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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선사시대 및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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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한의 성립과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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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은 지석묘와 석관묘가 성행하였던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한국 중서남부지역에서 성립된 최초의 역사적 실체라 할 수 있으며 54개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문헌기록에 남아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각 소국들의 위치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의 구체적인 면모들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장성지역을 기반으로 하였던 마한 역시 구체적으로 어떠한 소국이었는지에 대해 결론이 내려져 있지 않다. 마한 54개국 가운데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이 진원지역에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구사오단국은 김제의 금구에 있었다고 보고 장성지역을 고랍국(古臘國)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마한에 대한 문헌기록이 제한된 상황에서는 문헌을 토대로 한 연구 역시 제약될 수 밖에 없는 만큼 고고학 자료를 기반으로 마한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점을 검토해 보고 나서 마한 당시에 장성지역이 어떠한 면모를 띠고 있었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마한은 서울지역에서 건국된 백제의 세력확장 과정에서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에 병합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바 마한이 백제에 병합된 시기 문제는 마한사와 백제사를 구분짓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만큼 신중하고도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마한이 성립하여 발전해 나가는 초기과정과 백제의 건국 이후 변모하는 중기과정을 정리하고 나서 백제에 병합되는 후기과정과 그 시기에 대해 살펴본 다음 그와같은 변화에 있어서 장성지역의 마한사회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가늠해 보도록 하겠다.

(1) 마한사회의 성립과 발전

마한은 영역에 대해서는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 걸쳐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마한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견들이 있다. 그러나 고조선 준왕이 한지로 도망와서 한왕을 칭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기원전 2세기초에는 이미 마한이 성립해 있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마한은 기원전 3세기 중엽경의 세형동검Ⅱ기부터 기존의 비파형동검문화와는 다른 샤마니즘(Shamanism) 요소가 특히 강한 새로운 청동기문화가 번창하면서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후 중국에서 전국(戰國)계 철기가 들어옴으로써 대동강유역에서부터 초기철기시대로 접어드는데, 충청 전라지역에서는 여전히 기존의 청동기문화가 번성하는 반면 경상도지역에서는 점차 철기문화가 청동기문화를 대체해 나간다. 경상도지역의 철기문화는 기원전 108년에 멸망한 위만조선 후기의 혼란을 피하여 내려온 고조선계 유민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전해 나간 것으로 인식되는데 이 남천세력은 당시 확고한 청동기문화가 자리잡고 있던 충청과 전라 지역의 마한세력을 피해 경상도지역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마한권역에 철기문화가 확산되는 것은 기원전후경으로써 한강유역권, 아산만권, 금강유역권, 영산강유역권을 중심으로 발전해 나간다.

1) 한강유역권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강유역권에서는 철기 수용 이후 상당한 기간 동안 두드러진 세력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지역이 북으로는 낙랑으로 대표되는 한군현세력, 동으로는 예(濊)세력, 남으로는 마한세력 사이에서 완충지대로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2세기 후반경이 되면 서울 강남일대에 토광목관묘를 쓰는 집단이 자리잡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는 석촌동 3호분 일대에서 조사된 토광목관묘를 들 수 있는데 토기, 칠기 등의 부장품으로 미루어 서북한의 고조선계 토광묘세력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한군현의 통제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공백지대로 남아있었던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 후 3세기에 들면서 매장주체부가 지상에 있고 다장이면서 기존의 토광묘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대규모의 분구에 즙석이 부가되고 흑색마연토기가 부장된 즙석봉토분이 등장한다. 이 새로운 묘제는 즙석이라는 요소와 흑색토기를 감안하여 고구려의 영향으로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중국 양자강유역의 토돈묘(土墩墓)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최근 마한의 대표적인 기종이라고 할 수 있는 양이부호를 중국 강서지역의 후한대 평저양이부호가 충남 서부지방에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는데 직접적인 교류의 결과인지 낙랑을 통한 간접적인 교류에 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당시 마한과 중국 강남지역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견해일 것이다.

2) 아산만권

아산만을 낀 충남 북부지역은 세형동검기 이래 3세기대까지 마한권의 핵심지역으로 발전하였는데 특히 기원 후 1세기말이나 2세기초부터 새로운 면모로 바뀌는 것으로 판단된다. 대표적인 예로 청당동 유적을 들 수 있는데 청당동의 토광묘에는 목관이나 목곽이 안치되어 있고 대부분 눈썹형의 주구가 갖추어져 있다. 부장품으로는 회색 타날문 단경호와 적갈색 심발형토기가 세트를 이루고 있으며 환두대도, 환두도자, 철모 등의 철기들과 칠기의 존재 등 서북한지역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주고 있어 서북한지역의 토광묘문화가 파급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후 청당동에서는 지속적인 발전과정이 관찰되며 3세기 전반대에 흔히 나타나는 마형대구, 곡봉형대구, 금박옥 등은 청당동을 대표로 하는 마한세력이 대외교섭권으로 상징되는 정치적 주도권을 갖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3세기 중후반대의 청당동 마지막 단계부터는 서울 석촌동고분군에서 보이는 백제 토기류가 나오면서 기존의 전통이 끊어지고 있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서울에서 출범한 백제의 본격적인 남진과 관련된 것이다.

3) 금강유역권

최근 금강유역권에서는 주구묘로 불리는 새로운 자료가 조사되고 있어 1­3세기대의 마한에 대한 연구에 활기를 불어 넣고 있다. 금강유역권의 주구묘는 한강유역권이나 아산만권의 토광묘와는 다른 배경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 등장 배경이 주목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주구의 기능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구의 기능 문제에 있어 채토, 배수, 묘역구분 등 여러 가지가 거론된 바 있지만 필자는 채토목적이 가장 크고 배수나 묘역구분은 부차적인 것이었다고 본다.

주구묘의 주구가 원래 분구 조성을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하면 초기 주구묘의 분구는 그다지 높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마한권역에서 분구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이 주구묘의 단계부터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중국의 경우 『예기(禮記)』에 보면 '古也墓而不墳(고야묘이불분)'이라는 기록이 있어 공자 이전의 상, 서주시대의 묘에는 봉분이 없었다고 생각되며 실제로 춘추시대에 해당하는 무덤 가운데 봉분을 갖춘 고분이 조사된 바 없다. 그러나 요녕성 우하량(牛河梁)과 절강성 반산(反山) 등지에서 신석기시대의 분구를 갖춘 고분이 조사되고 있어 『예기』의 기록은 당시 중원지역에 국한될 뿐 주변지역에는 해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마한의 주구묘와 흡사한 일본의 방형주구묘에 대해서는 중국 진대 이주민과 관련된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견해가 있다. 일본의 방형주구묘는 마한의 주구묘와 마찬가지로 매장주체부가 확인된 예가 많지 않지만 기존의 전통과는 무관한 것으로 인식되면서 외부로부터의 유입을 생각하게된 것이다. 마한의 주구묘도 기존의 묘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으로서 서해안을 따라 광범위한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볼 때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구체적인 기원지와 유입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 무어라 단정하기 어렵다.

4) 영산강유역권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한 전남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를 중심으로 지석묘가 성행하였지만 기원전·후부터는 지석묘의 축조가 중단되면서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묘제가 알려지지 않고 3세기대부터 대형옹관묘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함평 만가촌 등 주구를 갖춘 고분들이 계속 조사되고 있어 금강유역권과 함께 주구묘를 특징으로 하는 동일한 문화권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금강유역권의 방형평면의 주구묘와는 달리 사다리꼴을 띠는 주구묘들이 많은 점에서 금강유역권의 주구묘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 또한 광주 신창동 옹관묘에서 보듯이 기원전·후까지 올라가는 이른 시기부터 소형옹관묘가 성행하였다는 점이나 나주 대초리나 화순 용강리 등지에서 조사된 위석목관묘 등은 금강유역권과의 차이를 말해주는 예가 될 것이다.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한 전남지역에서 나타나는 이 시기의 다른 특징으로는 패총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패총의 형성 계기는 기원전·후경부터 300년 사이에 해당하는 전세계적인 한랭기에 기온 저하로 인한 농작물 감소를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 청동기시대의 세형동검문화는 기존의 비파형동검문화에서 발전한 것이라기 보다는 주거지의 평면형태, 점토대토기, 매장시설 등에서 중국 요서지역의 하가점(夏家店) 상층문화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특히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소형토기, 토제국자, 복골 등 이 지역 원삼국시대 패총에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있어 상호 관련성이 지적되고 있다. 또한 복골이 점복에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던 시기를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4세기 전반으로 보고 중국 요서지역의 것과 제작 수법과 재료가 유사하기 때문에 중국 동북지역 철기문화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한 것으로 추정한 견해 등은 마한의 출범 이후 백제 건국 이전까지 마한지역이 중국 요동지역과 적지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2) 백제의 건국과 마한사회의 변천

1) 백제의 건국

백제의 건국세력이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이었다는 사실은 서울 강남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고구려식 적석총을 통해 입증된다. 이 적석총 세력들은 토광묘 계통의 이주민들이 한강유역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한 배경 속에서 한강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석총을 쓰는 고구려계 유이민들이 언제 본거지를 출발해서 어떠한 경로를 거쳐 서울지역에 진출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다. 백제의 건국과 관련해서 중요한 점은 언제 적석총계 이주민이 한강유역으로 진출하였는가 하는 문제보다 이들이 언제부터 서울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고대국가로서의 백제를 출범시켰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기존의 토광묘계통의 묘제들이 적석총의 영향을 받아 변화해 나가는 한편 다양한 규모로 분화 발전해 나가는 점이 관건이라고 판단되며, 3세기 중엽경부터 서울 강남 일대에서는 적석총계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고대국가로서 백제가 출발하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한강유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적석총 세력은 고구려의 발전된 국가체제를 경험하고 있었던 만큼 자력에 의한 고대국가의 건국이 불가능하지는 않았겠지만 석촌동 1호분을 통해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토광묘를 사용하는 선주민에게서 왕비를 취한 것으로 추정되는 등 기존의 토광묘 세력과 연합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 연합세력은 하남위례성을 축조하는 등 고대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기틀을 다지는 한편 서북한의 한군현과 서남한의 마한, 동쪽의 예 등 주변 세력과의 경쟁을 통해 영역의 확장을 시도하였다.

2) 마한사회의 변천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서 성장하고 있었던 마한은 3세기 중엽경 한강유역에서 건국된 백제의 영역 확장에 따라 점차 그 세력이 축소되는 변화를 겪게 된다. 3세기 중엽경 서울 강남일대에서 본격적인 발전을 시작한 백제는 3세기 후반까지 목지국이 있었다고 판단되는 충남 아산만일대와 한강중류지역을 장악하였을 뿐 금강 하류지역까지 직접 지배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주·부여와 익산 등을 포함하는 금강하류지역에는 4∼5세기대에 석곽묘로 대표되는 토착세력이 존재하였는데 석곽묘의 규모로 보아 어느 지역에도 거대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입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국에서 도입된 청자를 비롯한 위신재를 통해 유추되어 왔듯이 백제와의 관련성은 인정되며 소위 간접지배의 형태가 그러한 관계를 표현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한편 4∼5세기에 걸치는 시기동안 그 이남 지역은 백제와의 관계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시기에 전북 동부지역은 석곽묘를 쓰는 집단이 가야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생각되며, 전북 서남부 정읍·부안지역과 전남의 영산강유역에는 거대한 분구 윗쪽에 옹관과 석실을 쓰는 독자적인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영산강유역의 석실봉토분을 보면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에 해당하는 것은 백제식 석실봉토분과는 전혀 다른 영산강식 석실봉토분일 뿐 백제식은 6세기 중엽 이후부터서야 축조되기 시작한다. 또한 영산강유역에서는 일본식 고분인 장고분(長鼓墳, 前方後圓形古墳)이 5세기중엽부터 6세기중엽까지 축조되었는데 그 피장자에 대한 논란은 남아있지만 이 지역이 백제와는 무관한 독립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축조가 가능한 일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거의 없다.

3) 마한사회의 해체

전남지역과 부안 이남의 전북 서남부지역은 백제식석실과는 전혀 다른 영산강식석실을 사용하는 동일한 문화권으로서 그 역사적 실체는 마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6세기 중엽경부터는 이 지역에서도 백제식 석실이 축조되면서 백제 나솔 이상의 고위 관리가 장착했던 은화관식이 출토되는 예가 보인다. 또한 앞서 언급한 장고분의 축조가 중지된다. 이와같은 고고학 자료들은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남아있었던 마지막 마한 세력들이 백제에 병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한 마한사회가 6세기 중엽경에 이르러 백제에 병합되었을 것이라는 고고학적 판단은 백제의 22담로 문제와 같은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반증된다고 할 수 있다. 『양서(梁書)』에 전하는 백제의 22담로는 521년에 백제 사신이 중국 양나라에 전한 백제의 지방조직으로 알려져 있는데 백제 멸망시 37개 군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필자는 『양서』에 전하는 6세기초의 22개 담로는 전북 서남부와 전남을 제외한 영역일뿐이며, 6세기 중엽경 이지역이 백제에 병합되고 15개 군으로 편성되어 기존의 22담로에 더해짐으로써 37개 군으로 재편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영산강유역의 마한사회가 6세기 초까지 백제의 위협 아래에서도 독립된 세력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과의 밀접한 교류관계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문제에 있어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앞에서 살펴본 백제와 마한과의 관계이다. 백제의 성장과 함께 마한의 소국들이 하나하나 백제에 병합되는 과정에서 각 마한 소국의 지배세력의 일부는 백제에 흡수되는 한편 다른 일부는 영산강유역을 비롯한 그 남쪽이나 일본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한 마한세력은 일본으로 진출한 마한세력을 매개로 하여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백제의 남진을 저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북구주지역에는 영산강식석실분과 상통하는 석실분이 분포하고 있어 북구주지역과의 유대관계가 특히 밀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영산강유역에서 흔히 출토되는 유공광구소호는 기내(畿內) 지역에서도 적지 않게 출토되고, 원통형토기 역시 기내지역과의 관련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섞여 있는 등 영산강유역 마한세력과 일본과의 관계는 북구주지역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영산강유역 마한사회는 왜와 유대관계를 유지하며 발전하는 가운데 백제가 부여로 남천하면서 영산강유역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일본 북구주 중심의 마한 연계세력이 기내의 대화정권에 통합되는 변화가 일어난다. 이에따라 영산강유역의 마한세력은 남진하는 백제와의 무리한 전쟁보다는 평화적인 방법을 택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옹관묘, 영산강식석실묘, 백제식석실묘가 한 분구 안에 공존하고 있는 나주 복암리 3호분의 5호·16호 석실에서 출토된 백제 관식은 기존의 마한세력자가 백제에 병합된 이후에도 고위 관직을 받았던 사정을 잘 반영하고 있는 중요한 고고학자료일 것이다.

2. 마한의 사회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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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비롯한 몇몇 중국의 사서에는 단편적이나마 마한 사회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외국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마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담고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므로 고고학 자료와 비교하면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마한은 목지국을 비롯하여 54개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국은 만여호, 소국은 수천호여서 모두 10만여호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마한의 소국들은 평균 2000여호에 10,000여명이 거주했던 사회로 추정되는데 당시에 해당하는 마을들의 규모는 순천 대곡리, 함평 소명동, 광주 쌍촌동 등 비교적 큰 마을이 100여호에 달하였던 만큼 각 소국은 30개 이상의 마을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의 가옥은 초가집으로서 그 모양이 마치 무덤과 같다는 기록은 지금가지 발굴조사된 당시의 가옥들이 모두 움집이거나 반움집인 점과 통하고 있다.

마한인들은 곡식을 심고 누에를 칠줄 알고 베를 만들었고, 해마다 5월에는 파종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농사일이 끝나는 10월에도 마찬가지라는 기록이 있는데 광주 신창동유적에서 1m가 넘는 벼껍질 퇴적층과 탄화미, 보리, 밀, 외, 박 등의 재배식물 자료와 함께 수 많은 목제 농기구들이 출토됨으로써 당시에는 벼를 중심으로한 다양한 농경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신창동유적에서는 베를 짜는 도구도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폭이 30cm에 달하는 베를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마한 사회에서의 제사는 대단히 중요한 행사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한 형성 당시에 이 사회는 이미 무속적 성격이 대단히 강한 제정일치 사회였음이 밝혀졌고, 철기의 수용 이후 새로이 복골과 함께 제사용 토기들이 출토되고 있어 점복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복이나 장식에 있어서는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가죽신을 신으며 금이나 은은 보배로 여기지 않지만 구슬을 귀하게 여겨 목이나 귀에 장식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신발꼴과 여러 유적에서 흔히 출토되는 수 많은 구슬들은 바로 그러한 사실들은 입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해남 군곡리나 보성 금평유적에서는 유리옥을 주조하기 위한 용범도 발굴된 바 있다.

한편 마한에서는 사람을 묻을 때 관은 쓰지만 곽은 없으며 소와 말은 탈 줄 모르고 모두 장례에 써 버린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내용들 역시 지금까지 발굴된 3­4세기대까지의 고고학 자료를 통해 입증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5­6세기에 걸쳐서는 관 외에도 곽이라고 할 수 있는 석실이 사용되었으며 마구들도 출토되는 만큼 이러한 기록이 남겨진 이후 마한 사회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장성지역의 마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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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은 진한, 변한과 함께 삼한을 구성한 역사적 실체이지만 문헌 기록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상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로 발전한 진한이나 가야로 발전한 변한과는 달리 마한은 고구려계 세력이 남하하여 건국한 백제에 의해 점차 병합되는 변화를 겪었다.

그러므로 백제의 발전은 곧 마한의 쇠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장성을 포함한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남아있었던 마한세력이 백제에 병합된 시기 문제는 마한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백제사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4세기 중엽 백제 근초고왕대에 영산강유역이 백제에 병합됨으로써 마한사회가 해체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그러나 그 근거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고학적으로 본 마한은 장성지역을 비롯한 영산강유역을 기반으로 6세기초까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해 나오면서 주변지역과 교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장성지역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영천리 석실분은 그와 같은 사실을 밝히는데 필요한 핵심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장성지역에서 확인된 고고학 자료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지석묘이다. 지석묘는 석관묘와 함께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매장시설이며 마한은 기원전 3세기 중엽경 청동기시대의 세형동검문화를 기반으로 성립한 것인 만큼 장성지역에서 지석묘를 축조한 세력들도 점차 마한사회로 발전해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전 기간동안 한국의 거의 전지역에서 성행하다가 기원전후경에 소멸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석묘에 이어서는 비교적 다양한 매장유적이 나타나는데 마한지역에서는 1­3세기에 걸쳐 주구묘가 공통적인 묘제로 정착되며 지금까지 전남지역에서도 상당수의 유적이 조사된 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장성지역에서는 주구묘가 조사된 바 없어서 1­3세기대의 면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삼서면 학성리 지석묘에서 타날문토기편이 출토된 바 있는데 후대에 교란된 것은 아닐 것으로 판단되는 만큼 장성지역에서는 지석묘가 기원 후까지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기원 3세기대부터는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대형옹관묘가 성행하면서 마한의 독자적인 면모가 더욱 뚜렷해진다. 장성지역에서는 남면 평장리와 행정리, 삼서면 유평리, 진원면 진원리 등지에서 저분구묘가 확인된 바 있는데 아직까지 발굴 조사된 유적이 없기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가운데 일부 고분들은 대형옹관묘와 병행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 후반부터는 새로이 석실묘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장성지역에서도 장성읍 영천리, 삼서면 학성리에서 석실묘가 발굴된 바 있는데 학성리 석실분들은 백제식 석실묘로서 6세기 중엽 이후에 해당하는 것인 만큼 마한시대와는 무관하다. 또한 장성읍 기산리, 삼서면 대곡리 등지에서 석실묘가 확인된 바 있는데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바 없지만 입지로 보아 백제식 석실묘로 추정된다.

장성읍 영천리 석실분은 6세기 중엽경에 해당하는 영산강식석실묘의 마지막 단계에 속하는 고분으로서 당시 장성지역의 사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고분은 규모가 직경 20m에 달하는 것으로서 전남지역의 대표적인 영산강식석실묘의 하나이다. 오래 전에 이미 도굴된 것이어서 남아있는 유물들이 많지 않지만 수습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들을 보면 백제와는 무관한 것들이어서 석실의 구조와 함께 그 고분의 피장자가 현지의 유력 세력자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장성지역의 마한사회는 6세기 초경까지 마한의 전통을 유지하여 나왔다고 할 수 있으며 6세기 중엽 이후부터 백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병합 이전 영산강유역권의 마한사회는 영암 시종이나 나주 반남에 집중된 대규모 옹관봉토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영산강하류쪽에 그 중심을 두고 있었던 만큼 영산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장성지역은 마한시대 동안 외곽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백제시대로 넘어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임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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