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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3 · 1운동 열사 장성군 의적비
  • 2. 장성군 순국의열 충혼탑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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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 · 1운동 열사 장성군 의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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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치 :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산 200­1번지
설립년월일 : 1972년 9월 30일
규 모 : 아래 도면과 같음

의적비 도면이미지로 왼쪽에는 단면도 오른쪽에는 평면도를 나타내었다. 평면도는 안쪽부터 평면 90cm X 58cm, 좌대 150cm X 120cm, 좌대 225cm X 192cm, 좌대 317cm X 285cm, 좌대 463cm X 427cm를 나타내고 있다 3 · 1운동 열사 장성군 의적비 도면

[열사명단]

신경식 신상우 신태식 신국호 고용석 오상구 박영관 정선유
임춘열 김응현 최경동 류상능 류상순 류상학 류상설 정병모
박광우 변순기 류희영 송주일 정길언 나상철 오석완 박일구

[비문]

단군께서 건국이후 유구한 반만년 역사를 견지해 오던 중 우리 국가주권을 단기 4243년 경술 8월에 침략국 일본에게 강합(强合)을 당하여 식민지 정책에 우리 전국민이 노예가 되어 치욕의 고난을 당하므로 통분억울함을 금할길 없어 국권회복을 기천염원(祈天念願)하던 중 민족대표 손병희 선생외 32인이 단기 4252년 대한민국 원년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포하고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당시 고종황제께서 승하하시와 3월 3일 인산(因山)시에 기독교, 천도교, 불교, 종교단체가 주동이 되여 시민 수십만명이 뒤를 이어 탑동공원 및 동대문에 집합하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높이 들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항일투쟁 의거를 전개하였다. 3월 3일 별기열사 24인이 상호연락하여 최후일각까지 최후일인까지 동지를 다수 규합시켜 독립만세를 부르며 의거할 것을 비밀결의한 후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수천매를 준비하고 3월 3일부터 4월 4일까지 수백명씩 동원 하여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계속 독립만세를 부르고 밤이면 군내 각처에서 동지들이 봉기하여 봉화를 놓고 만세를 불렀는데 만세소리는 천지가 진동하였다. 또 일방적으로 군자금 을 모집하여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선생 주석에게 전달하였다.

일관헌에게 독립의거 주동 및 군자금 모집사실이 발각됨으로 별기열사들이 체포구금되어 악형을 당한 참상은 실로 목불인견 구불인언(口不忍言) 별별 고문을 당한후 전주, 대구, 서울 형무소에서 누년 옥고를 당하였다.

그 뒷받침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신경식, 류상능 두 열사는 가산을 경주하여 오북 의숙 을 창설하고 정선유열사는 삼일학교를 창설하여 3,4년간 수백명 청소년에게 애국사상과 민족정신을 고취함양하였는데 일정당국에서 불온학교라고 강압적으로 폐교명령이 내려 부득이 폐교를 당하여 통분함을 금할수 없었다. 별기 열사들이 출옥후에도 백절불굴하는 정신으로 세금불납 동맹을 일으켜 소위 무단정치 불의포학한 일정당국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통열한 배일 운동사를 꾸미었다.3·1운동 열사들의 일편단심 정열적인 독립운동 위대한 정신에 천우신조하여 제2차대전에 연합국의 승리로서 일본이 패망하여 단기 4278년 서기 1945일 해방이 되고 단기 4281년 서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독립이 되었다.
별기 열사들은 우리 오천년 민족의 사표가 되며 그 의적(義績)은 청사에 길이길이 빛나므로써 입비 명기한다.

기념사업비 이미지로 단기 4305년 9월 30일, 대한민국 54년 임자 9월 30일, 서기 1972년 9월 30일, 함평 이병헌 근찬, 여산 송성용 근전서, 광산 이병현 근후서, 3.1운동 열사 장성기념사업회 건립 / 임원 - 명예위원장 이병헌, 집행위원장 고재필, 집행위원 신수환 비석1 기념사업비

그리고 이 의적비 옆에는 비석이 3개 있는데
비1 : 3.1운동기념사입비이고
비2 : 일반 찬조자 명단이 기록되어 있으며
비3 : 독립선언서가 기록되어있다.

[상기 비석1 기념사업비 비문내용]
단기 4278년 서기 1945년 을유 8·15해방 즉후부터 우리 장성군민의 숙원이 되여온 3·1운동 열사기념 사업을 단기 4204년 서기 1971년 10월 초순경에 장성 담양선출 국회의원 하남 고재필씨께서 경향 저명인사들의 발기 찬성을 얻어 동년 10월 30일에 군내유지 100여 명이 장성군에서의 3·1운동의거 시발지인 북이면 사거리 남성노인당에 회합하여 사업회를 조직하고 본사업을 거군적으로 진행함에 성암 신태호씨의 거액찬조를 위시하여 군내 및 강호유지 제현의 정성어린 찬조를 얻어 열사의적비와 기념 사업비를 장성역광장 행객이 연락부절한 지점에 건립하여 살신 구국의 숭고한 선열의 애국심을 영원히 추모하고 후진들의 애국심과 민족의식의 함양에 자(資)하고자 하는바이다.
열사의적비문은 독립유공자 국사 편찬위원 경암 이병헌 선생이 지으시고 글씨는 광산 이병현씨가 쓰고 조각은 창녕 조영하씨가 하였으며 임원 및 찬조위원 명단은 별기와 여하다.(찬조위원 명단 생략)

단기 4305년 9월 30일
대한민국 54년 임자 9월 30일
서기 1972년 9월 30일

2. 장성군 순국의열 충혼탑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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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사변으로 말미암아 조국과 향토수호를 위하여 산화하신 영혼의 맺힌 한을 설원위무(雪 慰撫)하고 그 애국애향 정신을 길이 빛내고자 장성읍 충무공원내에 기 새워진 충혼탑의 위치에 순국의열충혼탑을 건립하였는데 1979년 6월에 발기하여 1981년 3월에 건립 제막식을 가졌다.

[추진경위]

1979. 6.19 의열위령탑발기위원회 발족
1979. 6.25 의열위령탑건립위원회 구성
1980. 6.13 고문 49명 추대 및 지도위원위촉
1980. 6.15 발기취지문작성 발송
1980. 6.17 탑공사 도급계약 체결
1980. 6.25 기공식
1980. 6.25 위령탑을 충혼탑으로 명칭
1980. 6.25 충혼탑비문은 향토문화개발협의회장 정채균에
1980. 6.25 진혼곡은 광주시박물관장허연 에게 작성위촉
1980. 11.20 봉안자 명단서투 완료(2,739명)
1980. 11.20 경내 제탑 이설키로 결정하고 공사 착수
1980. 11.28 경내 조경공사 실시 완료
1981. 3.11 장성군 순국의열충혼탑 제막식 거행

총공사비

총공사비 - 구분, 금액, 수입내역을 나타낸 표
구 분금액수 입 내 역
23,300천원군비 10,000천원이병직 200
공사비19,300천원박남순 6,000천원황흥식
설계기타경상비4,000천원삼양제사 1,000천원향로 1구 (36만원상당)
충혼탑 이미지로 충혼탑규모 - 총높이 10.88m, 좌대높이 0.78m, 탑고 10.1m, 봉안영령 : 2,739위 [사진 3-4] 장성군 순국의열충혼탑건립문

자고로 선비의 얼과 애국충절의 정신을 면면이 이어온 우리고장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국난극복의 선봉이 되어 신명을 바친 명현과 열사가 많이 배출된 충의지향이며 추로지향으로 이름 높은 고을이다.
저 6·25동란은 우리나라 미증유의 국난으로서 삼천리 강토는 초토화 되었고 백수십만명의 인명피해까지 가져온 처절한 민족의 대비극이었다.
생각컨대 당시 우리고장은 적의 수중에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사상이 투철한 동지들은 공산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구국의 일념으로 비밀결사조직과 태극결사대 등을 만들어 때로는 지하에서 활동을 전개하였고 때로는 남녀노소할 것없이 적수 공권으로 총칼 앞에 항거하여 나라와 향토수호를 위해서 의롭게 죽는 것을 두렵게 생각치 않았으니 적의 만행 앞에 무참히 쓰러진 순국의열의 수가 무려 3천여명에 달하였던 것이다.
무상한 세월은 어느덧 30개 성상이 흘렀지만 산화하신 고혼의 맺힌 한을 무엇으로 달래야 할것인가.
여기 만시지탄이 없지 않으나 승천하신 영혼을 설원(雪 )하고 그 애국충절의 정신을 길이 빛내고자 1980년 6월 군내 각기관, 단체의 장, 유지 및 군민대표들이 모여 이곳 제봉산 및 황룡수 굽어보이는 충무공원에 영지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현공원네에 이미 세워진 충혼탑에 봉안된 영령과 더불어 새로이 세운 순국의열충혼탑에 모시어 그 거룩한 정신을 자손만대에까지 길이 받들고자 우리 군민의 갸륵한 뜻을 여기 모은 것이다.

서기 1980년 11월 일
사단법인 향토문화개발협의회 회장 정채균 근찬병서
장성군순국의열총혼탑건립위원회 근견
위원장 박 남 순

[진혼곡]

아, 장하셔라
맨 주먹으로
불의와 싸우시다
꽃잎처럼

져버린 넋들이여
그 의혈이 있었기에
자유의 나무가 더욱 자라고
그 끈질긴 힘이 있었기에

평화의 열매를 거두거니
어서,
그리운 고향산천
따뜻한 품안으로

돌아오시랑게요.
여기
고장의 우리 정을
모두 모아서

하늘로 치솟은 탑잉게
맘놓고 돌아오시랑게요
새 세상문이 열린 이땅에
더욱 밝은

빛이 되시게요.
아. 거룩하셔라
오직 나라를 구하시려다
의롭게 가신 넋들이여

작시 허 연
글씨 정채균

[임원명단]

명예위원장 장성군수 안 재 호
위 원 장 박 남 순
부위원장 전 상 술
부위원장 기 우 대
부위원장 백 만 호
부위원장 김 영 석
총무겸사업부장 박 수 빈
설계자 동립건축설계사무소장 김 태 만
시공자 담양석공장대표 최 용 채 , 최 용 만

3. 독립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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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치 :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 587­1번지
설립년월일 : 1947년 8월 15일
규 모 : 아래 도면과 같음

이 탑은 광복을 기념하고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당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북이 분회장(김을수)이 사거리역 앞에 세웠으나 6·25때 파괴된 것을 1950년 대한 청년단 북이면 단장(권상술)이 보수하였고 1992년 2월 현위치로 이설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이면 독립탑 이미지로 오른쪽엔 단면도 있음 [사진 3-3] 북이면 독립탑

독립탑의 기단하부에는 공약 3장과 항일 독립운동내용을 약기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약 3장]

▶ 금일 오인의 차거(此擧)는 정의 인도생존 존영(尊榮)을 위하는 민족적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逸走) 하지 말라.
▶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야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라.

조선건국 4252년 3월 1일

▣ 이고장 항일독립투쟁약기

이 고장 북이면은 임진왜란시 남문창의를 비롯, 조국수호에 앞장선 충신열사와 효자 열녀가 많은 자랑스런 곳이다. 이제 독립탑을 옮김에 즈음하여 근대항일 독립투쟁사를 약기하여 선열의 얼을 기리려 한다.

김영백 의병장 공훈

1895년 일본군이 국모 민비 시해에 잇따른 을사조약에 분개, 장성을 중심으로 의병장이 봉기할때 본면 달성리 김영백 의병장은 의병 천여명을 모아 광주, 고부, 정읍, 담양, 고창을 비롯 이 고장 모현, 상곡, 동산에서도 일본군과 싸워 큰공을 세웠으나 끝내 일본군에 붙잡혀 망국의 한을 품고 희생됐다.

김기형 독립선언문사건

1918년 본면 백암리 김기형은 일본도꾜유학생 최팔종과 손을 잡고 독립선언문을 박아 광주독립만세 운동을 돕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오랜 옥고를 치루었다.

모현 3·1독립만세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에 번질 때 본면 모현리에서도 음력 3월 3일 2백여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사거리까지 오자 많은 면민이 합세했는데 장성 헌병대가 출동하여 주동자를 체포하고 강제해산시켰다.이때 모진 고문과 옥고로 희생당한 분은 한문선생을 하던 정병모를 비롯, 신종식, 신태식, 류상학, 신상우, 신국호, 류상설, 고용석, 유상순, 오상규, 신경식, 류상능, 박광우 등 여러분이다.

김기주 항일 독립운동 사건

사거리 양조장을 경영한 김치성의 장남 김기주는 일찍 나라 잃음을 한탄하고 성진회를 조직, 교단에 선 뒤에도 은밀히 광복운동을 꾀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 수천명이 반일을 외치고 일어서자 교직을 사퇴하고 전국 학생항일 독립운동 투쟁을 하다 체포되어 이 사건으로 갖은 고문과 감옥살이를 겪고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과 손잡고 독립운동을 하다 피검되어 전후 7년의 옥고를 당하고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1년 35세의 청춘을 일기로 조산 뒷산에 잠드시니 묘비에 독립운동 훈장기록이 빛난다.

김동규 학생 일본총독 모독사건

1930년 본면 묘동리 김동규는 국민학교 5학년 때 야마나시 일본총독이 뇌물을 먹고 감옥에 갔단다 하는 짧은 글짓기를 하여 교장과 담임까지 경찰서에 호출당하게 하고 그후 자기집 대문에 태극을 그려 가택수색을 여러차례 당하며 경찰의 사찰대상이 되었다.

사거리 청년들이 일제탄압 항거사건

1943년 7월 일본은 우리청년들을 징병, 학도병, 증용근로 보국대, 정신대등으로 잡아가고 남은 젊은이들은 군사훈련을 시킨다하여 매일 모아놓고 매질을 일삼었다.이걸 보다못해 사거리 청년들이 항의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패와 매일 같이 몽둥이 싸움이 벌어져 장성 기마대까지 출동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주모자인 전상술 외에 김영배, 박균홍, 최대연, 김병기 등이 일본경찰 고등계 형사대에 붙잡혀 모진고문과 국가 소요죄로 2년간이나 감옥살이를 치루었다.

김병태 일본순사 부장 구타사건

1944년 본면 달성리 김병태는 평소 우리 한국민을 멸시한 일본경찰에 분개하여 오던중 징병으로 붙들려 가면서 일본순사부장을 힘껏 두들겨주고 적으나마 한을 풀었다.

독립탑 건립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기쁨을 이 고장에서도 영원히 기념키 위해 1947년 8월 15일 대한독립촉성 국민회 북이 분회장인 김을수, 부회장인 신형식, 김용지와 감찰부장인 전상술이 주동이 되어 이곳에 독립탑을 세웠는데 준공식에는 정읍, 고창, 담양 등 각지에서 모였다. 6·25 사변당시 탑이 파괴되어 대한청년단장 전상술씨가 재건하였으나 이번에 이설복원하게 되었다.

모현리 삼일 사건

3·1독립만세 운동의 높은 뜻을 오래 기리기위해 모현리 류상문, 류두환, 최동호외 여러분이 서둘러 정부보조와 신태호씨를 비롯 유족, 유지들의 지원으로 1990년 모현리에 삼일사를 세워 당시 주동이 된 열세분의 제사를 매년 삼월삼진달 모시고 추모하고 있다.

서기 1992년 2월 일
김 병 효 근지

이 독립탑 앞에는 독립탑 이설복원에 힘쓴 분들의 뜻과 명단이 세겨진 복원비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설복원추진비문]

여기, 우리고장의 정을 모두 모아서 하늘로 치솟은 탑을 세우다. 새세상 문이 열려 나라와 백성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이 땅에 더욱 밝은 빛이 되소서

서기 1991년 12월 일
근찬 전 상 술

‥추진위원회 회장단: 7명
‥추진위원: 25명 및 기관단체
‥협찬위원: 38명
‥특별협찬위원: 5명

4. 충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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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사변당시 조국과 향토수호를 위하여 산화하신 영령에 대하여 1981년 3월 충무공원에 총혼탑을 봉안하였지만, 본군이 일시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수복한 후 당시 각읍면 지역에서 충혼비(탑)를 세우고 매년 위령제를 지역단위로 모시고 있는데 봉안 영령 가운데는 장성군 순국의열 충혼탑에 다시 봉안된 분이 많다.

(1) 장성읍 수산리 동산 충혼비

소 재 지 : 장성군 장성읍 수산리산 1번지
규 모 : 탑신 (높이 2.64m 둘레 1.1m), 탑기단 (높이 1.3m 둘레 9.4m), 형태 ­탑형(원형)
건립년월일 : 1959년 8월 15일
연 혁 : 6·25당시 순직자 박종수 외 군·경·민 169명의 참된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공인수, 김봉섭, 차상구, 서동호, 오수권, 김목녀 등이 발기하여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1959년 제막하였는데 1962년 1월 6일 동산 의열계를 조직 봉안하고 있다.

장성읍 수산리 동산 충혼비이미지로 오른쪽엔 단면도와 평면도가 있음. 원형비 둘레 110cm [사진 3-4] 장성읍 수산리 동산 충혼비

(2) 장안리 충혼비

소 재 지 :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산 120번지
규 모 : 탑신 (높이 0.9m 둘레 1.4m), 탑기단 (높이 2.7m 둘레 4.8m), 형태 ­탑형
설립년월일 : 1951년 4월 1일
연 혁 : 6·25전몰 군경 및 순국선열 변진후 외 37명의 영혼을 위로코자 이장 변경연 외 전 주민이 금을 모금하여 건립, 매년 현충일에 명복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음.
비 문 : "충혼 들이여 고히 잠드소서"
봉 안 영 령 : 38위

장성읍 장안리 동산 충혼비 [사진 3-5] 장성읍 장안리 동산 충혼비

(3) 진원면 충혼비

소 재 지 : 장성군 진원면 선적리 126번지
규 모 : 탑신 (높이 1.2m 둘레 1.5m), 탑기단 (높이 1.2m 둘레 3.36m), 형태 ­탑형
건립년월일 : 1953년 6월 25일
연 혁 : 6·25당시 공산당으로부터 애국지사와 양민 들이 무참이 살해당하였는데, 진원면내 거주자만도 91명에 달하였다. 따라서 1953년 6월 25일을 기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애석하게 순국하신 영령의 명복을 빌고 길이 빛내는 뜻에서 당시 면장 박호연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 진원면 소재지 광장에 건립하였다.
그 후 면청사 이전에 따라 1955년 8월 15일 진원면 선적리 현위치로 이설하였으며 매년 현충일에 위령제를 모시고 있다.
봉 안 영 령 : 91위

진원면 충혼비 이미지로 오른쪽엔 단면도와 평면도가 있음 [사진 3-6] 진원면 충혼비

(4) 남면 충의비

소 재 지 : 장성군 남면 분향리 산 350­4번지
규 모 : 탑신 (높이 1.2m 둘레 1.06m), 탑기단 (높이 0.46m 둘레 1.84m), 형태 ­탑형
건립년월일 : 1952년 8월 1일
연 혁 : 장성군 남면 분향리 560번지
정순조의 충의비로 이는 남면 의용 소방대로 활동한 자로서 1951년 9월 15일 남면지서에서 빨치산과 교전하다가 혁혁한 공훈을 세운 전사자임.

남면 충혼비 이미지로 오른쪽엔 단면도가 있음. 비상폭 각 20.5cm, 비하폭 27cm(옆면) + 26cm(정면) [사진 3 -7] 남면 충혼비

(5) 서삼면 충혼비
소 재 지 : 장성군 서삼면 장산리 179번지
규 모 : 탑신 (높이 0.85m 둘레 0.80m), 탑기단 (높이 0.19m 둘레 1.62m), 형태 ­탑형
건립년월일 : 1961년 8월 31일
연 혁 : 반공애국지사 변하연 외 5인은 6·25당시 속칭 빨치산에게 체포되어 장성군 서삼면 장산리 꼴째 계곡에 집단참변을 당한 자로서 장성읍 거주 변주연의 주도 아래 동 시체를 발굴하여 이장을 함과 동시 본 충혼비를 건립하였음.

서삼면 충혼비 이미지로 오른쪽엔 단면도와 평면도 있음 [사진 3 - 8] 서삼면 충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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