영하여 제3차 행정조직 개편을 단행하였는 바 이에 따라 1실 10과 2직속기관 1사업소 1읍 10개 면으로 개편되었는데, 제1,2차 개편 주요내용과 현재 적용되고 있는 행정조직 내용이 다음에 설명되어 있다.

(1) 제1차 행정조직 개편(1996. 2. 7)

부군수를 단장으로 하여 조직진단팀을 구성하여 만들어진 1차 행정조직 개편 현황이 [표 3-5]에 나타나 있다.

[표 3-5] 제1차 행정조직 개편 현황

[표 3-5] 제1차 행정조직 개편 현황 - 구분, 본청(실·과, 과·담당관, 계), 직속기관(실·과, 계), 정원을 나타낸 표
구 분본 청직속기관정원(명)
실 · 과과·담당관실 · 과
개편 전21350314668
개편 후41150313668
증 감2▽2--▽1-

-경영관리실 및 여성담당관실 신설, 사회진흥과 폐지, 사회과와 가정복지과를 통합하여 사회복지과 신설.
-지적과를 종합민원실로, 도시과를 도시개발과로, 민방위과를 민방위재난관리과로 자치시대에 걸맞는 이름으로 개칭하고 그에 알맞는 업무를 수용시킴.
-계단위기구 중 통계계, 진흥계, 개발계, 건전생활계, 의료보장계, 양정계, 방재계, 단속계, 교육훈련계를 폐지하고 정책개발계, 국제협력계, 관광계, 교육계, 재산관리계, 유통계, 창업지원계, 지역개발계, 설계지원계, 도시정비계, 재난관리계를 신설하였음.
-감사계를 경영평가계로, 문화공보계를 홍보계로, 문화관광계를 문화체육계로, 지적정보계를 지적전산계로, 통신전산계를 정보통신계로, 폐기물관리계를 환경정화계로, 농어촌개발계를 농정기획계로, 잠특계를 원예계로, 상공운수계를 운수계로, 관리계를 건설행정계로, 수도계를 상하수도계로, 부녀복지계를 여성정책계로 명칭을 변경하였음.
-보건의료원의 원무계를 폐지하여 보건행정계로 흡수하고 가족보건계를 방문보건계로 간호계를 진료간호계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진료부 소속이었던 원무계와 간호계 업무를 보건사업과에 흡수하여 진료부에 내과 등 4과 4실을 관할하도록 함.
-읍의 총무과와 진흥계를 폐지하고 개발과 수도계를 신설하고 재무계를 세무계로 호병계를 민원계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면의 경우 재무계를 폐지하여 총무계에 흡수하고 개발계를 신설하고 호병계를 민원계로 명칭을 변경하였음.

(2) 제2차 행정조직 개편(1998. 9. 24)

민선1기 3년을 거쳐오면서 얻어진 행정결과를 바탕으로 저효율, 고비용으로 운영되는 지방행정조직을 고효율 저비용체제로 개편하기 위하여 1998년 7월 2일 대학교수와 민간인 그리고 공무원으로 구성된 조직개편위원회를 발족하여 2차 행정조직을 개편하였는 바 개편내용이 [표 3-6]에 나타나 있다.

[표 3 -6] 제2차 행정조직 개편 현황

[표 3 -6] 제2차 행정조직 개편 현황 - 구분, 본청실과, 보건의료원, 농촌지도소, 환경사업소, 읍, 삼계면, 9개면, 정원을 나타낸 표
구 분본청실과보건의료원농촌지도소환경사업소삼계면9개면정원(명)
개편 전15실·과 51계1부1과4계2과8계1사업소부읍장2과7계부면장4계부면장4계674
개편 후11실·과52담당1과4담당2과7담당1사업소2담당7담당5담당4담당588
개편내용4식과감축1담당증1부폐지1계통합2담당신설부읍장,2과폐지부면장폐지1담당신설부면장폐지86명감원

-1995년 1차개편 시에 무산되었던 팀제가 담당제로 가능하게 되어 의사결정 과정을 한 단계 줄이게 되었다.
-군 본청의 경우 산림과와 산업과를 통합하여 농림과로 축소 개편하고 경영관리실과 기획실을 통합하여 경영기획실로 축소하였으며 민방위재난관리과를 계단위로 축소하고 여성담당관을 폐지하여 사회복지과로 통합하였음.
-보건의료원 진료부 1개과를 감축하였음.
-장성읍의 총무과와 개발과를 폐지하고 부읍·면장제를 폐지하였음.

(3) 제3차 행정조직 개편(현재 적용하고 있는 행정조직)

2001년 12월 현재 [그림 3-1]과 같이 1실 10과 2직속기관 2사업소 1읍 10개 면으로 구성 되어 있다.

[사진 3-1] 장성군 행정조직도
군수
비서실
부군수
  • 경영기획실장
    • 정책기획담당
    • 예산담당
    • 법무통계담당
    • 홍보담당
    • 국제협력담당
  • 총무과장
    • 행정담당
    • 감사담당
    • 교육담당
    • 정보통신담당
    • 민방위병무담당
  • 민원봉사과장
    • 민원행정담당
    • 지적담당
    • 지적전산담당
    • 부동산관리담당
    • 기동처리담당
  • 재무과장
    • 부과담당
    • 징수담당
    • 경리담당
    • 재산관리담당
  • 문화관광과장
    • 문화육성담당
    • 문화개발담당
    • 관광체육담당
  • 사회복지과장
    • 사회복지담당
    • 가정복지담당
    • 식품위생담당
    • 여성정책담당
  • 환경보호과장
    • 환경관리담당
    • 환경지도담당
    • 환경미화담당
    • 상수도담당
    • 하수도담당
[사진 3-1] 장성군 행정조직도

[표3-7]장성군 공무원

[표3-7]장성군 공무원 - 연도및 실과소 읍면별, 합계, 지방공무원(정무직, 별정직, 일반직(계, 4급, 5급, 6급, 7급, 8급, 9급, 지도관, 지도사), 기능직, 고용직)을 나타낸 표
연도및
실과소
읍면별
합계지 방 공 무 원
정무직별정직일 반 직기능직고용직
4급5급6급7급8급9급지도관지도사
19995681224433241041179764331975
본 청2051316321050543413--38-
의회사무과10--5-212----5-
직속기관124-129911511301733313-
사업소16--11--2441--5-
읍 면213-7165-1146462933--365

그리고 장성군 공무원 현황과 군 본청 및 읍면별 공무원 정원현황이 [표 3-7]에 나타나 있다.

3. 자치행정의 주요내용

실제로 자치행정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제1기 민선자치인 1995년부터인 바, 이후 이루어진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민선1기 자치행정의 내용(1995. 7. 1-1998. 6. 31)

1995년 7월 1일 제1기 민선자치 김흥식 군수는 "21세기 미래의 장성건설"을 군정구호로 내걸고 "군정의 경영화, 행정의 서비스화, 농업의 일류화, 지역의 균형화"라는 네 가지 군정방침을 천명한 후 제1기 기간동안 전국에서 가장 앞서가는 지방자치행정을 수행하였는데 주요한 행정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군민들의 자치역량 제고를 위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 동안 하향적인 지방행정에 익숙한 군민들에게 새로운 자치시대에 앞서 적응하고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21세기의 지방자치시대에 능동적인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주민의 의식을 깨우는 일대 혁신적인 핵심정책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1995년 9월 15일부터 매주 금요일 오후에 2시간씩 진행한 "21세기 장성아카데미"운영인데 초청강사로서는 전문기업인, 전직 고위공무원(총리 및 장차관), 대학교수, 예술인들인데 주제는 "21세기를 향한 국토개발의 방향과 지역개발 구상"에서부터 "한국경제 희망은 있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기간 동안 총 148회를 운영하였으며 주민 15,589명, 공무원 52,725명 기관단체 임직원 4,073명 총 72,387명이 참석하여 새로운 시대변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때로는 장성군의 미래지향적인 행정에 좋은 디딤돌이 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초빙된 강사들은 장성을 잘 이해하는 외부인사가 되어 장성발전에 직접·간접적으로 큰 기여를 할 원군을 얻게도 되었다.

또 다른 사회교육프로그램은 '장성선비대학'인데 1995년 2월부터 매월 셋째주 수요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문향의 고장 선비의 고장인 장성군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주민의 가치관 형성교육을 평생교육차원에서 실행하였다. 이 기간동안 총 33회에 52명의 강사가 초빙되었으며 입학인원은 남자 544명 여자 297명 합계 841명이었는데 수료자는 남자 322명 여자 159명으로 합계 481명이 되어 수료율은 57%에 이르렀다. 특히 나날이 증대되어가는 여성의 사회역할을 인식하고 여성들의 능력제고를 위하여 1996년 5월부터 "장성자치여성대학"을 운영하여 이 기간동안 23회가 운영되었으며 총 6,923명이 참석하였다. 지방행정의 주체적 역할을 할 공무원들의 역량을 높이기 위하여 공무원 외국어교육을 주 3회 80분씩 3개월, 6개월 1년 과정으로 운영하였는데 영어반 4기에 143명, 일어반 4기에 132명이 교육을 받았으며 군정수행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실과소장과 군청계장급, 읍면장과 부읍면장 등 간부공무원 110명을 한국능률협회의 협조로 2기로 나누어 "변화와 도전(Change & Challenge)교육"을 4일 동안 5시간씩 총 20시간을 받도록 하였고, 이외에도 공직자 자기혁신과정교육을 60명이 받았고 공직자 고객만족 행동혁신교육을 5기로 나누어 450명이 3박 4일 합숙으로 받았으며, 국제적감각과 시대변화에 대한 안목을 넓히기 위하여 총 29회 1,160명의 공무원들이 코엑스(KOEX)에서 개최되는 각종 박람회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이와같은 공무원들에 대한 교육은 다른 자치단체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획기적인 것이었고, 이 교육의 결과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지속적으로 나타나 장성발전의 초석이 될 것이다.

둘째, 경영행정 추진의 기반구축과 지방재정구조의 개선을 이루었다. 1995년 7월 6일부터 군수 직속으로 경영관리팀을 운영하고 이를 제1차 행정조직 개편시 경영관리실로 확대 개편하여 자치행정을 경영행정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후 2회에 거친 행정구조개편은 경영행정의 틀을 바로잡는 것이었고 행정에서 기업형 목표관리제도를 도입하여 300여건을 목표관리하고 있고 전국에서는 최초로 토지민원종합전산망을 구축 "원스톱(One-stop)민원서비스를 정착하였고, 지적자료의 보관 및 정확도가 향상됨으로서 민원사무착오에 의한 재산권손실이나 분쟁소지를 사전에 방지하였음은 물론 민원인 10대 권리장전제정, 홍길동 민원배달서비스, 민원사무 착오 보상제 등을 도입하였다. 정보화시대를 대비하고 전자정부 구현을 위하여 1인 1컴퓨터보급과 함께 전자결재시스템을 구축하였고 연말예산잔액의 지역개발비로 전환, [장성 21세기]에 유료광고 도입, 우리고장 담배판매운동을 전개하고 행정 여유자금에 의한 예금이자 수익 증대, 1995년 이전까지 매년 4억 5천만원에 이르던 보건의료원 운영적자를 1998년에는 5천만원으로 축소시겼다. 뿐만아니라 건설행정의 신뢰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부실공사 방지를 위한 철저한 현장점검과 감찰활동을 시행하고 설계와 시공에서부터 사후관리까지 철처히 감독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셋째, 행정서비스 질 향상을 크게 도모하였다. 이를 위하여 1996년 4월 23일부터 [생활민원 기동처리 팀]을 운영하였고, 매월 11개 읍면을 순회하며 진료하는 건강검진팀을 운영하고 있고 명예읍면장제도 도입으로 주민의 소리를 적극반영하고 있으며, [장성 21세기]소식지 발간으로 군민의 알권리 확대, 이동공청회, 마을순방대화 등을 통하여 군정의 더욱 투명해졌다 할 수 있다.

넷째, 세일스행정의 도입과 특색있는 관광자원개발을 들 수 있다. 장성이미지 통합전략인 CI(County Identity)와 지역상품의 브랜드 마켓팅전략인 BI(Brand Identity)를 개발하였고 군의 친절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하여 공직자 친절교육, 친절명예지도위원 위촉 운수업체종사자 및 요식업자 등을 대상으로 한 친절교육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지역별로 특색있는 관광가로수와 관광과수단지를 조성하여 4계절 관광이 가능하게 하였고 장성호 주변 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였다. 특히 백양단풍축제를 전국화하였고 홍길동축제를 개최하였다.

다섯째, 농업의 경쟁력 강화와 대규모 지역개발사업의 추진이 이루어졌다. 농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농업발전종합계획 수립, 권역별전략작목 개발 및 첨단농업 육성, 생산면적 확대, 보리재배 확대, 노업인 해외연수 실시, 대규모 경지정리사업 실시, 기계화경작로 확·포장, 저수지 준설, 관정 개발 등 농업생산 기반시설 확대를 추진하였다. 모든 마을의 진입로와 안길포장의 100%달성, 장성호 순환도로 개설, 읍면시가지 보도블럭 전면 교체, 장성읍 밀집지역 소방로 개설을 실시하였다. 특히 다음 [표 3-8]에 나타난 바와 같이 국도1호선 장성읍 우회도로 개설사업을 비롯 19건의 대규모 국책사업(사업비 약 2조 4254억원)이 건설 또는 계획 중에 있는데, 민선자치시대의 군수의 행정 및 정치적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모두 이루어지면 장성군의 주요 현안사업이 거의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

여섯째, 주민들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하여 깨끗한 환경보전과 맑은 물 공급에 노력을 하였는 바 [그린장성21] 환경보전 계획을 수립하였고 환경헌장을 제정하였으며 황룡강 등 소하천 정비는 물론 샛강살리기를 추진하고 위생쓰레기매립장의 철저한 운영과 관리 그리고 하수종말처리장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1996년 9월부터 2,800명의 명예환경감시원을 위촉하여 지역 내 환경보전에 만전을 기하려 노력하고 있다. 특히 안정적인 맑은 물 공급을 위하여 유탕제 상수원 대체와 상수도 노후관 교체를 추진하였다.

일곱째, 재정확보 노력이 괄목하게 이루어져 지역개발사업이 원활하게 추진되고 있다. 민선자치가 시작되기 전인 1994년도의 예산은 596억원이었으나 민선자치 1년 후인 1996년에는 922억원으로 늘어 1.6배 이상이 증가하였고, 1998년에는 963억원, 2000년에는 1,252억원으로 1994년도에 비하여 2.2배가 증가하였다. 2001년에는 당초예산이 이미 1,182억원이 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예산확대는 정부나 전남도로부터 받는 교부세, 양여금, 국·도비가 크게 증대했음도 알 수 있는데 1994년도 414억원(예산의 72%), 1996년도 594억원(예산의 64%), 1998년도 697억원(예산의 72%), 2000년도 970억원(예산의 77%), 2001년도 971억원(예산의 82%)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장성군의 국가 또는 전남도로부터 예산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그 만큼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표 3-8] 장성군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SOC 사업현황 (2001. 9. 30 현재) (단위: 억원)

[표 3-8] 장성군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SOC 사업현황 - 사업명, 사업량, 사업기간, 사업비, 현재공정을 나타낸 표
사업명사업량사업기간사업비현재공정
호남고속도로 장성 I·C이설(장성읍 단광리 가작마을)I·C신설 1개소 국도확장 1.0km'97∼200325335%
고창∼담양간 고속도로 건설(고창∼장성읍 야은리)L=17.2km B=23.5m'98∼20056,094실시설계중
고창∼담양간 고속도로 건설(장성 야은리∼담양군 대덕면)L=25.3km B=23.4m(장성구간 9.44km)'98∼20056,00010%
국도 1호선 장성읍 우회도록 개설(장성읍 단광리∼영천리)L=2.3km B=20.0m'98∼2002150공정(64%)
광주∼장성간 국도 4차로 확포장(못재터널 1.0km 포함)L=13.0km B=18.5m'99∼20051,550실시설완료
장성∼야은간 국도 4차로 확포장(장성 영천리∼야은리)L=5.8km B=18.5m'99∼2003603실시설완료
삼서∼장성간 도로 확포장(삼서면 수해리∼장성읍 영천리)L=19.1km B=18.5m'95∼20031,07357%
담양∼북하간 국지도 4차로 확포장(담양군∼북하면 약수리)L=15.7km B=19.0m'98∼2006942용지매수중
동화∼남평간 국지도 4차로 확포장(광주광역시 임곡동∼동화면)L=4.97km B=18.5m'98∼200447851%
북일 신흥 지방도 우회도로 개설(장성읍 용강리∼북일면 신흥리)L=1.54km B=10.0m'98∼200020완료
북하∼담양 대전면 지방도 확포장(장성 월성리∼담양 대전면)L=5.9km B=9.0m'99∼200358용지매수중
장성호 순환도로국도 17호선 11.8km'97∼200512050%
호남권 복합화물터미널건설(삼서면 용흥리)160천평(터미널 9, ICD7)'98∼20104,153실시설계승인요청중
삼계 광역상수도 사업식수공급 1일 3만톤'98∼20031,730실시설계완료
농업생산기반 종합정비시범사업(진원·남면 8개리)개경지정리,용수개발 등'00∼200330121%
지표수 보강개발사업(북이면 조양리)신규 21.2ha, 보강 67.1ha'99∼20035327%
황룡강 배수개선사업(황룡면 6개리)배수문 설치,배수로확장 등'99∼20036260%
황룡강·북일천·개천 개수공사7개 지구 13.9km'99∼200114495%
황서지구 농촌용수 개발사업추암·모래제 숭상등'98∼2005320용지매수중

테이블 추가 설명

여덟째, 이러한 행정의 노력은 결국 자치행정에 대한 각종 평가에서 매우 우수한 평가를 받았는데 1998년 말까지 총 29개 분야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그 상금으로 46억원을 수여 받았다. 1996년도에 2개 분야에 13억 9천만원, 1997년도에 17개 분야 14억 8,300만원, 1998년, 10개 분야 17억 8,500만원에 이른다. 이것은 장성군의 재정운용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것은 물론 장성군의 좋은 이미지를 온 나라에 알려, 지방자치의 모델로 평가 받아 장성발전의 튼튼한 기초를 구축하였다고 할 것이다.

아울러 장성군은 군민이 군청의 행정서비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 노력의 결실로 맺은 여러 사업들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장성군에서는 기존에 수작업으로 처리하던 것을 1996년 12월에 전국 최초로 토지민원 종합전산화 작업을 추진하였다. 토지민원은 전체 민원서류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중요 민원이다. 토지민원 종합전산화 작업의 결과, 오랫동안 기다리는 불편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수작업으로 인한 기재 잘못 등의 행정오류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장성군은 행정업무의 전산화를 추진하였다. 행정업무 전산화는 2000년대 정보화사회의 행정여건 및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1996년 3월부터 추진했던 사업으로 사무전산화의 기반조성과 개인간·부서간 정보공유체제 확립, 정책결정의 효율성 제고, 그리고 신속한 민원처리 등의 계기가 되었다. 셋째, 생활민원기동처리팀을 운영하였다. 이 사업은 주민의 생활현장에서 직접 불편사항을 해결함으로써 행정의 신뢰도를 향상시켰고 군민행정에 민·관이 동참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넷째, 전국 최초로 1997년 4월부터 지적역사관을 설치·운영하였다. 지적역사관은 한말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1백여년간의 지적 변천사료를 전시함으로써 민원인의 대기시간을 활용, 지적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였다. 다섯째, 장례도우미를 운영하였다. 장례도우미는 농촌인구의 고령화·자녀와 친족의 도시 이주로 장례 준비에 어려움을 겪는 영세가정을 대상으로 장례절차와 장례용품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여섯째, 민원사무 착오보상제를 실시하였다. 이 사업은 각종 민원사무 처리시 민원담당공무원의 행정착오 혹은 업무과실로 민원인이 손해를 입은 경우 손해상당액을 민원인에게 보상해 주는 제도이다.

(2) 민선2기 전반기 주요 행정내용(1998.7.1-2002.6.30)

민선2기는 민선1기의 군정을 책임 맡았던 김흥식 군수가 다시 재선되었다. 김흥식 군수는 1기에서 추진했던 것을 보완하면서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오고 있는 바 2기 군수 취임사에서 다음 네 가지의 군정 추진방향을 제시하였다.

첫째, 장성산업 근간인 농업발전을 위하여 집중적인 재정투자를 하겠다든 것
둘째, 21세기 벤처사업이자 지식산업인 문화·관광산업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것
셋째, 사회의 보호대상자를 따듯하게 배려하고 이들이 장성군의 소외 받지 않는 장성군 구성원이 되게 하여 군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생활체육을 활성화하겠다는 것.
넷째, 지역개발의 토대를 사회간접자본의 대폭적인 확충과 부실공사 방지에 두겠다는 것.
끝으로 환경보전에 중점을 두어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쾌적한 장성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2년 동안 추진된 주요 행정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99년 주요 행정내용을 보면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홍길동 캐릭터를 개발 장성이미지 제고 및 캐릭터개발 붐을 선도하고 제1회 공공부문 경영혁신 관리혁신상을 수상하였다. 장성아카데미가 200회를 돌파하고 이러한 교육사례가 전국의 지자체로 확산·보급되었다. 1999년 한해에 20개 분야에 선진행정 수행으로 상을 받으면서 7억 7천만원의 상금도 받았다. 그리고 보리 재배면적을 확대하고 친환경농법 보급으로 대외 경쟁력을 확보하게 하였고 생산적인 공공근로사업전개와 패션화 운동으로 차별화된 장성 이미지를 창출하였고, 21세기형 농촌 정착기반 및 도시개발 여건을 구축하였으며 공무원 1인 1컴퓨터 보급, 전자결재 시스템 구축 토지민원 종합전산화, 실과장 책임경영제 도입 등을 추진하였다.

2000년에는 장성아카데미 244회를 달성하였고 22개 분야에서 행정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수상하면서 13억600만원의 상금을 받았으며, 2001년에는 7개 분야 1억 8천만원의 상금을 수상받았다. 더욱이 황룡강 수질개선으로 국내 최대의 백로서식지 환경을 조성하였고 주민의 일상생활의 질을 높이기 위한 사회 기반시설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였다.또한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면서 지식정보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사업으로 제2건국위원회의 활동이 있었다. 제2건국위원회는 6대 의식·생활 개혁운동의 추진과정에 일반국민의 참여를 확대하고 정부의 개혁의지를 뒷받침하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실시되었다.

4. 선생안(先生案)·군수(郡守) 명단

[표 3-9] 장성군 현감(縣監) 부사(府使) 군수(郡守)명단 (1600년 진원 장성 양현 합병후 부터)

[표 3-9] 장성군 현감(縣監) 부사(府使) 군수(郡守)명단 - 대수, 성명, 부임, 이임을 나타낸 표
대수성 명부임이 임대수성 명부임이 임
1박종현경자1600년 1월 3일 부임41심 추을축1685년 8월 19일 부임
朴宗賢신축1601년 10월 10일 체귀沈 樞무진1688년 1월 12일 과귀
2권경호신축1601년 11월 3일 부임42이징구무진1688년 4월 5일 부임
權景虎갑진1604년 1월 20일 파귀李徵龜무진1688년 10월 30일 파귀
3홍 희갑진1604년 3월 3일 부임43정제태무진1688년 12월 27일 부임
洪 憙을사1605년 1월 22일 체귀鄭齊泰임신1692년 5월 15일 계파
4이 소을사1605년 2월 13일 부임44여필용임신1692년 7월 4일 부임
李 瀟체귀1605년 월 일 미상呂必容임신1692년 11월 17일 계파
5김여추부임1605년 월 일 미상45이동근계유1693년 1월 9일 부임
金汝秋체귀1605년 월 일 미상李東根갑술1694년 1월 4일 사귀
6기 협기유1609년 12월 일 부임46성대경갑술1694년 2월 20일 부임
奇 協경술1610년 월 일 체귀成大經갑술1694년 5월 10일 계파
7이 담신해 1611년 춘월 일 부임47박시경갑술1694년 6월 15일 부임
李 談갑인 1614년 추월 일 체귀朴時璟병자1696년 10월 13일 이배
8남두첨갑인 1614년 월 일 부임48김여남병자1696년 11월 27일 부임
南斗瞻병진 1616년 12월 일 체귀金汝南무인1698년 5월 7일 봉파
9양경우정사 1617년 4월 6일 부임49홍만기무인1698년 7월 6일 부임
梁慶遇경신 1620년 1월 5일 체귀洪萬紀신사1701년 2월 일 체차
10정운서경신 1620년 4월 일 부임50신서화신사1701년 4월 25일 부임
鄭雲瑞계해 1623년 3월반정후체귀申瑞華신사1701년 12월 12일 발정
11이 천계해 1623년 5월 17일 부임51이만동임오1702년 1월 27일 부임
갑자 1624년 1월 14일 체귀李萬東계미1703년 9월 4일 사체
12홍진문갑자 1624년 3월 6일 부임52서경조계미1703년 11월 6일 부임
洪振文기사 1629년 2월 6일 과귀徐敬祖갑신1704년 12월 2일 폄체
13이유준기사 1629년 3월 1일 부임53임세량을유1705년 2월 16일 부임
李庾俊경오 1630년 2월 11일 게파林世良무자1708년 3월 9일 졸관
14원이길경오 1630년 4월 18일 부임54윤 홍무자1708년 5월 11일 부임
元履吉동년 1630년 7월 15일 체귀尹 泓경인1710년 6월 12일 폄귀
15장 환경오 1630년 8월 24일 부임55이시징경인1710년 8월 16일 부임
張 喚을해 1635년 7월 2일 과귀李蓍徵임진1712년 6월 2일 폄귀
16유시영을해 1635년 9월 24일 부임56이신룡임진1712년 9월 6일 부임
柳時英무인 1638년 5월 20일 나거李臣龍을미1715년 4월 10일 사체
17이여항무인 1638년 6월 24일 부임57정면선을미1715년 6월 9일 부임
李汝恒경진 1640년 11월 17일 파귀鄭勖先병신1716년 7월 30일 사체
18한진명경진 1640년 12월 17일 부임58신성하병신1716년 9월 22일 부임
韓振溟계미 1643년 12월 13일 기귀申聖夏정유1717년 4월 12일 계체
19정 진갑신 1644년 2월 6일 부임59홍처주정유1717년 8월 29일 부임
무자 1648년 12월 19일 과귀洪處宙기해1719년 6월 10일 폄귀
20이문웅기축 1649년 1월 18일 부임60최종주기해1719년 9월 15일 부임
李文雄임진 1652년 10월 14일 파귀崔宗周임인1722년 8월 19일 사체
21이유형임진 1652년 12월 6일 부임61이의저임인1722년 10월 9일 부임
李惟馨계사 1653년 8월 6일 게파李宜著계묘1723년 6월 3일 이배
22정 사계사 1653년 9월 16일 부임62신의집계묘1723년 7월 29일 부임
鄭 伺을미 1655년 2월 21일 게파申義集을사1725년 3월 15일 사체
23심서견을미 1655년 3월 16일 부임63박수의을사1725년 5월 6일 부임
沈瑞肩을미1655년 7월 22일 체귀朴守義병오1726년 6월 9일 폄귀
24김익훈을미1655년 8월 15일 부임64이의록병오1726년 8월 28일 부임
金益勳정유1657년 3월 28일 기귀李宜祿정미1727년 6월 7일 이배
25이송령정유1657년 6월 5일 부임65윤동로정미1727년 9월 18일 부임
李松齡무술1658년 6월 11일 파귀尹東魯무신1728년 9월 28일 사체
26이상진무술1658년 7월 28일 부임66윤동설무신1728년 10월 25일 부임
李尙眞무술1658년 11월 28일 이임尹東卨계축1733년 8월 19일 과체
27이원정무술1658년 12월 25일 부임67조명종계축1733년 9월 29일 부임
李元楨기해1659년 12월 8일 이임曺命宗을묘1735년 9월 16일 사체
28박증휘경자1660년 2월 3일 부임68이기항을묘1735년 11월 15일 부임
朴增輝경자1660년 8월 15일 계파李箕恒정사1737년 7월 7일 폄귀
29최 일경자1660년 9월 20일 부임69김도흡정사1737년 10월 1일 부임
崔 逸신축1661년 6월 6일 나파金道洽기미1739년 6월 5일 사체
30이하악신축1661년 7월 21일 부임70이시정기미1739년 7월 21일 부임
李河岳계묘1663년 8월 26일 체귀李時鼎기미1739년 12월 18일 발정
31이 증계묘1663년 11월 2일 부임71송문상경신1740년 1월 21일 부임
갑진1664년 10월 6일 기귀宋文相경신1740년 6월 24일 폄귀
32이 정갑진1664년 12월 17일 부임72이현윤경신1740년 8월 9일 부임
李 晶정미1667년 5월 20일 과귀李顯允계해1743년 4월 6일 계파
33소두산정미1667년 7월 27일 부임73이언소계해1743년 5월 20일 부임
蘇斗山기유1669년 6월 25일 이배李彦 갑자1744년 11월 23일 사체
34김세정기유1669년 9월 6일 부임74어유황을축1745년 1월 22일 부임
金世鼎신해1671년 11월 18일 파귀魚有璜병인1746년 8월 2일 계체
35송시도신해1671년 12월 15일 부임75이 우병인1746년 9월 6일 부임
宋時燾갑인1674년 10월 1일 기귀신미1751년 7월 26일 과체
36홍석구갑인1674년 12월 1일 부임76정지익신미1751년 9월 26일 부임
洪錫龜정사1677년 3월 3일 계파鄭志翼갑술1754년 2월 25일 이배
37채시구정사1677년 4월 8일 부임77김상우갑술1754년 4월 3일 부임
蔡時龜기미1679년 12월 21일 발정金常遇을해1755년 7월 11일 계파
38송 창경신1680년 1월 29일 부임78김상양을해1755년 9월 17일 부임
宋 昌경신1680년 9월 30일 파귀金相良정축1757년 6월 6일 사체
39정재후경신1680년 11월 20일 부임79김시교정축1757년 7월 16일 부임
鄭載厚임술1682년 8월 8일 계귀金時敎기묘1759년 5월 28일 이배
40박진규임술1682년 8월 23일 부임80김이원기묘1759년 6월 18일 부임
朴鎭圭을축1685년 7월 2일 계파金履遠경진1760년 7월 2일 발정
[표 3-9] 장성군 현감(縣監) 부사(府使) 군수(郡守)명단 - 대수, 성명, 부임, 이임을 나타낸 표
대수성 명부임이 임대수성 명부임이 임
81최보흥경진1760년 7월 3일 부임121이규수기해1839년 5월 29일 부임
崔普興경진1760년 11월 26일 졸관李奎秀기해1839년 9월 12일 졸관
82최홍보경진1760년 12월 29일 부임122송종수기해1839년 10월 6일 부임
崔弘輔계미1763년 1월 22일 계파宋宗洙경자1840년 8월 25일 사체
83홍응진계미1763년 2월 6일 부임123김진교경자1840년 9월 12일 부임
崔應辰계미1763년 12월 2일 나거金晋敎임인1842년 8월 1일 이배
84정경순계미1763년 12월 18일 부임124정선교임인1842년 9월 29일 부임
鄭景淳을유1765년 4월 13일 이배鄭善敎갑진1844년 2월 3일 폄귀
85홍익대을유1765년 11월 10일 부임125이장우갑진1844년 4월 3일 부임
洪益大정해1767년 8월 4일 폄체李章愚정미1847년 6월 5일 이배
86홍익필정해1767년 8월 29일 부임126이병례정미1847년 7월 24일 부임
洪益弼무자1768년 11월 3일 이배李秉禮기유1849년 9월 2일 파귀
87서무수무자1768년 12월 6일 부임127김석연기유1849년 10월 18일 부임
徐懋修임진1772년 6월 26일 사체金昔淵신해1851년 6월 1일 폄귀
88송익언임진1772년 7월 22일 부임128정우용신해1851년 7월 18일 부임
宋翼彦갑오1774년 6월 2일 사체鄭愚容갑인1854년 7월 2일 체귀
89신광면갑오1774년 7월 28일 부임129이원필갑인1854년 8월 15일 부임
申光勉을미1775년 5월 1일 사체李源弼병진1856년 2월 3일 파귀
90김항주을미1775년 6월 18일 부임130한필교병진1856년 3월 25일 부임
金恒柱병신1776년 6월 15일 폄귀韓弼敎무오1858년 8월 1일 사체
91홍술조병신1776년 7월 19일 부임131장 조무오1858년 9월 7일 부임
洪述祖경자1780년 5월 29일 이배張 照기미1859년 12월 17일 폄귀
92심 준경자1780년 6월 28일 부임132김재홍경신 1860년 1월 29일 부임
沈 俊신축1781년 6월 1일 폄체金在弘임술 1862년 4월 27일 사체
93정국인신축1781년 7월 13일 부임133조응화임술 1862년 5월 29일 부임
鄭國仁병오1786년 5월 10일 과귀趙應和갑자 1864년 6월 12일 폄귀
94유증양병오1786년 7월 26일 부임134정대식갑자 1864년 7월 30일 부임
柳曾養정미1787년 6월 4일 졸관丁大植을축 1865년 12월 16일 이배
95임준호정미1787년 7월 1일 부임135민세호병인 1866년 1월 28일 부임
林浚浩경술1790년 2월 21일 폄귀閔世鎬무진 1868년 5월 12일 봉파
96한문홍경술1790년 3월 17일 부임136성정호무진 1868년 6월 26일 부임
韓文洪경술1790년 12월 5일 폄귀成鼎鎬경오 1870년 6월 8일 이배
97박좌원신해1791년 1월 13일 부임137심동근경오 1870년 7월 22일 부임
朴左源계축1793년 6월 일 이배沈東瑾신미 1871년 4월 24일 이배
98김이호계축1793년 7월 15일 부임138홍병위신미 1871년 5월 13일 부임
金履鎬갑인1794년 2월 10일 사체洪秉瑋임신 1872년 12월 15일 폄귀
99이학영갑인1794년 4월 17일 부임139정선시계유 1873년 2월 28일 부임
李學永을묘1795년 윤2월 6일 졸관鄭善始을해 1875년 11월 24일 이배
100홍경후을묘1795년 윤2월 26일 부임140정운소을해 1875년 12월 27일 부임
洪景厚병진1796년 9월 19일 나파鄭雲韶병자 1876년 7월 16일 이배
101이영교병진1796년 9월 19일 부임141서중보병자 1876년 8월 8일 부임
李英敎신유1801년 3월 29일 이배徐中輔신사 1881년 5월 2일 과귀
102이면휘신유1801년 4월 10일 부임142김윤현신사 1881년 윤7월 15일 부임
李勉輝임술1802년 6월 17일 이배金胤鉉계미 1883년 1월 29일 이배
103김기풍임술1802년 7월 16일 부임143이 희계미 1883년 1월 30일 부임
金基豊갑자1804년 12월 21일 이배李 僖병술 1886년 2월 10일 이배
104김 유을축1805년 1월 15일 부임144김오현병술 1886년 4월 15일 부임
을축1805년 윤6월 27일 이귀金五鉉병술 1886년 10월 10일 이배
105이낙수을축1805년 7월 2일 부임145김승집병술 1886년 11월 21일 부임
李洛秀병인1806년 11월 1일 이배金升集무자 1888년 7월 10일 이배
106서유승병인1806년 11월 5일 부임146윤태원무자 1888년 7월 10일 부임
徐有升경오1810년 6월 10일 이배尹泰元경인 1890년 6월 15일 승배
107엄사면경오1810년 6월 29일 부임147김헌수경인 1890년 7월 27일 부임
嚴思勉임신1812년 10월 24일 이배金 秀임진 1892년 4월 24일 이배
108송운재임신1812년 11월 9일 부임148김오현임진 1892년 4월 24일 부임
宋雲載을해1815년 6월 1일 이배金五鉉갑오 1894년 3월 23일 이배
109김명연을해1815년 6월 1일 부임149민상호갑오 1894년 3월 19일 부임
金命淵병자1816년 2월 14일 이배閔尙鎬갑오 1894년 9월 일 체귀
110홍집규병자1816년 2월 26일 부임군 수 1895년 군으로 고침
洪集圭정축1817년 8월 1일 이배150이병훈갑오1894년 12월 12일 부임
111윤치혁정축1817년 8월 10일 부임李秉勳병신1896년 2월 12일 승배
尹致赫정축1817년 12월 20일 승배151신승균병신1896년 2월 27일 부임
112권 익정축1817년 12월 20일 부임申昇均정유1897년 4월 25일 이배
權 익임오1822년 6월 4일 봉파152김성규정유1897년 5월 20일 부임
113홍희경임오1822년 6월 10일 부임金星圭기해1899년 12월 26일 면귀
洪羲敬갑신1824년윤7월 14일 사체153이석규경자1900년 1월 29일 부임
114홍철영갑신1824년 윤7월 14일 부李錫珪신축1901년 1월 15일 이배
洪澈榮을유1825년 6월 2일 계파154유기준신축1901년 1월 15일 부임
115김이정을유1825년 7월 7일 부임兪起濬임인1902년 5월 10일 이배
金履禎기축1829년 12월 2일 계파155민영복임인1902년 5월 29일 부임
116김조연기축1829년 12월 20일 부임閔泳復을사1905년 11월 3일 체귀
金祖淵임진1832년 5월 10일 이배156신헌균병오1906년 1월 14일 부임
117서유민임진1832년 5월 20일 부임申憲均정미1907년 9월 23일 사체
徐有民갑오1834년 6월 2일 이배157김윤창무신1908년 2월 8일 부임
118심의복갑오1834년 6월 26일 부임金潤昌기유1909년 월 일 면관
沈宜復을미1835년 10월 17일 사체158김연하경술1910년 8월 25일 부임
119조종순을미1835년 12월 4일 부임金演夏경신1920년 8월 7일 이배
趙鍾淳병신1836년 12월 15일 폄귀159민상현경신1920년 8월 7일 부임
120홍장섭병신1836년 12월 25일 부임閔象鉉계해1923년 3월 7일 사체
洪章燮기해1839년 4월 21일 사체160남정학계해1923년 3월 30일 부임
南廷學을축1925년 11월 일 이배
161김병숙을축1925년 11월 일 부임
金秉璹이하 1949년까지 기록이 없음

독립이후 역대 군수

독립이후 역대 군수 - 대수, 성명를 나타낸 표
대수성 명 대수성 명
1하헌종1949년 11월 3일 부임18김세장1974년 1월 25일 부임
河憲鍾1950년 9월 28일 사망金世章1975년 9월 2일 이임
2김기창1950년 12월 25일 부임19오경석1975년 9월 3일 부임
金基彰1952년 2월 20일 퇴임吳京錫1977년 2월 17일 이임
3박두옥1952년 2월 21일 부임20백주원1977년 2월 17일 부임
朴斗玉1953년 12월 27일 이임白柱元1979년 10월 26일 이임
4유수현1953년 12월 28일 부임21강영기1979년 10월 26일 부임
劉守鉉1955년 8월 3일 이임姜英奇1980년 9월 1일 이임
5한창석1955년 8월 4일 부임22안재호1980년 9월 1일 부임
韓昌錫1957년 4월 1일 이임安在祜1982년 4월 13일 이임
6박종환1957년 4월 2일 부임23김재웅1982년 4월 14일 부임
朴種煥1958년 11월 3일 퇴임金在雄1983년 4월 12일 이임
7박기옥1958년 11월 7일 부임24김옥현1983년 4월 13일 부임
朴基玉1960년 2월 7일 이임金沃炫1985년 5월 4일 이임
8이해영1960년 2월 8일 부임25조영택1985년 5월 6일 부임
李海榮1960년 5월 22일 이임趙泳澤1986년 11월 1일 이임
9이시형1960년 5월 23일 부임26문덕형1986년 11월 2일 부임
李時炯1960년 10월 31일 퇴임文德炯1988년 2월 11일 이임
10김남권1960년 12월 8일 부임27조항규1988년 2월 12일 부임
金南權1961년 10월 30일 이임趙恒奎1989년 12월 26일 이임
11김성열1961년 10월 31일 부임28고경주1989년 12월 27일 부임
金成烈1962년 11월 6일 이임高京株1992년 1월 4일 이임
12김재호1962년 11월 7일 부임29이광수1992년 1월 5일 부임
金在鎬1964년 10월 22일 이임李光洙1993년 3월 28일 이임
13김남섭1964년 10월 23일 부임30박래관1993년 3월 29일 부임
金南燮1968년 1월 1일 이임朴來寬1994년 2 25일 이임
14양재범1968년 1월 5일 부임31김정환1994년 2월 26일 부임
梁在氾1970년 3월 2일 이임金正煥1995년 6월 30일 이임
15송언종1970년 3월 3일 부임32김흥식1995년 7월 1일 부임
宋彦鍾1971년 8월 20일 이임金興植1998년 6월 30일 재선
16송인섭1971년 8월 21일 부임33김흥식1998년 7월 1일 부임
宋仁燮1973년 2월 6일 이임金興植2002년 월 일 현재
17김연수1973년 2월 7일 부임
金鍊洙1974년 1월 24일 이임

역대 부군수 명단

역대 부군수 명단 - 대수, 성명을 나타낸 표
대수성 명 대수성 명
1김동환1975년 1월 6일 부임10문병주1989년 6월 30일 부임
金東桓1975년 9월 3일 이임文秉周1991년 1월 17일 이임
2양현조1975년 9월 4일 부임11전윤식1991년 1월 18일 부임
梁現兆1977년 3월 8일 이임全潤植1991년 12월 28일 정년
3김은석1977년 3월 22일 부임12김이경1992년 1월 11일 부임
金殷錫1978년 8월 16일 이임金李京1993년 8월 16일 이임
4나무석1978년 8월 16일 부임13송귀근1993년 8월 17일 부임
羅武碩1979년 9월 1일 이임宋貴根1994년 7월 7일 이임
5이덕원1979년 9월 2일 부임14지종채1994년 7월 7일 부임
李德元1980년 12월 29일 이임池鍾彩1994년 12월 31일 이임
6신평영1980년 12월 30일 부임15김용준1995년 1월 1일 부임
申平泳1983년 9월 26일 이임金容俊1997년 9월 23일 이임
7장영규1983년 9월 26일 부임16임광락1997년 9월 24일 부임
張永奎1986년 11월 3일 이임林光洛1999년 1월 10일 이임
8이운형1986년 11월 4일 부임17백도선1999년 1월 11일 부임
李雲珩1987년 12월 31일 퇴임白道善2002년 월 일 현재
9김영남1988년 1월 1일 부임
金永男1989년 6월 30일 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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