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군 로고

국가상징 국무회의 알아보기

제2장 마을유래

  • 트위터
  • 페이스북
  • 구글
  • 현 페이지 엑셀로 다운
  • 현 페이지 워드로 다운
  • 현 페이지 인쇄
4차 메뉴 정의
5차 메뉴 정의

제6절 삼계면

원본파일 다운로드

1) 연혁

ο 삼계면에는 평림천과 삼계천 유역에 많은 지석묘가 남아있어 선사시대에도 많은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유창균씨(영남대 교수)는 마한의 임소반국(臨素半國) 위치를 삼계면으로 추정하고 있다.
ο 백제때 소비혜현(치소 우봉)에 속했으며 신라 경덕왕때 삼계현으로 개칭되고 892년부터 42년간 후백제 세력에 속하였다.
ο 1018년 영광군에 내속되었다.
ο 1749년(영조 25)에 발간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현 삼계현 지역에 영광군의 3개 면이 있었는데 내동면은 174호·732명, 현내면은 316호·1,215명, 삼북면은 471호·1,577명으로 총 961호·3,524명이었다.
ο 1789년 발간된[호구총수]에 의하면 내동면은 12개 마을 150호·789명, 현내면은 21개 마을 370호·1,450명, 삼북면은 44개마을 548호·1,910명으로 총 77개 마을에 1,068호·5,149명이 살았었다.
ο 1912년 간행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삼북면에 32개 마을, 내동면에 13개 마을, 현내면에 17개 마을, 총 62개 마을이 있었다. 이때 현내면 소재지는 우봉, 삼북면 소재지는 대동, 내동면 소재는 도동이었다.
ο 1914년 4월 1일 영광군의 삼북면·현내면·내동면을 삼계면으로 통합하여 장성군에 편입했는데, 이때 외동·외서·삼남면의 일부와 고창군 성송면 생촌리가 삼계면에 편입되었으며 삼계면은 15개 리 82개 마을을 관할하게 되었다.
ο 1950년 삼계면은 52개 마을 2315호·4572동(부속건물 포함) 이었는데 6·25동란 때 47개 마을 2,092호 4312동에 소각되고 1,630명이 사망했다.
ο 1990년 삼서면에 상무대가 들어오면서 사창리에 아파트촌이 생기는 등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2) 사창리(社倉里)

사창리는 1리(사창)·2리(약동)·3리(신억)·4리(우봉)·5리(금성)·6리(금광아파트)·7·8리(상무아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옛날 영광군 현내면 지역으로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사창리·용암·칠전·신대·신억곡·흥법리·우봉이 수록되어 있으며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는 용암리·우봉리·사창리·신억리·영성(今城)리가 나온다. 1914년 사창·약동·신억·금성(錦城)·우봉을 사창리로 묶어 장성군 삼계면에 편입했는데 1990년 삼서면 학성리에 상무대가 옮겨오면서 사창리에 군인 가족이 거주하는 상무아파트와 일반인이 거주하는 금광아파트가 조성되었다. 사창리는 삼계면의 소재지로써 옛 삼계현의 치소(우봉마을)가 있었던 곳이며 마한시대의 임소반국을 비정하는 곳이다.

ㅇ 사창(社倉)

1914년부터 삼계면사무소가 소재한 마을로 옛날에는 하천 때문에 지대가 높은 신억쪽에만 인가가 있었는데 시장(설립년대 미상, 조선말엽으로 추정)이 생긴후부터 마을이 조성된 것 같다. 오래 전에 남평문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150년을 넘는 성씨가 없다. 한말에 120여호가 거주하였는데 상업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일제때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살다가 해방 후 떠났다. 수성최씨가 150년전에 들어왔으며 일제초에 장흥임씨·인동장씨·이천서씨 등이 들어오고 그 외 성씨들은 일제중엽과 6·25전후에 들어왔다. 80년대초 57호 280명, 90년대초 119호 446명(당시 42개성씨), 현재 111호 327명이 살고 있는데 삼서면에 상무대가 들어온 후 주변에 아파트촌이 생기고 유입인구가 많아져 활기를 띄고 있다. 동명유래 : 1524년(중종 19) 설치한 사창(월정과 우봉사이)에서 유래 인물 : 나몽성(도의원)·유재원(삼계면장)·김종근(외무부서기관). 기타 : 면사무소·지서·삼계 중고등학교 등이 있다.

ㅇ 약동(藥洞)

1920년경 남양홍씨가 들어와 약방을 시작했으며 그 무렵 전주이씨와 김해김씨가 들어와 3호가 살다가 10여년 뒤에 하음봉씨·수원백씨, 일제 말엽에 밀양박씨 등이 들어와 초등학교 후문과 운동장 서쪽에서 10여호가 살았는데 6·25직전 20여호로 늘어났다. 인공때 10여명, 산에서 20여명이 죽고 가옥 5호가 소각되었다. 그 후 호수가 증가했으며 사창에 속해 있었는데 1970년경 분리되어 80년 33호 158명, 90년 52호 192명, 현재 59호 146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약방이 있어 약방동이라고 부르다가 약동이 되었다. 기타 : 사창초등학교(1920년 인가).

ㅇ 신억(新億)

마을 뒤쪽에 고려때 관음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그때부터 마을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300년전 진주강씨가 들어오고 230년전 진주정씨, 1840년경 평산신씨, 1850년경 전주유씨, 1890년경 문화유씨·전주이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동래정씨·인동장씨·의령옥씨가 들어오고 그 외는 6·25 전후에 들어왔다. 일제때 33호였으며, 6·25때 15명이 죽고 가옥 1호가 소각되었다. 90년 35호였는데 현재 54호가 되었다. 동명유래 : 신억실은 역촌이어서 진주강씨들이 이와 구분하기 위해 정자이름을 따 아래쪽을 은향정이라 했는데 지금은 신억실로만 부르며 [호구총수]에도 신억곡으로 나온다. 인물 : 유인수(호남의 명의원)·홍종휘(언론인·항일운동)·유재원(삼계면장)·유재창(조합장)·유재철(광주일보 문화부장) 유물유적 : 관음사터(7층석탑이 있었는데 일제때 마을에서 팔았으며 불상은 영광 불갑사로 가져갔다.)

ㅇ 우봉(牛峰)

옛 소비혜현과 삼계현의 치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마을 뒤 태봉산에 삼계고현성터가 있다. 1914년까지 영광군 현내면사무소가 있었으며 우봉과 용암으로 이루어졌는데 호구총수(1789년)에 두 마을과 칠전(漆田)이 적혀 있다. 350년전 진주강씨, 300년전 경주이씨가 들어오고, 구한말 광산김씨·해주오씨, 일제말 경주최씨·영성정씨·고흥유씨, 그 외 성씨는 6·25전후에 들어왔다. 일제때 100여호(경주이씨가 가장 많고 진주강씨·영성정씨도 많았음.)가 넘고 부촌으로 기와집이 많았다. 6·25때 30여명이 죽었으며, 일제때 4∼5호가 있던 칠전과 다리목이 6·25후 약동으로 편입되어 60여호 였다가 이농현상으로 40호로 줄었는데 최근 6세대 빌라가 생겨 46세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뒤 태봉산이 와우형이어서 '소무재'라고 부르며 우봉으로 표기한다. 용암은 냇가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인물 : 이기우(삼계중학교 설립자)·이상삼(초등교장). 유물유적 : 용암사지, 삼계고현성, 기영정.

ㅇ 금성(錦城)

고려때 이곳에 흥법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남평문씨가 오랫 동안 살다가 일제 말엽 마지막 떠났다고 한다. 동래정씨가 400여년 전에 들어와 13대째 살고 있으며 김해김씨가 200년전에 들어오고 그 뒤 신평송씨·장흥고씨·밀양박씨, 일제때 보성선씨, 남평문씨 해방후 진주강씨가 들어와 36호 정도(동래정 10·김해김 7·기타) 살다가 6·25를 지나며 10여명이 죽고 전가옥이 소각되었다. 그후 40호까지 살다가 90년 25호 였는데 약동의 일부가 편입되어 현재 64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호구총수(1789년)에 흥법리(興法里)로 나와 있으며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 금성리(今城里)로 나와 있다. 절이 있어서 흡법리라 하다가 주변 야산이 비단성 같이 둘러 있어 금성으로 고쳤는데 정씨의 동족마을이라 정촌으로도 불렀다. 인물 : 송한선(삼계면장)·정문엽(삼계면장)·고중엽(삼계면장)·김귀조(광주보현사주지)·백한풍(한말의병). 유물유적 : 흥법사지 ­ 사천왕상과 불상을 일제때 발굴하였는데 행방을 알 수 없고 5층석탑은 1981년 광주국립박물관으로 옮겼다.

ㅇ 아파트촌

1990년대 상무대가 삼서면 학성리로 옮겨옴에 따라 군인가족들의 아파트가 이곳에 세워져 생긴 마을이다. 당시 임야에 터를 닦아 상무아파트를 세웠으며 이어 민간인이 거주하는 금광아파트가 건립되었는데 행정상 금광아파트는 사창 6리, 상무아파트는 사창 7·8·9·10·11리로 편성되어 있다. 사창6리(금광아파트) : 삼계면 사창리 165­2번지, 건축면적 : 2,429m2, 대지면적 : 10,292m2 시공회사 : (주)금광주택, 착공 : 1995. 5. 29, 완공 : 1997. 1. 8, 총 420세대중 현재 310세대∼315세대가 유지된다.

아파트내 동장회의시 단지별로 구성되어 운영 : 5개 단지로 운영

아파트촌 단지별 구성 안내 표 - 단지별, 동별, 인구수, 세대수, 변경안 제공 표
단지별동 별인 구 수세 대 수변 경 안
총 계38 개동3,9031,192※ 기준 8.31현재
1단지101동 -106동718194사창 7리
2단지107동 -115동1,220328사창 8리
3단지116동 -122동633181사창 9리
4단지123동 -127동656179사창10리
5단지201동 -210
영외 BOQ
676310사창11리

(3) 월연리(月淵里)

월연리는 부연·월정·월구·수남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영광군 현내면이었는데 1789년의 [호구총수]에 나오는 중신촌이나 가신촌이 나오는데 사창리는 구사창을 말하며 중신촌과 가신촌은 사창이나 부연 주변에 새로 생긴 마을을 지칭한 것 같은데 혹 월정이 아닌가 싶다. 1914년 수남·월정·부연·월광·사창·월산·우봉·신계·지정 각 일부를 월연리라 하여 장성군 삼계면에 편입시켰다.

ㅇ 월정(月汀)

마을 뒤쪽에 옛 사창터가 있으며 마을에 새터란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호구총수(1789년)에 나오는 중신촌이나 가신촌이 이 마을일 수도 있으나 구사창이라고 부른다. 전주이씨가 7대째 살고 있으며 1870년경 김해김씨와 진주강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광산김씨·반남박씨·문화유씨·해주최씨 등이 들어오고, 해방후 경주최씨·이천서씨·수원백씨 등이 들어와 50여호가 살았는데 전주이씨가 가장 많았다. 여순사건때 2명, 인공때 13명, 입산자 6명과 기타 3명이 죽었으며 그후 40여호가 살다가 지금은 24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구사창으로 부르다가 사창과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마을이 수중반월형이므로 월정으로 바꿨다. 인물 : 김대중(육군소장)·정종균(건설부과장), 정종필(장성한전지점장) 유물유적 : 사창터 -1524년(중종 19) 설치, 순조때 폐쇄.

ㅇ 월구(月鉤)

200년전 상산김씨가 입향한 후 구한말 신평송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파평윤씨·청주한씨가 들어왔다. 해방 후 송·손·김·황·상김 등이 살았는데 6·25때 20여명이 죽고 마을이 불탔다. 20여호가 다시 들어오고 65년 문화유씨·부안김씨 그후 해주오씨·광산김씨·하음봉씨 등이 이거해 왔는데 현재 13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뒷산이 반월형이고 마을이 갈구리에 걸린 형태라 월구라 했다. [호구총수]의 가신촌(佳新村)이 이곳인지도 모르며 1917년 기록에는 월광(月鑛)으로 나온다. 유물유적 : 지석묘.

ㅇ 수남(水南)

600여년전 상산김씨가 살았다는 말이 전해 오는데 중간에 마을이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구한말 영광의 조지환(창녕조씨)이 현내면장으로 재직할 때 터를 잡아 들어왔다고 한다. 해방후 22호가 살다가 6·25때 16명이 사망했으며 함동저수지 축조때 일부가 떠나고 그뒤 이농현상으로 4호(창녕조 2·경주이 1·김해김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어느 도사가(또는 이서구?) 저수지를 예언해 수남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인물 : 조지환(영광현내 면장).

ㅇ 부연(釜淵)

상산김씨가 19대째 살고있는데 600년전 상주에서 동화면 서양리로 들어온 운보의 아들 법생이 들어와 그 자손들이 자자일촌해온 마을로 구한말 광산김씨, 일제때 유·탁·박·오씨 등이 들어와 60여호가 살았는데 전답이 함동저수지에 수몰되어 몇 호가 떠나갔으며 6·25때 많은 사람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그후 45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19호이다. 동명유래 : 마을이 가마솥 형국으로 '가마수'로 부르며 부연으로 표기한다. 인물 : 김찬순(전해산 의병의 도총장·김봉현(삼계면장), 조동수(광주일보 편집국장). 유물유적 : 부연사터(김법생·김우생·김석천 배향, 고종때 훼철).

(4) 주산리(舟山里)

주산리는 백산·정각·이곡·월산 4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영광군 현내면 지역으로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분동·정간·송죽동·신촌·중백산·양지·내백산·광대정이 수록되어 있는데 양지와 송죽동은 확인할 수 없고 광대정·신촌은 백산에 지명만 남아있다. 1914년 이곡·정각·백산·월산 등을 주산리로 편성하여 장성군 삼계면에 소속시켰다.

ㅇ 백산(白山)

호구총수(1789년)에 신촌·중백산·양지·내백산·광대정이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백산 부근에 여러 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신촌과 광대정은 지명만 남아 있고 양지는 알 수 없다. 약 500년전 광산김씨·종손(宗孫)이 우정동에서 들어와 17대손이 살고 있는데 그의 자손들을 백산파라고 한다. 1800년대초 상주박씨가 들어온 후 몇 성씨가 들어와 일제말엽 60여호(광김을 주축으로 박씨·함이·진주강·이천서·기타)가 살았으며 6·25때 25명이 죽고 함동저수지 축조로 11호가 떠났다. 현재 22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해뫼라고 부르며 백산으로 표기하는데 달빛에 대나무잎이 흰산 같아서 붙여졌다고 한다. 인물 : 김보원(임란때 의병장)·이구원(초등교장). 유물유적 : 유유정, 삼우정.

ㅇ 정각(淨閣)

1400년경 신평송씨가 충남 아산에서 옮겨왔던 증손이 지지당 송흠이며 20대손이 살고 있다. 그후 약 190년전 함평노씨·100여년전 하음봉씨·일제초 경주이씨·최근 영월신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40여호(분동 2호)였는데 6·25때 9명이 죽고 마을이 불에 탔다. 이듬해 복구하여 35호 였는데 함동저수지 건설로 몇 호가 떠나고 이농현상으로 현재 23호(송 14·노 6·신辛·이·봉)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샘물이 좋아 정(井)각(호구총수에는 정간(井間) )이라 하였는데 기노사 선생의 의견을 따라 고쳤다고 한다. 인물 : 송흠(호 지지당, 전라감사)·송인성(전남대 교수). 유물유적 : 회나무(보호수)·신평송씨재실(분동).

ㅇ 월산(月山)

1800년경 신평송씨가 정각에서 옮겨왔으며 일제때 전주이씨·풍천임씨가 들어오고 최근 영월신씨·김해김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30여호(모퉁아리 4)였는데 6·25때 10명이 죽고 마을이 소각되었다. 그후 큰 변화없이 26호(송씨 20)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뒷산이 달형국. 인물 : 송휘식(고등교장)·송영중(노동부 부이사관).

ㅇ 이곡(狸谷)

약 300년전 신평송씨가 정각에서 들어와 살다가 떠났다고 하는데 호구총수(1789년)에는 나오지 않는다. 1830년경 영성정씨가 들어오고, 150년전 신평송씨, 일제때 광산김씨, 금녕김씨·임씨·이천서씨·고씨 등이 들어와 33호가 살았는데 6·25때 10명이 죽고 가옥 5호가 소각되었다. 그후 25호가 유지되다가 현재 13호(송 6·정 4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살쾡이형국이라 삭실로 부르며 이곡으로 표기한다. 인물 : 심수근(한말의병)·정태수(장성군 산림조합장)·정영식(공군중령, 금호공단소장).

(5) 상도리(上道里)

상도리 쌍정·죽탄·도동 3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영광군 내동면 지역으로 면소재지였다. 1789년 발간된 [호구 총수]에도 대열리·석전·도동·시목동이 나오며, 1914년 도동·상죽(죽탄)·쌍정과 삼남면 판교리 일부지역을 합하여 상도리라 하여 장성군 삼계면에 소속시켰다.

ㅇ 도동(道洞)

옛날 고씨와 심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약 300년전 광산김씨가 염치에서 옮겨왔다. 그후 1800년대초 영월신씨가 들어오고, 광산이씨가 죽탄에서 분가해왔으며 1870년경 장흥임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상산김씨·장흥고씨·고령신씨·신평송씨·창녕조씨 등이 들어와 해방후 60여호가 살았는데 6·25때 15명이 죽고 30호가 소각되었다. 그후 문화유씨·함평이씨 등이 들어왔으며 현재 47호(광김 21·영월신(辛) 7·광산이 4·창녕조 3·상산김 3·신평송 3·고령신 2·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돼지막 형국이어서 돼지굴이 독굴→독골→도동으로 변했다고 한다. 인물 : 김영달(조선대총장)·김영술(삼계면장)·신천수(경정)·신희명(사법고시).

ㅇ 쌍정(雙汀)

고려 때부터 마을이 있었다고 하며 호구총수(1789년)에 나오는 석전(石田)은 일제때 없어져 마을 서쪽에 지명만 남아있다. 450년전 영월신씨가 들어와 살다가 도동으로 이거하고 180년전 광산김씨가 도동에서 옮겨왔다. 일제 때 나주정씨와 최·신(辛)·이(李)씨 등이 살았으며 죽탄과 합하여 100여호가 넘었다. 해방 후 보도연맹사건으로 15명이 처형당하고 6·25때 8명이 죽고 30여호가 소각되었다. 그후 장흥고씨·하음봉씨·광산이씨 등이 입향했으나 13호(광김 5·고씨 2·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에 정자나무 2주가 있어 쌍정이라 했다고 한다. 인물 : 김원경(교육청사무관).

ㅇ 죽탄(竹灘)

처음 광산노씨가 살았는데 약 500년전 광산이씨가 들어와 노씨와 혼인하여 자자일촌 하였으며 18대손이 살고 있다. 그 뒤 1880년경 광산김씨와 조금후 전주최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신평송씨·하음봉씨가 들어왔다. 해방 후 60여호가 살다가 6·25때 10여명이 죽고 전 마을이 소각되었다. 그뒤 50여호가 살다가 현재 36호(광김 20·광이 10·최 3·송 2·봉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대나무가 많고 여울이 있어 대여울이 대룰로 변하고 죽탄으로 표기한다. 인물 : 이윤종(병조참관)·이희익(임란의병장)·이효안(임란의병장)·이승호(항일운동)·김호근(육군중령)·이병갑(육군대령)·김대돈(육군중령)·김야정(소령).

(6) 능성리(綾城里)

능성리는 성산·마평·능성·신사·나신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 영광군 내동면 지역으로 1789년에 발간한 [호구총수]에는 능성치·신사전·대치·사사전이 나오며 1914년 성산·마평·능성치·신사리·나신리를 능성리라 하여 장성군 삼계면에 편입시켰다.

ㅇ 나신(羅新)

오래 전에 황씨가 살았다고 하며, 나씨도 살았던 것 같다. 호구 총수(1789년)에 나오는 대치(大峙)는 이 마을이며 사사전(四沙田)은 알 수 없다. 옛날에는 마을 공동샘이 영광과 나주의 경계였으며 원래 영광 한치라는 곳에(마을 앞쪽) 마을이 있다가 나주땅인 현 위치로 옮겨진 것 같다. 장흥고씨가 350여년 전에 능성에서 분가해 왔으며, 1900년경 금성나씨·진주강씨가 들어왔다. 해방후 18호가 살다가 6·25때 5명이 죽고 전 마을이 소각되었다. 그후 동래정씨·김해김씨·한양조씨 등이 들어왔으나 현재 11호(고씨 5·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나주 땅에(혹은 나씨가)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 인물 : 나동영(동국대교수)·나세근(변호사)·고재순(새마을훈장·조합장).

ㅇ 신사(新沙)

350년전 장흥고씨가 능성에서 분가해 와 동족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며 일제때 40호(고씨 33·나씨 4·허씨 2·남씨 1)였으며 6·25때 20여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그후 화순오씨·광산김씨·김해김씨 등이 이거해 왔으나 현재 20호(고씨 17·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모래치·모라치라 부르다가 신사라 표기했다. 인물 : 고제안(삼계면의원)

ㅇ 능성(綾城)

원래 철원주씨가 살았는데 400여년 전 장흥고씨가 생촌에서 분가해 왔으며 함평이씨도 9대째 살고 있다. 일제때 40호쯤(고씨 30·함이 3·한양조 2·남씨 1·박씨 1) 살았으며 6·25때 30여명이 죽고 가옥이 소각되었다. 그후 금성나씨·김해김씨가 들어오고 들가운데 좌평에 새로 8호가 조성되었으나 현재 22호(고씨 7·나씨 2·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원래 백운동이었는데 300년전 능주고을 원님이 이거해 와 능성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인물 : 고양진(삼계면장)·고영주(체신부 사무관)·고요상(삼계면장)·고웅주(동양화가)·고광우(목포대 교수)·고칠주(북하면장)

ㅇ 마평(馬坪)

장춘동에 장수황씨·바느라지에 철원주씨가 살았다고 전하며 150여년전 장흥고씨가 신사에서 옮겨왔으며 일제때 영월신씨·의령남씨·무송유씨가 들어와 27호(고씨 21·신씨 3·유씨 2·남씨 1)가 살았으며 24호가 6·25를 만나 8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현재 8호(고씨 6·신씨·남씨)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갈마음수 형국으로 '갈마지'라고 부르다 마평이 되었다.

ㅇ 성산(城山)

호구총수(1789년)에는 나오지 않으나 주변에 지석묘가 있고 철원주씨 2세가 신라때 귀양온 곳이며 14세부터 16세까지 살다가 1350년 전후 수옥리로 이거했다고 한다. 340년전 장흥고씨가 능성에서 옮겨왔으며 일제때 무송유씨·전의이씨·광산김씨가 들어오고 최근 한양조씨·밀양박씨가 입향했다. 일제때 56호였으며 52호가 6·25를 만나 14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현재 40호(고씨 31·유씨 5·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산이 성처럼 둘러 있다고 하여 성산이라 하였다. 인물 : 유병찬(육영사업에 크게 기여)·유병채(고등교장)·유병학(초등교장)·유병수(제주대교수)·고광어(의사)·고재완(육군대령). 유물유적 : 능성초등학교지(폐교)·도산사·지석묘.

(7) 발산리(鉢山里)

발산리는 대무·서발·동발·월곡 4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 영광군 현내면과 내동면이 합쳐진 지역으로 호구총수(1789년)에는 서발산·동발산이 나오며 1914년 현내면의 대무리·서발산·동발산과 내동면의 월곡리를 발산리로 통합하여 장성군 삼계면에 편입시켰다.

ㅇ 대무(大武)

처음 밀양박씨가 살다가 100년전에 떠났으며 190년전 나주오씨, 160년전 금성나씨, 110년전 여양진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철원주씨가 들어와 18호가 살았는데 6·25때 7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그후 신평송씨·함평노씨 등이 들어오고 21호까지 살았으나 현재 14호(나씨 5·오씨 5·광산이 2·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날 무기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ㅇ 서발(西鉢)

고려때 광산탁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1600년경 창녕성씨가 들어와 살다가 모두 떠났다. 같은 시기 신평송씨가 홍주에서 입향하고 260년전 밀양박씨가 들어와 일제초 20여호, 해방후 32호 였는데 6·25때 2명이 죽고 가옥은 무사했다. 그후 밀양박씨·함평이씨·무송유씨·인동장씨·금성오씨·창영성씨 등이 들어 왔으나 현재 22호(송씨 14·박씨 3·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발옥산 기슭에 마을이 있다. 인물 : 송광운(행정고시, 행자부 이사관)·송정식(내무공무원·대통령 표창)·송광재(의사).

ㅇ 동발(東鉢)

원래 서발산과 한 마을로 고려때 광산탁씨가 살았고 그뒤 상산김씨·창녕성씨가 살았다고 하는 말이 전한다. 370여년전 서발산의 신평송씨가 옮겨 왔으며 일제초 금성정씨·해주오씨가 들어온뒤 영월신씨·해주최씨·해주임씨·함평이씨·인동장씨 등이 입향하였다. 해방 후 23호가 살다가 6·25때 8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그후 밀양박씨·경주이씨·거창신씨·김해김씨 등이 들어왔으나 22호(송씨 9·최씨 3·신(辛)씨 2·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발옥산에서 유래. 인물 : 송광문(치과의사)·송화식(지방행정공제회 부장).

ㅇ 월곡(月谷)

옛날 박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1850년경 금성정씨가 들어오고 10년 뒤 철원주씨가 그리고 1890년경 행주기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조양임씨·영월신씨 등이 들어와 해방 후 34호 171명이 살다가 6·25때 20여명이 죽고 마을이 소각되었다. 그후 장흥고씨·밀양박씨·남평문씨·신평송씨·동래정씨 등이 들어왔으나 현재 22호(정丁씨 13·송씨 2·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어느 스님이 동구산의 달을 보고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인물 : 주문영(상공부 서기관). 유물유적 : 지방바위 -마을 뒷산에 있음. 송인선의 처, 철원주씨가 임난때 왜놈에게 팔목을 잡혀 그팔을 스스로 절단하니 왜군이 입구바위에 [이산에 열녀가 있으니 들어가지 말라]고 글을 써놓아 그 후 지방바위라 부른다.

(8) 수옥리(水玉里)

수옥리는 하방·수각·대화·옥천 4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영광군 내동면 지역으로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하방동·수각리·대화산·옥천동이 나와 있으며 1914년 수각리·옥천동·대화리·하방리를 수옥리라 하여 장성군 삼계면에 편입시켰다.

ㅇ 옥천(玉泉)

옥천·석촌·월봉·독밭골 등으로 구성되었다. 고려충열왕때 철원주씨가 능성리에서 옮겨왔다고 하며 한때 권씨도 살았다고 한다. 문화유씨가 240년전에 들어와 100여년전에 떠났으며 140년전 장흥고씨가 능성리에서 일제 때 광산김씨·전주이씨·진주강씨·인동장씨·진주정씨·하음봉씨·금성정씨·함평노씨 등이 그리고 해방 후 수성최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90여호(옥천 67·월봉 8·석촌 5·독밭골 3·도정골 2·청계동 4)가 살았는데 6·25때 8명이 죽고 전마을이 소각되었다. 그후 밀양박씨·순천박씨·청주한씨·한양조씨·인천이씨·나주임씨·달성서씨·신평송씨·남양홍씨 등이 들어왔으나 현재 78호(고씨 22·주씨 19·광김 12·송씨 4·임씨 3·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뒤 바위샘에서 유래되었다. 인물 : 고정패(한말의병·옥사)·고용주(항일운동옥사)·고길주(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주경수(면장)·고경석(영문학박사)·고광태(교육학박사)·고희탁(서기관)·박종배(삼계면장).

ㅇ 대화(大化)

대화산과 관동으로 이루어진 마을인데 관동은 폐촌되었다. 400년전 금성丁씨가 동쪽 밭에 터를 잡고 살다가 자손에 환자가 나오는 등 좋지않아 월곡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성촌했다고 한다. 주씨·송씨가 거쳐갔다. 해방후 32호(대화 24·관동 8)였는데 17명이 죽고 전호가 소각되었다. 현재 대화에만 15호(광김 6·밀박 2·정(丁)씨 2·고씨 2·해김 1·성씨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대밭아래 마을(대하) 또는 큰 새우형국(대하)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ㅇ 수각(水閣)

1580년경 함평이씨가 들어온 후 전의이씨는 훈장으로 들어오고, 1840년경 광산김씨가 들어왔다. 1890년경 여양진씨·경주이씨, 일제 때 전주이씨·문화유씨·철원주씨·밀양박씨·영월신씨·대구배씨 등이 들어왔으나 현재 36호(함평이 6·전의이 5·광산김 3·전주이 3·상산김 3·밀양박 3·철원주 2·영월신 2·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날에는 수강(水岡)(수강(壽岡))이라 하다가 양쪽에 물이 흘러 떠있는 형국이어서 수각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인물 : 이철형 ­ 호남창의 회맹소에서 기삼연대장휘하 지역부장으로 크게 활약. 유물유적 : 수강사터와 유허비.

ㅇ 하방(荷芳)

호구총수(1789년)에도 나오나 상고할수 없다. 1940년경 남평문씨가 들어오고 그후 수성최씨·밀양박씨 등 몇 성씨 들이 살다가 떠났다. 일제 때 김해김씨 등이 들어와 해방 후 30여호(하방 24·새터 6)가 살다가 6·25때 20여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그후 많은 성씨들이 들어왔으나 이농현상으로 현재 13호(남평문 3·김해김 3·조씨·박씨·배씨·조曺씨·성씨·전주이·고씨)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수련산에 연화도수가 있는데 마을이 연꽃같이 아름답다하여 붙인 동명이라 한다. 인물 : 신극정(경기도 정무부지사).

(9) 덕산리(德山里)

덕산리는 조산·덕림·청산·반월·이암 5개 마을로 구성되었다. 원래 영광군 삼북면 지역으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이암·상평·신촌·하평·청산리·덕암리·장우리·세영동이 나오며 1914년 조산·덕림·청강·월강·이암 마을을 덕산리로 묶어 장성군 삼계면에 소속시켰다.

ㅇ 조산(造山)

조산·장우리·쌍룡동·시옹동으로 이루어졌는데 호구총수에 나오는 장우리(長遇里)·세영동(世永洞) (쌍룡과 시옹동 지역)이 조산의 한뜸이다. 1780년경 동래정씨가 시옹동으로, 금성오씨가 장우리로 입향하였으며, 1890년경 전주이씨가, 일제때 수원백씨·장흥고씨·영월신씨·하동정씨·진주김씨가 들어와 해방 후 41호(조산 24·장우리 17)였는데 6·25때 13∼4명이 죽고 마을이 소각되었다. 그후 평산신씨·밀양박씨·함평이씨·김해김씨·파평윤씨가 입향하였으나 현재 20호(장우리 6·조산 9·시옹동 3·쌍룡동 2)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옆 조산등이 숙조투림이라 조산(鳥山)이라 했는데 조산(造山)으로 변했다. 인물 : 정인철(고종때 혜민원 주사)·오창규(삼북면장, 부자로 살았다.). 유물유적 : 미륵석불, 입석.

ㅇ 덕림(德林)

420여년 전 해주오씨가 입향하고 1860년경 동래정씨, 그뒤 인동장씨·김해김씨·밀양박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수성최씨 등이 들어와 말기에는 32호(오씨 8·장씨 6·정씨 4·윤씨 4·노씨 4·김씨 3·최씨 1·박씨)였으며 24호가 6·25를 만나 20여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마을을 복구하여 16호가 살다가 12호(정씨 4·장씨 2·해김 2·오·최·광김·박)로 줄었다. 동명유래 : 숙조투림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인물 : 정화복(초등교장)·서철수(초등교장)·정진필(전남대교수).

ㅇ 청산(靑山)

용곡과 청산으로 이루어졌으며, 약 300년전 광산김씨, 180년전 상산김씨, 150년전 신안주씨·해주최씨, 100년전 해주오씨, 1940년 김해김씨, 1950년 인동장씨, 1970년 장흥고씨, 전주이씨·전주최씨가 입향했다. 36호가 6·25를 만나 23명이 죽고 마을이 소각되었다. 대부분 다시 들어왔으나 이농현상으로 20호(광김 7·주씨 3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사방이 숲으로 쌓여있기 때문, 1912년 기록에는 청강(靑江)으로 나온다.

ㅇ 반월(半月)

반월과 하평(해평)으로 이루어졌는데, 호구총수의 상평·신촌이 반월인것 같다. 옛일은 알 수 없고 1840년경 남양홍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동래정씨·장흥고씨·반남박씨·청주한씨 등이 들어와 25호가 살다가 6·25때 3명이 죽고 마을이 불탔다. 전호가 복구되고 신평송씨·봉씨·금성오씨·이천서씨·파평윤씨·김씨·함평이씨 등이 이거해 왔으나 이농현상으로 23호(하평 12·반월 11 중 남양홍씨 7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반달형국이다. 인물 : 홍성일(교육장)·홍성옥(고등교장)·고광준(군의원). 유물유적 : 지석묘 3∼4기·삼계북초등학교터(폐교).

ㅇ 이암(耳巖)

1550년경 장흥고씨가 생촌에서 옮겨왔으며 1670년경 금성오씨가 나주에서 들어왔다. 150여년전 진주강씨, 구한말에 이천서씨·청안이씨·밀양진씨, 일제때 전의이씨·진주강씨·경주이씨, 해방후 해주오씨, 1960년경 밀양박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44호였으며 6·25때 20여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그후 60여호까지 살았으나 현재 23호(금성오씨 7·진주강씨 4·이천서씨 3·장흥고씨 2·기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귀바위라 부르며 사자등 양편에 사람 귀를 닮은 바위가 있다. 인물 : 오필선(판사)·오윤선(교육장)·오완수(농림부국장)·오송(외무고시)·오정수(임학박사). 유물유적 : 귀바우(경승지 제136호).

(10) 수산리(秀山里)

수산리는 자초·만화 2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영광군 삼북면에 속했는데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자초(自草)리·신성(新成)동·합천(合川)동이 나오며 1912년 [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자초리·홍산(弘山)리·석박(石朴)리가 나오는데 1914년 장성군 삼계면에 편입되었다.

ㅇ 자초(紫草)

전주이씨가 터를 잡아 자자일촌 하였으나 모두 떠나고 1호가 남아 있다. 그후 구한말 밀양박씨·수성최씨·함평이씨 등이 들어오고 일제때 장흥고씨·성주오씨 등이 들어와 50여호가 살았는데 6·25때 16명이 죽고 마을이 대부분 소각되었다. 그 후 45호가 조성되고 몇 성씨들도 들어왔으나 현재 27호(순천박 6·장흥고 6·김해김 3·광산김 2·함평이 2·전주이·이천서·해주오·수성최·밀양박·경주이·성주이)가 거주한다. 동명유래 : 지초라는 약초에서 또는 산새(붉은 학)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 원래 월성(月星)과 운산(雲山) 두 뜸이 있었는데 운산이 잘되면 구름이 달을 가리는 격이 되어 마을 전체가 재난을 당한다고 하여 개명했다는 설도 있다. 인물 : 이화삼(항일의병)·이현만(중·고교장)·이동석(초등교장)·최병주(혈액원 원장)·정방호(초등교장)·박남규(우체국장).

ㅇ 만화(萬化)

옛날에는 9개 마을(석박리·홍산·두나바지·서낭댕이·안동내·꼬재기·지선동·가사골·따순개비)이 있었는데 석박리가 가장 먼저 생겼다. 호구총수(1789년)에 나오는 합천(合川)동은 두나바지와 홍산리 지역이고 신성(新成)동은 안동내와 석박리인것 같으며 1912년 기록에는 홍산(弘山)과 석박(石朴)리가 나온다. 홍산(5∼6호)·지선동(7∼8호)은 행방전·후에, 석박리(5∼6호)·꼬재기(6호)·서낭댕이(3호)는 6·25때 폐촌되고 새터(밖에마을)는 6·25후에 성촌되었다. 옛날에 옥씨가 살았다고 하며 1800년경 창녕성씨와 이천서씨가 입향하고 그후 해주오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금성나씨·밀양박씨·김해김씨, 1950년경에 장흥고씨·전주이씨·금성오씨 그후 달성서씨·신씨·정씨 등이 들어왔다. 여순사건 직후부터 마을에 경찰관 출장소가 설치되기도 했으며 수연산과 고성산에 급접하여 많은 시련을 겪었다. 55호가 6·25를 만나 30여명의 인명피해와 가옥이 전소되었다. 전호가 다시 돌아왔으나 현재 33호(해주오 10·성씨 4·밀박 3·해김 3·달성서 3·전주이2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만화 ­ 깊숙하다, 가사골 ­ 꼬챙이, 연정 -샘, 석박 -돌바깥, 홍산 -붉은 흙, 지선동 -회관옆. 인물 : 서철수(초등교장)·서영수(화가). 유물유적 : 지석묘(2기·옛날에 군집이 있었다.).

(11) 죽림리(竹林里)

죽림리는 숙호·죽산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영광군 삼북면에 속했으며 구왕산과 수련산 사이의 깊은 산골지역이지만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이 지역에 산직촌·삼성촌·북촌·송정·말치·죽산·보압리·서당촌·한사동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삼성리·청림동·죽산·용사리(한사)가 나오며 1914년 죽림리로 묶어 장성군 삼계면에 소속시켰다.

ㅇ 죽산(竹山)

죽산·삼태·한사동을 죽산으로 통합했다. 호구총수에는 이 지역에 죽산·보압리(寶押)·서당촌·한사동이 나오는데 보압리는(비슷한 지명으로 배암골이 있다.) 알 수 없고 위쪽에 기록된 삼성(三省)촌이 삼태인지도 모른다. 죽산에는 100년전 전주이씨, 1945년 광산김씨, 해방후 광산김씨가 들어왔다. 삼태가 죽산과 한 마을이었으며 밀양박씨가 1670년경, 경주엽(葉, 엽·섭)씨가 300여년전, 경주최씨·여양진씨가 100여년전, 일제때 제주양시·청주한씨가 들어왔다. 한사동에는 옛날부터 이천서씨가 살고, 구한말 흥성장씨, 일제때 제주양씨, 해방후 조씨, 선산김씨가 들어왔으나 모두 떠났다. 서당골에도 일제때 3∼4호가 살았으며 1호가 남았는데 6·25때 없어졌다. 해방후 총 50호 가까이 살았는데(죽산 12·삼태 28·한사 6·서당골 1) 6·25때 5명이 죽고(죽산2·삼태 3) 각 마을이 전소되었다. 이때 서당골은 폐촌되고 대부분 복구하였으며 그후 몇 성씨들도 입향하였으나 한사동은 1985년 폐촌되고 현재 총 26호이며, 죽산 3호(이·고·김), 삼태 22호(박6·엽3·광김3·진3·경주최2·정丁·전주이·양·김2)이다. 동명유래 : 죽산 ­ 대나무 숲이 있다. 삼태 ­ 건너편에 삼태바위(지석묘)가 있다. 옛 삼성촌인지도 모른다. 한사동 ­ 황새형국에서 유래.

ㅇ 숙호(宿虎)

청림과 숙호마을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에 산직촌·삼성촌·북촌·송정·말치가 나오는데 산직촌은 구살막으로 추씨가 살았다고 하며, 북촌도 그 부근이고, 말치는 그위 고개인데 삼성촌과 송정은 알 수 없으나 삼성촌이 삼태인지도 모른다. 1912년 기록에는 삼성리·청림리가 나와 있으며 당시 지도에는 청림과 현 숙호 지역에 신성(新成)이 나와 있다. 청림에는 경주엽(섭)씨가 임진왜란 때 들어왔다고 하며, 일제 때 광산김씨·해주오씨·최근 경주최씨가 들어왔다. 숙호에는 파령윤씨가 오래살다 떠났으며 일제 때 전주이씨·김해김씨·회진임씨, 해방후 광산김씨, 최근 경주최씨·밀양박씨가 들어왔다. 해방 후 청림에 22호(엽씨 6·전주이 3·청주한 3·밀양박 2·연안명 2·금성나 2·상산김·김씨 2·한양조)가 살다가 6·25때 150여명이 죽고(청림 2가족 몰살, 숙호 6명) 각 마을이 전소되었다. 현재 숙호 12호(광김 3·전주이 2·해김·경최·언양김·윤씨·밀박·한씨·회진임), 청림 7호(엽씨 4·광김·해주오·경최) 총 19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청림 ­ 산골 숲속에 있는 마을, 숙호 ­ 뒷산이 숙호산이며 숙호형국이 있다.

(12) 생촌리(生村里)

생촌리는 성암·생촌 2개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전북 고창군 성송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7월 1일 장성군 삼계면으로 편입되었다.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무장현 원송(元松)면에 금치(金峙, 현성암)·생촌·추동 마을이 나온다.추동(秋洞) ­ 고산 남쪽에 있었는데 상무대 이전으로 1992년 없어졌다. 장흥고씨와(1570년경 입향)·선산김씨(1800년경 입향)를 비롯한 10여개 성씨가 살았다. 해방 후 56호(고씨 23·김씨 21등)·90년 33호(고씨 11·김씨 8·전주이 4·경주김 2·금성오·영월신·밀양박·순천박·성씨·윤씨·최씨)가 살았다. 지석묘가 5∼6기 있었으며, 고흥유씨 열녀비·선산김씨 세적비가 있었다.

ㅇ 성암(星巖)

고인돌이 있고 고산성과도 관련된 오랜 마을이나 1760년경 입향한 이천서씨가 가장 오래 살고 있다. 1840년경 선산김씨, 1860년경 전주이씨, 일제 때 남평문씨·광산김씨·금성오씨, 해방후 진주하씨가 들어왔다. 45호(성암 30·무금치 15)가 살다가 6·25때 20여명이 사망하고 가옥이 전소되었다. 35호 정도가 복구되고 경주김씨·인동장씨 등이 입향했으나 현재 30호(전주이 7·광산김 7·이천서 5·선산김 3·경주김 3·남평문 2·오·장·하)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화산(花山)이라 하다가 배형국이라 뱃골(舟洞)로 고쳤는데 일제때 성암으로 개명했다. 무금치는 무장의 금치라는 뜻, 인물 : 이은성(한말의병)·이남규(삼계농협장). 기타 : 지석묘(삼태마을 앞쪽, 8기), 경주엽씨 정려, 삼계교회(1789년 건립).

ㅇ 생촌(生村)

부근에 지석묘가 많이 있으며 조선 초 장흥고씨, 낙남조협(協)의 입향지이다. 그후 1800년경 광산김씨, 1720년경 경주김씨, 1870년경 흥성장씨·해주오씨·초계변씨가 들어오고 6·25후 이천서씨·영성정씨·여흥민씨가 들어왔다. 아랫뜸·송정뜸·고랑뜸(새터·서당잔등) 등으로 구분하는데 72호가 살다가 6·25때 산골마을이라 피해가 커 80여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그후 완전히 복구하여 64호까지 되었으나 1990년 41호였다가 현재 30호(고씨 10 여호와 광김 7·장씨 4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속칭 생말로 많이 부르며 성(城)마을이 변했는지 모른다. 인물 : 고재현(고교교장). 유물유적 : 지석묘(6기)·당산제(전남의 대표적 동제, 일본 등지에서 조사 실시)·고산성(城).

(13) 부성리(富城里)

부성리는 부성·절암·불당·북산 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 영광군 삼북면에 속했으며 호구총수(1789년)에는 부성리·복산치·절암리·신대가 나오며 1914년 부성·절암·신대와 화산 일부지역을 부성리로 통합하여 장성군 삼계면에 소속시켰다.

ㅇ 복산(伏山)

약 400년전 진주정씨가 성촌하였다는 구전이 있다. 1770년경 부성의 수성최씨가 옮겨 왔으며, 1860년경 상산김씨가 들어왔다. 일제때는 27호(최씨 13·김씨 9·반남박 2·순천박 1·해주오 1·금성나 1)가 살았으며 6·25때 8명이 죽고 마을 대부분이 소각되었다. 현재 13호(최 6·김 6·차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뒷산의 꿩이 엎드린 형국(복치)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인물 : 최강주(군산전문대 강사)·최희주(서울시 부이사관)·최효주(인천전문대강사)·최덕휴(서울교육청장학사), 최우영(사법고시), 최봉휴(철도청 서기관).

ㅇ 절암(切岩)

600년전 동복오씨가 성촌했다고 하며 밀양손씨가 14대째 살다가 떠났다. 1720년경 전주이씨, 1760년경 수성최씨, 1880년경 남평문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44호 였으며 6·25때 8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함평이씨·풍산홍씨가 입향하고 40여호가 살았으나 1980년 게앙골(당시 5호)이 없어지고 이농현상으로 21호(절암 15·신대 4·신앙 2)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뒷산에 절이 있었고 큰 바위(지석묘)가 있어 절암이라 했다. 인물 : 최정현(의병)·최병규(공학박사, 과학기술원 교수), 최변기(사법고시) 유물유적 : 지석묘 수기가 있다.

ㅇ 부성(富城)

600년전에 목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다. 1560년경 수성최씨가 입향하여 동족마을을 이루고 15대째 살고 있다. 일제때 장흥임씨가 들어오고 밀양박씨가 6·25후에 들어왔다. 그 외 몇 성씨가 거쳐갔으며 35호가 거주하다가 6·25때 14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현재 21호(최씨 18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고성산에서 유래된 듯하다. 인물 : 최원휴(삼계초대면장)·최병선(초등교장)·최정주(조선대2부대학장)·최종천(순천대교수)·최성주(외무부부이사관)·최홍유 (철도청사무관)·최병식(군청과장)·최정재(사법고시). 유물유적 : 절터(3∼4곳)·주천자묘(고성산 칠성대)·지석묘군(수기가 있다.)·수성최씨정려·고성산성지.

ㅇ 불당(佛堂)

마을이 원래 절터라고 하며 수성최씨가 13대째 살고 있다. 몇 성씨들이 거쳐가고 일제때 금성나씨, 6·25후에 한양조씨와 광산김씨가 입향했다. 해방 후 19호(궁관매 6호)가 살았는데 6·25때 마을이 소각되었으나 다시 23호까지 되었다가 현재 18호(최8·나2 등)가 살고 있는데 최근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12호가 더 늘었다. 동명유래 : 고성산에 태조암이라는 절이 있어 동구마을 이었으며, 옛날 절터였기 때문이라 한다. 유물유적 : 1930년경 도로 개설 때 다리 밑에서 고려청자 등이 나왔다고 한다. 천주교 불당골 공소터(1909년 창설).

(14) 화산리(花山里)

화산리는 화산·대동·남계 마을로 이루어졌는데 원래 영광군 삼북면 지역으로 대동에 면사무소가 있었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사하리·신흥리·대동·화산리·마치가 기록되어 있으며 1914년 사하·신흥·남계·대동·화산을 화산리라 하여 장성군 삼계면에 편입시켰다.

ㅇ 화산(花山)

화산·궁전·화평·신촌 4뜸으로 이루어 졌으며 오래 전에 전주이씨가 살았다고 한다. 350년전 동래정씨가 들어왔으며 1940년경 김해김씨·밀양박씨·구한말 순흥안씨·수성최씨·함평노씨가 들어왔으며 그 외는 6·25후에 입향했다. 일제 때 화산에 26호·궁전에 5호·화평 7∼8호(도로와 간이학교 설립후 점방·주막이 들어섬.) 총 40여호가 일대에 살았는데 인공때 6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복구되었으며 신촌에 구호주택이 들어서 호수가 증가하여 현재 52호(신촌 21·화산 20·화평 9·궁전 2)가 살고 있는데 동래정 19·수성최 6·해주오 4·순흥안 3·밀양박 3 등 많은 성씨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매화낙지 형국에서 유래. 인물 : 정용재(법원사무관). 정용준(인천시청경제통상국장)·정장춘(국방부사무관). 노연수(군청과장). 기타 : 삼계서초등학교지.

ㅇ 대동(大洞)

웃터굴에 400년전 함양오씨·300년전 금성오씨가 살았는데 산적 때문에 마을이 옮겨졌다고 하며 옛 삼북면사무소가 이 마을에 있었다. 280년전 장흥임씨가 들어와 최근까지 살았으며, 해주오씨가 7대째 살고 있다. 1840년경 김해김씨·경주이씨, 1850년경 수성최씨, 일제때 전주이씨·밀양박씨가 들어와 해방 후 30여호(수성최 10·임·오·김·이 등)였으며 6·25때 25명이 사망하고 20여호가 소각되었다. 그후 20여호가 살다가 현재 15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에 대나무가 많아 대골(죽동­竹洞)이라 하며 대동으로 표기하는데 호구총수에는 대동(待洞)으로 나와 있다. 인물 최권주(군법무관), 최병환(출입국소장) 유적 : 삼북면소터(임씨제각)·와요터.

ㅇ 남계(南溪)

일제때 신흥(사하포함)에 50여호 기동에 8호, 남계에 8호 등 70여호가 거주한 각성받이 마을이었는데 남계로 합하였으나 외부에서는 신흥으로 많이 불렀다고 한다. 360년전 순흥안씨, 200년전 경주최씨, 1840년경 수원백씨·전주이씨, 구한말 함평노씨·영광김씨·전주최씨, 그 외는 6·25 전후에 들어왔다. 인공때 30여명이 죽고 입산하여 5명이 죽었으며 마을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40여호가 다시 돌아왔으나 기동은 없어지고 30호(남계 3)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봉정사 아래 마을이라 사하(寺下)인 것 같은데 사하(仕下)·사하(沙下)로도 썼다. 남계는 남쪽으로 시냇물이 흐른다. 인물 : 김영환(초등교장). 유물유적 : 동백나무(수령 200년 보호수)·점터.

(15) 신기리(新基里)

신기리는 사선·신정·유천으로 이루어졌다. 원래 영광군 삼북면에 속했으며 호구총수(1789년)에는 검손리·신정·사선동이 나온다. 1914년 침천·신정·백기·사선을 신기리라 하여 장성군 삼계면에 편입시켰으며 사선동은 상무대 시설지역에 편입되어 1990년에 없어졌는데 당시 17호가 살고 있었다.

ㅇ 신정(新汀)

신정·건손·침천(방곡)·추만동 4뜸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고려초에 왕씨와 곽씨가 살았으며 삼계현 당시(고려때) 건손에 시장과 여각이 있었고 사장 등에 활터가 있었다는 구전이 있다. 1760년경 진주김씨, 1770년경 여양진씨·1790년경 밀양박씨·1830년경 강능유씨·1870년경 해주오씨·1880년경 광산김씨·1890년경 전주이씨·장수황씨·김해김씨·수원백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해주최씨·교하노씨·제주양씨·고흥유씨가 들어왔으며 그 외 성씨는 6·25전후에 들어왔다. 일제때 50여호(건손 23·신정 20·추민동 2·방곡 1)가 살았는데 6·25때 40여명이 죽고 마을이 소각되었으며 전염병으로 10여명이 죽었다. 현재 건손에 15·신정에 15호 추만동에 2호로 줄었는데 침천은 6·25후 10여로 늘어 총 42호(밀양박 9·진주김 6·광산김 4·장수황 3·교하노 3·김해김 3·전주이 3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건손(乾遜) 호구총수에는 검손리로 나오며 예부터 검생이로 부른다. 신정 ­ 호구총수에는 신정(新亭)으로 나오며, 새로 지은 정자에서 유래했다 한다. 침천(針川) -방고개·방곡으로 부르며 방고개는 바늘이고 냇은 실이라 한다. 인물 : 김동욱(삼북면장)·유희영(독립투사 한때 기거)·유흥규(육군대령). 유물유적 : 여양진씨열녀각·객사터·왕총·점터·추만재·원모재·활터·구동터(마을터)·돌다리(고려시)·봉정사.

ㅇ 유천(柳川)

도요지가 있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30여년 전에 영월신씨가 살다가 떠났다고 하며 일제초 밀양손씨가 거쳐갔다. 일제때 전주이씨·이천서씨·경주이씨 등이 들어와 사기점의 성업으로 30여호가 살았는데 인구의 변동이 심했다. 6·25때 가옥만 전소되고 20호가 다시 성촌 되었는데 현재 12호(전주이 4·이천서 2·경주김 2 등)가 살고있다. 동명유래 : 장승백이로 부르다가 백기(白器)리로 고치고 다시 버드나무가 많다고 하여 유촌동→유천이 되었다. 인물 : 서명수(고흥경찰서 경무과장). 유물유적 : 마차재 도로(고려시개설)·약수터·도요지·절터·성황당.

(16) 내계리(內溪里)

내계리는 아계·천방·내구·염치·군장으로 이루어졌다. 옛날에는 영광군 삼북면에 속하였으며 호구총수(1789년)에는 염치·군장리·동촌·구유동·아지대·건지산·구수정·천방리가 기록되어 있다. 1914년 이 마을들을 내계리라 하여 장성군 삼계면에 편입시켰다.

ㅇ 군장(軍莊)

삼계면에서 자초리·군장·사선동 3개마을이 가장 먼저 성촌되었다는 말이 있으나 상고할 수 없고 약 200년전 김해김씨, 150년전 밀양박씨, 130년전 함평노씨, 100년전 광산김씨 그리고 전주이씨가 6·25 직후에 들어왔다. 일제때는 25호(노씨 8·광김 7·해김 5·동래정 4·평산신 1)였으며, 6·25때 입산하여 5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현재 11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임진왜란때 군사들의 피난처라 군장이라 했다고 한다. 유물유적 : 말무덤(복산치 계곡).

ㅇ 아계(鵝溪)

애기대·건지산·신평·수동·가적골·활고개 등의 뜸이 있으며 호구총수에 아지대(阿只垈)와 건지산(乾之山)이 나온다. 250년전 함평노씨가 들어와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다. 220년전 평산신씨, 구한말 교하노씨·인동장씨, 일제때 금성나씨·밀양박씨가 들어와 55호(아계 42·신평 10·활고개 1·가적골 1·건지매 1)가 살다가 6·25때 58명이 죽고 15호가 소각되었다. 40호가 다시 들어오고 김해김씨·전주이씨·광산김씨·평택임씨·한양조씨 등이 입향하여 현재 50호(아계 38·신평(수동) 5·건지뫼 3·가적골 2·활고개 2)가 살고있는데 함평노씨가 33호이다. 동명유래 : 마을이 오리형국이고 냇이 있어 아계대(鵝溪垈)로 칭했다고 하는데 이지대·애기대로 많이 부른다. 인물 : 노정숙(의병대장)·노동열(통일주체대의원)·노동철(육군중령)·노영진(육군중령)·노왕금(작사가)·노만경(사법고시: 판사)·노윤택(고등학교교장).

ㅇ 염치(念峙)

옛날 장씨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광산김씨가 13대째 살고 있으며 구한말 김해김씨가 들어오고 6·25후 하음봉씨가 들어왔다. 일제 때 35호(광산김씨 다수·최씨·강씨·박씨·신씨·김해김)가 살았으며 6·25때 입산하여 50여명이 죽고 가옥이 전소되었으며 사창으로 소개되어 전염병으로 10여명이 죽었다. 이후 점차 35호까지 되었으나 현재 11호(광김 9)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소여물통형국이라 양치라 하다가 염치로 개칭했다고 한다.

ㅇ 내구(內九)

동촌과 구시동이 있으며 600여년전 나주오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다. 광산김씨가 14대째 살고 있으며 일제 때 장흥고씨·이천서씨가 들어오고 최근 경주이씨·파평윤씨 등이 들어왔다. 일제중엽 45호(광김 37·고씨 2·봉씨 2·함평이 2·서씨 1·신평송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소의 구시(구유)형이라 구시동이라 부른다. 인물 : 고인주(초등교장)·고광삼(조선대 약대교수)·김영조(한국화약 품질검사부장). 유물유적 : 새적굴좌불석상·도요지.

ㅇ 천방(千方)

백제 말기 세웠다고 전하는 천방사지가 있다. 함평노씨가 220여년전 아계에서 분가해왔고 그뒤 경주최씨가 거쳐갔다고 하며, 150년전 풍산홍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55호 정도의 여러 성씨들이 살았다고 하며 6·25때 55∼6명이 죽고 타촌에서 피난온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많이 줄었다. 그 후 48호까지 살다가 현재 22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천방사라는 절에서 유래되었다. 인물 : 오새준(조대교수). 유물유적 : 지지당송흠의 묘와 관수정·천방사지 5층석탑.

[표 8-6] 삼계면 마을·인구현황 (2001. 4. 30 현재)

삼계면 마을·인구현황 - 연번, 리, 자연부락, 이장, 가구수, 인구수, 비고 제공표
연번자연부락이 장가구수인구수비 고
3,0268,767
1사창 1사창나복주111327
2사창 2약동봉길홍59146
3사창 3신억정종철54143
4사창 4우봉오승철46141
5사창 5금성고 훈64173
6사창 6금광A서필식266809
7사창 7상무A김성순4811,853
8사창 8상무A박정옥6751,971
9월연 1월정,월구박화자62133
10월연 2부연,수남김영갑36100
11주산 1정각,백산정영임51136
12주산 2이곡,월산이준원69177
13상도 1도동신극희51131
14상도 2죽탄,쌍정김완열40110
15능성 1능성,신사,나신고승주57141
16능성 2성산,마평고재진42112
17발산 1대무,서발기형호41109
18발산 2동발,월곡박순자3597
19수옥 1옥천고광준72199
20수옥 2대화,수각,하방이석운75208
21덕산 1조산,덕림,청산김원기67163
22덕산 2반월,이암홍성민58143
23수산 1자초박석규2258
24수산 2만화김유환3073
25죽림죽산,숙호최병준3255
26생촌 1성암오영창2771
27생촌 2생촌김진현3081
28부성 1복산,절암이병노4091
29부성 2부성,불당최병규46105
30화산 1화산정귀례56135
31화산 2대동,남계김필수56138
32신기신정,유천양선승64165
33내계 1아계,군장송옥자59145
34내계 2천방,내구,염치이재욱52128
QR CODE
  • 왼쪽 정보무늬 사진을 휴대전화에 인식시키면 자동으로 이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 이 정보무늬는 『제2장 마을유래 195번』의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제2장 마을유래 페이지 바로가기 주소(https://www.jangseong.go.kr/q/ezIzMDd8MTk1fHNob3d8fQ==&e=M&s=3), QRCODE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