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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선사시대 및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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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제의 통치체제와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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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는 마한을 구성한 54개 성읍국가 중의 하나인 백제(伯濟)가 성장 발전한 나라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하여 660년에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의 역사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대략 6시기로 나누어진다. 시조 온조왕에서 사반왕까지는 성읍국가적 질서가 남아 있는 성읍국가-연맹왕국 시기로, 그리고 고이왕에서 계왕까지는 연맹왕국에서 증앙집권체제에 이르는 과도기인 5부체제 시기로 보고 있다. 또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시기에 해당하는 근초고왕 이후는 다시, 한성시대 전기(근초고왕∼아화왕)와 후기(전지왕∼개로왕) 및 웅진시기(문주왕∼무령왕)·사비시기(성왕∼의자왕) 등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

백제의 통치체제는 위와 같은 백제의 역사적인 추이에 따라 정비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제 그것을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어 간단히 살펴 보도록 하겠다. 그런 다음 그와 같은 체제 속에서 장성이 차지하는 위치를 알아 보려는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지방통치체제와의 관련 속에서 장성의 그것을 더욱 눈여겨 본다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백제의 관등제도는 고이왕대에 가서 비로소 성립된다. 앞서 연맹왕국단계에 나타나는 좌보(左輔)와 우보(右輔)는, 관등과 관직이 분화되기 이전의 말하자면 뭉뚱거려 중앙관제라고 칭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고이왕대에 들어와 중앙집권화가 적극적으로 추진되면서, 중앙귀족화된 세력들을 왕경의 일정한 지역으로 편제하는 5부(東·西·南·北·中部)가 나타나고, 그들 중앙귀족을 서열화하여 상하존비를 구별지어 주는 관등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등장한 관등제도는 최상층의 좌평(佐平)을 비롯하여 솔(率) 계통과 덕(德) 계통의 상위 관등과 좌군(佐軍)·진무(振武)·극우(剋虞) 등의 하위 관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이왕대를 거쳐 근초고왕대에 이르면서 백제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완비하였다. 이 무렵 관등제도 또한 정비되었음은 물론인데, 솔계 관등이 달솔(達率)에서 나솔(奈率)까지, 그리고 덕계 관등이 장덕(將德)에서 대덕(對德)까지 각각 5개의 관등으로 분화되었다. 여기에 훗날 성왕이 사비 천도를 계기로 체제를 재정비하면서 문독(文督)과 무독(武督)을 더함으로써, 백제의 16관등제가 완비되기에 이르렀다. 다음의 [표 2-1]은 그처럼 정비된 관등제도를 그 명칭과 함께 복식까지 나타낸 것이다.

[표 2-1] 백제의 16관등과 복색

[표 2-1] 백제의 16관등과 복색 - 관등, 복색을 나타낸 표
관 등복 색
(1) 좌평자복
(2) 달솔 (3) 은솔 (4) 덕솔 (5) 한솔 (6) 나솔자복
(7) 장덕 (8) 시덕 (9 )고덕 (10) 계덕 (11) 대덕비복
(12) 문독 (13) 무독 (14) 좌군 (15) 짐누 (16) 극우청복

이기백, 『한국사신론』, 신수판(일조각, 1990) 81쪽 표 전재

이후 백제의 관등제도는 말기로 가면서 문란해져, 차츰 운영상의 파행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대좌평(大佐平)과 같은 특진의 관등이 나타나고, 의자왕에 의해 국왕의 서자(庶子) 41명이 좌평으로 임명되는 것과 같은 데서 그것을 알 수가 있다.

16관등 중 제1품인 좌평은 처음 그 정원이 1명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지왕대의 상좌평 설치를 시작으로 상·중·하좌평으로 분화되면서 정원이 늘어났으며, 사비시기에 와서 마침내 6좌평으로 정비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성격도 관등에서 점차 관직적인 것으로 변화해 갔다. [표 2-2]는 그러한 6좌평의 명칭과 직무를 정리한 것이다.

[표 2-2] 6좌평의 명칭과 기능

[표 2-2] 6좌평의 명칭과 기능 - 『구당서』백제전 , 『삼국사기』고이왕을 나타낸 표
『구당서』백제전『삼국사기』고이왕
내신좌평(內臣佐平)장선납사(掌宣納事)장선납사(掌宣納事)
내두좌평(內頭佐平)장고장사(掌庫藏事)장고장사(掌庫藏事)
내법좌평(內法佐平)장예의사(掌禮儀事)장예의사(掌禮儀事)
위사좌평(衛士佐平)장숙위병사(掌宿衛兵事)장숙위사(掌宿衛事)
조정좌평(朝廷佐平)장형옥사(掌刑獄事)장형옥사(掌刑獄事)
병관좌평(兵官佐平)장재외병(掌在外兵)장외병마사(掌外兵馬事)

『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95, 168쪽 표 전재

다음으로 제2품 달솔은 대솔(大率)이라고도 하였으며, 정원이 30명이었다. 제3품 은솔 이하 제16품 극우까지 따로 정원이 정해져 있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백제의 지배계급 내에서 달솔을 소지한 귀족들의 정치적 비중이 그만큼 컸음을 알 수가 있다.

한편 백제의 관등제도는 신분제도와의 연계 속에서 운영되었다. 16관등의 명칭이 좌평과 여러 '솔' 및 여러 '덕' 그리고 문독 이하의 셋으로 구분될 뿐만 아니라, 이들이 각기 자복(紫服)·비복(緋服)·청복(靑服)으로 그 복색이 3구분되어 있는 데서 그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신라 골품제도하에서 진골 이하 6·5·4두품이 각각 나아갈 수 있는 관등의 제한과, 자복·비복·청복·황복(黃服)의 복색 구분이 서로 일치하고 있음을 참고할 일이다. 말하자면 백제의 지배신분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자복을 입으면서 1품 좌평에서 6품 나솔까지의 관등을 소지할 수 있는 제1귀족층과, 비복을 입고 7품 장덕에서 11품 대덕까지의 관등에 나아갈 수 있는 제2귀족층, 그리고 청복을 입고 문독 이하 극우에 이르는 관등을 소지할 수 있는 하급 귀족층 등이 그것이다.

백제의 중앙 행정관부로는 6좌평과 함께 22부(部)가 있었다. 이 22부는 내관 12부와 외관 10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관은 궁중과 왕실의 사무를 담당하는 관청이었으며, 외관은 일반정무를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일반행정을 담당하는 외관보다 궁중의 사무를 처리하는 내관의 숫자가 더 많은 것은, 왕실업무의 방대함과 함께 정치가 왕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외관 10부 중 핵심부서인 사군(司軍 ; 司馬)·사도(司徒)·사공(司空)·사구(司寇) 등이 {주례}에 나오는 중국 고대의 관직명과 동일한 것도 특이한 점으로서, 이는 당시 중국의 북주가 주례주의에 입각하여 왕권 중심의 관제를 정비하였던 데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아래의 [표 2-3]은 그러한 22부의 명칭 및 그 직무를 정리하여 작성한 것이다.

[표 2-3] 22부의 명칭과 직무

[표 2-3] 22부의 명칭과 직무 - 내관 12부, 직무, 외관 10부, 직무를 나타낸 표
내관 12부직 무외관 10부직 무
전내부국왕근시(?)사군부병마군사
곡부곡물조달사도부학문교육
육부육류조달사공부토목건축
내량부내창재정사구부형벌사법
외량부외창재정점구부호구파악
마부어마관리객부외교관계
도부도검관리외사부인사관계
공덕부사원관리주부직물징수(?)
약부약물의료일관부천문점술
목부목공건조도시부시장교역
법부예의업무--
후궁부후궁업무--

『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95, 172쪽 표 전재

백제시기 장성의 존재 양상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것이 그 지방 통치체제라 함은 앞서 말한 대로이다. 백제가 성읍국가―연맹왕국단계였던 온조왕∼사반왕대는 말할 것도 없고 5부체제였던 고이왕∼계왕대에 이르기까지도, 장성은 백제가 아닌 마한의 영역에 속해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장성이 간접적이나마 백제와 관계를 맺었던 것은, 일러야 4세기 후반인 근초고왕 말년 무렵의 일이 아니었던가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를 조심스럽게 해석한 연구에 따르면, 근초고왕 24년(369) 무렵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오늘의 전남지역에 잔존해 있던 마한세력을 정벌하였다고 한다. 근초고왕과 그의 아들 귀수(貴須 ; 近仇首王)가 군사를 이끌고 내려와 왜군의 협조 아래 가야를 끌어들여 동맹국으로 삼는 한편, 마한 잔여세력으로 추정되는 침미다례(침彌多禮)와 비리(比利) 등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의 침미다례는 전남지역의 마한 잔여세력 중 가장 중심적인 나라로서, 282년(太康 3) 서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신미국(新彌國)과 동일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여겨지고 있다. 결국 대략 4세기 전반에 노령산맥 이북지역까지 진출하였던 백제가, 강력한 정복정책을 추진하던 근초고왕대 말년에 가서야 비로소 현재의 전남지역으로 그 손길을 뻗칠 수가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장성이 백제의 영역에 포함된 것도, 아무리 빨라야 근초고왕대 말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백제에 의해 이룩된 마한 통합은, 그 내부의 토착세력을 온존시킨 가운데 그들을 통하여 공납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머물렀던 것 같다. 영산강 유역에서 5세기에 이르도록 왕릉에 버금가는 대형 옹관묘가 조성되었으며, 또한 그 중에서 금동관을 비롯하여 금동제 신발과 큰 칼(大刀) 등 높은 수준의 부장품이 출토되기도 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근초고왕대의 마한 통합은 불완전한 것이어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등의 일원적인 지방통치로까지는 연결되지를 못하였던 것이 아닌가 헤아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추측이 크게 어긋난 것이 아니라면, 4세기 후반 무렵 장성지역도 또한 지역 토착세력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가운데 백제의 간접적인 영향 아래 놓여 있었을 것으로 간주하여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백제가 통치조직을 정비하여 지방에 대한 본격적인 직접지배에 나선 것은 담로( 魯)를 설치하면서부터였다. 담로의 성격에 대해서는, "읍을 일러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개의 담로가 있으며, 모두 자제(子弟)와 종족(宗族)으로 하여금 분거하게 하였다"라고 하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담로가 중국의 군현과 같은 지방통치조직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담로제가 시행된 것은 한성시대 후기(405∼474) 내지는 웅진시기(475 ∼522)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니까 대략 5세기 혹은 늦어도 6세기 초반 이전에 담로제가 나타났던 셈이다.

담로제는 백제가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강화시켜 감에 따라, 종래 성읍국가를 구성하던 국읍―읍락을 성으로 재편하면서 성립한 제도였다. 담로란 그처럼 재편된 지방의 큰 성(大城)을 중심으로 일정한 지역을 다스리도록 편제되었던, 이를테면 거점지배적 성격의 지방지배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담로제의 실시는 종래의 지역 수장층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그들 중 일부는 중앙귀족으로 전화되어 간 반면, 나머지는 재지세력으로서 지방관을 보좌하는 지위로 격하되었다. 하지만 비록 재지세력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지역 지배세력으로서의 그들의 기반이 완전히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지역내 일반민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상당 부분 온존되어 있었다. 담로제가 이전의 지방통치체제에 비해 한 단계 진전된 조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토착세력의 권한을 중앙의 통치권으로 완전히 흡수 편제하기에는 아직 그 힘이 미치지 못하였던 셈이다. 앞서의 『양서』백제전에 나와 있듯이, 백제에는 담로가 22곳이 있었다. 이들 담로에는 왕족이거나 혹은 대성8족(大姓八族 : 沙, 燕, 협, 解, 眞, 國, 木,백)과 같은 유력한 귀족가문 출신이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 '자제종족'으로서, 대략 '솔'급 이상 좌평의 관등을 지닌 이들이 담로를 통치하도록 파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담로체제 아래에서 장성지역의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거점지배 방식이라는 담로제의 일반적인 성격으로 보거나, 혹은 마한의 잔여세력이 온존해 있음으로 해서 가장 뒤늦게 백제 영역으로 편입되었던 사실 등을 감안 할 때, 담로제가 시행되던 5세기 무렵까지도 장성지역에 대한 백제 중앙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경으로부터 담로에 파견된 지방관의 지배를 받는 형식을 취하였겠지만, 장성지역의 일반민들은 여전히 마한 이래의 토착세력에 의해 더욱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다.

주로 웅진시기에 실시되었던 담로제는, 성왕(523∼553)이 사비로 천도(성왕 16, 538)하면서 새로이 정비되었다. 백제의 가장 완비된 지방통치조직이었던 방(方)―군(郡)―성(城 ; 縣, 村)체제가 그것이었다. 방은 백제에서 가장 커다란 지방행정구역으로써, 전국을 크게 5구역으로 나눈 동방·서방·남방·북방·중방의 5방이 있었다. 이 5방은 사비시기 말에는 5부로 표기되기도 하였는데, 큰 방은 10개 군 그리고 작은 방은 6·7개 군을 각각 관할하였다. 방의 중심지 즉 치소는 방성(方城)이라 불렀으며, 그 장관으로는 방령(方領)이 파견되었다.

방령에는 흔히 달솔의 관등을 가진 중앙귀족이 임명되었고, 방령의 아래에는 그 임무를 보좌하도록 방좌(方佐)가 배속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5방에 관한 여러 사항을 정리하여 작성한 것이 [표 2-4]이다. [표 2-4]의 5방성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이 중방성인 고사성(古沙城)의 위치이다. 중방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왕경이 아닌 그보다 훨씬 남쪽의 고부에 위치하고 있어 이채로운 것이다. 5방제가 수도가 아니라, 당시 백제 영토의 지리상 중심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축으로 삼아 편제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아닌가 싶다. 왕경인 사비가 국토의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로서, 명칭으로나마 지방통치체제상의 중심축을 그 남쪽의 고부로 설정하였던 셈이다.

[표 2-4] 백제 사바시기의 5방

[표 2-4] 백제 사바시기의 5방 - 5방, 방성, 왕도 기준 방위 및 거리, 방성의 넓이, 병역, 방성의 추정지을 나타낸 표
5방방성왕도 기준 방위 및 거리방성의 넓이병역방성의 추정지
중방고사성남 260리방 150보1,200명전북 고부
동방득안성동남 100리〃 1리700∼1,000명충남 은진
남방구지하성남 360리〃 130보전남 구례(?)
서방도선성서 350리〃 200보?
북방웅진성동북 60리〃 1리반충남 공주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고대편〕, 일조각, 1982, 237쪽 표 전재

방의 관할 아래 있는 지방통치조직으로서 군이 있었다. 백제에는 모두 37개 군이 있었거니와, 각 군에는 대략 5·6개의 작은 성이 소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에 파견된 지방관은 군장(郡將) 혹은 군령(郡令)이라 불렸다. 보통 덕솔의 관등을 가진 중앙귀족이 임명되었는데, 하나의 군에 3명씩의 군장이 임명되었다. 복수의 군장을 두었던 것은, 군사와 행정 등의 여러 업무를 분담하도록 하기 위해 나온 조처가 아니었던가 생각되고 있다.

방과 군의 통할을 받는 하위 지방행정구역이 성(城)이었다. 현(縣)으로 표기되기도 하던 이 성은, 종래 담로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였던 촌(村) 중에서 지역규모나 인구 또는 물산의 면에서 독립적인 행정구역이 될 만한 것을 분리하여 만들었다. 성에 파견된 지방관의 명칭은 성주(城主) 혹은 도사(道使)였다. "군 아래의 현에는 도사를 두었는데 또한 성주라고도 이름하였다"는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방통치조직은 군사조직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각 방성에는 700∼1200 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방령이 이를 직접 지휘하였다. 또한 방령의 휘하에 있는 군장들도 대략 방령과 유사한 규모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방령의 통솔을 받았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므로 방은 일종의 군관구적(軍管區的) 성격을 띠는 지방행정구역으로서, 그 장관인 방령은 방의 관할 아래 있는 6·7∼10여 군데의 군으로부터 동원한 병력까지 합하여 대략 7·8천∼1만여 명의 병력을 지휘하는 군사령관이기도 하였던 셈이다.

이상과 같은 방―군―성(현)체제는 종래의 담로제와는 매우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방이라고 하는 광역의 행정구역이 처음 설정되었다. 5방은 전국을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눈 것이고, 이 방이 중앙의 명령을 받아 하위의 조직에 전달하고 또 관할하는 역할을 하였다. 중앙과 지방을 이어주는 중간 기구가 설치됨으로 해서, 종래의 지방통치조직에 비하여 한 단계 진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둘째, 성(현)이라고 하는 하위의 지방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는 지역을 대폭 확대하였다. 사비시기의 백제에 설치되어 있던 성(현)은 모두 합하여 대략 200 내지 250곳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지역까지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치하였다는 의미로서, 재지 토착세력의 전통적인 세력기반이 얼마나 약화 축소되었을 것인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됨에 따라, 토착세력도 재편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셋째, 지방조직을 편제하면서 전정호구(田丁戶口)라고 하는 보다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였다. 종래 담로체제에서는 마한시기의 성읍국가를 기본 단위로 하였기 때문에, 각 담로의 세력이나 크기가 균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와서 방―군―성을 편제하면서는, 특히 200에서 250 곳에 이르는 많은 수의 성(현)을 설치하면서는, 전정과 호구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편제하였다. 보다 객관적인 기준에 근거하여 지역을 편제함으로써, 각 행정단위 사이의 크기에서 나타날 수 있는 편차를 대폭 줄이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6세기 전반 무렵 위와 같은 방―군―성(현)체제 하에서 현재의 장성지역에는 3개의 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옛 장성의 고시이현(古尸伊縣)과 진원의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 및 삼계의 소비혜현(所非兮縣) 등이 그것이었다. 이들 3현은 5방 가운데 전북 고부에 방성이 소재하는 중방 내지는 전남 구례에 방성이 있었던 남방 중의 어느 하나에 소속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장성지역민들은 이들 현(縣, 城)에 파견된 지방관인 도사(道使) 혹은 성주(城主)의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처럼 사비에서 온 중앙귀족이 직접 지역의 주민들을 지배하게 됨에 따라, 오랜 기간 주민을 통제해 오던 토착세력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의 약화를 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백제는 사비시기에 들어서면서, 전정과 호구라고 하는 객관적인 기준에 의거해서 지방통치조직을 재편하였다. 말하자면 전국 각 지역의 토지와 호구를 중앙에서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데, 그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백제에서는 편호제를 실시하였다. 노동력 징발과 공물의 수취를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기 호구와 토지의 파악은 촌락을 단위로 이루어졌다. 신라의 촌락장적(村落帳籍)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전정호구 파악 작업은 각급 지방관의 책임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그처럼 지방통치와 수취가 지방관의 직접적인 관할 아래 이루어짐에 따라, 토착세력은 독립성을 잃은 채 지방관의 보조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장성에서도 그것이 매한가지이었음은 이를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지역의 토착 재지세력은 방령과 군장 내지는 도사 혹은 성주 등의 업무를 보조하여, 전세와 공부를 수취하고 요역을 징발하는 등의 행정실무를 담당하였다. 성읍국가 이래 오랜 기간 지역의 통치자로서 또는 중앙을 대신한 실질적인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던 장성지역의 토착 재지세력도, 4세기 후반 이후 물밀듯이 밀려오는 백제에 밀려, 6세기 전반 무렵에는 마침내 백제국왕이 파견한 중앙귀족 출신의 지방관을 행정적으로 보조하는 말단 실무자의 위치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2. 백제의 문화와 유적 ·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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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지역에 백제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한 것은 일러야 근초고왕대 말년(369년)이었다. 그나마 토착세력이 온존하는 중의 공납제적 지배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당시 백제의 문화가 장성에 끼칠 만한 영향이란 거의 없었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듯싶다. 담로제에 의한 간접적인 지방통제에 머물렀던 웅진시기(475∼522)에도, 장성지역에 대한 백제의 문화적 영향력은 그다지 보잘 것이 없었을 법하다. 적어도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고(538) 또한 방―군―성체제에 의해 지방을 직접 통치할 무렵쯤 되어야, 비로소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그 영향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나 않았을까 여겨지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선 백제의 문화를 사상적인 측면에서 대략 개괄한 다음, 장성지역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백제시기의 유적·유물을 뒤에서 일괄하여 더듬어 보도록 하겠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는 가운데 고도로 세련되면서도 우아한 문화를 발달시켰다. 신라의 초기사원이 백제기술로 건축되는 등 신라의 문화에 자극을 주었고, 멀리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 남조문화를 받아들여 다양하고 세련된 귀족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삼국시기 우리나라의 문화가 성장 발달하는 데 불가결한 미개척의 분야를 담당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백제에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한문이 보급되어 있었다. 근초고왕대에는 박사 고흥(高興)에 의하여 역사서인 {서기(書記)}가 편찬되는 정도였다. 유교 또한 높은 수준이어서, 5경박사를 두고 경·자·사를 읽었다고 전한다. 성왕 때 양나라에 표를 올려 모시박사(毛詩博士) 혹은 강예박사(講禮博士)를 구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유교에 대한 욕구가 매우 컸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백제는 유교를 일본에 전파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여, 한성시기에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이 일본에 건너가 한학과 유학을 전하였다. 또한 무령왕대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가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성왕대에는 일본의 요청에 따라 다시 오경박사인 왕유귀(王柳貴)를 일본에 보내었다.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침류왕 원년(384)이었다. 동진으로부터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와서 불교를 전하였는데, 왕이 그를 맞아 궁중에 모시고 경배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한산에 사원을 세워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하였다. 호국사찰로서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는 등 호국불교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백제에서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계율종(戒律宗)이 성행하였다. 계율을 강조함으로써 인심을 중앙으로 귀일시키고자 하는 시대적인 요청에 따른 일이었다. {미륵불광사사적}에 의하면, 겸익(謙益)은 성왕 4년(526) 인도에까지 가서 율부(律部)를 깊이 연구한 다음 범본5부율(梵本五部律)을 가지고 돌아와, 성왕의 명을 받아 국내의 명승 18명과 함께 {율부} 72권을 번역하였다. 그리고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은 그에 대하여 {율소(律疏)} 36권을 저술하였다. 그가 성왕의 열성적인 후원을 받았다든지, 혹은 성왕 스스로가 {비담신율서(毘曇新律序)}를 지어 계율을 힘써 행할 것을 강조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 겸익이 성왕의 국력 회복 운동에 크게 봉사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계율종이 성행함에 따라, 백제에서는 자연히 율학도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위덕왕 35년(688)에는 일본의 대신(大臣 : 蘇我馬子)이 백제의 승려를 청하여 수계의 법을 묻는 동시에, 선신니 등을 백제로 보내어 이를 배워간 일까지 있었다. 또한 백제에서는 '공'을 내세우는 삼론학의 연구도 활발하였다. 무왕 2년(601) 일본에 건너간 관륵(觀勒)은 삼론학의 대가로서 일본의 초대 승정이 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혜현(慧顯)은 삼론의 강설을 듣고 {법화경}의 독송에 힘을 기울여 이름을 떨친 결과 중국에 건너가지 않고서도 {속고승전} 등에 그 전기가 수록되었다. 무왕 10년(609)에 도일한 도장(道藏)은 같은 중관파의 {성실론소} 16권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은 백제의 학문이나 사상·종교가 장성지역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삼국시기 비교적 널리 보급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불교마저, 노령산맥 이남지역에서는 아직까지 관련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장성지역에 대한 백제의 문화적 영향이라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분과 토기류 등에서 겨우 그 편린을 찾아 볼 수 있는 정도가 아닌가 싶다.

장성의 여러 고분 가운데 백제시기에 축조되었음이 공인된 최초의 것은 영천리 고분이었다. 장성읍 영천리 산 152번지 구산마을 북쪽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보해양조주식회사 장성공장을 건설할 때 부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1986년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 6세기 후반에 축조된 백제시기의 고분으로서, 지름 17m 높이 3m의 원형분임이 밝혀졌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제 귀걸이 1쌍, 구슬 38점, 뚜껑 접시, 굽다리 조각 등이 있다. 상무대의 장성 이전과 관련하여 1992년에 발굴 조사된 삼서면 학성리의 고분군도 백제시기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모두 19기를 발굴하였는데, 출토된 관못과 방추차 및 토기류 등으로 미루어 백제시기인 6∼7세기대의 고분들로 밝혀졌다.

한편 지금까지의 보고 자료에 따르면, 장성지역에는 삼국시기 유물산포지가 6군데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성읍 청용마을에서 수습된 뚜껑접시 4점을 비롯하여, 남면 마령리 시정마을의 격자문·승석문·파상문 등의 문양과 투창이 있는 기대편 및 고배편, 동화면 서양리의 질그릇 단지 2점과 삼족토기 4점, 북이면 백암리 백암마을의 삼족토기와 곡옥, 북이면 만무리 만무마을의 세형동검과 굽다리접시·구멍단지·투겁창·말방울, 그리고 북이면 달성리 밀등의 뚜껑접시 1점과 기대편 등이 그것이다.

그밖에도 장성의 고읍치(古邑治)와 진원현(珍原縣)·삼계현(森溪縣)의 읍성지(邑城址)를 위시하여, 벽오산성(碧梧山城)과 망점산성(望岾山城) 및 이척산성(利尺山城)·삼성산성(三聖山城)·고성산성(古城山城) 등이 백제시기의 유적으로 추정된다는 보고가 있다. 그러나 문헌이나 혹은 발굴 조사에 바탕하여 확실한 증거를 제시한 것은 아니어서, 간단히 단정지어 말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지금까지 백제시기와 관련되는 장성지역의 유적과 유물을 살펴 보았다. 극히 영세한 데다 그 내용마저 그다지 보잘 것이 없는 수준의 것임을 확인한 셈이다. 그나마 본격적인 발굴 조사조차 별로 이루어진 적이 없어, 백제시기의 장성지역을 연구할 만한 유적과 유물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 내지 백제시기의 장성을 알 수 있는 문헌상의 기록이 전무한 상황에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 할 물질적인 증거마저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되어 있지를 않은 것이다. 유적과 유물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관심과 투자가 요구되어 마지 않는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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