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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마을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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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절 북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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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혁

ο문암리 성산리 등지에서 지석묘가 발견된다. 백제때 고시이현에 속하고 고려때(1172년경) 장성현의 소재지가 오산리에 설치 되었으며 절효공 서능이 작동에서 태어났다.
ο임진왜란때 장성현 남문에서 남문창의가 일어났으며 1600년 장성현과 진원현의 합병으로 소재지가 장성읍 영천리로 옮겨갔다.
ο(영조 25) 북일면의 인구는 458호 1,665명이고 1789년 (정조 13)에는 494호 1,707명이며 다음과 같은 23개 마을이 있었다. 중방리·여고개·구해리·신흥리·강정리·오정리·송천리·누태리·정곡리·신기리·행정리·율촌·개박리·생철점·금곡리·광암리·사산리·사동리·성덕리·상당리·창촌·도생리·교촌·흑암리.
ο1912년에는 46개 마을이 있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리동은 다음과 같다. 신흥리(신흥·갑동·운평·만세), 성산리(성산·구해·신기·누태·황록), 월계리(계동·광덕·정곡·안정·송현·율리·월곡·오정·개천), 박산리(오복·주산·작동·원동·창암), 오산리(죽남·송남·창촌·오서·오평·교촌·용연), 성덕리(죽서·사동·장두·용암·운곡·궁평), 문암리(광덕·매남·제암·송정·지장·금곡).
ο처음 사무소가 구해에 설치 되었으나 1919년 성덕리 죽서로 옮겼다가 다시 신흥으로 옮겼으며 1930년 성산리 공평마을이 서삼면으로 할양되었다.

(2) 신흥리(新興里)

신흥리는 남부·북부·강정·만세·갑동·신흥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신흥이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인 것 같으며 호구총수(1789년)에는 신흥리와 강정리만 기록되어 있다.

ㅇ 남부·북부·만세(南部·北部·萬歲)

북일면 소재지 마을로 호구총수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옛날에는 만세에 7∼8호가 있었는데 역과 면사무소가 들어서면서 상가가 조성되고 호수가 늘어났다. 만세로 통칭되어 오다가 해방직후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남부·북부를 분리하고 마을 뒷편(동쪽)만 [만세]로 부르게 되었다. 많은 성씨들의 이동이 있었으나 황주변씨가 가장 오래살고 있으며 일제 중기에 평택임씨 10·황주변씨 10·광산김씨 5·담양전씨 3·행주기씨 등이 살았다고 한다. 6·25때는 많은 인명피해를 입고 관공서와 가옥 대부분이 소각되었다. 1978년 호남고속도로 개설 때 만세마을 대부분(23호)이 북부마을로 옮겨졌으며 현재 남부 76·북부 100세대가 농업과 상업을 병행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만세(원래 만세(萬世)로 썼다. 만세대가 살 터라는 뜻이라 한다.) 인물 : 변재오(통일주체 대의원)·김병호(면장, 군의원)·이우규(군의회 부의장)·변동화(북일면장)·변원(군의회부의장). 유물유적 : 5층석탑 -탑거리에 있었다. 구신흥역 터 -물탑이 남아 있다.

ㅇ 강정(江亭)

호구총수(1789년)에도 나오는 마을이며 마을 앞 개냇등에 먼저 마을이 있었던 것 같다. 청주한씨가 280여년 전에 들어왔으며 고령신씨·광산김씨·밀양박씨·송씨가 차례로 들어와 해방후까지 살았다. 6·25때 8명이 죽고 가옥피해는 없었다. 송씨와 한씨 몇집이 떠나고 이·선·나·김씨 등이 들어와 1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냇물이 마을 옆으로 지났기 때문에 강정이라 했다고 하며 일제초에는 [운평(雲坪)]이라고도 하였다. 인물 : 박광우 ­ 항일투사.

ㅇ 갑동(甲洞)

감나무골에 마을이 있다가 아래로 옮겨졌다고 하며 작은 마을이라 했다고 하는데 호구총수에 신흥리만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신흥·갑동이 한 마을이었던 것 같다. 약 200여년전에 광산김씨·나주임씨·김해김씨·정선전씨가 비슷하게 들어왔으며 그뒤 많은 성씨가 거쳐갔다. 일제초에 의령남씨, 일제말에 해주오씨, 해방후에 김녕김씨·평산신씨가 들어와 70여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34명이 죽었다. 그후 많은 성씨가 들어왔으나 이농현상으로 현재 54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첫째가는 마을이라는 뜻. 인물 : 전용석(가선대부)·임정규(북일면장)·전진홍(북일면장)·전윤식(부군수)·전길웅(박사). 유물유적 : 정선전씨의 담락제(湛樂齋)에 호구단자 교지 등이 보관.

ㅇ 신흥(新興)

뒷산에 3개의 절이 있었는데 신흥은 동구마을 이었다고 하며 호구총수에도 나온다. 청주한씨가 1600년대초에 들어와 동족마을을 이루었으며 170여년전에 밀양박씨가, 구한말에 해남윤씨와 전주이씨가 들어오고 그뒤 정선전씨·김해김씨가 들어왔다. 해방 후 50여호가 6·25를 만나 30명이 죽고 4호가 소각되었다. 50호 정도가 계속 유지되다가 이농현상으로 27호가 살고 있다. 새로 생긴마을로 흥하라고 신흥이라 했다. 뒷산에 3개의 절터가 있다고 하며 6·25전까지 10개의 당산(입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3) 박산리(泊山里)

박산리는 박산·작동·오복촌 3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 원동·작동·주산·오복 마을이 나오는데 원동은 작동의 일부이고 주산은 박산인 것 같다. 고려때부터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오는데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4개마을이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마을이 없어졌다가 다시 생겨난 것 같다. 1914년 오복·작동·원동·창암리 일부지역을 박산리에 편성했다.

ㅇ 박산(泊山)

황주변씨가 북이면 모현리에서 이거해와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다가 일제때 나주정씨·광산김씨·진천송씨·순천박씨·광산이씨·청주한씨 등이 들어와 30여호가 되었다. 그후 울산김씨·성주이씨·한양조씨·탐진최씨·인동장씨가 들어왔으며 6·25때는 3호에서 20여명이 죽었다. 그후 35호가 조성되었으나 현재 20여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배형국이어서 [주산(舟山)]이라 하다가 [박산]으로 고쳤다. 인물 : 변동익(사간원정원)·백근기(우체국장, 면장).

ㅇ 작동(雀洞)

마을주변에서 고려장이 발견되고 고려 고종때의 서능 선생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으나 1789년의 기록에는 없고 1912년 기록에 나온다. 1820년경 황주변씨가 북이면 모현리에서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그뒤 광산이씨·인동장씨·울산김씨 등이 들어왔다. 40여호가 6·25를 만나 인공때 10여명이 죽고 입산하여 3∼4명이 죽었다. 그후 40여호가 다시 조성되었으나 현재 19호가 살고 있다. 원골은 옛날 보등원(寶登院) 자리로 추측되며 1912년경 철도가 나면서 없어졌다. 동명유래 : 마을뒤 대나무숲에 새가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는 설과 동편 산이 [숙조형]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인물 : 서능(고려사 열전, 삼강행실도에 나오는 효자), 서준(금자광록대부), 변봉섭(역장), 변형(김포세관장), 변재룡(공군중령), 변진열(철도공무원, 녹조근정훈장). 유물유적 : 서능비각(전남 문화재제 162호), 미륵불, 점터.

ㅇ 오복(五福)

일제초 황주변씨 영운이 박산에서 분가해 온 후 수원백씨·순천박씨가 들어왔으며 일제중기 이천서씨·해주오씨·하동정씨가 그리고 6·25후에 여양진씨·곡부공씨·정선전씨·창녕조씨 등이 들어왔다. 15호가 6·25를 만나 5명이 죽고 2명이 입산하여 죽었다. 70년대 8호였으나 현재 20여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복받는 마을이라 하여 오복(五福)이라 했다는 설과 뒷산이 자라형국이라 [오복(鰲伏)]이 [오복(五福)]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인물 : 백영기(대학교수)·백근기(면장). 김흥주(한국통신)

(4) 오산리(鰲山里)

오산리는 북창·양막·학교촌·죽남·교촌·용연 등 6개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옛 장성현의 소재지이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상당리·창촌·도생리·교촌이 기록되어 있는데 [상당리]는 현재의 [죽남]과 [양막]이며 [도생리]는 6·25때 없어졌다.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는 용연리·죽남리·개천리·송남리·오서리·담정리·창촌리·창암리가 나오는데 [오서리]는 현재의 [양막]이고 [담정리]는 없어졌다. [송남리]는 현 [죽남]의 일부이고 [창촌리]는 [북창]이며 [오서]·[오평]은 [양막]으로 합해졌다. 그리고 [개천리]·[창암리]는 없어졌으며 [학교촌]이 새로 생겼다.

ㅇ 북창(北倉)

약 300년전 황주변씨가 북이면 모현에서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고 살다가 일제때 김해김씨와 밀양박씨, 1975년에 전주이씨가 들어왔다. 10여호가 6·25를 만나 8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4∼5년후 복구하여 현재 8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오산현 당시 창고가 있던 곳으로 [창촌]으로 부르다 일제초 [북창]으로 고쳤다.

ㅇ 양막(陽幕)

탐진최씨와 임씨가 살다가 떠났다는 말이 전하며 약 300년전 황주변씨가 북이면 모현리에서 들어왔으며 그후 영광김씨·청안이씨·연일정씨·전주이씨·부안김씨·밀양박씨·남평문씨·영월신씨·광산김씨가 차례로 들어오고 6·25후 진주강씨 그리고 최근에 전주이씨·남궁씨·최씨 등이 들어왔다. 일제 때 50호가 살았으며 6·25때 수십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실되었다. 그후 40여호가 살았으나 이농현상으로 25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 장성현 관아의 양마장이 있던 곳이어서 [양막동]으로 불렀다는 설과 [오서(午西)]와 [오평(午坪)]이 합해진 마을이라 양오(兩午) [양마]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인물 : 변동섭(독립운동가)·최형옥(환경부서기관)·변재희(대통령표창). 유적 : 옛 장성현 관아터, 자라봉 아래 동헌이 있었고 그 앞에 객사, 북창에 창고와 감옥, 도성리에 북문, 당밑들에 남문, 더너골에 원님 관사, 양마들에 마장이 있었다.

ㅇ 학교촌(學校村)

1925년 북일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성촌되었다. 처음 일제 때 유방환이 학교 앞에 점포를 차렸으며 광복 후에도 고광표·변재환·변동윤·변재길의 점포만 있었다. 6·25때 2호에서 8명이 죽고 4호가 모두 소각되었다. 6·25후 황주변씨·고흥유씨·밀양박씨·진주정씨·전주이씨 등이 차례로 들어오고 최근 김해김씨·부안김씨·박남박씨 등이 들어와 13호가 살고 있다.

ㅇ 죽남(竹南)

옛 장성현의 치소가 있었던 마을로 오래된 마을이나 옛 일은 알 수 없다. 임진왜란 때 남문창의 맹주 김경수(울산김씨)가 이 마을에서 살았으며 약 300년전 황주변씨가 북이면 모현리에서 들어와 살고 있다. 그후 영월신씨·영광김씨·광산김씨·허씨가 들어오고 울산김씨·해남윤씨가 들어왔다. 30여호가 살다가 6·25때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고 가옥이 전소되었다가 4∼5년후 복구되었다. 1972년 북창과 양막동에서 10여호가 옮겨오고 1987년 신흥역이 마을 앞으로 옮겨왔다. 현재 20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호구총수]에는 [상당리(上堂里)]로 1912년 기록에 [행정구역명칭]에 [죽남(竹南)]과 [송남(松南)]으로 기록되어 있다. 뒷산이 당재봉이어서 [당밑]으로 많이 불렀으며 일제초 마을 뒤에 대나무 숲이 있어 죽남으로 고쳤다고 한다. 인물 : 김경수(임난때 남문창의 맹주), 변치도(진사), 변극(대학교수), 변재홍(면장), 변을봉(도의원), 변화석(검사, 변호사), 변재록(면장), 변관석(법제처 서기관). 유적 : 남문터 ­ 옛장성현청의 남문터가 마을 앞 논이라고 한다. 임난 때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김경수 등이 3차에 걸쳐 의병을 일으켰다.

ㅇ 교촌(校村)

옛 장성현의 항교가 있었던 마을이다. 조선중기에 탐진최씨가 자자일촌 했다는 구전이 있으며, 약 300년전 황주변씨가 들어와 집성촌이 되었다. 그후 광산김씨·김해김씨·곽씨·조씨·임씨 등이 1∼2호씩 살았다. 57호가 6·25를 만나 54명이 죽고 전 가옥이 불에 탔다. 4∼5년후 마을이 복구되고 장흥고씨·연안차씨·송씨 등이 들어왔으나 이농현상으로 15호 정도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매곡(梅谷)]이라고 부르다가 향교가 있었던 마을이라 교촌으로 부르고 있다. 인물 : 변동엽(북일면장)·변만순(북일면장)·변금산표(북일면장)·변재한(북일면장) 유적 : 사직단터와 항교터가 있다.

ㅇ 용연(龍淵)

100여년전 광산김씨가 살기 시작하여 밀양박씨와 문씨 등 16호가 살다가 6·25때 16명이 죽고 가옥이 모두 불에 타 타지로 이거하였다. 1960년대부터 남양홍씨·여흥민씨·김해김씨·흥양이씨·광산김씨 등이 들어왔으나 현재 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날에 용이 승천한 못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5) 월계리(月桂里)

월계리는 오정·안정·계광·송촌·월곡·율리 6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오정리·송천리·정곡리·행정리·송현리·율촌리가 나오고 1914년에 계동리·광덕리·정곡리·안정리·송현리 그리고 율리·월곡리·오정리·황록리·개천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월계리라 하였다.

ㅇ 오정(鰲亭)

임진왜란 무렵에 하동정씨와 광산김씨가 살았다고 하나 상고해 볼 수 없다. 150여년전 광산김씨가 들어와 자가일촌 했으며 남평반씨·김해김씨·회진임씨 등이 일제때까지 살았다 그후 밀양박씨·곡부공씨·황주변씨·울산김씨·행주기씨·은진송씨 등이 들어왔다. 6·25때 15명이 죽었으나 가옥피해는 없었다. 일제때부터 20호 내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뒤 구봉산이 자라 형국이어서 오정(鰲頂)·오산(鰲山)·오정(鰲亭)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인물 : 김지규(광산인, 가선대부)·공수자(조선대 교수). 유물유적 : 개천정사(하곡 정운룡 강학소).

ㅇ 안정(安亭)

곡부공씨가 살기 시작하였으며 선산유씨도 10대째 살고 있다 그 뒤 밀양박씨·광산김씨·평택임씨 등이 들어와 45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30여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2∼3년후부터 마을을 복구하고 함양오씨·김해김씨·수원백씨 등도 들어와 40여호가 되었는데 현재는 30호로 줄었다. 동명유래 : 마을형국이 소 안장 같다하여 안장이 안정으로 변했다고 하며 1912년 기록에 안정리로 나온다. 가곡 : [가시골]로도 부르는데 임진왜란 때 직산조씨의 처 문화류씨가 열녀 정려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가곡(家谷)으로 나온다. 인물 : 정화현(외무부 주 상파울로 총영사)

ㅇ 계광(桂光)

1789년의 [호구총수]에 나오지 않는다. 밀양박씨가 처음 들어왔고 창녕조씨가 거쳐 갔으며 현재는 함평이씨가 가장 오래 살고 있다. 한양조씨·황주변씨·평산신씨·고씨 등 20여호가 살다가 6·25때 30여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4∼5년후 마을을 복구했으며 밀양박씨·울산김씨 등이 들어왔으며 현재도 20여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달 형국으로 안길을 중심으로 계수나무와 달빛을 의미하는 계동(桂洞)과 광덕(光德)으로 나누었는데 계광으로 통칭한다. 인물 : 고광필(면장), 박요배(면장).

ㅇ 송촌(松村)

밀양박씨가 가운데 살다가 신축년(1901) 홍수때 떠나고 현위치에 다시 마을이 생겨 한양조씨·황주변씨·울산김씨·김해김씨·의성김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10여호가 거주했으며 6·25때 전호가 소각되었다. 몇 년후 마을을 복구하여 현재 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뒷산에 소나무가 많아 송촌(松村)·송현(松現)으로 불렀다고 하며 송천(松川)이라는 기록도 보인다. 인물 : 김관(전남대 교수).

ㅇ 월곡(月谷)

밀양박씨가 13대째 살고 있다. 마을이 두 뜸으로 나누어 있는데 일제때는 월곡에 박씨 19호·오씨 1호, 정곡에는 유씨·변씨·허씨·김씨·박씨가 1호씩 살았다고 한다. 6·25때 박씨 10여명이 죽고 마을이 소각되었다. 4∼5년후 복구되고 담양전씨·광산김씨도 들어왔으나 현재 10여호(월곡 7·정곡 3)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밀양박씨 입향조의 호를 따라 행촌(杏村) 또는 행정(杏亭)으로 부르다 마을 뒷산 명당을 따라 월곡(月谷)으로 고쳤으며 지금은 계광과 합쳤다. 井谷은 물이 좋아 붙인 이름이다. 인물 : 박안동(호 행촌(杏村), 임난때 남문창의 가담), 박요배(면장).

ㅇ 율리(栗里)

마을 주변에 지석묘와 고려장이 있었다고 한다. 오래 전에 죽산안씨가 살았다고 하며 [호구총수]에 [율촌(栗村)]으로 나온다. 300여년전 한양조씨가 정착했으며 의성김씨·황주변씨가 들어와 40여호가 되었는데 일제말에 광산김씨가 들어왔다. 6·25때 약30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이듬해부터 다시 들어왔으며 그 외 다른 성씨들도 들어와 45호가 되었으나 현재는 33호로 줄었다. 동명유래 : 밤나무가 많고 절이 있었다하여 밤절이라고 부르며 율촌(栗村)·율리(栗里)로 표기한다. 인물 : 고재훈(초등교장)·고근석(도농산과장)·윤석호(재정경제부사무관)·변양석(농업진흥공사장).

(6) 성산리(星山里)

성산리는 성산·누태·황록·구해로 이루어졌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엄고개(성산)·구해·누태·신기가 기록되어 있고 황록은 200년이 못된 마을이다.

ㅇ 성산(星山)

선산유씨와 전의이씨가 엄고개에 살다가 폐촌이 되고 현마을에서 곡부공씨가 10대째 살고 있다. 그뒤 천안전씨가 들어오고 일제 때 안동김씨·희천김씨 해방 후 전주이씨가 들어와 30여호가 살다가 6·25때 6명이 죽고 전호가 소각되었다. 몇 년 후 마을이 대부분 복구되고 김해김씨가 들어왔으며 엄고개에도 일제 때 일본인이 양잠을 하다가 떠나 해방 후 김씨가 들어오고 6·25후 6호로 늘었으나 지금은 총18호에 불과하다. 동명유래 : 엄한 마을이라 하여 엄고개(嚴古介)라 했으며 뒷산 이름을 따라 성산(星山)이라 했다고 한다. 인물 : 공태욱(육군대령)·공학진(공군중령).

ㅇ 누태(樓台)

고려말에 직산조씨가 입향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해주최씨도 살았다고 한다. 전주이씨가 8대째 살고 있으며 그 뒤에 김해김씨·밀양박씨·여산송씨·천안전씨 등이 들어와 일제 때 45호가 살다가 6·25때 10여명이 죽고 2호를 제외한 전호가 소각되었다. 그후 광산김씨·남평반씨 등도 들어와 30여호가 되었으나 20호로 줄었다. 마을 주변에 성황당이 있었고 당산제를 지냈었다. 동명유래 : 마을이 다락처럼 높이 있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인물 : 이복동(장성 소방대장)·이병직(검찰서기관).

ㅇ 황록(黃鹿)

옛날에는 [신기]에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황록에는 100여년전 김해김씨가 들어온 후 곡부공씨·한양조씨 그리고 평산신씨·광산김씨가 들어와 일제 때 황록 17호·새터 5호·양친이 1호가 살았다. 6·25때 2명이 죽고 가옥피해는 없었다. 그 후 전주이씨·수원백씨·울산김씨 등이 들어왔으나 현재는 황록 14호 양친이 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황록(마을뒷산이 사슴형국)·양친이(양촌의 변음). 인물 : 김현인(구한말 장성군 좌수)·정연택(예수교장로회 전국평신도회장).

ㅇ 구해(九海)

북일면 사무소가 처음 이 마을에 있었다. 300년전 울산김씨가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배씨·강능유씨·전주이씨·조씨·청주한씨가 살다가 모두 떠나고 일제때 장흥고씨가 들어왔다. 28호쯤 살다가 6·25때 10여명이 죽고 10여명이 행방불명되었으나 가옥피해는 없었다. 그후 금녕김씨·순천박씨·최씨·김해김씨가 들어 왔으나 현재 15호(울산김 8·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구해(狗海, 뒷산이 개형국이고 마을 앞의 큰 하천때문)가 구해(九海)로 변했다고 한다. 인물 : 김재남(북일면장)·김기수(북일면장).

(7) 성덕리(聖德里)

성덕리는 성덕·평암·사동·장두·용암·운곡·궁평 7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 사산리(평암)·사동리·성덕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 용암·평암·장두·죽서(성덕)·궁평·운곡이 나온다.

ㅇ 성덕(聖德)

오래 전에 안성덕에서 전주최씨가 살았다는 구전설이 있으며 14C 중반에 광산김씨가, 170여년전 황주변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면사무소가 잠깐 설치되기도 했으며 전주이씨·반남박씨 등이 들어와 24호 정도가 살았다. 6·25때 14명이 죽고 전호가 소각되었다가 다시 복구되고 의성김씨·밀양박씨 등이 들어왔으나 현재 15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성덕골과 풍덕골에 마을이 있어 성덕이라 했으며 죽남리 서쪽에 위치하여 한때 죽서(竹西)라고도 했다. 인물 : 변재영(담양 교육장)·변동욱(북일면장).

ㅇ 평암(萍岩)

절효공 서능의 후손들이 세거한 마을이다. 일제말에 광산김씨가 들어온 후, 달성서씨·한양조씨가 들어와 25호가 살다가 6·25때 70여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마을이 복구되고 현풍곽씨·문경송씨·탐진최씨·고흥유씨 등이 들어왔으나 현재는 13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원래 [모람]이라 불렀는데 [호구총수]에 사산리(沙山里)로 나오며 뒷산이 [사산]인 것으로 보아 [모래뫼]가 [모람]으로 불렸으며 [평암]으로 표기한 것 같다.

ㅇ 사동(社洞)

500여년전 원사동에 강능유씨가 450여년전 뒷골에 하동정씨가 살았다고 한다. 황주변씨·나주임씨 등 13호가 살다가 6·25때 20여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그후 전주이씨·밀양손씨·광산김씨·진원박씨가 들어와 8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 장성현의 사직단이 있었던 마을이라 사동이라 한다. 인물 : 하곡 정운룡(임란때 고창현감, 남문창의)·변동열(면장·성균관이사)·변진섭(장성등기소장)

ㅇ 장두(獐頭)

150여년 전부터 서능의 후손들이 자자일촌하였다. 그 뒤 최씨·황주변씨·김해김씨·한양조씨·울산김씨가 들어와 20여호가 되었는데 6·25때 28명이 죽고 전호가 소각되었다. 몇 년후 마을이 복구되고 문경송씨·진주강씨·순창설씨·흥양이씨·광산김씨 등이 들어왔는데 현재 14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뒷산이 노루머리 형국이다. 인물 : 김영수(장성중교장).

ㅇ 용암(龍岩)

오래된 마을인 것 같고 광산김씨가 250여년전에 들어와 자자일촌 하였다고 하나 1789년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제때 서씨·박씨·오씨·민씨 등이 살았으며 6·25때 8명이 죽고 전호가 소각되었다. 10여호가 다시 들어오고 행주기씨·곡부공씨·권씨 등이 이거해 왔으나 현재 8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모정이 있는 바위 때문이라 한다. 유물 : 용전사(龍田祠).

ㅇ 운곡(雲谷)

기왓등에 먼저 사람이 살았으며 오래전 주씨가 부자로 살았다고 한다. 120여년전에 청송심씨가, 들어온후 남평문씨가 들어왔으며 일제때 전주이씨·황주변씨·한양조씨·함평이씨가 들어와 40여호가 살다가 6·25때 13명이 죽고 전호가 소각되었다. 마을이 다시 조성되어 선산김씨·이천서씨·평산신씨·진주강씨·장흥고씨 등이 들어왔으나 이농현상으로 20여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기와를 굽던 곳으로 기와동·와야골이라 부르다가 운곡으로 하였다. 인물 : 변재팔(북일면장)·변영석(운암동장).

ㅇ 궁평(弓坪)

옛날 하동정씨가 살았다고 하며 150여년전 한양조씨가 입향하여 자자일촌한다. 일제때 함평이씨·광복 후 진천송씨가 들어와 40여호가 살다가 6·25때 8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5년후 마을이 복구되고 전주이씨·창녕조씨 등이 들어와 25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서쪽산은 쥐형국, 동쪽산은 소형국이라 서우실이라 부르다가 활처럼 생긴 돌이 나와 마을 앞에 세우고 궁평이라 했다고 한다.

(8) 문암리(文岩里)

문암리는 광암·제암·매남·지장·성진원·금곡 6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금곡과 광암에 지석묘가 있으며 호구총수(1789년)에는 개박리·생철점·금곡리가 나온다. 개박리는 제암이고 생철점(부릿점)은 확실치 않다. 매남은 천주교인들이 들어와 생촌되었고 성진원은 1960년대 나환자들이 조성하였다. 1914년 광암·매남·제암·송정·지장·금곡·궁평 일부를 합하여 문암리라 하였다.

ㅇ 광암(廣岩)

마을 앞 냇가에 지석묘가 있고 [호구총수]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350여년전 하동정씨(하곡의손자)가 들어와 자자일촌 하였다. 불무골샘 위쪽을 문암, 아래를 광암, 서당골샘 아래를 덕암이라 하며 물통골에 3∼4호 살다가 신축년 물난리때 없어지고 마을 앞 들건너 새뜸에도 일제때 하동정씨·충주박씨·진주강씨·전주이씨·김씨 등 6호가 살다가 6·25때 폐촌되었다. 마을남쪽 들가운데 숲안에는 1923년 하동정씨가 입향하고 해방 무렵 평산신씨·황주변씨, 일제때 현풍곽씨·전주이씨·선산김씨, 최근에 연안차씨·한양조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광암·덕암·문암·숲안·새뜸에 57호가 살다가 6·25전후에 15명 정도의 인명피해와 가옥이 전소되었다. 그후 30호정도가 살다가 24여호로 줄었다. 동명유래 : 광암(마을 앞에 넓은 바위가 많았으며 광암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문암(文岩­마을앞 도덕봉에 문암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덕암(德岩, 새절골에 덕암사라는 절이 있다.). 인물 : 정은채(북일, 북이면장). 유물유적 : 서산유씨 정려, 양심당(養心當, 정운룡 자손 강학지소), 광암초등학교(1963년 개교 1990년 폐교).

ㅇ 제암(濟岩)

여양진씨가 250여년전 입향하였고 그뒤 밀양박씨가 살다가 지장으로 옮겨왔다. 일제때 전주이씨·여흥민씨·한양조씨 등 20여호가 살다가 6·25때 인명피해는 없고 가옥이 전소되었다. 10여호가 들어오고 장흥고씨·창녕조씨 등이 이거해 왔으나 현재 8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원래 [개빼기]로 불렀는데 마을 앞에 개바우를 개암(介岩)이라 하였다. [호구총수]에는 [개박리(介朴里)]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개암리(介岩里)]로 1917년 기록에 [제암(諸岩)]으로 나온다. 유물유적 : 고흥유씨 정려(조찬한의 처).

ㅇ 매남(梅南)

임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구한말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하여 들어와 성촌된 마을이다. 조씨가 살다가 떠났으며 전주이씨가 들어와 자자일촌 하다가 일제때 김해김씨가 들어왔으나 지금은 전주이씨 4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원래 [매내미]라고 부르며 마을 뒷봉이 매남봉이다. 유물유적 : 천주교 매남공소(1882년 창설).

ㅇ 지장(芝長)

원래 안지장과 아래지장(뙤얏등)이 있었는데 웃지장에는 1968년 성진원이 생겼다. 130여년전 부안김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하동정씨, 6·25후 보성선씨·창녕조씨·덕수이씨 등이 들어왔으나 1968년 웃지장에서 몇집이 옮겨왔다. 1885년 천주교 되야동 공소가 창설되어 38명의 신자가 있었다고 하며 일제 때 5호가 지금은 8호가 되었다. 동명유래 : 아랫지장을 뙤얏등, 소정이로 불렀는데 마을 뒤 장군봉에서 지장(智奬)이 유래되어 지장(芝長)이 되었단 말이 있으나 뙤얏 등을 한문식 표기로 지장(芝長)이라 한 것 같다.

ㅇ 성진원(聖進圓)

원래 안지장(웃지장)이라고 불렀으며 해방후 19호까지 살다가 6·25후 5호가 되었는데 1960년대초 북당골에 나환자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모두 타지로 떠나고 환자들이 점차 늘어나 100여명까지 되었는데 현재 23호 70여명이 천주교 신앙생활을 하면서 축산과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천주교 성진원공소(1960년에 설립)와 백주원 군수 공적비가 서 있다.

ㅇ 금곡(錦谷)

주변에 지석묘가 있으며 호구총수(1789)에도 나온다. 1730년경 청주한씨가 들어와 종이를 만들었다고 하며 그뒤 김해김씨·광산김씨·경주김씨·하동정씨·밀양박씨·대구배씨·장수황씨 등이 들어왔다. 들독골에 일제때 10여호가 살다가 점차 줄어들어 1980년경 폐촌되었다. 텃골에도 일제초 6호가 살았으며 점골에도 6·25전까지 3호가 있었다. 원금곡은 60여호였으며 6·25때 가옥이 전소되고 전후 40여명이 죽었다. 다시 40여호가 살았으나 현재 28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종이를 많이 만들던 마을로 종이를 비단으로 보아 금곡으로 했다는 등 몇가지 설이 있으나 검은골이 금곡으로 변한 것 같다. 인물 : 황두연(육군대령)·오성옥(육군중령). 기타 : 지금도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표 8-9] 북일면 행정구역·세대수 인구수 현황 2001. 4. 30 현재

북일면 행정구역·세대수 인구수 현황 - 법정리, 행정리, 자연마을, 세대수, 인구, 남, 여 제공 표
법정리행정리자연마을세대수인구(명)
신흥리남부리남부,강정7621697119
북부리북부,만세100222107115
갑동리갑동541236162
신흥리신흥27733736
박산리박산리박산,작동,오복651697891
오산리오산1리북창,양막,학교촌,죽남751789583
오산2리교촌,용연22723537
월계리월계1리오정,안정48136970
월계2리계광,송촌,월곡391075750
월계3리율리33883850
성산리성산1리성산,누태391064858
성산2리황룡,구해39924052
성덕리성덕1리성덕,평암,사동,장두,용암541477671
성덕2리운곡,궁평491357362
문암리문암1리광암,제암,매남 지장,성진원691818992
문암2리금곡28733439
16 8172,1211,034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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