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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입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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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곡부공씨(曲阜孔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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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부공씨는 공자를 시조로 그의 54세손인 소(紹)가 노국공주를 배행하여 고려에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어 우리나라 공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공씨가 장성에 입향한 것은 직장(直長)을 한 인(麟)으로 이곳에서 명종12년(1557)에 아들 기우(奇宇)를 낳았다. 기우의 나이 36세가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을 살육하자 비분강개하여 복수할 뜻을 가지고 있다가 옥천에서 중봉 조헌이 의병을 일으키자 가동과 마을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조헌의 의병대에 가담하여 공주부근에서 갑자기 적을 만나 분전하다가 순국했다. 나라에서는 사헌부 지평을 증직했고 공씨의 일족들은 장성일원에 90여호가 되며 후손으로 창덕은 4대전남도의원을 역임했다.

2. 행주기씨(幸州奇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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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기씨의 시조인 우성(友誠)은 준왕의 49세손이며 백제 온조왕대 시중을 했다 한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크게 활약한 건(虔)은 세종대 지평이 되었고 전라감사, 개성유수, 대사헌을 역임했는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려 절개를 지켰다. 그의 증손으로 5형제가 있는데 다섯째인 준(遵)은 호를 복재라 하고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를 지냈으나 기묘사화로 화를 입었다. 이에 형제들이 지방으로 은거했는데 둘째인 원(遠)이 장성 황룡의 아치실로 들어와 살았으니 그가 장성의 입향조요 그의 동생인 진(進)은 임곡의 너부실로 은거하여 대승을 낳았다. 원의 후손들로 효간·효근은 왜란에 큰 공을 세웠고 한말에는 대학자 노사 정진과, 송사 우만, 그리고 임술의책을 올린 승규·양연 등이 있으며 한말의 의병장으로 호남의병의 총수가 되었던 삼연과 을사오적 암살활동에 앞장 선 산도 등이 후손이다. 장성에 있는 추산서원에는 건·효간·정익을 배향했고, 고산서원은 정진을 배향했으며 행주기씨들은 남면 월정리에 20여호, 북이면 만무리에 18호가 집단거주하고 있다.

3. 경주김씨(慶州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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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의 시조는 알지(閼智)로 탈해왕의 사위가 되었고 그의 후손들이 신라의 왕위를 계승했다. 신라가 고려에 투항하자 고려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아 후손들이 크게 활약했는데 특히 인경은 조충과 함께 강동성의 거란족을 정벌해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하자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그리고 도은 이숭인과 같이 수은공 충한은 절개를 지켜 세칭 5은이라 불렸다.
장성의 입향조인 정수(廷秀)는 중종 29년(1534)에 출생했으니 장성 입향시기는 그 이후가 될 것이다. 장성에 입향한 경주김씨의 후손인 언길은 신독재나 우암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공을 호남의 거유라 칭찬했다. 또한 석호는 노사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명성이 높았고 준칠은 한말에 의병장으로 김태원의 선봉장으로 활약했으며 명삼은 독립군 모연대장으로 활약했는데 후손들은 삼서면 석마리에 30여호 살고 있다.

4. 고령김씨(高靈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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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김씨의 시조인 남득(南得)은 신라의 왕족인 의성군의 11대손으로 고려 공민왕을 도와 큰 공을 세워 고양부원군으로 책봉되었는데 고양은 고령의 옛 칭호다. 고령김씨가 언제 어떻게 장성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북이면 만부리에 35호, 그리고 남면 녹진리에 15호가 집단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입향시기가 오래일 것이라 추측된다.

5. 광산김씨(光山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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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의 시조인 흥광(興光)은 신라 신무왕의 셋째 아들인데 광주 평장동에 살았는데 고려 태조가 그에게 광산부원군을 봉해 광산을 식읍으로 주어 광산김씨라 부른다. 장성에서 두 번째로 많이 거주하고 있는 광산김씨가 입향한 것은 세 갈래인데 장성 황룡과 삼계 백산, 그리고 삼서 소룡리이다.

ㅇ장성 황룡 : 고려말의 충신 자진(子進)은 고려가 망하자 나주 삼장산으로 은거하여 밭, 우물, 담장에 모두고려의 이름을 붙이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살았는데 그의 장자가 충손(衷孫)이요 그의 아들이 숭조(崇祖)인데 이때부터 황룡에 입향하였다. 숭조는 성종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요직과 나주목사를 역임했고, 아들인 기(紀)는 홍문관 전한을 비롯하여 요직과 세자의 서연을 맡았다. 기의 장남인 경우(景愚)는 좌랑으로 하서, 고봉과 교류하여 명성을 떨쳤고, 그 후에도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황룡의 광산김씨는 황룡을 비롯하여 장성일대에 많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그 후손들의 활약도 대단했으니 전남도 문교사회국장을 역임한 영하, 민선으로 재선된 장성군수 흥식, 국회의원 효석, 대법원 기획실장 황식 등이 있다.

ㅇ삼계 백산 : 고려말의 충신 자진의 셋째아들인 종손(終孫)은 낭월산 아래 백산(白山)에 은거하여 아버지의 절개를 뒤따랐다. 그의 아들인 숭수(崇壽)는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고, 둘째 숭노(崇老)도 생원시에 합격하여 현감이 되었다. 숭노의 아들 약(約)은 이조좌랑이요 회(繪)는 참봉을, 종손의 증손인 찬원(贊元)은 임진왜란때 영광성을 지켰고, 조원(調元)은 하서의 문인으로 명성이 있었으며, 보원(輔元)은 진주성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후손들이 삼계의 백산을 비롯하여 삼서의 가산·외동, 삼계면 상도리, 동화면 송계리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ㅇ삼서 소룡리 : 시조 흥광의 19세손인 양산군수 효근(孝根)이 광주에서 나주로 이거하였으며 그의 후손인 26세 현( : 낭옹공)이 삼서면 소룡리 용동의 안동곡에 자리잡은 것이다. 소룡리에 입향조인 낭옹공 현은 19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후학을 가르치고 시문을 창작하여 문집을 남겼다. 이곳의 광산김씨는 경향 각지로 흩어져 갔으나 소룡리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그 후손으로 광주시 교육감인 원본과 장성군의회 부의장 상복 등이 활약하고 있다.

6. 김해김씨(金海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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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의 시조는 가락왕 수로(首露)로 2천년 가까운 역사를 가져 분파만도 김령김씨를 비롯해 142개파가 있다. 우리고장 장성에서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성씨인데 여러 종파가 있으나 그 가운데 자료를 보내준 장성읍 영천리 재식 가문과 삼현파(三賢派)인 장성읍 유탕리의 계윤 가문을 기록하겠다.

ㅇ오동촌 재식 가문 : 김해김씨 사군파(四君派)는 영암에서 살다가 조선의 현종 11년(1670)에 학성군의 손자인 성균관 생원 세성(世成)이 북일면 성산리에 입향했다가 장성읍 영천리 오동촌에 생활기반을 닦아 살게 되었다. 그 후손들이 장성을 비롯해 전국에 150여호로 번창해 살고 있는데 재식은 육군대령으로 예편하여 수협중앙회장, 수산청장, 전남지사,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ㅇ유탕리 계윤 가문 : 김해김씨 삼현파로 계윤의 9대조인 성숙(聲塾)이 나주에서 출생하였고, 6대조인 현석(顯錫) 때 장성으로 입향하였으니 1770년경으로 보인다. 계윤은 용길과 파평윤씨 사이에 4남 2녀의 3남으로 태어나 광주시 교육위원과 향토문화개발협의회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청소년 선도와 장애인 재활활동, 장학사업에 헌신하고 있으며, 김병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재광장성향우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또한 상현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으로 활동했다.

7. 도강김씨(道康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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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강김씨의 시조는 희조(希祖)로 알지의 35세손이니 경주김씨의 분종(分宗)인데 그는 고려의 문하시중을 역임해 도강백으로 책봉되어 도강김씨가 되었다. 그의 후손 회련(懷鍊)은 이성계를 도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8대손인 격(激)이 17세기 중엽에 태인에서 북하면 단전리로 입향했는데 장자 충광(忠光)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순국했고, 동생 충용(忠勇)은 남원성에서 순국했다. 그의 후손들이 북하일대에 30여호 살고 있으며 성열은 담양·고흥군수를 역임했다.

8. 연안김씨(延安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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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김씨의 시조는 섬한(暹漢)인데 알지의 후손으로 신라왕족이다. 왕에게 직간하다가 유배되어 연안으로 간 왕실의 후손이다. 연안김씨가 언제, 어떻게 장성에 입향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황룡면 옥정리에 34호가 집단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입향연대가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9. 영광김씨(靈光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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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네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현손(玄孫)인 심언(審言)을 시조로 한다. 심언은 고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현종 대에 예부상서를 거쳐 내중시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오성(筽城 : 영광의 옛 지명)군에 봉해졌으므로 관향을 영광으로 하였다.
그후 후손이 개성에 터를 잡고 살면서 고려조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영광 김씨는 1170년 무신의 난으로 무신들이 활개를 치자 동북면병마사인 보당(甫當)이 의종복위의 거사를 도모했다가 실패하여 멸족의 화를 당해 중간계대(中間系代)가 실전(失傳)되었다. 장성에 거주하는 영광김씨의 파조는 영광파와 장흥파가 두드러짐으로 이들 계파를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영광파의 파조(派祖)인 연(衍)의 5대손인 개(漑)는 성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연산군 때에 옥과현감을 하고 있었는데 연산군의 폭정과 패륜이 날로 심하자 뜻있는 사람들은 모두 궐기하여 연산군을 축출하고 진성대군을 옹립하자는 격문을 조정과 수령들에게 보냈는데 먼저 중종반정이 성공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격서에 감동하여 홍문관의 교리를 제수했으나 고향에 돌아가 살다가 죽었다. 그는 청백리 박수량의 스승으로 유명하며, 황룡면 신호리 수산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황룡을 비롯하여 장성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장흥파의 파조인 태용(台用)은 충렬왕대에 공조전서를 지냈다. 그의 증손(曾孫)인 찬(瓚)과 필(玉筆 ) 형제는 각각 세종대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과 이조 참판(吏曹參判), 삼도(三道)의 관찰사(觀察使) 등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장흥(長興)에 낙향하였다. 장성에는 태용의 16세손인 원룡(元龍)이 입향하였다. 후손들은 황룡면 장산리 수산, 필암리 중동에 10여호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한말 유학자로 화동 김한익, 탁신재 김한목이 노사 기정진, 송사 기우만, 면암 최익현 등과 교류하였으며, 근대 한학자인 동곡 준식이 동강사에 모셔져 있다.

10. 울산김씨(蔚山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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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김씨의 시조는 덕지(德摯)로 신라 경순왕의 아들이다. 그의 14세손인 환(環)이 고려에서 수상이 되어 학성(울산)군에 봉해져 본관을 울산으로 삼았다. 목사인 온(穩)은 이성계와 태종을 도와 공신이 되고 양주목사가 되었으나 태종의 4촌 동서가 되어 태종이 처족들인 민씨일족을 모조리 숙청할 때 온은 죽음을 당한 것 같고, 온의 처인 민씨(민양의 딸)는 아들들을 데리고 장성의 필암으로 은거하여 장성에 입향한 것이다. 온의 5대손인 인후(호는 하서)는 복재 기준과 모재 김안국, 신재 최산두의 가르침을 받고 이황과 학문을 교류했으며 기묘사화 후에 장성으로 돌아왔다.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세자의 스승이 되었는데 인종이 승하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가르치고 시문으로 세월을 보냈으며 그를 모신 필암서원은 사액을 받았다. 그의 후손들은 전국 각처에 살고 있으나 장성의 11개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제헌국회의원 상순, 5대 국회의원 병수, 녹영 국회부의장, 국태 도의원이 정계에서 활약했고, 학계에서도 관 전남대 교수, 병욱 충남대 교수, 상오 전북대 교수, 석중 광주교대 교수, 영 목포대 교수, 재승 전남대 교수, 재수 광주교대 교수, 정수 전남대 교수, 영중 홍익대 교수 등이 있고, 동식 광주서구의장, 상집 광주서구의원 등이 있으며 성은 호남신문편집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1. 진주김씨(晉州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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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김씨의 시조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인 진성군 추(錘)로 경주김씨의 분파이다. 삼서면에 입향한 진주김씨의 중시조는 진양부원군 무진(茂珍)인데 그의 6세손 어은공(漁隱公) 선정(善貞)은 성종대에 군기시 직장, 상의원 주부를 거쳐 제천 현감, 형조 정랑을 지내다가 연산군 대에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을 버리고 삼서면 원당의 외숙인 교리 고습댁에 머물렀다. 그후 삼서면 삼계리 어랑마을에 정착하여 500여년 동안 살게되었는데 그곳에 25여호가 집단거주하며 전국 각처에 380여호나 된다.

12. 창평김씨(昌平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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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김씨의 시조는 석규(錫奎)로 창평에 토착한 씨족으로 주부를 지냈고 그 자손들이 창평에 세거하여 창평을 본관으로 삼았는데 주로 전라도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창평김씨가 언제 장성에 입향했는지 알 수 없고, 동화면 구림리에 34호, 삼서면 수양리에 35호가 살고 있다.

13. 금성나씨(錦城羅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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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나씨의 시조는 고려태조 왕건에게 큰 공을 세운 총례(聰禮)이다. 본래는 중국에서 이주했다고 하나 그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조선조에는 19세손인 세찬(世纘 : 호는 송재)이 문과에 급제하여 학식과 덕망이 높고 강직하여 간신 김안로의 미움을 사 유배를 당하기도 했으나 한성부 부윤,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는데 을사사화에 화를 입기도 했다. 그의 둘째아들인 협(協)이 선조 2년(1569)에 나주 문평에서 삼서면 우치리에 입향하여 38대 432년을 삼서면의 우치 한실, 금산리 죽산, 보생리 보강, 석마리 마령 등에 집단 거주하고 있다. 그의 후손으로 2대 도의원을 지낸 몽성이 있다.

14. 교하노씨(交河盧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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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노씨의 시조는 오(塢)인데 그는 중국에서 안록산의 난 때 피난 온 수(穗)의 둘째로 그의 후손인 강필(康弼)이 고려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어 교하노씨로 사성되었다. 18세손인 변린(變麟)이 조선 성종 때 북계관찰사를 지내다가 중종 2년에 영광 군남으로 낙남했는데 24세손인 상룡(尙龍)이 선조 24년(1591)에 진사에 합격한 후 1594년 임진왜란 중 삼서면 대도리에 입향했다. 그의 후손으로 전남대 명예교수인 희관과 조선대 교수인 형철이 있다.

15. 함평노씨(咸平魯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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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노씨는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인데 그의 중조는 목(穆)으로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의 난을 평정해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함평군으로 책봉되었다. 7세손인 신(愼)은 홍건적을 토벌하여 함풍군으로 책봉되었는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하자 충절을 지켜 은둔했고 11세손인 종주(宗主)는 수양대군의 찬탈에 분노하여 영암에 은거했으며, 20세손인 성니(省尼)가 흥덕으로 이거하여 왜란을 당해 의병으로 참여했다가 진주성에서 순국했다. 그의 며느리가 가족을 거느리고 삼계면 내계리 아계에 정착하니 22세손인 치산(致山)이 입향조가 되는 셈이며 17세기 초였다.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번창했는데 6·25사변으로 피해가 많아 현재는 40여호가 살고 있으며, 삼서면 수해리에도 25가구가 살고 있다. 아계부락에 참봉 득좌(得佐)의 부인인 광산김씨의 효열각이 있고 경현사에는 노신을 배향했고 그의 후손으로 만경은 법관으로 활약하고 있다.

16. 밀양박씨(密陽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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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의 시조는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의 큰 아들인 밀성대군 언침(彦 )으로 신라의 왕족이다. 밀양박씨는 신라와 고려에서 크게 활약했는데 조선조에 들어와서 서창이 함길도 관찰사로 이시애 난을 평정했는데 그는 장성에 입향한 기손의 7대조이다. 기손의 아버지는 춘원으로 명종대에 진사에 합격하여 양덕현감을 거쳐 순변사로 임지에서 순국했다. 입향조인 기손은 선조 11년(1578)에 출생하여 훈련원 주부로 임진왜란 때에 방어사로 활약하여 바다에서 적을 격퇴했는데 난 후에 가족을 거느리고 장성의 통안에 입향했다. 그곳에서 대를 이어 살면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는데 아들인 호인은 학문이 뛰어났고 손자인 득황은 진사였으며 증손인 철수는 우암 송시열의 문하생이었다. 그리고 언제 장성에 입향했는지는 모르지만 북일면 오산리 출신인 안동은 명종 2년(1547)에 출생하여 송강 정철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추천으로 현릉 참봉이 되었고 뒤에 내섬시 봉사를 제수받았는데 임진왜란이 터지자 장성의 남문창의에 참여해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도 의병에 참여했다. 그의 아들들도 의병에 가담했으며 그의 후손들이 오산리에 15여호나 살고 있다.

17. 진원박씨(珍原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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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원박씨의 시조는 고려때 대장군을 지낸 진문(進文)인데 그는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그의 5세손인 첨(瞻)은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로 수상의 지위에 이르렀으며 익양백(益陽伯)에 책봉되었고, 6세손인 홍서(洪瑞)는 고려말에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7세손인 온(溫)이 진사로 구례감무를 지냈다. 그의 아들 희중(熙中)이 조선 태종때 예문관직제학을 지냈으며 김제의 벽골제 수리공사에 공을 세우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겨 공신으로 진원군에 책봉되어 본관을 진원으로 하였는데 그는 남원부사를 역임한 후 진원에 은거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희중은 휘생, 곤생, 진생 등 3형제를 두었는데 휘생이 처가를 따라 보성으로 이거하여, 휘생의 5세손인 광전(光前)은 학자요 의병장으로 유명하다. 진사인 곤생과 진생의 후손들이 그대로 진원에 남아 그들의 후손들이 장성·담양·나주 등지에 살고 있다.

희중의 묘가 있는 진원면 학림리에 학림사(鶴林祠)를 지어 희중을 비롯하여 원순(元恂)과 준철(濬哲)을 모셨는데 원순은 하서의 문인으로 생원을 지냈고, 준철은 도학이 뛰어나며 생원을 지냈다. 그리고 후손으로 우(祐)는 선조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왜병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조총기술을 배워왔고 승종(承宗)은 선조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역임하고 왜란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장성에는 남면 삼태리에 40여호, 진원면 학림리에 20여호가 집단거주하고 있으며, 후손으로 국회의원과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태영, 주벨기에 대사인 양천, 법관으로 상선·태훈·태운 등이 있고 전남대 교수인 태진이 있다.

18. 태인박씨(泰仁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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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박씨의 시조 언상(彦祥)은 신라 경명왕의 세자 밀성대군 언침의 8세손이니 밀양박씨의 분파이다. 그의 8세손 거인이 고려말에 태인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거하였는데 거인의 증손 연생이 단종 때 대호군으로 있다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가족을 거느리고 태인에서 장성 아치실로 은둔하여 절의를 지키면서 본관을 태인으로 고쳤다. 돈재(遯齋) 연생은 세조의 부름과 공신록을 거절하고 절의를 생명보다 중하게 여겨 많은 선비들의 칭송을 받았으니 황윤석과 최익현의 예찬한 글이 남아 있으며, 장성 황룡의 수산사에 모셔졌다. 그의 후손인 수량(守良)은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관찰사, 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나 장례비나 집 한 칸 없어 명종은 99칸의 집을 지어주고 서해바다의 대리석을 내려 묘비를 세웠으니 그의 청백을 상징하여 글자를 새기지 않아 백비(白碑)로 남겼다. 그리고 천문지리에 통달한 백의당 상의가 그의 후손이며 자손들은 황룡면 일원에 40여호가 살고 있다.

19. 남평반씨(南平潘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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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반씨의 시조는 부(阜)로 중국에서 동래하여 고려에서 벼슬을 지냈는데 그는 문인이며 무를 겸하고 외교에도 능했으며 거제도에 묻혀 거제반씨라 부르기 시작하다가 8세손인 유현(有賢)이 남평반씨의 파조가 되었다. 그런데 진도군수를 지낸 유현의 증손인 침의 아들 상주(尙周)가 16세기 중엽 장성군 서삼면 송연리에 옮겨 살게 되어 장성의 입향조가 된다. 그리하여 남평반씨는 남평과 장성에서 문명을 떨치면서 대를 이었는데 장성에서는 18세 여경, 24세 행도, 26세 영구가 모두 진사에 합격하여 진사고을이란 명예를 얻었다. 남평반씨 가운데 학영은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져 나라가 망하자 시장바닥에서 유서를 써놓고 자결한 애국열사로 그 순국비가 이 곳에 이전 건립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김덕령은 남평반씨의 외손이고 장성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반씨들은 이웃인 고창 성송면에 거주하는 반씨들과 왕래하면서 화목과 상부상조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상진은 장성고등학교와 고창남중학교를 건립하여 영재육성에 헌신하였고 사회봉사에도 열성적이며 향토문화개발협의회 회장을 역임했고 장성군의원 강진과 전북고창군의회의장 기진 등이 그의 형제이며 동족으로 재형은 체신부 서기관을 지냈으며 삼길은 육군준장으로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하고 있고 전군의원인 성진이 있다.

20. 수원백씨(水原白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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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백씨의 시조는 우경(宇經)으로 당나라에서 망명와서 신라 성덕왕대 큰 벼슬을 한 중국계의 성씨이다. 고려시대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고, 조선조의 중종대에 인걸(仁傑)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를 당해 금강산에 입산했다가 대과에 급제해 강직하고 청렴한 관직생활을 하면서 모함을 받아 유배당하기도 했으나 대사관을 세차례, 대사헌을 네차례 역임했다. 그는 언로를 트이게 하고 청백리에 선임되었는데 그의 후손들이 장성에 입향했는데 삼서면 홍정에 입향한 상의는 휴암의 6세손 상희(尙曦)인데 영조 8년(1732)에 전북의 고창 흥덕에서 인접지역인 너부실 행주기씨의 처가 곁으로 이거한 것이다. 상희의 4대손인 규수는 문과에 합격해 홍문관 교리를 지냈는데 두 아들이 진사에 합격했고 교리공의 증손인 용규(龍圭)는 상해임시정부 호남대의원을 역임했고 하규는 함평군수를 역임했으며 현손인 동호는 문화공보부에서 이사관을 지냈다. 용규의 아들인 재호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4년간 복역했고 반민특위 전남조사관·법전편찬위 간사장·관리관을 지냈으며 봉호는 한양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안산캠퍼스 총장·대학원장을 역임했다. 교리공의 현손인 진호는 안기부 부이사관을 역임했고 인호는 언론계에서 활약하여 YTN방송사장으로 재임중이고 교리공의 6세손인 영석은 원광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한편 동화면 월사리에 입향한 수원백씨는 휴암 인걸의 5세손인 시표(時標)인데 그는 영조대 사관으로 있다가 사도세자가 사사되고 간신들이 날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살게 되었는데 그의 증손인 동규(東奎)는 증직으로 호조참판을 했다. 동규의 고손인 군기(君基)는 육군소장으로 31사단장으로 있으며 그 일가로 경규는 강릉대교수 조종은 서울시 서기관으로 근무했고 그 일족은 동화면의 월사리·구림리·남평리 등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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