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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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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고려시대의 미술 ·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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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에서 10세기 전반에 걸쳐 동북아시아의 해상무역을 통해 월주요(越州窯)의 청자, 형요(邢窯)의 백자, 장사요(長沙窯)의 황유자(黃釉磁) 등이 중국에서 수입되고 있었다. 선종의 전래와 선종산문의 성립에 따른 다기(茶器)의 보급에 따라 도자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선종사상이 선승들에 의해 널리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서 선종의 수행방법의 하나로서 음다(飮茶)는 매우 중요하게 이해되었다. 이에 따라 차를 담는 다기(茶器)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중국에서 수입된 도자기들이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었지만 차츰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지면서 도자기 제작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고려의 새로운 지배층의 요구에 따라 중국 동남지방의 오월국으로부터 건너 왔을 중국 도자기 기술자들에 의해 도자기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고려도공에 의해 초기청자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새로운 지배세력과 관계가 깊은 서남해안 일대에 고려초기의 요지(窯址)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들 요지는 호남지방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10세기 전반으로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 도자기 만드는 기술이 향상되면서 청자와 함께 백자, 흑자(黑磁)가 토기와 함께 제작되었다. 호남지방에서는 고려도자기의 기원에서 발전에 이르는 10세기 전반에서 11세기에 이르는 초기청자와 흑자 등을 제작하였던 요지군(窯址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서 고려도자기의 모체를 이루는 요람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가마의 분포에 있어 10세기­ 11세기 전반기에 호남을 비롯한 서남해안에 널려 있던 가마군이 점차 전남 강진군 대구면과 전북 부안군 보안면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여 운영되었다. 즉 서남해안에 널려 있던 초기 청자의 제작지가 호남지방의 강진과 부안으로 집약되어 호남은 11세기 후반으로부터 전성기인 12세기를 거쳐 13­14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고려도자기 제작의 중심지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12세기의 뛰어난 각종의 순청자들과 상감청자들은 모두 호남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이다.

고려 귀족문화의 황금기인 12세기 전반에는 고려청자는 고려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감탄하는 뛰어난 비색(翡色)의 순청자가 완성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려청자의 세계적인 명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러한 청자들이 강진 사당리 당전마을의 가마자리와 부안 유천리 요지군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어 고려청자의 전성기에 호남지방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도자의 제작은 자기소(磁器所)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도자기를 별공(別貢)의 공물로서 수납되어졌던 것이다. 소(所)의 토착세력인 소리(所吏)에 의해 도자기가 국가에 수납되었다. 12세기 전반에는 도자기에 대한 공물이 과중하여 도공들이 소를 도피하기도 하였다. 도공들은 소민(所民)으로서 자기소에서 생산된 우수한 도자기를 대부분 공물로써 왕실, 관청, 귀족들이 사용할 도자기로 바치면서 생활하였다. 고려청자의 대표적인 산지인 강진군 대구면 일대는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대구소(大口所)가 있었던 곳으로 고려시대의 자기소가 있었던 소(所)의 하나로 추정된다. 전북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일대에는 낮은 토성이 둘려진 흔적이 있으며 요지가 이 토성 안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어 소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13세기 후반으로부터 4세기 전반에 이르는 동안 원(元)의 간섭 하에 들어간 고려는 원의 부마국으로 예속되어 원세력의 배경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권문세족과 원과의 폭넓은 교류는 고려 자기에 있어서 성격을 변화시키게 되었다. 원을 통한 원대(元代) 도자기와 서역문물 교류 및 고려의 새로운 지배세력의 등장은 고려청자가 가지는 섬세하고 내세지향적인 청자보다는 안정된 조형과 실용성이 강조되는 경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기형(器形)에 있어서 매병(梅甁)이 줄어들고 각이 진 조그만 접시류가 많아졌으며 대접은 저부(底部)가 깊어지고 측면이 편평한 광구호(廣口壺) 등이 만들어졌다. 대접이나 접시의 경우는 구부(口部)가 안으로 말린 내만된 기형이 많아지고, 기벽(器壁)은 두꺼워지며 상감(象嵌)의 문양은 산만한 구도로 되거나 필치가 조잡해지고 동일 문양의 반복 사용으로 도안화되기 시작한다. 원과의 활발한 교류를 가지는 14세기부터 도자기의 실생활화가 추진되며, 그에 따라 도자기의 대량생산이 요구되기 시작한다. 고려말기에 재향중소지주 출신의 신진 유학자들은 성리학을 정신적 지주와 생활이념으로 받아들이면서 검소하고 질박한 생활을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가 도자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14세기 중엽부터 왜구의 집요한 침입과 약탈은 특히 전라도 지역에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시키었다. 세금을 실은 배들이 왜구의 습격을 받아 조운이 막히게 되면서 육상운송이 요청되기에 이르렀고 바닷가 50리 내외의 지역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불안한 상황은 바닷가에 위치한 강진과 부안의 청자산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 청자의 생산지가 폐쇄되고 말았으며, 살아남은 도공들은 내륙으로 가마를 옮기게 되었다. 새로운 신진세력의 등장과 왜구의 노략질로 해안가를 떠나 내륙 곳곳에 가마자리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와같이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내외의 여건 변화와 신진사대부의 등장과 확산에 따라 도자기의 일상생활화가 추진되어 대량생산이 시도되어 가마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어 15세기의 분청사기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도자기는 10세기 전반에 그 제작이 이루어져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에 따라 성숙되고 찬란한 꽃을 피우며 변화해 가다가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모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고려도자기의 성립과 발전, 쇠퇴의 과정에서 호남지방은 도자기 제작의 모체가 되었으며, 초기청자로부터 12­3세기에는 강진과 부안에 집중적으로 운영되어 고려도자기의 꽃인 순청자에서 상감청자에 이르기까지 그 성황을 이루었다. 14세기 말에는 내륙지방으로 가마를 옮겨 조선시대 도자기의 기반을 이루어 한국도자기사에 차지하는 위치가 대단히 크다.(이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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