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군 로고

국가상징 국무회의 알아보기

제2장 마을유래

  • 트위터
  • 페이스북
  • 구글
  • 현 페이지 엑셀로 다운
  • 현 페이지 워드로 다운
  • 현 페이지 인쇄
4차 메뉴 정의
5차 메뉴 정의

제10절 북이면

원본파일 다운로드

(1) 연혁

ο 지석묘가 사거리·원덕리·조양리·오월리 등지에 남아 있으며 죽청리에서 환상석부(둥근 돌도끼) 만무리에서 돌칼(유물 분실) 그리고 세형동검(출토지 미상)이 출토 되었다.
ο 마한시대 고랍국의 위치를 장성읍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어 북이면은 이 세력권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삼한시대에 벽오산성이 백암리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ο 백제때는 고시이(古尸伊)현에 속하였다. 죽청리 언골에서 삼족토기가 달성리 밀등에서 삼족토기와 곡옥이 발견되고 만무초등학교 앞 언덕에서는 백제때 것으로 보이는 칼·창·갑옷편과 가야식 토기 및 삼령구가 출토되었다.
ο 660년 통일신라의 영역이 되어 갑성군(岬城郡)에 속했으며 892년 후백제 세력으로 들어가 45년간 지속하였다.
ο 936년(태조 19) 고려의 영역이 되었으며 원덕리 미륵석불과 사거리 당간지주가 고려때 유물로 추정된다
ο 1759년(영조 25)에 발간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의하면 장성군에 15개 면이 있었으며 북이면에는 504호 1,779명이 살았다.
ο 1789년(정조 13)에 발간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북이면은 615호 2,180명 34개 마을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북상면에는 37개 마을 687호 2,859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12개 마을이 현재는 북이면에 속한다.
ο 1914년 행정구역 개편후 1917년에 발간된 [조선면리동명칭일람]에는 북이면에 9개 리 48개 마을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북상면에는 8개 리 40개 마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3개 리 13마을이 현재는 북이면에 속한다.
ο 1975년 10월 1일 장성호 건설로 북상면 오월리·조양리·수성리가 북이면에 편입되었다.

(2) 사거리(四街里)

ㅇ사거리(四街里, 남부·북부)

북이면 소재지 마을로 옛날에는 복암리(福岩里)라 불렀으며 웃네거리와 아넷네거리로 나뉘어 있다. 보건소 앞 언덕에 지석묘가 있고 우황수쪽 철도변에 고려 때 것으로 보이는 석당간(石幢竿)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 같다.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 [복암리(伏岩里)]로 나와 있으며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 [복암리(福岩里)]로 나온다. 구한말때까지 면사무소 앞 언덕에 집 몇채와 꿀등재 삼거리에 주막집 몇 호가 있었는데 1914년 철도가 개통되고 국도와 담고선이 개설되면서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으며 관공서가 들어서고 시장(1919년)이 생기면서 호수가 크게 늘어나고 마을이름도 네거리(四街里)로 부르게 되었다. 일제중기에 110호(남부 60·북부 50) 정도 살았으며 광복 전후에는 300여호(남부 130·북부 170)였는데 현재는 400여호가 살고 있다. 일제초기에 진주강씨가 들어왔는데 그 전에 김해김씨가 들어온 것 같다. 역앞의 독립탑, 장터부근에 남문창의 비각, 철도변에 석당간, 장터에 이공진 공적비, 노인당에 신태호 시혜비, 공원 산밑에 전일귀 효자비 등이 있다. 인물 : 김성수(경기도청 정무부지사)·유중은(육군대령)·손창완(경찰청총경)·이삼범(북이면장)·박상구(백양사조합장).

ㅇ 연수동(硯水洞)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 [여수리(余水里)]로 나온다. 보통 [여시동]으로 불렀는데 공원산이 여우형국이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마을 앞 냇 건너편 [내시동]에 대칭되는 [외시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1970년경부터 [연수동]으로 불렀다 일제초기 2호가 중기에 7∼8호로 늘었으며 현재 15호 정도 살고 있다.

ㅇ 복룡(伏龍)

원래 저수지 밑에 마을이 있었으나 호환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밀양박씨가 1750년 전후에, 광산김씨가 1800년대에 들어온 후 고령신씨·한양조씨·김해김씨·청주한씨 등이 들어왔다. 동명유래는 확실치 않으나 저수지 옆 잔등이 용이 엎드린 형국이어서 [복룡(伏龍)]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일제 때 56호(광산김씨 20·밀양박씨 14·김해김씨 4·울산김씨 2·고령신씨 1·한양조씨 1)가 살다가 6·25를 만나 5명이 사망하였다. 현재 55호 120명이 살고 있으며 1969년 장성북중학교가 이 마을에 설립되었다. 인물 : 박흥진(한말의병)·박용만(저수지 부지희사)·김성현(행정고시, 삼성그룹 부장). 유물유적 : 황주변씨제실·사기점터·성신암터·고총(홍길동 조부의 묘)·입석.

ㅇ 묘동

오래 전에 우씨가 살았다는 말이 전하며 호구총수(1789년)에 [묘동]과 [소묘동]이 기록되어 있다. 270년전 전주이씨(임영대군파)가 들어왔으며, 250여년전에 김해김씨가, 150여년전 울산김씨가 들어왔다 마을 중앙에 있는 거제반씨묘의 동쪽은 동령동 서쪽은 묘동으로 부르다가 마을 가운데로 국도가 개설된 뒤 윗뜸 아랫뜸으로도 부른다. 일제때 30호(묘동 18호·동령동 12호)가 살았는데 김해김씨 15호, 울산김씨 8호, 전주이씨 4호였으며 현재 22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요동(여뀌풀 마을)이라 부르다가 묘동으로 변음되었다는 설과 [매화낙지]라는 명당이 있어 [매동]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200년전 호구총수에도 [묘동]으로 나온다. 인물 : 김성옥(북이면의회 초대의장)·김병효(교육가 국민훈장 동백장, 장성문학회 회장)·김남규(화랑무공 훈장, 을지훈장)·김면규(재무부 세법심의 의원, 국민훈장)·김진웅(부산중기 사장). 유물유적 : 장군묘·입석.

ㅇ 조산(造山)

120여년전 전주이씨가 안조산에 터를 잡았다가 호환 때문에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그후 광산김씨·전주최씨·울산김씨·달성배씨·파평윤씨·봉산이씨가 들어와 25호 정도가 살았다. 1969년 철도변 정비때 원덕마을에서 18호가 옮겨와 새마을이 조성되었으며 장성호 수몰민 2호가 옮겨왔으나 일부가 떠나 현재 51호(새마을 15·안동네 36)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앞 작은 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인물 : 김종호(원광대 교수)·정재홍(원광대 교수)·이원일(전화 사업시 마을에 큰 시혜). 유물유적 : 울산김씨 제실·절터

(3) 원덕리(院德里)

원덕리는 면의 북쪽에 위치한 원덕과 목란으로 이루어졌으며 전남북 갈재계곡에 자리잡고 있어 옛부터 노령산맥을 넘는 길목으로 국도, 철도, 고속도로가 모두 이곳을 통과한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내시리(乃是里)]·[원덕리(院德里)]·[직도리(稷島里)]가 기록되어 있고, 1912년 기록에는 [목란리]·[원덕리]·[직도리]·[밀억리]가 나오며 그뒤 [새터]마을도 생기었으나 지금은 원덕과 목란 두 마을로 통합되었다.

ㅇ 원덕(院德)

마을에 지석묘가 있으며 고려시대 미륵석불과 조선초기 미륵원이 있었다. 구전에 의하면 내시동(북당골)과 용구촌에 몇 호가 살았는데 북당골은 화재와 도둑 때문에 용구촌으로 모두 이거했다가 용구촌도 질병과 도둑 때문에 주민들이 타지로 떠나가고 수원백씨·진주강씨·광산김씨 3호가 언고개 밑으로 옮겨 살면서 밭으로 개간했던 현 마을터에 인구가 늘었다. 일제말엽 100여세대가 살았으나 6·25때 100여명이 죽었으며 1973년 고속도로 건설 때 7∼8호가 뜯기고 불량가옥이 철거되어 15호가 조산으로 이거하고 이농현상으로 현재 45호가 살고 있다. 1909년 10월 22일 김영백 의병 20여명과 신평파견소 헌병이 격전 의병 2명이 죽었다. 동명유래 : 미륵원에서 유래했다. 인물 : 전일귀(조선 영조때의 유명한 효자). 유물유적 : 갈애바위·전일귀 효자비·미륵석불(전남 문화재 제13호)·절터·도요지·지석묘.

ㅇ 목란(木蘭)

갈재 초입 마을로 안쪽에 새터와 필심이(직도리) 마을이 있었는데 모두 목란으로 합해졌다. 호구총수에는 원덕리(院德里)만 나와 있는데 갈애의 전설이나 주막집이 있었다는 구전 등으로 보아 목란도 오래된 마을이다. 남양홍씨와 정씨가 살았다는 말이 전하며 진주강씨가 250여년 살고 있다. 많은 성씨들이 거쳐 갔으며 김해김씨와 일제말기에 들어왔고 그 외는 해방 후에 들어왔다. 주막·산전벌이·나무장사·종이공장을 주업으로 50여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3명이 죽고 마을이 소각되었다. 그후 40여호가 조성되었다가 1973년 고속도로 건설 때 뜯긴 5호와 불량주택 7호 등 15호가 동쪽 산기슭에 신목란을 조성하여 현재 총 33호(목난 26·신목난 20·새터 7)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뒷산이 난초 꽃 형상이라 [목란]이라 했다는 설과 마을입구 도로변 바위에 모람이라는 넝쿨이 있기 때문이라 설 그리고 난을 피한 곳이라 [몽난(蒙亂)]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ㅇ 새터(신기, 新基)

천주교도들의 은신처로 달성배씨가 처음 들어왔으며 그후 충주지씨가 몇 집 살다가 모두 떠나고 현재의 성씨는 6·25후에 들어왔다. 15호 정도가 살다가 6·25를 만나 20여명이 사망하고 가옥이 불탔으며 현재 6호가 살고 있다.

ㅇ 필심이(직도리, 稷島里)

오래된 마을로 [오산창의사]가 이 마을에 있었다. 밀양박씨·전주이씨·전주최씨·나주나씨·김해김씨·해주오씨·곡부공씨 등이 한때 살았었다. 20여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가옥이 소각되었다. 그후 5∼6호가 살다가 3호로 줄어 모두 타지로 떠났는데 다시 1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날에 피를 많이 심은 곳이라는 설과 어느 죄인이 섬으로 귀양가다가 이곳에 머물면서 [도(島)]자를 붙여 섬에 있는 것으로 속였다는 설이 있다. 인물 : 강우증(입암산성 별장)·강귀동(초대면의원). 유물유적 : 도요지·노령사(盧嶺寺, 1963년경 장두삼 스님이 20여명에게 한문·영어·수학을 가르켰다.). 갈애 생가터 당산제(소나무 1그루와 입석 2기).

(4) 신평리(新坪里)

신평리는 면소재지 서쪽 3개마을[신창(新昌)·신평(莘坪)·거마(巨馬)]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간)에 거마산리만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평과 신창은 200년이 못된 마을인 것 같다.

ㅇ 신창(新昌)

북이초등학교가 있는 마을이다. 황주변씨가 1800년 전후에 들어왔다고 전한다. 그후 수원백씨·직산조씨·김해김씨·해주오씨·영광정씨 등이 들어와 일제말엽 50여호(웃신창 40·아랫신창 10)가 살았다. 1972년 고속도로 건설 때 아래신창은 완전히 없어지고 윗신창 일부가 뜯겨 일부는 타지로 떠나고 일부는 학교 옆 한림당으로 새터를 잡아 옮겨 현재 32호(한림당 11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새롭게 번창하라는 뜻 인물 : 변남연(면장)·변동직(면장)·변염(쌍방울주식회사사장)·변선의(읍장, 도의원)·변희봉(텔런트)·변재호(한국전력 순천소장). 유물유적 : 김상호 공적비(북이 초등학교 건립유공)·동암(東岩) 김병효 선생 은혜의비(1988 제자들이 세움).

ㅇ 신평(莘坪)

원래 거마와 한 마을이었는데 호수가 불어나자 분리했다. 울산김씨가 거마에서 옮겨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현재는 5호가 살고 있으며 행주기씨·문경송씨·상산김씨·초계정씨 등이 6·25후에 들어왔다. 30여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20여명이 사망하였으며 그후 인구이동이 심하여 현재 2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원래 이곳이 삐비밭이었다고 한다. 인물 : 김경중(진안군수)·김상효(면장). 유물유적 : 김은 부조묘(울산김씨시조).

ㅇ 거마(巨馬)

노(盧)씨가 처음 황시암에서 살았다고 하며 강릉유씨가 16C 중반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후 울산김씨가 들어와 살다가 신평으로 이거하였으며 광산김씨와 장흥고씨 등이 들어왔다. 일제때 72호 였으나 6·25때 100여명이 사망하였으며 70년대 이농현상으로 37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뒷산이 말의 형국이기 때문이라한다. 인물 : 유병선(한말의병)·김상순(제헌국회의원)·고영환(중학교 교장)·고영신(언론인)·김병조(인기 개그맨).

(5) 달성리(達城里)

달성리는 원래 달성(達城)·밀등(密登)·궁동(弓洞)·신월리(新月里)·명정(明丁)·산동(山東)·강머리 등의 마을이 있었는데 [강머리]는 달성저수지 건설시 수몰되고 [신월리]는 자연폐촌 되었으며 나머지 마을도 인구의 감소로 인하여 달성(밀등)·궁동(신월리)·명정(산동)으로 합병되었다. 호구총수 (1789년)에 [밀등]과 [신월리]만 나오며 그 외는 200년이 못된 마을인 것 같다.

ㅇ 달성(達城)

밀등은 오래된 마을로 추측되나 상고해 볼 수가 없다. 밀등갱변은 소나무가 울창했는데 일제때 뽕나무 밭으로 개간했다고 한다. 일제때 10여호가 살았는데 가게·주막·정미소·이발관 등 상업이 성하였으며 현재 10호가 살고 있다. 달성은 19C경의 도요지로 추측된다. 150여년전 안동김씨와 풍천임(任)씨가 들어왔으며 그후 울산김씨·안동권씨·선산김씨·고령신씨 등이 들어와 20여호가 살고 있다. 달성저수지 동쪽 작은제방 위쪽에 그릇을 구웠다고하는 점등이 있는데 이곳에도 6·25전까지 민가가 있었으며 저수지 건너 산밑 냇가에 [강머리]라고 불렀던 3호 정도의 마을이 있었는데 저수지 건설로 없어졌다. 동명유래 : 달성마을 뒷산에 [운중반월(雲中半月)]형 명당이 있다고 하여 월(月)의 음인 [달성]이라 했다 한다. 인물 : 김영백(한말 의병장)·이우룡(판사)·김병기(면장)·김병만(에너지 관리공단 전남지부장). 유물유적 : 도요지·점등·일본인(가와사끼(천기, 川崎))의 집터·백암리와 경계에서 삼족토기와 곡옥이 발견.

ㅇ 궁동(弓洞)

오래전부터 신월리에 마을이 있었는데 150여년 전부터 아래쪽인 궁동에 인가가 들어서 점점 커졌다. 신월리는 8∼10호가 살았는데 1960년대 후반 모두 타지로 이거하였다. 궁동은 진주강씨가 가장 오래 살고 있으며 광산김씨·밀양박씨·김해김씨·제주고씨·전주최씨·경주이씨·탐진최씨·고령신씨·봉산이씨·곡부공씨 등이 점차로 입향하였다. 일제때 15호 6·25때 20호 였으나 그후 호수가 늘어나 58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형국이 활과 같아 [궁동(弓洞)]이라 했다고 한다.

ㅇ 명정(明亭)

명정은 오래전에 남평문씨가 살았다고 하며 고령신씨가 250여년전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호구총수(1789년)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후 일제때 울산김씨가 이거해 왔으며 양천허씨·봉산이씨·영성정씨·달성서씨·전주최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일제 때 20여호가 해방 후 28호로 늘었으나 6·25때 40여명이 사망하고 호수가 줄어들어 15호가 살고 있다. 산동은 전주최씨가 100여년전 들어왔으며 그 후 울산김씨·경주정씨·문화유씨가 들어왔다. 일제 때 30여호가 살았으며 6·25때 30여명이 죽고 17호로 줄었는데 이농현상으로 4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명정(明亭)은 유래를 알수 없으며 산동(山東)은 울산김씨 선산인 복부형(가마솥형국)이 있어 명정(鳴鼎)이라 하다가 옆마을과 음이 같아 [산동]으로 바꿨다고 한다. 인물 : 김제옥(전북대 교수)·김재정(의사). 유물유적 : 울산김씨 입향조인 민씨묘와 그의 부군 학천공 김은의 신도비·명정제(울산김씨제실).

(6) 백암리(白岩里)

백암리는 백암·수도·용산·성부·동산·선평 마을로 이루져 있었는데 수도는 없어지고 백암 1리는 백암·성부·동산, 백암 2리는 용산·선평으로 통합되었다. 백암과 수도는 오래된 마을이고 동산·성부·용산·선평은 200년이 못된 마을인 것 같다.

ㅇ 선평(船坪)

곡부공씨가 처음 살았다는 말이 전하며 창녕조씨가 1870년경 입향하였다. 반씨·금녕김씨·공씨·황주변씨도 한때 살았으며 고령신씨·남평문씨가 들어오고 김해허씨·광산김씨·밀양박씨·울산김씨·은진송씨·영광김씨·선산김씨·경주김씨 등은 모두 6·25후에 들어왔다. 100여년전에는 5∼6호 였는데 34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60여명이 죽었다. 그후에도 40여호가 되었는데 이농현상으로 17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원래는 [모리등]이라 부르다가 마을터가 배형국이라 하여 [선평(船坪)]으로 고쳤다고 한다. 인물 : 조정현(의학박사). 유물유적 : 짐터 (마을 동쪽 냇 건너).

ㅇ 용산(龍山)

옛날 일은 알 수 없고 고령신씨가 200여년전 한양조씨가 100여년 전에 들어왔다. 그후 광산김씨·밀양박씨·문화유씨·풍천노씨·수원백씨 등이 들어와 1920년경 25호가 살다가 해방 후 45호가 되었는데 6·25때 30여명이 죽고 가옥이 대부분 불탔다. 그 후 한때 60여호까지 되었으나 현재 30여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날에는 마을을 가마솥 형국으로 보아 [산정(山鼎)]이라 하다가 [용산]으로 고쳤다. 마을 동편 뜸을 [칠목동]이라고 하는데 집 7체가 있었기 때문 또는 옷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인물 : 신영수(구한말 의병활동)·조일행(농협장).

ㅇ백암(白岩)

삼한시대 벽오성이 있었다는 설이 있는 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서 순절한 양산군수 조영규의 출생마을로 그의 조부때 들어왔다고 하며 그의 사위 고령신씨도 처가 따라 들어왔다. 그뒤 울산김씨 등 많은 성씨들이 거쳐 갔는데 1840년경 곡부공씨, 1920년경 전주이씨와 광산김씨 그 후 해주최씨·선산김씨 등 많은 성씨들이 들어오고 수도골의 천주교인들이 내려왔다. 구한말 20여호였는데 종이공장이 생기고 산벌이를 위해 모여들어 50여호가 되었는데 6·25때 20여명이 사망했다. 그후 60여호가 살았으나 현재 36호가 살고 있다. 옛날 수도골에는 절이 많았는데 이와 관련하여 마을이 있었던 것 같고 구한말에는 천주교인들의 은신처가 되어 많은 호수가 살았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폐촌되었다. 동명유래 : 방장산 투구바위가 흰색이어서 생긴 이름이다. 인물 : 조영규(양산군수, 임진난때 순절)·이군익(북이면장)·이병직(문화훈장화관장)·이병래(의학박사, 교수). 유물유적 : 벽오산성(碧梧山城, 삼한시대의 성 미상)·직산조씨 충효정려·창녕조씨 열효문·절터(방장산에 많은 절터가 있다.).

ㅇ 성부(成富)

원래 고령신씨의 동족마을이었으나 후에 전주이씨·강능유씨·곡부공씨 등이 들어왔다. 일제때 30여호가 살다가 해방후 38호가 되었는데 6·25때 18명이 죽었으며 대부분의 가옥이 소각되었다. 15호가 다시 살기 시작하였으나 많이 떠나가고 대부분 6·25후에 들어온 10여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뒷산에 [성불사(成佛寺)]라는 절이 있어 [성불]이 [성부]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인물 : 신처권(고령인, 문집 4권)·신만수(군 과장).

ㅇ 동산(東山)

백암의 고령신씨들이 옮겨와 자자일촌 하였는데 금녕김씨·울산김씨·청송심씨·한양조씨·강능유씨 등이 차츰 들어와 살고 있다. 일제때부터 20호 내외가 살았으며 6·25때 26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호수는 지금도 20호 정도이다. 양고살재 초입에 있어 한때 주막집이 마을 윗편에 성하였다. 동명유래 : 청천암(절) 입구의 [동구(洞口)]라고 부르다가 [동사촌]이라 불렀는데 뒷산을 옥녀의 동자(童子)로 보아 [동산(童山)]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인물 : 신근식(의사)·신봉영(의사). 유물유적 : 부안김씨 열녀각터.

(7) 죽청리(竹靑里)

죽청리는 전북 고창읍과 고개 하나 사이에 있으며 청운·중산·이동·죽청·금양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금양마을 아래 길가에서 환상석부 언골에서 삼족토기가 발견되고 신라말의 도둑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호구총수(1789)에도 금양동·죽청리·고사치·생철점이 나와있다.

ㅇ 금양(金良)

구짐장골에 마을이 먼저 형성되었다는 구전이 있다. 1760년대 울산김씨가 들어와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살다가 일제때 곡부공씨·문화유씨 등이 들어왔다고 한다. 일제때 30여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35명이 죽고 가옥이 전소되었다. 2년후 6호가 들어와 살다가 1980년 22호까지 되었으나 점차 줄어들어 21호가 살고 있다. 언골은 천주교도의 피난처로 의성김씨가 18호까지 살았으나 8호가 6·25를 만나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난다. 그후 임·오·김·유·성씨가 들어왔으나 1970년 독립가옥 철거때 없어졌다가 그후 목장이 생겼다. 또 오소골에는 6·25때까지 2호가 있었다. 동명유래 : 원래 [짐장골]이라 불렀는데 김씨장자가 살아 김장자골이 변한 것 같으며 [금양(金良)]으로 표기한다. 언골은 원(遠)골 또는 어은(漁隱)골로 기록되어 있다. 인물 : 공사진(보성 경찰서장). 유물유적 : 환상석부(광주국립박물관 보관)·삼족토기(광주국립박물관 보관)·도요지.

ㅇ 중산(中山)

약 200년전 곡부공씨 한일합방 무렵 황주변씨가 들어와 11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전 가옥이 소각되고 모두 타지로 떠났다. 그후 3호만 되돌아 오고 새로운 성씨들이 들어와 10여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중산 또는 중뫼라고 불렀는데 산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인물 : 변태섭(대전상공회의소 부회장)·변자섭(모나리자(주)회장).

ㅇ 이동(梨洞)

약 200년전 울산김씨가 입향하여 구한말 때 자자일촌 하였으며 일제때 곡부공씨·강능유씨·한양조씨가 들어오고 해방 후 광산김씨·밀양박씨가 들어와 20여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20명이 죽고 전호가 소각되었다. 다시 15호가 들어섰는데 지금은 10여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이화낙지(梨花落地)]혈 또는 배나무가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인물 : 기호준(해양수산부 서기관).

ㅇ 죽청(竹靑)

무잿등 안골에 먼저 마을이 생겼으며 옛날에 광산김씨가 살았다고 한다. 의령남씨가 200여년전에 광산김씨가 100여년전에 들어왔다. 천주교 박해때 전주이씨가 들어오고 그후 나주오씨와 진주정씨가 들어왔으며 그 외는 최근에 입향하였다. 일제때 25호 정도가 살았으며 6·25때 30여명이 사망하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그후 20여호가 살다가 지금은 18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대나무가 있는 동네라서 [대평이]라 부르며 [죽청(竹靑)]으로 표기한다. 유물유적 : 천주교 대평공소터.

ㅇ 청운(靑雲)

큰재 아래 잿등과 망골다리 부근에 천주교도와 남로당원들이 은신했다고 한다. 일제말에 웃고살터·아랫고살터·망골 등지에 33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22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그후 26호까지 되었으나 현재 10호가 살고 있다. 창녕조씨가 140여년전에 들어왔고 많은 성씨들이 거쳐 갔으며 그 외는 6·25후에 입향하였다. 동명유래 : [고살재]아래에 있어 [고살터]라고 했는데 한문표기는 [고사치(古沙峙)]이다. [고시이(고실)재]에서 유래된 듯하다. 유물유적 : 만동민본성(도둑성, 백제가요 방등산가의 산실)·사기점터(죽청저수지 위쪽밭)·천주교 망골공소(1882년 유달영이 세웠다고 한다.)·청운교회(김상운 밭에 교회가 있었다.).

(8) 만무리(晩舞里)

만무리는 면의 서쪽에 위치한 부동·호산·만무·율정·상곡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만무 초등학교 앞 언덕에서 백제유물이 나오고 호구총수에도 여산(호산)·율정·만무·상곡·부동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ㅇ 만무(晩舞)

만무정과 옥동 두 뜸으로 이루어졌다. 약 400년전 곡부공씨가 율정에서 들어와 자자일촌 하다가 구한말 옥동에 장씨·신씨 만무정에 차씨·울산김씨·의성김씨·봉산이씨가 들어와 38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50여명이 사망하고 전 가옥이 소각당했다. 다시 30여호를 이루었는데 일부는 떠나가고 전주이씨·행주기씨·남양전씨·우씨·강능유씨 등이 입향하였다. 현재 17호가 남아있다. 동명유래 : 학이 춤추는 형국이라 하여 [만무]라 하였다고 한다. 인물 : 기갑서(국방부 사무관).

ㅇ 율정(栗亭)

구전에 의하면 고려 중엽 우(禹)씨가 살다가 망하고 조선초기에 최씨가 번창하다가 다시 쇠하였다고 한다. 그후 곡부공씨가 임진왜란 직전에 입향하여 번성하였으며 200년전 광산김씨가 들어왔다. 해방 후 37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70여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다시 30여호까지 살았으나 현재 10여호로 줄어들었다. 동명유래 : 안골산(알뫼)이 알밤형국이고 밤나무가 많이 있어 [밤절]로 부르며 율정으로 표기한다. 인물 : 공학원(한말유학자). 유물유적 : 사산사 (泗山祠)·서림사(書林祠).

ㅇ 상곡(上谷)

약 400년전 곡부공씨가 율정에서 분가하여 온 후 자자일촌 하다가 300여년전 황주변씨가 들어오고 200여년전 달성서씨가 천주교 박해를 피해 들어와 해방후까지 60여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30여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40여호가 타지로 떠나고 전주최씨와 김해김씨가 들어와 20여호가 살다가 이농현상으로 15호만 남았다. 동명유래 : 긴 고랑에 상곡·중곡·하곡이 있었는데 [상곡]만 남았다고 한다. 유물유적 : 만무초등학교 터(1963년 설립 1988년 폐교), 백제시대 유물(초등학교앞 말무덤 칼·창·갑옷편·토기·삼령구출토·광주박물관 소장).

ㅇ 부동(釜洞)

고려때 우(禹)씨가 살다가 폐허가 되었는데 270여년전 봉산이씨가 들어와 30여호가 동족마을을 이루었다. 해방 후 한양조씨가 들어와 35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10여명이 사망하고 많은 가옥이 소각되었다. 이때 20여호가 타지로 떠나가고 경주이씨·곡부공씨·전주최씨·보성선씨 등이 들어와 30여호가 되었으나 이농현상으로 17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형국이 [부뚜막]과 같다하여 [부동]이라 했다고 한다. 유물유적 : 죽림사·죽림사고문서(전남 유형문화재 제 163호).

ㅇ 호산(狐山)

1760년경 행주기씨가 들어온 후 1900년경 광산김씨가 입향하였으며 일제때 이천서씨 6·25후 곡부공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30여호가 살았으며 6·25때 21명이 사망하고 타지로 많이 떠나가 20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여우뫼]가 [여뫼]·[여산]·[호산]으로 변했다. 인물 : 서영수(아시아게임 육상 금메달)·공창덕(도의원).

(9) 신월리(新月里)

면의 남쪽에 위치한 신월리는 신광·월하·상공·오동·홍산으로 이뤄졌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사전리·홍산리·마산리·방화산리·신광리가 나와 있는데 사전리(총거리들)는 없어지고 마산은 오동으로 바뀌고 상공은 새로 생겨났다.

ㅇ 신광(新光)

원래는 주막이 있었던 마을이다. 100여년전 달성서씨가 들어왔으며 일제때 진주강씨·탐진최씨·능주주씨·장수황씨·창녕성씨·광산김씨 등이 들어와 30여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7명이 죽고 7호가 소각되었다. 그 후로도 몇호가 들어 왔으나 이농현상으로 호수가 줄어 13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1920년경까지 [주막거리]라고 불렀는데 호구총수에도 [신광]으로 나온다. 인물 : 강대훈(중학교 교장).

ㅇ 월하(月下)

광산김씨와 진주강씨가 살았다고 전하며 1860년경에 행주기씨가 들어오고 약 20년뒤 곡부공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상주주씨·고령신씨·풍천노씨가 들어와 40여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28명이 사망하였다. 그 후 호수가 늘었으나 이농현상으로 27호 63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원래 [방화산]으로 불렀는데 마을에 살구나무가 많아 [방화산(芳華山)]·[방화산(芳花山)]이라 했다는 설과 노루를 겨누는 총의 방아쇠로 보아 [방하산(芳下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며 달성의 [반월(半月)]에서 뻗어내린 산 아래에 있어 [월하(月下)]라 했다고 한다.

ㅇ 상공(相公)

추계추씨가 약 150년간 살고 있으며 그뒤 광산김씨·김해김씨·하동정씨·해주최씨·동래정씨·진주강씨가 차례로 입향하고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일제때부터 45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25명이 죽고 32호가 소각되었다. 3개월 후 되돌아와 점차 40여호가 형성되다가 34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속칭 [상고니]라 부르며 [3공(公)]이 나올터라 하여 [상공]이 되었다고 한다. 인물 : 정순걸(북이면장)·정병모(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정봉준(사무관).

ㅇ 오동(午洞)

옛날 일은 알 수 없고 현재 거주 성씨중 죽산안씨가 190여년전 행주기씨가 100여년전에 들어오고, 곡부공씨·울산김씨는 일제때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35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21명이 죽고 가옥 일부가 소각되었다. 77년 44호까지 되었으나 점차 줄어 25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시루봉 [갈마음수]형국이 있어 [마산(馬山)]이라 부르다가 [오동]으로 바꿨다고 한다. 인물 : 기노훈(면장). 유물유적 : 송암 기정익의 묘(갈마음수 형).

ㅇ 홍산(洪山)

구전에 의하면 남양홍씨가 안홍산에 동족마을을 이루고 살다가 정유왜란때 입암산성으로 들어가 폐촌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00년이 지나 황주변씨가 들어오고 창녕조씨·선산김씨·옥천조씨·문화유씨·곡부공씨가 차례로 들어와 24호가 해방후까지 살았는데 6·25를 만나 60명이 사망했다. 현재 22호 48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홍씨 마을 또는 붉은 황토땅이기 때문에 [홍산]이라 했다고 한다. 인물 : 공귀남(면장).

(10) 모현리(茅峴里)

모현리는 원래 12동네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화동·북촌·모현·평촌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화동촌·신동리(新洞里)·여촌(余村)·양지·평지·고동촌 6마을이 기록되어 있는데 신동리는 화동의 일부인 것 같고 여촌은 제촌(提村)으로 평지는 평촌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솔청뫼 밑에 있었던 양지는 없어졌다. 또 중리(中里)·서평리·꽃고개·실뫼·옥녀촌·안터 등에도 크고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제촌은 모현에 고동촌은 평촌에 합쳐지고 양지촌·꽃고개·실뫼·서평리·옥녀촌·안터·중리는 없어졌다.

ㅇ 모현(茅峴)

300여년전 고령신씨가 들어오고 150여년전 문화류씨가 들어왔으며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일제때 30여호가 살다가 25호가 되어 6·25를 만나 5명이 죽고 가옥이 전소되었다. 그후 20여호가 되었다가 14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옥녀봉 뒷고개에 띠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인물 : 모현리 만세운동 주동자 12인(유상능·유상학·유상순·유상설·신경식·신상우·신태식·고용석·오상구·박광우·신국호·정병모)·신태호(광주상공회의소 회장)·유중혁(감사원 사무관). 유물유적 : 오산창의사·삼일사·용쏘(기정익 은식처).

ㅇ 평촌(平村)

350년전부터 황주변씨가 살았는데 사위인 문화류씨가 250여년전에 들어와 번성했다 그뒤 해주정씨·조양임씨·전주이씨·원주이씨가 들어왔으나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1900년경 40호가 살다가 32호가 해방 후까지 살면서 6·25를 당하여 30명이 사망하고 30호가 소각되었다. 현재 2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평지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인물 : 유주환(면장,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유중근(면장)·유중현(감사원). 유물유적 : 산당(팔각정과 물통이 있었다.).

ㅇ 화동(和洞)

260년전 문화유씨, 240년전 전주최씨, 150년전 수성최씨, 120년전 영광정씨와청주한씨, 100년전 황주변씨가 들어왔으며 울산김씨는 일제때, 문의박씨·수원백씨·강능유씨는 6·25후에 들어왔다. 해방 후 30호가 살다가 6·25때 9호가 소각되고 17명이 죽었다. 현재 27호가 살고 있다. 마을 남쪽 800m에 창암(蒼岩)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일제때부터 6∼7호가 있었는데 6·25때 소각되어 그후 다시 10호가 들어섰는데 고속도로 건설 때 없어졌다. 동명유래 : 화합이 잘되는 마을이어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인물 : 유중진(면장)·유성희(초등교장)·최규채(광주시 과장).

ㅇ 북촌(北村)

200년전에 선산김씨가 살았으며 그뒤 전주최씨·풍천임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한양조씨·울산김씨·청주한씨·밀양손씨·나주오씨가 들어왔으며 그후 영광정씨·이천서씨·문화유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25호가 살다가 6·25때 34명이 사망하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현재 14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옥녀가 북을 치는 형국이라 하여 [북촌]이었는데 [북촌(北村)]으로 변했다고 한다.

(11) 수성리(水城里)

면(面)의 동남쪽에 위치한 수성리는 원래 북상면이었는데 장성호 건설로 1975년 북이면에 합병되었다. 원래는 수성·성동·장평·수명·화산 5개마을이었으나 장성호 수몰로 인하여 수성(성동·장평)·수명(화산) 두 마을로 합쳐졌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접부치리(화산)]·[어만리(수명)]·[성동리]·[검성리(수성)]가 기록되어 있다.

ㅇ 수성(水城)

수성에는 약 300년 전부터 황주변씨가 살았으며 약 200년전 밀양박씨가 들어오고 그뒤 전주최씨·평산신씨·함평이씨 등이 들어왔다. 현재 살고있는 김해김씨와 연안차씨는 일제때 함양오씨는 6·25후에 들어왔다. 일제때 50여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20여명이 사망하고 마을전체가 소각되어 2∼3년 뒤에 약 40호가 뒤돌아와 수몰전 53호가 살았다. 삼거리에는 130년전 주막집이 들어선후 정미소·이발소·가게 등 17호가 살다가 수몰되었다. 성동은 성미산의 망점산성과 관련된 마을로 오랜 마을인 것 같으나 옛날 일은 알 수 없고 수원백씨가 5대째 살았고 강능유씨·진주강씨·언양김씨·황주변씨·한양조씨가 차례로 들어오고 6·25후에 평강채씨가 들어왔다. 20여호가 살다가 6·25때 전가옥이 소각되었다. 2∼3년후 마을을 복구하여 17∼8호가 살다가 장성호가 건립되어 수성과 성동은 수몰되지 않았으나 농토가 없어 현재는 수성에 5호 성동에 6호가 살고 있다. 장평마을은 옛날에 고씨가 살았다는 말이 전하며 황주변씨가 200여년전에 들어와 새터에서 살았다. 그뒤 밀양박씨·강능유씨·함평이씨·대구배씨 등이 100년 이상씩 살고 김해김씨가 일제때 들어와 모두 15호 정도가 살다가 6·25때 모두 불탔으나 다시 15호가 살다가 수몰되었다. 동명유래 : [수성]은 망점산성 성지기가 사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유물유적 : 망점산성·망곡정(고종황제 국상시 망곡)·절터·불당(불당골).

ㅇ 수명(水明)

수명은 오래 전부터 남양홍씨가 살았으며 고씨가 들어와 살다가 모두 떠났다. 그후 전주이씨가 거쳐가고 청주한씨가 5대째 살고 있으며 전주이씨와 김해김씨가 들어오고 6·25후에 황씨와 최근 밀양박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12∼3호 였으며 11호가 6·25를 만나 가옥이 소각되고 10여명이 죽었다. 장성호 건설로 8호로 줄었다. 화산은 옛 일은 알 수 없고 김해김씨와 울산김씨가 5대째 태인박씨와 전주이씨가 3대째 살고 있으며 그 후 황주변씨와 최근 함평이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15여호가 20여호로 늘어나 6·25를 만났는데 전 마을이 불탔다. 현재 9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호구총수에 [어만리]로 나오며 [어망]이라고도 하다가 수명으로 바뀌었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화산은 나비형국인 접붙이 고개 밑의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부근에 [쇠부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화산(火山)]이 [화산(花山)]으로 변했을 가능성도 있다.

(12) 조양리(朝陽里)

면의 남동쪽에 있는 조양리는 원래 북상면이었으며 조양·내동·덕곡(정동)·동정(석암)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소지방리·대지방리(현조양부근)·덕곡리·광암리(현동정)·상봉리(상봉산 밑)·내동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상봉리는 내역을 알 수 없다.

ㅇ 조양(朝陽)

남양홍씨가 터를 잡고 진주소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다. 250년전 울산김씨, 그뒤 신안주씨와 여흥민씨, 100여년전 청주곽씨가 들어왔으며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일제때 50여호가 살았는데 화재로 20여호가 소각되었다가 다시 그 호수가 들어섰다. 6·25때 45명이 죽고 13명이 행방불명되었다. 현재 35호이다. 동명유래 : [조양]·[웃주앵이]·[쇠주앵이]·[주앵이]라 부르는데 이유는 알 수 없으며 [쇠주앵이]의 쇠는 소씨 때문이라는 설과 쇠부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인물 : 김병주(의학박사, 병원장)·김병대(고등학교장)·김병학(초등교장)·이여범(경찰경정)·김상운(면장). 유물유적 : 가마(김재언 소유)·도요지.

ㅇ 덕곡(德谷)

옛날에 강능유씨가 살았다는 말이 전하여 밀양박씨가 5대째 살고, 제주양씨가 160여년전, 전주이씨가 4대째, 진주정씨가 3대째, 연안차씨가 100여년 살아오고 그 외는 6·25전후에 입향했다. 처음에는 정동에 마을이 있어 35호에 달했는데 일제말기에 덕곡쪽으로 옮겨와 37호(정동 11·덕곡 26)였다. 30호가 6·25를 만나 전 가옥이 소각당하고 12명이 사망하였으며 현재 30호(정동 12·덕곡 2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정동은 [정동(貞洞)]으로 표기하는데 [정동(井洞)]이 변했다고 하며 [덕곡] 덕실이라고 부르며 이유는 알 수 없다. 인물 : 양석재(역장).

ㅇ 내동(內洞)

450년전 연안차씨가 살았다고 하는 구전이 있으며 조선후기 들어온 연안차씨가 살다가 30여년전 모두 떠나고 지금 살고있는 차씨는 6·25후에 들어왔다. 일제때 20호였으며 18호가 6·25를 만나 15호가 불타고 15명이 죽었다. 1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 유물유적 : 내온사(절터골에 있었다고 함)·당산나무(200년).ㅍㅇ 동정(東井)

남양홍씨가 뒷산 기슭에서 살았다는 구전이 있다. 담양전씨가 220년전 들어오고 일제때 진주강씨와 울산김씨가 들어왔으며 그 외는 6·25후 들어왔다. 30여호가 살다가 6·25때 전 가옥이 소각되고 22명이 죽었다. 그 후 20여호였으나 현재는 18호이다. 동명유래 : 마을 동쪽에 샘이 있어 [동정]이라 부르며 서쪽에 바위가 있어 [석암]으로도 부른다. 인물 : 전풍년(순천철도청 감사관)·전승희(감사원서기관).

(13) 오월리(鰲月里)

면남동쪽에 위치한 오월리는 오현·월봉·송산(필동)으로 이루어 졌으며 원래 북상면에 속했는데 1975년 장성호 건설로 북상면이 없어지고 북이면으로 편입되었다. 호구총수(1789년)에 [송산리]·[성조동(오현)]이 기록되어 있다.

ㅇ 오현(鰲峴)

오현은 월봉과 합해졌으며 총77호가 살고 있다. 오현에는 광산김씨가 정해촌에서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남평문씨가 1792년 정해촌을 거쳐 3년후 성조동으로 옮겼다. 그 뒤 입향한 청주곽씨가 6대째 살고있으며 봉산이씨 4대째, 울산김씨 80여년, 전주이씨 65년, 청송심씨 55년간 살고 있다. 일제때 45호 정도 였는데 6·25때 21명이 죽었으며 현재는 49호가 살고 있다. 월봉은 해주오씨가 4대째, 밀양박씨가 4대째, 밀양박씨가 100년간, 울산김씨가 3대째 살고 있다. 일제때부터 15호가 살다가 6·25때 5명이 죽고 현재 13호가 살고 있다. 또 새마을연수원과 최근 영업집 몇 호가 들어섰다. 동명유래 : 뒷산이 [자라형국]이어서 속칭 [자라뫼]라 부르며 [오현]으로 표기한다. 월봉은 마을 뒷산을 달도지라 부르는데서 유래했다. 인물 : 이기용(통정대부)·이만수(군의회부의장)·이준규(목포경찰서장)·심혜택(해군대령)·이영규(북상면장). 유물유적 : 지석묘.

ㅇ 송산(松山)

옛날 울산김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다. 480여년전 강능유씨가 들어와 14대째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1910년에 화순오씨, 1920년에 전주최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64호였으나 50호가 되어 6·25를 만나 16명이 죽었으며 현재 42호이다. 마을 입구 송산저수지 위쪽에 필동(筆洞) 마을이 있는데 전주최씨가 4대째, 광산김씨(2호)가 40년전에 들어와 3호가 살고있는데 일제때는 8호 였다고 하며 송산에 합해져 있다. 동명유래 : 송산은 소나무가 우거져 옛날부터 [솔뫼]라 불렀으며 필동은 뒷산이 [붓] 형국이어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인물 : 유구성(사간)·유영종(조대 약학대학장). 유물유적 : 지석묘(저수지 옆산)·송계서원(6위의 위패 봉안).

[표 8-10] 북이면 행정구역·세대인구현황 2001. 3. 31 현재

북이면 행정구역·세대인구현황 - 행정리, 자연마을, 세대수, 인구수(계, 남, 여) 제공 표
행정리자연 마을세대수인구수
1,5434,1062,0272,079
사가 1사남216582290282
사가 2사북193470290282
사가 3복룡551205565
묘동22723240
사가 4조산511528171
원덕 1원덕491487771
원덕 2목란26522626
신목란20633132
샛터7281315
신평 1신창32944549
신평 2신평26713140
거마37954253
달성 1달성30924448
궁동581296168
달성 2명정19432122
백암 1용산32723042
선평17421725
백암 2백암36803941
성부10512625
동산17411823
죽청 1금량21552728
중산10321616
이동9241113
죽청 2죽청19703337
청운12392415
만무 1만무17472819
율정1429154
상곡15321616
만무 2부동17452124
호산20341618
신월 1신광13482325
월하27633330
신월 2상공34864145
신월 3오동25562729
홍산22482325
모현 1모현14462026
평촌26724131
모현 2화동27723636
북촌14361521
수성리수성51468
성동8221111
화산19391821
조양 1조양35824339
조양 2덕곡34934449
내동16412120
동정18482424
오월 1오현7722612997
오월 2송산421105258
QR CODE
  • 왼쪽 정보무늬 사진을 휴대전화에 인식시키면 자동으로 이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 이 정보무늬는 『제2장 마을유래 199번』의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제2장 마을유래 페이지 바로가기 주소(https://www.jangseong.go.kr/q/ezIzMDd8MTk5fHNob3d8fQ==&e=M&s=3), QRCODE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