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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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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학의 발달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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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의 동향과 장성 유학

조선왕조는 성리학자가 주축이 되어 건국하였으므로, 건국 후에는 성리학이 국가적으로 장려되어 더욱 융성하였다. 이리하여 여말에 전래된 성리학은 여말선초에 있어서 과거제도의 여행과 학교의 부흥으로 더욱 학자들 사이에 유포되었고, 주자가례와 주자의 정치철학은 유교적인 조선의 양반사회에 있어서 정통적인 학풍으로 굳어져 갔다.

조선왕조의 건국을 전후하여 성리학은 크게 두 파로 나뉘었다. 정몽주 길재계열의 이학파 성리학과 정도전, 조준, 권근계통의 경세파 성리학이 그것이다. 양자가 모두 이기철학을 신봉하고 불교와 도교를 배척함에는 마찬가지였지만, 전자는 철학, 도덕, 종교 등 관념적인 문제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진데 반하여, 후자는 정치, 경제, 군사 등 현실문제에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인데 차이가 있었다. 물론 후자도 기본적으로는 성리학자였기 때문에 철학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정도전, 권근 같은 이는 『불씨잡변(佛氏雜辯)』,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기이편(心氣理篇)』, 『입학도설(入學圖說)』과 같은 뛰어난 성리철학서를 저술하여 불교와 도교의 모순점을 맹렬히 비판하여 전자보다도 더 철저하게 성리철학을 옹호하였다.

이들이 성리철학을 적극 옹호한 것은 성리철학 그 자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보다는 사원경제와 연결된 불교와 미신화된 도교의 사회적 해독성을 극복함으로써 사회개혁의 정신적 기초를 다지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일반적으로 성리학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경학, 사학, 병학, 지리학, 천문, 역학, 의학, 문학 등 국가경영과 사회개혁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여 박학주의를 지향하였다. 신왕조 개창의 주체세력인 이들은 실천적 측면에서 더욱 강한 의지를 보여 조선건국 후에도 체제확립을 위해 주로 외형적 제도에 보다 큰 관심을 지녔다.

이와 같은 경세파의 학풍은 조선초기 관학의 학풍을 지배하여 관학 교육을 받아서 성장한 성리학자들은 대개 비슷한 성격을 지니었다. 이들이 바로 조선왕조의 통치체제를 완성한 주역들이었고, 집현전 출신의 유신들도 대개 그러하였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학파 성리학자들은 신하는 그가 섬기는 왕에 대해서 '절의'를 지켜야 한다는 유교적 윤리관에 입각하여 조선 건국에도 반대하였고, 세조와 같이 왕위를 찬탈한 왕에게는 계속해서 섬길 것을 거부하고 관계(官界)와는 인연을 끊은 자들이었다. 이들은 경세파 성리학을 지나치게 공리적이라 비판하고 주자의 학풍을 존중하면서 정신주의적 도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따라서 사변 철학적인 성리학이 이들의 학풍으로 자리잡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들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은둔하거나, 향촌으로 낙향하여 학문적 이론을 연구하고 그에 토대를 두고 이를 실천하는데 힘쓰는 한편, 제자 양성에 전념하거나 혹은 체념 속에 유유자적하였다. 지방에 성리학이 보급되고 학문적 수준이 향상되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들의 영향이 컸다 할 것이다.

이들은 세종 때부터 점차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15세기 말에는 커다란 정치세력을 이루었는데, 이들을 흔히 사림파라 부른다. 이들을 사림이라 한 것은 이들이 현실 참여를 거부하고 산림에 은거한 선비로서 도학을 실현하려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림파 성리학은 16세기 이후에는 성리학의 지배적인 학풍이 되었으며,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김인후(金麟厚), 이황(李滉), 이이(李珥)와 같은 뛰어난 학자를 배출하였고, 이러한 학자들을 사림이라고 불렀다. 이들 사림 중에서도 역시 경세를 중시하는 조광조, 이이계열과 철학을 중시하는 이언적, 이황계열이 갈라져서 소위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분립을 보게 되었다.

경세파 유학자 즉 관학파에 의하여 지배되던 조선사회는 세종∼성종 연간에 유교정치의 진흥을 도모하면서 새로운 인재를 등용시킴에 따라 지방의 사림들이 대거 중앙의 정치무대에 진출함으로써 진통을 겪게되었다. 세종대를 전후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들은 세조의 왕위찬탈과 패도적 중앙집권정책에 반발하여 스스로 관계에서 물러나거나, 세조의 탄압을 받아 그 세력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그러나 세조가 물러나고 나이 어린 성종이 즉위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성종은 훈신 세력의 독주를 견제하고 왕권의 신장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림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이들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삼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언론, 문필을 담당하면서 훈신들의 비리를 공격하였다. 사림파의 이러한 훈신 비판은 사상적인 면에서 성리학의 도리론·명분론에 대한 확신과 자신들이 농촌에서 훈·척신들의 비리 행위를 직접 체험하거나 목격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정계는 훈신세력과 사림세력간의 대립 투쟁을 조성하여 드디어는 사화를 낳았다.

성종은 신·구세력의 갈등을 적절히 조정하였기 때문에 큰 정치적 변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성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훈·척신들과 손잡고 사림세력을 탄압하여 참혹한 사화를 빚어냈다.

연산군의 탄압에 밀려난 사림들은 중종반정 이후에 다시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사림의 소장학자 조광조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조광조 일파는 사림의 정치적 주도권과 향촌사회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언론정치를 강조하고 향약을 실시하였으며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사림을 많이 등용시켰다. 조광조가 현량과를 설치한 것은 자신의 이상정치의 실현에 맞는 사림파를 등용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광조 일파의 도학정치는 너무 급진적이어서 훈신세력의 반발을 사 사림세력은 다시 크게 꺾이었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기묘사화는 직접적으로 중종 14년(1519) 반정공신 가운데 공이 없는 자들의 위훈(僞勳)을 삭제하고 그들이 받은 토지와 노비를 환수한 것을 빌미로 일어났다. 이 때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곧 사사되었으며, 현량과로 등용되었던 많은 인물들이 화를 당하였다. 이들을 기묘명현이라 한다. 기묘명현에는 다수의 호남 출신 인사들이 포함되었는데, 이들을 존숭하는 풍조가 일어남에 따라 호남지역의 성리학이 크게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종반정 후 사림세력의 훈구세력 비판은 반정 후 폐위된 중종비 신씨의 복위상소로부터 시작되었다.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무안현감 유옥(柳沃)이 주도한 신씨 복위상소는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를 반정공신인 훈구세력이 불법적으로 폐출시킨데 대한 불의와 부당성을 통렬히 논박하고 복위를 강력히 촉구한 내용이었다.

한편 중종 사후 중종의 배다른 두 아들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싸움의 결과로 을사사화가 일어나 사림은 다시 타격을 받았다. 중종 사후 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8개월만에 죽고 이어 명종이 왕위를 계승하자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 일파가 그 반대파와 사림세력을 숙청하였다.

이와 같이 사화는 사림세력이 중앙정계에 등장함으로써 빚어진 훈신세력과의 대립 투쟁이 주류를 이룬 것이어서 사림세력은 거듭된 사화 속에서 박해와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은 그 때마다 농장 등의 확고한 기반을 갖고 있는 향촌으로 돌아와 향약을 보급하고, 서원을 세우면서 세력을 온존하여 마침내 선조 때에는 재차 정치 무대에 등장하여 결국 정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사화기를 거치면서 중앙정계서 자행된 사림에 대한 박해는 지방 성리학의 발전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즉 사화에서 피화된 사림들은 벼슬을 단념하고 연고지에 낙향하여 학문의 연구와 후진의 교육에 힘씀으로써 지방 성리학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성의 성리학도 사화기를 거치면서 점차 발전되어 갔다. 이 지방에 사화와 관련되어 낙향한 사림이 얼마나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읍지나 가보의 전승을 통하여 살펴본 바로는 이재인(李在仁), 유성춘(柳成春), 김인후(金麟厚)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묘사화 때에 낙향한 유성춘은 원래 해남 출신이었다. 그는 김굉필의 문인인 유계린(柳桂隣)의 아들로 유희춘(柳希春)의 형이었다. 유계린은 최부(崔溥)의 사위로 최산두와 함께 김굉필에게서 수학하였다. 유성춘은 기묘사화가 일어난 직후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진원에 정착하여 노모를 봉양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유성춘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한 유계린의 학문을 이은 사림으로 중종이 사림을 한참 등용할 때인 중종 8년(1513)에 진사과에 합격하고 다음 해에 문과에 등제하여 관계에 진출하였다. 그는 중종 10년(1515)에는 기준 등과 함께 사가독서를 받아 학문을 연구하였고, 이듬 해에는 기사관(記事官)으로서 검토관 조광조, 시독관 유관(柳灌) 등과 더불어 정사에 참여하였다. 중종 13년(1518)에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현실을 개탄하고 대토지소유 작태를 공격하면서 박수량이 제시한 균전책(均田策)을 실시할 것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 때가 바로 조광조가 혁신정치를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관력을 가진 그가 정계에서 은퇴한 것은 기묘사화 후의 일이었다. 그가 관계에서 물러난 것은 사간원과의 알력 때문이었고, 이 때 그의 관직은 이조정랑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기묘사화는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의 혁신정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이며, 유성춘이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유성춘은 상당한 정도의 사림이었다 할 것이다.

사화을 피하여 낙향한 사림 가운데 장성의 사림형성과 유학발전에 가장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은 김인후이다. 그는 10살 때 김굉필의 문인으로 당시 전라도 관찰사로 와있던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을 배웠으며, 18세 되던 해에는 동복에 유배와 있던 최산두(崔山斗)를 찾아가 사사받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성리학의 대가인 이황, 기대승, 정지운, 이항, 노수신 등과도 교분이 있었다. 김인후는 중종 35년(1504)에 등제한 뒤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옥과현감이 되었다가 인종 사후 윤원형과 윤임 사이의 당쟁을 염려하다가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장성에 돌아와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이러한 사람이 사화기에 장성에 내려와 거주함으로써 장성의 유학은 크게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하여 하서의 성리학 이해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천명도는 정지운의 천명도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는 정지운의 천명도를 보고 자신의 천명도를 그렸다고 발문에서 밝히고 있다.이 천명도는 인간의 본성이 천명과 어떻게 연관되어질 수 있으며, 성(性)이 정(情)으로 발하면서 선과 악의 작용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밝힌 그림으로, 여기에는 그의 천명관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하나의 명으로 연결시키고, 음양 오행과 인의예지의 사덕과 성(誠)으로 천명을 설명하고 있다. 원으로 표현된 하늘의 둥근 외곽으로부터 세 개의 원을 안으로 그리고, 12간지를 표시하여 시간의 순환이 끝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또 인간의 성의 핵심을 중(中)으로 표현하고 중이 인의예지의 이치를 갖추고 있으며, 이 네 가지가 혼연히 한 몸이 되어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하고, 마음은 천명으로 음양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재인은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에서 물러나 현 삼계면 백산에 은거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그가 김종직을 따라 도의를 강론(講論)했다고 한다.이로써 보면 그도 사림이었음에 틀림없다 하겠다.사화로 참화를 입은 인물은 아니지만 장성출신으로 박수량 만큼 잘 알려진 인물도 드물다. 그는 옥과현감인 김개(金漑)의 제자이며 유성춘과 동방(同榜)으로 중종 8년(1513)에 진사·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다음 해에 역시 문과 별시에 합격하여 관계에 진출하여 사헌부 지평, 헌납, 장령, 사간 등 대간직을 역임하였으며, 이어 동부승지를 거쳐 호조 참판, 한성부 부윤, 공조 참판, 예조 참판을 거쳐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학문으로 보다는 청렴한 성품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이미 명종 원년(1546)에 조사수(趙士秀) 김순(金洵)과 함께 청백리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박수량에 대하여 사신이 "청백함은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고 하고 있는 것에서도 그가 청렴한 관직 생활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명종 9년 박수량이 죽은 지 얼마 안되어 열린 경연 석상에서 대사헌 윤춘년이 "죽은 박수량은 청백한 사람으로 서울에서 벼슬할 때도 남의 집에 세들어 살았습니다. 본집은 장성에 있는데 그의 가속들이 상여를 모시고 내려가려 하나 그들 형편으로는 어렵습니다. 이 사람을 포장한다면 청백한 사람들이 권려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왕이 "수량은 청근(淸謹)하다는 이름이 있은 지 오래되었는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 매우 슬프다. 마땅히 포장하는 것이 옳다."하고 있는 것에서 그가 얼마나 청렴하게 살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명종은 이어서 박수량의 운구를 관인들로써 호송하게 하고 상수를 지급해주도록 명하였다. {명종실록}에 실려 있는 사신의 평에는 "수량의 청렴과 근검은 남쪽 선비의 으뜸이다. (중략) 겉으로는 청렴하고 근검한 듯하나 실상 속으로는 비루하고 비루한 자들은 어찌 이마와 등에 땀이 흐르지 않았겠는가?"고 적고 있다. 이러한 사신의 평은 『중종실록』에도 실려 있다. 중종 39년 전라도 관찰사가 판중추 송흠(宋欽)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준 일과 관련하여 "(전라)도내에서 재상이 된 사람 중에서 소탈하고 담박한 사람으로는 송흠을 제일로 쳤고, 박수량을 그 다음으로 친다."고 하였다.이러한 인물들이 장성과 진원에 거주함으로써 장성의 유학은 크게 발전할 기틀을 마련하였다.

(2) 장성의 교육기관과 과거

조선왕조는 문치주의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국초부터 적극적인 교육장려책을 실시하여 교육기관이 크게 확장되었다. 전국 각 군현에는 향교가 설치되어 지방의 우수한 인재들을 교육했으며, 중앙에는 사학과 성균관이 있었다.

지방학교인 향교는 한 고을에 한 학교를 원칙으로 하여 각 고을마다 세우고 이의 유지를 위하여 국가에서는 학전(學田)과 노비를 지급하였다. 이 지방에는 장성과 진원에 향교가 설립되어 있었다. 향교에는 군현의 등급에 다라 교수나 훈도가 파견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향교의 학생을 교생이라 하는데 교생의 수는 군현의 등급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어 있어서 장성이나 진원과 같은 현의 향교는 30인으로 정해져 있었다. 교생에게는 군역 면제의 특전이 주어지고 학비는 관비에서 충당되었다. 교육의 장려는 수령의 직책 가운데 하나로 규정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시되었다. 향교에서 교육을 받고 생원·진사시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들어가거나 문과에 응시할 수가 있었다.

향교 건물의 구조는 성균관의 축소판이었으므로 문묘를 중심으로 정전(대성전)과 동서 양무를 두고, 명륜당 등의 생도 교육에 필요한 부속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건립 당시 장성향교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장성군읍지』에 등재된 규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건 물 : ο정전(문묘, 대성전) 3칸 ­ 공자 및 4성, 10철, 송조 6현 배향
ο동·서무 각 3칸 ­동방 16현 모심
ο 명륜당 7칸 ­ 강학 장소
ο 기타 ­ 제물고(祭物庫), 신문, 외문, 고사(庫舍), 동랑, 북랑 등 모두 36칸
인 원 : 재수(齋首) 1인, 장의 2인, 색장 2인, 한장(汗長) 1인, 고직 1인
교 생 : 70명
『장성군읍지』에서 교생의 정원이 70명으로 늘어난 것은 조선 후기에 입암산성이 수축되면서 장성이 도호부로 승격되었기 때문이다.

지방에는 관학인 향교 외에 서원이라는 사설교육기관이 조선중기부터 설립되기 시작했다. 서원은 일반적으로 명유(名儒)·선현들의 연고지에 그 지방에 세력 근거지를 가진 사림들에 의해 세워져 지방의 양반 자제들을 가르쳤다. 경제적으로 중소지주적 기반을 갖고 있던 이들은 성리학이 전해진지 얼마 안되는 고려말부터 그들의 본거지에다 서재나 정사(精舍)를 세우고 후진을 교육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한 걸음 나아가 서원으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조선 최초의 서원은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었다. 백운동 서원은 그 후 명종 5년(1550)에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란 편액을 하사 받아 사액(賜額) 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이 서원이 봉사(奉祀)한 선현은 이곳 출신의 안향이지만 학규는 주자의 백록동 학규를 본받음으로써 종래 서재나 정사가 갖고 있던 장수(藏修), 강학(講學)의 기능에서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祠廟)를 갖추고 엄격한 학규에 의하여 운영되는 서원의 단서를 열게 되었다.

서원은 사림의 세력기반이자 구심점이기도 했다. 따라서 사림세력이 일찍이 성장한 지역에서는 서원의 설립도 빨라질 수 있었다. 이리하여 각 지방에서는 사림의 출자와 국가의 보조로 서원을 세워 그 지방의 사림과 연고가 있는 선현을 봉사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한편 국가에서도 유서가 있는 서원에는 편액을 하사하고, 전지와 서적, 노비 등 재정상의 보조를 해주었을 뿐 아니라 면세·면역의 특전까지 주어 이를 장려하였다.

이리하여 명종 때에는 17개의 서원이 세워진 것을 비롯하여 선조 때에 들어와 사림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됨에 따라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되어 선조 때에만 54개의 서원이 세워지고 그 중에서 당대에 사액을 받은 서원만도 21개에 이르렀다. 서원은 지방에서 중소지주층의 지식 수준을 향상시키고 사림의 저변을 확대함으로써 이들이 정치여론집단을 형성하고 훗날 붕당정치의 저변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서원 설립의 실태를 유형상으로 나누면 ① 문인에 의한 설립 ② 후손 및 동족에 의한 설립 ③ 향인(鄕人)에 의한 설립으로 구분할 수 있다. 초창기에는 문인에 의한 설립이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였으나 후기에 들어와서는 후손이나 동족에 의한 설립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게 되어 서원이 남설되기에 이르렀다. 서원의 배향 인물은 설립 초기에는 명유(名儒)가 중심이었으나, 서원 건립의 주체가 후손이나 동족 등 문중 중심으로 바뀌면서 충신, 공신, 고관 등으로 확대되어 갔다.

전라도 지역에 최초로 건립된 서원은 명종 19년(1564)에 세워진 김굉필을 봉사한 순천의 옥천서원이었다. 선조 때에는 전라도에만 12개의 서원이 설립되었다.장성에 최초로 세워진 서원은 선조 23년(1590)에 설립된 필암서원(筆巖書院)이다. 김인후를 배향한 필암서원은 현종 3년(1662)에 사액되었다. 모암서원(慕岩書院)은 고려 이래로 서능(徐稜)의 사우로 있다가 조선 인조 26년(1648) 이후에 서원으로 전환되었던 것 같다. 즉 『증보문헌비고』에 "고려 때에 사우를 건립하였고, 인조 무자년에 중건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이 때에 서원으로 전환한 사실을 중건이라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조 무자년은 1648년이다.

참고로 장성지역에 건립된 서원과 배향인물을 살펴보면 다음 [표 2-25]와 같다.[표 2-25]에 나타난 바로 본다면 1677년에 건립된 추산서원과 봉암서원은 주향과 배향이 같은 문중인으로 되어 있어 후손이나 문중에 의하여 설립되었던 것 같다. 학림서원(鶴林書院)의 경우도 김온과 김응두, 김영열, 박희중과 박준철이 각각 같은 문중이어서 김씨와 박씨의 문중에서 공동으로 건립한 것 으로 보인다. 문중에 의한 서원 설립에서는 '강학(講學)의 장소'라는 서원의 일차적 기능이 흐려지고 봉사 위주의 성향이 현저한 상태에서 가문의 권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짙다.

[표 2-2] 장성 지역의 서원

[표 2-2] 장성 지역의 서원 - 서원, 창건연대, 사액, 주향, 배향을 나타낸 표
서 원창 건 연 대사액주 향(추향년)배 향(추배년)
필암서원15901662 김인후양자징(1786)
모암서원고려시 건사서 능조영규(1667), 조정로(1667)
-1648 중건-최학령, 정운용, 김우급 (이상1678)
추산서원1677기건기효간, 기정익
봉암서원 변이중변경윤(1707)
학림서원1624 영당 김영열, 김 온, 박희중
-1688 서원 김응두, 박준철(이상1718)
가사서원1559 백산사의재 이제현백사 이항복 (가산서원으로 이설시 배향)
-1766 가산서원-

국가적인 입장에서 볼 때 교육의 장려는 유능한 인재를 기르기 위한 것이었으며, 개인에게 있어서도 교육은 과거를 위한 준비에 중점이 두어져 조선시대의 교육은 관료로의 진출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에 있어서는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가 중시되었다.

조선시대의 과거는 문과, 무과, 생원·진사과, 잡과로 대별되었고 문치주의의 경향으로 문관시험인 문과가 가장 중시되었다. 과거 중에서 가장 경쟁이 심한 문과에는 생원·진사과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 성균관 유생 그리고 현직관료가 응시할 수 있으며, 자, 묘, 오, 유의 3년마다 돌아오는 식년에 정기시험을 치러 33명을 뽑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수시로 임시시험이 실시되어 이 원칙은 지켜지지는 않았다. 문과에 합격하면 고급 문관으로 등용되거나 승급되었다.문과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경학에 밝은 자를 뽑는 생원과와 문학에 뛰어난 자를 선발하는 진사과로서 이것 역시 3년마다 각각 100명씩을 뽑았다. 생원·진사과에는 향교와 사학의 학생이 응시할 수 있었고, 여기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들어가거나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다.

관료가 되려는 사람은 향교나 서원에 들어가 유학을 공부하여 생원·진사과에 응시하고 여기에 합격하면 다시 성균관 유생이 되거나 문과에 응시하여 합격하는 것이 정상적인 코스였다. 장성 지역에서 이러한 경로를 밟아 조선전기에 문과에 합격한 자를『장성군읍지』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표 2-26] 장성 출신 문과 합격자 (삼계·삼서·동화는 제외)

[표 2-26] 장성 출신 문과 합격자 - 시기, 등과자, 인원을 나타낸 표
시기등 과 자 (등 과 년)인원
태 조심계년 김 온 박 온3
태 종박희중(초명 박희종 신사) 김극신(을유) 심 연(갑오)3 ⑶
세 종이견의(기유)1 ⑴
세 조*반순효(정축)1
성 종정이공(기해) 정이득(병오) 정이량3 ⑵
연산군김숭조(을묘) 김낭원(신유)2 ⑵
중 종**정 순(경오) 박수량(갑술) 김 기(기묘) 김응두(임오) 정희렴(을유) 김인후(경자)7 ⑺
명 종김백물(기유)
선 조변이중(계유) 변경윤(계묘)-

고딕은 국조방목에 등재되어 있는 인물임. ( ) 속의 간지는 『국조방목』의 합격한 해임.
* 반순효는 『국조방목』에는 손순효로 되어있음.(세조 정축방)
** 정순(鄭洵)은 『장성군읍지』에는 정순(鄭珣)으로 표기되어 있고 진원인으로 되어있으나 『국조방목』에는 연일인으로 되어 있으며 그의 손자로 되어있는 정이공, 정이득은 방목에는 조부의 이름이 연(淵)으로 표기되어 있어 동인인 여부를 확인할 수 없음. (전형택)

2. 문학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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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문학은 한문으로 쓰여진 한문학, 우리말로 쓰여진 국문학,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진 구비문학으로 가를 수 있다. 이 셋 가운데 지배계급에 속했던 사대부들의 가치관과 미학을 표현했던 한문학이 주류를 이루었고 국문문학과 구비문학이 기층문학으로서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한문학으로는 한시와 부, 한문소설, 야담 등이 있고 국문학으로는 악장, 가사, 시조, 고대소설, 민요, 전설, 민담, 무가, 판소리, 가면극, 탈춤, 인형극, 굿 등이 있다. 이 시대의 장성문학을 다룰 경우 국문문학이나 구비문학은 남겨진 자료나 기록이 미미하여 일반적인 추론에 그칠 수밖에 없고 개인문집으로 전해진 한문학을 중심으로 이 시기의 문학을 서술할 수밖에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전남의 북쪽 끝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장성은 전남문화의 중심지인 광주와 나주에 가까워 담양과 함께 전남문화의 중심권을 형성하였던 고장으로 이들 중심권과 교류가 매우 활발하였다. 무등산 자락을 중심으로 면앙정가단, 성산가단 등이 형성되어 호남가단의 중심을 이루었고 호남전역의 이름 높은 문인들이 모여들어 서로 사귀고 시를 화답하였다.

박상, 박우, 박순, 송흠과 송순, 양산보, 임억령, 임형수, 나세찬, 유성춘, 유희춘, 김인후, 기대승, 고경명, 김성원, 김윤제, 정철, 임제, 양팽손, 양응정, 최경창, 백광훈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교유하였고, 이들과 사제관계 또는 인척관계로 맺어진 문인들과 전국에서 이들을 찾아오는 문인들이 교유하였다.

이 문학권의 특색으로 정익섭 교수는 학연, 지연, 혈연으로 긴밀히 맺어져 있으며 학파와 당파로 볼 때 서인과의 친근성이 매우 두드러짐을 지적하였는데, 같은 도내이면서도 남인들과는 접촉이 소원했음은 당시 시대상의 반영으로 보인다. 조선조 말까지 장성은 대학자들을 배출한 고장이어서인지 두드러진 문학가들을 많이 배출하지 못한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현재 65개의 개인문집이 간행되었고, 발간되지 못한 문집이 10여집 있다. 장성문학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들 문집을 연구하여 그 문학적 가치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장성이 낳은 훌륭한 인물이나 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문학적 세계를 다루려고 한다. 이들은 당시에 문필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계층이며 문학 독자층을 형성할 수 있는 계층이기 때문이다.

(1) 장성문학의 선구자들

장성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인물로는 박희중(朴熙中), 심연(沈涓), 송흠(宋欽), 기건(奇虔), 이재인(李在仁), 김개(金漑), 김숭조(金崇祖), 이장영(李長榮), 이만영(李萬榮), 박수량(朴守良), 유성춘(柳成春)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오랜 관직생활을 했던 사람들과 연산군 중종 때 사화를 피하여 낙향했던 사림파 문학인들로 구분할 수 있다.

위남(葦南) 박희중은 진원출신으로 1401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직제학을 지낸 분인데 애석하게도 시문이 다 전하지 못하고 1920년에야 후손이 간행한 위남선생문집이 전한다.김개(金漑)(1405∼1484)는 본관이 영광으로 1458년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전하는 문집이 없다.청파 기건(奇虔)(?∼1460)은 1448년 전라도 관찰사, 1453년 대사헌이 된 인물로 장성에 이주하였다. 기대승의 아버지 기준과 함께 장성문학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점필재의 제자로 무오사화를 피하여 삼계 백산에 낙향하여 화초정(花草亭)을 짓고 은거한 이재인(李在仁)(1415∼), 그의 아우 대사헌 이유인(李有仁), 사화로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한 이장영, 이만영 형제가 있으며 화초정·관개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종윤(李從允)(1431∼1494)은 호는 송와(松窩), 본관은 경주, 사헌부 장령, 사간원 정언을 거쳐 시강원 보덕, 제주목사, 제주목사시 선정을 베푼 것으로 유명하다. 지지당(知止堂) 송흠(1459∼1547)은 장성문학의 선구자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다. 세조4년 삼계에서 출생하여 1492년에 문과급제하였다. 김안국과 같이 공부한 그는 전주부윤 나주목사 전라도 관찰사로 호남의 목민관이 되었다. 고향에 관수정(觀水亭)을 짓고, 박우, 양팽손, 송순, 임억령, 오겸, 나세찬, 김인후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최산두, 윤구, 조광조 등 기묘명현들과 가까웠다. 특히 양팽손, 송순, 나세찬은 그의 제자들이며 양팽손의 아들인 송천 양응정도 그의 학맥과 이어지는 인물이다. 송흠은 시문에 뛰어나 많은 시가 전한다. 송흠은 물의 철인이요 물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원형이정의 사상을 물에 구현하여 철학화하고 문학화한 시인이다. 별시장원한 글에서는 목민관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물에 비유하여 여실히 나타냈고, 관수정을 짓고 이름 붙인 사유를 쓴 글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관수정운에서는 명경지수의 시심을 노래했다. 특히 그의 유고 중에 의정부 좌참찬의 명을 받고 고향에서 상경하여 돌아오기까지를 기록한 기행록(記行錄)은 당시의 풍습을 잘 담고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문집으로는 지지당유고(知止堂遺稿)가 전한다.

정혜공 박수량(貞惠公 朴守良)(1491∼1554)의 호는 아곡(莪谷)이요 본관은 태인이다. 15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좌참찬 호조판서 지중추부사에 이르기까지 38년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오랜 관직생활에도 청렴, 결백, 강직하여 청백리로 여러 번 표창을 받았다. 그의 청렴에 감동한 명종(明宗)은 그의 집을 청백당(淸白堂)이라 이름짓고 죽었을 때에 서해 바다 돌을 골라 하사하면서 비문 없이 그대로 세우도록 했다. 박수량은 연산군 폭정에 저항했던 홍문관교리 김개에게 배웠다. 문장이 뛰어났으나 청백리라 공적을 남기는 일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그의 시문이 남겨지지 않았고 1945년에 후손이 간행한 아곡실기(莪谷實記)에 시 4수, 부 5수가 전할 뿐이어서 아쉽다.

나옹 유성춘(懶翁 柳成春)(1495∼1522)은 본래 해남 사람으로 최부의 사위인 유계린(柳桂隣)의 아들이요 유희춘의 형이다. 1519년 기묘사화에 유배되었다가 장성 진원에 정착하였으며 동생 유희춘도 담양 창평에 이주하였다. 당시 최산두 윤구와 함께 호남의 삼걸(三傑)이라 칭송 받았고, 허균이 거론한 호남 16걸에 든 사람이나 애석하게도 그의 문집이 전하지 않는 듯하다.서청헌 김숭조(西淸軒 金崇祖)(1465?∼1519)는 1495년 문과급제하여 경기도사 사헌부지평에 이르고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김굉필의 제자로 시문이 뛰어났으나 전하지 않으며, 그의 아들 김기(金紀)(1500∼1535?)는 자암 김구의 문하생으로 1519년 문과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부응교에 이르렀으나 병화와 화재로 시문이 유실되어 일기 1편이 전한다.김경우(金景遇)는 호가 요월정(邀月亭)이요 김기의 아들로 1565년 공조좌랑을 그만두고 황룡에 요월정을 짓고 휴식하면서 음풍영월하였다. 수많은 시인들이 찾아들어 교유하였다. 성자경, 김인후, 기대승, 정철과 도의계(道義 )를 하였다. 요월정에는 김인후, 기대승, 양응정, 김수항의 시가 현판되어 있다.

(2) 하서 김인후의 문학

거듭되는 사화와 정계의 파란으로 선비들이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는 한편 산수가 수려한 곳에 정자를 짓고 시를 화답함으로써 문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학문으로나 문학으로나 호남을 대표하는 인물이 하서 김인후이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는 황룡면 맥동에서 태어났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김안국과 최산두에게 수학하였으며 성균관에서 이황과 한 방에서 공부하였다. 인종(仁宗)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하서는 인종과 함께 삼대지치의 이상에 불탔으나 인종이 승하하자 낙향하여 시와 술로써 일생을 마쳤다. 면앙정 소쇄원을 비롯하여 호남의 명류들이 모이는 곳을 드나들며 시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정철, 조희문, 양자징, 기효간, 변성온, 최학령 등이 제자이다. 만년에 학문에 전념하여 기호학파의 중심에 우뚝 섰다.

김충렬 교수는 "학문적으로 하서는 이기(理氣)를 포괄·회통한 대심(大心)의 철학자다. 배타보다는 포용, 분석보다는 회통을 중시하였고, 모든 사물을 같은 생명 차원에서 교감했다."고 결론지었다. 이와 같은 사상이 녹아있는 그의 시에는 자연과 사물을 생명 차원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교감한 시들이 많다. 도학사상을 시로 표현하면서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시정을 표현하여 도학시(道學詩)의 절정을 이루었다는 평을 들었다.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
竹外風淸耳 대숲 너머 부는 바람 귀를 맑게 하고
溪邊月照心 개울가 밝은 달은 가슴을 비추네
深林傳爽氣 깊은 숲은 서늘한 기운 보내주는데
喬木散輕陰 높은 나무는 엷은 그늘 드리우네
酒熟乘微醉 술이 익자 살포시 취기를 띄고
詩成費短吟 시를 짓자 조용히 읊조리네
數聲聞半夜 한밤중 들려오는 처량한 소리는
啼血有山禽 피를 토하며 우는 산새의 울음

잔잔한 서정 뒤에 격정을 토로하는 것이 하서 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인종을 잃은 한과 울분을 노래한 그의 시는 도학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격정이 표현되어 있다. 인종을 그리워하는 시로 유소사(有所思)가 유명하다. "상사일야매화발(想思一夜梅花發)이라는 옛 시를 시제로 지은 시를 들어본다.

美人不可見 어여쁜 임 그리워도 볼 수 없으니
一去何當廻 무엇이 돌아올 길 막사옵니까?
別來閱星霜 작별한 지 몇 세월이 흘러갔기에
鏡裏朱顔  거울 속엔 백발이 성성합니다.
姮娥盈又缺 밝은 달은 찼다가 다시 기우는데
寸恨終離裁 이 마음에 맺힌 한은 풀리질 않네.
壁間綠綺琴 벽에 걸린 이름난 녹기 거문고
絃索生塵埃 줄에는 먼지만 수북하다오.
極目望山河 눈을 돌려 임 찾아 갈 길 찾아보지만
氷雪空崔嵬 얼어붙은 빙설만이 기구합니다.
遙夜不成夢 깊은 밤 잠 못 이루어 뒤척이다
搔首起徘徊 머리 긁고 일어나 서성댑니다.
宛然巧笑  방긋 웃는 임의 모습 완연하여서
忘却窓前梅 창 앞에 핀 매화인 줄 깜빡 잊었소
精神忽交通 정신이 홀연히 서로 통하니
靑眼爲君開 그대 위해 추파를 띄워 봅니다.
參橫月又落 샛별은 비끼고 달마저 지니
翠羽驚   취우새도 놀라서 푸덕입니다.
閒愁復 亂 잠재웠던 근심 걱정 다시 일어나
茫然自生哀 속절없는 슬픔만 더해 옵니다.
且就此花下 말없이 꽃 아래 다가가 앉아
酌彼黃金  술잔을 기울이며 취해 봅니다.

하서는 우리말 시가에도 관심이 깊어 한시 백련초해(百聯抄解)를 언해했으며, 정미사화에 죽은 임형수(林亨秀)를 애도한 시조를 썼다. 하서의 문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자연가(절로가)를 들어본다.

靑山도 절로절로 綠水도 절로절로
山절로 水절로 山水間에 나도절로
그中에 절로 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저서로는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과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가 있으나 전하지 않고 그의 도학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천명도(天命圖)만이 전한다. 하서집에는 1700여 수의 시가 전한다. 하서기념회에서 2년마다 학술발표회를 열어 대표적 논문을 정선하여 '하서 김인후의 사상과 문학'을 두 권 간행하였다.

(3) 임란을 전후한 장성문학

임란을 전후하여 장성문학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김인후의 문인들이 정철을 중심으로 활약하였고 기대승의 집안들이 광산 임곡 너부실과 장성에서 활약하였으며 변이중 집안들이 학문과 문학에 뛰어났고 정운룡, 김경수, 윤진 등이 활약하였다. 또한 서울에서 피난 와서 장성의 명문가와 혼인을 맺거나 정착한 권필, 조찬한과 그의 형 조위한, 양경우, 양형우, 정홍명 등 당대의 대문인들과의 교유가 이루어졌다.

고봉 기대승의 아들 기효증의 사위가 된 현주 조찬한, 그의 형 현곡 조위한, 그리고 그와 절친한 석주 권필이 장성 토천(지금 임곡 토말)에서 돌아가며 지은 토천연구(土泉聯句)는 유명하다. 권필은 해광 송제민의 사위요 의병장 윤진은 그의 매부이다. 또한 송제민은 광주목사 김응두(金應斗)의 아들 김대형(金大亨)의 사위이며 제봉 고경명은 김응두의 아들 김백균(金百勻)의 사위이다. 이들은 모두 송강 정철과 절친한 사이이니 당대의 대문인들이 장성과 인연을 맺고 활약하였던 것이다. 이 때의 문인들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기효간(奇孝諫)은 호가 금강(錦江)이요 본관은 행주이다. 기대유(奇大有)의 아들로 김인후와 일재 이항의 문인으로 평생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으며 추산서원에 제향한 서태수, 변성온, 변이평과 교유했다.박상의(朴尙義)(1538∼?)는 청계 박원순(朴元恂)의 제자로 천문지리에 통달했다. 명나라 장수 양원의 군사로써 공을 세웠다.정운룡(鄭雲龍)(1542∼1593) 호는 하곡(霞谷) 본관은 하동이다. 장성 북일면 사동 출생, 기대승의 문인으로 박순 고경명과 함께 공부하였다. 1589년 왕자사부가 되고 임란 때에 전사하였다. 황룡강 상류에 개천정사(介川精舍)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니 박순, 이정구, 고경명이 와서 시를 짓고 교유했다.김경수(金景壽)(1543∼1621) 호는 오천(鰲川) 본관은 울산, 기효간, 정운룡, 변이중과 교유했다. 기대승과 율곡 이이에 사사함. 1591년 송강의 천거로 예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송강이 유배됨으로써 물러났다. 남문창의 때 의병의 맹주로 크게 활약했다.

최학령(崔鶴鈴) 호는 율정(栗亭)이요 본관은 탐진이다. 김인후의 문인으로 1539년 정시문과에 장원했으나 홍패의 오자가 있어 받기를 거부하고 귀향하여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김백균(金百勻)(1525∼1584) 본관은 울산. 광주목사 김응두의 아들로, 제봉 고경명의 장인이다. 1549년 문과급제 관직이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 평안감사에 이르렀으나 윤원형 이량의 다툼에 희생되었다.
변이중(邊以中)(1546∼1611) 호는 망암(望菴) 본관은 황주. 율곡과 우계의 문하생이다. 1573년 문과급제. 1584년 황해도사 1592년 전라도소모어사가 되어 병마 군기를 수습하고 화차 300량을 제조하여 권율장군에게 보냄. 망암유고 1권을 1613년에 아들 변경윤이 편집하고 1958년에 간행함. 시 30편과 그 외 많은 글이 실려 있음.
윤진(尹軫)(1548∼1597) 호는 율정(栗亭) 본관은 남원. 장성에 은거함. 권필의 매부로 정유재란 때 입암산성에서 전사함.
김성길(金成吉)(1562∼1639) 호는 맥로(麥老) 본관은 울산. 이황 문하에 출입. 맥로유고에 시10여수와 그 외 글이 전함.
이희웅(李喜熊)(1562∼1648) 호는 기천(杞泉) 본관은 전의. 삼서 태생. 송천 양응정의 문인으로 그의 손서가 되었다. 1624년에 62세로 문과에 급제. 1987년에 간행한 기천집에 시13편을 비롯한 여러 글이 전한다. 인조의 요구에 따라 헌치평16책소(獻治平16策疏)를 올렸고 임란직후 호남지방 사류의 동향과 지역사회 동향을 쓴 글과 양산룡 양산숙의 의병활동을 기록했다.
조찬한(趙纘韓)(1572∼1631) 호는 현주(玄洲) 본관은 한양. 기효증의 사위가 되어 장성 토천에 정착함으로써 장성과 인연을 맺었으며 후손들이 장성에 살아 조비, 조휴, 조유상을 배출하였다. 유민탄(流民嘆)이란 가사와 소설 최척전(崔陟傳)을 쓴 현곡 조위한은 그의 형이다. 1606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낸 인물로 문장이 뛰어나고 시부에 능했으며 또한 명필이다. 조위한, 권필과 토천에서 토천연귀를 지었다. 당대 대문인으로 권필, 허균, 이안눌, 정철, 정홍명, 양경우 등과 교유했다. 문집으로는 현주집 15권이 전한다. 시조 두 수를 지었다.

貧賤을  랴�고 權門에 드러가니
침업슨 홍졍을 뉘 몬져 �자�리
江山과 風月을 달리�니 그  그리 못�리.

天地 몃번째며 英雄은 누고누고
萬古興亡이 수후  에 꿈이여 
어듸셔 망녕엣 거슨 노지 말라 하나니
변경윤(邊慶胤)(1574∼1623) 호는 자하(紫霞) 본관은 황주. 장성읍 가곡리에서 변이중의 아들로 태어남. 하곡 정운룡에게 수학하고 우계 성혼과 사계 김장생에게서 수학, 1603년에 문과급제. 1617년에 광해군 폭정을 피해 백암산 자하동에 은거함. 정홍명, 김지남, 장경세, 성혼, 김상헌, 권필 등과 교유함. 그의 문집 자하집은 초간본 미상이고 1898년에 간행함. 부10, 사1, 시 수백편이 전함. 잡저로 치재총화( 齋叢話)가 있음.

김우급(金友伋)(1574∼1643) 호는 추담(秋潭) 본관은 광산. 광해군 폐모시에 진사로서 생어모자 불의응차(生於母者不宜鷹此)를 내걸고 귀향한 문학자로 모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으로 추담선생집이 전한다.김여옥(金汝鈺)(1596∼1662) 호는 미산(薇山) 본관 광산. 우급의 아들. 1624년 식년문과에 급제. 예조 병조좌랑, 지평 사간 등을 지내고 1649년 한성부윤이 되고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황해도, 충청도, 관찰사, 형조참판을 지냈다. 병화와 화재로 시문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4) 백양사와 불교문학

백양사는 내장사와 선운사 등 많은 사찰을 말사로 거느린 유명한 사찰이다. 따라서 승려들이 지은 게송, 선시, 종교적인 깨달음을 기록한 글, 큰 스님들의 일생과 일화를 기록한 글, 수많은 신도들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또한 수많은 유학자들이 산사에서 공부하였고 전국의 유명한 문인들이 방문하여 시문을 남겼다. 스님과 유학자들이 주고받은 시문도 많았다. 현재 쌍계루에 유명한 시인들의 시가 걸려 있다. 이러한 백양사 문학권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앞으로 이에 대한 자료발굴과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김재수)

3. 조선전기의 미술·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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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미술사상 회화가 가장 발달하였던 시기가 조선시대였다. 조선시대에는 양반화가들과 화원들에 의해 회화가 가장 폭넓고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도화원이 설치되고 그 조직이 체계화되어 이를 토대로 많은 화원이 배출되어 초상화, 인물화, 산수화, 영모화, 화조화 등 각 분야에 걸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도화원은 1463년부터 1474년까지의 어느 때인가 도화서로 개칭되었는데, 이것은 아마 도화원의 등급을 낮추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도화서는 종6품아문으로 최하위 기관이었다. 이 도화서가 고려시대의 도화원을 모방한 것인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화원들은 초상화 제작, 궁중의 각종 행사 모사, 풍경 사생 등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일체의 회사(繪事)에 참여하였고, 그 밖에 사대부들의 요청에 따라 계회도(契會圖)나 사인(士人)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심지어 청화자기의 문양을 그리는 데에도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에 파견되는 사절단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도화서의 조직이 체계화되어 있어 이 기관을 통하여 훌륭한 화원이 배출되어 우리나라 회화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찍부터 중국의 화론에 바탕을 둔 서화일치의 사상이 소개되어 소극적이나마 선비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선비화가들은 비록 중국의 경우처럼 화원들의 화풍과 집합적으로 구분되는 양식을 형성하지는 못하였지만, 항상 새로운 화풍의 수용에 있어서 화원들보다는 진취적인 태도를 유지하였고, 또 회화의 발전에 있어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조선초기에는 고려시대에 축적된 중국회화가 다수 전승된 이외에 연경(燕京)을 중심으로 하여 명(明)과의 회화교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 결과 중국의 화풍이 전래되어 한국적 화풍의 형성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조선초기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화풍으로는 이곽파 또는 곽희파화풍을 들 수 있으며, 남송·원체화풍이 그에 버금 갔었다고 여겨진다. 이 두가지 화풍들은 이미 고려시대에 도입되어 조선초기로 전승되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안견과 같은 거장이 곽희화풍을 소화하여 [몽유도원도]에서와 같은 개성이 강한 독자적 양식을 발전시킨 것이다. 곽희화풍을 토대로 발전된 안견의 화풍은 조선초기의 화단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안견파의 그림으로서 삼단구도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 양팽손의 [산수도]이다. 양팽손(1488­1545)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삭직된 후 1521년 고향인 전라도 능성현 쌍봉리의 시냇가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1545년 8월 18일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의 [산수도]는 은둔생활을 노래한 두 수의 시문이 상단에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학포당에서 은둔생활을 했던 1521년부터 1545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양팽손은 안견의 화풍을 따른 대표적 선비화가로 알려져 있거니와 그의 [산수도]는 이를 입증하여 준다.

조선전기에는 곽희화풍을 밑거름으로 하여 안견의 화풍이 가장 널리 추종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의 화가들은 대부분 이미 뚜렷한 한국적 화풍을 형성하였다. 16세기 전반기의 화가들은 15세기에 형성된 화풍에 보다 집착하는 전통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세종대이래 조선초기의 문화가 뿌리를 깊이 내렸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초기의 회화는 한일간의 활발한 문화교류의 영향으로 일본 회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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