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군 로고

국가상징 국무회의 알아보기

제2장 마을유래

  • 트위터
  • 페이스북
  • 구글
  • 현 페이지 엑셀로 다운
  • 현 페이지 워드로 다운
  • 현 페이지 인쇄
4차 메뉴 정의
5차 메뉴 정의

제1절 장성읍

원본파일 다운로드

(1) 연혁

ㅇ선사시대

청동시대의 유물인 지석묘가 읍 전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구산마을에서 민무늬토기, 완형토기, 붉은간토기, 돌촉, 돌창 등이 발견되고 있다.
마한 54국 중 고랍국을 천관우는 [마한제국의 위치시론]에서 옛 백제시대의 고시이현 지역에 비정하고 있다.
성산리 청룡마을 뒷산의 돌무덤에서 1973. 5. 13 유개합 2쌍이 발견되었다.

ㅇ 백제시대

361년(근초고왕 16) 무렵에 백제의 영역이 되어 고시이현이 설치되었는데 현 장성읍 제봉산 아래에 읍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영천리(보해양조)에 백제시대의 대형 고분이 있어 상당한 고위 신분이나 세력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ㅇ 통일신라시대

660년(의자왕 20) 신라의 영역이 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고시이현을 갑성군으로 고쳤다.
892년(진성여왕 6) 후백제 세력으로 들어가 이후 45년간 지속됨.

ㅇ 고려시대

939년(태조 19) 고령의 영역이 되었으며 940년(태조 23) 갑성군을 장성군으로 고쳤으며 이때까지 치소는 매화동에 있었다.
1018(현종 9) 장성군이 영광군에 내속되었다. 이 무렵에 영천리 일대에 장성(대창동으로 추정)에 마량부곡이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1172년(명종 2) 장성이 영광에서 분리되어 감무가 파견되었다. 이때 현의 치소를 북일면 오산에 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ㅇ 조선시대

1413년(태조 13) 장성감무가 현감으로 바뀌었으며 마량부곡이 대략 태종때 혁파되어 진원에 내속되었다.
1600년(선조 33) 정유재란으로 장성과 진원이 매우 피폐하므로 두 현을 합쳐 장성현이라 하고 치소를 제봉산 아래에 옮김.
1655(효종 5) 입암산성을 호남의 보장지로 정비하고 수진관을 장성원이 겸하게 되므로 장성현이 도호부로 승격되어 관아가 성산(현 성산초등학교)으로 옮겨졌다.
용강리(현 장성호 제방)에 단암역이 있었는데 나주청암도찰방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여지도서(1759년 기준)》에 의하면 현 장성읍 지역에는 3개면이 있었으며 그 호구수는 다음과 같다.
읍동면 : 호 371 인구 1,433 (男 698 女 835)
읍서면 : 호 731 인구 2,626 (男 1,189 女 1,437)
영 면 : 호 760 인구 2,173 (男 1,049 女 1,124)
계 3면 : 호 1,862 인구 6,232 (男 2,936 女 2,396)

《호구총수(1789년 발간》기록된 장성읍 지역의 면과 관할 마을은 다음과 같다. (총 3면 41마을)
읍서면 : 교촌, 신기, 구암, 가마, 장안, 봉암, 내기산, 외기산, 수림촌, 상남당, 남당리, 중남당, 하남당, 상비리, 하비리, 오리정(16)
읍동면 : 서굴리, 유탕리, 율치리, 방축리, 상오동리, 하오동리, 회암리, 인천리, 월평리, 단광리, 가작리(11)
역 면 : 우지, 상오치리, 원산리, 사천리, 대천리, 동산리, 방동리, 하목리, 황주리, 별관리, 백계리, 대사리, 동구리(14)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1913. 12. 29 부령 제 111호)에 따라 읍동면과 읍서면을 합하여 장성면이라 하고 역면을 북삼면이라 하였다.
1921년 군청을 영천리로 옮겼으며 1930년 북삼면이 장성면에 편입되었다.
1943년 10월 1일 장성읍으로 승격하고 10월 3일 읍사무소가 성산에서 영천리로 옮겼다.
1975년 장성호의 건립으로 북상면 용곡리가 편입되었으며 용강리가 대부분 수몰되었다.

(2) 수산리(壽山里)

수산리는 원래 읍서면 지역으로 동산·중초·수산·신천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 발간)에는 상비리·하비리·오리정이 나오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상초·중초·하초·수산리·태산이 나오는데 1914년 이 마을들을 햡쳐 수산리라 하고 장성면에 편입시켰다. 동산과 중초·수산은 고샅을 경계로 마치 한마을처럼 근접해 있다. 주변에 지석묘가 있는 것을 보면 고대에도 사람이 살았던 것 같으나 옛일은 알수 없고 1655년 장성도호부 관아가 성산으로 옮겨온 후 본격적으로 형성된 마을들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동산마을 뒷길(구길)에 있는 비석거리를 중심으로 상비리와 하비리로 나누고 중초마을에 오리정이 있어 그 주변을 오리정으로 불렀는데 1879년 당시 읍터(성·수산일대)가 와우형이기 때문에 소의 밥을 저장하는 적초루(積草樓)를 짓고 상초·중초·하초라 불렀으며 신천은 몇호가 있었는데 일제때 일본인들이 양잠을 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현재 1리 동산·중초, 2리 수산, 3리 신천으로 나뉘어 있다.

동산(東山)
진주강씨가 1700년경 들어온 후 많은 성씨들이 거쳐갔다. 1800년경 밀양박씨와 김해김씨, 1840년경 해주오씨 등이 들어와 일제때 70여호가 살았으며 일본인 나까무라가 양잠을 하였다. 6.25때 비행기 폭격으로 가옥 20여채와 10여명의 인명피해가 있었으며 수복 후 공비들의 지서습격으로 가옥 7채가 불타고 1명이 죽었다. 그 후 많은 성씨들이 들어와 현재 32호(김해김 5·경주이 4·전주이 4·곡부공 2·밀양박 1·남평문 1·광산김 1·금산김 1·안동김 1·해주오 1·양성이 1·경주정 1·장흥고 1·해주최 1·나주정 1·광산김 1·연안차 1·진주정 1·나주나 1·함평이 1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상비리라 부르다가 상초로 바뀌었는데 동산아래에 있다하여 다시 동산으로 바뀌었다. 인물 : 김덕길(장성읍장), 오규현(장성군 과장), 유물유적 : 비석거리(마을 뒤 길가에 3∼4개의 비석이 있었다), 비(원래 지석묘, 동산서원터 주변 등 여러 곳의 비를 동산아래 모아 세웠다. 30여기가 있다.)

중초(中草)
처음 밀양박씨가 살았다는 말이 전하며 1850년 광산김씨, 1880년경 순홍안씨, 1900년경 행주기씨 그리고 일제때 여양진씨, 탐진최씨 등이 들어와 60여호가 살았으며 일본인이 양잠·과수·상업을 하였다. 6.25때 비행기 폭격으로 5명이 죽고 2호가 불탔으며 수복 후 공비들의 지서 습격으로 지서뒤 가옥이 파괴되고 10여명이 처형되었다. 현재 40호(광산김 6·김해김 6·탐진최 5·밀양박 3·경주이 3·전주이 3·순흥안 3·남양홍 2·나주나 3·평산신 1·하음봉 1·행주기 1·연안차 1·해주오 1·청주한 1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중초­가운데 뜸이다. 인물 : 정선유(숭실학당건립, 만세운동), 최상근(초등교장)

수산(壽山)
1655년 장성도호부가 성산으로 옮겨온 후 형성된 마을로 호구총수(1789년)에 기록된 오리정(五里程)이 이 마을인 것 같다. 밀양박씨가 6대째 살고 있으며 곡부공씨도 오랫동안 살다가 모두 떠났다. 1800년경 서산정씨, 1910년경 광산김씨, 1918년 안동장씨, 1930년 제주양씨, 1931년 탐진최씨, 1945년 진주정씨가 들어왔다. 한일합방(1910년)후 적초루 자리에 장성면사무소가 들어서고 시장이 섰으며 마을 앞에 신작로(국도1호)가 개설되면서 상가가 조성되는 등 활기를 띄다가 1943년 장성면사무소가 떠나면서 침체되었다. 일제때 120여호였으며 6.25때 4명이 죽고 이농현상으로 68호(밀양박 12·김해김 7·광산김 6·해주최 4·담양전 3·연안차 5·밀양손 4·제주양 2·해남정 2·전주이 2·해주오 2·인동장 2·함평이 2·해평길 2·달성배 1·금산김 1·곡부공 1·노 1·송 1·서산정 1·나주정 1·조 1·유 1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오리정·하초가 이 마을인 것 같으며 조산을 조성한 이후 수산으로 부른 것 같다. 인물 : 김계윤(병원 원장), 안기완(전남대 교수), 오재규(공학박사), 김영일(장성군 산림조합장) 유물유적 : 적초루터(면사무소가 되었다가 현재는 마을회관이다.)

신천(新川)
원래 읍동면 유탕리에 속했던 지역으로 한일합방 후 일본인들이 양잠을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전에도 몇호가 있었다고도 한다. 일본인 6명이 양잠, 과수 등을 재배했으며 1920년경 황주변씨, 평강채씨, 정씨 등이 들어오고 해방후 나주나씨, 밀양박씨, 금녕김씨, 전주이씨, 해주오씨 등이 들어와 37∼8호가 살다가 6.25때 7명이 죽었다. 1953년 구호주택 48호가 세워져 한때 70여호였으나 고속도로 공사때 4호, 자진철거 3호 등이 없어지고 이농현상으로 현재 54호(김해김 7·밀양박 7·전주이 4·해주오 3·광산김 3·연안차 3·금녕김 2·황주변 2·탐진최 2·나주장 1·나주임 1·연안이 1·남평반 1·평강채 1·담양국 2·진주강 1·울산김 1·나주오 2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조산이라 부르다가 금방앗간이 있어서 쇠내(金川)이라 하였는데 신천으로 바뀌었다. 유물유적 : 조산·5층석탑·진곤비(읍터(성산)가 곤방(남쪽)이 허하다고 하여 진원에 있던 탑을 이곳에 옮겨 세우고 조산을 쌓았으며 탑 옆에 진곤비를 세웠다.)

(3) 성산리(聖山里)

성산리는 성산·복산·청룡·중남·남당·상풍·밀등 7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1655년 장성도호부가 현성산초등학교 자리로 옮겨온 후 1921년까지 장성군의 소재지로써 지금도 성산리 수산리 일대를 구읍이라 부르며 성산으로 통칭한다. 구읍(성산)일대에는 10여개의 마을이 근접해 있었으며 대부분 읍서면에 속했는데 복산마을과 신천(수산리)마을은 읍동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읍동·읍서를 장성면으로 통합하고 현도로를 중심으로 성산리와 수산리로 나누었다. 현 성산리지역(도로동쪽)에는 1789년 발간한 [호구총수]에 상남당·남당리·중남당·하남당이 읍서면으로 나오는데 복산마을은(읍동면에도) 보이지 않는다.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읍서면 지역에 상풍리·중풍리·삼풍리·청룡리·교촌리가, 읍동면 지역에 복산리가 나온다. 1914년 읍서면의 상풍리·중풍리·삼풍리·청룡리·교촌리와 수산리·교촌리 일부, 북삼면의 채약리 일부, 읍동면 복산리와 신기리 일부를 합쳐 성산리라 하고 장성면에 소속시켰다.

성산(聖山)
1655년 장성도호부가 옮겨온 후 1921년까지 장성군의 소재지로써 원래 읍서면에 속했다가 1914년 장성면이 되었다. 옛날에는 호구총수(1789년)에 나오는 상남당과 1912년의 [전국행정구역명칭일람]에 나오는 중풍마을에 속했거나 또는 관아만 있었고 민가는 없었는가 확실히 상고해 볼 수 없다. 밀양박씨가 오랫동안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1850년경 여양진씨, 1910년 김해김씨 등이 들어와 일제때 50여호(밀양박 5·김해김 5·경주이 2·전주이 2·여양진 2·광산김 2·담양전 2·담양국 1·곡부공 1·조씨 1·일본인 8 등)가 살았으며 장성도호부가 군으로 바뀌면서 경찰서, 우체국, 금융조합등의 기관이 들어섰다가 1921년 군청이 영천리로 옮겨가면서 모두 떠나고 관아 자리에 성산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6.25때는 비행기 폭격으로 가옥 3채 파괴, 5명이 사망했으며 그 후 7명이 죽었다. 현재 37호(김해김씨 11호)의 산성마을이다. 동명유래 : 성자산에서 유래되었다. 인물 : 김영주(대농대교수), 김경주(대룡화학사장), 김경주(행정고시), 김우진(최초의 극작가, 군수 김성주의 아들), 유물유적 : 성산초등학교(장성군 최초의 학교), 장성군청터(1921년 군청이 영천리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 성산초등학교가 개설되었다), 형틀(성산초등학교 교내에 옛 관아의 형틀이 남아 있다)

복산(福山)
500여년전 장성서씨와 탐진최씨가 살았다는 말이 전하며 장성도호부의 감옥이 있었다고 한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나오지 않고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 복산으로 나온다. 1820년 장성서씨가 들어오고 그 외는 1900년 이후에 들어왔다. 일제때는 80여호(장성서 20·김해김 8·밀양박 6·해주오 5·평강채 5·행주기 3·한양조 1·전주이 1·일본인 10 등)가 살았으며 도로변에 상가가 형성되고 회관 골목일대에 읍시장이 서기도 했으나 군청과 읍사무소가 떠난후 한산해졌다. 6.25때 20여명이 죽고 한천공장 등이 불탔다. 6.25후 도로변에 버스정류소와 가게가 있었는데 점차 다방·식당이 생기고 최근 여관·목욕탕이 들어서 호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현재 98호(김해김 17·밀양박 15·해주오 6·장성서 7·광산김 4·파평윤 4·연안차 5·밀양손 3·한양조 3·신씨 3·한씨 2· 배씨 2·담양국 2·탐진최 2 등)이다. 동명유래 : 홍수때 마을이 침수되지 않아 복있는 마을이라 복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옛날 옥거리(또는 밤태)라는 동명을 좋은 이름으로 바꾼 것 같다. 인물 : 서봉운(참봉), 김인하(군수), 서기풍(읍장), 서경호(농협도지부장), 강종수(한전광주지점장), 채건(초등교장), 서정숙(중등교장), 김만회(초등교장), 손창규(전대교수), 김용(육군대령), 박종수(군수), 서기덕(장성금융조합장), 서한충(조흥은행 지점장), 서귀암(전남도과장), 임재호(장성군의원), 박철용(신민당중앙당조직국장) 유물유적 : 감옥터(장성도호부 감옥터), 장터(장터거리)

청룡(靑龍)
1500년경 여양진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나 호구총수(1789년)와 1912년[행정구역명칭]에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당시는 다른 동명으로 부른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현재 살고 있는 여양진씨는 1800년경 들어왔으며 김해김씨는 1900년경 들어와 일제때 30여호 (여양진 4·인동장 4·파평윤 4·전주이 3·울산김 3·김해김 2·최씨 2·진주강 1·천안전 1·일본인 2·기타)였는데 심석 김시준이 진흥회를 조직하여 양잠과 축우로 소득을 증대시켰으며 6.25때 아무 피해가 없었다. 현재 55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 관아 외 청룡등에 마을이 있다. 인물 : 김시준(장성읍장), 박동유(초등교장), 정채균(군수, 광주부시장), 정중대(광주서구 도시국장), 정채홍(공군소령) 유물유적 : 장성향교(전남문화재 105호)

중남(中南)
옛 장성도호부 남문 밖에 위치한 마을로 호구총수(1789년)의 중남당이 이 마을로 추정되며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는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당시는 삼풍이나 중풍으로 불렀던 듯 싶다. 1500년경 밀양박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나 상고할 수 없고 1910년경 김해김씨가 들어온 후 여러성씨가 들어와 일제때 25호(연안차 5·김해김 4·밀양손 4·밀양박 4·전주이 3·광산김 2·주씨 1·박씨 1)가 살다가 6.25때 3명이 죽고 2호가 불탔다. 현재 32호(김해김 7·밀양박 5·연안차 6·전주이 3·광산김 3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중남당을 줄여 중남이라 한 것 같다. 인물 : 강영옥(초등교장), 손희주(삼경석유사장), 강성수(초등교장), 손윤주(장성군과장), 박영수(광주서부경찰서 보안과장)

남당(南堂)
1500년경 밀양박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1700년경 김해김씨가 들어와 살다가 떠나고 현재의 성씨들은 일제 이후에 들어왔다. 일제말에 45호(김해김 5·밀양박 4·전주이 3·연안차 3·진주강 2·해주오 2·광산김 2·탐진최 2·평산신 1·청송심 1·나주나 1·유 1·임 1·정 1·기타)가 살다가 6.25때 6명이 죽었다. 현재 38호(밀양박 5·광산김 4·김해김 4·전주이 3·해주오 3·청송심 3·평산신 1·선씨·성주김 1·진 1)이다. 동명유래 : 장성도호부 남문 밖 남문거리에 있었던 마을이라 남당이라 했다고 하는데 신을 모시는 당이 있었던 듯하다. 인물 : 김상근(초등교장), 김용준(광주역장)

상풍(上豊)
기록상으로는 1912년[행정구역명칭]에 처음 나오지만 임진왜란 이전부터 밀양박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장성부의 동문거리라 했다고 하는데 옛일은 상고할 수 없다. 1850년경 밀양박씨·나주나씨가 들어온 후 여러성씨가 들어와 일제때 23호(밀양박 4·김해김 4·나주나 3·진주강 2·천안전 1·평택임 1·부안김 1·유·정·조 등)가 살았으며 6.25때 2명이 죽었다. 현재 21호 (김해김 5·밀양박 3·전주이 2·나주나 2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빈한하여 풍성한 마을이 되라고 豊자를 쓴 것 같다. 인물 : 박재휴(함평군과장), 김상철(장성텍타일 대표)

밀등(密燈)
원래 장성 도호부의 말을 기르던 마장터라 하며 1920년경 전주이씨 희구가 산을 개간하여 살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손석주가 죽물공장을 세워 일제때 40여호까지 살았으나 해방 후 14호가 남았는데 6.25때 2명이 죽고 1호가 불탔다. 현재 19호(김해김 4·밀양박 2·회진임 1·서산유 1·청도김 1·금성나 1·수원최 1·인동장 1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나비와 벌이 밀원을 보고 날아오는 형국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인물 : 이주환(면장)

(4) 유탕리(流湯里)

유탕리는 원래 읍동면으로 유탕·서동 2개 농촌마을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 간행)에는 유탕리와 서굴리가 나오며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상동리 서굴리·유탕리가 나오는데 1914년 이 3마을을 합쳐 유탕리라 하였다. 현재 1리 신촌·유탕, 2리 상동·서동으로 나뉘어 있다.

유탕(流湯)
1600년경 여양진씨가 들어와 13대째 살고 있으며 전주이씨가 11대째, 김해김씨가 11대째, 해주오씨가 9대째, 광산김씨가 8대째, 현풍곽씨가 6대째 살고 있다. 1800년경 밀양박씨, 1850년경 김녕김씨, 1900년경 진주강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탐진최씨·밀양손씨·고령신씨·흥성장씨·한양조씨·순흥안씨가 들어왔다. 일제때는 220여호(여양진 38·전주이 20·광산김 12·김해김 10·밀양박 9·해주오 6·김녕김 6·파평윤 2·최·천·서 등)의 대촌이었으며 6.25때 45명이 사망했다. 현재 152호(여양진 27·전주이 10·김해김 10·김녕김 8·밀양박 9·해주오 11·연안차 8·밀양손 4·진주강 4·달성서 3·탐진최 5·흥성장 3·평택임 3·순흥안 3·나주정 3·언양천 3·추계추 3·영성정 2·현풍곽 2·채·홍·조·윤·장·신·황·위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온수통과 참시앙의 물주기가 마치 여인의 젖줄기 같다하여 유탄(乳灘)이라 하였는데 유탕으로 변했다고 한다. 인물 : 최봉구(입암산성 별장), 김남권(장성군수, 목포시장), 김형종(장성중앙의원장), 김흥규(의사), 김인규(광주교대교수), 진재량(전남도계장), 김용규(장성산림조합장), 김우규(초등교장), 강용수(목포교육장) 유물유적 : 지석묘 2기, 당산제(천룡당산, 내당산, 외당산, 연당산 현재도 지냄)

서동(西洞)
서동과 상동이 합해진 마을이다. 서굴에서 김해김씨가 500년전에 살았다는 말이 전해오며 현재의 김해김씨는 1700년경 입향하였다. 1770년경 전주이씨, 1890년경 탐진최씨, 1900년경 진주강씨와 하동정씨, 1940년경 김녕김씨, 1947년경 평산신씨, 1950년경 장수황씨가 들어왔다. 일제때는 70여호(상동 24, 가남쟁이 4, 서동 40)가 살았으며 여순 반란사건때 뒷산에서 군인 빨찌산이 교전하여 13명이 죽고 6.25때 주민 3명이 죽었다. 현재 21호(전주이 6·김해김 4·탐진최 4·진주강 3·김녕김 1·평산신 1·하동정 1·장수황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서동­유탕 계곡의 위쪽에 있어 상동이라 하고 상동의 서쪽골이기 때문에 서굴 또는 서동이라 하였다. 가남쟁이­옛날 하청사 관음전이 있던 자리라고 함. 인물 : 김재문(전남대 교수) 유물유적 : 절터(상청사·하청사·취봉사·인월사·연화사·정이암·나옹암 등 많은 절터가 남아있다.), 정이암(송강 정철과 석탄 이기남이 공부했던 곳, 6.25때 소실. 최근 마을 가까이 옮겨 신축했다.), 나옹마애석불(나옹암터에 있다), 용소(주변경치가 매우 좋다.), 운동폭포(장성부사의 시가 남아있다), 하청용추(삼청동구라 각자 되어있다.)

(5) 영천리(鈴泉里)

영천리는 장성읍 소재지이며 구산동·월산동·오동촌·매화동·청운동·충무동·대창동·삼월동 8개 동으로 이루어졌다. 원래 읍동면 지역이었으며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율치·방축·상오동·하오동·회암·인천·월평이 나오는데 율치는 현 구산마을 안쪽에 방축은 현 방구다리 아래쪽에 있었고 회암은 비기촌인듯 싶은데 인천(仁川)은 알 수 없다.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하오·산직·일평·신기·청운·월평·구산이 나오는데 하오와 산직은 오동촌, 신기는 삼가동의 새터로 추정되며 일평은 알 수 없다. 월평은 원래 읍동면에 속했는데 1914년 황룡면에 귀속되었다. 영천리는 고대부터 장성군의 중심지로 제봉산 아래 현천주교회 부근에 백제때 고시이현, 통일신라때 갑성군, 고려초 장성군의 읍성이 있었으며 마량부곡이 현 대창동에 있었다. 임진왜란후 장성과 진원이 합병하여 치소를 옛 고시이현터에 설치했다가 55년후인 1655년 성산으로 옮겼다. 현 장성읍시가지는 황룡강 강변이었는데 제방을 막고 기차역이 생기면서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군청 등 관공서가 옮겨오면서 다시 영천리는 장성군의 소재지가 되었다. 영천 : 오동촌에 있는 방울샘에서 유래했다.

구산(龜山)
마을 뒤 계곡에 지석묘가 있고 보해양조 공장부지에 백제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석실고분이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율치리로 1912년 [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구산리(九山里)로 나온다. 1600년경 진주하씨가 살았으며 그후 한양조씨가 살았다는 말이 전한다. 1670년경 파평윤씨, 1760년경 광산김씨가 들어와 살고 있다. 원래 북쪽 건네몰에 마을이 있었는데 물이 귀해 1860년경 현재의 터를 옮겼다고 한다. 일제때는 50여호(광산김 20·김해김 6· 진주강 3·창원황 2·전주이 2·금성나 2·파평윤 2·고령신 2·최·신·조 등)였으며 6.25때 별 피해는 없었다. 1989년 수해때 구산 저수지가 터져 가옥 8호가 반파되고 전답·도로 등이 유실되었다. 1984년 장성고등학교가 들어오고 1989년 보해양조가 건네몰에 들어왔으며 65호(광산김·김해김·전주이·창원황·윤·서·봉·강·박·나·송·심·오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九山이라 하다가 마을앞 등이 거북이 형국이어서 龜山으로 변했다. 인물 : 김원규(군농협장)·김원설(의사)·김원양(미국이리오와주 시립병원)·황형권(읍장)·김자영(감사원사무관)·봉병호(용산역장)·김만식(장성농협장)·김요식(노동청보상과장). 유물유적 : 지석묘(14기)·백제시대 석실분(보해양조 부지내에 있다. 원래 말무덤으로 불렀으며 야산 위에 있었는데 보해양조가 들어오면서 없어진 것을 경내에 복원하였다.)

월산(月山)
원래 구산과 한마을이었는데 장성중학교와 장성실업고등학교가 들어오면서 인구가 늘어 1945년 분리되었다. 거북등에서 파평윤씨가 살다가 구산마을로 옮겼다고 한다. 일제때는 15∼6호(파평윤 2·김녕김·의성김·순흥안·일본인 6 기타)가 도로변에 산재해 있었으며 6.25때 피해는 없었다. 해방후 상가가 생기고 1985년 원호대상자 6호가 이주해 오고 최근 영업집이 늘고 있다. 현재 98호(김해김 8·광산김 8·밀양박 7·파평윤 6·동래정 6·전주이 5·인동장 4·장흥고 5·울산김 4·연안차 4·진주강 4·담양전 4·황주변 4·달성서 3·여양진 3·순흥안 2·경주최 2·나주임 2·현풍곽 2· 김녕김 2·조 2·금성나·영월엄·광산이·해주오·전주최·경주김·경주정·평산신·천안전·연안김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구산에서 분리할 때 정인홍이 작명했다고 한다. 인물 : 정금모(면장) 시설 : 장성중학교·장성실업고등학교·장성영천교회

오동촌(梧桐村)
마을 중앙의 냇을 중심으로 1리(영천)·2리(방죽골, 새터)로 나누는데 오래전에 여양진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김해김씨와 금성나씨가 300여년간 세거하고 있다. 마을 위쪽 가는골에 먼저 마을이 형성되었다가 현재의 터로 옮겨졌다고 한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 상오동리, 하오동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일람]에도 하오동리로 나오는데 1927년 조선총독부 발간 지도에는 하오리, 산직리, 신오동이 표기되어 있다. 일제때도 80여호(금성나 37·김해김 18·밀양박 7·여양진 8·광산김 6·전주이 4 등)의 큰 마을이었으며 6.25때 14명이 죽었다. 60년대 이후 이농현상으로 인구가 다소 줄었으나 1990년경 방죽골에 영천아파트가 들어선후 1995년경 해주아파트(130세대)와 최근 임대아파트가 들어서 급격히 인구가 늘어 현재 300여호가 거주하고 있다. 동명유래 : 오동촌 ­ 앞산이 제봉산(啼鳳山)이라 봉황이 깃드는 오동나무를 뜻하여 오동촌이라 했다. 영천동 ­ 방울샘에서 유래, 산직촌 ­ 고경명 묘의 산직이 집이 있었다. 인물 : 김규현(오천유고)·김재웅(재건국민운동 장성군위원장)·김재식(도지사. 국회의원)·김천근(해태제과공장장)·김범수(한전지점장)·기우섭(전남도청 민방위국장)·나백순(산림조합장)·윤영수(육군준장)·나승한(축협장)·나승유(포항공대교수)·나병순(경찰서장)·나재호(군법무관)·진형하(변호사) 유물유적 : 방울샘(호남명천. 나라에 길흉이 있으면 물빛이 변하여 이를 예고한다)·고경명묘(제봉재. 신도비 등이 있다.)·오천정·김공규현 실적비·금성나씨 유허비·노농 김재식 불망비·방울샘제와 당산제를 지낸다.

청운동
1900년경에 김해김씨가 처음터를 잡았다고 전하며 그 후 여러성씨들이 들어왔다. 1914년에 장성역이 개통되면서 역 앞과 신작로를 따라 상가가 형성되었고 우체국, 잠견장 등이 들어서면서 마을규모가 커졌으며 1943년에는 읍사무소가 옮겨왔다. 일제때 60호가 거주했고 6.25때 10여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 1971년 주택단지를 조성하였고 1975년에 호남고속도로 공사에 편입된 가옥들이 이주해 왔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 북쪽에 신주택지가 조성되면서 인구유입이 늘어 현재 732호에 2244명이 거주하고 있다. 동명유래 : 풍수설(청룡이 누워있는 형국)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확실치 않다. 인물 : 기노생(장성읍장), 변복기(장성읍장), 고금열(장성축협장), 차중이(장성농협장), 조성준(광주시계장), 정인섭(대한통운소장), 정채경(광주위생사업소장), 김재봉(상명상사사장), 최창호(신창문화사장), 차상열(한국화학사장).

매화동
백제때 고시이현 치소가 있었고 1600년에 장성과 진원현을 합치면서 현소재지가 되었다가 1655년 성산으로 옮겨간 뒤 비기촌에 몇호의 인가가 유지되었다. 1900년경 김해김씨와 탐진최씨가 들어왔다는 말이 전하며 1921년 장성군청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후 장성경찰서 등 각 관공서들이 들어오면서 마을이 점차 커졌다. 비기촌에 피병원이 개설되었고 장성성당이 건립되었으며, 그후 영천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때는 50여호가 거주했고 6.25때 (인공) 유격대사령부가 설치되었으며 수복 후 5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 6.25 직후에 새장터에 2일과 7일에 시장을 열었으나 곧 폐쇄되었으며 1973년경에 매일시장이 개설되었다. 현재 727호에 각 성씨가 고루 거주하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형국(매화낙지형)에서 유래되었다. 인물 : 김현섭(장선군과장), 김효석(국회의원).

충무동
1900년경 울산김씨와 김해김씨가 터를 잡아 형성된 마을로 신작로(국도1호선)을 따라 상가가 형성되면서 많은 일본인과 각 성씨들이 들어와 규모가 커져 상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제때는 60여호가 거주했으며 문재철의 선일척식회사와 삼양사농장, 일본인의 세천농장, 호남은행, 최초의 정미소 등이 설립되었고, 1942년에 장성공원이 조성되었다. 인공치하에 노동당사무소와 국보위후원회가 설치되기도 했으며, 수복 후 10여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 현재 370호에 1,083명이 거주하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북쪽에 유명한 샘(약시암)이 있어 약수동이라 하다가 장성공원에 충혼탑이 세워진 후 충무동이라 하였다. 인물 : 김상필(도의원).

대창동
고려때 설치된 마량부곡의 소재지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마을 뒷쪽의 점낙치 고개로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 1900년경 광산김씨가 부근에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일제때 50여호가 거주하면서 주로 농업에 농사했으며 빈한한 사람이 많아서 장성읍의 녹두밭 웃머리라 하였고 주민 2명이 징용에 다녀왔다. 6.25때(인공)는 정치보위부가 설치되었으며 수복 후 4명이 사망했다. 1972년경 마을뒷산 중턱으로 호남고속도로가 개설되었으며, 현재 388호에 1214명이 거주하고 있다. 동명유래 : 크게 번창하라고 大昌洞이라 하였다. 인물 : 김연수(장성군수), 김상술(사무관), 최경천(장성군 기획실장).

삼월동(三月洞)
황룡강이 커지고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일제초에 김녕김씨와 울산김씨가 처음 살기 시작하여 남평문씨·남양홍씨·김해김씨 등이 들어와 120여호가 되었으며 지서, 면화공판장, 식량배급소, 남선전기 등 관공서가 설치되고 일본인(4호)도 살았으며 여관, 음식점 등 상가가 들어섰다. 6.25때 정미소가 소각된 것 외에는 피해가 없었다. 고려시멘트 부지로 전답이 편입되었으나 상가가 늘어나고 있다. 현재 184호의 산성마을이다. 동명유래 : 삼가동 월평사이에 있어 삼월이라 했다고 한다. 인물 : 김장섭(전교)·홍낙천(연극배우. 나윤규와 함께 활동)·김영모(통일주체 대의원)·김영숙(대학교수)·한웅진(육군소장).

(6) 단광리(丹光里)

단광리는 단광·가작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읍동면 지역으로 호구총수(1789년 발간)에는 단광(端光)·가작교(加作橋)가 나와 있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丹光·加作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14년 단광·가작·월평 일부를 합해 단광리라 하였다. 현재 1리 단광, 2리 가작으로 나뉘어 있다.

단광
약 400여년전 청주한씨가 번성했다는 구전이 있다. 그 후 1580년경 해주최씨, 1670년경 김해김씨, 1894년경 울산김씨가 들어왔는데 1906년 화재로 3호만 남고 전소된 일이 있다고 한다. 일제때는 65호(해주최·김해김·울산김·전주최·청송심·진원박·진주강·제주양 등)가 살았으며 6.25때 4명이 죽었다. 이농현상으로 호수가 줄고 1989년 군용부지로 편입되어 17호가 떠나가 현재 26호(해주최 12·김해김 6·청송심 3·전주최·진주강·밀양박·제주양·신안주·진원박)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뒷산의 단풍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인물 : 김태중(서울남대문경찰서장), 최득수(한국통신과장), 김두영(외무부과장).

가작(加作)
호구총수(1789년)에도 가작교로 나오는데 주민들이 모두 일제 이후에 들어와 옛일을 알수 없다. 원래 못재 밑에 주막이 성했던 마을로 일제때 20호 정도(김해김씨·천안전씨·풍천임씨·광산김씨·담양전씨·문화유씨·창녕조씨 등)가 살았으며 주막 7∼8호가 있었다. 6.25때 3명이 죽고 1978년 고속도로 개설 때 철거된 13호가 들어오고 취락구조 개선사업 때 30호로 늘었으며 그 후 식당 주유소 등이 생겨 현재 49호(해김 13·전주이 5·천안전 3·풍천임·기·창녕조·의성김·장흥고·장수황·인동장·광김·옥구장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못재 밑 단광천의 가작다리에서 유래되었다. 취락구조사업 후 새마을로도 부른다.

삼가동(三街洞)
원래 단광리에 속한 곳으로 몇 호가 있어 뒷골 또는 샛터라고 불렀는데 일제때 신작로가 나면서 광주·장성·영광 3방면에 갈림길이 되어 삼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점차 가옥이 들어서고 상가가 형성되면서 삼가동으로 분리 되었으며 진주강씨, 전주이씨, 광산김씨, 김해김씨, 현풍곽씨, 인동장씨, 유씨 등이 살고 있으며 김연수(장성군수), 김용억(광주시의원)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못재의 전설과 관련된 목호 효자비가 전남 제재소 담부분에 서 있으며 일제때 일본 야마구찌현 출신 모리다라는 일본인이 황룡시장에 다녀오다가 의병 20여명에게 피살된 일이 있다고 한다.

(7) 기산리(岐山里)

기산리는 내기·강변·외기·부동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읍서면 지역으로 호구총수(1789년 발간)에 내기산, 외기산이 기록되어 있으며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는 내기·외기가 나온다. 내기와 외기는 원래 같은 마을로 거리제(거르제) 또는 기산리라 불렀으며 안동네, 바깥동네로만 구분했었고 강변과 부동은 일제때 조성된 마을이다.

내기(內岐)
임진왜란때 순절한 남원윤씨 윤진장군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고 1590년 필암서원이 이 마을에 세워졌다가 정유재란때 소실되었다고 하며 해주오씨가 320여년간(10대째) 살고 있다. 일제때는 50여호(해주오 32·파평윤 2·인동장 2·장수황·흥성장·초계정·남양홍·김해김·평택임·경주최 등)가 살았으며 6.25때 7명이 죽었다. 그 후 몇호가 들어왔으나 이농현상으로 호수가 줄다가 1997년 제일빌라 17세대가 들어서 현재 65호(해주오 24·김해김 5·전주이 4·광산김 3·남양홍 3·흥성장 3·초계최 3·경주최 2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거르제(거리제)라고 부르며 기산리로 표기한다. 기산은 선연(배나드리)의 물이 맑고 옆산의 경관이 좋아서 생긴 것 같다. 안동네(내기), 바깥동네(외기)가 있다. 인물 : 윤진(임진왜란때 남문창의, 정유재란때, 입암산성에서 순절), 오상근(독립운동), 오도석(농산물검사소장), 오권석(건국대교수), 유물유적 : 필암서원터(서당골), 석송대(석탄 이기남과 송강 정철이 교유 하던 곳)

강변(江邊)
황룡강 제방공사때 술집이 생기고 1910년경부터 일본인 6∼7인이 들어와 양잠을 하면서 서삼에서 선씨·반씨·김씨 등이 뽕밭 관리를 위해 들어오고 1930년경 방천에 주막도 들어서 한때 40여호(해주오씨 14·보성선씨 3·전주이씨 3·행주기씨 2 등)까지 살았으나 해방후 일본인들이 떠나고 1960년대 이농현상으로 호수가 줄더니 1997년 도로 확장때 11호가 철거되었다. 그러나 원예·화훼 등 특수작물로 소득을 올리고 장성읍의 번창으로 예식장 식당·여관 등 상가가 생겨 장성읍과 맞닿아 있으며 현재 32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황룡강변에서 유래.

외기(外岐)
원래 기산리(거리제) 바깥마을이다. 1480년경 청안이씨가 입향하여 세거하다가 1800년경 모두 떠났다. 뒷터에 마을이 있었으나 정유재란때 모두 소각되어 옮겨졌다고 하며, 1600년경 진주강씨, 1700년경 해주오씨 등이 들어왔다. 일제때 40여호(오씨 10·강씨 10·밀양박 4·전주이씨·김해김 2·광산김 2·강능유·청주한 등)가 살았으며 6.25때 10여명이 죽었다. 1987년 장성여상고가 들어오고 1975년 들어섰던 군부대가 1994년 옮겨간 자리에 문화센터가 세워지고 있다. 현재 40호(해주오 15·진주강 6·김해김 4·밀양박 3·전주이 2·광산김 2·제주양 1·청주한 1·하음봉 1·강능유 1·옥천육 1·선산김 1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기산리 바깥동네, 인물 : 이기남(호석탄, 송강정철 등과 교유), 이문용(이기남의 자, 사헌부감찰, 학립서원, 충의사 배향), 오현석(육군중령), 김금수(육군중령), 유물유적 : 행주기씨(이문용의 처) 정려.

부동(釜洞)
1910년경 일본인이 살았다고 하며 밀양박씨가 처음 들어왔다. 일제때 5호(밀양박·광산김·진주강·해주오·일본인)가 살았으며 해방후 6∼7호가 되었는데 6.25때 별로 해는 없었다. 1960년대부터 인구가 늘었으며 1963년 수해로 피해를 입었으나 1967년 제반공사를 완료하였으며 현재 32호(밀양박 5·김해김 4·해주오 3·광산김 2·전주최 3·황·고·강·윤·송·봉·장·울림·신 등)가 원예 작물 등의 소득으로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형국이 가마솥형이다. 인물 : 박원기(육군중령), 심중선(동신대교수).

(8) 장안리(長安里)

장안리는 장안·장재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읍서면에 속했으며 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장안·봉암이 나오고 1912년의 [행정구역명침일람]에는 봉암·월봉이 나오는데 1914년 수산(水山)리, 봉암리, 월봉리를 장안리라 하여 장성면에 편입시켰다.

장안(長安)
장안은 봉암·월봉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오래전에 남양홍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고려 공민왕때(1364년 무렵) 황주변씨가 입향하여 동쪽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그 외 성씨는 대부분 일제 이후에 들어왔는데 봉암은 황주변씨, 월봉은 타성받이가 살았다고 한다. 일제때 봉암은 80여호(변씨 30·청송심 4·김해김 4 ·평택임 3·제주양 1 등), 월봉은 70여호(변씨 10·김해김 5·담양국 3·김해허 3·밀양박 3·기타)등이 살았는데 6.25때 120여명이 죽고 큰 수난을 겪었다. 이때 인구가 급격히 줄고 근래 이농현상으로 현재 52호(변씨 23·박씨 2·김해김 2·전주이 2·청송심 3·수원김 1·금성나 1·의성김 1·경주이 1·청주한 1·한양조 1·평택임 1·최씨 1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원래 담안(장내)이라 하다가 장안이 되었다고 한다. 인물 : 변정(황주변씨 입향조), 변이중(임난때 화차제작, 의병장), 변윤중(임난때 의병항전), 변덕윤(병자호란때 의병), 변경윤(봉암서원배향), 변순기(항일운동), 변진걸(사립장명학교 설립), 변진일(독립운동, 태극결사대조직), 변복기(장성읍장), 변진무(통대의원), 병성연(여수경찰서장), 양화목(장성군과장), 변충연(광산구 건설과장), 변화연(보건복지부과장), 심상득(재무부관재국장). 유물유적 : 지석묘 3기(봉암마을 앞), 영천이씨 정려, 영사정, 황주변씨 삼강정려, 기옹정, 봉암서원, 충혼비, 봉암석불.

장재(長在)
임진왜란때 황주변씨(윤중)가 원당골에서 살았다고 하며 담양전씨가 6대째 살고, 구한말 해주오씨·안동김씨·황주변씨가 살았다고 하는데 호구총수나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장안에 속한 마을로 추측된다. 일제때 40여호(담양전 9·김해김 2·안동김 2·평택임·황주변 등)가 거주하다가 6.25때 40여명이 죽었다. 1952년 마을입구 서쪽에 전쟁고아수용시설(귀계원)이 들어섰는데 1982년 호남선 복선 공사때 뜯긴 가옥이 그쪽으로 옮겨 새 마을이 조성되었으며 좀보 부근에도 최근 여관·식당 등 영업소 6∼7호가 생겨 전체 70여호로 증가되었다. 동명유래 : 옛날 큰부자(변윤중)가 살아 장자터라하며 장재로 표기한다고 한다. 인물 : 변윤중(임난시 의병), 변만리(부자), 임낙이(교육장), 김경수(의사), 강병조(육군중령).

(9) 안평리(安平里)

안평리는 안평·장동·잠암·구암·용암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읍서면 지역으로 잠암에 지석묘가 있으며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 신기(新基)·구암(九岩)·가마(加馬)가 기록되어 있고 1912년 [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안평·장동·장동·장암·구암·용암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1리 안평, 2리 장동·장암, 3리 구암, 4리 용암으로 나뉘어 있다.

안평(安平)
1884년경부터 장안리의 황주변씨들이 이거해와 동족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1789년의 호구총수에도 신기(新基)로 나와있는 것을 보면 그 이전에 성촌된 마을인 것 같다. 일제때 광산김씨, 장흥임씨, 전주이씨 등이 들어와 32호 정도가 계속 유지되다가 6.25를 만나 10여명이 사망하였다. 그 후에는 호수의 변동이 없다가 이농현상으로 19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주변에서 가장 늦게 생긴 마을로 새터라 부르다가 마을 뒤 질마재와 마을 앞 이양평들 이름을 따 안평(鞍坪)이라 했는데 安平으로 변했다. 인물 : 변대용(황주변씨 입향조, 학자), 변승기(장성군수서리, 회산집 6권), 변진갑(승기의자, 국회의원 3선), 변진혁(조흥은행지점장), 변진숙(장성군과장), 변지연(농산물검사소장), 변영남(의학박사), 변규연(육균대령), 변백연(헌병대령), 변국본영(농협지부장), 변영호(국민훈장), 김갑수(초등교장), 유물유적 : 기옹영정(변종락의 영정, 지방문화재 67호).

장동(壯洞)
1700년경 남양홍씨가 들어온 후 1850년경 연안차씨, 1880년경 김녕김씨, 1890년경 황주변씨 그리고 1900년대 초에 울산김씨, 진주강씨가 들어와 일제때 30여호(홍씨 6, 차씨 4, 김녕김 3, 변씨 4, 김해김 2, 울산김 1, 달성서 1, 하동정 2, 기타)가 살다가 6.25때 3명이 죽고 30호(김해김 4·변 4·차 5·정 3·홍 3·김녕김 3·강 1·울산김 1·고 1·오 1·주 1·양성이 1·달성서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뒷산 장군형국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인물 : 홍판용(면장), 홍석갑(육군중령), 차용철(초등교장), 변행섭(행정고시), 변국본영(장성농협군지부장), 변자연(서울지검조사관).

잠암(簪岩)
마을앞에 지석묘가 있으나 호구총수(1789년)에는 나오지 않고 1870년경 울산김씨가 들어와 자가일출 하다가 일제때 동복오씨·장흥고씨·경주최씨·밀양박씨·황주변씨·금성나씨 등이 들어와 30여호(울산김씨 17호 등)가 살았다. 6.25때 별피해는 없었으며 현재 28호(울산 4·박 3·변 3·최 2·고 2·해김 2·차 1·나 1·김 1·영월신 1·전주이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원래 감나무골(枾木洞)이라 부르다가 비녀바위가 있어 잠암으로 고침. 인물 : 김윤환(참봉), 김윤철(사무관), 김상옥(행정고시), 최동호(전남도청 계장), 변시연(전남문화재 전문위원, 한학자), 유물유적 : 지석묘 5기, 잠암(비녀바위), 비록골(김자점 출생지).

구암(九岩)
1610년경 담양국씨가 들어오고 1750년경 남평문씨가 들어와 7대째 살고있으며 1810년경 전주이씨가 살다가 떠났다. 1841년 밀양박씨, 1880년 탐진최씨, 1900년 전주이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남양홍씨, 진주강씨, 해주오씨, 광산김씨, 이천서씨, 금성나씨 등이 들어와 70여호가 살았으며 6.25때 지방폭동으로 49명이 죽었다. 그 후 흥성장씨, 김녕김씨, 남원양씨, 김해김씨 등이 들어왔으나 현재 57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구암과 용암을 구분하지 않고 두룸바우라고 불렀는데 두 마을을 합쳐 두루미형국이라 하여 鷗岩이라 하다가 九岩이 되었다고 하나 호구총수(1789년)에도 九岩으로 나온다. 또 두루미가 날아가지 못하도록 세운 9개의 입석에서 유래되었다는 논설도 있다. 인물 : 이윤성(태천군수), 박양규(담양경찰서장), 박종건(해군중령), 김선순(해정고시), 유물유적 : 입석(9개였으나 현재 2개만 남았다.).

용암(龍岩)
원래 구암과 한마을이었고 1630년 구암의 담양국씨가 옮겨왔으며 1700년경 보성선씨 1800년경 광산김씨 등이 들어와 성촌되었다. 처음 가매동에 먼저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호구총수(1789년 발간)에는 加馬로 나와 있고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용암으로 나온다. 일제때는 40여호(국씨·선씨·광산김·밀양박·평산신·탐진최·남평문·달성배·철원주 등)가 살았으며 6.25때 6명이 죽었다. 그 후 고령신씨, 천안전씨, 전주이씨, 평산유씨, 옥천조씨, 김해김씨 등이 들어왔으나 이농현상으로 30여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가마동이라 하다가 마을이 용의 형국이라 하여 용암으로 바꿨다.

(10) 부흥리(扶興里)

부흥리는 부흥·신흥 두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래 북삼면에 속했는데 1914년 장성면에 편입되었다. 호주총수(1789년)에는 나오지 않고 1912년 [전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부흥·신흥이 나오며 현재 부흥, 신흥으로 편성되어 있다.

부흥(扶興)
1760년경 김해김씨가 들어오고 그 외 성씨는 1900년 이후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호구총수(1789년)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제때는 24호(김해김 4·전주이 2·나주임 3·광산김 2·탐진최 1·청주한 1·해주외 1·달성배 1·행주기 1·평강채 1·하음봉 1 등)가 살았으며 6.25때 피해는 없었다. 1960년대 30여호가 되었으나 현재 18호(김해김 4·전주이 3·나주임 3·밀양박 2·광산김 2·전주강 2·탐진최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부엉바위에서 유래 富興이 扶興으로 변했다. 유적 : 부흥바위(휴암 변윤중이 정유재란때 왜병을 막다 실패하여 이 바위에서 강물에 투신하자 성씨부인과 며느리 서씨도 함께 투신했다.)

신흥(新興)
백계리의 김해김씨들이 전답을 벌기위해 넘어다니며 막을치고 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밀양박씨가 7대째 살고 있으며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는다. 전주이씨가 1860년경, 동래정씨도 구한말쯤 들어온 것 같으며 그 외 성씨들이 들어와 일제때 40여호(김해김 8·밀양박 6·전주이 8·동래정 7·담양전 3·파평윤 2·달성배 1·진주강 1·인동장 1·기타)가 살았으며 6.25때 사망 1명 외 다른 피해는 없었으나 이농현상으로 현재 25호(해김 4·이 3·박 5·배 2·광김 2·오 2·무송윤 1·동래정 1·평산신 1·강 1·나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부흥보다 늦게 생겨 신흥이라 했다고 하며 북일면 신흥과 대칭으로 안신흥이라고도 한다. 인물 : 윤영환(대통령 표창), 박정수(과학경진대회 최고상)

(11) 백계리(白鷄里)

백계리는 원래 역면에 속했으며 백계·남양촌 2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역면조에 백계·대사(大寺)가 나오고,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는 북삼면조에 백계리·대사리·기룡리가 나오는데 1914년 대사리·백계리·기룡리를 백계리라 하였으며 현재 1리 백계, 2리 남양촌으로 나뉘어 있다.

백계(白鷄)
연안차씨가 약 400년, 김해김씨가 약 350여년 살고 있다. 옛날 청암역이 가까이 있어 관계가 깊은 듯 하며 일제때는 70여호(차씨·김씨·달성서·나주정·진주강·전주이·담양전 등)였으며 6.25때 13명이 죽었다. 현재 52호(김해김 20·전주이 5·밀양박 3·연안차 4·해주최 4·나주정 3·담양전 2·의령남 2·파평윤 2·달성서 2·진주강 2·설 1·영성정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뒷산이 닭형국이다. 상오리는 지내형국으로 언제나 대립되었다. 인물 : 차순년(성종때 효자), 김종연(지적공사 소장), 김석후(육군소령), 김종인(삼환기업대표), 김정수(육군중령), 김종진(KBS기자), 정수학(화랑무공훈장), 차경준(세무서장), 박명삼(전남대교수), 전영배(육군준장), 김용화(면장). 유물유적 : 지석묘 1기, 행주기씨 효열각, 연안차씨 열녀비, 관음사, 홍두표 선정비.

남양촌(南陽村)
백계의 연안차씨와 김해김씨가 옮겨와 살기 시작한 것 같으며 전주이씨가 11대째 살고 있다. 그 후 담양전씨가 1760년경, 밀양박씨가 1800년경, 달성서씨가 1820년경, 광산김씨가 1900년경 들어왔다. 일제때는 58호(차씨 11·김씨 8·박씨 5·전씨 5·이씨 4·서씨 3·광김 2·윤씨 2·정씨 2·안씨·조씨 등)였으며 6.25전후에 32명이 죽었다. 현재 45호(연안차 6·김해김 6·전주이 3·담양전 4·달성서 2·밀양박 2·여주이 2·나주나 2·광산김 3·진주정 2·진주강 1·수원백 1·밀양손 1·영광김 1·오씨 1·조씨 1·나주정 1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날에는 대사(大寺), 기룡(起龍)으로 불렀는데 이용중이 자기처소 야은제가 황룡강변에 있는 것이 제갈량의 와룡강변 남양초당과 같다하여 남양촌으로 부른 것이 동명이 되었다. 인물 : 이용중(해남현감), 이치홍(참봉), 이영구(국민훈장 동백장), 이진환(장성문화원장), 차영환(경제기획원 사무관), 김칠환(감역), 서진순(독립운동) 유물유적 : 야은재(향토문화재), 영산홍(전라남도 보호수), 정성북초등학교터(1996년 폐교).

(12) 용강리(龍岡里)

용강리는 원래 역면(驛面) 지역으로 중흥·복암·용강·별관·우동 5마을로 이루어졌었으나 1975년 장성호 건립으로 모두 없어지고 우동 마을만 남았다. 호구총수(1789년 발간)에는 황주리와 별관리가 나오고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는 북삼면 중흥·복암·용강·별관·우동 마을이 기록되어 있다. 현 장성군 제방 부근에 청암역(靑巖驛)이 있었는데 이 역은 원래 단암역이라고 부르다가 1700년 전후에 나주의 청암역찰방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11개 역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명칭도 청암역으로 바뀌었다. 역 동쪽 하천에 봉덕연(鳳德淵)이 있었는데 물이 맑아 호남명천으로 이름 나 있었으며 1930년대에 8각정을 세웠는데 장성호 건립때 뜯겼다. 장성호 : 1973∼1976년 완공.

우동(牛洞)
마을에 지석묘가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보이지 않는다. 1870년경 나주임씨가 들어오고 1890년경 김해김씨, 1900년경 평택임씨와 담양전씨, 1943년 달성배씨가 들어왔다. 일제때는 40여호(김해김 7·나주임 4·평택임 4·밀양박 3·담양전 2·달성배 3 등)였으며 6.25때 2명이 죽고 수복후 성산 등지로 피난 갔다가 1954년경에 들어왔는데 그 후 호수가 급격히 줄었으며 흥덕장씨·전주이씨·파평윤씨·금성나씨·순흥안씨 등이 들어왔으나 현재 23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와우형국이다. 유물유적 : 지석묘 1기. 인물 : 전종배(육군소장).

(13) 덕진리(德津里)

덕진리는 덕진·구산·구신·덕산 4마을로 이루어졌다 구산저수지 위쪽과 덕진저수지 아래에 지석묘가 있으며 원래 북하면 지역으로 호주총수(1789년)에는 구산·구산치가 나오고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덕진·구산·구신이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북삼면으로 편입되고 1930년 장성면으로 합해졌다. 현재 1리 덕진, 2리 구산·구신, 3리 덕산으로 나뉘어 있다.

덕진(德津)
1620년경 연안차씨가 충청도에서 입향하여 자자일촌하다가 구한말 평택임씨와 광산김씨가 들어왔다. 원래 북하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북삼면에 편입된 마을로 일제때는 67호(차씨 42·임씨 8·김씨 2·장흥고 2·전주이 3·광산김 1·기타)였으며 6.25때 8명이 죽고 마을이 소각되었다. 약 3년간 마을이 복귀되어 예전의 호수가 되었으나 이농현상으로 27호(차 13·임 2·광김 2·전주이 2·고·배·서·김해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배가 닻을 내리고 있는 형국이어서 덕진이라 했다고 한다. 인물 : 차정섭(독립운동), 차복섭(초등교장), 차성만(정치학박사, 국민대교수), 차두욱(육군중령), 김봉문(우체국장), 김무련(고대공전교수), 임윤용(북하면장), 임규열(장성읍농협장).

구산(九山)
원래 북하면에 속했으며 1700년경 광산김씨, 평택임씨, 문화유씨가 들어왔으나 문화유씨는 모두 떠나갔다. 일제때 50여호(광김 27·임 6·해주최 4·문화유 3·순천김 2·기타)가 살았으며 6.25때 5명이 죽고 마을이 소각되었다. 현재 24호(광김 9·임 4·순김 2·고 2·김녕김 1·박 1·나 1·최 1·유 1·차 1·제주양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개가 범(범배우)를 보고 고개를 두르고 엎드린 형국으로 구산(狗山)이라 하다가 구산(九山)으로 바뀌었다.

구신(九申)
원래 북하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북삼면에 편입된 마을로 1700년경 밀양박씨가 아치실에서 들어온 후 1850년경 광산김씨, 1900년경 평택임씨, 인동장씨, 김녕김씨 등이 들어와 일제때는 27호(밀박 4·전주이 3·평택임 3·광김 3·김녕김 3·여양진 2·인동장 1·기타)였으며 6.25때 11명이 죽고 마을이 불탔다. 그 후 마을이 복구되어 옛 호수가 되었으나 이농현상으로 현재 13호(남양홍 3·광김 2·진 2·박 1·임 2·장 1·김녕김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호구총수(1789년)에는 仇申峙로 나온다. 구신재(구신치) 밑에 있는 마을이라 구신이라 하며 [개의 남근]형국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기타 : 옛날 구신재 중턱에서 석회석을 캐다가 북하면 월성리에서 회를 만들어 팔았는데 지금은 고려시멘트 원료 채취장이 있다.

덕산(德山)
연안차씨가 12대째 살고 광산김씨가 1750년경 들어왔다고 하는데 호구총수(1789년)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옛부터 우지와 한 마을이었던 것 같다. 구전에 의하면 연안차씨·광산김씨·담양전씨가 상성뫼에서 살다가 현 마을터로 내려왔다고 한다. 일제때는 42호(연안차 15·광산김 9·나주정 2·금성나·申·청주한·전주이·밀양박·장·최 등)가 살았으며 6.25때 2명이 죽고 수복후 주민 절반이 장성읍·성산 등지로 피난갔다가 모두 돌아왔으나 지금은 이농현상으로 27호(차씨 8·광김 6·나주정 3·해김 3·나씨 1·전주이 1·담양전 1·평산신 1·밀양박 1·청주한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현재도 [웃원갓]으로 많이 부르며 일평(日坪)이라 하다가 1968년 마을총회에서 덕산으로 바꿨다. 인물 : 차홍섭(육군소령), 차용섭(전남도종축장), 차연섭(광주시계장), 김수련(육군중령).

(14) 상오리(上蜈里)

상오리는 원래 역면(驛面)에 속했으며 상오·하오·호산·우지 4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789년 발간한 [호구총수]에는 상오치(嘴)리·하오치리·사천리·우지리가 나오고,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북삼면조에 상오리·하오리·사천리·우지리가 나온다. 현재 1리 상오, 2리 하오, 3리 호산, 우지로 나뉘어져 있다.

상오(上蜈)
500여년전 임천순(舜)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1680년경 담양전씨가 웃원갓에서 옮겨오고 비슷한 시기에 김해김씨가 백계리에서 들어왔으며 연안차씨도 300여년 전에 들어왔다고 한다. 옛날에는 청암역 역원들이 많이 살았으며 일제때는 북삼면 면사무소가 있었던 마을로 60여호(전씨·해김·차씨·광김·박씨·강씨 등)의 빈촌이었는데, 종이 공장(지소)이 생기면서 생활이 나아졌다. 6.25때 1명이 죽고 2호가 불탔으며 1972년 새마을 시범마을이 되었다. 현재 65호(김해김 16·광산김 8·담양전 11·전주이 6·평택임 4·밀양박 3·반남박 3·해주오 2·평강채 2·장수황 1·파평윤 1·노 1·서 1·송 1·진주강 1·연안차 4)가 살고있는데 1975년경부터 서쪽 황룡천변에 식당 등 영업집이 생겨 성업중이다. 동명유래 : 뒷산(지내형국)에서 유래, 인물 : 전동섭(북삼면장), 김병욱(장성읍장), 전인기(전남대교수), 김정식(세무서장), 전진희(지방노동청장), 김명수(덕성한지대표), 전용필(육군소장), 전계진(노동청사무관), 김철수(목포시과장).

하오(下蜈)
원래 상오·하오가 구분이 없었으며 김해김씨와 연안차씨가 300여년간 살고 있으며 하오와 배암내(蛇川里)가 합해진 마을이다. 제주양씨가 6대째 광산김씨가 4대째 살고 있으며 반남박씨도 오랫동안 살고 있고 전주이씨도 오랫동안 살다가 떠났다. 일제때는 하오 40호(차 30·해김 5·이 2·전 1·양 1·박 1) 배암내 10호(차 4·이 1·박 1·강 1·최 1 등)였으며 6.25때 8명이 죽었다. 현재 52호(차 12·김 11·전주이 7·밀박 4·반남박 2·강 3·함평이 2·죽산안 1·양 1·전 1·채 1·방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오치리의 아래쪽 마을. 인물 : 차석준(전남경찰청 수사과장), 高○○(의병장), 차상섭(우체국장), 유물유적 : 득량원터.

호산(湖山)
1870년경 김해김씨와 진주강씨가 들어오고 전주이씨가 4대째 살고 있다. 일제때 20여호(김해김 5·진주강 3·연안차 4·전주이 2 등)였으며 6.25때 별로 피해는 없으나 이농현상으로 16호(차 3·강 3·김 2·이 2·천안전 1·여양진 1·인동장 1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배형국이므로 물이 필요하다고 하여 호(湖)자를 썼다는 설과 마을 앞 하천과 마을 뒤 산이 있어 호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인물 : 김상현(국회의원).

우지(芋枝)
원래 웃원갓(덕산)과 한 마을이었다고 하며 연안차씨가 400여년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담양전씨도 살았다고 한다. 일제때는 80여호(차씨·전씨·나주나·여양진·광신김·해주오·진주강·전주이 등)였으며 6.25때 16명이 죽고 70호로 줄었는데 이농현상으로 현재 48호(차 27·해김 4·광김 5·전 3·강 1·황·밀박 1·탐진최 1·전주이 2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부근에 옛날 득량원(得良院)이 있어 원갓이라 하였는데 뒷산이 우엉형국이어서 우지라했다고 한다. 인물 : 차영평(영평군수).

(15) 야은리(野隱里)

야은리는 야은·채약·신기 3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역면에 속했으며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역면조에 원산리(遠山里)가 나온다. 1914년 야은·채약을 야은리라 하였으며 북삼면 관할이었는데 1930년 북삼면이 장성면에 합쳐졌다. 현재 1리는 야은·채약, 2리는 신기로 나뉘어져 있다.

야은(野隱)
1750년경 김녕김씨, 1800년경 해주오씨, 1900년경 전주이씨가 들어와 동성이라 할 정도로 사이좋게 살았다고 한다. 일제때는 50여호(금녕김 18·전주이 15·해주오 3·평택임 1·조씨 1·기타 12)가 살았으며 6.25때 피해는 없었다. 새마을 사업으로 널리 알려져 1982년 지원금 1억을 받아 선진 견학지가 되었으나 이농현상으로 지금은 40호(김녕김 7·전주이 7·해주오 6·평택임 4·김해김 3·담양전 3 등)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앞산과 뒷산이 두 마리의 기러기와 흡사하다고 하여 양안동(兩 洞)이라고 부르다가 이용중(구한말 해남현감)이 이 마을로 들어온 후 그의 호를 따라 야은으로 부른다고 한다. 인물 : 이용중(해남현감), 이봉구(담양군수), 이원휘(세무서장), 임재호(군의원), 유물유적 : 망곡단과 망곡비(마을입구 산기슭에 [야은 이용중 망곡단비]가 있고 조금 위에 이용중이 고종황제 서거에 망곡하던 망곡단이 있다), 야은재 (전주이씨 제각).

채약(採藥)
비석등에 마을이 있었다는 구전이 있으며 김해김씨가 6대째 살고 있다. 구한말 전주이씨, 금성나씨가 들어오고 그 후 몇 성씨가 들어와 일제때 20여호(김해김 6, 여양진 2, 금성나 2, 전주이 1, 장수황 1, 밀양손 1, 정씨 1, 기타)가 살았으며 6.25때 5명이 죽었다. 현재 18호(김해김 5·경주최 4·금성나 3·전주이 2·해주오·평산신·장흥고)가 거주하고 있다. 동명유래 : 산에서 약초를 채취하여 채약동이라 부른다는 설과 1935년 이희구가 금광채굴을 하여 채골이라 부른다는 설이 있다. 1912년 [행정구역명칭일람]에 북삼면 채약리로 나와 있다.

신기(新基)
1840년경 해주오씨가 자귀나무와 가시덤풀 땅을 구입하여 살기 시작하였으며 1900년경 탐진최씨와 김녕김씨 등을 비롯 대부분 야은에서 옮겨온 주민들이 일제때는 25호(탐진최 5·해주오 3·김해김 3·김녕김 1 등)를 이루었다. 6.25때 3명이 죽었으나 쌈지뜸(황룡교 도로남쪽)에 70년대부터 상가가 들어서 현재 38호(김녕김 8·전주이 4·해주오 3·탐진최 3·김해김 3·연안차 2·창원황 1·진주정 1·영양천 1·진주정 1·최씨 1·윤씨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원래 [짜구머리]라 부르다가 1970년 오달생이 [신기]로 명명했다. 짜구대나무·오씨마을(작오)·작은마을(짝은몰) 등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인물 : 김신기(초등교장), 기타 : 농협장북지소. (이병직)



[표8-1] 장성읍 마을· 세대 ·인구(2001. 3. 12 현재)

장성읍 마을 · 세대 · 인구 - 행정리, 자연마을명, 세대수, 인구수(계, 남, 녀), 비고 제공 표
행정리자연마을명세대수인구수비 고
48리동산, 중초4,98714,6177,3047,313
수산 1리수산83214103111
수산 2리신촌76240122118
수산 3리성산 571557382
성산 1리복산371085256
성산 2리청용 118324161163
성산 3리남당, 중남631789286
성산 4리상풍, 밀등72209104105
성산 5리유탕401065650
유탕 1리유탕651537677
유탕 2리서동78247135112
유탕 3리구산25603129
구산동월산78222113109
월산동오동촌136427226201
영천 1리오동촌76219118101
영천 2리매화255834408426
매화 1리매화4211,288619669
매화 2리청운306927475452
청운 1리청운253740364376
청운 2리충무4821,510733777
충무 1리충무172499246253
충무 2리대창198583292291
대창 1리대창236732379353
대창 2리삼월152473251222
삼월동단광156470252218
단광 1리가작28794435
단광 2리삼가491548074
삼가 1리삼가85236119117
삼가 2리내기, 강변110300148152
기산 1리외기, 부동128412193219
기산 2리장안76218114104
장안 1리장재601446282
장안 2리안평68264138126
안평 1리장동, 잠암26543222
안평 2리구암551396673
안평 3리용암651447074
안평 4리부흥, 신흥33713338
부흥리백계561316764
백계 1리남양촌591476681
백계 2리우동511246262
용강리덕진30672443
덕진 1리구신, 구산27592732
덕진 2리덕산38894643
덕진 3리상오29703139
상오 1리하오7020499105
상오 2리우지, 호산551568571
상오 3리야은, 채략681859194
야은 1리신기571517675
야은 2리 391015021
QR CODE
  • 왼쪽 정보무늬 사진을 휴대전화에 인식시키면 자동으로 이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 이 정보무늬는 『제2장 마을유래』의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제2장 마을유래 페이지 바로가기 주소(https://www.jangseong.go.kr/q/ezIzMDd8fHx9&e=M&s=3), QRCODE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 평가하기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