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군 로고

국가상징 국무회의 알아보기

제2장 고려시대

  • 트위터
  • 페이스북
  • 구글
  • 현 페이지 엑셀로 다운
  • 현 페이지 워드로 다운
  • 현 페이지 인쇄
4차 메뉴 정의
5차 메뉴 정의

1. 무인정권의 성립과 장성

원본파일 다운로드

문치주의에 입각한 고려의 귀족정치는 상대적으로 무신의 사회적 열세를 초래하였다. 무신들은 정치적으로 문신보다 하위에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열세에 놓여 있었다. 응당 무신이 맡아야 할 군사령관직도 문신이 맡는 자리로 되어 있었다. 유명한 강감찬(姜邯贊)은 명장으로 이름이 높은 분이지만 그는 무신 출신이 아니라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간 문신이었다. 윤관(尹瓘)이 그렇고 김부식(金富軾)이 또한 그러하였다. 결국 무신은 천대받는 존재였고 문신에게 부림을 받는 존재였다. 그 때문에 일찍이 현종 5년(1014)에도 최질(崔質)·김훈(金訓) 등의 무신이 주동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킨 일까지 있었다.

이러한 천대는 의종대(1146∼1170)에 극도에까지 달하였다. 의종은 수많은 정자를 지어 거기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환락을 즐겼다. 그를 따라 다니는 문신들이 즐거움을 같이 나누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를 호위하고 다니는 무신이나 군인들의 신세는 비참하였다. 병졸 아닌 당당한 장군들조차도 그들의 호위병 구실밖에 못하였다. 일찍이 무신 정중부(鄭仲夫)가 문신 김돈중(金敦中)의 촛불에 수염을 그을린 적이 있었지만, 또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은 문신 한뢰(韓賴)에게 뺨을 맞는 사건이 발생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무신의 난이 일어난다는 것은 단지 그 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무신난의 또 하나의 원인은 군인들의 불평에 있었다. 군인들은 군역의 담당자로서 군인전(軍人田)을 받아 그 생활이 보장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규정뿐이었고 사실에 있어서는 토지를 거의 갖고 있지 못하였다. 오히려 갖고 있는 토지조차 관리들의 녹봉을 위해서 빼앗긴 일이 있었다. 전쟁뿐 아니라 평상시의 공역에도 흔히 동원되는 그들은 마치 천역의 담당자처럼 천시되었다. 그러므로 일찍부터 군인들의 불평은 자라나고 있었고 또 많은 도망자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불평은 거의 폭발할 지점에 이르고 있었다.

무신의 반란은 의종 24년(1170)에 일어났다. 국왕이 보현원(普賢院)에 갔을 때 호종하던 장수 정중부·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은 군인들에게, "무릇 문관(文冠)을 쓴 자는 모조리 죽이라"고 선동하며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무신과 군인들의 합류는 이 반란을 쉽사리 성공시키었다. 그들은 이어 의종을 폐하고 그 아우 명종을 옹립하였다. 이 난에 김돈중·한뢰를 비롯한 수없는 문신들이 살육됐음은 물론이다. 그 뒤 김보당(金甫當)이 의종의 복위운동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는데, 그가 죽음을 당할 때에 "문관은 모두 공모하였다"고 한 것이 빌미가 되어 앞서 화를 면한 문신들이 또 다시 많이 죽음을 당하였다(명종 3년, 1173). 그 후에 조위총(趙位寵) 등이 무신에 반항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리하여 정권은 문신으로부터 무신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정권을 쥔 이후 무인들은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정치를 요리하고 문신을 대신하여 고위의 관직으로부터 하위의 말직에 이르기까지 관직을 독차지하려 하였다. 그리고는 그 지위를 이용하여 문신들과 마찬가지로 사유지를 확대하여 경제적인 재부를 차지하고 나아가 문객(門客)과 가동(家 )을 무장시켜 군사적인 실력까지도 갖추게 되었다.

처음 정권에 참여한 것은 정중부·이의방·이고 등 무신난의 3거두였다. 이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공동으로 정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의방이 이고를 죽이고 권세를 부리더니 정중부 일파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이후 정중부는 홀로 득세하여 그 위세를 떨치다가 청년 장군 경대승(慶大升)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그리고 경대승 또한 얼마 안 가서 압박감을 느끼는 분위기 속에서 발병하여 죽었다. 이후 경대승을 꺼려 지방에 은신하고 있던 이의민(李義旼)이 상경하여 정권을 독차지하였다. 원래 천민의 신분에서 출세한 이의민은 횡포함이 심하더니 이어 최충헌(崔忠獻)·최충수(崔忠粹) 형제에게 살해되었다(명종 26년, 1196). 무신의 난 이래 20여 년의 짧은 기간에 주마등처럼 무인들의 군상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무신난 이후의 정치적 혼란은 최충헌의 등장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는 자기 파에 속하더라도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가차없이 제거하였다. 최충수나 박진재(朴晉材) 등도 그러한 희생물이었다. 그리고 이같이 자기의 모든 적대세력을 차례로 억압한 끝에 드디어 독재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최충헌은 또한 국왕의 권력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일생 동안에 명종과 희종의 2왕을 폐하고, 신종·희종·강종 및 고종의 4왕을 옹립하였다. 왕위가 완전히 그의 손아귀 속에 있었던 셈이다. 그밖에도 그는 사원의 세력을 억압하고 농민과 노비들의 봉기를 진압하였다. 이처럼 그의 노력으로 닦여진 최씨정권의 기초는 그 아들 최이(崔怡. 崔瑀)의 집권과 함께 더욱 굳어졌다. 무인정권의 기구가 정비되어 갔고 그리하여 최항(崔沆)·최의(崔 )까지 4대 60여 년 동안 계속된 최씨무인정권이 우리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무인정권시기의 위와 같은 격변은 장성지역에도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무신난이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은 명종 2년(1172)에 장성군과 진원현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채 영광군과 나주목의 속현이었던 장성지역에 지방관이 두어짐으로써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장성지역에까지 직접 미치게 되었다. 그동안 나주목과 영광군의 수령을 비롯한 향리 등 다른 군현의 관리 및 지역의 유력자들로부터 이중의 통제와 수탈을 받아야만 하였던 지역 주민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삼계현에는 여전히 감무가 배치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장성지역 주민의 일부는 영광군의 속현 주민으로서 아직도 중앙정부로부터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남아 있었다.

2. 몽고의 침입과 장성의 대몽항쟁

원본파일 다운로드

북아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으로서 성장한 몽고의 가장 중요한 정복 대상은 남쪽 농경민족이었다. 그것은 농경민족들이 지니는 풍부한 생산품이 그 구미를 돋구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금·송과 함께 고려도 몽고의 침략 대상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금나라를 치고 남송과 일본을 정복하기 위한 기지를 구하려는 목적도 몽고가 고려에 침략의 손을 뻗친 하나의 이유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가 몽고와 최초의 접촉을 가지게 된 것은 몽고에게 쫓겨 오는 거란인을 협공하더 때부터였다. 거란인은 금이 망할 무렵 독립하였다가 다시 몽고에게 쫓기어 고려의 국경 안으로 들어 왔던 것이다. 이들은 강동성(江東城)에 의거하였으나 고려는 몽고와 함께 이를 함락하여 버렸다(고종 6년, 1219). 이러한 일이 있은 이후 몽고는 고려의 은인을 자처하며 매년 고려로부터 공물을 취하여 갔다. 그 요구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에 고려는 이에 불응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계기로 고려와 몽고와의 사이는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몽고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고려로부터 귀국 도중 살해된 사건을 구실로 드디어 고종 18년(1231)에 제1차 침입을 하여 오게 되었다.

살례탑(撒禮塔)이 거느린 몽고군은 귀주(龜州)에서 박서(朴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으나 이를 버려 둔 채 수도 개경을 압박해 들어 왔다. 이에 고려가 강화를 청하자 몽고는 다루가치를 서북면에 두고 군사를 철퇴시켰다. 그러나 최이는 몽고와의 항쟁을 결의하고 서울을 강화로 옮기었다(고종 19년, 1232). 이것은 바다를 두려워하는 몽고의 약점을 찌른 것이었다. 귀족들이 강화로 들어감과 동시에 일반 백성들에게도 산성(山城)이나 해도(海島)로 피난케 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항몽정책은 몽고를 자극하여 재차의 침입을 보게 되었다. 비록 몽고의 장군 살례탑이 처인성(處仁城. 龍仁)에서 김윤후(金允侯)가 거느린 처인부곡민(處仁部曲民)에게 살해된 후 곧 물러갔으나 뒤에도 몽고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몽고는 전후 30년 간에 6차례의 침입을 해오기에 이르렀다.

몽고군 침략의 말발굽이 장성지역에까지 이른 것은 제6차 침입 때의 일이었다. 앞서 제3차 침입(고종 22년, 1235∼고종 26년, 1239) 중의 고종 23년과 제5차 침입(고종 40년, 1253) 때에 몽고군 병력의 일부가 현재의 전북지역에까지 쳐들어 왔었으나 노령산맥을 넘지는 못하였다. 그랬다가 제6차 침입(고종 41년, 1254∼고종 46년, 1259) 중의 두 번째 침입 때에 마침내 갈재(蘆嶺) 너머에까지 그 발길이 미침으로써 전라도 전역이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장성지역도 몽고군의 말발굽에 유린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장성지역의 주민들은 입암산성(笠巖山城)에 들어가 몽고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웠다. 처음 조정에서는 장군 이광(李廣)과 송군비(宋君斐)로 하여금 연해안지역의 섬을 방비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선박에 군사 300명을 태우고 영광군을 향하여 내려가던 그들은, 서로 길을 나누어 몽고군을 양측에서 협격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몽고군이 미리 그것을 알아채고 대비하자 하는 수 없이 이광은 섬으로 돌아가고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송군비만 입암산성으로 들어가 몽고군과 대치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송군비는 짐짓 성안의 식량이 다 떨어진 것처럼 꾸며서 노약자 여러 명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자 이에 속아 넘어간 몽고군이 방심한 채 입암산성 아래에 밀어닥쳤고 그것을 노리고 있던 송군비가 정예병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서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다수의 적군을 살상한 끝에 몽고군을 격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송군비의 입암산성 승리는 그의 뛰어난 계략과 지휘의 덕분이었던 것으로 기록에 전한다. 그러나 당시 여러 차례 몽고군에게 시달렸던 다른 지역의 경우 주민들이 자진하여 몽고군에게 항복하는 것이 그리 드물지 않은 실정이었음을 떠올리면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일만은 아닌 듯싶다. 전통시기의 기록이 으레 그러하듯이 모든 것이 전투를 지휘한 송군비 위주로만 남아 있는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 지휘부를 도와 함께 싸워 외적을 물리치는 데 온 몸을 다 바쳤고 또 그러다가 이름없이 스러져 갔을 수많은 장성지역 주민들의 존재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의 분투가 없었던들 그처럼 놀라운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리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지 않을까 여겨지는 것이다.

3. 고려말의 사회와 장성

원본파일 다운로드

고종 45년(1259) 몽고와의 강화를 결정한 고려에서는 이듬해(1260)에 태자 전( . 뒤의 元宗)을 몽고에 파견하여 강화의 뜻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원종 11년(1270)에는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함으로써 몽고에 대한 항쟁을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다. 마침내 고려가 원의 정치적 간섭 아래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고려는 원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80년 가량을 원의 부마·제후국으로 지내야만 하였다. 고려의 왕은 원의 공주를 정비로 맞이해야만 되었고 그 몸에서 난 아들이 원칙적으로 왕이 되었다. 세자는 어렸을 때 북경에 독로화(禿魯花. 質子)로 머물러 있다가 장성한 다음 귀국하여 즉위하는 것이 하나의 통례가 되었다. 또한 국왕이 훙서(薨逝)한 다음 올리는 묘호(廟號)에도 '조(祖)'나 '종(宗)'을 붙이는 대신 '왕(王)'자를 사용하게 되었고 게다가 위에는 '충(忠)'자를 덧붙여서 원에 대한 충성심을 표시하는 뜻을 나타내었다. '짐(朕)'은 '고(孤)'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국왕에 관련되는 용어가 모두 격하되었다. 왕위의 폐립이 원에 의하여 좌우되는 일도 많았다. 정치제도 역시 옛날과 같을 수가 없어 3성(省)이 통합되어 첨의부(僉議府)로 되는 등 명칭의 격하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몇 가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려 국왕은 독립왕국의 군주로서의 지위를 끝내 유지하였다. 무인정권시기의 끈질긴 대몽항쟁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고려에 대한 원의 영향력은 이전의 어느 중국왕조 보다도 막강하였다. 그리고 그에 따라 원의 세력을 등에 업은 채 고려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권문세족(權門勢族)이 출현하는 것은 필연의 추세였다. 이들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정방(政房) 등의 기구를 통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농장과 노비를 소유하여 경제적인 재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이들 권문세족은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일에만 몰두할 뿐 국가의 제도를 통한 지배층 전체의 공동 이익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이들 권문세족의 부정적인 행태를 비판하며 등장한 것이 곧 고려후기의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였다. 이들은 충선왕·충목왕대에 잇따라 개혁운동을 펼쳤으나 번번이 원을 배경으로 한 권문세족의 방해를 받아 좌절하였다. 이들의 개혁이 어느 정도나마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된 것은, 원·명 교체기에 즉위함으로써 원의 정치적 개입을 배제할 수 있었던 공민왕대에 가서였다. 대외적으로 반원정책(反元政策) 대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의 억압이라는 양면성을 띠고 추진되었던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한때 성공한 듯 보이기도 하였다. 신돈(辛旽)으로 하여금 권문세족 출신을 축출하고 문벌이 한미한 자들을 등용하도록 하였으며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에게 빼앗긴 토지와 노비를 그 원래의 소유주에게 반환하거나 해방하여 주게 하였다. 이러한 일은 일반 백성의 환영을 받아 신돈은 성인(聖人)이라는 칭호까지 듣게 되었다. 그러나 권문세족들로부터는 비난을 받았고 권력확대와 방종·방탕에 탐닉하던 신돈이 실각하여 살해되고 이어서 그 자신마저 시해당함으로써 공민왕의 개혁정치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고려말기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시기였다. 위에서와 같은 국내의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에 더하여 이민족의 침입마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노략질이 그것이었다. 특히 고려말·조선초에 걸쳐 반세기 가량 지속된 왜구의 침탈이 우리나라에 끼친 피해는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천도론의 대두와 국가재정의 악화 등 중앙의 정치와 경제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으려니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피난·유이민을 발생시킴으로써 연해안 지역을 무인지경으로 화하게 하였다. 섬과 연해안 지역에 소재하던 군현의 치소가 내륙으로 이동하고 각 지역별 거주민의 구성이 바뀌었던 것도 모두가 그 때문이었음은 물론이다.

장성지역도 또한 이상에서와 같은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중앙의 정치적 혼란기에 이 지역으로 낙향한 인물도 있었다고 하며 우왕 2년에는 왜구의 침탈로 피해를 입었음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장성지역에 토성 이외의 내성·속성이 늘어나고 나아가 그밖의 성씨집단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 또한 그로부터 말미암은 바가 컸을 것임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변동명)

QR CODE
  • 왼쪽 정보무늬 사진을 휴대전화에 인식시키면 자동으로 이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 이 정보무늬는 『제2장 고려시대 80번』의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제2장 고려시대 페이지 바로가기 주소(https://www.jangseong.go.kr/q/ezIyODB8ODB8c2hvd3x9&e=M&s=3), QRCODE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