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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입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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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하음봉씨(河陰奉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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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음봉씨의 시조는 우(佑)로 고려 인종때 정당문학·좌복야라는 재상의 지위에서 공을 세워 강화의 하음백에 책봉되었다. 그의 후손 유례(由禮)도 정당문학을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자 충절을 지켜 은둔했으며 그 아들 집(楫)은 사관을 지내다가 아버지를 따라 은거했는데 병조판서를 주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여해(汝海)는 성삼문·이개 등과 교류했으며 박팽년과는 남매간으로 사육신 등과 의기가 투합했는데 사옹원 별좌로 있을 때 수양대군의 찬탈을 만나 단종복위거사에 참여했다가 죽음을 당하자 그 아들 안국(安國)이 화를 피해 삼서면 보생리에 몸을 숨겼다. 그의 부인은 연산군의 사화를 피해 백산에 은거한 경주인 현감 이재인의 딸이며 그의 사위는 지지당 송흠이다. 안국은 단종이 승하하자 통곡하면서 충절을 지켰는데 보생리 생동에 있는 만곡사에는 여해를 모셨고 그의 후손들로 석호는 전남도 보사국장·영암군수·광양군수를 지냈고 기수는 경북 보사국장·울진군수를 지냈으며, 태열은 중부 국세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2. 고령신씨(高靈申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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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신씨의 시조는 성용(成用)으로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여 군기감을 지냈는데 그의 선계는 대대로 고령의 호장을 지내면서 고령의 토착세력이었던 것 같다. 시조의 7대손인 장은 5형제를 낳았는데 셋째가 숙주요, 다섯째가 말주다. 장성에 고령신씨가 언제 입향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귀례공 말주의 후손들이다. 귀례공의 손자인 공제(公濟)는 호를 이계(伊溪)라 하였는데 공의 손자가 응하(應河)로 4형제를 두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응하는 아들 술(術)·호(淏)·결(潔)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북상하다가 과천에서 순국하였다. 이들의 묘가 모두 북이면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장성에 인연을 가졌고 장성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시조로부터 15세손이요 응하의 증손인 숙(淑)의 대에서 인것 같은데 대체로 1600년대 중반기나 된다. 그 후손들이 북이면에 살면서 번창해 갔는데 1919년 3·1운동 때 모현리 만세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해 국호·상호·태식·경식 등이 옥고를 치르고 훈장을 추서받았으며 후손들로 국회의원을 지낸 규식(부안),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인 태호, 전남대 교수인 남수, 국제로타리클럽 총재인 흥수, 광역광역시 교육청서기관인 복수 등이 활동하고 있다.

23. 문화유씨(文化柳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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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씨의 시조는 차달(車達)인데 고려태조 왕건을 도와 공신이 되고 대승에 올랐다. 시조의 14세손인 양(亮)은 이성계를 도와 대사헌과 참찬을 거쳐 우의정으로 승차하였고 17세손인 도장(道長)은 단종대에 통정대부에 올랐으나 일족인 유성원이 단종 복위에 화를 입자 벼슬을 버리고 광주에 은거했다. 22세손인 사경(思敬)은 임진왜란을 당해 의병을 일으켰고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으로 있다가 향리에 은거했다. 문화유씨가 광주에서 장성에 입향하여 삼서에 자리잡은 것은 27세손인 덕신(德新)에서 부터로 그의 아버지 문규(文奎)의 묘가 삼서 대곡에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의 증손인 기홍(基泓)은 흉년을 당해 빈민을 구제하고 곡식을 나누어 주위의 칭송을 받아 조정으로부터 통정대부를 제수받았고 가선대부까지 승차하였다. 그의 후손들이 삼서와 삼계에 100여호 살고 있으며 다른 계파인 듯한 문화유씨가 북이면 모현리에 많이 살고 있는데 상설, 상순, 상학 등은 모현리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삼서의 문화유씨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우선 전남대교수, 근선 조선대사무국장, 제철 광주일보논설위원 등이 있다.

24. 강릉유씨(江陵劉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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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유씨는 중국에서 건너온 성으로 시조는 전(筌)인데 고려에서 경북 영일에 정착했는데 그의 12세손인 창(敞)이 조선 개국공신 2등으로 옥천(강릉)에 봉군되어 강릉유씨로 분파하였다. 창의 현손인 세분(世 )은 문종 원년(1451)에 출생하여 음서로 진원현감으로 재직하다가 세조의 찬탈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장성의 사동에 은거하면서 화초와 시문으로 벗을 삼았다. 입향조 세분의 손자인 덕문은 임진왜란을 당해 장성의 의병인 남문창의에 가담하여 활약한 공으로 상호군을 제수받았다. 북이면 오월리 송산에는 송계서원이 있어 강릉유씨의 파조인 유창을 배향했고 그 후손들이 장성일원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25. 경주이씨(慶州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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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의 시조인 표암공 알평(謁平)은 신라 경주의 6촌의 촌장으로 6촌장의 수장이 되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경주로 사성을 받았다. 시조의 36세손인 거명(居明)을 중조로 하여 대를 이어 번창했는데 분파만도 원주·재령·아산·가평·평창 등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국가에 공헌했다. 특히 공민왕을 즉위시킨 제현은 일찍이 원의 수도에 설치된 학문연구소인 만권당의 주인공으로 국제간의 학문연구에 공이 컸으며, 고려에 돌아와 네 번이나 수상을 역임하면서 정치·문화·역사에 크게 공헌했다. 제현의 5대손인 재인(在仁)은 장수현감을 역임했고, 김종직과 교류했는데 종손자인 원(재사당)이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자 삼계면 백산의 산중으로 은거하여 정자를 짓고 제자들을 길렀으며 모시고 온 익재의 영정을 모셔 사당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가산서원이 되었다. 가산서원에는 익재 제현과 오성 항복, 그리고 현감공 재인을 배향했으며 그의 후손들이 전국에 분산 거주하고 있는데 장성에서는 가산·한실·월령 등에 60여호가 살고 있다. 재인의 아들로 공신은 순천부사, 공형은 이조정랑, 공준은 진사, 공권은 사정을 지냈으며 12세손 집문(集文)은 진사를 지냈고, 14세손 규철(圭哲)은 간재 전우의 문하에 출입한 학자이다. 그의 후손으로 국민대 교수 상보, 전남대 교수 상식, 장성군의원 일현, 전남도 내무국장을 역임한 관종과 제일은행 이사를 역임한 상천, 특허청 서기관 상용, 광주서부소방서장을 지낸 정희 등이 있다.

한편 성암공파는 성암공(誠菴公: 仁挺)의 현손인 석(碩)이 고려가 망하자 충절을 지켜 나주 문평으로 낙남했는데 그의 증손인 우평(牛平)이 장성현감을 지냈다. 현감의 11대손 기원(基元) 형제가 1798년에 동화면 송계리에 입향했는데 후손 근우(瑾雨)는 큰 학자며 그의 아들 상용은 현재 장성문화원장이다. 또한 같은 성암공파인 한주(漢柱)가 300여년전에 나주에서 삼계면 우봉에 입향하여 인근인 사선동까지 자손들이 살고 있는데 그의 후손인 기우(基雨)는 삼계중고등학교 건립하여 기증한 독지가로 유명하고 그 일가들이 우봉을 중심으로 집단거주하고 있다.

26. 광산이씨(光山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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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이씨의 시조는 종금(宗金)으로 신라왕족인 경주김씨의 분종이니 종금이 고려현종대 거란의 침략을 강감찬과 함께 격퇴해 큰 공을 세워 광산군에 봉해지고 광산이씨로 사성되었다. 장성에 입향한 사람은 시지(時止)로 아버지는 가선대부로 호조참판을 지낸 매(枚)인데 그는 대과에 급제하여 많은 관직을 거쳤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는데 만년에 광주에서 삼계면 상도리 죽탄마을로 옮겨서 살았다. 그의 장자인 윤종(胤宗)은 성종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수령을 거쳐 전라·충청병사를 역임했고 가선대부로 승차하여 호조참판을 맡았는데 충직하고 성실하여 왕이 죽탄마을 앞들을 하사하여 어사이평(御賜李坪)이라 불렀는데 둘레 20리의 땅이었다. 그의 후손들이 계속 벼슬을 하였고 대를 이어 사패지를 관할하였는데 진원면 진원리에 40여호, 죽탄마을과 장성읍 일원에 20여호가 살고 있으며 후손으로 남진 교수는 조선대, 도진 교수는 순천대에 있으며 병석은 교육부 이사관을 역임했고, 해인은 감사원 부이사관으로 봉직하고 있다.

27. 광주이씨(廣州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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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의 시조는 자성(自成)인데 칠원에서 세거한 호족이다. 그 후손들이 신라의 벼슬을 맡아 살다가 고려에게 신라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고려 태조의 미움을 사서 회안(광주의 소속)의 호족으로 좌천되었다. 그의 9세손 원령(元齡)이 공민왕대 문과에 급제하여 중용되었으나 신돈의 종횡을 공박하여 그 화를 피했다가 복직되었다. 원령의 증손들이 극배·극돈·극감 등 16명이 영의정 등의 고관대작에 올라 현달했는데 그의 후손들이 보성·광주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광주이씨가 언제, 어떻게 장성에 입향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말의병항쟁으로 처형된 범진도 그 후손인 것 같으며 삼서면 대도리에 35호나 집단거주하고 있다.

28. 양성이씨(陽城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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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이씨의 시조는 수광(秀匡)으로 고려 문종때 송의 사신으로 가서 공을 세워 양성군에 책봉되어 그 후손들이 대를 이었다. 양성이씨는 고려와 조선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장성에 입향한 사람은 증(增)으로 호는 암계(岩溪)요, 그 아버지는 감찰을 역임한 정양(挺陽)이다. 그는 대를 이어서 경기도 진위에서 살았는데 임진왜란을 당해 아버지와 가족이 함께 난을 피하여 함평의 복만동(현재는 광산 삼도)으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 수년간 살다가 안정을 찾지 못해 남면의 검정촌으로 이동하여 정착했는데 대개 1600년부터 1620년 사이의 일이다. 양성이씨는 남면 행정리에 50여호가 집단거주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있는데 그 후손으로 광주시민속박물관장을 역임한 종일, 육군소장 연신, 전남대교수 종연 등이 있다.

29. 인제이씨(麟蹄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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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이씨의 시조는 원철(原哲)인데 그는 고려시대에 중추원 부사를 역임했고 조선의 세종대에 견의(堅義)는 문과에 급제하여 원종정사 훈관으로 보문관 직제학을 지냈고 남원군에 책봉되었다. 또한 영조대에 정필(廷弼)은 사용으로 충효가 뛰어났으며 후손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인제이씨가 언제 장성에 입향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500년이 된다고 하며 성균관 사예인 견의의 어머니가 강릉유씨인 것으로 보아 견의의 아버지인 백(伯)이 처가를 따라 장성에 입향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견의의 자손들이 이어 벼슬하였으나 번창하지 못해 장성에 20여호가 살고 있다.

30. 전주이씨(全州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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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는 한(翰)으로 신라 문성왕 때 사공으로 전주에 살다가 18세손 안사(安社)가 수령의 횡포에 반항하여 삼척으로 도피했는데 다시 함길도 영흥으로 이주했다. 그의 손자인 자춘(子春)이 공민왕 때 공을 세워 고려의 사복경이 되었다. 그의 아들 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도전·조준 등의 추대로 조선왕조를 개창했다. 장성에서 세 번째로 많이 거주하고 있는 전주이씨는 종파가 많아 그 유래를 모두 파악할 수 없어 자료가 입수된 종파만 기록할 수밖에 없다.

ο 장성읍 백계리 진남군파 : 정종의 6남인 진남군파로 그의 8대손인 덕하(德夏)가 진원면 고산리에 입향했고 그의 증손인 인영(寅榮)이 백계리로 이주해 그의 후손들이 장성읍에 100여호 살고 있으며 용중은 해남현감을 지냈고 봉구는 군수를 지냈으며, 진환은 장성문화원장을 지냈다.

ο 북이면 백암리 양녕대군파 : 양녕대군의 15대손인 상선(相善)의 처인 진주강씨가 1894년의 난리(동학농민혁명)를 피해 자녀들을 거느리고 정읍에서 백암으로 은거했는데 그의 후손들이 장성·광주·서울 등지에 30여호 거주하고 있으며 병직은 장성문화원장을 역임하여 향토문화개발에 공헌했고 병래는 조선대 교수로 있다.

ο 서삼면 완풍대군파 : 영광에 살던 완풍대군(元桂)파로 유명한 실학자이며 태천군수를 역임했던 윤성(潤聖)이 안평리 구암에 입향했다가 서삼면으로 이거했는데 그 후손으로 성헌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ο 그밖에 효령대군파는 장성에 분산거주하고 있는데 후손으로 만수는 군의회부의장을 역임했고 성립은 군의원을 지냈으며 덕흥대원군파로 유규는 군의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31. 함평이씨(咸平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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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는 언(彦)으로 고려 광종 때 대장군으로 공을 세워 함평군으로 책봉되었고 그의 고손 광봉(光逢)이 충숙왕 때 삼사사로 공을 세워 함풍부원군으로 봉해져 함평이씨라 불렀는데 장성에 입향한 종파가 많아 삼서와 동화에 거주하는 함평이씨들을 기록하겠다.

ο 두동·가산의 현령공파 : 시조의 12세손 흥매(興枚)가 함평군 대동면 아차동에서 가산에 터를 잡았고 그의 아들인 세화(世華)가 1540년경에 두동사에 이주했다. 두동에는 현령공 조(稠)와 그의 5세손으로 왜란 때 순국한 분(芬)을 배향했다. 그의 후손들이 두동에 50여호, 가산에 10여호 살고 있으며 영석은 광주대 교수, 송범은 서울시경 수사과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ο 수양·서재의 현령공파 : 현령 조(稠)의 13세소인 유집(儒集)이 함평군 학교면 복천리에서 1794년에 입향하여 서재에 살게 되었으며 1805년에 수양으로 이주하여 200여년간 살면서 200여호까지 번창했으나 현재는 각지에 산거하고 있다. 후손으로 계학은 전남대 교수·호남대 교수, 준범은 고려대 총장, 석범은 고법부장판사를 거쳐 변호사로, 상범은 지법부장을 거쳐 변호사로 활동중이며, 재창은 미국에서 변호사로, 재갑은 노동부 국제혁력담당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ο 이문의 기성군파 : 시조의 16세손 몽린(夢麟)이 처가(하음봉씨)를 따라 1580년에 삼서면 보생리에 입향했는데 그는 이순신의 휘하에서 큰공을 세우고 순국했으며 그의 후손들이 이문에 거주하고 있고, 준범은 판사를 거쳐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ο 동화면 구림리 통안·구산의 함평이씨 : 시조의 24세손인 경화(敬華)가 1670년경에 영광군 대마면 남산리에서 이주하여 현재 통안에 25여호가 살고 있고, 구산에는 1790년에 입향해 후손으로 칠헌(七憲)이 있는데 그는 한말의병으로 활동했다.

ο 동화면 가정의 함평이씨 : 시조의 25세손인 익빈(益彬)이 남산에서 1644년경에 용정리의 가정에 이주하여 35여호가 살고 있는데 그의 후손으로 기수는 내무부 지방국장·서울시 부시장·경남지사를 역임했고, 재두는 전남도 회계과장을 지냈다.

32. 나주임씨(羅州林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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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임씨의 시조는 비(庇)로 고려 충렬왕때 대장군을 지냈는데 그의 후손인 해남감무를 지낸 탁(卓)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나주 회진에 은거하면서 회진임씨라 부르다가 나주임씨로 부르게 되었다. 탁의 5대손인 평(坪)이 조선왕조에 벼슬하기 시작했고 그의 아들 붕(鵬)이 조광조의 문인으로 활동했고 그 손자인 제(悌)는 풍류시인으로 유명하다. 나주임씨가 장성에 입향한 것은 1703년부터 3년간 장성현감을 지낸 세량(世良)으로 부터인 것 같으며 그 후손들은 남면 삼태리에 40여호가 집단거주하는 등 남면의 월곡리, 동하면 가정리, 황룡면 중동 일대에 180여호가 살고 있다. 그의 후손들로 광행 보해양조회장, 권택 영화감독, 광원 서울대교수, 종태 공주대교수, 채국 변호사, 군의원을 지낸 택만 등이 있다.

33. 조양임씨(兆陽林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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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임씨의 시조인 세미(世味)는 평택임씨의 분파로 고려말에 삼정승에 올랐는데 정치적 혼란을 피해 보성의 조양(조성)에 은거하여 조양임씨라 했다. 시조의 8세손인 처의(處義: 호는 栗隱)는 영조 30년(1758)에 남원을 거쳐 진원면 율리(밤실)로 은거하여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다. 입향조인 처의의 선조는 대대로 벼슬을 하였으니 10대조는 병조참판, 9대조는 울산부사, 6대조는 첨지중추부사, 고조는 통덕랑을 하였지만 깨끗한 마음과 산수를 즐기는 고상한 품격을 지녀 벼슬을 단념하고 장성땅에 자리 잡았다. 그 후손들은 진원면 율곡리의 밤실을 비롯해 장성지역에 30여호가 살고 있으며 후손인 우진은 광주광역시 기획관리실장(이사관)과 산림청 서기관을 지낸 형진 등이 있다.

34. 평택임씨(平澤林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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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임씨의 시조는 팔급(八及)으로 당에서 동으로 건너온 사람인데 그를 원조(原祖)로 삼고 시조는 세춘(世春)으로 고려말에 세자전객령을 지냈다. 나주임씨를 제외한 모든 임씨들이 평택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데 장성의 평택임씨는 삼서면 유평리에 25호, 진원면 신정리에 19호가 살고 있고 장성읍 덕진에 집단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삼서나 진원의 평택임씨가 언제부터 살게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삼서에 있는 계산사에는 환춘·두춘·흥진·화진을 배향하고 있는데 두춘과 화진이 의병활동에 크게 공헌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후손인 것 같다. 또한 장성읍 덕진리에 입향한 평택임씨는 300여년전에 영석이 장성에 거주하기 시작하여 그의 후손들이 장성읍을 중심으로 집단거주하고 있다.

35. 경주정씨(慶州鄭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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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정씨의 시조는 지백호(智伯虎)로 경주의 6촌 촌장인데 그 후손들이 신라를 거쳐 고려에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그 후손 진후(珍厚)가 고려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며 월성(경주)군에 봉해졌다. 경주정씨가 언제, 어떻게 장성에 입향했는지 알 수 없으나 진원면 상림리에 32호나 살고 있다.

36. 금성정씨(錦城鄭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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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정씨는 하동정씨 평장공(平章公) 도정(道正)의 후손이다. 석숭(碩崇)을 1세로 하여 7세손 금성군(錦城君) 성(盛)을 시조로 분관되었다. 성(盛)은 충숙왕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금성으로 이거하여 살았는데 왕의 부름을 받아 공을 세워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이르렀고 금성군에 책봉되었다. 12세손인 충신(忠信)은 광주출신으로 임진왜란·이괄의 난·정묘호란때 큰 공을 세워 금남군에 책봉되었는데 그의 장자 반(주부)의 후손들이 진원면 학전리·진원리와 남면 월곡리에 30여호 거주하고 있으며 후손인 희영은 판사로 활동하고 있다.

37. 나주정씨(羅州丁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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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정씨의 시조는 압해정씨의 시조인 덕성(德盛)으로 당의 문종대 대승상을 지내다가 직소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서 신라 문성왕때 신안군 압해로 유배되어 압해정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장자인 열도(烈道)는 영광정씨가 되고, 둘째인 응도(應道)가 공이 있어 금성군에 책봉되어 나주정씨가 되었는데 그의 후손인 윤종(允宗)을 1세라 한다. 나주정씨가 장성에 입향한 것은 고종 12년(1875)에 영화(永和)가 나주 삼포에서 장성읍 성산리에 이주한 때부터다. 그런데 영화의 14대조인 극륭(克隆)은 단종때 사관을 지내다가 세조의 찬탈을 보고 충절을 지키려고 나주 삼포로 낙향했다. 영화는 4형제를 낳고 성산리와 영천리에 거주하였는데 둘째인 경섭(暻燮)은 채균·채홍·중대 등 3형제를 두었다. 그중 채균은 강진군수·곡성군수·광주부시장을 역임했고, 향토문화개발협의회를 창설하여 향토문화발전에 공헌했고 중대는 광주시 도로과장을 거쳐 서구청 도시국장으로 있다. 그의 일족 21세대가 장성을 비롯해 광주·서울 등지에 분산거주하고 있다. 또다른 나주정씨는 삼계면 발산리와 삼서면 석마리에 50여호가 집단거주하고 있다.

38. 진주정씨(晉州鄭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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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씨의 시조는 예(藝)인데 그는 경주의 육촌장인 지백호의 후손이므로 경주정씨의 분파다. 시조 예는 고려 태조때 문하시중을 했으며 그 후손들이 고려에 봉직하다가 공민왕대에 이오(以吾)가 대제학을 지냈으며 온(溫)은 창왕대 대사헌을 역임했는데 조선왕조가 창립되자 불사이군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지리산 청학동에 은거했다. 또한 분()은 단종때 우의정을 하다가 수양대군에게 김종서와 같이 화를 입었는데 진주정씨가 언제, 어떻게 장성에 입향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남면 삼태리에 있는 경현사(景賢祠)에 온이 배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후손들이 장성에 살게 된 것 같다.

39. 하동정씨(河東鄭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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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정씨의 시조는 도정(道正)이다. 그의 9세손인 지(地)는 도원수며 해군을 처음 창설했고 왜구격퇴에 공이 컸으나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광주에 은거하여 충절을 중히 여겼다. 그의 아들 경(耕)은 벼슬길에 올라 7도관찰사를 역임했으며 손자인 종(種)은 이시애난을 평정하여 동평군에 봉해졌다. 동평군의 3남 중 둘째인 운(耘)은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에 이르렀는데 그의 아들인 순(恂)은 세조 5년(1459)에 태어나 성종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열현감을 지냈다. 연산군의 폭정을 만나 벼슬을 그만두고 고창으로 은거했다가 10여년 후에 장성 삼서의 화산에 이주하여 배나무 수 백주를 심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학을 지도했으니 1500년초였을 것이다. 공의 아들인 화암(華巖) 사평(思平)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연에 파묻혀 시문을 공부하면서 후학을 지도했다. 그리하여 삼서의 하동정씨는 500여년 동안 대를 이어가면서 후손들이 번창하여 삼서면 금산리에 30여호, 북일면 문암리에 19여호가 살고 있으며 후손들로 전남대시설과장을 역임한 인규, 시카고대학교수인 준기 등이 활동하고 있다.

40. 옥천조씨(玉川趙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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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조씨의 시조는 장(璋)으로 고려시대에 문하시중을 지냈는데 그의 증손 원길(元吉)은 공양왕 대 시중 겸 전공판서를 지내다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있자 아들 유(瑜)와 같이 순창(옥천)에 내려가 충절을 지켰다. 유는 순창에 은거했다가 뒤에 순천 겸천(순천시 주암면 죽림리)으로 옮겨 살았고, 그의 아들인 숭문과 손자인 철산은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고 증손인 경은 8살인데도 유배를 당했다. 순창에서 살던 옥천조씨가 장성에 입향한 것은 22세인 연성(淵聖) 때였으니, 그는 고부에서 발생한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여 장성으로 피신하여 진원의 고산에서 살게 되었으니 1894년의 일이다. 연성은 그곳에서 송사 기우만의 제자가 되었고 그곳의 토착세력인 서산정씨와 결혼하여 그 후손들이 그곳에서 번창하게 되었다. 후손으로 경종은 의정부에서 종합병원인 국민병원 이사장을 지내면서 많은 사회사업에 헌신하고 있으며, 홍훈은 서울 강서구의회의장을 역임했다.

41. 한양조씨(漢陽趙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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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의 시조는 지수(之壽)로 중국에서 건너와 고려에서 첨의중서사를 역임하고 용진에서 세거했는데 한 때는 원에 귀부하기도 했으나 고려말에 이성계를 도와 우의정을 지낸 영무(英茂) 등도 있고 우의정을 지낸 연(涓)도 있으며 중종때 대사헌으로 도학정치를 추구한 광조(光祖)도 있다. 정암 광조가 기묘사화로 화를 입자 그의 4종제인 광성(廣成)이 화를 피해 나주로 은거했고 그의 증손인 사신(士臣)이 참봉을 지낸 후 죽자 그의 부인인 여양진씨가 아들 우(瑀)를 데리고 북일면 문암리 서우실에 이거하여 그 후손들이 수십호가 살고 있다. 또한 선조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로 상주목사를 역임한 찬한(纘韓)의 후손들이 문암리 제암에 살고 있으며 찬한은 추산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는 영광·장흥·장성군수를 지닌 항규(恒奎) 등이 있다.

42. 영양천씨(潁陽千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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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천씨의 시조는 만리(萬里)로 임진왜란때 명의 장수로 공을 세운 후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영양천씨가 언제 장성에 입향했는지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으나 남면 분향리에 40여호가 살고 있다.

43. 수성최씨(隋城崔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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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최씨의 시조인 영규(永奎)는 본래 신라왕족으로 고려 원종 때 보문각 대제학을 지낼 때 수원이 소란스러워 자청하여 그곳에 달려가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풍속을 순화시켜 그 공을 인정받아 최씨를 사성받고 수성(수원)백에 책봉되었다. 그의 손자인 순(淳)은 세조대에 벼슬을 그만두고 나주로 은둔했으며 그의 증손인 악궁(樂窮)은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임진왜란 때 의병에 참가하여 5남 희량은 흥양현감으로 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고 3남 희급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진·연·선· 등 3형제가 김천일 의병대에 가담하여 희급과 연은 전사하고 진과 선은 살아 돌아와 조부의 묘가 있는 삼계면 부성동에 아버지 희급을 모시게 되었으니 그때부터 장성에 입향한 것 같다. 입향조인 연의 아들인 인현은 무과에 급제하여 이괄 난을 토벌할 때 공을 세웠다. 수성최씨가 장성에 입향한 것은 1600년경이니 400년이 넘는 동안 그 후손들은 부성동에 200여호나 살고 있으며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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