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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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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장성읍지에서 본 광공업
  • 2. 일제강점기 전후의 광공업
  • 3. 광복후 장성의 광공업

1. 장성읍지에서 본 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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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장성지방에서는 가내수공업적인 원시형태의 공산품이 전업 또는 농가부업으로 생산되었다. 즉 농사도구, 의류원료, 생활도구 등이 만들어져 사용되었음을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성읍지(長城邑誌,1927)에서 살펴보면 공산(工産)이란 항목에 19개 품목이 보인다. 면포, 마포, 모시베, 명주, 목물, 죽물, 놋그릇, 옹기그릇, 백토그릇, 왕골자리, 새끼와 가마니, 짚신, 철물, 금은세공품, 석회, 한천(寒天), 한지, 우피(牛皮) 등으로서 이들은 생산되어 자급도 하고 시장에 출하하여 재화를 획득하는데 큰 몫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2. 일제강점기 전후의 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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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의 광공업 발전에 기여한 지하자원인 석회암이 장성에는 널리 매장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장성읍지에 백토그릇이 보이는 것은 분명히 백토나 고령토가 장성에서 채토 이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졌는데, 1992년 상무대 이전지역 종합학술조사 때 삼서면 대도리 백자요지(史蹟 337호, '93.10 지정)와 서삼면 추암리 분청사기요지(粉靑沙器窯址) 그리고 삼계면 신기리 백자도요지 등이 밝혀졌다.

전라남도사정지(1931)에 따르면 장성의 공업은 미곡, 면화, 장유 술, 한천 등이 주된 것이며, 그 밖의 것은 거의가 가내공업에 속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제지업은 임의조합을 설립하고 기술자를 초빙하여 제품개선, 규격의 통일을 꾀한 결과 현저한 진전을 보았다고 하였다.

[표4-48] 공산품 생산공장 현황(1930)(단위: 원[圓], 명)

공산품 생산공장 현황 - 종별, 공장수, 자본금, 종업원수(한국인, 일본인, 계) 제공 표
종별공장수자본금종업원수
한국인일본인
한국인공장23252,40034180421
일본인공장587,500-55

자료: 전라남도사정지(1931)

면화, 마류(麻類)의 천은 점차 품질이 향상되어 연 생산액은 59,000여원(圓)을 상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무렵 공장과 공산액은 [표 4-49]과 같다.한국인의 공장수는 많지만 종업원 가운데 80명의 일본인 종업원이 있는데 반해 일본인 공장에는 한국인 종업원이 없음은 기술전수를 두려워했던 것이 아닌가 싶고, 한국인 공장에 일인이 많음은 기술자로서의 상당한 우대를 받았던 것으로 보아진다. 한국인 공장 자본금과 일본인 그것과 1공장당 자본금은 전자는 10,973원인데 비해 후자는 17,500원으로 한국인 공장의 영세성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일제하의 장성의 공산품과 공산업적 산업의 내용을 [표 4-50]에서 대체로 파악할 수 있는데 가마니 제조가 정미업 다음으로 높은 생산액을 올리고 있고 도자기가 제일 낮은 산액이다. 그러나 도자기의 공산물로서의 위치는 높다고 보아진다.

남면 장평과 진원면 영신, 삼계면 율촌등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일제 때 이전부터 가마를 설치하고 장작불을 피워 옹기그릇을 구어 냈던 곳이 많이 전해 오고있다. 옹기그릇 제조역사는 전언으로 대충 200년전 쯤으로 보며 1960년경까지 생산하였다고 연고인들은 말하고 있다. 옹기는 황룡, 사창, 비아, 광주시장에 출하하였다. 그리고 옷감생산은 목화와 삼, 모시를 재배하여 상당수의 농가는 직접 베틀을 놓고 손발을 써 수직하였고, 양잠을 하는 농가에서는 실을 뽑아 명주를 짜기도 하였다. 소농기구는 대장간에서 만들어 팔았는데 21세기를 맞은 오늘에도 소농기구임으로 제작 사용되고 있다.

이 무렵의 농기구라면 철제로써 괭이, 쇠스랑, 가래, 부삽, 호미, 낫 등이며 목재로 만든 농구로는 쟁기, 써레, 갈퀴, 지게, 장군, 절구, 나락 매, 키, 두레 등이었고, 생활도구로는 죽석, 돗자리, 대바구니 등이었다. 운반기구로는 달구지, 손수레 등을 큰 대장간에서 만들었다. 대장간은 장성읍에 몇 군데와 황룡시장, 사창시장, 사거리시장 중심으로 가동되고 있었으며 일제 때에는 장성역전에 일본인이 내산(內山)철공소를 운영하였는데 풍구, 쟁기, 우마차제작을 비롯하여 발동기, 정미기 등을 수선하였다. 한국인 경영의 큰 대장간에서도 수레 등을 제작했다. 한지는 장성삼백(長城三白, 쌀, 누에고치, 백지)중의 하나로서 유명했다. 닥나무껍질을 주원료로 만들어지는 한지는 책지(冊紙), 문창지(門窓紙), 화선지(畵仙紙), 장판지(壯版紙)로 구분 제지되어 조선조 때에는 왕실계보를 찬록하는 종부시에서 사용하였고 국내에 널리 유통되었다. 제지업체는 북하면 신촌을 비롯 장성읍 상오등지에 왜정말 때까지 여러 지소(紙所)가 있었다. 북하의 신촌지소는 100여년전 박준의 조부가 장골에 통 13개 규모의 지소를 운영하였다고 한다.

건축자재로 사용되는 붉은 벽돌 제조공장은 가마의 규모가 제법 컸고 붉은 벽돌로 높이 세운 굴뚝은 높아 공장 같은 느낌을 줄 정도였다. 이들 벽돌공장은 장성읍 월산과 황룡면 장산 등지에 있어 생산이 활발하였다.

장성의 지하자원인 석회암은 일제하에 황룡면 와룡리 건동에서 석회암을 일인이 체광하여 1935년경 가마를 만들고 소석회를 제조하여 출하하였으나 1943년경 중지되었고, 현재의 고려시멘트공장의 뒷편 산밑에 일인이 소규모 가마를 1940년경 만들어 소석회를 시산하다가 가마 붕괴로 중단하였다.

[표4-49] 공산품별 공산액(1930)(단위: 원[圓], )

공산품별 공산액 - 품명, 산액 제공 표
품명산액품명산액품명산액품명산액
생 사18,725도자기 1,746왜간장3,430식물성유 10,185
면마포류 59,516비료 16,403곡 자 35,892주 류 197,217
한 지41,600가마니 265,036찰 기 7,500정 미 2,165,262
장판지29,488새끼29,919한 천35,000조 면256,800

자료: 전라남도사정지(1931). 참고: 1930년경 쌀 중품 도매가로 1석값은 26.68원(서울)

3. 광복후 장성의 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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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공업은 일제 강점하에서 시작되었으므로 당초부터 자립적 기반을 가지지 못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광복 후에도 국토의 양단으로 남한의 공업은 경공업의 구조를 면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6·25동란으로 대부분의 공업시설물이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1953년 휴전과 더불어 외국원조를 뒷받침으로 공업건설이 이루어졌으나 방직(방직), 제분(製粉), 제당(製糖) 등 이른바 삼백공업(三白工業)이라 불리는 일부 경공업(輕工業)이 건설되는 것에 불과하였다.

이 무렵 장성의 광공업이라고 해도 일제하의 그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한지제조와 벽돌제조, 가내수공업인 면포와 마포생산, 옹기생산, 한천(寒天)제조 등이 고작이었다.

한지제조업체는 1979년경 7개 업체가 있어 외화획득에도 일조를 하였고 덕성한지는 17만 4천$의 외화를 벌어들였고 이 무렵 참여 농가호당 2백67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이러한 제지업체들도 양지에 밀려 수지가 맞지 않아 폐업하고 덕성한지만이 가동중이며 '90년대 들어 중국에까 지 진출 공장을 설치 운영중이다.

[표4-50] 한지제조업체 현황 자료:장성군사(1982)

한지제조업체 현황 - 업체명, 소재지, 업주, 종사원 제공 표
업체명소재지업주종사원업체명소재지업주종사원
덕성한지장성 상오김명수36명한지부업단지황룡 필암김경학5명
약수제지북하 약수이원행6영신제지북하 단전박 준8
월산제지장성 구산박인순6중앙제지장성 구산장광호4
구봉제지장성 월산박봉구6

[표4-51] 한지 생산업체 현황

한지 생산업체 현황 - 업체명, 소재지, 업주, 규모, 생산능력, 생산량 제공 표
업체명소재지업주규 모생산능력생산량('79)
대동한천황룡 장산신태호10가마 3,000평190,000cbs190,000 Ibs
장성한천장성 기산최용주8가마 20,800130,000-
도미한천장성 성산최용문5가마 15,600100,00065,000
전남한천장성 성산오창섭4가마 15,00065,00055,000

자료:장성군사(1982)

한천제조업은 1979년전후 해 생산업체가 4개 업체였다. 예로부터 장성은 수질과 적당한 기온(-5∼10℃)이 제조기간에 잘 맞아 생산이 활발하였는데 [표 4-51]에서 보듯 규모가 컸고 외화 획득에도 크게 이바지하는 한편 농한기 농가소득 향상에도 도움이 컸다.

장성에는 1980년경 시멘트 제품제조업체가 16개 업체로 고려시멘트를 사용하여 블록과 벽돌 등을 생산하여 건축과 농가건물 수축, 환경개선에 많이 사용되었고 업체도 많다.

1980년경 장성에는 주조업체(酒造業體)가 12개소 있어 찹쌀, 멥쌀, 보리, 밀, 옥수수 등을 원료로 하여 이들 전분질을 발효시켜 우리의 전통주인 막걸리(탁주)를 만들어 농민과 일반인의 사랑을 받았으나, 1980년대 들어 국민소득이 올라 소주와 고급주를 선호케 됨으로서 소비량이 매년 줄고 있다. 1980년경 주조장은 각 읍면에 1개 업체가 있었는데 그 현황은 [표 4-52]와 같다.

장성의 인근에는 광주라는 대도시가 있고 공장은 도시에 집중되는 시대였기에 현대적 공업형태를 갖춘 기업체를 보지 못하다가 1962년에 고려시멘트주식회사가, 1970년에는 삼양제사공업주식회사가, 1975년에는 삼양물산(주)전남제사공장이, 1972년에는 백양산업주식회사가, 1989년에는 보해양조가, 1991년에는 금호건설이 설립되어 현대식 기계설비와 기업형태를 갖춘 공장들을 비로소 보게되었다.

1979년말의 장성관내 중소기업체 수가 65개 업체로 공장수는 증가하였으나 그들 대부분이 영세한 수공업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무렵 이 고장에서 생산된 공산품으로는 시멘트와 생사, 한천, 한지, 버섯통조림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공산품은 내수는 물론 수출도 하여 외화획득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그 후 중소기업체는 85개 업체나 대폭 증가 설립되었다.

농공단지조성은 농어가의 농외 취업기회를 넓혀 농외소득을 증대시켜 농촌 경제의 활성화와 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농어촌 소득원 개발촉진법(1983.12월 제정)에 의하여 1984년부터 착수한 사업이다. 따라서 장성에는 1985년에 농공단지가 동화면에, 삼계면에는 1989년에 각 1개 단지를 확정하였다. 입주업체는 28개 업체로 768명의 종업원이 종사하고 있다.

광업부문에서는 기업형태로 보기 어렵지만 지하자원으로 1억 8천 2백만톤의 양질 석회석이 장성 곳곳에 매장되어 있어서 시멘트 생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삼계면 덕산에서 고령토(高嶺土)와 삼계면 수옥에서 규석(硅石)이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채광되다가 휴지(休止) 되었다.

[표 4-52] 주조장 현황 (1980. 6. 30현)(단위: kl)

주조장 현황 - 업체명, 소재, 업주명, '79생산량 제공 표
업체명소재업주명'79생산량업체명소재업주명'79생산량
장성주조장영천김영운678삼계주조장사창김종성376
성산주조장성산김영주441서삼주조장장산김요덕154
진원주조장선적임학주240삼서주조장대곡유영환323
남면주조장분향신용수321북일주조장신흥변재철169
황룡주조장월평조귀문 526북이주조장사거손인선288
동화주조장용정이상식197북하주조장약수이병직210

자료: 장성군사(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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