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군 로고

국가상징 국무회의 알아보기

제3장 민속

  • 트위터
  • 페이스북
  • 구글
  • 현 페이지 엑셀로 다운
  • 현 페이지 워드로 다운
  • 현 페이지 인쇄
4차 메뉴 정의
5차 메뉴 정의
  • 1. 세시풍속
  • 2. 민속놀이
  • 3. 민간신앙
  • 4. 구비문학

1. 세시풍속

원본파일 다운로드

(1) 세시풍속의 개요

세시풍속(歲時風俗)이란 해마다 계절에 따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생활습속을 뜻한다. 이는 달리 세시(歲時), 세사(歲事), 시령(時令), 월령(月令)이라고도 하는데,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가운데 농사를 주업으로 삼아왔던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발달돼 왔다. 한 해를 시작하는 연초에는 개인과 마을 전체의 안녕과 질서를 비는 경건하면서도 엄숙한 풍속들이 있고, 씨뿌리는 봄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제의(祈風祭儀), 가을 추수기에는 풍요로운 수확에 감사하는 수확제의(收穫祭儀) 등이 있다.

우리의 세시풍속은 주로 태음력(太陰曆)에 의한 것이 많은 편인데, 달의 움직임은 농업이나 어업 등 생업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세시풍속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긴 세월에 걸쳐 쌓이고 쌓인 민중들의 생활습속으로 해마다 계절에 따라 반복되는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생활에 역동적인 변화와 생활의 리듬을 가져다 준다. 사람들은 이러한 때에 오랜 노동 뒤의 휴식을 취하고, 시절음식을 마련해 먹기도 하며, 가족이 제사나 마을 단위의 공동제사를 올리기도 한다.

이러한 세시풍속도 현대화 과정에서 양력(陽曆)이 쓰이고, 서구문물이 유입됨으로 해서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종전의 농경생활 중심의 집단적 생활이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개인주의적인 생활의 형태로 변모를 겪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세시풍속에는 단순히 생활상의 휴식이나 활력소가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간의 집단적 결합성도 강하게 내재돼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2) 장성지역 세시풍속의 특징

한반도 남서부 노령산맥을 경계로 황룡강 극락강이 합류되어 영산강에 합류시키는 지역이기에 북에 전북 정읍 순창과 접하고 서에 전북 고창과 영광 함평과 접하며 동에 담양과 인접한 내륙지방으로 남에 광주시와 연결되어 북단에 위치하여 나주평야 광주 도시와 접한 서울로의 통로가 되어 높은 문화 문물 수준을 누리게 되었다.

이렇듯 인문과 자연 환경이 뛰어나 안락한 전원 이상향을 이루면서도 의림 문화권의 축을 유지하고 한국 민족 정신의 고향을 건설하기 위해 현인 충의 열사가 끊임없이 전통문화 맥락을 이루어 오고 있다.
세시풍속 형성도 자연적 역사적 사회적 생업적 종교적 요인을 영향받아 천체역법 자연적 이(理)와 기(氣)를 수용하면서 전래되는 특징이 있다. 특히 24절후 절기와 2행 음양과 십이간지지를 매우 중요시했기에 참고로 제시한다.

[표 7-11] 24절기에 따른 24절후(節侯)

입춘(立春, 2월 4일경) - 봄이 시작된다고 여김
우수(雨水, 2월 19일경) - 강물이 풀리기 시작하는 때
경칩(驚蟄, 3월 5일경) - 동물이 동면(冬眠)을 마치고 깨어나는 시기
춘분(春分, 3월 21일경) - 밤과 낮의 길이가 같게 됨
청명(淸明, 4월 5일경) - 날씨가 맑고 청명함
곡우(穀雨, 4월 20일경) - 봄비가 내려 백곡이 윤택해 짐
여름입하(立夏, 5월 6일경) - 여름이 시작된다고 함
소만(小滿, 5월 21일경) - 만물이 점차 성장하여 가든 찬다는 의미
망종(芒種, 6월 6일경) - 보리는 익어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되는 시기.
하지(夏至, 6월 21일경) - 낮이 제일 길고 밤이 제일 짧은 시기
소서(小暑, 7월 23일경) -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됨
대서(大暑, 7월 23일경) - 더위가 가장 심한 시기
가을입추(立秋, 8월 8일경) - 가을이 시작되는 시기
처서(處暑, 8월 23이경) - 더위가 풀려가는 시기
백로(白露, 9월 8일경) - 이슬이 내리고 가을 기운이 완전히 나타남
추분(秋分, 9월 23일경) -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짐
한로(寒露, 10월 8일경) - 찬 서리의 기운이 싹틈
상강(霜降, 10월 23일경) - 서리가 오기 시작함
겨울입동(立冬, 11월 7일경) -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
소설(小雪, 11월 23일경) - 눈이 오기 시작하는 때
대설(大雪, 12월 7일경) - 눈이 많이 오는 시기
동지(冬至, 12월 23일경) - 낮이 제일 짧고 밤이 제일 긴 시기
소한(小寒, 1월 6일경) - 겨울 중 가장 추운 때
대한(大寒, 1월 20일경) - 추운 시기

[표 7-12] 오행음양표(五行陰陽表)

오행음양표 - 오행명칭, 음양성, 형체배열, 도장배열, 상생설, 상극설, 비고 제공 표
오행명칭음양성형체배열도장배열상생설상극설비고
금 金양·陽금형 金兄폐장금생수금극목
금제 金弟肺臟金生水金剋木
목 木중·中목형 木兄간장목생화목극토
목제 木弟肝臟木生火木剋土
수 水음·陰수형 水兄신장수생목수극화
수제 水弟腎臟水生木水剋火
화 火양·陽화형 火兄심장화생토화극금
화제 火弟心臟火生土火剋金
토 土음·陰토형 土兄비장脾臟토생금토극수
토제 土弟土生金土剋水土剋水

[표 7-13] 지·십이지지표(支·十二地支表)

지·십이지지표 - 명칭, 상징, 방위, 시각, 띠신, 방위신, 비고 제공 표
명칭상징(띠)방위시 각띠신방위신비고
자 子오후 11시∼오전 1시子神北神
축 丑北北東오후 1시∼오전 3시丑神北北東神
인 寅東東北오전 3시∼오전 5시寅神東東北神
묘 卯토끼오전 5시∼오후 7시卯神東神
진 辰東東南오전 7시∼오전 9시辰神東東南神
사 巳南南東오전 9시∼오전 11시巳神南南東神
오 午오전 11시∼오후 1시午神南神
미 未南南西오후 1시∼오후 3시未神南南西神
신 申원숭이西西南오후 3시∼오후 5시申神西西南神
유 酉西오후 5시∼오후 7시酉神西神
술 戌西西北오후 7시∼오후 9시戌神西西北神
해 亥돼지北北西오후 9시∼오후 11시亥神北北西神

(3) 월별 세시풍속

1) 1월의 세시풍속

설날이란 일년 중의 첫날로서 설, 설날, 원일(元日), 세수(歲首), 연수(年首), 신일(愼日)이라고도 하는데, 한 해가 시작하는 날이니 만큼 매사에 조심하고 삼가며 경건한 마음으로 맞이하게 된다.설빔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없어 누구나 마련하는데 미리부터 각 가정에서는 정성껏 준비해 둔다. 옛날에는 어른들까지 두루마기 또는 도포를 비롯하여 버선, 대님, 바지, 저고리까지 두툼한 솜을 넣어 추운 날씨에도 견딜 수 있도록 했으며 아이들은 색동저고리로 곱게 단장했다. 이렇게 새옷을 입고 새해를 연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한 해를 경건하고도 기쁜 마음으로 시작한다는 뜻이 되겠다.

차례(茶禮) :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설빔을 입고 정성껏 음식을 차려 조상께 차례를 올린다. 사당(祠堂)을 종가(宗家)에서 모시는데, 고조, 증조, 조부모, 부모까지 4대를 모시고 5대조 이상은 집에서 지내지 않고 시제(時祭)때 모시게 된다.
차례에는 멀리 떨어져 있던 자손들이 다 모여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지내게 된다. 평소에 흩어져 생활했던 자손들이 이를 통하여 뿌리의식을 느끼게 되고 한마음이 되는 것이다.세배(歲拜)란 차례가 끝나면 조부모, 부모, 숙부, 형 등의 순서로 어른들께 새해 첫 인사를 드리는 데 이것을 세배라고 한다. 집안에서 세배가 끝나면 세찬과 떡국으로 아침을 마치고 일가친척이나 이웃어른을 찾아서 세배를 드리고 세배를 받는 쪽에서는 음식을 대접하고 정담을 나누며 아이들에겐 세뱃돈도 준다. 세배를 드리고 받으면서 서로 '덕담'이 오고간다. 이러한 세배는 일가 어른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라도 찾아가 세배를 드리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으며, 정월 보름까지는 이러한 세배 행렬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성묘(省墓) : 설날에는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 성묘를 한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는 인사를 생전과 같이 하며, 돌아가신 선조들의 효열담(孝烈談)이나 업적 등을 이야기한다.복조리 : 복조리 풍속은 섣달 그믐날 밤 자정이 지나서 조리를 방이나 부엌에 걸어 두는 풍습이다. 섣달 그믐날 복조리 장수가 돌아다니면, 각 가정에서는 남보다 먼저 사야 복이 온다고 하여 1년 동안 사용할 양만큼 사서 사용한다.
삼재 막는 법(三災 免法)은 남녀의 나이가 삼재(三災-수재, 풍재, 화재)를 당하면 삼재를 면하기 위해 삼재면법을 쓴다. 설날 아침에 세 마리의 매를 그려 문설주에 붙이는 것이다.태어난 해가 간지(干支)로 사(巳)·유(酉)·축(丑)이 든 사람은 해(亥)·자(子)·축(丑)이 되는 해에, 신(申)·자(子)·진(辰)에 태어난 사람은 인(寅)·묘(卯)·진(辰)이 되는 해에, 해(亥)·묘(卯)·미(未)에 태어난 사람은 사(巳)·오(午)·미(未)가 되는 해에, 인(寅)·오(午)·술(戌)에 태어난 사람은 신(申)·유(酉)·술(戌)이 되는 해에 삼재가 든다. 따라서 사람은 9년마다 삼재를 당하게 된다.

** 정초(正初)의 점복(占福)

토정비결(土亭秘訣)은 연초에는 1년의 운수가 어떠할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토정비결을 본다. 사업에 성공할지, 관계에서 승진을 하는지, 무병건강하고 온 집안이 평안할 것인지 등에 대해 궁금하게 여겨서 보게 되는 것이다.

** 정초의 놀이

윷놀이는 정초에 남녀노소 구분없이 가장 많이 즐기는 놀이로, 정초뿐 아니라 사시사철 언제나 널리 행해지는 놀이이기도 하다.널뛰기는 정초에 여성들이 하는 발랄하고도 힘찬 놀이이다. 폭이 한 자, 길이가 7∼8자 정도 도는 널판을 짚단이나 가마니 위에 올려 놓고 양쪽에 한 사람씩 올라타서 힘껏 굴러 뛰었다 내려앉았다 하는 동작을 번갈아 반복한다.
연날리기는 정초의 대표적인 놀이로, 바람이 많이 부는 언덕에 아이들이 모여 가오리연, 방패연 등 여러 종류의 연을 날리며 실감는 자세를 돌려 서로 연줄을 걸고 연싸움을 하기도 하는데 지지않기 위해 연줄에 부레풀을 묻히고 사금파리 조각을 부수어 바르기도 한다. 또한 연에 '송액영복(送厄迎福)', '송액(送厄)' 등의 글씨를 써서 멀리 날려보내며 그 해의 모든 재액(災厄)이 연처럼 멀리 사라지기를 기원하는 풍습도 있다.

** 12간지일(干支日)

쥐날(上子日)은 정월에 첫째 쥐날을 상자일이라 하여 농부들은 들에 나가 쥐를 없애기 위해 논과 밭두렁에 불을 놓는다. 또 밤에 불을 밝혀 쥐가 곡식을 먹는 것을 방지하며 바느질이나 길쌈도 하지 않고 하루를 쉰다.
소날(上丑日)은 소의 명절이기 때문에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여물을 듬뿍 주어 하루를 쉬게 한다. 이날은 도마질도 하지 않고 쇠붙이 연장도 안 다루며 방아도 찧지 않는다.
호랑이 날(上寅日)은 옛날부터 호랑이 날엔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하여 산에 가지 않았다. 또 이날은 사람날(人日)과 음이 같으므로 일도 하지 않고 쉬며 출입을 금하고 근신을 한다.
토끼날(上卯日)은 이날은 남자가 먼저 일어나 대문을 열어야 일년간 가운이 번창한다고 한다.
용날(上辰日)은 장성지방에서는 이날 물을 긷지 않는다. 이날 물을 길면 바쁜 농사철에 비가 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날에는 머리도 감지 않고 실과 같은 긴 물건도 다루지 않는다.
뱀날(上巳日)에는 용날처럼 물을 긷지 않고 머리도 빗지 않는다. 또 빨래도 널지 않으며 바느질도 안하고 땔나무도 부엌에 들이지 않아 뱀이 나타나는 것을 예방한다. 그리고, 청룡(靑龍)·백룡(白龍)·흑룡(黑龍)이라 쓴 손바닥만한 종이를 뱀이 나올만한 곳에 거꾸로 붙이는 뱀 입춘이 있으며 '뱀지지기'라 하여 막대 끝에 솜을 뭉쳐 뱀사(巳)자를 쓴 뱀지지대에 불붙여 끌고 다니기도 한다.말날(上午日)은 좋은 날이라 하여 장을 담근다.
염소날(上未日)은 잰나비날, 납날이라고도 하는데, 일을 아니하고 놀며 술과 고기를 먹기도 한다.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일어나 문을 열고 청소를 하며, 부엌에도 남자가 먼저 들어가기도 한다.
닭날(上酉日)에 부인들은 바느질을 않는다. 바느질을 하면 손이 닭발처럼 보기 흉하게 된다고 한다.
개날(上戌日)에는 일을 하면 개가 텃밭을 해친다고 하여 일을 하지 않고 쉬며, 이날은 풀도 쑤지 않는데, 개가 풀을 잘 먹기 때문에 풀을 많이 먹고 탈이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돼지날(上亥日)엔 바느질을 하면 손가락이 아리기 때문에 하지 않고 머리를 빗으면 풍증(風症)이 생긴다고 하여 삼간다.
유모일(有毛日)과 무모일(無毛日)에는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일반적으로 일을 하지 않고 쉬며 풍년을 빌고, 한 해의 행운을 기원하면서 신성하게 보내는 기간이다.

1일부터 12일까지는 간지(干支)에 의해 유모일과 무모일로 나뉜다. 유모일은 길하고 무모일은 흉하다고 한다. 유모일은 쥐, 소, 호랑이, 토끼, 말, 염소, 원숭이, 닭, 개, 돼지날이며 무모일은 용, 뱀날 뿐이다. 설날이 유모일이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하며 그 중에서도 호랑이 날을 제일 좋게 여긴다.
인일(人日) 정월 1일은 닭날, 2일은 개날, 3일은 염소날, 4일은 돼지날, 5일은 소날, 6일은 말날, 7일은 사람날이다. 사람날에는 외숙(外宿)하지 않으며 손님이 오는 것도 꺼린다.입춘날 민간에서는 집집마다 대문이나 기둥에 '입춘대길건양다경(立春大吉建陽多慶)' '국태민안가급인족(國泰民安家給人足)' 등의 춘첩자(春帖子)를 붙인다.보리뿌리점(麥根占) 입춘날 보리뿌리를 보고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것을 맥근점이라 한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期)에는 "입춘에 농가에서 보리 뿌리를 캐 보아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는데, 뿌리가 세 가닥 이상이면 풍년이고, 두 가닥이면 보통이며, 한 가닥이면 흉년이 든다."라고 적혀 있다.
정월 대보름(上元) 세시풍속으로 동제(洞祭)를 실행하는데 동제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로 당제(堂祭), 산제(山祭), 당산제(堂山祭), 산굿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안택(安宅)은 동제가 마을 전체의 제사인데 비하여 안택은 개인 제사이다. 무당을 불러 안택경(安宅經)을 읽으며 터줏대감이나 조상신에게 가족의 무병건강이나 1년간의 액(厄)을 막아 주라는 부탁을 한다. 이를 고사(告祀)라고도 하는데 농사를 짓는 사람뿐 아니라 장사를 하는 집에서도 사업의 번창을 빌며 안택(安宅)을 한다.노두놓기란 보름 전날 밤에 아이를 키우는 집안에서는 아이의 장수나 건강, 성공을 위해 냇가에 누둣돌을 놓는다. 여러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징검다리를 쌓음으로써 적선(積善)을 하게 되어 그 복이 자식에게로 되돌아 온다는 믿음에서이다.

제웅치기는 남녀의 나이가 직성(直星)이 들면 제웅을 만들어 동구밖에 갖다 버림으로써 직성을 풀게 되는데, 직성이라 하면 남자의 나이가 11, 20, 29, 38, 47, 56세 때이고, 여자의 나이는 10, 19, 28, 37, 46, 55세 때로 액운(厄運)이 낀 해를 말한다.

짚으로 사람처럼 인형을 만들어서 그 속에 쌀이나 돈을 넣어서 제웅직성이 든 사람의 생년, 월, 일, 시를 넣은 것
을 제웅이라 하는데, 보름 전날 아이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제웅을 내라고 소리쳐서 안에 들어 있는 쌀이나 돈만 내 가져가고, 제웅은 개천이나 마을 밖의 후미진 곳에 갖다 버린다.
복토(福土)훔치기는 보름 전날 밤에 가난한 사람이 부잣집 마당이나 뜰의 흙을 몰래 파다가 자기네 집 부뚜막에 바르는 풍속이 있는데 이것을 복토훔치기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잣집의 복이 흙과 함께 그대로 옮겨 와 자기도 부자가 된다는 유사주술(類似呪術)적인 풍속인 것이다.

낟가릿대 세우기란 볏가릿대, 유지방, 유지지, 화간(禾竿)이라고 한다. 보름 전날 장대 꼭대기에 볏짚단을 묶어 매달고 그 곳에 벼, 조, 보리 이삭과 종이꽃이나 팔랑개비를 꽂아두고 아이들이 그 둘레를 돌며 농악을 치며 논다. 추수한 곡식이나 열매를 노적하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풍습인 것이다.달집 태우기는 농악대의 청년들이 집집의 마당밟이를 해주고 짚을 얻어 오거나 또는 각자가 나무나 솔잎 등을 가져와 언덕이나 산에 쌓아 두고 달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불을 지핀다. '망울이 불'이라 외치며 달빛 아래 빨갛게 타오르는 불덩이를 보며 이웃 마을과 어느 쪽이 더 높이 올라가는가 겨루기도 한다. 달집이 잘 타오르면 그 해 농사가 풍년이 들고 타다가 꺼진다거나 불길이 약하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풍요의 원리인 달과 신성한 불을 결합시켜 풍년을 기원하는 풍습이다.부럼은 보름날 아침에 일어나 호두, 잣, 밤 등을 깨무는 것을 말한다. 깨물면서 "1년 동안 무사태평하고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라고 축원한다.귀밝이술(耳明酒)의 풍습은 동국세시기에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라고 했다. 보름날 아침에 일찍 술을 한 잔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1년간 좋은 소식만 듣게 된다고 하여 여자도 마신다.

더위팔기란 보름날 아침에 더위팔기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사람을 급히 불러 대답을 하면, "내 더위"라고 외쳐 더위를 판다. 그러면 여름철에도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호명을 받은 사람이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가 먼저 "내 더위 사가라."고 응수하면 팔려던 사람이 오히려 더위를 사게 된다고 한다.오곡밥 먹기는 보름에는 쌀, 콩, 팥, 보리, 수수 등으로 오곡(五穀)밥을 해 먹는다. 이날은 타성(他姓)받이의 집에서 한 밥을 먹어야 좋다고 하여 서로 밥을 나누어 먹으며 평상시 세 번씩 먹는 밥을 여러 번으로 나누어 아홉 번씩 먹기도 한다.진채식(陣菜食)이란 보름에 호박말림, 무말림, 가지나물, 버섯, 더덕, 도라지, 외고지, 감자순 등 여름에 말려둔 나물을 삶아 먹는 것을 진채식이라 한다. 이날 보름나물을 먹으면 일년내 더위도 타지 않고 병도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백가반(百家飯)은 동국세시기에는 "어린이가 봄을 타 살빛이 검어지고 야위어 마르는 아이는 정월 보름날 백 집의 밥을 빌어다 절구를 타고 개와 마주 앉아 개에게 한 숟갈 먹이고 자기도 한 숟갈 먹으면 다시는 그런 병을 앓지 않는다."고 쓰여 있다. 이를 백가반이라 하는데, 적어도 세 집 이상의 밥이라도 먹기 위해 서로 돌아다니며 먹는 시늉이라도 하고 자기 집에서도 일찍부터 밥을 하여 나누어 주기도 한다.

개 보름 쇠기는 보름날에는 개에게 밥을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밥을 먹이면 여름에 파리가 끓고 부스럼이 생겨 개가 마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속담에 "개 보름 쇠듯 한다."라는 말도 있다. 이날은 개에게 밥을 주지 않아도 거리에 나가면 내전밥이나 거릿제밥 등이 있어 그것을 먹으므로 개가 굶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소 여물주기는 보름날 아침 일찍 소에게 밥과 나물을 차려 주며 무엇을 먼저 먹는가에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이를테면 밥을 먼저 먹으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들고, 나물을 먹으면 흉년이 들긴 하나 목화(木花)나 야채, 과일 등은 풍작을 이룬다는 것 등이다. 또한 이날에는 외양간 앞에다 밥, 떡을 차려서 소가 언제나 사고없이 일을 잘 하기를 빌기도 한다.다리밟기(踏橋)란 보름날 밤에 남녀노소 모두가 나와 다리(橋)를 밟는 풍속으로 이렇게 하면 1년 동안 다리(脚)가 병이 없이 튼튼해 진다고 한다. 장성에서는 백양교, 용강교, 서삼교, 황룡교에서 횃불놀이와 같이 실행된 것을 보고 들었다는 노인들의 증언조사에서 볼 수 있는데 밤이 되면 사람들은 새옷으로 갈아입고 가까운 곳에 있는 다리를 찾아 농악대의 뒤를 따라 몇 번이고 밟고 오가며 놀았다. 이는 다리(脚)와 다리(橋)가 음이 같은 데서 온 유사주술적인 민속 행위라고 볼 수도 있겠다.달맞이란 대보름날 저녁에 달이 떠오를 무렵 사람들이 달구경을 하기 위해 산을 오르는 행위이다. 동쪽에서부터 달이 떠오를 때쯤이면 모두 두 손을 모아 달을 보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원을 한다. 또 떠오르는 달을 보고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하는데, 달이 선명하면 풍년이 들고, 흐릿하면 흉년이 들며, 달빛이 희면 비가 많이 오고, 달빛이 붉으면 가물 것이고, 달이 남으로 기울면 바닷가가 풍년, 북으로 기울면 산간지역이 풍년이 들 것이라고 하는 것 등이다.잰부닥불 피우기는 보름 전날 밤 마당에 불을 피우고 그 위에 대, 피마자대, 고추대 등을 올리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이다. 불 옆에는 양동이에 물을 담아 놓고 바가지를 엎어 둔다. 아이들에겐 한지로 만든 옷을 입히고 자기 나이만큼 모닥불을 뛰어 넘게 한다. 그리고 한지를 불에 태우면 아이가 1년간 건강하다고 한다. 불이 사그라들면 양동이의 물을 바가지로 퍼서 여기저기에 뿌리며 잡귀물림을 한다.

쥐불놀이란 정월 상자일(上子日)이나 열 나흗날 밤에 논, 밭둑에 불을 놓는 것을 쥐불놀이라 한다. 그러면 논두렁이 더 여물어지고 물이 새지 않아 농사가 잘 된다. 이는 쥐를 쫓고 병충해를 방지할 수도 있으며 잡귀를 몰아내어 신성하게 봄을 맞이한다는 의미와 함께 타고난 재는 또 거름으로도 이용할 수가 있다는 이점이 있다.뱀치기는 정월 상사일(上巳日)이나 보름 경에 아이들은 여자의 머리카락, 피마자대, 왼새끼, 고추, 헝겊 등으로 뱀처럼 길게 만들어 그것을 질질 끌고 다니며 뱀이 나올 듯한 곳에서 "배암 끄집자" "진대 끌자"라고 외치고 난 뒤 집밖에 갖다 버린다. 이를 '진대끗기', '진것치기'라고도 부른다샘물 대기는 샘물이 잘 나오지 않을 때 남의 마을 샘물을 몰래 길어와 자기 샘에 부으면 물이 마르지 않고 잘 나온다고 하여 부녀자들이 샘물대기를 한다. 자기 마을의 공동샘에 다른 마을 샘의 정기(精氣)를 불어넣는 행위인 셈이다. 그리하여 보름 전날에는 작당을 해서 이웃 마을을 침범하기도 하고 자기 마을 지키기도 한다.지신밟기는 정초부터 정월 보름 사이에 마을의 농악대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매구를 쳐준다. 그러면 각 가정에서는 돈이나 쌀, 술상을 차려 대접을 한다. 농악대의 상쇠는 그 집에 도움이 될만한 덕담이나 축원을 하며 마당, 뒤안, 부엌, 장독, 광 등을 돌면 풍물을 따라 포수, 각시, 양반 등의 놀이패가 뒤를 따르며 한바탕 신나게 판을 벌리며 논다.횃불싸움은 보름을 며칠 앞두고 아이들은 헌 대빗자루나 싸리를 묶어 홰를 만들어 두었다가 보름날 밤이 되면 횃불을 만들어 가지고 논다. 횃불을 돌리며 각자가 기세를 올리는데 보름달이 떠오를 때쯤이면 이웃 마을과 경쟁하다가 싸움이 붙기도 한다.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퍼붓다가 시비를 걸면 치고 때리는 격투가 벌어진다. 승부는 부상을 당하거나 횃불을 빼앗긴 사람이 많은 쪽에서 항복을 하게 되어 결정이 난다. 이는 협동정신과 함께 용맹성을 기르는 남성적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장성에서는 북상, 북하, 장성읍, 서삼, 삼계, 삼서, 황룡, 동화, 진원, 남면간 마을 단위로 6.25 이후까지 성행되었음을 장성 마을사 유래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기세배(旗歲拜)란 정초에 마을의 상징인 기를 앞세우고 여러 마을의 농악대가 모여 순서를 정하고 서열에 따라 농기를 숙이고 인사하는 것을 기세배라 한다. 서열은 농악대가 창설된 순서, 곧 역사가 오래된 마을이 형(兄)이 된다. 세배하는 장소는 맏형 마을의 광장이 되며 각 마을의 농악대는 이곳에 당도할 때까지 농악을 치며 농기를 높이 들어 기세를 올리는데 각 마을의 농기가 모두 모여들 때쯤이면 그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줄다리기는 일반적으로 정월 보름에 당제가 끝나고 마을에서 편을 갈라하게 되는 기풍(祈豊)적인 놀이이다. 보름날 전부터 마을에서는 집집에서 갹출한 짚단으로 암·숫줄을 꼰다. 짧은 것은 20∼30m에서 긴 것은 100m가 넘기도 한다. 짚이 부족할 때는 산에서 칡넝쿨을 뜯어와 보태기도 한다. 생산성이 있는 여자쪽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하여 남자쪽에서 일부러 져주기도 하는데, 놀이가 끝나면 농악대와 마을민들은 농악을 치며 한바탕 신나게 놀아댄다. 마을 축제적인 성격이 강한 놀이로, 쓰고 난 줄은 당신목(堂神木)에 칭칭 감아 두기도 한다.

2) 2월 세시풍속

머슴날은 2월 1일 중화절(中和節)이라고 하며, 농가에서는 머슴날, 하리아드래날이라고도 한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오랫동안 쉬던 머슴들이 봄을 맞아 일을 할 시기가 돌아와 주인들은 새로운 해의 농사를 잘 지어주기를 부탁하며 머슴에게 대접을 톡톡히 한다.콩볶기란 2월 1일 날 각 가정에서 콩볶는 행사를 말한다. 콩을 볶을 때는 타지 않게 주걱으로 저으며 "콩을 볶아라, 새알 볶아라, 쥐알도 볶아라."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콩을 볶아 먹으면 노래기도 없어지고 쥐가 곡식을 축내는 일도 없어진다고 한다. 아이들은 볶은 콩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먹는다. 또 여러 가지 곡식을 솥에 넣고 볶으면서 어느 것이 먼저 볶이고 튀는가에 따라 그해 농사를 점치기도 한다.
영등은 2월 1일 하늘에 사는 영등할머니가 내려오는 날이다. 영등할머니는 며느리나 딸을 데리고 내려오는데 딸이 올 때는 바람이 일지 않으나 며느리가 올 때는 거센 바람과 비를 동반한다고 한다. 일기가 불순하면 농사에 큰 지장을 초래하므로 농가에서는 2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부터 새 바가지에 물을 담아 장독이나 부엌에 올려놓고 빌며 근신한다.노래기 부적(符籍)인 2월 초하루에는 온 집안을 샅샅이 청소를 한다. 이때쯤이면 노래기라고 하는 벌레가 초가지붕이나 초목이 썩은 부분에서 나와 심한 악취를 풍기는데, 향랑각시, 노략, 요내기라고도 불리는 이 노래기를 없애기 위해 기둥이나 서까래 등에 '향랑각시 속거천리(香 閣氏 速去千里) 또는 '노낙각시천리속거'라는 부적을 써서 거꾸로 붙인다. 백지에 붉은 글씨로 쓰며, 이 밖에도 솔잎을 따서 마당이나 문 앞에 뿌리기도 한다.
경칩일(驚蟄日)엔 남자들은 들이나 산에 가서 개구리알을 건져 술과 함께 마신다. 이를 용알 떠먹기라고도 하는데 이렇게 하면 해수병이나 남자의 양기를 돕는 데에 좋다고 한다. 이날엔 흙일을 하면 탈이 없다 하여 담을 쌓거나 벽을 바르고 둑을 쌓기도 한다. 또 빈대가 심한 집에서는 물에 재를 타서 집 네 모퉁이에 놓아둔다.좀생이점(占)인 2월 6일 저녁에 묘성(昴星)이란 별과 달과의 거리를 보아 그해의 풍흉을 점치는 풍습이 있다. 묘성을 송진이, 솜싱이, 좀싱이, 소무생이라고도 하는데 오밀조밀 많은 별들의 이름을 그렇게 부른 듯하다. 좀생이가 달보다 앞서 있으면 대풍이고, 달과 평행이면 보통이고, 달보다 뒤떨어져 가면 흉년이 든다고도 하며 좀생이의 빛이 붉으면 가뭄이 심하며, 투명하게 맑으면 비가 적당히 와 풍년이 든다고 한다.

3) 3월 세시풍속

삼진날은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다. 이날엔 제비를 보면 손을 흔들어 반기는데, 나비를 보면 일년 동안 멋만 부리고, 개미를 먼저 보면 열심히 일을 해서 부자가 된다고 믿는 아이도 있다.한식(寒食)은 동지(冬至)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로, 이날 농가에서는 곡식의 씨를 뿌려 새해 농경의 시작을 준비한다.곡우(穀雨)는 24절기 중에 여섯째 오는 날로, 이 무렵이 되면 농가에서는 못자리를 하기 위해 볍씨를 담근다.풀각시 놀이는 아가씨들이 각시풀, 물곳, 비단개를 뜯어다 실로 묶어 나뭇가지에 매달고 머리를 반드시 따서 마치 소녀의 댕기머리처럼 만든 다음 땋은 머리에 성냥개비와 건명태 관자뼈를 비녀로 쪽에 꽂아 치마 저고리를 입혀 풀인형을 만드는데 이를 각시놀이라고 한다.

4) 4월 세시풍속

초파일(初八日)로 석가모니의 탄생일인 이날은 욕불일(浴佛日)이라고도 불리우는데 불도들은 절에 찾아가 재(齋)를 올리고 축원을 드리며 탑돌이를 하기도 한다.

5) 5월 세시풍속

단오(端午)란 5월 5일을 단오, 수릿날, 천중절(天中節)이라고도 한다. 각 가정에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차례를 지낸다. 여자들은 그네를 뛰고, 창포에 머리를 감으며 놀고 남자들은 씨름 등을 하며 하루를 즐긴다. 이날 또 가정에서는 쑥떡을 해먹기도 하는데 이를 수리떡이라 부른다.쑥과 익모초(益母草) 풍속행사는 단오날 아침에 쑥이나 익모초를 뜯어다 다발을 만들어 집안에 걸어놓기도 하는데 여름철에 입맛이 없을 때 달여 그 즙을 내어 먹으면 식욕이 되살아난다고 한다. 또 농가에서 단오날 이른 아침에 쑥다발을 문에 걸어 두는 것은 재앙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6) 6월 세시풍속

6월 15일을 유두날이라 한다. 이날에는 폭포를 찾아가 물맞이를 하거나 바닷가로 가서 모래찜도 한다. 또, 유두천신(流頭薦新)이라 하여 새로 나온 수박, 참외 등의 과일과 국수와 떡을 만들어 제사를 올리기도 한다.
복날 행사는 하지가 지난 후 셋째 경일(庚日)이 초복(初伏), 넷째 경일이 중복(中伏), 입추 후 첫 경일이 말복(末伏)이다. 이를 일컬어 삼복(三伏)이라 하는데 일년 중 가장 더운 때이다. 이때가 되면 사람들은 몸을 보(補)하기 위해 개를 잡아먹는다거나, 햇병아리를 잡아 인삼과 대추, 찹쌀을 넣은 삼계탕(蔘鷄湯)을 먹기도 하며, 삼복 더위에 악귀가 몸 속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악귀가 무서워하는 붉은 색의 팥죽을 쑤어 먹기도 한다.

7) 7월 세시풍속

칠석(七夕)이 있는데 7월 7일을 말한다. 이날은 천상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라고 하며, 칠월 칠석을 전후해서 여름 장마철에 습기가 배어 눅눅해졌던 옷이나 책을 내어 말리기도 한다.백중(百中) 풍속은 7월 15일로 백중(百中), 백종(百種), 백중(百衆), 중원(中元),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부른다. 농사를 거의 다 지어놓고 추수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이므로 이날은 모두 일을 하지 않고 논다.
호미씻이(洗鋤宴)란 7월 보름쯤 되면 이제 농사도 거의 끝났기 때문에 호미를 씻어 두는 것을 말한다. 이를 초연(草宴), 풋굿, 농장원 놀이라고도 한다. 이날 부잣집에서는 그동안 농사를 짓느라 고생한 머슴에게 마포잠방이를 한 벌씩 해주고 우장에 삿갓을 씌워 소를 태워주며 술과 음식을 대접한다. 또 어느 집 농사가 가장 잘 되었는가를 보아서 그 집의 머슴을 농장원(農壯元)으로 뽑아 축하하며, 주인집에서는 음식을 내와 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8) 8월 세시풍속

한가위인 8월 15일은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로 추석(秋夕), 가위, 중추절(仲秋節), 가배일(嘉俳日)이라고도 한다. 이날엔 아침 일찍 새옷으로 갈아입고 1년 동안 지은 농사의 수확물을 가지고 조상께 차례를 올린다. 차례가 끝나면 며칠 전에 미리 벌초(伐草)를 해둔 산소에 찾아가 성묘을 하며 조상의 덕을 기린다.
추석음식에는 햅쌀로 밥을 짓고 떡을 한다. 추석의 시절 음식으로 송편(松餠)떡이 있고, 무와 호박을 섞어 시루떡도 만들며, 찹쌀가루를 쪄 떡을 만들고 거기에 볶은 검은 콩가루나 누런 콩가루, 깨소금을 무친 인절미(引餠)을 만들기도 한다. 이때 나오는 햇과일에는 감, 밤, 대추, 사과 등이 있다.올베심리로 추석 무렵 벼가 익게 되면 벼이삭이 잘 영근 부분만 골라 훑어서 솥에 넣고 볶는다. 이것을 올벼쌀이라 하는데 이 햅쌀로 밥을 지어 차례상에 올리기도 한다.

9) 9월 세시풍속

농촌에서의 9월은 무척 바쁜 계절이다. 한로(寒露), 상강(霜降) 무렵이면 농가에서는 목화따기나 콩·팥·수수·조 수확과 함께 벼의 가을걷이를 하며 무·배추·고추 등을 거두어 김장 준비도 해 둔다. 또 한편으론 가을보리도 심어야 하며 마늘도 심어야 한다.

10) 10월 세시풍속

시제(時祭)는 시향(時享), 시사(時祀)라고도 한다. 집안에서는 4대봉사(四代奉祀)를 하고 5대조부터는 산제(山祭)로 모시는데 이를 시제라 한다. 시제날에는 원근의 자손들이 모두 모여 음식을 직접 장만해 온다거나, 문중답(門中畓)을 부쳐먹는 산지기에게 음식을 준비시켜 제사를 올린다. 이날은 원근 일가친척들이 서로 만나 안부도 묻고 문중회의도 개최하여 문중사를 논하며 조상의 덕을 기리기도 한다.
조상단지 모시기는 10월 각 가정에서 성주신을 모시고 제사를 올린다. 조그만 단지를 마련하여 그 안에 들어 있던 묵은 곡식을 비우고 새 곡식을 넣는다. 이를 세존(世尊)단지, 제석(帝釋)오가리라고도 한다.

11) 11월 세시풍속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때를 동지(冬至)라고 하며 아세(亞歲), 작은설이라고도 하는데 이날에 붉은 동지팥죽을 쑤어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여긴다. 또 이 팥죽을 부엌, 대문, 장독 등에다 뿌리기도 하는데 이는 잡귀를 물리치려는 축귀(逐鬼)의 행위이다.

12) 12월 세시풍속

섣달 그믐 행사는 12월 30일에 1년의 마지막 날로서 제야(除夜), 제석(除夕)이라 부른다. 연중의 거래를 종결짓는 날이어서 빚이 있는 사람은 해를 넘기지 않고 모두 갚는다. 또 받을 것이 있으면 미리 받아야 하며 해를 넘기면 정월 보름까지는 빚 독촉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다대청소 행사로 섣달 그믐날 새해를 맞기 위해 집안을 구석구석 청소한다. 마당을 쓸고 거미줄을 털며 헛간이나 외양간도 깨끗이 치운다. 묵은 해의 잡귀나 액운을 모두 물리치고 새로운 해를 신성한 마음가짐으로 청결하고 경건한 가운데 맞이하려는 것이다.

폭죽(爆竹)놀이는 제야의 자정 무렵에 마당에 불을 피우고 그 위에 생대를 올려 태운다. 그러면 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지는데 이를 폭죽, 대불놀이라고도 한다. 이 소리를 듣고 집안에 있던 잡귀들이 모두 놀라 도망치고 만다는 것이다.

수세(守歲)란 섣달 그믐날에 다락, 마루, 방, 부엌, 마당, 곳간, 변소에 모두 불을 켜 놓는다. 또한 윷놀이 등을 하며 모두 잠을 자지 않고 날을 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잡귀가 끼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이날 아이들은 일찍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하여 잠을 자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혹 자는 아이가 있으며 눈썹에 밀가루나 쌀가루를 묻혀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게 해 눈썹이 세었다고 놀리기도 한다.

13) 윤달(閏月)의 세시풍속

태음력(太陰曆)만으로는 계절의 흐름을 정확히 알 수가 없으므로 4년에 한번씩 윤달을 두어 맞추는데, 이를 공달, 덤달, 여벌달이라고도 하며, "송장을 거꾸로 세워도 탈이 없다."고 할 만큼 무슨 일을 한다 해도 지장이 없는 달이다. 집수리나 이사를 해도 부작용이 없으며, 궂은 일도 일부러 이때를 가려서 한다.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집에서는 윤달에 미리 수의(壽衣)를 지어 두기도 한다.

[표 7-15] 장성 지역의 세시풍속 전승 현황(장성군사, 마을사. 자료 참고)

장성 지역의 세시풍속 전승 현황 - 리 동 마을명 (읍면), 전승보존 리 동 마을명, 비고 제공 표
리 동 마을명전승보존 리 동 마을명비고
읍 면
장성읍수산, 성산, 영천, 유탐, 구산, 오동촌, 기산, 장안, 안평, 백계, 상오
진 원율곡, 산정, 남계, 평촌, 진원, 작동, 산동, 학림, 용산, 상림
시목, 마산, 신흥, 자풍, 내가, 외마, 선창, 선평, 행정, 검정, 불정, 월산, 삼태, 월곡
동 화가정, 동계, 구산, 통안, 황산, 월산, 덕산, 동호, 송계
삼 서학산, 월악, 대곡, 어랑, 우평, 박중, 학성, 대도, 월곡, 우치, 금산, 석마, 보생, 홍정, 두월
삼 계송각, 월산, 도동, 나신, 금성, 성산, 능성, 수옥, 발산, 생촌, 내계
황 룡방곡, 와곡, 목정, 월암, 원황룡, 중동, 필암, 선촌, 아곡, 통안, 관동, 와우
서 삼임곡, 덕산, 초곡, 모암, 덕평, 축암, 송계, 금계, 신평, 용흥
북 일오산, 죽림, 교촌, 월곡, 율리, 구해, 성덕, 궁평
북 이묘동, 조산, 원덕, 신창, 백암, 죽청, 만무, 신월, 모현
북 하중평, 월성, 대악, 용두, 대흥, 성암, 쌍웅

2. 민속놀이

원본파일 다운로드

민속이란 민중 속에 남아 있거나 전해지는 풍속이나 생활을 말함이요, 놀이란 마음의 충동에 의해 몸을 움직임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지속되고 소리음악과 율동에 맞추어 피로를 덜고 삶의 질을 재충전하기 위하여 공동사회의 필요에 따라 구속력을 가진 습속으로 맥락을 이어올 때 민속놀이라 한다.따라서 재미 본위의 오락, 일정한 방법 절차에 따라 행했던 유희, 말과 동작을 재주부리는 유희든 간에 그 속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슬기, 멋이 합일되어 오랜 세월동안 갈고 닦아온 지행의 복합체라 할 수 있다.

시대적으로 전승되어온 놀이가 생활양식과 사회변화에 따라 소멸·변형·생성되어 왔는데, 1960년대까지 다른 지방과 공통적이거나 특이한 것은 도표화하여 정리하고 우리 지역에서만 행하여지고 있는 민속놀이는 요약 정리한다.

이렇듯 민속놀이는 일상의 속박이나 의무감에서 자유로운 시간 공간에서 개인 집단이 공동체적 황홀감을 경험하면서 새생활에 활력을 제공하는 특수 문화적 기능을 갖게 되는 것이다.우선 민속놀이는 제의적 신성성보다 민간적 오락 중심으로 이행되면서 전래되고 있지만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성 별 상 : 남자놀이(씨름), 여자놀이(그네), 남녀놀이(줄다리기)
인 원 상 : 개인놀이(돈치기), 단체놀이(고싸움)
민속예술상 : 연극놀이(굿, 탈놀이), 민속악 놀이(농악)
장 소 상 : 실내놀이(윷놀이, 화투놀이), 실외놀이(연날리기, 팽이치기)
오 락 상 : 경기놀이(편싸움), 곡예놀이(줄타기)
계 절 상 : 정월놀이(썰매타기, 쥐불놀이), 봄놀이(화전놀이), 여름놀이(강변, 수류천엽놀이)
주 체 상 : 어린이 놀이(제기차기), 어른 놀이(활쏘기)

* 민속놀이의 명칭과 종류

공기놀이, 줄넘기, 목마타기, 땅뺏기, 술래잡기, 자치기, 팽이치기, 비석치기, 구슬치기, 공치기, 못치기, 딱지치기, 나무치기, 돈치기, 성냥치기, 수건찾기, 눈싸움놀이(眼,雪), 닭서리, 외 수박 복숭아 감서리, 투전 화투놀이, 그림자놀이, 윷놀이, 가마타기놀이, 어름타기, 흙 옴칠하기, 고무놀이, 연날리기, 그림자놀이, 장기 바둑놀이, 씨름, 농악놀이, 활쏘기, 단추돌리기, 독줍기, 널뛰기, 그네놀이, 토끼풀 시계놀이, 들독놀이, 바람개비놀이, 불싸움, 질갱이 싸움놀이, 줄다리기, 팔 다리 씨름하기, 풀(버들)피리 불기, 동글태 굴렁쇠 굴리기, 복도훔치기, 지신밟기, 기우제모시기, 다리밟기, 강강술래, 비녀돌리기, 쌍륙, 화전놀이, 갈퀴놀이, 솔방울장치기, 승경도놀이, 가마싸움, 방아개비놀이, 엿기, 깡통치기, 군사병정놀이, 어깨동무, 풍뎅이 돌리기, 고무줄놀이, 원님놀이, 각시놀이, 독장수놀이, 손뼉치기, 소문놀이, 기차놀이, 시소놀이, 솟걸이, 두꺼비 집짓기, 풀각시놀이, 앉은뱅이 놀이, 신랑놀이, 두레놀이, 편싸움, 길쌈놀이, 달집 태우기, 용호놀이, 탑돌이, 농기싸움, 장군놀이, 사냥놀이, 뱃놀이, 들놀음소리놀이, 장태놀이, 용신굿놀이, 풍장굿놀이, 굿놀이, 초군놀이, 문굿 마당굿 놀이, 백중놀이, 대동놀이, 성쌓기놀이, 도깨비굿 놀이, 지경돋우기놀이, 목도놀이, 상여놀이, 액막이놀이, 집짓기놀이, 장태놀이 등이 전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읍 면 마을사 자료)

(1) 농악놀이

장성농악은 삼도 굿 농악에서 아랫다리에 속한 산악 내륙지방이기에 농경사회 노동 풍장 농악과 유림 생활권의 당산제의 의식 행사 농악 불교사찰 건립의 걸립굿의 다양성을 공유하면서 동화면 최화집(상쇠명인)에 의해 우도농악의 근간을 이루어 왔는데, 농파 유흠선과 영광, 고창 농악 마을 순회 지도로 크게 번창되었음을 기록문헌으로 증명하고 있다.

근간에는 읍 영천리 양인석, 북일 갑동 김상운, 서삼 해평 반재종, 삼계 생촌 고택진, 동화 송계 이상룡, 남면 삼태 박봉삼에 이어져 전통적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편성은 앞치배(꽹과리, 징, 장고, 북, 소고)와 잡색들의 뒷치배와 농기 영기의 기수단, 쇄납, 나팔수로 나뉘어지고 복색은 5방 3색으로 나팔깔, 담배씨, 고깔을 쓰고 가락은 일곱마치 7채 긋물 소리를 울리는 특징이 있다.

연희 순서는 판 어울림굿, 당산굿(정문삼채, 인사굿, 오방진굿, 영산 다드래기 짝드름, 28숙), 인사굿, 철룡굿, 액맥이굿(마당밟이, 샘굿, 마당굿, 구정 개인놀이, 성주굿, 조광굿, 장꼬방굿, 노적굿), 판굿(개인 부문놀이, 채7채까지로 잦은영산, 풍년굿, 호호굿, 개인놀이, 노래굿, 도둑잽이, 등밀이굿), 날당산굿, 문굿, 퇴장 인사굿으로 이루어진다.

(2) 백암산 국기제

국가에 환란이나 재앙이 있을 때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어 국태민안을 기원했던 무속, 불교, 유교적 제의행사이다. 백암사에는 고려 충정왕 때도 국기제를 봉행했고, 백양사 정토사적지와 증보 문헌비고에는 조선 선조 36년 현종 2년에 호남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여 국왕이 제문을 짓고 홍문관 교리를 제관으로 종파를 초월 관민이 합동제의 했으며, 인근 7∼9개 고을 원님이 집사가 되어 지내게 되었는데, 1983년 이병직 문화원장, 백양사 용운스님, 박내경 등이 발굴 재현 남도문화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이후 국기제 보존위원회가 결성, 제단을 설치, 신문을 건립하여 매년 행례절차에 따라 지내고 있다.

(3) 목도놀이

목도놀이는 옛날에 무거운 짐을 운반 이동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2,4,6,8,10,12인의 협동정신과 공동체의 힘을 발휘하여 나무버리기, 다리놓기, 묘석운반, 땅다지기, 생활도구(혹돌, 절구통, 구시, 디딜방아, 연자방아) 등을 선소리(선창) 받는 소리(후렴)로 '어영차',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올라간다', '내려간다', '뫼시어라 명당지지로' 하면서 어깨 멜빵에 목도 행렬로 재료를 이동, 필요한 위치로 옮기는 노동희이며 주로 산, 들, 둑에서 이루어지고 삼서 학성, 북하 용두, 대악, 신성, 진원 고산, 북일 문암, 북이 달성, 삼서 학성, 남면 마령, 동화 서양, 서삼 축암 마을에서 행하여지고 있다. 집짓기의 상량놀이와 토역 운반에도 산간지방에서는 이루어진다.

(4) 산상 기우제

날이 가물면 읍 면 마을별로 무젯등, 용소폭포, 너럭바위, 천룡, 당산목 주위에서 제관, 축문을 미리 정하여 주(술), 과(과일), 병(떡), 돼지머리 육고기를 마련하여 쌀, 건포, 촛불, 향불, 소지, 땔감을 짊어지고 가서 유교의식 기우제를 지냈다. 수맥 혈등에 이장한 부정한 묘소를 파내고 방뇨를 하며 시장 민가를 돌면서 구름몰이와 각 가정에 현병을 달고 금기사항을 지키면서 강우를 기다린다.
읍, 면별 5∼7개 마을에서 지금도 기우제 관행을 경험한 증언을 조사할 수 있었는데 자세한 실행 내역은 장성 마을사에서 밝혀두었으니 참조하였으면 한다.

(5) 액막이놀이

정월 보름에 거의 당산제를 행하였던 마을에서 그 해 마을 사람들이 화재, 풍해, 병해 등 각종 재난의 액운을 막고 물리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솟대(짐대) 장승을 세우고 액막이 놀이를 하는데 북이 선평, 북하, 쌍웅, 동화 동계, 진원 선동 마을에서는 지금도 행하고 있다.

(6) 풍장 놀이(서삼면 송현리, 동화면 월산리, 구산리)

백중날 행해지는 가장 인기 있는 놀이로 마을에서 혹은 들에서 누구의 농사가 제일 잘 되었는가에서 비롯된다. 누구나 장원 농가로 결정되기를 원했으며 장원으로 결정된 논의 주인은 성찬을 마련하고 술을 빚어 잔치를 준비한다. 마을의 모든 농군들과 머슴들은 장원 집 황소를 가져다 비단, 무명베 등으로 울긋불긋한 굴레를 만들어 머리, 목 부분에 걸어 단장을 하고 소등에 안장을 만들어 씌운다. 장원집 머슴에게는 볏짚이나 대풀로 모자를 만들어 씌우고 수수깡으로 안경을 씌우고 솔잎으로 수염을 만들어 달고 양볼에 숯검정을 칠하여 양손에 어사장화를 들고 소에 태우고 마을 장정들은 징, 꽹가리, 소고 등 질지심 농악을 치며 장원답으로 간다. 논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마을로 돌아올 때까지 흥에 겨운 농악이 절정에 이르며 소를 탄 머슴은 개선장군처럼 위세를 부려 다른 머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장원집으로 오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잔치가 벌어지며 부근에서 모여든 거지들도 한패를 이루어 술과 음식을 얻어먹고 한쪽 구석에서 '장타령'으로 풍작을 기원해 주기도 한다. 이 풍장놀이는 하루를 놀고 즐기는 놀이로, 궁극적으로는 서로 농사 장원을 하려는 선의적인 경쟁심을 유발하게 하였다.
이는 곧 생산증대와 직결된 생산적인 민속놀이로써 오늘날 벼농사 다수확 경진대회가 그 당시도 있었다고 보아 이 놀이에서 선조들의 슬기를 배울 수 있다.

(7) 길쌈놀이(진원면 진원리, 삼서면 금산리, 장성읍 유탕리)

장성 길쌈놀이는 1978-1985 남도문화제에 출연하여 전승되어 오고 있다. 작업과정은 삼째기, 삼삼기, 물레돌리기, 실것올리기, 실 것빨기, 염색하기, 삼거슬기, 실것내리기, 베날기, 베매기, 실꾸리 감기, 베짜기 인데 작업시 부르는 노래는 생략한다.

(8) 미도(未倒)지기 놀이(삼계면 사창리)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에서 행해지는 민속놀이다. 두레농사 일의 한 방편으로 이 마을 송진사댁(조선 명종때)에서 가을 곡신인 벼를 지게에 짊어 운반하는 작업에 마을 일꾼들이 일찍부터 공동작업을 벌이는데 게으름을 피우다가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작업장에 도착한 일꾼은 먼저 온 사람의 몫까지 벼다발을 한 두 단씩 더 자기 지게에 젊어지게 되는 절차를 노래와 놀이로 행하여 홍과 멋 또 공동작업의 효율성을 기하는 규율적인 농군들의 놀이다.

(9) 사냥놀이(남면 죽분리, 부하면 월성리)

우리 고장은 남도 지방의 내륙 산간을 이룬 곳이라 사냥놀이를 즐겼다 한다. 사냥놀이를 하기 전에 산신령께 산신제를 지내고 사냥의 좋은 성과를 거두도록 기녀가 고사춤을 추면서 흥을 돋구게 했다고 한다. 산신령인 호랑이는 잡지 못하게 되었으나 포수들은 호랑이를 포획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고, 정당 방위로 호랑이와 싸우다가 잡는 수도 있다니 호랑이를 잡으면 관가에 가서 신고를 하는데 원님은 준엄한 심판을 하여 초단 3대와 쌀 서말, 미역 세 가닥을 상으로 받으면 교군들은 포수를 가마 위에 태우고 흥겹게 노는 놀이로 이는 자기 보호와 전쟁의 감투정신을 기르는 놀이라 하겠다.

(10) 장태놀이

황룡면 옥정리(玉井里)는 물이 좋고, 임곡면 광산리와 경계한 토말(土末)마을은 마을 형국이 용이 날면서 비를 몰고 온다는 지형이어서 비룡토우지세(飛龍吐雨地勢)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천도교주인 이춘영씨는 1862년 삼계면 백산리에서 태어나 한학의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17세때 남원 운봉산 이집록 가정에서 최해월 신사(神師)께 직접 전수 입교하여 수도 공덕과 실천궁행인으로 명성이 높던 차 갑오(1894) 8월에 전북 정읍 고부에서 전봉준 장군의 동학혁명이 봉기되자 황룡강변에 대장깃발을 세우고 나주 가정리의 송영직 집에서 대나무 450본을 벌채 운반하여 대나무 장태를 만들고 그 속에 볏짚을 넣고 관군과 접전하여 승리를 이끈데서 유래되어 황룡 시장터에서 전승되어 온 놀이이다. 대나무 장태를 굴리면서 적군에 근접하여 적을 사살했던 전쟁놀이로 일제시대에도 행했던 놀이이다. 지금은 홍길동 축제 행사에 시연으로 출연하고 있다.

(11) 집짓기 놀이(북하면 중평리, 진원면 고산리)

장성군 북하면 중평리는 노령산 밑 백양사 입구에 있는 마을로 곶감과 문종이가 생산되는 민박촌이다. 전국에서도 유일하게 집짓기 놀이와 민요가 체계있게 전승되어 오고 있다. 건축양식과 작업과정이 옛날과도 다른 현재에도 전해지고 있고, 진원면 진월리 마을에 재현되어 남도 문화제 행사에 출연했다. 종합 예술과도 같은 한 채의 집을 짓는 데는 어려움과 고달픔이 따르기 마련인데, 이렇게 힘든 일을 흥겹고 능률적으로 해내는 놀이다. 옛날 이 마을에 김진사라는 분이 계시었는데 범사가 바르고 문필이 유려하며 덕망과 신임이 두터웠지만 가세가 빈한하여 삼순구식(三旬九食)이 되었어도 대인접객이 상하 차별없는 훌륭한 어른이시라, 마을에서 허참봉을 비롯하여 온 주민이 목재와 재료 노력을 자담하여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는 유래도 전하고 있다.

(12) 용굿놀이(북하면 남창리)

장성댐으로 들어간 북상면에 수성(水城), 용강(龍岡), 용곡(龍谷), 용암(龍岩), 동연(銅硯) 마을에서는 음력 4월이 지나도록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고 용굿을 하여서 비가 내리면 농사일을 서둘러서 하는 풍속이 있었다. 용굿놀이는 북상면 마을 주민들이 참대(竹) 가지와 흰배 진흙으로 용의 머리와 몸을 만들어 수성리 덕재리 도로가에 굼틀하게 뻗어내린 후 각 가정에서 짚단 화목을 남녀가 들고 나와 성미 산성에서 관민이 합동하여 기우제를 지내고 용굿놀이를 한다. 용굿놀이는 무당 농악대가 징과 장고 소리를 은은하게 울리고 용의 전신 주위를 싸고 돌며 활무춤을 추면서 '천신(天神)이여 용왕(龍王)이여 단비를 내리소서' 축원하면서 용굿을 계속한다. 이렇게 해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이제 입암산성에 올라 불을 피우고 파묘(破墓)로 청장년들은 묘파기를 하고 깨끗한 처녀가 산중턱에서 오줌을 싸면 하늘신이 노하시어 부정함을 씻기 위하여 비를 주신다고 믿기도 했다.

물과 관계있는 동네 앞산의 흙을 긁어내려 비가 내렸다는 전설이나 북하 쌍웅리, 동화 동계리의 연신 설치를 보거나 오늘날에 북상면 거의가 장성댐으로 수몰되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끝으로 장성지역에서 1950. 6. 25.이후 1960년대 새마을 사업이 이루어지기 이전까지 농악을 비롯한 민속놀이가 비교적 잘 전승되었던 읍 면 마을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 7-16] 1960년대 이전 장성지역의 농악 전승 읍·면·리

1960년대 이전 장성지역의 농악 전승 읍·면·리 - 리 동 마을명(읍면), 전승보존 리 동 마을명 비고 제공 표
리 동 마을명전승보존 리 동 마을명비고
읍 면
장성읍영천, 성산, 기산, 장만, 덕진, 상오, 백계
진 원율곡(영신), 덕천, 학전, 산정, 진원, 작동, 산동, 학림, 용산
죽분, 녹진, 회룡, 자풍, 덕성, 연산, 선창, 선평, 백운, 장평, 평산, 월산, 불정, 월산, 월곡, 삼태
동 화가정, 동계, 구산, 남평, 구룡, 송계, 초지, 송사
삼 서송곡, 대곡, 장동, 삼봉, 초정, 어랑, 계동, 계산, 저전, 학성, 대도, 월곡, 우치, 금산, 석마, 보생, 흥정, 두월, 수양
삼 계금성, 부연, 월산, 이곡, 도동, 죽탄, 신사, 성산, 발산, 만화, 죽림, 숙호, 내계, 생촌
황 룡월산, 월평, 구대해, 원황룡, 월암, 하사, 아곡, 호사, 관동
서 삼장산, 해평, 금정, 세포, 송계, 금평, 태암, 여고
북 일남부, 갑동, 신흥, 박산, 교촌, 계광, 송촌, 평암, 궁평, 광암
북 이사남, 사북, 묘동, 달성, 궁동, 명정, 선평, 용산, 성부, 동산, 부동
북 하약수, 성암, 월성, 대악, 용두, 쌍웅, 중평, 성암, 대흥, 가인, 월성, 대악, 용두

3. 민간신앙

원본파일 다운로드

민간신앙이란 민간인의 자연적 신앙, 즉 민간인이 믿는 신비성을 지닌 자연적 종교를 의미한다. 이러한 민간신앙은 그 영역을 계절제, 가신신앙, 동신신앙, 무속신앙, 독경신앙, 자연물신앙, 영웅신앙, 풍수, 사귀신앙, 점복, 예조, 금기, 주술, 부적, 민간의료 등으로 세분화하여 목적과 형태를 구체적으로 발휘하기도 하고, 크게는 개인신앙과 집단신앙으로 구별하여 개인신앙은 가신, 무속, 독경, 풍수, 자연물, 점복, 예조, 민간의료 등을 들 수 있고, 집단신앙인 동신 신앙으로는 당산제, 지신밟기, 차례, 신년제가 해당된다.

(1) 가신신앙

가신신앙이란 가정의 각 공간마다 각기 그 공간을 관장하고 있는 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가업의 번창과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가족 중의 주부가 제사 및 고사 등을 정기적으로 혹은 부정기적으로 지내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가택신앙, 가정신앙 등으로도 불리우고, 마을신앙과는 달리 혈연 중심이면서 개인신앙이라 할 수 있다. 전통사회라는 신앙공간을 배경으로 전승되어 온 가정신앙은 집안 위주로서 개인 중심의 신앙이지만, 주부들이 주가 되어 여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신앙이다. 특히 가부장적인 전통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위치를 지켜주는 구실을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주부들이 주가 되기 때문에 형식성이나 이념성을 가진 유교적인 조상제사와는 달리 소박하고 다분히 현실 지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가정신앙에서 여성들의 신앙적 대상이 되고 있는 신격들로는 조상신, 성주신, 조왕신, 측신, 업신, 철륭신, 문간신, 삼신 등이다.

조상신은 한 가정에서 명절이나 4대조의 조상까지 제삿날에 제사를 지내 선영들의 뜻을 받들어 모신다. 주로 조상에 대한 제사는 남자들이 중심이 되어 유교식의 예법에 따른 기제(忌祭)나 시제(時祭)가 있으나, 이외에도 가정의 주부가 중심이 되어 행해지는 신앙의례도 있다. 조상신은 각 가정에서 신주단지, 세존단지, 조상단지, 제석, 지석오가리 등으로 불리는 신체에서 구체화된다.

남도지역에서 조상신 신체의 유형을 보면, 먼저, 단지에 곡식을 가득 채운 뒤 지역에 따라서는 엽전이나 의류를 함께 넣어 창호지로 봉한 다음 안방 시렁이나 구석에 모셔 두는 형태이다. 장성지역에서는 단지에 주로 햅쌀이나 나락을 넣는다. 햅쌀을 갈아넣을 때는 주부가 목욕재계를 한 다음 옷을 갈아입고서 교체한다. 이 때 묵은 쌀은 밥을 지어서 가족들끼리만 먹는다. 두번째로, 주머니를 만들어 쌀을 넣어 안방 벽에 걸어 놓는 형태이다. 세번째로, 석작 속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성명을 기록한 한지를 넣어 성주 머리에 안치하는 형태이다. 이는 일부지역에서 나타난다. 네번째로, 4대조의 위패를 모신 감실을 안방 선반 위에 모셔 두는 형태이다. 감실은 조선조 사당의 영향으로 사당은 경제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소유할 수 있는 것이어서,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가정에서는 사당 대신 감실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섯번째로, 조상의 사진을 안방 벽에 걸어 두는 형태이다. 이는 최근에 형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장성지역에서는 단지 형태의 신체가 일반적이었으나, 근래에 단지류의 지석오가리는 사라졌으며, 다만 위패를 봉안한 감실이나 사진을 모시는 경우가 지속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장성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조상신에 대한 신앙 행위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보아 오래 전에 단절된 것으로 생각된다. 조상단지는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명절에 지내는 차례상에서 조상신과 성주신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차례 상은 지앙상과 성주상 그리고 선영상(조상상)을 차린다고 한다.

최고의 가옥신인 성주는 가옥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집안의 제일의 주신 격으로서 성주대감, 성주 조상이라 하기도 한다. 성주 신은 조상신처럼 장손의 집에서만 모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거주하는 주택이면 모두 모시는 신격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신격이다. 성주 신은 가옥의 상량(上樑) 때에 대청의 대들보 위에 봉안되고, 다시 낙성 때에도 모셔질 뿐만 아니라 매년 10월 상달에는 제신으로 해서 안택의 굿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성주신의 신격은 가내의 제일 주신 격으로 집임자, 상량신등으로 주관되었고, 여기에 조령신과 곡령신적인 관념까지도 곁들이고 있어서, 가내의 평안, 농상의 풍년, 부귀, 번영, 무병, 어린아이들의 질병까지도 치유되기를 기원하는 제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치성은 명절이나, 생일, 조상의 제삿날 등의 시기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장성지역에서는 현재 성주신의 신체는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명절날에 성주 상을 차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주는 대청 구석이나 대청 대들보, 안방 윗목, 안방 문설주 위 등에 모셔지는 것으로 지역에 따라 다르다. 장성 지역의 장손 집에서는 주로 대청 마루 구석에 모시는 경우가 많고, 차남 이하의 집에서는 주로 안방에 모시는 경우가 많다. 장성 지역에서 성주동우는 오래 전에 단절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성주신앙에 대한 흔적은 아직도 엿볼 수 있다. 장안리, 원황룡, 진원 고산마을 조사에 의하면 성주단지인지 조상단지 구별 할 수 없고 10월에 갈아주고 단지에 있는 쌀은 밥을 지어서 가족들만이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명절에 지내는 차례상에서 조상신과 성주신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차례 상은 지앙상과 성주선 그리고 조상상을 차린다고 한다.

조왕신은 조왕님, 부엌신, 조왕할매, 조왕대감이라고도 불리며, 그 신격은 화신(火神), 재물 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조왕이 화신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불을 때는 아궁이를 맡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재물신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궁이에 불을 땜으로써 음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왕신왕은 특히 부녀자들의 전유물처럼 되어 버린 것 중의 하나로써 가장 모성적으로 기울어진 신앙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지극히 조왕신왕은 자녀들에 대한 정성을 쏟는 신앙 대상이 되기도 한다.

조왕은 부뚜막 뒤 중앙 정면에 흙으로 조그만 단을 만들고, 그 위에 작은 중발을 올려놓아 둔다. 이것을 조왕중발, 조왕보세기, 혹은 조왕물그릇이라 부르는데, 그 중발에는 언제나 물이 채워져 있다. 이 물은 주부가 아침 일찍 일어나 매일 우물에 가서 길러다 물을 갈아 준 것이다. 조왕신앙은 주로 주부가 정월 보름이나, 유두, 백중, 추석, 섣달, 그믐날 등 세시명절에 정성스럽게 가장이나 아이들의 복을 기원하며 특히 객지에 출타한 사람이 있으면 출타한 사람의 안전을 기원하는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이 주택의 개량으로 많이 단절되었으며, 비록 읍내 농촌 산간지역이라 할지라도 가족 중에 운수업을 하는 가정에서는 아직도 조왕신이 지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삼신은 삼신 할머니라고도 불리는 데,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여신(女神)으로서 기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출산 및 육아 그리고 산모의 건강까지 담당하는 신격으로 받들어 모셔져 왔다. 더군다나 산모가 의학의 도움을 받지 못한 옛날에는 산모나 아이의 사망률이 많았기에 삼신신앙은 주부들에겐 중요한 신앙 중에 하나였다.

삼신의 신체 봉안은 남도지역에서는 주로 바가지에 쌀을 가득 담고 그 위를 창호지로 덮은 뒤 금줄을 동여매어 아랫목 시렁 위 한쪽에 모셔 두기도 한다. 햅쌀이 나오면 바가지의 쌀을 햅쌀로 바꾸어 넣는다. 장성지역에서는 지앙상이라 하여 상위에 쌀을 부어 놓고, 그 곁에 미역과 정화수를 올려놓은 형태가 일반적이다. 미역은 애기를 출산할 달에 마련하여 지앙상에 올린다. 만약에 미역을 마련해 두었는데 애기를 달을 넘겨 출산할 경우는 다시 미역을 준비하여 사용한다. 미역을 살 때 상인이 미역을 어떻게 어떤 것으로 묶어 주는가를 보고 아들인지 딸인 지의 성별을 점치기도 한다.

지앙동우나 지앙상의 쌀과 미역은 첫 국밥을 지어 산모에게 먹인다. 첫 국밥은 산모가 아이를 낳고 맨 처음 먹는 밥을 말하는 것으로, 산모는 첫 국밥을 먹기 전에 먼저 산모의 젓꼭지에 바른 다음 먹는다. 첫 국밥 뿐만 아니라 세 이레까지 끼니마다 이쌀과 미역으로 밥을 지어먹기도 한다.

철룡은 남도지역에서 일반적으로 뒤꼍 장독대 주위에 모셔지나, 천룡산(天龍神)으로 인식되어 지기도 하고, 터주라는 지신(地神)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장독대에 모시는 경우는 특별한 신체가 없고, 다만 철륭의 주변 나무는 절대로 베지 않는다고 한다. 철륭신에게 공을 드리고자 할 때에는 장독대에 정화수만을 차려 놓고 매일 물을 갈아준다고 한다. 이러한 신앙은 앞서 언급한 조왕중발과 유사하며, 주부들이 매일 혹은 7일, 17일, 27일에 목욕재계를 하고 장독대 간장 독 위에나 장독대 곁에 대발을 만들어 그 위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자손들을 위해 비손을 하기도 한다. 장독대에 차린 제사상을 철륭상이라고 부른다. 또 간장을 담근 후에 숯과 붉은 고추를 띄우고 금줄을 치거나, 아니면 버선의 모양으로 창호지를 오려서 거꾸로 붙여 놓기도 하는데, 이것은 간장의 맛을 지키기 위한 축귀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월 보름에 찰밥을 해서 장독대에 차려 놓기도 한다. 이 때 철룡의 신격을 하늘의 용, 즉 천룡(天龍)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다.

업신은 그 집안의 살림을 늘게 해 주기도 하고 집을 지켜 주는 신격으로서 재산신(財神)이라 말할 수 있다. 신체는 주로 뱀(구렁이, 도마뱀)이나, 족제비, 두꺼비들로, 경우에 따라서는 그 집안의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업을 지니게 되는 것으로도 믿는 경우가 있는데, 가령 그 집안 한 아이가 태어나면서 살림이 불어나고 가운이 일어나거나, 며느리를 새로 맞이한 이후 집안의 살림이 일어난 경우가 있다. 이 때 아이나 며느리에게 업이 들었다 하여 '업둥이' 라고 부르기도 한다.
업신의 신체는 주로 뒤꼍이나 지붕, 장작더미 속에 있다고 믿는다. 각 가정의 재복을 관장하는 업신의 신격이 있듯이 마을의 재복을 관장하는 업신도 있다. 장성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황룡이나 삼서 등지에서는 두꺼비나, 거북이 형상의 돌을 신체로 삼아 동네 앞에 놓고 마을의 재물을 지키기도 한다.

(2) 공동신앙(共同信仰)

공동신앙은 마을신앙, 동제, 당산제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서울·경기 지역에서는 도당제, 강원도 일원에서는 성황제, 영남지역에서는 골맥이제나 당신제 그리고 호남내륙권에서는 당산제, 동제, 당제라고 하며 서남해안 지역에서는 용왕제, 풍어제라 부르고 행해진다.

당산제는 자연부락 단위의 집단적인 종교행사로써 일정한 기간에 행해지는 정기의례이다. 장성권 일원의 당산제는 오늘날까지 현행되고 있는 예가 많지 않다. 일제치하, 6 25동란, 새마을사업 등 소위 민속의 3대 악재가 겹치는 가운데, 특히 시대상에 민감한 민간신앙이 크게 훼손되어 왔다. 또 대도시화가 되면서 역시 산업구조와 생활양식의 변화 등이 겹쳐 동일 문화권 속에 속하는 전남 지역보다도 당산제의 현행 밀도가 낮아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장성군의 당산제에는 동화면 구림리 구산마을 당산제, 삼계면 생촌리 당산제, 장성읍 유탕리 동제, 장성읍 오동촌 새암제가 있으며, 여기서는 유탕리 당산제를 소개한다.

유탕리 당산제

① 마을 현황

장성읍 소재지에서 동북방 2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지금부터 450여 년 전에 정송강, 이척 선생이 하청산 암자에 기거할 무렵 성촌되어 진씨, 이씨, 김씨가 터를 잡았다.마을 전후에 있는 원수통과 참샘이라 부르는 두 샘의 물줄기가 여인네 젖줄기와 같다 하여 유탄리라 불리웠으나 현재는 유탕이라 부르며, 185호에 1,000여명이 사는 장성읍에서 가장 큰 자연부락이다.

② 당산신격

당산 신격의 형태는 제를 지내는 신이 다섯 신으로, 주된 신인 천룡신 그리고 내당신, 상당신, 외당신, 연당신 등이다. 신체를 모시는 위패각은 없고 선돌과 당산나무(귀목과 팽나무)가 신의 대상으로 되어 있다.

천룡신 - 이 마을의 주된 신이며 수호신으로 마을의 윗쪽 용의 형태를 한 커다란 바위 위에 심어진 300년된 괴목이다.
상당신 - 마을의 동쪽에 위치한 선돌로 원래 할아버지 신으로 내당신인 할머니신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 십여 년 전 새마을 사업으로 도로 확장 때 마을 중앙에 있는 내당신과 함께 모셔져 있다.
내당신 -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선돌로(할머니신) 당산제를 모실 때는 그 옆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모신다.
외당신 - 마을의 입구 유탕천 옆에 있는 400년된 괴목으로 외부로부터의 질병을 막는 신이다.
연당신 - 부락의 남쪽 앞산 아래에 있는 팽나무로(옛날에는 솟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풍수설에 따라 득이 흘러간다 하여 제를 지내고 있으며,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잡귀, 액, 질병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당산제의 목적은 몇 년 전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무렵 부락 총회에서 동제의 존폐여부가 거론되었을 때도 이 마을에서 월남전에 20여 명이 출정했어도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고, 일제때 징용을 가서도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고 지금도 일본에서 잘 살고 있는 것은 이 동제를 지내기 때문이라고 하여 존속하기로 하였다.

③ 제사일시, 제관

제사일시는 정월 보름날 초저녁부터 시작하여 자정에 제사를 지낸다.
제관의 구성 및 역할은 주관 1명, 축관 1명, 화주 1명, 제관 4∼5명, 별좌 2명, 농악대 10여명, 운반하는 사람 10여명 등 30여명으로 구성되고, 이들은 정월 초 3일날 부락총회에서 선출하는데 제물의 준비자 외에는 남자로서 구성되며, 부락에서 덕망이 있고 나이가 많은 호주 중에서 부정하지 않고 생년간지를 봐서 결정한다. 결정된 이들은 정월 초 3일부터 제를 지내는 15일까지 초상난 곳, 출산이나 개고기 먹는 것을 피하며 부부관계도 하지 않는다. 만일 금기사항이 지켜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으로 보충한다. 가족이 죽은 후 2년간, 다른 사람의 장례식에 참가한 후 1년간, 출산 후 49일간이 지나야 제에 참가할 수 있게 된다. 이 기간에 사망자가 생기면 마을 안에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마을 밖에서 상을 치른다. 또 제일 3일 전부터는 매일 목욕을 하며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한다.

주관 - 이장이 담당하며 제사비용의 회계를 총괄하고 당산제의 대표자가 된다.
축관 -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분을 선출하여 천룡신과 내당신의 축문을 읽고 초헌관이 된다. 부락민을 대표하여 신에게 기원한다.
화주 - 제를 지내는데 필요한 제물을 준비하는 가정으로 생년간지를 가려 선정한다.
제관 - 제를 지내는 사람으로 헌찬, 소지, 음복을 행한다. 비교적 나이가 많은 호주 중에서 선정한다.
별좌 - 화주을 보좌하며 제물의 요리나 연료준비를 담당하고 제주를 도와준다.

④ 제사비용, 제물

제사비용은 '지붕머리돈'이라 하여 각 세대별로 지출하는데 쌀이나 현금으로 걷는다. 옛날에는 백미를 가구 당 한 되씩 균등하게 지출해 오다가 수 년 전부터는 대농가와 소농가에 차이를 두어 지출하고 있다. 요즘에는 부락의 공동답 수익으로 제사 비용의 일부를 충당하고 있다. 이 돈으로 음식물, 떡시루 등의 식기, 천막 등의 제구, 농악 준비물 등을 구입한다. 제물은 황룡시장에서 화주와 별좌가 구입하는데 오고 가는 도중 아무와도 말을 하지 않으며, 새벽에 가서 제일 좋은 물건으로 구입한다.
값은 에누리하지 않으며 주로 과일(삼실과)과 나물, 육류 등을 구입한다. 매년 떡시루나 제기 등도 새것으로 구입하여 사용한다. 제에 사용할 음식은 양념을 쓰지 않고 소금만을 넣어 만들며, 멥쌀은 부락의 공동답에서 생산된 것으로 미리 멥쌀용 벼는 따로 관리한다.

⑤ 제의 준비 및 과정

정월 3일(음력) - 오전 중에 당산제를 위한 부락 총회를 열어 동제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축관, 제관, 화주, 별좌를 뽑고 농악대를 선발한다. 오후에는 당산 주변을 청소하고 각 당산에 금줄을 치고 한지에 제신명과 제일 연월일을 써 붙인다. 이날부터 제관단으로 선출된 이들은 여러 금기사항을 준수해야 한다.

12일 - 시장에 가서 제물을 준비하고 화주댁 입구 길가에 황토를 일정한 거리로 뿌려 청정의 표시를 한다.
13일 - 동제준비위원회를 개최하여 제의 준비상황을 점검한다.
14일 - 아침에 당산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고 동네 입구와 화주댁에 금줄을 쳐 통행인을 통제한다. 오후에는 밤에 밝힐 화목을 모으고 농악대는 소리를 점검한 후 각 당신에 불을 밝힌다. 이날 저녁 9시경부터 농악대는 각 당신을 돌며 굿을 친다. 굿을 세 차례씩 치게 되는데 첫번째 소리는 제사지냄을 알리는 것이고, 두번째 소리는 제사를 지내니 내려 오셔서 마음껏 잡수시라는 것이며, 세 번째 소리는 제사의 끝남을 알리는 소리이다. 이 소리를 듣고 각 가정에서는 제사를 지내게 된다. 제사는 천룡부터 지내며 내당신을 지내고 외당신과 연당신, 마을공동 우물 순서로 지낸다. 내당산에는 짚으로 당집을 짓고 그곳에서 제를 지낸다. 농악에 따라 제를 올리고 축문을 읊고 나면 소지(燒紙)를 하며 한해의 복을 빈다.
제사가 끝난 뒤 떡은 마을 사람들이 골고루 나누어 먹는데 이는 그 해의 잔병을 막는 일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음식물을 물에 합하여(무례밥) 동네 입구에 버리고 잡귀를 달랜 뒤 조용히 제를 마친다.

15일날 아침에는 부락 총회를 개최하여 제에 대한 반성회를 갖고 효자와 효부를 표창하는데 효자, 효부에게는 많은 음식으로 상을 차려 대접하고, 불효자에게는 덕석몰이라는 것으로 훈계한다. 또한 향약을 개정하고 마을 공동사업을 협의한다. 이날 오후부터 마당 밟기라는 농악놀이로 들어가는데, 이 놀이는 집집마다 돌면서 가정의 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굿을 쳐주며 할머니들의 타령, 머슴들의 노래, 여러 가면극 등의 축제가 정월이 다 가도록 계속된다. 이때 각 가정에서 내놓은 돈으로 마을의 공동사업을 한다. 이 마을 동제의 특징은 전남도내 각 지방에서 일반적으로 모시는 당산제와는 달리 산, 우물, 천룡 각 당신을 위해 복합적인 제가 되고 있으며, 지붕머리돈이라는 것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부락민 전체가 참여한다는 것이다.

⑥ 축문

촌제일지는 1957년부터 기록 보존되어 있으며, 축문을 1919년에 작성된 원본이 보존되어 있으며, 천룡축과 당산축문은 생략한다.

(3) 무속신앙

무속은 무당을 주축으로 오래 전부터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는 종교 현상으로 장성지역에서는 6·25이전까지 관당골, 지역당골로 구분지어 활동했고, 1960년까지는 혈연적 가계의 무당은 대다수 이거해 갔으며, 사제 계승형의 무당, 점쟁이들이 법사(남자), 보살(여자)로 불리어 몇 개 마을 지역단위로 점복 생활로 생활유지 및 굿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무속제의의 굿은 축원굿, 성주굿, 치병굿, 중천굿, 명두굿, 씻김굿, 넋건지기와 망자 혼맞이굿, 내림굿, 삼신제왕굿, 액막이굿, 운수대통안택발원굿 등으로 구분된다.황룡교동(유○○)과 삼계 수옥(주○○)에서 일하는 무속인의 대담조사에서 보면 넋건져 씻김하는 굿은 축원굿, 넋건지기, 문굿, 안당굿, 초가망석 손님굿, 제석굿, 고풀이 씻김, 넋올리기, 손대잡이 길닦음, 배송종천굿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망자 혼사굿의 과정은 조왕굿, 성주굿, 지앙굿, 혼맞이 굿으로 혼인의례의 순서로 이로어 진다.일반적으로 사제지간 관계로 맺어지는 내림굿은 일정한 장소(강신 무당의 법당, 명산대첩, 산중암자)에서 무병을 앓아 신이 들렸을 경우에 신을 내림받아 전무적인 무속인이 되도록 하는 굿으로 주민전체가 공인되도록 크게 이루어 진다고 한다.

부자지간이나 고부 계승형의 세습무속인은 장성읍 수산, 성산 유탕(임○○, 유○○, 이○○), 삼가 월평(이○○, 유○○), 진원 학전(전○○, 유○○, 박○○), 남면 분향, 행정(정○○, 김○○), 동화 구림, 월산(김○○, 조○○), 삼계 능성, 발산(김○○, 강○○), 황룡 장산, 월평, 원황룡(정○○, 임○○, 유○○, 조○○), 삼서 수해, 대도(김○○, 조○○), 서삼(최○○, 차○○), 북일(임○○, 최○○), 북이(임○○, 신○○, 유○○), 북하(박○○, 김○○, 최○○)에서 활동했었고, 1960년까지나 현재에도 일하고 있는 지역은 도표명칭으로 대신한다. 장성지역(남도내륙지방) 무속신앙은 타지역과 대동소이하므로 특징과 무속인의 행위동작, 제복, 도구, 노래가사는 지면상 생략한다.

[표 7-17] 민간신앙의 전승 현황

민간신앙의 전승 현황 - 구분(지역), 개인/가정신앙, 공동/집단신앙, 전문/무속신앙, 비고 제공 표
구분개인, 가정신앙공동, 집단신앙전문, 무속신앙비고
지역
장성읍전지역, 집성촌구산, 오동촌(방구다리), 매화(영천), 유탕, 상오, 장안덕진, 수산, 월평, 유탕, 단광
진 원진원, 선동, 학림, 용산, 상림고산 고산, 산동, 율곡 영신, 선적
시목, 자풍, 덕성, 서촌, 백운, 삼태월곡, 장평, 신흥, 마령, 평산
동 화가정, 동계, 구산, 월산송계, 남산, 가정, 서양
삼 서삼봉, 어랑, 계동, 계산, 관음, 수양, 월곡, 인지, 송곡명주, 옥동, 유정, 우치, 금산, 호정
삼 계백산, 도동, 능성, 생촌, 내계수목, 성산, 쌍정, 마평, 발산, 복사
황 룡신기촌, 중동, 아곡, 금동,관동하사, 교동, 조산, 관동
서 삼축암, 용흥, 오정, 신평축암, 용흥, 오정, 송현, 장산
북 일갑동, 신흥, 계광, 누태, 장두 용암율리, 신흥, 용암
북 이복룡, 원덕, 목란, 신창, 금동, 명정용두, 월성, 백암, 동산, 상곡, 사가
북 하약수, 대악, 월성, 단전, 가인, 용두, 쌍웅, 동현쌍웅, 용두, 약수

4. 구비문학

원본파일 다운로드

(1) 전설

장성군은 긴 역사 만큼이나 많은 전설이 골골이 깃들어 있다. 필자가 장성군 마을사(장성문화원 간)에 실린 전설을 조사해 보니 무려 250 여편에 이르고 있다. 본 고는 지면 관계로 각 읍면 별로 제목만 적고 대표적인 몇 가지 전설만 소개한다.

장성읍 : 1. 개명당(구산) 2. 방울샘(오동촌) 3. 점낙치(충무2동) 4. 자점이골(삼가1동) 5. 못재(단광2리) 6. 호맘굴(장안1리). 7 배틀바위와 벼락바위(수산3리) 8. 부엉바위(수산2리) 9. 황금재(유탕1리) 10. 천연기념물 왕버들(봉덕리)

진원면 : 1. 함박금이(산정) 2. 찌개터(산정) 3. 배넘어재(선동) 4. 빈대와 선녀(선동) 5. 벼락선생과 도깨비(석전) 6. 학정봉 전설(고산) 7. 장군굴 전설(고산) 8. 아내의 도량(고산) 9. 달래고개(고산) 10. 쌍용꿈을 산 언니(고산) 11. 황새고개(고산) 12. 비단바우(진장) 13. 이장군굴(학동) 14. 서산정씨와 말명당(용산) 15. 3년간 죽었다 살아난 은행나무(산동) 16. 의기바위(고산) 17. 누에의 전설(고산) 18. 암 수 아기탑(고산) 19. 견훤의 출생 전설(고산)

남 면 : 1. 매화락지의 발복(분향) 2. 호랑이를 목침으로 잡은 이씨(죽분) 3. 처절한 복수(시목) 4. 공필장(孔弼張) 효자(녹진) 5. 돼지골(자풍) 6. 황룡강 물이 넘어온다는 전설(덕성) 7. 꿈과 현실(서촌) 8. 도둑잡은 당산나무(백운) 9. 사장골(서촌) 10. 남자바위와 여자바위(장평) 11. 불로 뜨는 명당(장평) 12. 가마봉의 옥녀(검정) 13. 서당골 폭포(검정) 14. 배가 넘나들던 뒷각재 잔등(검정) 15. 불정저수지(불정) 16. 역적의 터(불정) 17. 음부 샘(새터) 18. 찾지 못한 비석(아산) 19. 공양왕(금리) 20. 학 세마리(금리) 21. 인선(人線)(안평) 22. 배형국에 샘판 전(錢)씨(덕촌) 23. 가뭄과 파묘(신촌) 24. 왕궁이 생긴다는 전설(신촌) 25. 호미로 도랑을 판 오장사(신촌) 26. 신거무장 전설(신가리)

동화면 : 1. 배형국에 샘(가정) 2. 도둑이 들지 않는 마을(기산) 3. 산태바우(조산) 4. 용이 승천한 용월정(서양) 5. 쌀 나오는 석수암(서양) 6. 산태바우와 먹짐재(통안) 7. 도읍지가 될뻔한 임정(임정) 8. 청송심씨와 옥녀탄금 명당(인정) 9. 장군비(인정) 10. 삼용마을 팽나무(삼용) 11. 네무덤(4총산)(축내)

삼서면 : 1. 애기장군(삼계리 장동) 2. 돛대 바위(어랑) 3. 선바위(立岩)(유정) 4. 남천로(南天老) 묘와 묘비(내봉) 5. 입석바위(원촌) 6. 국전(菊田) 이명교(李明敎)(수침) 7. 용동의 지석묘(용동) 8. 행주혈에 샘(화해) 9 당산보 이무기(안정) 10. 도깨비 터(양현) 11. 흙무덤(조산등: 朝山登)(하죽) 12. 안개봉(일명 왕재등)(하우) 13. 가장솔밭(하우) 14. 선독골 처녀바우에 얽힌 전설(하우) 15. 연화도수혈과 비봉포란혈(죽산) 16. 쌀 나오는 바위(화산) 17. 긔목(마령) 18. 장군묘(월령) 19. 혼자 돌아온 애마(월령)

삼계면 : 1. 오가리 정굴 약수(금성) 2. 관음사 쌀바위(신억) 3. 학질 떼는 솔무덤(우봉) 4. 옛날 바다였다는 새터(월구) 5. 광산김씨 입향유래(백산) 6. 송흠과 청룡(정각) 7. 고심터 와우명당(도동) 8. 마을내기 바둑(쌍정) 9. 나나리 벌명당(나신) 10. 사령바위(죽탄) 11. 엽전 항아리(나신) 12. 가남정(신사) 13. 연기 통하는 두 개의 호랑이 굴(대부) 14. 바랑바우(서발) 15. 비방바우(월곡) 16. 지릿재와 효자 주처건(周處乾)(옥천) 17. 벼락바우(대화) 18. 귀바우(이암) 19. 한사동 샘(죽산) 20. 8장사 묘(죽림) 21. 문바우(생촌) 22. 시래떡 바우((생촌) 23. 남생이 바우(생촌) 24. 용초굴 명천수(추동) 25. 구랭이 보(추동) 26. 도깨비 둠벙(추동) 27. 인삼밭(추동) 28. 할미바우와 호랑이에 얽힌 이야기(추동) 29. 할미바우(추동) 30. 주천자 묘(부성) 31. 가랫재(생촌) 32.큰 당산나무(절암) 33. 호암(부성) 34. 산적의 너덜강(대동) 35. 치도골(사선) 36. 산나무 쌍다리(신정) 37. 왕총(신정) 38. 신비한 약수터(유천) 39. 도둑잡은 당산나무(군장) 40. 성황당(유천) 41. 송지신 이야기(유천) 42. 동낭치 바아계) 43. 부인으로 둔갑한 여우(군장) 44. 말굽바우(염치) 45. 당산거리(내구) 46. 들독거리(내구) 47. 천방사와 5층석탑(천방)

황룡면 : 1.맥정의 옥녀탄금 전설(맥정) 2. 도깨비 방죽(하사) 3. 까치명당과 구렁재(외장산) 4. 불빛을 발하는 묘(수산) 5. 중동이 흥하면 장산, 하사가 기운다(중동) 6. 모리고개 전설(필암) 7. 구석(龜石)전설(구석) 8. 깔딱바우 전설(구석) 9. 하서 김인후 선생의 출생 전설(맥동) 10. 황새알 아이(필암) 11. 벌통골 전설(중통) 12. 원수통 전설(중동) 13. 붓바위 전설(맥동) 14. 소금 샘 전설(맥동) 15. 용바위 전설(황룡). 16. 압록강 물이 몇동이냐?(황룡) 17. 조선제일 황룡에 얽힌 전설(황룡) 18. 덕울암 전설(신기촌) 19. 낙화암(황룡) 20. 팔무덤(일명 일비장(一臂葬))(맥동) 21. 홍길동에 관한 전설 (1) 홍길동은 아치실 사람 (2) 홍길동은 용마삼신 (3) 홍길동은 무등산 정기를 받았다.

서삼면 : 1. 태봉(신기) 2. 노적봉(외연) 3. 두꺼비 바우(외연) 4. 맹호출림과 느티나무(임곡) 5. 미륵불(임곡) 6. 역적골(공평) 7. 원가매산(상평) 8. 아보와 벼락바우(상평) 9. 도둑골(주암) 10. 용소(모암) 11. 효자천(금점) 12. 공근이 고랑(금점) 13. 도둑골과 깔딱바우(증암) 14. 변수연(邊守淵) 의병(송계) 15. 도깨비 이야기(송계) 16. 고등어로 보인 전(송계)

북일면 : 1. 여시바우(갑동) 2. 잔치집 음식과 귀신(갑동) 3. 너덜강(갑동) 4. 용알바위(신흥) 5. 역병 쫒는 디딜방앗대(신흥) 6. 서능 선생의 효행과 감천수와(感天隨蛙)(작동) 7. 도둑터(양막) 8. 독선거리(안정) 9. 입석(율리) 10. 옥녀봉 앵금통(율리) 11. 황새등(성산) 12. 엄고개 폐촌 유래(성산) 13. 유태 성황당(유태) 14. 배 파산 자리(구해) 15. 아흔아홉고랑(용암) 16. 8명당(운곡) 17. 소머리형국과 정자(궁평) 18. 새형국에 석물(궁평) 19. 망주석(궁평) 20. 3년간 죽었다 살아난 귀목(문암) 21. 신축년 물난리(문암) 22. 고흥유씨 정려각과 똥벼락(재암) 23. 용마삼신 장사(금곡) 24. 호암사(작동) 25. 목숨바쳐 남편을 살린 문화류씨(월계1구 가곡 일명 가시골) 26. 꽃무덤(문암)

북이면 : 1. 전일귀 효자(원덕) 2. 갈애바위(원덕) 3. 우총등(일명 공원산-사가) 4. 입석(立石)(복룡) 5. 성신암(복룡) 6. 벌명당(복룡) 7. 입 벌어진 바위(조산) 8. 호환막는 미륵불(원덕) 9. 떨어진 바위(거마) 10. 불당골(명정) 11. 벼락바우(명정) 12. 도깨비 불(선평) 13. 짠 샘물(용산) 14. 조양산(趙梁山)과 개 용덕(龍德)(백암) 15. 백암 큰 화재의 전설(백암) 16. 수도골 절 전설(수도) 17. 방등산가(方登山歌)(청운) 18. 지천골재(중산) 19. 우장수(禹將帥)(율정) 20. 늘바우(일명 널바우)(월하) 21. 버들유씨 입향 유래(평촌) 22. 정골 도깨비(덕곡) 23. 피할매보(동정) 24. 연화도수형국(송산)

북하면 : 1. 배나무등 수박장사(가인) 2. 백양사 전설(백양사) 3. 쌀 나왔던 영천굴(백양사) 4. 진묵대사에 관한 전설( (1) 운문암과 진묵대사 (2) 중고기 유래 (3) 도술로 지킨 입암 산성 (4) 누님돕던 진묵대사 (5) 순천 송광사 불을 상추로 끈 상좌 (6) 목중에게 시험당한 백양사 주지(백양사) 5. 장풍원(張豊源)과 여우(중평) 6. 영험한 느티나무 당산(중평) 7. 안골과 된등(성암) 8. 소바우(성암) 9. 도둑잡은 당산나무(성암) 10. 만병통치 용남폭포(명치) 11. 수호신 당산나무(용동) 12. 구시바우(일명 구신바우)(갈마) 13. 신비한 당산나무(대정) 14. 동삼 섞인 물(대정) 15. 박상의(박주부)에 관한 전설 (1) 박상의가 지관이 된 사연 (2). 박상의가 국지사가 된 사연 (3) 천년지기 화개산 와우명당을 울산김씨가 잡게된 사연 (4) 손룡낙사(巽龍落梭)와 박주부) 16. 곡두(谷頭)재 전설(백양사) 17. 배고픈 설음(신촌) 18. 용머리 전설(용두) 19. 참나무 숲(하웅) 20. 도둑잡은 노병사(魯兵使)(신웅) 21. 생이바위 전설(신웅) 22. 벼락소(일명 장자못) 전설(가평) 23. 최고운 탄생과 중국사신 물리치기(임실)

1. 황금재 전설

장성읍 유탕에서 구산마을을 거쳐 진원면 선동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황금재"라 부른다. 지금은 묵어있는 산길이지만 옛날에는 진원에서 성산관아로 가는 큰 길이었다. 옛날 이 황금재 아래에 마음씨 착한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이 형제가 함께 고갯길을 넘게 되었는데, 동생의 눈에 번쩍거리는 누런 황금덩이가 보였다. 동생이 기뻐서 어쩔줄 모르며 금덩이를 주워 형에게 보이니 형도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한참 길을 걷다가 갑자기 동생이 품에서 금덩이를 꺼내어 숲속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형은 깜짝 놀라며 그 이유를 묻자, 동생이 "나는 지금까지 형님의 사랑을 잊어보거나 미워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저 금덩이를 품에 넣자 형님이 의심스러워지니 이것은 진정 좋지 못한 물건인 것 같아서 버렸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형은 동생의 말에 감동하여 "네 말이 옳구나 저 금덩이는 우리에게 욕심을 불러 자칫 우애를 해칠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동생의 등을 어루만지며 우리 부지런히 일해서 잘 살자고 하였다.

형제는 다정하게 다시 고개를 걸어가다가 얼마후 소금장수(또는 포수)를 만나게 되자 형제는 그 소금장수에게 황금덩이를 버린 곳을 가르쳐 주며 주워 가라고 하였다. 소금장수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 곳에 가 보았더니 황금은 커녕 누런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자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가 난 소금장수는 작대기로 뱀을 두동강이 내고 가버렸다.

한편 두 형제는 볼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며 보니 이상하게도 황금덩이가 두 쪽으로 똑같이 갈라져 있었다. 형제는 "모든 물건은 주인이 따로 있다더니 이 황금의 주인은 바로 우리 형제로구나"라고 생각하며 그 황금을 한쪽씩 나누어 가지고 잘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이 형제의 우애를 후세의 사표로 삼기 위하여 이 재를 "황금재"라 하고 의좋은 형제를 기렸다고 전한다.

2. 못재의 전설

광주에서 장성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못재"라 하는데 이 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먼 옛날 이 고개에 한 청년이 매일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생계를 유지하며 늙은 노모를 모시고 살았는데 가난했지만 효성이 지극하여 모두들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하루는 나뭇짐을 지고 산을 내려 오다가 한 노승(혹은 여인)을 만났다. 그 노승은 대뜸 "오늘밤 그대의 어머니가 호식당할 운명인데 어디를 가느냐?"고 꾸짖으며 "마당에 흰죽 한 동이를 쑤어 놓고 그 옆에 허수아비를 세워 어머니 옷을 입혀 두면 화를 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청년은 노승이 시키는 대로 해 놓고 방에서 노모를 지키고 있었다. 밤이 되자 정말 큰 호랑이가 나타나 두리번거리다가 흰죽을 먹고는 허수아비를 물고 사라졌다.

그 후에도 호랑이는 자주 나타났으나 그 때마다 흰죽을 먹였고 그러는 사이에 호랑이가 순해져 따르며 오히려 모자를 돌봐 주었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총각의 효성이 맹수를 감복시켰다며 총각을 목호(牧虎)라 부르고 이 고개를 "목호재"라 불렀는데 "목호재"가 "모고재"로 변했다가 "못재"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3. 부엉부위 전설

장성읍 부흥리 부흥다리 서편에 깍아지른 듯 위용을 자랑하는 부엉바위가 있다. 옛날에는 그 바위 밑으로 내(川)가 굽이쳐 소(沼)를 이루며 흘렀으나 지금은 논으로 변했다. 임진왜란때 화차를 제작한 변이중의 종제인 윤중(允中)은 종형을 도와 화차를 제작할 때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정유재란때 왜적이 장성에 들어오자 윤중은 젊은이들을 모아 왜적과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패하고 많은 의병을 잃자 부엉바위에서 투신해 죽었다.

이를 안 부인 함풍서씨(咸豊徐氏)가 "여필종부인데 나도 남편을 따른다"라 하며 부엉바위에서 강물에 투신하자 아들 형윤 또한 부모님의 뒤를 따라 죽으려 하니, 그의 아내 장성서씨(長城徐氏)가 "내가 대신 죽을 것이니 당신은 대를 이어 주소서"하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건졌는데 며느리는 하류에서 몸을 던졌건만 그 시신이 거슬러 올라와 시어머니의 손을 꼭 움켜잡고 있었다. 남편의 충, 아내의 열, 며느리의 효로 세상에 보기드문 일문삼절이었다. 조정에서는 변윤중에게 통정대부 이조참의를 증직하고, 삼강정려를 명하여 1893년에 장성읍 장안리에 삼강정려를 세웠다.

4. 누에의 전설

삼한시대 진원지역에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이라는 작지만 아름다운 나라가 있었다. 평화롭기만 하던 이 나라에 어느 해 가을 이웃 나라가 침략해 와 매우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다. 왕은 잠도 이루지 못하고 근심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이를 지켜보던 공주가 한 가지 계책을 간곡히 진언하였다. "적장의 목을 베어오는 자를 부마로 삼겠다고 공포하옵소서" 왕은 깜짝 놀라며 이를 반대하였다. 이 나라에는 왕자가 없어 공주가 대통을 이어야 할 형편이기에 부마선택을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왕은 어쩔 수 없이 공주의 간청을 받아들여 어명을 내리니 이 소식은 순식간에 온 나라에 퍼졌다.

그런지 얼마 후 전선에서 승전고가 들려오고 적이 패하여 물러갔다. 그러나 적장의 목을 가져온 것은 사람이 아닌 말이었다. 왕은 비록 약속은 하였지만 공주를 말과 결혼시킬 수가 없어 난처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공주는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자신은 평생 말을 기르면서 혼자 살겠다는 것이었다. 왕은 백방으로 공주를 달래여 보았지만 소용이 없자 할 수 없이 말을 죽이고 말았다. 그 후 공주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가죽을 벗겨 매일 손질하며 뒷뜰에 말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그 말가죽이 공주를 감싸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덧없이 해가 바뀌었는데 이듬해 어느 산골 나무가지에 말가죽이 걸려 있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왕이 그 곳으로 가 보니 과연 그 말가죽이 틀림없는데 그 속에서 이상한 벌레들이 수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 신하가 이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이 벌레는 공주마마의 화신인 것 같습니다. 입은 말을 닮고, 나뭇잎을 먹는 모습도 마치 말이 풀을 뜯는 모습과 같으며, 몸은 희고 고운 공주님의 살결을 꼭 닮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신하들에게 이 벌레를 가져다가 소중히 기르도록 했는데, 이 벌레가 바로 누에였으며 말가죽이 걸렸던 나무는 뽕나무였다고 한다. 누에가 실을 뽑아내는 것은 공주의 자수 솜씨를 본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이 지방에서는 누에나 번데기를 먹으면 공주처럼 살결이 고와지고 바느질 솜씨도 좋아진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이 전설은 마한의 구사오단국이 이 고장에 있었다는 것과 우리 고장에 이미 삼한시대부터 양잠을 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귀중한 전설이다.

5. 학정봉(鶴頂峯) 전설

옛날 진원면 고산리에 최생원란 사람이 살았는데 성격이 괴팍하고 매우 인색하였다. 머슴새경은 물론 아들 훈장의 삯마져 항상 깍았고 집으로 찾아든 걸인이나 과객은 문전박대 하였으며, 흉년에는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죽 한 그릇이나 잡곡 몇 되를 주고 그들의 땅을 빼앗는 등 온갖 못된 짓을 했지만 학정봉 상봉에 있는 선조의 묘가 명당인지라 천석궁 부자로 잘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동자승이 시주를 받기 위해 대궐같은 최생원집의 대문을 두드렸는데 최생원은 시주는 커녕 삿대질로 오른쪽 눈을 찔러 쓰러져 고통스러워 하는 동자승을 하인을 시켜 동구 밖에 버렸다.

그 후 3년이 지난 어느날 방갓을 깊이 눌러쓴 대사와 애꾸눈 상좌승이 최생원 집 앞을 지나며 학정봉에 있는 최생원 선산 묘를 가리키며 "아깝도다 5척만 내려 임좌로 쓰면 만석은 받을텐데"라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최생원은 황급히 대사를 찾았으나 대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최생원은 바로 길일을 받아 묘를 이장하기 위해 땅을 파는데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학 3마리가 하늘 높이 날다가 한 마리는 서남방 한 마장 떨어진 밭에 앉고, 또 한 마리는 동남방으로 오 리쯤 떨어진 나무위에 앉았으며, 다른 한 마리는 안마산을 넘어 동북방으로 오 리쯤 떨어진 산골에 앉았다.
묘를 이장한 후 최생원의 집은 점차 기울어 망하게 되었는데 이는 죄값이라 한다. 학 3마리가 앉은 곳에 각각 마을이 생겼는데 밭에 앉은 곳에 학전마을이, 나무에 앉은 곳에 학림마을이, 산골에 앉은 곳에 학동마을이 생겼다고 전한다.

6. 의기(義妓)바위 전설

진원면 고산마을 뒤 불태산 하단에 하얀바위 3개가 있는데 서쪽바위는 단오바위, 가운데 바위는 의기바위, 동쪽바위는 문턱바위라 한다. 이 바위들은 마치 빛광자(光) 모양으로 광주의 지명이 이 바위에서 연유됐다는 설도 있다. 의기바위 위에는 사람 발자국, 말 발자국, 남녀가 앉았던 자리, 누웠던 자리의 흔적이 있는데 백제 의자왕 때의 애절한 사랑의 전설이 전한다.

구진골(진원)에 사는 한 청년이 구국심에 무술연마를 갈구하며 애절한 소원을 빌었다. 불태산 산신령은 그 정성에 감동하여 큰 호골과 작은 호골을 오가며 그 중간에 있는 장군굴에서 주로 무술을 전수하였다. 장군굴에는 옥샘에 금보깨가 항상 띄워져 있었고 큰 내(川)가 흘러 담양 추월산에 이르는데, 천년묵은 이무기가 지키고 있어 내(川) 위로 걸쳐 있는 외나무 다리를 무사히 건너야만 무술을 전수받게 된다고 전한다. 청년은 외나무 다리를 무사히 건너기 위해 열심히 무술을 연마하고 있던 중 이 고을에 사는 절세 명기 "부용"과 달콤한 사랑에 빠져 수개월을 허송세월로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의기바위(낭군바위) 위에서 부용을 끌어 안고 달콤하게 잠든 사이 꿈결에 스승이 나타나 "네이놈 사비성 함락이 촌각인데 술과 계집으로 허송세월인고 지금 당장 사비성으로 가거라" 하였다. 청년은 깜짝 놀라 깨어나 부용을 뿌리치고 즉시 사비성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사랑스런 부용을 차마 떨쳐버릴 수가 없어 서로 부등켜 안고 바위에 걸터 앉아도 보고 누워보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바위에 흔적이 생겨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 낭군바위에서 다시 만나기로 굳게 약속하고 청년은 질풍같이 말을 달려 사비성에 다달아 계백장군 휘하에서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 소식을 들은 부용은 낭군바위에 올라 수십질 낭떠러지에 몸을 날려 죽고 말았다.

그 후 이 산에는 이름모를 큰 새가 찾아와 부엉부엉 하고 울어 대니 사람들은 청년의 넋이 부용을 못잊어 우짖는 소리라며 청년과 부용이 노닐던 바위를 의기(義妓)바위라 하고, 청년이 무술을 연마하던 동굴을 장군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7. 견훤(甄萱) 출생 전설

진원면 진원리 고산마을에 신라 말기 무렵 한 부잣집에서 처녀를 시집 보내려고 하였으나 한사코 가지 않겠다고 하므로, 그 연유를 따져 물은 즉 처녀 말이 "밤이면 이목구비가 준수한 청년이 나타나서 그만 동침을 하고 말았다"고 하는지라 이에 놀란 부모들은 그렇다고 딸을 내 쫒을 수도 없어 그날 밤에 나타나는 청년을 잡아 어느 집 자제인가를 알아보고 그럴듯한 집안이면 정혼을 하고자 지켜보기로 하고는 청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과연 밤이 깊어지자 청년이 나타나 딸과 사랑의 운우를 나누고 새벽이 되자 문을 열고 나오므로 붙잡아 물어 보려 하였으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므로, 이는 청년이 분명 사람이 아닌 어떤 화신이라고 단정하고 딸에게 다음날 또 나타나면 도포자락에 명주실 한꾸리를 꿔어 바늘을 매라고 일렀다. 그날밤 처녀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바늘을 겉옷 자락에 꿰어 놓고 이틑날 아침에 명주실을 따라가 보니 장군굴 속에 커다란 거미의 발에 명주실이 달린 바늘이 박혀 있었다. 그 후로 청년은 나타나지 않았고 처녀는 태기가 있어 옥동자를 출산하게 되는데 점점 자라면서 하는 짓이 거무와 같아 거무(일명 불태산) 정기를 받은 거무의 화신이라고 모두 말하였다. 이 아이가 성장하여 신라의 비장(裨將)이 되었고 드디어는 후백제를 세워 왕이 되었는데 원래 진훤이라는 이름이 [견훤]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8. 신거무장 전설

남면 행정리 승가(신가리) 마을에는 옛날에 신거무장이 있었다. 지금은 비아로 옮겨 가고 터만 남아 있는데 매우 기이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조 중엽쯤 진원고을 하청산 아래에 단둘이 살던 늙은 부부가 100일 기도를 올린 후 다행히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사람이라 하기 어려운 마치 거미 모습을 한 괴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아이를 신거무라고 불렀다.

신거무는 어렸을 때부터 보통 아이와는 다르게 머리가 비상하고 힘이 장사라 항상 대장노릇을 했으나, 무서움을 느낀 아이들이 함께 놀기를 두려워 하니 자연히 외톨박이가 되었다. 점점 성장함에 따라 성격은 난폭해지고 행패가 심하여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면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 날리듯 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자만 보아도 질겁을 하였으며 둘만 모이면 신거무 이야기가 화제였지만 무서워서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때 진원현에는 이상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현감이 부임해 오기만 하면 이유없이 그 날 저녁에 죽어 버렸다. 그리하여 고을 원이 공석인 상황이라 신거무의 행패를 막을 길이 없어 더욱 행패는 심해만 갔다.

이 즈음 인접 담양에 송정승이라는 분이 낙향해 있었는데 하루는 그의 아들이 "지금 진원현은 신거무의 행패 때문에 백성이 마음 편히 살 수가 없으며 현감에 부임할 사람 또한 없다하니 이대로 두면 폐현이 될 위기입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주청을 하였다. 당시는 정승의 아들은 과거를 보지 않고도 고을 원님이 될 수 있었다. 평소 대의를 가르친 송정승은 이를 반대할 수 없어 진원현감으로 보내게 되었다. 송현감이 부임한 날 밤에 홀연히 한 여인이 나타나 "신거무에게 억울하게 죽은 원한을 풀어 달라"고 하면서 "하소연을 하기 위하여 소녀가 나타나기만 하면 원님들이 모두 놀라서 죽고 말았습니다"는 말을 했다.

송현감은 이튼날 신거무를 붙들어다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그 날 밤 원인을 알 수 없이 송현감도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송정승은 아들이 무사하기를 빌었으나 3일 후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상여소리가 가까이 들려 올때까지 바둑만 두고 있던 송정승은 상여가 마당에 들어온 후에야 관을 내려놓게 하고는 회초리로 관머리를 힘껏 때리면서 "너 왜 애비의 말을 거역하고 훌륭한 신거무를 죽였느냐"고 호통을 쳤다. 정승의 눈에 상여 앞에 신거무가 시퍼런 칼을 들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신거무는 자기를 높여 말해주고 자기를 죽인 아들을 호통치니 비로소 온화한 표정으로 절을 하며 "오늘 대감댁 식구를 몰살하려 했는데 대감의 덕에 감복하여 그냥 돌아갑니다"라 말하고 가버렸다.

송정승이 아들의 장사를 지낸 날 밤 꿈에 신거무가 나타나서 "신가리 마을에 장과 다리를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송정승은 이 사실을 나라에 고하여 신거무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 장에 왔다가 가장 늦게 돌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신거무가 잡아먹는다 하여 모두 다투어 빨리 떠나 버렸기 때문에 장이 일찍 파했다고 하며, 흐지부지 끝나는 일을 "신거무장 파하듯 한다"는 속담이 생겼다. 신거무는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설도 있다.

9. 효자 공필장(孔弼張)전설

공필장은 인조 때 녹진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저녁엔 2∼3차례 부모님 방에 불을 때드렸고, 부친이 병으로 눕자 무명지를 단지하여 소생토록 하였으며 얼마후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중 산소 주변 소나무에 송충이가 번져 계속 잡아도 끝이 없자 이를 자신의 정성부족이라 한탄하며 슬피우니 산천의 새들이 날아와 송충이를 잡아 먹기도 하고 풍정제에 떨어뜨리니 풍정제의 파란물이 빨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심한 가뭄이 들어 모든 논의 물이 말랐는데 공필장의 윗논에는 물이 담겨 있었다. 남의 논 물이라 끌어올 수 없어 바라만 볼 뿐 안타까와 하였는데 뱀한마리가 논둑에 구멍을 내어 물이 모두 공필장의 논으로 흘러내려와 버렸다. 윗논의 주인이 공필장을 찾아와 남의 논 물을 도둑질 했다고 난리를 피우자 공필장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려 하였으나 막무가내었다. 어쩔 수 없이 공필장이 두레로 자기 논 물을 위논으로 한나절을 퍼 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윗논에만 비를 뿌리고 없어지니, 모두들 하늘이 공필장의 효심에 감동하여 이렇듯 신비한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라고 전하여 오고 있다.

10. 네무덤(사총산) 전설

옛날에 동화면 축내에 광산김씨가 잘 살았는데 마을터가 배형국이라 샘을 파지 못하고 건너마을 송사까지 가서 물을 길러다 먹었다. 마을이 점차 모두가 잘사는 부촌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교만하여저 중들이 시주를 받으러 오면 시주는 커녕 오히려 곤욕을 보였다. 어느 날 한 도사가 나타나 제일 부잣집에 들어가 마을에 해가 없는 샘자리를 가르쳐 주겠노라 하였다. 부자는 동네 사람을 모이게 하여 의논하니 해가 없는 자리가 있다하니 그렇게 하자고 의견이 일치되자 도사는 마을 앞 정자나무를 베고 우물을 파면 아주 좋은 물이 나오리라 했다. 마을 사람들이 도사 말대로 샘을 파니 과연 맛좋은 물이 펑펑 솟아나왔다. 물깃기에 고생해온 마을 사람들은 도사에게 후한 사례까지 하였다. 그러나 정자나무는 배형국의 돛대였는데 돛대를 없애고 배에 구멍을 냈으니 마을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마을에 때아닌 괴질이 퍼저 사람들이 죽어가니 나중에는 장사를 치러줄 사람도 없게되어 마을 뒤 온골 옆에 한 자리에 4명의 송장을 넣고 장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을 "네무덤" 또는 "사총산"이라고 불렀는데 현재는 모두 개간되어 밭이 되었고, 우물은 장성댐 용수로 둑이 되었는데 우물 바닥에 정자나무 뿌리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11. 직방재 김보원 장군의 전설

김보원(金輔元)은 삼서면 수양리 기동(중수)출신 인데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진주성 촉석루 삼장사 막하에서 싸우다 전세가 어렵게 되자 입고있던 옷을 찢어 혈서를 써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던 말 갈기에 매달아 주며 "네가 비록 미물(짐승)이나 어미를 안다했으니 이 편지를 집으로 가져가라"하고 말을 집으로 보냈다. 한편 고향의 부인 성씨가 낮잠을 어렴풋이 자는데 꿈속에서 남편이 나타나 얼굴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손을 흔들면서 용을 타고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것이었다. 부인은 같이 가자고 따라가다가 꿈을 깨었다. 부인은 불길한 예감에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의 무사함을 비는데 그때 남편의 애마가 혼자서 힘없이 오는 지라 순간 남편의 죽음을 직감하고 애마를 부등켜 안고 슬피 우는데 말갈기 속의 편지가 손에 잡혀 펴본 즉 '일개한사 천리부의 여삼현 동사 사역하한'(一介寒士 千里赴義 與三賢 同死 死亦何恨 : 일개 한 선비로서 천리나 되는 곳에서 의에 따라 죽으니 죽어 한이 있을까)라 적혀 있었다.

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을 결심을 하고는 남편의 시체만이라도 찾고자 남장을 하고 진주성으로 떠났다. 얼마쯤 산 속을 가다가 도둑을 만나 보따리마저 잃게 되자 부인 성씨가 남편의 이름과 전사한 이야기, 시체를 찾으러 간다는 이야기를 하자 도둑도 김보원의 명성을 잘 아는 터라며 자신의 무례한 행동을 사죄하고 진주성까지 동행하여 남편의 시체를 찾아 주었다. 부인은 남편의 장사를 지낸 뒤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1985년 유론에 따라 김보원의 충(忠)·김주원(金調元)의 효(孝)·성씨 부인의 열(烈)을 기려 광산김씨 일문 충·효·열 삼강비를 삼계 백산에 세워 기리고 있다.

12. 애기장군 전설

삼서면 삼계리 삼봉산 서쪽기슭 장동 마을 부근이 옛날에 호수였다고 한다. 이 호수에서 삼태성(三台星)이 노닐다 가곤 했는데 그 삼태성이 남기고 간 흔적이 삼봉산 이라고 한다. 어느날 삼태성이 이 호숫가를 노닐다 마음씨 착한 장흥임씨 가문을 찾았다. 그 뒤부터 그 가문에 태기가 있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태어날 때 울음소리가 유달리 컷고 생김새도 영특하였다. 태어난지 삼일 후 임씨 부부는 가난 때문에 일하러 나가지 않을 수 없어 늦게까지 일을 하다 집에 돌아왔는데 애기만 누워있는 방안에 먼지가 가득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부부가 다음날 일하러 나가는 척하고 뚫린 문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니 아이가 일어나 막대 하나를 집어들더니 베개로 군인을 만들어 칼싸움을 하였다. 아이는 천정에 붙었다가 벽에 붙었다가 하면서 신나게 싸움을 하자 삽시간에 방안은 먼지가 가득히 일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런 소문이 온 동네 퍼지니 결국 촌로가 "이 아이는 역적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아이를 죽이자"고 하자 임씨는 "내 아들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없으니 산모퉁이에 버리자"고 하였다. 동네사람들은 임씨의 말대로 산모퉁이에 아이를 버리니 임씨 부부는 뜬 눈으로 날을 새운 뒤 새벽에 산모퉁이에 가보았는데 아기는 죽지 않고 계속 울고 있었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마을사람들이 몰려들어 아기를 죽이겠다고 돌로 치고, 아기의 가슴에다 큰 돌과 나락 3섬, 서숙 3섬, 팥 3섬을 올려놓았는데도 아이는 죽지 않았다. 생후 5일 만에 무수히 구타를 당하고 그 무거운 짐으로 눌렀으나 죽지 않자 관가로 보내자고 하던 차에 웬 할머니가 나타나 "이 아이는 그렇게는 죽일 수 없소"라 하니, 이 아이를 죽이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사정하자 "아이의 겨드랑 밑을 보면 털이 세개 있으니 그것을 뽑아 버리면 죽는다"라 말한 뒤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이 아이의 겨드랑 밑에 깃털 3개를 뽑아버리니 아이의 숨이 끊어졌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더니 마을 앞 저수지에서 용마 한 마리가 솟구쳐 나오더니 저수지를 세 바퀴 돌고 난 뒤 저수지 제방을 무너뜨리고 마을 앞에다 칼을 꽃고 곧 삼봉산으로 날아갔다. 저수지가 터져 마을이 모두 떠 내려가 마을이 없어져 버리고 폐허가 되었으며 주인인 아기장군을 잃은 슬픔에 용마는 인간세상이 싫어 삼봉산에 있는 바위(용마바위)를 딛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고 하며, 지금도 삼봉산에는 용마가 딛고 뛰어 오른 발자국이 박혀있는 용마바위가 있고, 용마가 오를 때 벼락을 맞아 두쪽난 벼락바위(유평유정 임근성 집뒤), 칼이 꽃힌 자리에 칼바우 등이 남아 있으며, 저수지 제방이 터진 부근에 금광마을이 있는데 이 부근을 터진 방죽거리라고 불러오고 있다.

13. 가랫재 전설

삼계면 생촌 뒤에 고성산과 고산이 서로 마주보며 솟아 있는데 이 두산이 만나는 골에 가랫재가 있다. 옛날 형과 아우가 살았는데 형은 고성산을 아우는 고산을 쌓기로 하고 기한 내에 다 쌓고 가랫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형은 산성을 다 만들고 가랫재로 나왔으나 동생이 늦자 형은 동생이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였다고 크게 노하며 늦게 도착한 동생을 가래로 찍어 죽여 버리고 말았다. 그 뒤 형이 고성산을 둘러보며 '명천수'(明天水)라는 샘을 파 놓은 것을 발견하고는 아우의 노고에 감탄함은 물론 자신의 경솔했음을 깊이 뉘우친 끝에 자신도 가래 삽으로 목을 쳐 자결하고 말았다. 그 후 이 재를 '가랫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고산에는 명천수가 있는데 커다란 구렁이가 살고 있다고 하며 그 물이 좋기로 유명하여 사람들은 만병통치약수 라고 한다.

14. 문바위 전설

삼계면 고산에는 이곳 저곳 바위가 많다. 그 중에서도 고산의 중턱에는 마을 앞에서도 그 모습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가운데에 문의 형상처럼 생긴 문 바위를 볼 수 있다. 옛날 문바위 안에는 힘센 장수가 살면서 문을 지키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안에는 값진 보물이 있어 그것을 팔면 조선의 모든 병사들이 3일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살 수 있었다 한다. 바위 중간에 나 있는 문은 몸집이 작아 아이들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인데 그 안에는 넓이 1m 높이 1.5m 가량의 빈터가 바위와 바위 사이에 있다.옛날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던 사헌 김이복 선비는 그곳에 올라 학문을 익혔으며, 마을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그 분은 자신의 아호를 문바위의 이름을 따서 문암이라 하였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저녁이면 문암을 여닫는 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15. 주천자(朱天子) 묘

삼계면 고성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조금 내려 오다가 3개의 능선이 갈라지는데 가운데 등에 주천자묘라는 고총이 있다. 죽립리 박귀남옹은 이 묘는 명태조 주원장의 조상묘라 하며 이 부근의 지형이 북두칠성형국이라 칠성대라고 불리우기도 한다고 하나, 다른 사람은 이맥이 무등산을 약간 비껴 일본 후지산을 향하고 있어서 명나라가 일본을 제압하고자 이곳에 주천자능을 만들었다고도 하며, 임란시 이여송이 조선의 산세가 좋아 앞으로 큰 인물이 나오지 못하도록 산맥을 끊었는데, 고성산은 맥을 끊을 수가 없어 묘를 쓰고 성묘하면 무병장수하며 복을 받는다고 말을 만들어 퍼뜨렸으며 자신도 칠성대를 올라 성묘를 했다고 한다.

주천자는 이곳에서 나서 이곳에서 자라 학문을 익히고 중국으로 건너가 명을 건국하였다고 하며, 주원장이 어릴 적에 항상 왼손을 쥐고 다녔으므로 그를 가르치던 훈장이 잠든 틈에 손바닥을 펴보니 '대국창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주원장은 이에 노하여 스승을 떠났으며 대국창건의 뜻을 안고 중국으로 건너가 명나라를 세웠다고 전한다.

주천자묘 등이 명당이기에 그곳에 몰래 묘을 많이 썼는데 쓰기만 하면 이 고장에 가뭄이 들거나 인심이 흉해지므로 마을 사람들이 칠성대에 올라 파묘를 하곤 했는데, 이를 고소하여 몇사람이 6-7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얼마전까지도 한해가 들면 이곳에 올라 기우제를 올려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곳으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매우 신성시한다.

16. 송흠과 청룡

송흠은 신평인으로 세종 5년(1459) 3월 13일 삼계 주산리 정각에서 송가원과 하동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송흠이 어렸을 때 정각에서 지내다 공부를 위해 삼서 생동의 봉씨 집에서 수학하였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정각에 계시는 어머니를 뵈러 왔다고 한다. 어느 날 송흠이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한달을 채우지 못하고 보름만에 정각에 오자 어머니는 화를 내며 밤인데도 생동으로 쫒아 보냈다고 한다. 쫓겨간 송흠이 생동에 돌아와 보니 만곡사 아들 집 대문이 잠겨져 있어 대문 옆에서 쪼그리고 잠이 들었다.그날밤 만곡사 아들이 꿈을 꾸었는데 대문 옆에 청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가 잠에서 깨어 하인들을 시켜 대문을 살피도록 했으나 살피고 온 하인들이 대문 옆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자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똑같은 꿈을 꾸자, 이상해 여긴 그가 다시 대문을 살피도록 해 대문을 열어보니 송흠이 대문 밖에서 쪼그리고 앉아 잠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꿈의 용이 바로 송흠이라 믿었고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을 예감하였다.

송흠은 역시 성종 11년(1480) 21세 때 사마시에 합격했고, 성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정자(정 6품)로 첫 관직을 시작하여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근면절약하고 청렴결백하여 청백리 표상을 5회 수상하였고, 학문에도 뛰어났고 시에도 능하여 망동서실 사제 김정국과의 회답시를 비롯하여 관수정 원운 및 기에서 그의 재능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문인 가운데는 송순과 같은 시가의 거성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그의 투철한 충효사상은 관직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모를 위해 관직을 초개같이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수없이 하였다.

17. 홍길동 전설

가. 홍길동은 용마삼신의 화상이다.

아치실에 고창으로 넘어가는 살우치(사리재) 고개가 험준하여 도둑이 출몰하므로 조정에서 여숙사를 짓고 관리를 파견하여 여행자를 보호하였는데 그 책임자로 춘섬의 원수인 강태수가 부임해 왔다. 춘섬은 원수를 지척에 두고도 어쩌지 못하는 힘없는 처지를 한탄하면서 원수를 갚게 해 달라고 신령님께 간절히 빌었다.

그런지 1년 반이 지났을 때 강태수가 부친상을 당하여 사루치 배룡산에 명당을 잡아 묘를 썼는데 며칠후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 배룡산 봉우리의 바위가 누르고 있어 갑갑하여 치워달라고 하니 강태수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그 바위를 캐어내 석물을 만들도록 하였다. 며칠간의 작업 끝에 바위가 나오니 갑자가 땅속에서 하얀 김이 솟아 오르더니 투구를 쓴 3장군이 말을 타고 힘차게 뛰어 나왔는데 세번째 말의 다리가 부실하여 부러지면서 장군이 떨어지고 말았다. 이 때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면서 천둥이 치더니 용 한 마리가 내려와 3장군을 감싸고 하늘로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떨어져 다리를 절둑거리던 3째 장군이 용에서 빠져 아치실 홍상직의 집으로 떨어졌다. 이 때 마침 낮잠을 자던 상직이 똑같은 꿈을 꾼지라 이는 분명 훌륭한 인물을 점지할 태몽이라 믿고 부인을 찾으니 망령이라고 극구 거부를 하므로, 생각끝에 춘섬을 찾아가 아들을 낳으니 바로 홍길동이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내용은 춘섬이 떨어지는 장군을 품에 안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길동을 낳았다는 것이고, 또는 용에서 장군이 떨어지는 순간 길동을 낳았다고도 전한다.

나. 길동은 무등산 정기를 받았다.

하루는 길동의 부친이 낮잠을 자다가 집 앞에 바라 보이는 무등산을 삼키는 꿈을 꾸고 큰 인물을 얻을 태몽으로 보고 부인을 찾았으나 아프다는 핑계로 거절하자, 마침 지나가던 시비인 춘섬을 불러 길동을 얻었다. 길동은 자라면서 비범하여 땅을 끌어 당기는 축지법과 둔갑술을 써서 단 두 걸음에 무등산을 오갔고, 머리를 뽑아 훅 불면 홍길동이와 똑같은 사람이 머리 숫자만큼 만들어 졌는데 성장하여 가출한 뒤 소식이 끊겼다 한다.

18. 붓바위 전설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 입구에 붓처럼 끝이 날카롭게 되어 있는 필암(筆岩 : 붓바위)이 있는데 하서 김인후선생이 이 바위의 기운을 받아 태어났다고 전한다. 병계 운봉구(1861-1767)의 글씨로 필암이라 조각되어 있는 이 바위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에 김도령과 이도령이 과거를 보기 위해 산 속 암자에서 함께 글공부를 했는데 김도령은 가난하나 마음이 착했고 이도령은 마음이 좋지 못한 심술꾼이었다. 한편 이곳에 살고 있던 백여우가 사람이 되고 싶어했는데 신령님의 도움으로 밤에만 사람이 되어 마음씨 착한 김도령을 찾아가 시중을 들어 주었다. 그러기를 3년이 지나 과거를 보러 가게 되었는데 백여우가 김도령에게 여우털로 만든 붓을 주며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하라고 기원했다. 김도령은 그 붓을 고이 간직하고 상경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안 이도령이 이를 시기하여 과거보기 전날 밤 김도령의 붓을 잘라 버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과거장에서 붓을 꺼내든 김도령은 붓이 잘려 있자 깜짝 놀라 "내붓 내붓" 소리치며 정신이 돌아버리고 말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백여우는 붓바위에 올라 김도령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바위를 핥았다는데, 오랜 기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바위 끝이 붓처럼 날카롭게 달도록 핥다가 지쳐 죽고 말았다.
그 후로 이 바위를 "필암(붓바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19. 황새골 전설

황룡면 필암리에 황새골이 있다. 지금은 한 마을을 이루고 있지만 옛날에는 조그마한 오두막집 한 채만 있었다. 이 오두막 집에는 가난한 농부 내외가 살고 있었다. 내외는 금슬은 좋았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어 항상 적적해 하였다. 자식을 얻기 위해 굿도 해보고 칠성님께 공도 들여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 부부는 아이 갖는 것을 포기하고 적적하게 살아가고 있던 어느날 한 여승이 찾아왔다. 그 여승은 한참 동안 염불을 하더니 "당신의 아이는 황새알인가 봅니다"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로부터 1년 후 부부는 평소와 같이 나무를 하러 갔다. 나무를 한짐 해 놓고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새 울음소리가 들려와 소리나는 쪽으로 가보니 집채만한 황새가 둥우리에 알을 품고 있었다. 잠시후 황새가 날아가자 둥우리를 들여다 보니 큰 황새알이 하나 있었다. 퍼뜩 여승이 말한 황새알 아이란 말이 떠올라 조심조심 알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 알이 깨지면서 아이가 나왔다. 부부는 소원을 이룬 기쁨에 덩싱덩실 춤을 추며 기뻐했다.

알에서 나온 아이는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라며 매우 영특했다. 이 아이는 자란 후 부모에게 효도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전하며 그 후부터 이 곳을 "황새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20. 아보와 벼락바우

서삼면 상평 마을에 아보라는 보가 있다. 옛날 이 보는 조금만 비가 와도 자주 터져서 작인들이 큰 고통을 받았는데, 하루는 지나가던 도승이 이를 보고는 살아있는 아이를 넣고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웬 거지가 아이를 업고 지나가므로 자초지종을 말하고 돈을 주고 그 아이를 사서 묻고 보를 무사히 완성하였다. 그런데 아이를 팔고 가던 거지가 소나기를 만나 근처 바위 밑으로 피했는데 갑자기 벼락을 때려 거지가 죽어버렸다. 이 바위를 "벼락바우"라 부르고, 이 보를 아이를 묻고 막았다 하여 "아보"라 부르는데 날이 굳을 땐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전한다.

21.효자천(孝子泉)

서삼면 금정마을 뒷산에 효자천이 있다. 김응환(1809∼1889)은 신평에서 양어머니 오씨를 모시고 살았는데, 오씨가 풍에 걸려 13년간을 병석에 들어 누워 있어도 정성껏 간호함은 물론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동안 딸 5형제를 시집보내면서도 상객 한번 나서지 않을 정도였다. 오씨가 죽게 되자 응환은 이곳에 묘지를 정하고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첫날밤에는 호랑이가 나타나 으르렁거리면서 밤새 위협하였으나 방에 앉아 끄떡하지 않고 버티었으며, 2∼3일이 지난 뒤에는 호랑이도 그 효성에 감동했는지 밤이면 온순하게 그를 지켜주었다.

이런 소문이 마을에 전해져 마을 사람들이 그가 쓸 물을 길러다 주게 되었는데 어느날 토방 밑에 물기가 어려있어 파보니 물줄기가 솟아나와 옹달샘과 같은 깨끗한 샘이 되었다. 샘이 있을 수 없는 산비탈에 훌륭한 샘이 생겨난 것은 하늘이 응환의 효심에 감동해서 만들어 준 것이라고 하여 여기에서 흐르는 천 이름을 효자천이라 하게 되었다 한다.

22.서능의 효행과 감천수와(感天隋蛙)

서능은 고려 고종 (1213∼1219)때 현재의 북일면 작동마을에서 흥위위 보승별장 희팔(希八)과 합천이씨의 4남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서능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약관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으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홀로되신 어머니께서 고종 33년(1245) 12월에 목에 종기가 나서 위급한 상태가 되자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의원을 청하여 보였더니 "산 청개구리를 구하지 못하면 고치기 어렵다"고 하였다. 마침 때가 한 겨울인지라 청개구리를 구할 수가 없어 애통하게 흐느끼니 이를 딱하게 본 의원이 "비록 산청개구리는 없더라도 약이나 만들어 시험해 보자"고 말하여 집앞의 나무 아래에서 약을 달이고 있는데 갑자기 나무 위에서 청개구리가 약탄관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하늘이 서능의 효성에 감동하여 산청개구리를 내려주었다고 입을 모았으며 그 약을 붙인 모친은 병이 나으니 그의 효성이 온 나라에 알려져 조정에서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고 그의 시호를 절실한 효자라는 절효라 하였다. 고려사 열전 효우편 서문에 "고려 500년간 효우로서 사서에 기록되어 정표된 경우는 10여인에 불과하다"라고 기록하였고, 서능과 함께 11인을 소개했는데 전라도인으로는 유일하다.

1421년(세종 13)에 만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리신 분이시며 전국전승가훈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거가십훈(居家十訓 : 1. 부식삼강(扶植三綱) 삼강을 지킬 것, 2. 돈서오륜(惇敍五倫) : 오륜을 돈독히 하여 질서를 세울 것, 3. 관이어하(寬以御下) :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랫사람을 대할 것, 4. 예이사상(禮以事上) : 예로써 윗사람을 섬길 것, 5. 임상치애(臨喪致哀) : 상을 당하여는 슬픔을 다할 것, 6. 당제치경(當祭致敬) : 제사 때는 공경를 다할 것, 7. 대심이공(持心以公) : 마음 가짐을 공정하게 할 것, 8. 처사이의(處事以義) : 일을 처리할 때는 올바르게 할 것, 9. 교자이정(敎子以正) : 자식을 바르게 교육시킬 것, 10. 대인이서(待人以恕) : 남을 대할 때는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것)을 남기어 가문과 후학의 정표를 삼았기에 오늘날 장성의 학문에 기풍을 세웠다 하겠다.

23.꽃무덤 전설

옛날 북일면 문암리에는 화월이라는 매우 예쁘고 마음씨 고운 처녀가 병든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화월의 나이가 혼기에 이르자 많은 총각들이 욕심을 내고 중매쟁이가 많이 들락거렸다. 그러나 화월은 결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아버님 병간호에만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장성고을에 새 사또가 부임해 왔다. 사또는 매일 주지육림에 파묻혀 풍류를 즐기고 기생을 점검하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이러한 사또가 화월의 미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당장 데려오라는 불호령을 내렸다. 포졸들은 사또의 명령을 전하고 데려가려 하였으나 거절하고 묵묵히 자기 일만 할 뿐이었다. 부하들이 수 차례 헛걸음만 하는 것을 본 사또는 화월이의 기를 꺽어놓을 심산으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불렀으나 의연하게 거절하자, 사또는 드디어 화월이의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렸다.

화월이의 목을 베는 순간 이상하게도 갑자기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더니 화월이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하늘에서 빨간 꽃송이가 계속해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사또의 관졸들은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버지는 화월이가 비명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딸을 찾아 헤매었으나 시신은 찾지 못하고, 죽었다는 자리에 마치 무덤같이 쌓여있는 꽃무더기를 보고 그 속에 화월이가 묻혀 있다고 알고 목이 터지게 딸을 부르다가 그 옆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화월이는 하늘나라에 가면서 절개의 표상인 꽃무덤을 세상에 남긴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꽃무덤은 자취도 없어졌지만 정절의 여인 화월이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

24.갈애바위 전설

북이면 갈재 입구에 있는 목란 마을은 옛부터 갈재를 넘는 길손들을 상대로 주막이 성행하였다. 이곳에 조선시대 초기 갈애라는 유명한 기생이 살면서 숱한 염문을 뿌려 오늘날까지 명기열전, 한국의 전설 등에 그 일화가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장님 노파의 딸 복녀의 몸에서 불우하게 태어나 빼어난 미모로 뭇사내들의 심금을 울린 전설의 주인공 갈애는 아버지가 신선에게서 석자나 되는 갈대꽃을 받은 태몽을 꾸고 태어나 갈대아이 즉, 갈애라 부르게 되었는데 기생열전에는 노화로 나온다.

천하일색으로 성장한 갈애는 기생이 되었는데 한양을 오가는 선비들이나 지방의 수령방백들이 수없이 매혹되어 허송세월을 하게 되니, 결국 전라 감사가 조정에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성종대왕은 전라도에 내려가는 암행어사 노계명(蘆啓命)에게 명하여 갈애를 처벌토록 한다. 그러나 전라도에서 지방관을 지냈던 이조좌랑 홍만춘은 아름다운 갈애를 죽이기가 너무 아까워 이 사실을 미리 갈애에게 알려 주니 밀지를 받은 갈애는 노계명이 지나갈 길목에 집 한 채를 빌려 소복으로 단장하고 노계명을 유인하여 결국 백년가약을 맺고 그 증표로 설부녀(雪膚女)라고 팔에 새겼다.

장성 관아에 도착한 노계명은 갈애를 잡아들여 문초하자 "갈애의 이 팔에 뉘 이름 새겨 있고 고운 살에 먹이 베어 글자도 선명코야 차라리 천원강이 말라 버릴지언정 굳게 맺은 그 맹세 변할 줄이 있으랴"라는 글을 올렸다. 어사는 그때서야 속은 줄 알았으나 어쩔 수 없어 처벌하지 못하고 귀경하며 성종대왕께 고하고 죄를 청했으나 왕께서는 "사람을 논할 때 주색은 예외다"라고 하시며 어사의 이름을 새긴 갈애를 기생으로 그냥 둘 수 없다며 기적을 지우고 노계명의 첩을 삼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 처용암은 갈애바위를 변하고 위령(葦嶺)은 갈재로 변했고 하천에는 꽃가래라는 물고기가 살았다고 한다.

25.효자 전일귀(全日貴) 전설

조선 후기쯤 북이면 갈재계곡 깊숙한 곳에 전씨 성을 가진 늙은 부부가 살았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이들은 정성껏 공을 들여 다행이 아들을 얻자 이름을 '일귀'라 짓고 애지중지 키우면서 "일귀야 엄마 뺨 한 번 때리고 오너라". "아빠 한 번 때리고 오너라"하고 얼르며 일귀가 커가는 것을 보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교육이 일귀를 세상에 못된 불효자식으로 만들어 걸핏하면 부모를 때리니 늙은 부부는 일귀가 무서워 벌벌 떨게 되었다. 이러한 불효자식이 일시에 만고의 효자로 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어느 날 전일귀가 나무를 팔러 갔다가 어느 집 아들과 며느리가 부모님께 밥상을 바치고 식사를 마칠 때까지 마루에서 공손히 무릎을 꿇고 기다리는 것을 보고는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 모처럼 부모님께 드릴 고기를 사 가지고 돌아오던 중, 어느 집에서 아이를 나무라면서 "이 천하에 몹쓸 전일귀 같은 불효자식아"라는 말을 듣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불효를 뉘우쳤다고 한다.

전일귀가 결혼하여 애를 낳아 매우 예뻐하자 어머니는 "나도 네가 그렇게 예뻤다"라고 말하자 크게 뉘우쳐 딴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일귀가 개과천선을 한 지 얼마 안되어 늙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하늘을 볼 수 없다 하여 평생 방갓을 쓰고 다녔다.
얼마 후 일귀는 대궐 공사장에서 일을 하게 되자 항상 쉬지도 않고 어찌나 열심히 일을 하는지라 소문을 들은 조정대신이 불러 연유를 물으니 "나라에 정성을 바쳐서라도 불효의 죄값을 하고 싶다"라고 하였다. 그 대신이 장성부사를 시켜 모든 것을 알아본 후 큰 상을 내렸다.
사람들은 이같은 효행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해 동네 어귀에 조그마한 비석을 세웠으며 동학혁명 때 전봉준이 이 곳을 지나다 이 비에 제를 지내 주었는데 관군이 이 말을 듣고 비석을 동강내 버렸다고 한다. 동강난 비석은 지금도 그대로 서 있고 1977년에 장성유림들이 북이면 사거리에 새 비석을 세웠다.

26.백양사 전설

가. 백양사

조선 선조때 환양선사(喚羊禪師)가 영천암에서 법회를 열고 금강경을 풀어 설법을 하는데 이를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물려 들었다. 법회가 시작된 지 사흘째 되던 날, 어디에선가 하얀 양이 내려오더니 무릎을 꿇고 스님의 법회를 들었다. 스님의 법회는 7일간 계속 되었는데 마지막날 밤 꿈에 법회를 들었던 흰양이 나타나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했는데 이재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환생하여 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라 하며 절을 하는 것이었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는 하얀 양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후부터 정토사로 불렀던 절의 이름을 백양사로 개칭하였다 하며 그때 설법을 하셨던 스님을 백양을 환생시켰다는 뜻으로 환양선사라 했다고 전한다.

나. 운문암과 진묵대사

운문암에 금을 입지 못한 부처가 있었다. 선조 초기에 진묵대사가 이 암자에 있으면서 불상을 만들다가 완성되기 전에 어디로 가면서 다시 자기가 와서 완성하기 전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하여 그 말대로 하였는데, 그 뒤 진묵대사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흙만 바른 부처로 전해오고 있었다.
진묵대사의 본명은 일옥인데 이상한 행적이 많았다. 어느 날 저녁 여러 사람의 꿈에 보법신이 나타나서 "부처 차 심부름을 하는 것은 황공하다"고 했다. 그 때 진묵대사는 그 암자에서 차 심부름을 맡았는데 처음은 모두들 어리둥절히 생각했다.
그후 남녀 나뭇군이 산에서 급히 쫓겨오면서 대성통곡을 하는지라 사유를 물은즉, 일옥이란 중이 불로 지져서 그 기운에 못이겨 도망해 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여러 사람들은 진묵대사가 부처임을 깨닫고 더욱 대사를 존경하였다. 이 운문암은 6·25 동란 때 불탓던 것을 지금은 복원하여 서옹선사가 계신다.

다. 쌀 나온 암자(영천굴외3)

백학봉 중간지점에 영천암 옆에 영천굴에 쌀이 나오는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하루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의 쌀이 나왔는데 어느날 허기진 객승이 찾아와 스님은 객승을 살리기 위해 쌀 나오는 구멍을 불달은 쇠부지깽이로 구멍을 쌀이 더 나오도록 후볐는데 쌀대신 핏물이 나왔다고 한다. 이때부터 쌀은 나오지 않고 약수가 흘러나오고 있으며 그때 피가 흘러 붉어졌다는 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전설이 장성에 많이 있는데 삼서면 금산리 화산에 있는 성절사에서는 구멍을 키운후 신쌀이 나왔고, 삼계면 사창 3구 신억의 관음사에서도 구멍을 키운 후 타진쌀이 나왔으며, 동화면 서양리 석수암에서도 쌀이 나왔는데 구멍을 키운 후 쌀이 나오지 않고 폐사되었다고 전한다.(김형렬)

(2) 민요

1) 들노래

① 동화면 들노래

가. 들노래(아침나절 일 시작할 때 부르는 노래)

동이트면 소몰고 시금밭 수렁논에 아헤 아헤 히하 얼씨구나, (후렴)
아그당초 밝은 달은 붉은 방만 헤아르고 아하이 오우이 아이고 스으, (후렴)
아빠이야 내 말듣소 서러우이 저 말이랑 아헤 아헤 히야 얼씨구나,
청강녹수 원앙새야 너 간다고 설워 마라 아마이 우오이 아이고 스으,
먼데사람 듣기 좋고 저태사람 보기좋게 아하에 에헤 헤야 절로,
이논농사 나라봉사 저논농사 선영공대 아아하 아하에 에헤 헤야 절로.
(구산. 박원영. 남)

나. 들들노래 (긴노래)

오호오호 어리시구나 아아야야 오호오호이오, (후렴)
어이허 어이허 어어허 어어허, 나주 영산 도네기 새암 상추씻는 저처녀야,
(일동) 어 그럴쎄 어이허흐 흐흐흐,
상추랑 철철씻어 잎일랑은 네가 먹고 줄기랑은 나를 주오. (후렴)
(초지. 박복만. 남)

다. 두엄내기 노래 (지게에 두엄을 지고 등짐하며 부르는 노래)

아아하 아하하 어허허 허어허 허어허 뒤호 뒤호우,
어허허 어허허 어허허 애해야아, (후렴)
저건너 갈뫼봉에 비가 몰아 들오온다, (후렴)
바늘같은 허리에다 태산같은 짐을지고, (후렴)
연잎 댓잎 숙어지고 잉어넣어 꼬리치고, (후렴)
살찐 가마치 연자에 놀고 예뿐 새악씨 내품에 논다, (후렴)
앞산 뒷산 불질러라 두렁엎어 콩을 찍세, (후렴)
이내신세 어이하여 지게목발 못면하나. (후렴)
(초지. 박복만. 남)

라. 똘(고랑)치기 노래(삽, 괭이, 가래로 고랑치며 부르는 노래)

오호이이허∼오호이어허∼ (후렴)
어리나 우리네 제원들 잘도나 허네 잘도나 허네, (후렴)
이똘을 쳐서 물어내어 농사태풍 이룩하면, (후렴)
선영봉사 부모공양 처자식 호의호식, (후렴)
우리농군 일잘험 나라살림 불어나네, (후렴)
불러보세 불러보세 이십전에 배운노래, (후렴)
삼년묵은 다랭넝쿨 새순나 만발하네. (후렴)
(남평. 배종철. 남)

마. 모찌기 노래(모판의 모를 찌면서 부르는 노래)

오오호 헤에라 모무세, 오오호 헤에라 모무세,
신과 옷은 등에 업고 이모판에 들어서니, (후렴)
우리같이 모를찌어 어서어서 모내기로, (후렴)
구렁배미 먹어지면 장구배미 기다리네, (후렴)
맞어주소 맞어주어 모무소리 맞아주소, (후렴)
목이타면 막걸리 있고 땀이나면 수건있네, (후렴)
먼데사람 듣기좋게 저태사람 보기좋게, (후렴)
얼씨구나 절씨구나 모찌는 소리도 잘도허네, (후렴)
그렁저렁 다되어가네 이만저만 쉬어보세. (후렴)
(구산. 김일용. 남)

바. 모심기 노래(논에 모를 심으면서 부르는 노래)

에이 에헤라 ∼ 이두 상사뒤에, (후렴)
우리 농부들 다 잘도허네, (후렴)
어울려 진다 상사소리가 어울려 진다, (후렴)
맞어를 주소 맞어주어 상사소리 맞어주소, (후렴)
손빼지 말고 골고루 구멍맞춰 심어주소, (후렴)
줄렁이 한폭은 막둥이 몫이고, (후렴)
논뚝에 한폭은 영감님 몫이라네, (후렴)
온달같은 논빼미가 반달만큼 남았네, (후렴)
언덕위에 저영감 사위하나 고르소, (후렴)
모쟁이 등재기가 마음에 든다네, (후렴)
올배배미 다심거덩 점심먹으로 가세. (후렴)
(구산. 김일용. 남)

사. 군벌매기 노래

오호호호 ∼ 에헤로 ∼ 아하 ∼ 상사 ∼ 어허 ∼ 뒤어, (후렴)
아아 아아아 애애 애애애 얼씨구나, (후렴)
농사라 하는것은 자고이래 대본이라, (후렴)
실농씨의 본을 빌어 처처에 농사로세, (후렴)
호맹이자리 훌쳐잡고 와락아락 매어주소, (후렴)
나주영산 노대기에 검은구름 비묻어온다, (후렴)
금년에는 개띠해고 명년에는 돼지헬세, (후렴)
모두한몸 한뜻으로 니손네손 빨리놀려, (후렴)
이집일을 어서끝네 다음에는 우리집이라. (후렴)
(구산. 김일용. 남)

아. 만드래 씻기노래

두루루 두루루 두름박 허허로 두드리 둠박 어허 허허로∼오호∼오오∼오오∼응, (후렴)
밀어라 밀어라 지심을 밀어라, (후렴)
우리농부들 소리도 잘도허네, (후렴)
잔지심은 밀어내어 풍년이 오거덩, (후렴)
우리집 큰아들놈 장가를 보내지, (후렴)
밀어라 잘아라 크고작은 지심, (후렴)
풍년들어라 선영제사 지내지, (후렴)
우리농군들 다함께 합심하면, (후렴)
누렁황소 지즐타고 풍장치며 들어가세, (후렴)
영감아 망주야 백년동거 하자꾸나, (후렴)
수영산 가마귀 이별 물어다 놓고, (후렴)
북망산천 가더라도 정은두고 가자닝께. (후렴)
(통안. 박춘익. 남)

자. 들내기 노래 (하루일을 마치고 끝냄을 알리는 노래)

재넘어가오 [어허] 오이리 아이 허이 아하 ∼
일일사오 [오호]수고들 했소, 오호 ∼∼들들 내요, (후렴)
우리나라 기름진땅 오곡초를 심어놓고, (후렴)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수풍작 좀도좋네, (후렴)
삼사월에 종자뿌려 육칠월에 오곡익고, (후렴)
얼씨구나 절씨구나 금년에도 풍작일세. (후렴)
(구봉. 유흥선. 남)

차. 애농 대농 노래 (들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올 때 상머슴을 황소[사다리]에 태우고 부르는 노래)

아농(我農)∼저농(저農)∼애농(愛農)∼대농(大農), (후렴)
태고라 천황씨는 덕목으로 왕을 했고, (후렴)
염재라 실농씨는 농사짓기를 가르쳤고, (후렴)
땅도좋고 물좋은데 신작로나고, (후렴)
산천좋고 수목많아 우리나라 명당일세. (후렴)
(구봉. 유흥선. 남)

② 서삼면 들노래

가. 모찌기 노래

오∼에∼라∼먼∼들∼, 오∼에∼라∼먼∼들∼
일락서산에 해는 지고서 월충동정에 달은 솟아오네 (후렴)
저달 뒤에는 별따러 가고 우리님 뒤에는 나도나∼가네 (후렴)
저그가는 저망구님 따님있글랑 왼달같은 사우나 삼어주소 (후렴)
일락서산에 해는지고 월출동정에 달이솟아오네 (후렴)
이농사를 지어갓고 국민을 두루다 같이 먹고 살자고 지어나 보세 (후렴)

나. 모심기 노래

어∼이여∼어허∼여루 상∼사∼뒤∼여
어∼이여∼어허∼여루 상∼사∼뒤∼요
저건너 갈미봉에 비 묻어온다 (후렴)
우장을 허리다 두르고 모를 심그세 (후렴)
죽장을 집고 망하를 신어 (후렴)
천리나 강산에 구경을 가세 (후렴)
바람아 광풍아 부지를 마라 춘풍낙엽이 다떨어진다 (후렴)
사람이 살며는 몇백년이나 살거나 (후렴)
간다 간다 나는 간다 (후렴)
우리님 뒤에 내가 따라간다 (후렴)
저건너 연방죽 안에 연꽃이 피었는디 연꽃 한송이 꺽어서 새필립꼭지다 기와를 꼽아보세 (후렴)
새필립꼭지다가 꽃을 꼿고서 마후라기 춤을 추어보세 (후렴)
뒤동산에 할미꽃아 (후렴)
늙으나 젊으나 허리가 꼬부라 졌다 (후렴)
사람이 살면은 몇백년을 살까 (후렴)
살아청춘 거드렁거리고 놀아나 보세 (후렴)

다. 잦은상사소리

에∼헤∼헤루 상∼사∼뒤∼여 에∼헤 에∼루 상∼사∼뒤∼여
간다 간다 나는 간다 (후렴)
우리님 뒤에는 나도 간다 (후렴)
바람아 광풍아 네가 부지마라 (후렴)
춘풍에 낙엽이 다 떨어진다 (후렴)
가면 가고서 말면마제 (후렴)
경상에 도로만 시집을 갈까 (후렴)
일락서산에 해떨어지고 (후렴)
월출동정에 달 솟아오네 (후렴)
가면가고 말면말제 (후렴)
경상에 도로야 시집을 가냐 (후렴)
죽장을 집고서 마야를 신어 (후렴)
천리나 강산을 나도나 간다 (후렴)
일락서산에 해는 뚝 떨어졌구나 (후렴)
서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치 남었네 (후렴)
한폭씩 한폭씩 심글적에 두서너폭씩 쭉심거주소 (후렴)
방고르게 심거야만 이농사가 잘된다네 (후렴)
나는 간다 나는 간다 (후렴)
우리님 뒤에는 내가 나도 갈까나 (후렴)
오동추야 밝은 달은 (후렴)
임에 생각이 저절로 나네 (후렴)
말은 가자고 네굽을 치는디 (후렴)
임은 날잡고 낙루를하네 (후렴)
일본에 대판이 얼마나 좋아서 (후렴)
꽃같은 이내몸 나를두고 연락선을 탔느냐 (후렴)
간다 못간다 얼마나 울어서 (후렴)
대합실 마당이 한강수가 되였네 (후렴)
여기도 꼿고 저기고 꼿아보세 (후렴)
만경창파에 두둥실 뜬배야 (후렴)
여기잠깐 멈춰봐라 말물어보자 (후렴)
치어다 보느냐 만학은 천봉 (후렴)
내려다 굽어보니 박사지 땅이라 (후렴)
산이나 높아야 골도나 깊지 (후렴)
조그만헌 여자속이 얼마나 깊어 (후렴)
일락서산에 해떨어지고 (후렴)
마을마다 연기가 나네 (후렴)
우연히 저달이 구름속에서 나드니 (후렴)
공연한 심사를 산란케 헌다 (후렴)
저달에 원수는 구름이 원수요 (후렴)
요내몸 원수는 황금이 원수다 (후렴)
저달이 밝은것은 구름이 없는 탓이요 (후렴)
요네몸 늙은것은 임이없는 탓이라 (후렴)
파양궁허세 파양궁허세 (후렴)
그만 저만 파양궁허세 (후렴)
- 김재식. 체록 -

놀다가세 놀다를 가세 (후렴)
오늘날은 여기서 놀고 (후렴)
내일날은 각기 맘대로 가느니 (후렴)
바람 불고 비올줄 알면 (후렴)
어떤양반이 빨래질 갈까 (후렴)
말을 타고 꽃속에 들면은 (후렴)
말끝마다 향내만 나네 (후렴)
앞산은 점점 푸를 청자가되고 (후렴)
뒷산은 굽이굽이 냇천자 뿐일세 (후렴)
얼씨구 좋구나 지화자 좋네 (후렴)
상사 소리를 다잘도허네 (후렴)
- 설석규 선창 -

에∼헤∼에∼후 상∼사∼뒤∼요 에∼헤∼에후 상∼사∼뒤요
한폭씩 숨글적에 두서너 폭씩 숨그소 (후렴)
바람아 광풍아 네가 부지마라 (후렴)
우리님 놀기좋은 정자나무잎 다떨어진다 (후렴)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절시구 (후렴)
한번가면은 또다시 못온다 (후렴)
죽장을 짚고서 마이야를 신어 (후렴)
경사도로만 시집을 갈까 (후렴)
쳐다를 보아라 안창넘어 비양기 (후렴)
내려다 보아라 백사지 땅일세 (후렴)
늙으나 젊으나 꼬부라진 것이 멋인가 (후렴)
뒷동산 할미꽃이 늙으나 젊으나 다꼬부라지네 (후렴)
한폭씩 갈라쥐고 마후라기 춤추자 (후렴)
이배미 신고서 장구배미로 갈꺼나 (후렴)
앞산은 멀어지고 뒷산은 갓차와 (후렴)
간다고 보아라 하느님전으로 갈꺼나 (후렴)
한번가면 또다시 못온다 (후렴)
가세 가세 어서가세 (후렴)
백두나 산으로 내가 나도 갈꺼나 (후렴)
이번만 숨그고 잠깐 쉬어 숨그세 (후렴)
그만 숨그고 잠깐 쉬어 숨그장께 (후렴)
- 반재종 선창 -

오동추야 달이 둥실 밝은디 (후렴)
님의 생각이 저절로 나네 (후렴)
오동복판 거문고는 (후렴)
줄만 골라도 소리가 난다 (후렴)
수는 만어도 소리는 적네 (후렴)
명사십리 해당화야 (후렴)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은 (후렴)
네 꽃진다고 설워를 말어라 (후렴)
어느 시절에 또다시 올꺼나 (후렴)
임아 임아 무정한 임아 (후렴)
온다는 기약이나 하여나 주소 (후렴)
달뒤에는 별따라 가고 (후렴)
우리님 뒤에는 내가 따라가네 (후렴)
저달은 고와서 서산을 넘고 (후렴)
우리님은 고와서 내품안에 든다 (후렴)
춥느냐 더웁느냐 내품안으로 들어라 (후렴)
비개가 높거든 내팔을 비소 (후렴)
여기도 숨그고 저기고 숨그고 (후렴)
방방마다 어서 어서 숨그세 (후렴)
잘도나헌다 다잘도 헌다 (후렴)
우리네 농군들 다잘도 허네 (후렴)
서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치 남었네 (후렴)
니가 무순 반달이냐 (후렴)
초생달이 반달이지 (후렴)
-김재식 선창-

저기가는 저가스나 보소 (후렴)
넝쿨없는 수박이 열렸네 (후렴)
광양읍에 물방아는 (후렴)
물이나 감고 돌고 도는디 (후렴)
우리동네 처녀들은 (후렴)
날만 감고 돌고 돈다네 (후렴)
우물가에 갈가마귀는 (후렴)
구렁이 간장을 다녹이고 (후렴)
우리네 동네 처녀들은 (후렴)
요네 간장을 다녹이네 (후렴)
신작로 복판에 하이야가 놀고 (후렴)
하이야 복판에는 신랑신부가 논다네 (후렴)
-반재종 선창-

울퉁불퉁 저남산보소 (후렴)
우리도 죽어지면 저모양 되리라 (후렴)
시내강변 종달이새는 (후렴)
천길만길 구만길떳네 (후렴)
달뜨는 동산에 달이 떠야 좋고 (후렴)
임없는 빈방에 임이들어야 좋네 (후렴)
니가 무슨 반달이내 (후렴)
우리 님이 반달이제 (후렴)

라. 논매기 노래

아리∼시구나∼하∼하∼아∼아∼오∼오∼오∼오∼오∼
아리∼시구나∼하∼아∼아∼아∼오∼오∼오∼오∼오∼
가네 가네 나는 가네
님을 따라서 나는 가네
아리∼시구나∼하∼아∼아∼아∼오∼오∼오∼
바람아 광풍아 부지를 말아
우리님 나무잎이 다떨어진다
아리∼시구나∼아∼아∼오∼오∼이∼오∼오∼

마. 세화자 타령

어기야∼하∼하 어∼어∼허어∼허허에헤야에∼헐∼허리 나보∼보∼아세
간다 보아라 나는 간다
경상도로만 시집을 간다 (후렴)
저달 뒤에는 별따라가고 우리님 뒤에는 네가 따라가네 (후렴)
갈라면 가고 말라면 마제 경사도로만 시집을 갈까 (후렴)
바람아 강풍아 부지를 말아 춘풍낙엽이 다떨어진다 (후렴)
오늘도 하심심하야 노래한자리 불러나보세 (후렴)
죽장짚고 마야를 신고 준령강산을 귀경허세 (후렴)
사람이 살며는 몇백년을 살까 죽엄에 들어서 노소가 있을손가 (후렴)
간다 간다 강짜를 말고 문턱밑에 새암을 파주소 (후렴)
오늘날은 여기서 놀고 내일날은 어디로 갈까 (후렴)
오날도 하심심하니 세화자 소리나 하여나 보세 (후렴)

바. 산아지 타령

에야 뒤야라 산이로곤나야 에헤헤헤이야
에이야뒤∼여 산아지로구나
에야 뒤야라 산이로곤나야 에헤헤헤이야
에∼야∼뒤∼여 산아지로구나
어∼어허허이 에이야∼
에야 뒤여라 산아지로∼고나
어∼어허허이 에이야
에∼야 뒤여라 산아지로∼고나
무정한 세월아 오고 가지를 말아라
아까운 요네청춘 다 늙어간다
에야 뒤야라 산이로곤나야 에헤헤헤이야
에∼야뒤∼여 산아지로구나

사. 덩기 타령

덩기덩기덩기야∼허이야덩기야∼둥덩기야
덩기덩기덩기야∼어이야덩기 둥덩기야
덩기덩기야∼허∼허이야덩기야 둥덩기야
덩기덩기덩기야∼허이야 덩기 두덩기야
간다 못간다 말만 말고 어디까지 간다 간다 어디간다
덩기덩기덩기야∼어∼어야 덩기두덩기야
간다 못간다 말고 이리가자 저리가자 둥덩기야
덩기덩기덩기야∼어∼어야 덩기 두덩기야
덩기덩기야 어∼허어야 두덩기야
덩기덩기덩기야∼어∼어야 덩기 두덩기야
오늘날은 여기서 놀고 내일날은 어디로 갈꺼나
덩기덩기덩기야 어∼어야 덩기 두덩기야

아. 두룸박 타령

두룸∼박∼어∼아어∼ 두룸∼박∼어∼아어∼
나주영산 노나기 새암 상추씻는 저 처자야
잎일장은 훨훨씻처 니가 묵고 줄거릴랑 나를 주오
두름박∼어∼아어∼

자. 장원질 노래 (아롱처롱)

오늘날은 여기서 놀세 아하롱∼처∼롱
소만타고 가면은 쥔네집이네 아하롱∼처∼롱
닭잡고 술사다 놨다네 아하롱∼처∼롱
저달뒤에 별따라 가고 아하롱∼처∼롱
우리님뒤에 나도나 갈꺼나 아하롱∼처∼롱

2) 부요

① 여자 복숭아

또랑 또랑 객사에 도랑
여자 복숭을 숭꿨더니
제주로는 뿌리가 뻗고
서울로는 넝쿨이 뻗어
열었구나 열었구나
여자 복숭이 열었구나
내려 오시는 신관사또
빛좋다고서 다따먹고
올라가시는 구관사또
맛좋다고서 따들먹고
우리나라 상감님네는
무엇으로 대접할꼬

② 찔래

배꽃찔래 배배곷 찔래
처자하나 홀목에
아이고 배꽃찔레라
후렴-에헤이 에라 어절마 동동
니가 내사랑 아니냐
분꽃찔래 부분꽃찔래라
처자하나 손질에
연꽃질래 여연꽃찔래라
방죽지향에
아이고 연곷찔래라.

③ 시집살이

가. 밭으로 가면은 보래기원수 논으로 가면은 거머리 원수

집으로 들며는 시누이원수 원수원수 시원수를 잡아갖고
서사실로 엮어 갖고 버새 골로만 데리고가세

나. 시집간 사흘만에 부석애를 나가보니

때를찾아 밥을지어 조그마한 시누에게
정게 나와 하는말이 아당 보당 하는소리
이내간장 다녹이네 나도 실로 니뜻을 받드느라
너도 일랑 시집가면 너도 일랑 당하리라
시집가서 쫓겨나와 하는말이 애라 애라 요 망할년아
나도동동 당했더 너도 동동 그러느냐
누룩같이 밝을년아 까치같이 찢을년아
꼬치같이 좃을년아 발길년아 찟을년아
다대 동동 당한구나.

다. 열세살에 질삼을 배워 열네살에 시집을가서

시집간 삼일만에 양동이를 깨었으니
시어머님 썩 나섬서 아가 아가 며늘 아가
느그 집에 가서 세간 등물을 다팔아
요내 양동이 물어내라 며느라기 썩 나섬서
어따 여보 그말마오 신선같은 갯네아들
일월같은 사모쓰고 구름같은 말을타고
안개봉에 넘어와서 이내 문전에 썩 달라들어
이내 한몸 홀렸으니 이내 몸값 치러주면
양동이 값을 물으리다 시어머님 썩 나섬서
아가 아가 며놀아가 어따 그 말마라
나도 시집은 삼일만에 죽시끼 열다섯개
한눈에 끼여 왔다.

라. 시집간 석달만에 명주배 백자를 짜고나서

뒷문이라 열어보니 여자 복송이 열어났구나
그놈한쌍을 따먹었드니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아강 아강 며늘아강 소지정을 갈란다
소지정을 가서 형틀에다 올려매고
삼태같은 요내머리를 형틀에다 매었더니
분통같은 요내젖통 사령손에 다녹아났구나
에헤이 애라 ∼

마. 시금시금 시아버니 거멍창은 엇다두고

흰창으로 날보시오 심으라면 심그리오
부르라면 부르지오 못허겄네 못허겄네
시집살이 못허겄네 말도많고 일도많고
못허겄네 못허겄네 시집살이 못허겄네
(백계리. 황남현. 여89세)

바. 어매어매 우리어매멋할라고 나낳는가

날 설 때 날 마다 죽순나물 먹었는가
마디마디 설움이네 날설 때 날마다
덕석구부 앉았는가 구부구부 눈물일세
고추당초 맵다한들 시집위에 더매울까
석자세치 깁수건을 살강발에 걸어놓고
하루에도 열두번씩 눈물닦기 다젖었네
논에가면 거머래기 밭에가면 보모래기
집에오면 시누애기 애기애기 세애기를
당사실로 꽁꽁묶어 한강수 깊은 물에
풍덩실 빠처나 볼까
(백계리. 황남현. 여89세)

사. 성님 성님 사춘성님 시집살이 엇떠든가

모치같은 다홍치메 사랑뿌려 걸어놓고
이리감서 눈물닦고 저리감서 눈물씻고
시집살이 헐만허데
(백계리. 황남현. 여89세)

④ 방아타령

가. 우리님이 심그신나무 정성스리 물을주어

동으로 동쪽 뻗은가지 와질근와질근 분질러다가
동서문 짓고 서서문 짓고 구암문 짓고 연호를 지어
육모정 짓고 삼간초당 널리지어 경신년 경신일에
좌좌 고향에 집을 짓고 어느세월 또다시 만나볼꺼나

나. 에∼헤∼에야∼에∼헤이∼에∼헤어라∼방애∼로다

이방애가 뉘방엔가 강태공에 조작방애로구나 (후렴)
죽장집고 마야를 신고 천리나강산 에라 나는 간다 (후렴)
사람이 살며는 몇백년이나 사느냐 죽엄에 들어서 헤에라 노수가 있는가 (후렴)
저달 뒤에는 별도따라가고 우리님 뒤에는 나도 따라가네 (후렴)

⑤ 배틀노래

구름잡아 잉에걸고 안개잡아 안을넣고
춘하추동 벙어리는 밥만달라 입만벌려
황소같은 돗루마리 차례차례 졸라드네

- 배틀가 -

바람솔솔 부는날 상제께 득죄하여
인간세에 내려와서 할 일이 하도없어
비단한필 짜려하오 앞집에산 박목수야
뒷집에산 김목수야 우리집에 놀러와서
술도먹고 밥도먹고 배틀하나 지어주소
이내다리 두다리요 배틀다리 네다리요
개조다리 팔형제라 낮에짜면 일광단
밤에짜면 월광단 번쩍번쩍 이비단을
누구옷을 지을거나 무지개 다리타고
상제님께 바치오리
(백계리. 황남현. 여89세)

⑥효자동이

금자동아 옥자동아, 칠금칠금 보배동아
산축산동 일월동아, 우리집의 옥동자야
무산인간 성자동아, 질과같이 질었거라
약대같이 실었거라, 새암같이 깊었거라
하늘같이 높았거라, 땅과같이 두럽거라
부모께는 효자동아, 형제간에 우애동아
동구간에 화목동아, 나라에는 충성동아

⑦ 노동요

딸아딸아 양념딸아 너무곱게 잘만커라
오동나무 큰장농에 가진장석 걸어주고
깊은곳에 논을사고 얕은곳에 밭사주마
-밭매기 노래-
오네오네 잠이오네 초롱같은 요네눈에
안개같은 잠이오네 안거스니 잠이올까
누웠으니 강수젔어 잠도임도 아니오고
강수젔네 강수젔네 비게넘어 강수젔네

⑧ 밭노래

못다맨밭 다멜라다가 금봉채를 잃고가네
근봉채 하나에 날댓냥가도 금봉채하나는 내당음세
다죽어 간다 다죽어 간다 황애장시 다죽어 간다
열량짜리 네자처 놓고 백량짜리 네 당음세

⑨ 베틀노래

하늘에다 베틀걸고 구름자어 잉애거고
안개잡아 선을둘러 형제나무 보디집에
대추나무 북에다가 울렁출렁 짜느랑게
웃집할매 불싸러와 그배짜서 멋헌당가
우리오빠 장가간디 청포도포 지어냈네
그남치기 멋헐랑가 우리아비 후배가는
청포도포 지었다네 그남치기 멋헐랑가
우리성님 시집갈때 가매얼기 때어주고
그남치기 멋헐랑가 우리성님 시집갈 때
반포수건 띄어갔고 횃대뿌리 걸어노코
옴서감서 눈물씻기 그수건이 다젖었네

⑩ 자장가

가. 자장자장 우리애기 잠잘잔다.

문턱밑에 검정개야 반침밑에 찹쌀개야
마당간데 백살개야 동네개도 짓지말고
꼬꼬닭도 우지말아 우리애기 잠잘잔다
자장자장 자장개야 우리애기 잠잘잔다
우리애기 자장개야 남애기는 개똥밭고 재워주고
울애기는 꽃방석에 재워줄께
자장자장 자장개야 우리애기 잠잘잔다.
b. 들강 달강 서울갔다 오는길에
밤한톨 주워다가 선반위에 얹었드니
머리감은 새앙쥐가 들락날락 다까먹고
뜨까군쪽 남은 것은 울어머니 드리고서
살쪼금 남은 것은 울어머니 드리고서
쪼끔쪼끔 남았길래 너랑나랑 먹었고나
(백계리. 황남현. 여89세)

3) 남요

① 집짓기 노래 (상량노래)

에헤야 상사뒤야 (후렴)
가마니(가만히) 따라와 깡깡(꽝꽝) 놓세
여기도 찍고 저기도 찍고
고로 고로(고루 고루) 찍어보세
기암절벽 풍치좋네
백양산 한줄기타고 보살님을 뫼시고
우리중생들에게 부귀공명 빌어주어
나무아미 타불이라
약사암에 흐르는물 중풍잡고
뇌 절소 다나았다네
약수로다 약수로다 너두먹고 나두먹고
만수무강 할터이니 얼씨구나 좋다좋아
명당일시 분명하네
우리 대감님네 만수무강 할터이디
어찌 아니 좋을손가
여기도 찍고, 저기도 찍고
살짜기 들었다 깡깡 놓세
얼시구나 절시구나
다되었네 다되었네, 터다두기도 다되었네
몽기놓고 시켜보세
우겨라 너아 어기엉차, 이가래를 모두놓고 힘차게 당겨 보세
높은데가서 깊은데 고르고
두발을 버티고, 두손을 모아잡고
기운차게 당겨보세
먼산에 두견이 울고
가까운 산에 꾀고리 우니
녹음 방초 시절일세
우리모두 땀을 닦고, 이가래를 당겨주소
상량밑도 골라보고 들보밑도 골라보세
태산이 높다하되, 이가래를 당할손가
앞산뒷산 바라보며 두루두루 골라보세
우겨라 어아 어기엉차

② 화전노래

들으러논다 들으러논다
술상하나가 들으러논다
금주야 술부어라
거문고 비파 새금에
새줄을 골라
저건너 낭구에 금강산으로
화전 놀이나 갈꺼나
에헤이 애라∼

③ 서산풍월

서산풍월 서산펄펄 망월이 백경산 오봉도봉
천루의 구시월에 뜬달풍월은 여기서 놀기가 좋구나
흰백자 붉은홍자 고모리 고모리 단초세
사대문 걸워잠궈 술매때생이 다나선다
에헤이야 에헤라 등가둥가둥가 니가 내사랑 아니냐.

④ 형승가

육십여척 노령산이 서북편에 돌입하야 물외봉 낙맥으로 선인같이 춤을 추며
덕평 합금속에 행단타러 나려올제 만세봉은 노래하다 부끄러워 은신하고
천세봉이 썩나서서 환영가를 부는구나
고장산 장고치고 둥더매 북을 치니
향로봉은 우뚝서서 칭찬을 마지않고
푸실산은 푸실푸실 웃기를 일삼으며 가금봉 대량동은 주육를 장만하고
자당동 미인들은 초대하기 기다리네.
대곡리는 고간되고 해남봉 닷줄끌려 남북침을 가르치며 범피중류 떠나가니
호자봉 새벽범이 은연이 호위하네.
아마도 제일승지는 이뿐인가 하노라.

⑤ 꽃타령

삼월동풍 호시절에 먼저피는 척촉화라 영산홍은 네 얼굴을 비추어서 더욱 곱다.
춘풍이 덧 없어서 넷동질 만난단말가.
낡은 고기 꿰들고 차문주가 저 향화야 만화방창 빵긋 빵긋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장막에 일등미색 곱다고 자랑마소.
암향부동 월황혼에 소식전 한매화요.
담안에 붉은 빛은 편시춘에 홍조화라.
태평성대 응시장에 월계화가 제일일세.
만화방창 빵긋 빵긋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성성제 슬피울어 피맺힌 두견화는 낙일이 재산한데
견화석별 여랑화 촉국에 망제사를 부여귀로 끌어내다가 님을 만류말고 넘는 해를 붓잡으렴.
만화방창 빵긋빵긋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은한이 삼경인데 반짝이는 금성화 양유지당담담풍 화중군자 연화되고 산일이
지지한데 햇빛받는 향일화라 차화개진 이무화 은일처사 국화로다.
만화방창 빵긋 빵긋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십일홍이 없다는데 백일홍이 조킨하다.
화중왕 목단찾아 꽃의 내력 물어보니 방학거심객이요.
주인래간채송화라 아마도 이강산은 무궁화가 첫째라고,
만화방창 빵긋빵긋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진환)

QR CODE
  • 왼쪽 정보무늬 사진을 휴대전화에 인식시키면 자동으로 이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 이 정보무늬는 『제3장 민속 173번』의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제3장 민속 페이지 바로가기 주소(https://www.jangseong.go.kr/q/ezIzMDJ8MTczfHNob3d8fQ==&e=M&s=3), QRCODE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