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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선사시대 및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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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신라의 지방조직과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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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는 편입된 영역과 그 주민을 새로이 편제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고구려·백제의 유민을 신라로 편입시키며 나아가 확대된 영토를 신라의 판도로 확고히 장악함으로써, 통일왕조로서 전국을 통치하는 데 만전을 기하고자 함이었다. 그러한 조치의 일환으로 우선 문무왕 13년(673)에는, 백제 유민에게 옛 백제시절 소지했던 관등에 준하여 신라의 관계를 주었다. 백제의 제2관등인 달솔에게 신라의 제10관등인 대나마를 내린 것을 위시하여, 백제의 3∼7관등인 은솔∼장덕에게 각각 신라의 11∼15관등인 나마∼대오를 칭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 후 신문왕 6년(686)에는 고구려 유민에게도 마찬가지의 원칙에 준하여 신라의 관계를 주었는데, 백제 유민보다는 상위의 관등을 내리는 등 상대적으로 우대하였던 흔적이 엿보인다.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신라인으로 편입시키는 조치를 취하는 것과 함께, 신라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을 아우르는 지방행정조직의 정비에 착수하였다. 5소경(小京)과 9주(州)의 제도가 그것이었다. 소경은 통일 이전부터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 일찍이 지증왕 15년(514)에 아시소경(阿尸小京 : 安康)이 설치되었으며, 진흥왕 18년(557)에는 국원소경(國原小京 : 忠州)이, 선덕여왕 8년(639)에는 북소경(北小京 : 江陵)이 설치되었다. 이같이 소경이 이미 설치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전국적으로 체계있게 정비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통일 뒤인 문무왕 18년(678)에 북원소경(北原小京 : 原州), 동 20년(680)에 금관소경(金官小京 : 金海)이 설치되고,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 : 淸州)과 남원소경(南原小京 : 南原)이 설치되고, 앞서 설치된 국원소경(國原小京)이 중원소경(中原小京)이라 고쳐짐으로써 5소경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5소경이 신문왕 5년에 정비되었다는 것이 우선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이 해에 신라의 정치조직이 전반적으로 정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같은 정치조직 정비의 일환으로 5소경도 일정한 계획 아래 정비되었던 셈이다. 5소경은 동·서·남·북·중의 방향에 맞추어 다섯으로 정리되었다. 왕경인 경주가 국토의 동쪽 끝에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결함을 보완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왕경의 귀족들을 이주시켜 거주케 하기도 하였다. 지방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이처럼 견제가 필요하였던 것은, 소경에 신라가 정복한 국가의 귀족들을 사민정책에 의해 강제로 이주시켜 살게 한 때문이기도 하였다. 소경의 설치는 이러한 사민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가령 중원소경에는 대가야(大加耶 : 高靈)의 귀족들이, 남원소경에는 고구려의 귀족들이 옮겨 살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중원소경의 강수(强首)·우륵(于勒)이나 김생(金生), 남원소경의 고구려인 악사(樂師)나 법경(法鏡)같은 승려의 존재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피정복국민의 이주는 그들에 대한 감시의 필요성을 낳게 하였을 것이다. 소경의 관할구역은 작지만 그 장관인 사대등(仕大等 : 仕臣)의 지위가 주(州)의 장관과 비슷하게 높게 되어 있는 것은, 결국 위와 같은 이유에서 말미암은 소경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5소경과 더불어 통일신라에서 지방통치조직의 근간을 이룬 것이 9주와 그 아래의 군·현이었다. 주는 통일 전에도 영토의 확장에 따라 차례로 설치되어 온 것이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뒤에 새로이 편입된 지역을 포함하여 이를 9주로 정비하였다. 그 시기는 다른 정치조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문왕 5년(685)이었다. 이 9주를 정비하는 데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는,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을 기준으로 하여 각기 그 옛 땅에 3개의 주를 설치하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표 2-5] 신라의 5소경

[표 2-5] 신라의 5소경 - 소경명, 현지명, 건치연대를 나타낸 표
소 경 명현 지 명건 치 연 대
중 원 소 경충 주진흥왕 18년(557)
북 원 소 경원 주문무왕 18년(678)
금 관 소 경김 해문무왕 20년(680)
서 원 소 경청 주신문왕 5년(685)
남 원 소 경남 원신문왕 5년(685)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고대편〕, 일조각, 1982, 333쪽 표 전재

물론 엄밀하게 따지자면 신라의 옛 땅이라는 데에는 가야의 옛 땅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대체로 이러한 원칙은 승인되어 좋을 것이다. 둘째로는, 중국의 옛날 우임금(禹王) 때의 9주(州)에서 모범을 취하였다는 점이다. 기록상으로는 밝혀져 있지가 않지만, 고려의 성종이 12목을 설치하면서 이것이 중국 순임금(舜王)의 12목을 본뜬 것이었다고 말한 사실에 비추어 틀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방 통치조직에서 주의 비중은 상당히 무거운 것이었다. 원래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던 때문에 그 장관은 군주(軍主)라고 일컬었는데, 이것은 신라의 독자적인 칭호였다. 그러나 태종무열왕 때에는 이를 중국식으로 고쳐서 도독(都督)이라 불렀고, 신문왕 때에는 또 총관(摠管)이라 칭하게 되었다. 명칭만으로는 반드시 단정할 수가 없으나, 이러한 중국식 명칭의 사용은 또한 행정적인 성격이 커져가는 과정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총관은 규정상으로는 급찬 이상 이찬까지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6두품 출신도 이에 임명될 수가 있을 것도 같아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6두품 출신으로 총관에 임명된 사람은 기록에 나타나지가 않으며 따라서 진골의 독점직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결국 주의 정치적 중요성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표 2-6] 통일신라시기 9주와 관할 군현수

[표 2-6] 통일신라시기 9주와 관할 군현수 - 주명, 주명, 주치, 군수, 군수, 현수, 현수를 나타낸 표
주 명주 명주 치군 수군 수현 수현 수
원 명경덕왕시개칭명(현지명)「삼국사기」지리지「삼국사기」경덕왕 16년조「삼국사기」지리지「삼국사기」경덕왕 16년조
사벌주상주상주10103130
삽량주양주양산12124034
청주강주진주11113027
한산주한주광주28274946
수약주삭주춘천12112627
하서주명주강릉992625
웅천주웅주공주13132929
완산주전주전주10103131
무진주무주광주15144344
--(계)120117305293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고대편〕, 일조각, 1982, 335쪽 표 전재

[표 2-7] 통일신라시기의 외관

[표 2-7] 통일신라시기의 외관 - 주, 소경, 군, 현을 나타낸 표
소경
도독(총관)
주조(주보)사신(사대등)군태수
장사(사마)사대사(소윤)외사정소수 현령
외사정 (제수)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 337쪽 표 전재

주 밑에는 전국에 117 내지 120개의 군과 293 내지 305개의 현이 있었다. 군에는 그 장관으로 군태수(郡太守)가 임명되었으며, 현에는 그 격에 따라서 혹은 소수(少守)가 임명되기도 하고 혹은 현령(縣令)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군·현의 외관으로는 모두 왕경의 귀족을 파견하였는데, 흔히는 학식이 있는 자가 임명되곤 하였다. 군·현의 장관을 성주(城主)라 하여 그 군사적 성격이 중요시되던 삼국시기의 전통은 이제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관계로 해서 학문에 특히 관심이 많던 6두품 출신이 보통 이들 군·현의 외관직에 임명되었을 가능성을 짐작해서 좋을 듯싶다.

주·군·현의 칭호는 종래 전통적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던 것이 경덕왕 16년(757)에 이들의 이름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쳐 버렸다. 가령 사벌주(沙伐州)를 상주(尙州), 수약주(首若州)를 삭주(朔州), 완산주(完山州)와 무진주(武珍州)를 전주(全州)와 무주(武州)로 각각 고친 것과 같은 것이 그러하였다. 군·현에 있어서도 수주군(水酒郡)을 예천군(醴泉郡)으로, 고시이현(古尸伊縣)을 갑성군(岬城郡)으로,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과 소비혜현(所非兮縣)을 진원현(珍原縣)과 삼계현(森溪縣)으로 고친 따위가 그러하였다. 요컨대 고유한 원래 지명의 소리(音)라든지 뜻이라든지에 의거해서 대담하게 아화(雅化)된 한자 이름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이 한화정책은 2년 뒤에 중앙관직의 명칭을 역시 아화시킨 한자 이름으로 고친 것이나 마친가지 원칙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전제주의의 강화, 중앙집권의 강화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위와 같은 9주제하에서 장성지역은 무진주에 속하였다. 앞서 당나라에서는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그 옛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비롯한 1부(府) 7주(州)를 설치하였는데, 당시 고시이현 즉 원래의 장성은 사반주(沙泮州)의 치소였다. 그리고 삼계는 이 사반주에 속해 있었으며, 진원은 분차주(分嵯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의 웅진도독부 시절, 한때 장성지역은 사반주와 분차주에 나뉘어 소속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신라가 당을 몰아내고 9주제를 시행하면서, 모두 무진주 소속의 군현으로 되었던 것이다.

무진주 치하에서 장성지역에는 갑성군 즉 본래의 장성군과 진원현·삼계현이 있었는데, 갑성군이 진원현과 삼계현을 영현(領縣)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장성지역민들은 경주에서 파견된 왕경 귀족 출신의, 아마도 6두품 출신의 군태수와 현령 혹은 소수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토착세력가들은 백제 사비시기와 유사하게 이들 지방관을 보좌하는 말단 행정업무를 맡고 있었을 것이다.

군·현의 아래에는 촌이라는 보다 작은 행정구역이 설정되어 있었다. 행정적으로 설정된 촌은 자연촌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몇 개의 자연촌이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 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장적(新羅帳籍)에 의해 알 수가 있게 되었다. 위의 장적은 4개 촌의 것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촌주에 할당된 촌주위답(村主位畓)은 1개 촌에만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촌주는 4개의 자연촌 중에서 1개 자연촌에만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촌주가 관할하는 행정촌은 몇 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행정촌에는 그 지방의 토착세력가를 촌주로 임명하여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이 파견된 지방 행정기관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촌주는 통일 전부터 있어왔으나, 통일 후 중앙으로부터의 지방통제가 진전됨에 따라서 그 지위가 법제적으로 더욱 명확하게 규정된 것 같다. 가령 신분적으로는 그들을 진촌주(眞村主)와 차촌주(次村主)로 나누어 이를 중앙귀족의 5두품과 4두품에 해당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또 행정적으로는 군태수와 현령·소수의 통제 밑에서 행정촌의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관등에서는 지금까지 받아오던 외위(外位)를 버리고 중앙귀족과 마찬가지로 경위(京位)를 받게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촌주의 독자적인 중요성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촌주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에 주·군·현의 리(吏)가 있다. 이 주·군·현의 리는 촌주와 같이 토착세력 출신이지만, 주·군·현의 말단 행정보좌직으로서 중앙정부에 대한 의존도는 촌주보다도 더 컸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이러한 토착세력 출신의 지방 말단행정 담당자는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정치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 중에는 상당한 학식을 지닌 자들이 있기도 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경덕왕대(742∼764)의 {화엄경} 사경(寫經) 발문에 의하면, 무진주·남원경·고사부리군(高沙夫里郡 : 古阜) 지방의 토착인 출신 경필사(經筆師)가 11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한문에 대한 소양이 없이는 경필사가 될 수 없을 것임이 분명하므로, 그들은 상당한 학문적 교양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들은 아마도 지방에서 일정한 학업을 닦을 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성지역의 경우도 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앙에서 임명하여 파견한 지방관의 통치 아래, 리 혹은 촌주와 같은 지역 토착세력가들이 조세와 공부·역역을 징수하고, 치안을 유지하며, 각종 종교의식을 집행하는 등, 지역민들을 직접 지배하는 형태가 아니었을까 짐작되는 것이다. 한편 앞서 언급한 경덕왕대 『화엄경』사경 발문에는 통일신라시기 장성지역의 토착세력에 관한 기록도 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지작인(紙作人)으로 나오는 나마(奈麻) 황진지(黃珍知)가 구질진혜현(仇叱珍兮縣) 즉 진원현 출신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지작인이라면 아마도 공장(工匠)이었을 법한데, 나마의 관등을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지역의 토착세력가가 아니었던가 이해되고 있다. 나마라면 5두품 이상의 신분만이 나아갈 수 있는 신라의 제11관등으로서, 지방의 촌주급에게 흔히 주어지곤 하던 관등이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시기 장성지역의 상황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위에서 잠시 언급하였던 신라장적에 의하여 일반적인 추측이 가능할 따름인데, 서원경(西原京 : 淸州) 부근의 4개 자연촌락의 실태를 세세히 기록한 이 문서와 같은 것이 당시 장성지역에서도 작성되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3년마다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이 촌락문서에는, 각 촌의 호구와 우마수(牛馬數)·토지면적을 비롯하여 뽕나무·잣나무·호도나무의 숫자 따위가 기록되어 있다. 촌의 인구를 연령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어 역역을 징발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었으며, 호는 9등급으로 나누어 조부(租賦)를 징수하였다. 지목별(地目別)로 토지의 면적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마와 잣나무·호도나무의 숫자까지 일일이 기재하여 과세의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농민들의 신라 중앙귀족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는데, 당시 장성지역의 농민 또한 거기에서 예외가 아니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2. 통일신라의 문화와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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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는 삼국의 문화를 계승한 위에, 당나라를 통하여 국제적인 조류를 받아들이는 일에도 적극 나섬으로써, 민족문화가 성장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삼국 가운데 가장 후진적이었던 신라가 그것을 극복하면서 그처럼 여러 계통의 문화를 복합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계통의 철학을 종합·정리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의 신라사상체계가 성립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종파를 초월하여 불교 교리 전반을 널리 연구한 원효(元曉 ; 617∼686)에 의하여, 대승불교의 2대 사상인 중관파(中觀派)와 유가파(瑜伽派)를 종합 정리한 철학이 성립하였던 데서 알 수가 있는 일이다.

통일신라는 불교가 문화의 주류를 차지하던 시기였다. 불교는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밑으로는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라인들이 한결같이 우러러 받드는 종교로서, 중대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당이나 혹은 멀리 인도에까지 가서 불법을 구하는 승려들도 많았다. 일찍이 원광(圓光) 이래로 자장(慈藏)·의상(義湘)·원측(圓測) 등의 명승이 중국에 가서 불교를 배웠는데, 원측 같은 승려는 길이 당에 머물러 역경과 저술 등으로 중국 불교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또한 혜초(慧超)는 인도에까지 가서 성적을 순례한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을 남기어 유명하다.

이렇게 당에 유학하고 돌아오는 승려의 수가 많아질수록 당에서 성립된 여러 종파가 신라에도 전하여지게 되었다. 통일신라시기 귀족사회에서 크게 환영받은 의상의 화엄종이 그 중에서도 대표적이었거니와, 종파간의 대립 모순을 보다 높은 입장에서 융화 통일할 것을 내세우는 화쟁사상(和諍思想)의 원효도 빼놓을 수가 없음은 물론이다.

한편 당시의 장성지역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화엄종 소속의 구례 화엄사와 법상종 소속의 김제 금산사이다. 화엄사는 위에서 말한 경덕왕대의 『화엄경』} 사경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사경 조성에 관여한 인물 가운데 장성지역의, 구체적으로는 진원현의 토착세력가가 들어 있음이 밝혀졌다. 지작인(紙作人)으로 참여한 나마(奈麻) 황진지(黃珍知)가 바로 그였다. 화엄사의 영향력이 장성지역에까지 미치었음을 알 수가 있다. 화엄사는 신라 오악(五岳) 중의 남악(南岳)인 지리산에 터를 잡은, 의상계(義湘系) 화엄종의 화엄십찰(華嚴十刹) 가운데 하나였다. 하나(一)가 곧 일체(一切)이며 일체가 곧 하나라는 원융사상(圓融思想)으로서 일심(一心)에 의하여 만물을 통섭하려는 화엄사상을 신봉하던, 통일신라시기의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였다. 말하자면 우주의 다양한 현상이 결국은 하나라는 것으로서,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뒷받침하기에 적합한 사상을 내세우는 사찰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장성지역의 토착세력가가 그러한 화엄사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전제왕권으로 상징되는 신라 중앙의 권력이 그만큼 장성지역에도 깊이 침투해 있었다고 하여도 잘못은 아닐 것이다. 통일신라시기 장성지역 주민에 대한 중앙의 통제와 수탈이 매우 강력하였을 것임을 암시하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한편 그처럼 중앙의 통제와 수탈이 가중될수록 지역 주민의 불만은 높아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러한 불만은 나라 잃은 백제 유민으로서의 한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았으며, 이는 훗날 무진주를 근거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에 대한 열렬한 지지로 나타났음직하다. 후삼국의 쟁패기에 장성지역이 끝까지 후백제의 편에 서 있었던 까닭도, 그와 같은 데에서 연유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후삼국시기 장성지역의 그와 같은 상황과 관련하여, 당시 김제의 금산사를 중심으로 퍼져갔던 미륵신앙이 주목된다. 미륵신앙이란 장차 미륵불이 이 지상에 와서 현세에 이상사회를 실현해 줄 것을 믿는 신앙이었다. 이 신앙을 크게 떨치게 한 것은, 경덕왕대(742∼765)에 금산사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진표(眞表)였다. 그는 백제의 유민으로서, 이 미륵신앙을 통하여 정신적인 측면에서 백제의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백제 유민들 사이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으며, 나아가서는 고구려의 유민들 사이에서도 환영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미륵신앙이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 사이에서 환영을 받은 것은, 신라의 중앙집권적인 전제주의 통치 밑에서 억압받던 그들이 사상적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에 호응한 것이며, 그 전통이 견훤과 궁예에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미륵신앙이, 장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김제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갔다는 사실은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닌 것 같다. 우선 거리상으로 두 지역이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장성은 지리적으로 그러한 사상이 전파되기에 용이한 잇점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다음으로는, 장성 역시 김제와 다름없이 백제의 옛 땅이었으며, 더욱이 『화엄경』사경의 예에서 보듯이 신라 중앙의 강력한 통제와 수탈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으리라는 점을 지적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불만이 백제 유민으로서의 의식을 자극하였으리라는 점도 지나칠 수가 없음은 이를 나위가 없다. 장성지역의 주민들 사이에는 정신적인 백제 부흥운동을 받아들일 여건이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고 하여 과언이 아닌 상황이라고 할 수가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성지역이 견훤의 편에 서 있으면서 후백제가 멸망하기까지 한번도 그 판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점도 하나의 방증은 될 것이다. 견훤이 미륵신앙에 의지하여 후백제 건국을 정신적으로 뒷받침받았듯이, 일찍부터 진표의 미륵신앙을 받아들여 신봉하던 장성지역 주민도 끝까지 후백제를 지지하였기에 그리 되지는 않았을까 헤아려지는 것이다.

불교의 융성에 발맞추어 유교가 성장한 것도 통일신라시기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이었다. 신문왕 2년(682)에 있었던 국학(國學)의 설립에서 그러한 경향을 느낄 수가 있다. 이후 성덕왕 16년(717)에는 당으로부터 공자·10철·72제자의 화상을 가져다 국학에 안치하였으며, 이어 경덕왕 때에는 국학을 태학감(太學監)이라 개칭하고 박사(博士)와 조교(助敎)를 두어 교수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 국학에서는 3과로 구분하여 교수하였는데, 『논어』와 『효경』을 필수과목으로 하고 거기에 『예기』·『주역』·『좌전』·『모시』·『상서』의 5경과 『문선』을 선택과목으로 더하여 각기 교육과정을 구성하였다. 규정상 이 국학에는 대사(大舍) 이하 무위자(無位者)에 이르는 귀족들이 입학하도록 되어 있지만, 주로는 6두품 출신이 이에 많이 입학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기관의 정비를 기초로 하여 원성왕 4년(788)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고 하는 관리 채용을 위한 일종의 국가시험제도가 설정되었다. 국학에서 배운 책들을 중심으로 독서의 성적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채용하였는데, 이는 관리 채용의 기준을 골품제의 신분보다는 유교적인 교양에 두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성장한 유교는,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진골 위주로 짜여진 골품제도와 이를 옹호하는 불교에 대항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유교를 주로 신봉한 것은 6두품 출신들이었으며, 이들이 현세적인 도덕지상주의를 내세우고 불교의 내세 중심의 이원적 세계관에 비판을 가하였다. 이 시기 유교의 대표적 인물인 강수나 설총이 모두 그러하였다. 말하자면 유교는 전제정치하에서 진골에 대항하고 있었고, 오히려 왕권과 결합하여 성장하여 갔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기에 있었던 위와 같은 유교의 성장이 당시의 장성지역에 무슨 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관련 기록이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5소경 및 9주의 치소에는 학원(學院)과 같은 일종의 교육기관이 설치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에 따르면, 무진주의 치소와 바로 경계를 맞대고 있던 장성지역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든 그와 관련되는 움직임이 있었을 법하다. 적어도 지역 토착세력의 경우라면, 이웃에 있는 무진주 치소에서의 그러한 동향에 수수방관만 하였을 리는 없지 않았을까 여겨지는 것이다.

3. 후삼국시대와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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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을 누리던 신라가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경덕왕대(742∼765)부터의 일이었다. 진골귀족들 사이에서 전제주의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경덕왕 16년(757)에 있었던 녹읍(祿邑)의 부활에서 그것을 알 수가 있다. 경덕왕은 이러한 움직임을 막기 위하여 한화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렇다 할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드디어 혜공왕대(765∼780)의 대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몇 차례의 정변을 겪은 끝에 혜공왕은 죽음을 당하고, 그 뒤를 이어 상대등 김양상(金良相 ; 선덕왕)이 즉위하였다(780). 그는 내물왕의 10대손이라 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김경신(金敬信 ; 원성왕)은 내물왕의 12대손이라고 하였는데(785), 그 뒤에는 모두가 원성왕의 계통에서 왕위에 올랐다. 중대(中代)의 왕위를 이어오던 태종무열왕계(太宗武烈王系)는 끊어지고 원성왕계(元聖王系)가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를 보통 하대(下代)라 부르고 있다.

흔히 하대는 정치적 혼란의 시기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진골귀족의 분열 속에 치열한 왕위다툼이 전개되었고, 6두품귀족들은 골품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하대 약 150년 사이에 20명의 왕이 즉위하였고, 그 중 상당한 수의 왕은 내란에 희생되었다.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은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하면서 진골귀족에 반항하였고, 심지어는 최승우(崔承祐)와 최언위(崔彦 )의 경우에서 보듯이 아예 신라를 등진 채 후백제와 고려로 투신해 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정치적 혼란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자체가 경주 중심의 시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중앙에서의 그같은 정치적 혼미 속에 지방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사회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족(豪族)이 바로 그들이었다.

지방에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은, 그들의 독자적인 세력을 강하게 내세우는 존재였다. 호족들은 중앙에서 지방으로 몰락해 내려간 중앙귀족 출신도 있었지만, 지방에 토착해 있던 촌주 출신도 있었다. 이들은 자기의 세력기반인 향리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중앙정부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강한 의욕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행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또 경제적으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반독립적(半獨立的)인 자세에서 중앙정부와 연결하고 있었다. 이들은 사서에 장군(將軍)·성주(城主)·성수(城帥)·수(帥)·적수(賊帥)·적(賊)·웅호(雄豪)·호걸(豪傑)·호족(豪族) 등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대략 낙향귀족(落鄕貴族) 출신의 호족, 군진세력(軍鎭勢力) 출신의 호족, 해상세력(海上勢力) 출신의 호족, 촌주(村主) 출신의 호족 등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해하려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호족의 대두는 신라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약하게 만들었으며, 이것은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거둬들일 수 없게 하였다. 신라 말기에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은 늘어갔고, 이에 따르는 비용도 증가하였지만, 이를 충족시킬 만한 재원은 반대로 줄어들었던 셈이다. 이 재정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정부는 지방의 주·군에 대하여 조세를 독촉하기에 이르렀다(진성여왕 3년, 889). 농민들에 대한 부담만을 가중시키는 조치였다.

원래 농민들은 신라의 융성기에 조차도 조세와 역역의 부담 때문에 유망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유민이 되어 사방으로 흘러다니거나, 혹은 무리를 지어 도적이 되어서 질서를 교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 호족의 보호 속에서 그들의 새로운 생활을 영위하기도 하였다. 이 새로운 변화는 왕경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옛 질서에 대한 타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세의 독촉은 말하자면 신라 귀족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농민들을 반란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반란의 첫 봉화를 든 것은 상주(沙伐州) 지방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였다. 이들의 반란세력은 상당히 강한 것이어서, 이를 평정하러 나선 정부군은 그들의 기세에 눌려 감히 싸울 생각조차 못하였다고 한다. 그 뒤 각지에서 반란이 연이어 일어났는데, 원주(北原)의 양길(梁吉), 죽산(竹州)의 기훤(箕萱), 전주(完山)의 견훤(甄萱), 양길(梁吉)의 부하 궁예(弓裔) 등이 두드러진 반란군의 두목들이었다. 또 왕경의 서남 방면에서는 적고적(赤袴賊)이라 하여 붉은 바지를 입은 반란군들이 휩쓸기도 하였다(진성여왕 10년, 896). 이밖에도 초적(草賊)이라고 하여 이름없는 농민반란군이 수없이 일어났었다.

원종이나 양길·기훤 등은 아직 지방의 한낱 반란군 두령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여 신라와 대항하는 인물이 나타나게 되었다. 견훤과 궁예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각기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건국하여 신라와 정립하였으므로, 이를 후삼국이라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장성지역의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호족이 대두하고 후삼국이 정립되어 가던 격동의 소용돌이에서, 장성지역만이 예외일 수가 없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아마 장성지역에서도 토착세력가들이 호족으로 성장하여 가고, 또한 농민들이 유망하는 현상도 나타났을 것이다. 다만 구체적인 기록을 찾기가 어려운데, 우선 장성지역 호족의 존재를 짐작하게 해 주는 토성(土姓)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 보도록 하겠다. 토성이란 지역 토착세력의 성씨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15세기의 공·사문헌에 자주 나타난다. 조선초기 들어 지방관아(地方官衙)에서 소장 중이던 옛 문서(古籍)를 토대로 작성하여 중앙에 보고한 것이, 지리지류(地理志類)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조선초기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고려시기 이래의 지역 실정이 반영되어 있다 할 것이다. 토성은 그 연원이 중국의 고전에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그 형성 시기가 신라말·고려초까지 소급되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요컨대 토성이란 곧 고려시기 지역의 유력자들로 구성된 사회집단으로서, 신라말·고려초의 호족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가 있는 존재였던 셈이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당시 장성지역에는 그와 같은 토성이 여럿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장성(長城) ; 이(李), 서(徐), 유(兪), 공(孔), 노(魯)
•진원(珍原) ; 박(朴), 오(吳), 안(安), 문(文)
•삼계(森溪) ; 주(周), 최(崔), 손(孫), 성(成), 공(公), 전(田)

지역의 크기에 비하여 매우 많은 토성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만큼 다양한 세력이 서로 얽혀 있었던 셈인데, 이는 곧 당시 장성지역에 주변을 압도할 만한 대호족(大豪族)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말·고려초기의 장성지역에는 중심이 될 만한 큰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그만그만한 크기의 중소호족(中小豪族)들이 상호 견제하고 협조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나 않았는가 여겨지는 것이다.

장성처럼 좁은 지역 내에 그처럼 많은 토착세력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농민들의 처지를 매우 어렵게 만드는 일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토착세력의 숫자가 많은 만큼,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농민들에 대한 수취도 더욱 가중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장성지역에는 농토를 떠나 유망하거나 또는 도적의 무리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직하다. 다음의 자료를 살펴 보자.반등산(半登山)은 고창현(高敞縣)의 동쪽 5리에 소재하는 현의 진산(鎭山)이다. 신라의 말기에 도적이 이 산에 터를 잡고서 크게 일어나니, 많은 양가(良家)의 자녀들이 붙잡혀갔다. 장일현(長日縣)의 어느 여성도 그 붙들려간 속에 들어 있었거니와, 남편이 곧바로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자 그것을 풍자하는 노래를 지었다. 그 노래 이름을 방등산가(方等山歌)이라 이르는데, 이 방등이라는 말이 바뀌어 반등으로 되었다. 장일현은 아마도 장성현(長城縣)이 아닌가 의심된다.

장성의 북서쪽에 우뚝 서 있는 방등산에 얽힌 설화이다. 통일신라의 말엽, 그러니까 호족이 각지에서 할거하던 즈음 큰 도적떼가 이 산을 근거로 자주 장성지역을 약탈하러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설화인 만큼 그 모든 것을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당시 전국적으로 그러한 일이 늘상 벌어지고 있었음을 상기할 때, 장성지역이라고 하여 그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을 듯하다.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위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하여 하등 이상히 여길 일은 아니지 않을까 헤아려지는 것이다.

당시 방등산에 터를 잡고 있었다는 도적떼는, 장성을 포함한 인근의 고을에서 유망한 농민들로 구성되었음직하다. 전통시기의 도적집단이 으레 농토에서 이탈한 농민을 주요 구성분자로 하였으며, 주로 본래의 연고지 부근에서 활동하곤 하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러하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신라말·고려초 장성지역 농민들의 삶은 매우 고단한 편이었다. 그리하여 농토를 떠나 유망하는 농민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하였는데, 그들 중 일부가 방등산에 모여들어 도적의 무리에 들어가서는 떼를 지어 장성을 포함한 인근의 고을에 출몰하였던 것이 아닌가 헤아려지는 것이다. 위의 방등산가(方等山歌)와 같은 노래가 지어져 널리 불려졌던 것도,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의 일이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장성지역을 휩쓸던 소용돌이가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된 것은 견훤이 등장하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무진주에 터를 잡고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바로 이웃에 위치하는 장성지역의 불안정한 상황을 모른 체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 이르는 말이다.

견훤은 상주(尙州) 내지는 광주(光州) 지방의 호족 출신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처음 경주에 들어가 중앙군이 되어, 서남해 즉 현재 전남지방의 해안을 방수(防戍)하도록 파견되었다. 여기에서 공을 세워 비장(裨將)에 오르는 등 출세의 길을 연 그는, 때마침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 틈을 타 무진주를 점령하고서는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진성여왕 3년(889)의 일이었다. 그리고는 의자왕의 원한을 갚는다는 구호 아래 스스로 왕이라 칭하더니(진성여왕 6, 892), 나아가 완산주(全州)로 근거를 옮겨 국호를 후백제라 하고 정치제도를 정비하는 등 국가의 틀을 갖추었다.(효공왕 4, 900)

견훤이 광주에서 새로운 정권을 세운 이래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장성지역은 후삼국시기 내내 후백제의 판도 안에 들어 있었다. 끝까지 후백제에 충성을 다하였다고 할 수가 있겠는데, 그리하여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함에 미쳐서는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루어야만 하였다. 통일신라시기에는 갑성군(岬城郡)이라는 이름으로 진원현(珍原縣)과 삼계현(森溪縣)을 영현(領縣)으로 거느리는 큰 고을이었던 장성이, 고려시기에 들어서는 이웃 영광군(靈光郡)에 예속된 일개 속현(屬縣)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통일신라시기의 무진주 치소이자 후백제의 초기 수도였던 광주가, 고려왕조에 들어 해양현(海陽縣)으로의 격하를 감수해야만 하였던 것에 비견되는 일이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왕조에서 후백제 편에 섰던 지역을 차별한 데 따르는 일이었음은 물론이다. 장성이 지방관도 없는 속현의 설움에서 벗어난 것은 먼 훗날(明宗 2년, 1172)에 감무(監務)가 설치되면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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