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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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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학의 변천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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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성리학은 사회경제적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 일변도의 사상체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주자의 설에 만족하지 않고 독창적인 견해를 표명하는 학자들이 나타나면서 표면화되었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윤휴(尹 )와 박세당(朴世堂)을 들 수 있다. 윤휴는 유교 경전에 대해서 주자와 다른 해석을 내려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으며, 송시열(宋時烈)과 벌인 예송(禮訟)에서 패배하여 사형을 당하였다. 박세당도 유교 경전에 대한 독창적인 주해(註解)를 하였으며, 도가사상에 접근하기도 하였다. 그 역시 이러한 반주자학적인 성향으로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이러한 성리학에 대한 비판은 양명학의 수용으로 나타났다. 양명학은 주로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 계열의 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연구되었다. 양명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정제두(鄭齊斗)였다. 정제두는 강화도로 옮겨 살면서 양명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으며, 그의 휘하에서 강화학파라 불리는 양명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양명학자들은 주자의 주해가 아닌 경전의 본뜻을 존중하는 복고적 성향을 가지고 경전에 대해 성리학자와는 다른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성리학 일색의 조선사회에서 이단시되기를 꺼려 겉으로는 성리학자인 양 행세하는 양주음왕적(陽朱陰王的)인 경향도 갖고 있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붕당 정치가 파행으로 치달으면서 노론의 몇몇 가문이 정권을 독점함에 따라 정권에서 소외되어 몰락하는 양반들이 늘어났으며, 농촌에서는 농업 생산력의 발달로 부농이 생기는 반면에 토지에서 밀려나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농민의 수가 늘어났다. 또한 도시에서는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영세상인이 몰락하고 물가가 앙등하는 등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기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은 이러한 현실 사회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에, 일부 학자들이 이론에만 치우치던 성리학을 비판하고, 현실사회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실용적인 학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어난 학문이 실학이었다. 실학자들은 당시의 정치와 사회경제적인 여러 모순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다각적으로 제시하였다. 이를 그 성향에 따라 구분하면 대개 다음과 같이 3개의 학파로 대별할 수 있다.

① 경세치용학파­토지제도 및 행정기구 등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는 학파
② 이용후생학파­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기구 등 기술면의 혁신을 주장하는 학파
③ 실사구시학파­경서 및 금석, 전고(典故)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학파

경세치용학파는 농업 문제의 해결을 중시하여 중농학파라고도 한다. 여기에 속한 학자로는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 등이 있다. 이들은 지주층보다는 토지의 경작자인 농민을 중심으로 농촌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남인에 속하였으며, 근기지방 거주자들이었다.

이용후생학파는 상공업을 중시하여 중상학파라고도 한다. 이들은 대부분 연경에 다녀와 기행문을 남기고 있으며, 청나라의 문물을 배울 것을 주장하여 북학파라고도 한다. 여기에 속한 학자로는 유수원(柳壽垣),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홍대용(洪大容) 등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노론에 속하였으며,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실사구시학파는 실증적 연구방법을 계승하면서 민족문화의 연구를 통하여 주체적 인식을 선명히 하고, 금석, 전고 등에 대한 격조 높은 학문성을 보여주었다.여기에 속한 학자로는 김정희(金正喜)가 대표적이다. 이 학파의 특색은 학문 그 자체가 목적이며, 엄격한 객관적 태도로서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었다.실학자들의 학문적 대상은 현실적인 문제들이었으며, 연구방법은 확실한 전거에 의존하는 실증적인 것이었다. 또한 이들의 주요한 관심사가 조선사회의 현실이었기 때문에 민족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성리학의 연구가 깊어지면서 각지에 서원이 우후죽순과 같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종래 지방의 중요한 교육기관이었던 향교와 더불어 이들 서원이 주요 교육기관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이후 서원이 남설되면서 교육 기능은 점차 쇠퇴하고, 선현 봉사 기능만 강화되어 갔다. 이러한 기능 변화는 특히 가묘(家廟)화한 서원에서 심하게 나타났다. 서원은 초기에는 지역 전체 사림들의 공론에 따라 그 지역에 연고가 있는 선현을 봉사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으나, 후기로 오면서 특히 국가에서 서원의 설립을 규제하면서부터는 한 두 가문이 중심이 되어 자기네 조상을 모시는 서원이 많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서원은 사실상 그 가문의 사묘(祠廟)에 지나지 않았다.

장성에도 조선후기에 들어와 많은 서원이 세워졌다. 조선 전기에 건립된 필암서원 외에 숙종 때에는 추산서원과 봉암서원, 학림서원이 세워졌다. 이들 서원은 주향과 배향이 같은 문중인으로 되어 있어 후손이나 문중에 의하여 설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중에 의해 설립된 서원은 '강학(講學)의 장소'라는 서원의 일차적 기능이 흐려지고 봉사 위주의 성향이 현저하여 가문의 권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짙었기 때문에 교육 기능은 그다지 컸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조선후기에는 서원 외에 향교도 여전히 지방의 교육 기관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러나 향교의 교육 기능은 서원의 교육 기능이 활발해지면서 위축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들 교육기관 외에 사마소(司馬所)와 양사재(養士齋)가 설립되어 교육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사마소는 그 지방 생원과 진사들의 교육기관으로 조선초기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마소는 교육 기관에 그 기능이 한정되지 않았고, 지방의 생원과 진사의 집결소로서 향론을 주도하기도 하고 향촌의 일에 간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양사재는 향교의 교육 기능이 약화되면서 지방관과 향교의 교임을 역임한 향유(鄕儒)들의 협력으로 설치되었다. 양사재는 자제들의 교육뿐만 아니라 향촌 내의 신분 질서 변화에 따른 양반들의 명분 확립과 지위 강화의 목적도 있었다. 이들 사마소와 양사재는 그들의 본래의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조선 말기에 이르러 쇠퇴하였다. (전형택)

2. 문학과 예술의 새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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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병자 두 난을 겪고 조선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지배계층의 기반이 서서히 무너져 가기 시작했고, 경제적으로는 농업자본과 상업자본이 형성되면서 지배층의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에 대한 비판과 반성 속에 실학사상이 일어났다.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두 난을 겪은 후 목숨을 바쳐 전쟁에 참여한 평민층의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고 평민층의 의식이 성장하였다.

이러한 시대의 영향을 받아 문학과 예술에도 새바람이 일어났으니 평민문학과 평민예술이 바로 그것이다. 두 전쟁에 참여하여 국가 존망에 크게 기여했던 평민들의 의식이 성장하여 그러한 삶을 표현한 문학과 예술의 새로운 장르들이 출현했던 것이다. 두 전쟁의 처절한 수난과 참상을 겪으면서 당시의 세계관으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일들이 설화와 야담의 풍부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양반들의 미적 취향에 맞게 향유되었던 시조나 가사에 평민들의 생활과 감정을 담은 사설시조, 엇시조, 평민가사, 내방가사가 창작되었다. 임란 전후에 창작되기 시작했던 고대소설이 숙종대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몰락양반이나 중인계급에 의해 창작되었으리라 추정되는 한문소설, 국문소설이 상업자본과 결합하여 방각본 소설로 출판됨으로써 소설 독자층이 확대되었다.

또한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18세기경 판소리가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전파되면서 대표적인 국민문학으로 발전하였다. 각종 민속극, 가면극, 인형극, 무속극과 민속놀이가 흥행을 목적으로 공연되었다. 좁은 장성지역에서 이런 문학이 어떻게 지어지고 어떻게 향수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이 없어 그 자세한 실상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장성인물이 대부분 서인에 친근성을 보이고 있어 소외된 남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실학사상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후 한말에 이르기까지 장성은 문불여장성이라는 지칭에 걸맞게 노사 기정진, 송사 기우만을 비롯한 대학자들이 배출되었으나 특출한 문인이 배출되지 않았다. 평민문학이 대두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룰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이 시기에 활동했던 문인들의 문집을 중심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조휴(趙休)(1600∼1656) 본관 한양. 조찬한의 장자. 장성 북일 거주. 16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 호조좌랑 역임. 문장이 뛰어났다.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 정두경, 신천익의 칭찬을 받음. 조비의 아들인 조구상에 의해 7권 1책으로 문집이 간행된 바 있으나 산실되고 1985년에 삼휴당유집(三休堂遺集) 2권 1책이 간행됨. 그의 동생 조비(趙備)와 아들 이우당 조유상(趙柳祥)은 문장으로 유명함. 조유상은 강국론(强國論), 십만언소(拾万言疏)로 유명하며 치한록(恥寒錄) 6권 용강문답(龍江問答) 1권이 전한다.
변우익(邊友益)(1601∼1670) 호는 송계(松溪), 변이중의 손자. 학식이 뛰어나 이시백(李時白)의 추천으로 사산감역에 제수되었고 장성의 야사(野史)인 오산명인록을 편찬하였다.
김현(金睍)(1606∼1683) 호는 낭옹(浪翁). 나주 회진에서 태어나 삼서면 소룡리에 정착함. 19세에 진사 합격. 낭옹유고에는 시 542수와 오언장편(五言章篇) 3수가 전한다.
변명익(邊命益)(1610∼1660) 호는 창암(滄岩). 변경윤의 아들. 부친과 석주 권필에게 수학하고 김상헌에게 사사. 1958년에 간행한 문집 창암유고에 50여편의 시문이 전한다.
기정익(奇挺翼)(1627∼1690) 호는 송암(松岩) 손재 박광일과 함께 송시열 문하에서 수학. 1651년 식년별시 급제, 학문에 몰두. 김인후의 연보를 씀. 송암선생문집 6권 2책이 1788년에 간행되었고 1955년에 석판본이 간행되었다.

변휴(邊烋)(1640∼1699) 호 청류당(聽流堂). 청류당일고에 시 몇편이 전한다.
변광식(邊光軾)(1648∼1679). 변명익의 아들. 최석정, 임영, 김창협, 오도일과 함께 장안팔재사(長安八才士)라 했다. 1980년 간행한 범호정유고(泛湖亭遺稿) 2권 1책에 시부 258수가 전한다.
김극광(金克光)(1653∼1724) 호 원광헌(遠光軒) 본관 광산. 창계 임영과 함께 김창집에게 수학.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다. 황룡강 위에 원광헌을 짓고 많은 사람과 교유하였다. 원광헌집 2권 2책에는 시 수백편이 전한다.
송명현(宋命賢)(1659∼1763) 호는 옥강(玉崗) 본관은 신평. 송흠의 7세손으로 명재 윤증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박세채, 최석정, 임영, 오도일과 교유하였다. 옥강집의 간행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원래 9권 14책이었다. 후손들이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였고 1986년에 간행하였다. 수백편의 시와 글, 문자총설(文字總設)이 있다.

반응호(潘應濩)(1666∼1739) 호는 연체당(聯 堂) 또는 연천(硯川). 본관은 남평이다. 연체당유고는 1940년에 간행되었는데 김택현(金宅賢) 등과 화답한 많은 시가 전한다.
변치명(邊致明)(1693∼1775) 변이중의 5세손. 59세에 문과급제. 예조좌랑 사헌부지평 역임. 1986년에 간행한 묵포집(墨逋集) 3권 1책에 시 수백편이 전한다.
변치도(邊致道)(1696∼1773) 변광식의 손자. 1986년에 간행한 죽천재유고(竹泉齋 遺稿) 2권 1책에 시 537수가 전한다.
오광원(吳光源)(1714∼1790) 호 임천재(臨泉齋) 장성 전도곡 출생. 미호 김원행의 제자. 성리학을 공부하였고 당송(唐宋)의 글에 뛰어났다. 1974년에 임천재유고 1책이 간행되었다.
변득양(邊得讓)(1723∼1801) 장안리 출생. 34세에 문과급제. 사헌부 집의와 공조판서 역임. 시호는 효정(孝靖). 유고는 유실되고 1986년에 여러 문집에서 글을 모아 단옹일고(檀翁逸稿)를 묵포집에 합편으로 간행했다.
변상휘(邊相徽)(1723∼1815) 68세에 문과급제 성균관 전적, 73세에 예조좌랑 묘향산을 여러 차례 탐승했다. 그의 문집 하관집(遐觀集)은 11권에 부록 1권이었는데 5·6권과 부록만 남아 있다. 이 외에 서행일기(西行日記), 연행일기(燕行日記)가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김이휴(金履休)(1745∼1821) 호 고암(顧菴) 본관 울산, 북하 중평 출생. 미호 김원행의 문하생. 고암집 4권 1책이 1982년에 간행되었는데 시 100여수가 전한다.
김상직(金商稷)(1750∼1815) 호 죽국헌(竹菊軒) 본관은 울산. 진원 밤실 출생. 장수 팔공산에서 독서와 시 짓기로 보냄. 죽국헌유고 2권 1책(1926년 간행)에 가사 감성은가, 계자사, 입산가, 사향가가 이상보박사에 의해 1971년 현대문학지에 소개되었다.
기정진(奇正鎭)(1798∼1879) 호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 순창에서 태어나 진원에 이거함. 1833년 증광문과에 급제. 모든 관직에 취임하지 않고 오직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다가 1861년 사헌부장령 1876년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조선유학의 6대가로 칭송되는 대학자이다. 노사집 28권이 1882년에 만들어지고 1898년에 중간본이 간행되었다. 문집 1·2권이 시집이고, 나머지는 모두 학문에 관한 글이다. 성리학에 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졌으나 문학에 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변우기(邊遇基)(1799∼1881) 호는 용헌( 軒)이요 본관은 황주다. 66세에 진사. 용헌유고 7권이 전하는데 5권까지 수백편의 시가 실려 있다.

변상철(邊相轍)(1818∼1886) 호는 봉서(鳳棲)다. 유집 봉서유고 2권 1책(1974년 간행)에 시 수백편이 전한다. 19년 동안 쓴 그의 일기는 사료총서에 들어 있다.
김녹휴(金祿休)(1827∼1899) 호는 신호(莘湖), 울산인. 노사 기정진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생을 여행과 글짓기로 보냈다. 금강산 등의 기행문을 모은 유산록(遊山錄) 1책을 남겼다. 신호집 3권 1책(1981년 간행)에 시 수백편이 전한다.
변태용(邊台容)(1836∼1897) 신묵(愼默) 사단칠정 연구에 전념. 신묵재유고 3권 1책(1982년 간행)에 시 수백편이 전한다.
기우만(奇宇萬)(1846∼1916) 호는 송사(松沙) 노사 기정진의 손자로 의병장. 1881년 김평묵과 함께 행정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문집 송사집은 거질인데, 50권 26책, 拾遺 3권 1책 합 27책이 1931년에 간행되었다. 1권에 시 수백편이 전한다.
이규채(李圭彩)(1849∼1933) 호는 송석(松石) 본관은 경주다. 동회면 송사리 출생. 기정진을 뵙고 학문에 전념. 기우만, 오준선과 비견되는 학자다. 송석유고 2권 1책이 1975년에 간행되었는데 시 수백편이 전한다.

기재(奇宰)(1854∼1921) 호는 식재(植齋) 장성 하남리 출생. 기정진의 문하에서 경전과 사서 연구. 기우만과 의병을 일으킴. 아들 기산도는 의병으로 유명. 식재집 6권 3책이 1929년에 간행되었는데 시 100여편이 전한다.
이규철(李圭哲)(1854∼1925) 호는 일암(一菴) 본관은 경주. 삼서 가산리 출생. 후석 오준선과 교유했다. 일암유고 5권 2책이 1936년에 간행되었는데 수십편의 시가 전한다.
변만리(邊萬里)(1858∼1924) 호는 봉남(鳳南) 최익현에게 사사하였다. 1938년에 간행된 봉남집 5권 1책에 시 수백편이 전한다.
공상원(孔商源)(1861∼1917) 호는 율재(栗齋) 본관은 곡부. 장성 치북에서 출생. 율재유고 1책(1938년 간행)에 시 수십편이 전한다.
김경중(金暻中)(1863∼1945) 호는 지산(芝山) 본관 울산. 인촌 김성수의 아버지. 지산유고 4권 1책(1966년 간행)에 시문이 전한다.
김성규(金星圭)(1863∼1936?) 호는 초정거사(草亭居士) 본관은 안동. 1896년 북삼면 동산동에 이거하였다. 1897년 장성군수가 되었다. 개화기 극작가 김우진의 부친이다. 만년에 목포 죽교동에 살면서 시 모임인 유산시사(儒山詩社)를 후원하고 이끌어 중심역할을 하였다. 그의 문집 초정집(草亭集) 12권 6책(1937년 간행)에 수백편의 시문이 전한다.

김한익(金漢翼)(1863∼1944) 호는 화동(華東) 본관은 영광. 1974년에 간행한 화동유고 2권 1책에 시 수십편이 전한다.
김응환(金應煥)(1869∼1949) 호는 신포(莘圃) 본관 울산인. 신포유고 2권 1책(1954년 간행)이 전한다.
이종채(李鐘彩)(1871∼1952) 호는 희재(希齋) 본관은 경주. 희재유고 1권 1책(1966년 간행)이 있음.
김봉환(金鳳煥)(1873∼1915) 호는 회봉(晦峰) 본관 울산. 독립운동가. 최익현, 기우만과 함께 독립운동. 회봉집 4권 2책(1960년 간행)에 시문 전함.
김노수(金魯洙)(1878∼1956) 호는 경암(敬菴) 황룡면 맥동에서 태어나 고창 고수면 황산리로 이거하여 연재 송변선에게 수학하였다. 성균관, 규장각 경선제대 도서관에서 사학과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특히 조선사(朝鮮史) 17권을 저술하였는데 일제침략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하여 왜경의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한감강목(韓鑑綱目) 하서선생전과 하서선생 언행록 등 편저서가 60여권 41책에 이른다. 이미 간행된 저서 외의 글을 모아 1995년에 경암집 24권 13책을 손자 병채(炳采)가 간행하였다. 문집에 여러 글과 수백편의 시가 전한다.

김재준(金在駿)(1879∼1947) 호 석재(石齋) 광산인. 석재유고(1973년 간행)에 시 수백편 전함.
김도중(金度中)(1881∼1959) 호는 오남(鰲南) 황룡 옥정 출생. 오남집 6권 2책(1963년 간행)에 시문이 전한다.
임문규(林文奎)(1886∼1964) 호는 행원(杏園) 본관은 평택. 송사 기우만에게 수학. 공학원 오준선, 김시중과 교유하였다. 성산에 양심재를 신축하여 시회를 가졌다. 1964년에 간행한 행원유고에 시 수십편이 전한다.
김준식(金駿植)(1888∼1969) 호는 동곡(東谷) 본관은 영광. 기우만, 오준선에게 사사. 수련산에서 후진양성. 동곡집 9권 4책(1972년 간행)에 수백편의 시문이 전한다.
김태호(金泰鎬)(1889∼1952) 호는 용파(龍波) 본관은 광산. 용파유고 2권 2책(1988년 간행)에 시 수백편이 전한다.
이희봉(李喜鳳)(1901∼1988) 호는 오헌(梧軒) 서삼 봉연 출생. 오헌만록 1책(1988년 간행)에 시 수십편이 전한다.
기노장(奇老章)(1904∼1970) 호는 장헌(莊軒) 기우만에게 수학. 장헌유고 6권 4책(1972년 간행)에 시문이 전한다.
김광수(金光洙) 호는 만하(晩河). 만하유고 2권 1책에 시 38수가 전한다. 특히 중국과 서양을 꿈을 통해 유람한 내용을 쓴 몽유록이 특이한 문학이다. 꿈에 용궁이나 지옥을 몽유하거나 중국을 여행한 문학작품은 있으나 중국과 서양 즉 천하를 두루 몽유한 문학작품은 그 유례가 없다. (김재수)

3. 조선후기의 미술·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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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신라말 고려초부터 거친 백자를 굽기 시작하였으며 고려시대에도 양은 적으나 양질의 백자를 생산하였으며 조선시대는 백자의 전성시대였다. 점력을 가진 순도 높은 백토로 성형하고 그 위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도 열을 가하여 구워낸 자기를 백자라 한다.

조선전기에는 고려시대의 상감청자에서 변모 발전한 분청사기와 백자가 함께 도자기의 양대 주류를 이루었지만, 16세기 후반부터 분청사기는 점차 백자화되어 백자에 흡수되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백자만이 주류를 이룬다. 분청사기는 고려문화의 유영을 새로운 조선시대의 시대감각에 맞게 조형적으로 활달하고 자유분방하며 거기에 나타난 공예 의장 역시 형태에 걸맞게 대담하고 뛰어난 것이었으나 결국 백자로 이행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따라서 분청사기의 소멸은 고려문화와 불교적 유영이 조선 도자기에서 사라지고 조선시대의 백자에 흡수된 것이다.

백자는 16세기 말부터 항아리의 구연부, 굽다리와 굽받침 등에서 변화를 보인 백자는 17세기 후반의 초경까지 유태가 밝아졌으며 새로운 기형이 나타나고 굽다리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16세기 말­17세기 초부터의 커다란 백자의 흐름이 17세기 후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후 국내 정세의 변화와 외세의 간섭 침입으로 정치, 사회경제가 대단히 불안해지고 어려운 상황아래 놓이게 되면서 백자에도 새로운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전대의 것을 계승하고 있지만, 기벽은 조금 더 두꺼워지고 기형이 이루는 선은 아주 둔중하며 가마에 구울 때 모래받침과 내화토 받침이 병행되었다. 19세기 말경에는 태토와 유약이 거칠어지며 대청회백색(帶靑灰白色)의 백자가 병행 생산되고 있다.조선 백자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수한 백자가 전체 백자류의 9할 이상을 차지하지만, 순수 백자가 기본이 되어 어떤 안료로 문양을 내느냐에 따라 구분이 된다. 청화백자, 철화백자, 상감백자, 진사백자 등으로 백자의 종류가 나뉘어진다.

장성군의 도요지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의 '도자소일현서모율리품하(磁器所一縣西毛栗里品下)'와 {호남읍지}에 실려있는 '각점촌 읍동면유탕 북하면월성(各店村 邑東面流湯 北下面月城)'이 있다. 장성군의 도요지를 체계적으로 조사한 것은 1988년 국립광주박물관이 처음이다. 국립광주박물관은 분청사기 7곳, 백자가마터 15곳을 조사하여 1988년 12월 {전남지방도요지조사보고서} Ⅱ를 출간하였다. 상무대 이전 지역에 포함되는 삼서면 대도리 백자가마터를 1992년 목포대학박물관이 발굴조사하여 17세기 전반으로 추정하여 이 유적을 1992년 10월 10일 사적 제377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이후에 분청사기와 백자를 생산하였던 가마터만 25기가 발견되었고, 분청사기를 생산한 가마터 2기, 분청사기와 백자가 함께 발견되는 가마터 5기, 백자 가마터 8기가 발견 조사되었다. 이와같이 장성지역은 최근에 도자유적이 잇따라 발견조사되어 조선시대 도자문화의 융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어 주목되는 곳이다. (이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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