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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마을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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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절 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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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혁

ο 지석묘가 쌍웅리·신성리·덕재리·약수리·성암리 등지에 남아 있으며 백제시대 고시이현에 속하였다.
660년 신라의 영역이 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고시이현이 갑성군으로 개칭되고 892년(진성여왕 6) 후백제 세력으로 들어가 45년간 지속되었다.
ο 936년(태조 19) 고려의 영역이 되어 태조 23년 장성군으로 개칭되고 1018년(현종 9) 영광군에 내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가 파견되고 치소가 북일면 오산으로 옮겨졌다.
ο 1413(태종 13) 장성현이 현감고을이 되었으며 조선중기 장성현에 15개 면이 설치되었으며 효종 6년(1655) 장성현이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ο 영조 25년(1759) 발간한 [여지도서]에 북하면은 437호 1,469명·북상면은 603호 2,168명 이었다.
정조 13년(1789) 발간한 [호구총수]에 북하면은 534호 1,378명으로 28개 마을이 있었고 북상면은 687호 2,859명 37개 마을이 있는데 그 중 21개 마을이 현북하면 지역에 있었다.
ο 1906년 9월 24일 창평현 갑향면이 장성군에 편입될 때 월성리 연동마을이 북하면에 편입되었다.
1912년 간행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북하면 32개 마을 북상면은 40개 마을이었는데 북상면의 25개 마을이 현 북하면 지역에 있었다.
ο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의하여 북하면에 8개 리, 북상면에 8개 리가 편성되었는데 그중 북상면 4개 리가 현 북하면 지역에 있었다.
ο 1975년 장성호의 건설로 북상면이 폐지되면서 신성리·쌍웅리·덕재리·동현리가 북하면에 편입되었는데 동현리는 완전히 수몰되고 덕재리 한 마을만 남았다.

(2) 약수리(藥水里)

약수리는 면소재지이며 약수·학림·황룡·가인 마을로 구성되었다. 약수에 지석묘가 있고 백제사찰인 백양사가 있는 점으로 보아 오랜 옛날부터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호구총수(1789년)에 약수·학림·가인·손마·입석이 기록되어 있다. 백양골에는 괴비동(고비, 高飛)·동구(洞口)·서당골·탑쟁이·북당골 등의 마을이 있었는데 200년이 못된 마을이었던 것 같으며 이 마을들은 6·25때 소각·독립가옥 철거·국립공원 개발 등으로 없어지고 가인만 남아 있다.

ㅇ 학림(鶴林)

남양방씨가 200여전 중평에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고 하나 그 이전에도 인가가 있었던 것같다. 김해김씨가 4대, 제주고씨가 3대째 살고있으며 6·25후 인구이동이 심한 마을이다. 6·25때 7명이 사망했으나 수복 후 인구가 늘어 현재 71호 212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날 냇옆 숲에 학이 많이 깃들었다고 한다. 인물 : 채상영(항일운동)·채봉선(항일운동)·방규원(한약방 시혜).

ㅇ 화룡(華龍)

옛날에는 마을 뒤쪽 서석골 부근에 입석 마을이 있었는데 170년전에 앞쪽에 화룡마을이 생겼다. 진주정씨가 270여년전 들어왔으며 수원김씨 200년·밀양박씨 4대·밀양손씨 3대·광산김씨가 3대째 살고 있으며, 그 외 성씨는 6·25후에 들어왔다. 한일합방 당시 입석 22호·부치댕이 10호·화룡 8호가 1914년 한 마을이 되었다. 초등학교가 들어선 후 52호로 늘었는데 6·25때 52명이 죽었다. 40호 정도가 살다가 백양사 국립공원 정비때 철거민들이 옮겨와 44호 145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입석(立石)­회관 앞길을 중심으로 뒤편이며 옛날에는 북상면에 속했다. 서숙골(서석)도 입석에서 유래되었고 선돌(입석)이 있었다. 부치댕이(부처댕이) ­ 원래 북상면 석불리였으며 돌부처가 있었다 한다. 화룡 ­ 마을 앞에 용머리 산이 있어 붙여졌다고 한다. 인물 : 김영희(북하면장)·김홍상(북하면장)·김병석(북하면장)·김영석(초등교장)·김병택(공군중령)·정종연(농협장)·김동욱(건설부서기관)·김병삼(중정서기관)·김철상(담양농협상무)·김연상 (대전역장)·김우상(고흥군교육장)·김원상(강경역장)·김백규(통일주체 대의원, 면장). 유물유적 : 지석묘 2기·입석 4기.

ㅇ 가인(加仁)

백양사 계곡에 6·25전까지 괴비동·북당골·선마실·서당골·탑정이(탑동)·가인암·동구(옥가모탱이)·채시동 등이 있었는데 호구총수에는 선마실(손마, 孫馬)과 가린암(加仁岩)만 나온다. 괴비동·북당골·서당골을 6·25때 불타 없어졌으며 선마실·옥가 모퉁이는 국립공원 개발 때 철거되고 가린암만 남았다. 가인은 옛일은 알 수 없고 150년전 청주한씨가 들어왔으며 광산김씨가 4대째·봉산이씨가 3대째 살고 있다. 6·25때 4명이 죽고 가옥이 전소되었으며 수복 후 14호가 들어와 그 정도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 백양상가는 1935년 일광정 남쪽 200m 지점에 백양관(여관)이 있어 사진관까지 하다가 없어지고 1955년부터 여관 등 상가가 들어 섰으나 1979년 모두 철거되고 이듬해 당시 손마마을을 철거하고 그 일대에 상가지구를 조성하여 현재 20여 업체가 들어서 현재 총 7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가인 -가인봉에서 유리된 듯하다. 유물유적 : 백양사(白羊寺, 문화재편 참조).

ㅇ 약수(藥水)

약수와 학림은 한 마을이었는데 1965년 분리되었다. 그러나 호구총수(1789년)에도 별도로 나온다. 남양방씨가 처음 살기 시작하였다고 하며 장흥마씨가 3대째·청안이씨가 2대째 살고 그 외는 모두 6·25 후에 들어왔다. 도로변에 주막집·대장간 등 영업집이 몇 호 있다가 약수장이 서면서부터 [약수쟁이]로 널리 알려졌다. 일제때 10여호 해방 후 18∼9호 였는데 6·25때 피난와서 정착하여 20여호가 늘었다. 1976년 소도읍 가꾸기로 상가가 정비되었으며 1979년 백양사 공원정비때 철거민 25호가 이거해와 현재 80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학림뒷 계곡(호텔고랑)의 [약수정(藥水井)]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인물 : 임효선(3·1만세운동)·마신엽(항일의병활동)·이병직(통일주체 대의원, 문화훈장화관장)·서권수(군의원)·김형곤(공군중령). 유물유적 : 지석묘(약수중학교 내)

(3) 중평리(中약坪里)

ㅇ 중평(中坪)

회촌이 먼저 성촌되었으나 차츰 중평이 커졌다고 한다. 울산김씨가 400여년전 회촌으로 들어왔다가 후에 중평으로 옮겼으며 남양방씨가 350여년전에 중평으로 들어왔다. 해방후까지도 회촌 50호·중평 60호 였는데 6·25때 30여명이 죽고 회촌 전체와 중평 10여호가 소각되었다. 그후 회촌은 8호가 살다가 없어졌으며 중평은 계속 호수가 늘고 1990년대 들어서 회촌과 뒤뜰 쪽에 여관·식당등이 들어서 현재 94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중평 ­ 둘가운데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하며 회촌은 회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회촌(村)]이라는 설이 있으나 [회촌(會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물 : 김인수(북하면장)·송재근(북하면장)·김동철(이화여대교수)·김영(목포대교수)·김종욱(조선대교수)·강대석(공주사대교수)·황인규(의학박사)·김병득(의학박사)·김재영(의학박사)·이기상(의학박사)·김동진(의사)·김병호(박사 스리랑카 대사관 근무)·김재형(농협장)·김동호(의사, 군의원, 민의원)·김인흥(교육장)·김병권(사무관)·김병철(중앙청총무과장)·김재현(건설부과장)·김종찬(한국통신과장)·김병훈(서기관)·이용준(육군대령)·김병관(군의원) 황인영(사법고시 합격). 유물유적 : 김인후 부조묘·회계사지·스무나무(3왕조를 거쳤다고 하며 수령 1000여년).

ㅇ 강선(降仙)

파령윤씨가 400년전 피난했다는 설이 있으며 경주최씨가 200년전에 경주김씨가 170년전 피난 했다고 한다. 그후 130년전 인동장씨·100여년전 남원양씨·80여년전 울산김씨·50여년전 밀양박씨·30여년전 광산김씨가 들어왔다. 해방 후 50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4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으나 42호가 다시 들어왔으며 19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신선이 내려온 곳이라는 뜻으로 강선동이라 한다. 인물 : 백동국(일제때 의병활동). 유물유적 : 지석묘(마을뒤 언덕 숲속에 2기, 강선고개에 몇기가 있었는데 도로개설시 없어졌다.

ㅇ 용산(龍山)

강선동에서 1.5km 떨어진 산속마을이다. 원래 기고개 동쪽 500m 지점에 마을이 있었는데 200년전 화재로 현재의 터로 옮겨졌다고 하나 호구총수의 기록에는 없다. 160년전 풍천노씨와 비슷하게 강능유씨가 들어왔으며 일제때 김해김씨가 들어왔다. 25호가 살다가 6·25때 전소하여 3년후 17호가 되돌아 왔으나 현재 7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주변에 [용의 혈]이 있다하여 용산동이라 부른다.

(4) 성암리(星岩里)

성암리는 성암·명치·용동 3개 마을이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광암(廣岩)·우암(牛岩)·세곡(細谷)이 나오는데 광암은 알 수 없고 우암은 성암이며 세곡은 용동이다. 명치는 200년이 못된 마을인 것 같으며 명치동에 속한 도장동이 있었으나 6·25때 소각된후 복구되지 못하고 말았다.

ㅇ 성암(星岩)

450년전에 철원주씨가 들어왔고 여양진씨·초계최씨·배씨가 임진왜란때 들어왔다고 한다. 그후 약 300년전에 김해김씨·200년전에 남원양씨·일제말 창녕조씨가 들어왔다. 구한말 100여호가 화재로 80호로 줄었다고 하며 6·25때 3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현재 51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날에는 소바위(소위, 牛岩)라 했다가 성암으로 변했다. 소왓들에 소바위가 있다. 인물 : 박판기(항일의병)·김병천(광주동장)·염귀(농협장). 유물유적 : 지석묘(9기), 성암초등학교 건물(1990년 폐교, 전남교육청 자연학습장).

ㅇ 명치(鳴雉)

안동권씨가 130년·김해김씨 110년·연안차씨 100년·밀양박씨 80년·달성서씨 80년·경주최씨 50년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해방후 35호 정도였는데 6·25때 8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으나 그후 점차 복구하여 본마을에 25호가 살고있으나 물통골에 목욕탕이 들어선 후 식당·주유소 등 상가가 들어서 총 38호가 살고 있다. 물통골 안쪽에 도장동(道藏洞)이 있었는데 도장동 7호·배암골 5호·장작터 3호 총15호로 윤씨·장씨·서씨가 살았으나 6·25때 소각된 후 복구되지 못하였다. 동명유래 : 마을 뒷산이 꿩형국인데 앞에 매(매봉)가 있어 먹이(콩바위)를 먹지 못하고 울고 있다 하여 명치라 부른다고 한다. 유물유적 : 지석묘(마을 위쪽 도로변, 일명 콩바위).

ㅇ 용동(龍洞)

옛날 여양진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남원양씨·나주최씨·밀양박씨가 차례로 거쳐 갔다고 한다. 현재 안동김씨가 8대째 울산김씨가 120여년 살고있으며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해방후 74호의 큰마을이었으나 6·25때 마을이 전소되고 11명이 사망하였으며 현재 17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호구총수에는 [세곡(細谷)]으로 나온다. 용머리 산이 마을을 등지고 있어 용동으로 고쳤다고 한다. 인물 : 김병하(전남대학교 교수)·김용기(북하면장)·김진오(농업기반공사광주댐소장)·김동준(전대한교육보험사장). 유물유적 : 옛날에 갈모 감나무 밑에 조산(造山)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마을입구에 150cm의 입석이 있다.

(5) 대흥리(大興里)

대흥리는 면의 동쪽 대흥·갈마·대정 3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갈마리·대정곡·적암(赤岩)이 기록되어 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적암은 담양군 홍암리에 합쳐지고 당시 담양군에 속했던 천변리 일부가 대흥마을로 합병되었다.

ㅇ 대흥(大興)

장성군의 최동쪽 마을이다. 초계최씨와 철원주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김해김씨가 약 200년전에 들어왔다. 그 후 청주한씨가 120년전에·광산김씨가 100년전에·창녕조씨가 50년전에 들어왔으며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원래 마을 안길을 중심으로 안쪽은 대흥리로 30호정도 바깥쪽은 담양군 천변리로 7호가 살았는데 1914년 통합되었다. 광복 후 40호 정도가 살다가 6·25때 15명이 사망하고 마을전체가 소각되었다. 2년후 35호가 다시 들어왔으나 이농현상으로 2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촌]·[신천]이라 부르다가 안쪽은 [대흥리] 바깥 냇쪽은 [천변리]라 하였다.

ㅇ 갈마(渴馬)

옛날 한양조씨가 살았다는 말이 전하여 170년전 창녕조씨, 90년전 청주한씨, 1934년 광산김씨, 1942년 전주최씨, 6·25직후 고부이씨·의성김씨가 각각 들어왔다. 일제때 31호였으며 6·25때 마을 전체가 불에 탔다. 현재 20호가 살고 있다. 유물유적 : 순천박씨재각(1934년 건립). 동명유래 : 갈마음수(渴馬飮水)라는 명당이 있다한다.

ㅇ 대정(大井)

최씨가 오래 전에 살았다고 한다. 의성김씨가 370여년전에 들어왔다가 떠난 후 그의 후손이 150여년전에 다시 들어왔으며 광산노씨가 4대째 살고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일제때 30여호가 광복후 25호로 줄어 6·25를 만나 5명이 줄고 마을전체가 소각되었다. 5년 후 10호가 다시 들어와 14호까지 되었으나 현재 8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큰샘이 있어 [한알실] 즉 [대정(大井)]이라 불렀다고 하나 큰 샘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인물 : 김상봉(일제때 의병활동).

(6) 월성리(月城里)

면의 최남단 월성·연동으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에는 월성과 판교촌(板橋村)으로 나온다. 연동(판교촌)은 원래 창평현에 속하였으나 1909년 장성군에 편입 되었으며 판촌·너드리 등으로 부르다가 1965년 연동으로 바뀌었다.

ㅇ 월성(月城)

320여년전 진주강씨가 들어왔다. 그 후 많은 성씨들이 거쳐갔으며 일제때 김해김씨·밀양박씨가 들어오고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100여년전에 부릿점(쇠 공장)이 있어 70호 정도 살다가 공장이 없어지면서 호수가 줄어 해방 후 40호가 되었다. 6·25때 15명이 죽고 전호가 소각되었으나 35호가 다시 살다가 이농현상으로 25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뒷계곡 달령골(월령암, 月嶺岩)에서 유래되었다. 인물 : 강종흡(육군중령).

ㅇ 연동

270여년전 곡산연씨가 최초로 입향했다는 설이 있으나 진주강씨가 먼저 들어온 것 같다. 그후 고령신씨와 전주이씨(효령대군파)가 들어와 200년 이상 살고 있으며 전주이씨(양녕대군파)가 180년 김해김씨가 170년, 여산송씨가 150년, 나주임씨가 100년, 한양조씨가 3대째 살고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100년전에는 하낙골 개천을 중심으로 남쪽은 창편현 갑향면 판촌마을로 55호 북쪽은 장성군 월성마을로 20호쯤 되었는데 1909년 갑향면이 장성군에 편입되어 두 마을이 합쳐졌다. 광복후 79호(연동 55호, 두무동 24호)가 거주하다가 6·25때 11명이 죽고 전마을이 소각되었으며 다시 50호가 살다가 지금은 27호가 살고 있다. 두무동(斗舞洞)은 연동과 같이 창평에 속했으며 김해김씨가 13대째(270여년전) 살았다고 하나 호구총수에는 보이지 않는다. 밀양박씨·전주이씨 등이 살다가 1990년대에 없어졌다가 영업집이 1∼2호가 들어서 있다.

(7) 대악리

ㅇ 대악(大岳)

옛날 전주최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다. 300여년전에 강능유씨가 그후 여양진씨·김해김씨가 들어왔다. 평산신씨는 160여년, 밀양박씨와 하동정씨는 100여년, 전주이씨는 80여년전, 연안차씨·광산김씨·남양홍씨·달성서씨·청송심씨·장흥고씨·담양전씨 등은 6·25전후에 입향했다. 일제때 44호였으며 한지공장이 생기면서 58호로 늘어 6·25때 20명이 사망하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3년에 걸쳐 복구하여 70호 정도가 살았으나 이농현상으로 42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대손룡 아래 있는 마을이라 [대기(大基)]라 했다가 [대악(大岳)]으로 변하였다. 인물 : 강만희(북하남학교 설립자)·서기원(국가대표축구선수)·양광일(장성읍장)·양공식(육군소령).

ㅇ 풍기(豊基)

남원양씨가 최초 입향자라고 전하며 150여년전 김해김씨, 100여년전 담양전씨가 들어오고 그후 신안주씨·경주김씨·전주이씨가 일제때 수원김씨·나주정씨·연안차씨가 들어왔다 6·25때 7명이 사망하고 전가옥이 소각되었으며 현재 17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낙사혈의 북이 있다 하여 [북년동]이 [풍년동]이 되었다가 [풍기]로 바뀌었다. 인물 : 주권량(의사).

ㅇ 대방(大方)

옛날 창방(昌方)에서 노(盧)씨가 살았다는 말이 전하다 김해김씨가 임진난때 들어왔다고 하며 그 후 해주오씨·평산신씨가 살다가 떠나고 230여년전 청주한씨, 170여년전 남원양씨, 150여년전 평택임씨가 들어오고 하남정씨·천안전씨, 6·25후 전주이씨가 입향했다. 해방 후 47호(창방 17·대방 30)가 살다가 6·25때 10여명이 죽고 마을 전체가 소각되어 3∼4년후까지 복구하여 40호(창방 20, 대방 20)가 살았으나 이농현상으로 2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호구총수에는 [창방동(唱榜洞)] 그 이후부터는 [창방동(昌方里)]로 나오는데 옥녀가 배를 짜다가 잠을 잤다 하여 [잔밭]이라 하다가 [대방(大方)]으로 바꿨는데 1960년 창방과 대방을 합하였다. 유물유적 : 여주이씨정려·울산김씨재각·김해김씨재각.

ㅇ 장사(長沙)

370여년전 수원김씨가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제주양씨가 110년, 나주정씨가 90년, 진주강씨·도강김씨·달성서씨·해주오씨가 60년 되었으며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일제말엽 60호가 광복후 50호가 되어 6·25때 30명이 사망하고 마을전체가 소각되어 4∼5년후에 다시 50호가 되었으나 현재 39호가 살고 있다. 북쪽 200m쯤 안평(雁坪)에 3호정도 살았으나 1975년경 없어졌다. 동명유래 : [손용낙사]라는 유명한 명당과 관련하여 [장사(長絲)]라 했는데 [장사(長沙)]로 변했다고 한다. 인물 : 서덕규(국가대표 축구선수).

(8) 단전리(丹田里)

ㅇ 단전(丹田)

옛날 장수황씨가 살았다는 말이 전하며 도강김씨가 400년간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20여년전 전주이씨와 진주강씨·울산김씨·행주기씨가 차례로 들어왔으며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일제 때 58호(아리굿테 14·어버랑골 14·점작골 15호) 였으며 6·25때 9명이 죽고 전가옥이 소각되어 3∼4년후 다시 38호가 되었으나 현재 23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단봉하전(丹鳳下田)이라는 명당에서 유래되었다. 인물 : 김퇴술(한말의병)·김성열(군수)·김상순(면장)·김상고(사장)·김정호(병원장)·김현섭(장성군청과장)·김용진(면장)·김정용(의사). 유물유적 : 느티나무(보호수, 당산목).

ㅇ 신촌(新村)

오랜 옛날 배씨가 배숲골에서 그릇을 굽고 우씨가 우수방골에서 쇠부리를 하였는데 용수촌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아랫동으로 옮겼다고 한다. 해주오씨가 14대째 살고 있다. 약 150년전 김해김씨가 들어왔으며 밀양박씨와 평산신씨·인동장씨가 3대째 도강김씨가 50년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일제때 78호(장골 12·큰골 10·새터 15·아랫동내 29·한후리 12)였는데 6·25때 6명이 죽고 전가옥이 소각되어 5년여에 걸쳐 마을을 복구 35호가 다시 들어왔으며 기도원이 들어서고 주유소·식당·여관 등이 들어서 현재 53호가 살고 있다. 한후리(汗厚里)는 호구총수에도 나오며 6·25후에도 13호가 살았으나 1976년 독립가옥 철거때 없어졌다. 동명유래 : 옛날에는 농수(용수)촌에 마을이 있다가 아래쪽에 새로 생겼다고 하여 새말(신촌)이라 했다고 한다. 유물유적 : 부안최씨재각·도강김씨재각. 인물 : 신우선(농협장).

(9) 용두리(龍頭里)

용두리는 용두·하만·궐전마을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함안·용강·용두·궐전이 나오며 1914년 이 3마을을 합쳐 용두리라 하였다.

ㅇ 용두(龍頭)

양천허씨가 400여년전에 살았다는 말이 전하며 150여년전 인동장씨·문화유씨·달성서씨가 들어오고 많은 성씨가 거쳐갔다. 6·25때 45호중 8호만 소각되고 8명이 죽었다. 현재 25개 성씨 40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뒷산이 용의 형국이며 우측에 머리에 해당되는 산(용머리산)이 있다. 인물 : 김용순(참봉)·김용구(북하면장). 유물유적 : 약수초등학교 청사터(하서 김인후의 종손 참봉, 김용순의 집터).

ㅇ 하만(河晩)

웃하만에 마을이 먼저 형성되었다. 300여년전 수원김씨가 들어와 100여년간 살았으며 150년전 울산김씨가 들어오고 창녕성씨와 청안이씨가 4대째 살고 있으며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한일합방 때 웃하만에 2호 하만에 26호가 있었는데 1914년 북상면 신계(新溪)마을의 3호가 편입되어 총 31호가 살다가 6·25때 전소되고 33명이 죽었다. 5년후 복구하여 20호가 형성되었는데 장성호 수몰로 북상면 1호가 편입되었다. 동명유래 : 호구총수에는 [함안(咸安)]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행경내 물이 늦게 마을 앞에 오른다하여 [하만]이라 한다. 인물 : 김광수(항일운동 옥사, 만하유고)·김상협(북하면장). 유물유적 : 김경수의 묘와 제각(오천재)·지석묘(2기)·입석(1기).

ㅇ 궐전(蕨田)

오래전에 남평문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다. 김해김씨가 240여년전에 들어와 9대째 살고있으며 진주강씨가 4대째, 평산신씨·전주최씨·창녕조씨는 일제때, 남평문씨·초계최씨는 6·25전후, 전주이씨는 최근에 들어왔다. 구한말 50여호가 담배를 지배하여(궐전초로 유명했다.) 잘 살았으나 일제때 담배경작 금지로 어렵게 되어 6·25때 48호가 전소되고 13명이 죽었다. 현재 17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고사리가 많아 [궐전]이라고 했다 한다.

(10) 덕재리(德在里)

덕재리는 원래 북상면이었으며 원동·덕재·신광·남바우·명시내 5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장성호에 모두 수몰되고 지대가 높은 원동만 남았으며 1975년 북하면에 편입되었다. 장성호에 잠겨버린 동현리 원동·남바위 일대에 지석묘군이 분포되어 있었던 점으로 보아 이 일대에 선사시대 집단 거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호구총수(1789)에는 상덕치·중덕치·신덕치·덕신·부귀리·명시내리가 나오는데 상덕치·중덕치·신덕치를 합하여 [덕재]라 하였으며 면사무소가 덕재에 있다가 후에 도로변에 새로 생긴 [신광]으로 옮겼다.

ㅇ 원동(院洞)

마을에 지석묘가 있고 장가등(장씨)·박아등(박씨)·유씨의 고총 등이 있어 오래된 마을로 보이나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는다. 남원양씨가 약 200년간 살고 있으며 그후 전주이씨·전주최씨가 6대째 살고 그 외 일제때나 6·25후에 또는 수몰시에도 이동이 많았다. 일제말엽 56호였으나 6·25때 52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어 5∼6년에 걸쳐 복구하여 34호가 형성되었으나 1975년 장성호에 길가집 몇 호와 전답이 수몰되어 현재 26호(원동 15·마구실 5·덕신 2) 살고 있다. 마구실에는 100여년전 서씨가 산막을 치고 살다가 해방 후 떠났는데 수몰민이 5호가 들어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날 [가정원(柯亭院)]이 있었다. 새가장·날가장이란 지명이 남아있다. 인물 : 임덕기(대흥사 주지)·김판수(황룡면장)·양병무(경제학박사)·양현봉(한국산업연구원 수석연구원). 유물유적 : 지석묘(3기가 있었으나 수몰시 발굴했다.)·이내춘 자선비(도로변에 있다.).

(11) 쌍웅리(熊里)

쌍웅리는 원래 북상면으로 상목동·화룡리·중웅리·하웅리·구웅치리가 있었는데 송정이 새로 생겨 상목동 보다 커졌으며 중웅리는 회룡에 구웅치리는 하웅에 합해지고 사점리(沙店里)에도 인가가 있었다. 1975년 장성호의 건립으로 사점리와 회룡(중웅리)이 수몰되고 송정·상목동·남바위(덕신)·하웅·사점리 일부가 남아 북하면으로 편입되었다.

ㅇ 송정(松亭)

송정은 수몰전까지 상목동·새터·송정·부정리·사점리가 있었으나 호구총수에는 상목동리(桑木洞里)만 나온다. 상목동에는 탐진최씨가 450년전에 들어 왔으며 전주최씨가 350년 되었다. 광복후 13호였는데 6·25때 2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으며 7호가 살고 있다. 송정은 전주최씨가 상목동에서 옮겨와 살기 시작하였으며 탐진최씨는 동학난 때 옮겨왔다. 160여년전 김해김씨·전주이씨·연안차씨가 입향하였다고 하며 황주변씨도 그 무렵 들어왔다. 합방전에 10여호가 해방후 60여호가 되었는데 6·25때 13명이 죽고 가옥전체가 소각되었다. 30여호 살다가 현재 24호이다. 샛터는 100여년전 인가가 생기기 시작하여 일제 때 10여호까지 되었다가 해방후 6호였는데 6·25때 전소되어 5호가 다시 들어왔다. 덕신(德新)은 원래 남바위라 했는데 지석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 같으나 압해정씨가 5대째 살았으며 그후 몇 성씨들이 들어와 수몰전까지 살았다. 현재는 수몰당시 북상지서와 우체국이 옮겨왔으며 보트장이 설치되었다. 길위 언덕에는 수몰민 6∼7호가 새로 터를 잡아 들어왔다. 사점리는 엣날 그릇을 굽던 곳으로 모두 수몰되고 1호가 남았으며 부정리(富亭里)는 100년전 4호, 일제때 10여호, 해방후 7호였으며 6·25때 전소되어 15호가 다시 형성되었는데 장성호에 수몰되었다. 현재 총 48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상목동 ­ 뽕나무가 있어 붙인 이름, 송정 -소나무옆에 정자가 있었다. 덕신- 새로 생긴 덕재라는 뜻. 인물 : 최상종(사법고시). 유물유적 : 당산나무(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ㅇ 하웅(下熊)

약 400년전 부안김씨가 들어왔으며 160년전 화순오씨와 경주이씨가 들어왔다. 광복 후 50여호가 살다가 6·25때 10명이 죽고 가옥이 전소되었다. 5년만에 42호가 다시 형성되었는데 장성호에 전답이 수몰되어 30호가 떠나가고 회룡 15호, 송정 3호가 옮겨와 30호였다가 현재 37호가 살고 있다. 회룡(回龍)은 오래된 마을이었으며 해방 후 40여호 6·25후 25호였는데 모두 수몰되어 하웅으로 15 타지로 10호가 떠나갔다. 사점리는 100여년전에 달성서씨가 살기 시작하여 일제때 5호, 해방 후 2호가 6·25때 전소되어 다시 2호가 들어왔는데 수몰로 1호가 남아 하웅에 편입(원래는 송정)되었다. 동명유래 : 하웅 -곰재 밑에 있기 때문에 생긴이름, [구석곰터]라고도 한다.

(12) 신성리(新城里)

ㅇ 신웅(新熊)

광등(光嶝)에 먼저 사람이 살았다는 말이 있으나 호구총수(1789년)에는 신웅만 나온다. 신웅은 옛날 일은 알 수 없고 약 200년전 선산김씨가 들어온 후 청주한씨·상주박씨·해주오씨가 거쳐 갔다고 한다. 50호가 살다가 6·25때 15명이 죽고 전호가 소각되었으며 5년후 45호가 다시 들어섰다. 광등에는 10여호가 살다가 6·25때 전소되어 2호가 다시 들어섰으나 1970년 독립가옥 철거때 소개되었다. 북상초등학교(폐교)·영락양로원·정신요양원·할렐루야기도원·영생기도원·신성교회와 가든 등 영업집이 들어섰으며 총 42호(주민등록 60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곰재 등 웅(熊)자가 들어간 지명이 주변에 많아. 새로생긴 마을이라 [신웅]이라 한 것 같다. 유물유적 : 지석묘(2기).

ㅇ 남창(南創)

남창골에는 고려 때 항몽유적지인 입암산성이 있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성내리(城內里)와 평교리(平橋里)가 기록되어 있으며 1871년의 입암산성 진지에는 은선동·조치리·자장동(子藏洞)·정자동·남창리가 나온다. 그 후 1912년 기록에는 평창리(平倉里) 1914년 기록에는 동곡리·평지리가 나오며 내인골 불바래기에도 인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장동·남창·정자동만이 남았으며 골짜기에 식당 등 업소가 몇 개 있었는데 [남창]으로 통칭한다. 자장동 ­ 임진왜란 때 변경윤이 은거했다는 설이 있으며 옥천육씨·김해김씨가 일제 때 들어와 살다가 떠나고 지금의 성씨는 최근 들어왔다. 일제때 15호가 12호로 줄어 6·25때 전소되었는데 5년후 10호가 형성되었으나 현재 6호가 살고 있다. 남창 ­ 옛날 창고터에는 전남대학교 수련원이 들어서고 냇동쪽에는 인가가 있다. 구한말 풍천임씨·반남박씨가 들어와 6·25 전까지 살았다. 7호가 살았으며 240년전 경주이씨가 입향했다. 행주기씨 등 8호가 살다가 6·25때 전소되어 5호가 살며 평지리에도 5호가 있어 현재 총 24호가 살고 있다. 유물유적 : 입암산성(국가사적 제 384호)·윤진순의비(산성내)·몽계폭포(하곡정운룡의 친필각자가 있다.).

[표 8-11] 북하면 행정구역 가구, 인구 2001. 12월말 현재

북하면 행정구역 가구, 인구 - 마을명, 가구·인구수(가구수, 인구수), 비고 제공표
마을명가구 · 인구수비고
가 구 수인 구 수
월 성 리연동2770
월성2573
대악 1리대악42102
풍기1757
대악 2리대방2662
장사3485
단 전 리신촌53174
단전2345
용두 1리용두40107
용두 2리하만2263
궐전1748
약수 1리학림71212
약수 2리화룡44145
약수 3리가인76158
약수 4리약수80227
중평 1리중평94298
중평 2리강선1949
용산712
성암 1리성암51149
성암 2리명치3892
용동1757
대 흥 리대흥2691
갈마2055
대정815
덕재 리원동2893
쌍웅 1리송정48119
쌍웅 2리하웅37112
신성 1리신웅60404
신성 2리남창12473
1,074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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