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유래
용정리
- 가정마을
가정은 원래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동촌ㆍ서촌(새터포함) 우데미ㆍ작은뜸 등 4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주 오랜 옛날에 가매봉과 와가등 사이에 진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고 추측하고 그 후 신평송씨가 입향했는데 정식(1930~ )의 15대조인 온이 기묘사화로 말미암아 1520년경에 삼계면 주산리에서 이거해 왔다고 한다.
동명유래
마을 형국이 배형국이라 가정이라 했는데 가정으로 변했다
전설
마을의 형국이 배형국이라 샘을 파지 못하여 옛날에는 식수 조달에 어려움이 많았다. 어느때 신평송씨가 잘 살았는데 교만하여 세도가 대단하였다. 중들이 시주를 오면 문전박대 하거나 덕석몰이를 시켜 쫓아보내곤 했다. 어느날 스님 한분이 찾아왔는데 덕석몰이를 당하자 주인을 불러놓고 말하기를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재각을 허물고 샘을 파면 더욱 좋을 것이라 하였다. 솔깃해진 송씨들이 재각을 허물고 샘을 팠는데 이것은 배에 구멍을 뚫은 격이라 이후 송씨들은 망해 버렸다고 한다. - 기산마을
기산은 원래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기동과 부산 2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두 마을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고 탐진최씨와 가 오랫동안 세거해 왔다고 전하는데 이들의 첫 입향지가 모두 이웃 마을인 황룡면 몰뫼인 것으로 보아 기산은 200년이 못된 마을.
동명유래
기동(基洞)의 "基"자와 부산(釜山)의 "山"字를 따서 基山이라 부른다.
전설
마을의 형국이 배형국이라 샘을 파지 못하여 옛날에는 식수 조달에 어려움이 많았다. 어느때 신평송씨가 잘 살았는데 교만하여 세도가 대단하였다. 중들이 시주를 오면 문전박대 하거나 덕석몰이를 시켜 쫓아보내곤 했다. 어느날 스님 한분이 찾아왔는데 덕석몰이를 당하자 주인을 불러놓고 말하기를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재각을 허물고 샘을 파면 더욱 좋을 것이라 하였다. 솔깃해진 송씨들이 재각을 허물고 샘을 팠는데 이것은 배에 구멍을 뚫은 격이라 이후 송씨들은 망해 버렸다고 한다.
동호리
- 연동마을
연동은 원래 영광군 외동면 지역이며 연동과 북쪽으로 500m 거리에 있는 새터로 이루어 졌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200년이 못된 마을인 것 같으며 1917년〈조선면리동일람〉에는 연동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명유래
마을 앞에 2000평 규모의 연방죽이 있어 연꽃이 많이 피었기 때문에 연화라고 하였는데 연동으로 변했다고 한다. 연방죽은 일제 말엽 관잔등의 김원석이 매입하여 논으로 만들어 버렸다. - 남동마을
남동은 원래 관잔등이라 불리었으며 영광, 고창에서 장성장을 보러오는 장사꾼과 행인들을 위한 주막이 있었던 곳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 한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남동리라 나와 있다.
동명유래
관을 쓰고(양반) 술을 판다 하여 관잔등이라 불러왔는데 옛 지도에 남동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을 최종업 이 보고 면에 건의하여 1968년부터 정식으로 남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관잔등이 옛날에는 무척이나 고약한 동네였다고 하는데 장날이 되면 힘깨나 쓰는 청 년들이 그 전날부터 술에 취해 길에 들어누워 있다가 영광에서 넘어오는 장사치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이 들은 삼계면 생촌의 가랫재를 넘어올 때 "관잔등을 무사히 지나갈수 있도록"빌었다고 한다. - 조산마을
조산은 원래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원조산과 강당, 산태바우, 삼밭골 등 4개 뜸으로 이루어졌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조산리가 기록되어 있어 오래된 마을인 것 같은데 현 거주 성씨로는 200년 전에 입향된 성씨가 없으며 광산김씨(1호)가 원조산에서 부자로 살다 떠났다고 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동명으로 보아 원조산이 가장 먼저 성촌된 것 같으며 그후에 강당이 성촌되었고 산태바우는 1943년경부터, 삼밭골은 1962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 1912년에 발간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조산리라 나와 있다.
동명유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는데 조산이라 불러오다가 장성댐 수로 개설시 나온 흙더미가 산을 이루어 이름 이 맞아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산 입구 솔무덤이나 강당 앞 논 가운데에 있는 조그만한 산 때문인 듯하 기도 한다.
전설
어느 장사가 용진산에서 수연산으로 가지고 가다 떨어뜨렸다고 하기도 하고 어느 장사가 이 바위를 새끼 손가락에 얹고 무등산까지 뛰기로 했는데 못 뛰어 바위 위에 장사의 발자국과 억울해서 흘렸다는 눈물자 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 동계마을
동계는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원동계와 월봉촌 등 2개 뜸으로 이루어져 있고 동계는 원래 반룡동이라 불렀으며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반룡동,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동계리, 〈조선면리동일람〉 에는 동호리라 기록되어 있다.
동명유래
광산김씨 수일당파 동리공의 "東"자와 동쪽으로 흐르는 내의 "溪"자를 더해 東溪라 했으며 일명 자차우라 고도 부른다.
구림리
- 장만마을
장만은 원래 영광군 외동면 지역이며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두 마을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200년이 못된 마을 인 것 같은데 장동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동래정씨가 1700년경에 입향하였다고 한다.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장동만 기록되어 있고 1917년〈조선면리동일람〉에는 장동과 만평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장동과 만평 모두 동래정씨가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진형의 9대조인 효선(1660~1714)이 1700년경에 영광 백수에서 장동으로 들어왔으며 그 후손들이 만평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동명유래
- (壯晩(장만)) 마장동과 만평의 첫글자를 따서 장만으로 하였다.
- (壯洞) 마을 뒷산인 장군봉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동이라 하였다. - 통안마을
통안은 원래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현재 안뜸, 양촌, 새뜸, 학림동 등 4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60년경 마을 앞산 밭에서 청동기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돌촉 , 돌끌 등의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초수》에는 통안리라 기록되어 있으며 1917년〈조선면리동일람〉에는 통안리 와 항림리가 기록되어 있다.
동명유래
원래는 동구산 아래에 있어서 구동이라 하였는데 구동은 장성부사 박수의가 박철수에게 보낸 서간내용 참조. 중간에 통암 박철수(1624~1684)의 호를 따서 통암으로 부르다가 통안이라 변했다고 한다.
전설
산태바우에서 물이 내리면 비가 온다는 전설과 먹짐재가 구름이 끼면 비가 온다는 전설이 있다. - 구산마을
구산은 원래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마을 가운데 당산나무 옆에 지석묘로 추정되는 바위가 있으며 옆 마을인 통안에서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돌촉, 돌끌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부근에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 같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음.
동명유래
동구산(東龜山) 아래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거북같이 생겨서 구산(龜山)이라 하였으나 최근 구산(九山) 으로 표기하고 있다.
전설
어느 장사가 용진산에서 수연산으로 가지고 가다 떨어뜨렸다고 하기도 하고 어느 장사가 이 바위를 새끼 손가락에 얹고 무등산까지 뛰기로 했는데 못 뛰어 바위 위에 장사의 발자국과 억울해서 흘렸다는 눈물자 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남평리
- 안곡마을
안곡은 안장개(원안곡)와 네거리로 이루어졌는데 행정구역은 남평리로 속하지만 지적도상에 안장개는 구림리, 네거리는 용정리에 속해 있다. 1923년 장성-함평 간 도로가 개설된 후 가정마을에 있던 면사무소가 1930년경 이곳으로 옮기면서 마을이 생긴 것 같으며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과 1917년〈조선면리동일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이 때는 화곡마을에 속했던 듯하다.
동명유래
안장개의 안자와 화곡의 곡자를 따서 안곡이라 하였다. 안장개는 말의 안장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부근에 안마산(구산앞) 마구청(장동앞)등의 말과 관련된 지명이 있다 - 화곡마을
화곡은 원래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원화곡과 밤나무촌 등 2뜸으로 이루어졌으며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200년이 못된 마을인 것 같고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에는 화곡리라 기록되어 있다. 동명유래 :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부터 화곡이라 불러오고 있다.
- 환교마을
환교는 원래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환산과 교촌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환산이 먼저 생겼는데 옛날에 진씨들이 살다 떠났다고 전하며 그후에 수원백씨가 1810년대에 입향하였다고 하며 교촌은 1926년에 동화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살기 시작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동명유래
환산(環山)의 "環" 字와 교촌(校村)의 "村" 字를 따서 環校라 하였다. - 남평마을
남평은 원래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구남촌, 청룡동, 초동, 평강 등 4개 뜸으로 이루어졌으며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구남촌과 쌍룡동이 기록되어 있는데 쌍룡동은 구남촌 남쪽 300m 거리에 있는 골짜기로 마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구남 촌 평강, 초동이 기록되어 있다.
남산리
- 황산마을
황산은 원래 나주군 문화면과 영광군 외동면의 접경지역으로 원황산과 송정 두뜸으로 이루어졌는데 원황산을 영광황산 송정을 나주황산이라 부른다. 그 경계를 보면 노사 기정진의 묘소 대등발로 영광, 나주로 나뉘며 이영수(황산)집과 고제낭(송정)집이 경계이다.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를 보면 외동면에 황산리, 문화면에 황산촌이라 기록되어 있고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을 보면 외동면과 문화면에 황산리가 기록되어 있다. 1917년〈조선면리동일람〉에는 문화면에 황산리, 송정리가 기록되어 있다.
동명유래
마을 주위에 노송이 많아 많은 새가 날아들어 봉산(鳳山)이라 하였는데 일제시대 황산(黃山)으로 부르다 해방후 다시 봉산(鳳山)으로 부르게 되었음. - 동산마을
동산은 원동산과 마을 앞 도로 건너편(주산리로 통하는 도로 좌측)의 나주황산, 마을 서북쪽 잔등 너머의 부곡, 마을 동쪽 산 너머 200m 거리의 용계 등 4뜸으 로 이루어졌으며 용계 동쪽 300m 거리의 개골에서도 6.25사변 후 4호가 살았는데 없어졌다. 동산은 원래 영광군 외동면과 나주군 대화면이 합해진 지역으로 그 경계는 정확하지 않으나 원동산과 나주황산은 나주지역, 용계와 부곡은 영광지역이었던 것 같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를 보면 대화면조에 황산촌이 기록되어 있고,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대화조에 황산리, 외동면조에 용계리가 기록되어 있다. 1917년〈조선면리동일람〉을 보면 대화면에 왕산리가 있는데 1927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지도를 보면 현동산지역에 왕산리가 기록되어 있다.
동명유래
마을 주변에 오동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마을 이름을 동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 연산마을
연산은 원래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호구총수》에 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연산으로 나와 있다.
동명유래
풍수설에 마을이 연화도수 형국이라 하여 연화도수의 첫 자인 "蓮"자에 마을 뒤편에 있는 금강산의 "山"자를 붙여 연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작소마을
작소는 원래 나주군 대화면 지역으로 남강, 두실, 허더리, 한치, 작소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호구총수》에는 허교촌(許橋村), 한치산(寒峙山)이 기록되어 있고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대치리, 남강리, 두곡리, 1917년〈조선면리동일람〉에는 이외에 임교리가 기록되어 있다. 임교리는 현 허더리를 말하는 것 같고 한치촌ㆍ대치는 현 한치다.
동명유래
삼계면 능성리에 한치마을이 있는데 당초에 한치가 영광땅이 되어서 지금도 한치라 부른다.
월산리
- 월전마을
월전은 원래 나주군 문화면 지역으로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200년이 못된 마을인 것 같으며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월전리로 나와 있다.
동명유래
마을 형국이 달형국이라 달판이, 달팽이(달평이) 불렀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월전이라 하였다 한다. - 초지마을
초지는 원래 마을 서쪽 잔등 부근의 명장동이란 곳에 있었는데 불이나서 현 마을터로 옮겨 왔다고 하며 마을을 우데미(상초지)와 하초지로 나누기도 한다. 초지는 원래 나주군 대화면 지역으로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호구총수》에 는 초지촌, 하초지촌이 기록되어 있는데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는 초지리가 기록되어 있고 1917년〈조선면리동일람〉에는 초지리와 명장리가 기록되어 있다.
동명유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날부터 샛가지라 불러오다가 이조말부터 지명을 초지라고 부르고 있다. - 임정마을
임정은 원래 나주군 대화면 지역으로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호구총수》에 임정촌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임정리로 나와 있다. 동명유래 : 외부에서는 동네가 보이지 않을 만큼 마을 앞을 아름드리 쭉나무, 참나무와 대나무가 감싸고 있어서 임정지라 했는데 임정으로 변했다 한다.
전설
마을 뒤 고랑이 100고랑이 되면 도읍이 될터인데 한고랑이 부족하여 도읍이 되지 못했다고 하며 그 한 고 랑은 낙수정(마을 동북쪽에 있는 조그마한 산)이가 붙으면 이루어지는데 어떤 여자가 낙수정이를 보고산 이 움직인다고 말했더니 그대로 멈춰버렸다고 한다. - 인정마을
인정은 원래 나주군 대화면 지역으로 인산과 월정 2마을로 이루어졌으며 두 마을이 별개의 마을이었다가 합해졌다고 하는데 그 시기는 알 수 없으며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호구총수》에는 인산촌만 기록되어 있고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인산리와 월정리로 기록되어 있다.
전설
옛날에 청송심씨가 부자로 살았는데 세도가 대단하여 이곳을 지날때는 말을 타고 가던 사람도 모두 하마 청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그러나 덕을 베풀지는 못하여 스님들이 시주를 오면 쇠똥을 주기도 하는 등 교만을 부렸다. 어느날 한 스님이 찾아와 문전박대를 당하고 쫓겨나면서 말하기를 옥녀탄금이 명당이긴 하나 자리를 조금 옮겨 이장을 하면 대성왕통을 누린다 하므로 주인이 이를 전해 듣고 스님을 다시 잡아 오게 하여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반신반의하던 청송심씨 문중에서는 논란을 벌인 끝에 이장을 하기로 하 고 스님을 붙잡아 묘소 옆 큰 소나무에 대나무로 일곱군데 묶어 놓고는 파묘를 시작하였다. 묘속에는 황 구슬, 옥구슬이 가득하고 검정황소가 앞다리는 구부린채 뒷다리로 일어서고 있는 순간이 었는데 갑자기 구슬과 황소가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나무에 묶어 놓았던 스님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후 청송심씨는 망하여 여기저기로 흩어져 갔다. - 임정마을
임정은 원래 나주군 대화면 지역으로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호구총수》에 임정촌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임정리로 나와 있다. 동명유래 : 외부에서는 동네가 보이지 않을 만큼 마을 앞을 아름드리 쭉나무, 참나무와 대나무가 감싸고 있어서 임정지라 했는데 임정으로 변했다 한다.
전설
마을 뒤 고랑이 100고랑이 되면 도읍이 될터인데 한고랑이 부족하여 도읍이 되지 못했다고 하며 그 한 고 랑은 낙수정(마을 동북쪽에 있는 조그마한 산)이가 붙으면 이루어지는데 어떤 여자가 낙수정이를 보고산 이 움직인다고 말했더니 그대로 멈춰버렸다고 한다. - 만화마을
만화는 원래 나주군 대화면 지역으로 원만화와 동쪽 50m 거리의 낙수쟁이로 이루어졌으며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호구총수》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200년이 못된 마을인 것 같으며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만화 리로 기록되어 있다.
동명유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만화로 써오다가 6.25사변 후 만화로 바뀌었다 한다.
구룡리
- 구봉마을
구봉은 원래 나주군 대화면 지역으로 원구봉과 너더리, 동각 등 3마을로 이루어졌으며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호구총수》에는 板橋村(너더리)만 기록되어 있고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판교리, 동각리, 구봉리 가 기록되어 있어 너더리가 가장 먼저 성촌된 마을인 것 같다.
동명유래
《구 봉》: 마을 앞으로 용진산 자락이 뻗어 있는데 산 봉우리가 9개라 하여 九峰이라 하였다 한다.
《너더리》: 삼서 홍정으로 가는 길에 판자다리(널더리)가 놓여 있어 생긴 이름이라 한다. - 덕산마을
덕산은 원래 나주군 대화면 지역으로 원덕산과 신덕, 삼룡, 마산, 온골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삼룡이 가장 오래된 마을터라고 한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신기촌, 삼촌이 기록되어 있는데 신기촌은 온골 인것으로 추정되고 삼촌은 삼룡인 듯하다.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에는 마산리, 덕산리, 삼룡리가 기록되어 있는데 1927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지도에 현 온골 지역에 신기가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온골이 신기인 듯하다.
동명유래
유래는 알수 없으나 옛날부터 덕산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설
삼룡마을 입구에 패나무 2주가 나란히 서 있었으며 그 사이에 바위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 바위를 옛날에 장씨 처녀가 갖다 놓았다고 하며 너더리에 사는 총각이 가져가곤 하여 서로 가져왔다 가져갔다 싸웠다 고 한다. 그리고 어느 핸가 세찬 바람이 불어 팽나무 가지가 부러졌는데 서윤길이 갖다 쓰고 한쪽 눈이 멀었다고 하며 또 갖다 쓴 후 한쪽 눈마저 멀었다고 한다.
송계리
- 좌동마을
좌동은 나주군 대화면 지역으로 원좌동과 한골, 원좌동 남쪽 1㎞ 거리의 신정으로 이루어 졌는데 신정은 6.25사변때 폐촌되었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호구총수》에 지달촌, 신촌, 호계촌이 기록되어 잇는데 지달촌은 마을 남쪽 1㎞거리의 지달재 부근에 있었던 마을인 것 같으나 알수 없고 호계촌은 좌동을 말한다.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동계리, 신정리, 좌동리 가 기록되어 있는데 동계리는 한골을 말한다. 원좌동은 마을 위쪽의 외야골과 아래쪽의 신촌으로 나뉘기도 한다.
동명유래
《좌 동》: 마을 현국이 범 형국이라 원래는 범계라 불렀는데 호랑이는 숲이 짙어야 좋다고 하여 송자를 쓰게 되었다고 하며 마을이 송계리 전체로 봐서 왼쪽에 있기 때문에 외약골이라 한다.
《한 골》: 큰 골짜기란 뜻인 것 같으며 범계의 동쪽에 있어 동계라 한 것 같다. - 축내마을
축내는 나주군 대화면 지역으로 원축내와 고짓터(성산)으로 이루어졌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축내촌이라 기록되어 있고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성산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1917년의 〈조선면리동일람〉에는 성산리, 축내리가 기록되어 있다.
동명유래
마을형국이 물위에 떠 있는 배형국이라 옛날부터 방죽안이라 불렀는데 장성댐이 건설되어 광산으로 내 려가는 용수로가 마을앞으로 흘러감에 따라 수로의 높은 둑이 마을을 감고 도는 형국이 되어 이름이 맞아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