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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입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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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장흥고씨 (長興高氏)
  • 2. 상산김씨(商山金氏)
  • 3. 황주변씨(黃州邊氏)
  • 4. 장성서씨(長城徐氏)
  • 5. 신평송씨(新平宋氏)
  • 6. 청송심씨(靑松沈氏)
  • 7. 철원주씨(鐵原周氏)

1. 장흥고씨 (長興高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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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고씨의 시조는 탐라국왕 을나(乙那)인데 후손인 말로(末老)가 고려 태조에 협조하여 그 아들들이 고려왕조에서 크게 활약했다. 고려말에 증연이 홍건적 토벌에 공을 세워 장흥백(長興伯)이 되었는데 그의 증손자인 협(協)이 고려가 망하자 장성 삼계에 숨어 살아 장성에 입향한 것이다. 그 후 협의 손인 상지가 자라꿈을 꾸고 7형제를 낳았는데 넷째인 자검이 운을 낳았으니 그가 기묘명현이며 광주로 옮겨살면서 의병장 경명을 낳아 광주와 담양에 후손들이 번창했다. 막내인 백신이 7형제를 낳아 그의 후손들이 삼계면 능성리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데 100여호나 된다. 후손으로 광주광역시 문화관광국장 희탁, 장성·영암군수를 역임한 경주, 장성군의원 광준, 인천교육대 교수 경석, 목포과학대학 교수 광태, 국정원 이사관 광문 등이 있다.

2. 상산김씨(商山金氏)

상산김씨의 시조는 신라종실의 후손인 수(需)로 상주에 대대로 살아 상산군으로 봉해졌다. 그의 후손인 충(忠)은 삼별초 난을 평정하고 일본 정벌에 공을 세워 오성군(筽城君: 오성은 영광의 옛 이름)에 봉해져 현재의 삼계면 발산에서 살게되어 장성에 입향한 것이다. 충의 증손자인 운보(云寶)와 신보(臣寶)는 무장으로 고려왕조에서 활약하다가 이씨왕조가 개창되자 장성에 은거했다. 그런데 큰 집인 운보에는 법생(法生)·덕생(德生)·우생(佑生)이 있었는데, 셋째인 우생은 손천부사를 지냈고 세종대 활약하다가 단종이 화를 입자 고향에서 자결했다. 법생의 후손인 형진(亨進)은 왜란이 일어나 조헌의병대에 가담하여 옥천에서 순국해 종용사에 배향되었으며 수산사(首山祠)에 모셨다. 상산김씨는 삼서면 수양리, 두월리 월산, 삼계면 월연에 집단거주하며 준호 서울대교수, 용출 부장판사 등이 그 후손이다.

3. 황주변씨(黃州邊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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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변씨의 시조는 중국의 망명객 여(呂)로 황해도 황주에서 세거했는데, 그는 고려 고종때 상장군으로 태천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황주로 본관을 삼았다. 황주변씨가 장성에 입향한 것은 사정공 정(靜)인데 그는 왕실과 외척이 되어 고려말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그것을 피해 장성에 은거하면서부터였다.
정의 4대손인 이중(망암)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풍기군수를 거쳐 임진왜란 때는 전라도 소모사가 되어 병력 6천명을 얻고 화차 40량을 만들어 도원수 권율에게 주어 행주대첩을 거두었다. 그는 소모사, 조도사를 하면서 군병과 군량을 조달했고 화차를 발명하여 행주대첩을 이루었으나 시기하는 사람이 많아 벼슬이 올라가지 못하고 자주 바뀌었다. 그는 장성의 봉암서원에 배향되었고 그의 아들인 경윤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역임했으며 광해군의 폐모에 반대했고 현손인 휴 등이 있다. 그리고 일가나 후손들도 많은 학자와 관리들이 배출되었고 의병으로 활약한 각원, 독립투사며 전남대 사학과 교수인 극, 민족운동가 순기·진설·진풍 등이 있고, 국회의원을 역임한 진갑, 2대 도의원 을봉, 현도의원 선의 등의 정치인과 한국고문연구회장인 시연 등이 있으며 법조인으로 목포지청장을 역임한 화석이 있다.

4. 장성서씨(長城徐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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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서씨의 시조인 능(稜)은 고려 고종대 시중을 지내고 장성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장성에 정착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성을 본관으로 삼았는데, 서삼면 모암리의 모암서원에 배향되었고 북일면 성덕리의 용전사에도 배행되었다. 절효공 능은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도 감동하여 어머니의 병을 낳게 했다는 삼강행실도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있다. 장성서씨는 장성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이웃고을인 정읍군 이평면 마항리에 45호가 살고 있다.

5. 신평송씨(新平宋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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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송씨의 시조는 구진(丘進)으로 여산송씨에서 갈려 나왔는데 고려가 망하자 장성 삼계로 은거한 구(龜)가 입향조이다. 그의 증손자인 지지당 흠(欽)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하여 고향에 돌아와 자손과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의 문하에 양팽손·양응정·정철·나세찬·송순 등이 유명하다. 그는 중조반정이 성공된 후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병조·이조판서, 좌참찬을 역임한 후 고향에 은거했는데, 청백리로 표창을 받았으며 89세로 일생을 마쳐 호남학파의 형성에 큰 공을 세웠다. 그의 후손들은 삼계면 주산리에 180여호, 발산리에 38여호가 살고 있으며 인성 전남대교수, 변호사인 현규 등이 그의 후손이다. 그리고 흠은 삼계면 수옥리에 있는 수강사(壽岡祠)에 배향되었다.

6. 청송심씨(靑松沈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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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심씨의 시조는 홍부(洪孚)인데 그의 4세손인 덕부는 왜구토벌에 공을 세웠고 공민왕때 중흥공신이 되어 청송백(靑松伯)에 봉해져 청송심씨가 되었다. 청송심씨가 장성에 입향한 것은 연(涓)의 아버지인 계년(繼年)이 조선왕조 개창후에 남면에 은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연은 그후 벼슬길에 나아가 태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을 지냈고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또한 우신은 삼서출신으로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표의장군이라 칭하고 진주성을 사수하다 순국하였다. 남면 마령리의 양계서원에 덕부, 계년, 연 등이 배향되었고, 삼서면 유평리의 표의사에 우신이 배향되었으며 집단거주지로는 남면 마령에 11여호와 삼서면 수해리에 35여호가 있다. 그리고 후손으로 광주고검장과 소청심사위원장·총리실행정조정실장을 역임한 상명과 광주고법원장을 지낸 의섭 등이 있다.

7. 철원주씨(鐵原周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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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주씨의 시조는 승광(承光)인데 그는 당나라 중종때 문하시중으로 있다가 난을 피해 신라로 망명했는데 신라 효소왕이 극진하게 대우하여 철원을 식읍으로 하사해 본관을 철원으로 했다. 시조의 장자인 행검(行儉)이 성덕왕대에 통문박사의 칭호를 받고 중국과 문물교류를 추진하다가 모함을 받아 삼계면 수옥리 옥천동에 유배되어 이곳에 정착했으니 장성에 입향한 성씨들 가운데 그 유래가 가장 오래되었다.
그후 철원주씨는 고려와 조선의 천여년동안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는데 명옹(命雍)은 고려말에 왜구토벌로 삼계군에 봉해졌으며, 봉(封)은 병조좌랑을 역임하고 임진왜란을 당해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행주대첩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순국했으며, 규(圭)는 문과에 급제하여 시간원 좌사간으로 있다가 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 의병대에 가담하여 순국했다. 후손들은 삼계면 수옥리에 65여호가 살고 있고 담양·영광·고창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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