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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현대 이전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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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개화기 사립학교
  • 2. 일제 식민지 시대 교육

1. 개화기(開花期) 사립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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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립 장명학교(私立長明學校)

1) 설립연대 : 1906년
2) 위 치 : 장성읍 성산리 장성향교 내
3) 설 립 자 : 장성향교 유림
4) 설립목적 : 한일 합병 직전 각처에서 우국지사들이 개화를 부르짖고 자주독립을 위한 계몽의 열풍이 일기 시작한 때 향교 유림들이 앞장서 새학문의 전당을 세우고 민족 자주 정신을 깨치려 했다. 한일합방 이후에도 신학문 교육운동은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5) 규 모 : 15세∼45세의 상투를 꽂은 유림 선각자들의 자녀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향교의 명륜당 4처 30간에 약 80명의 학생이 방마다 가득했다 한다.
6) 학감(學監) : 향교직장(直長) 지산 변진걸
7) 교 과 목 : 과학, 산수(가, 감, 승, 제) 정도
8) 일인 간섭 : 한 때 학생수가 100명이 넘어 멀리서 온 학생이 많아 자취방 구하기도 어려웠는데 일본인이 교장으로 와 식민지 교육이 시작되면서 학생수는 급감하였다.

(2) 삼일학교 (구 숭실학교)

1) 설립연대 : 1918.10.10
2) 위 치 : 장성읍 성산리 복산부락
3) 설 립 자 : 정선유 (鄭善瑜)
4) 설립목적 : 민족 자주 정신의 선양
5) 만세운동 : 전신 숭실학교 교장 정선유는 교사 최에리사, 조순식, 고경상 신도일 선생들과 학생 150여명을 이끌고 1919년 2월 지방 유지 청년들과 비밀 집회를 갖고 만세운동을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고역을 치루고 학교명까지 3·1학교로 바뀌였다.
6) 학교운영 : 교장: 정선유 교직원: 4명 학생수: 150여명 재정: 설립자 부담 운영기간: 6년 장성역전 3·1운동비문에 활동내용 소개
7) 일제 강제 폐교 : 독립만세운동의 실패 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다.

(3) 오북의숙

1) 설립연대 : 1919. 3·1운동 일어나던 해로 추정
2) 위 치 : 북이면 사거리 북부 추정
3) 설 립 자 : 신경식, 류상승
4) 설립목적 : 민족 자주 정신의 함양과 신문화 학습
5) 설립동기 : 북이면 모현리 3·1만세운동 이후 젊은이들에게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했다.
6) 재 원 난 : 뜻은 좋았으나 재원 난으로 단명으로 끝났다.

(4) 광성의숙(廣成義塾)

1) 설립연대 : 1920년대 추정
2) 위 치 : 백양사 청류암
3) 설 립 자 : 만암 송종헌(曼庵 宋宗憲)
4) 교육내용 : 국어, 국사, 교리. 이웃 사찰에서도 와서 수강

(5) 심상학교

1) 설립연대 : 1925년대 추정
2) 위 치 : 백양사 경내 쌍계루 옆
3) 설 립 자 : 만암 송종헌(曼庵 宋宗憲)
4) 설립목적 : 민족자주정신의 선양 및 새 시대 문화 습득
5) 교육대상 : 승려, 일반 청소년, 이웃 북하면은 물론 순창 복흥과 정읍 입암면에서도 공부하러 왔다.
6) 교육내용 : 국어, 국사, 수학, 농사기술에 민족혼 고취
7) 일제탄압 : 일제의 탄압이 심하여 약수로 옮겨 약수초등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6) 사립월평보학교(私立月坪普通學校)

1) 설립연대 : 1920. 9. 1.
2) 위 치 : 황룡면 월평리
3) 설 립 자 : 김시중(金時中) 교주(校主) 김요중(金堯中)
4) 설립목적 : 향토민의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새 문화 습득을 위해 장기적 안목을 갖고 설립했다.
5) 설립과정과 운영 : 당시 황룡면장 박균철, 군 참사 김궁현, 등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찬조금을 모아 설립키로 되어 동아일보에 보도까지 되었으나 기금부족으로 중단되었다. 월평 울산 김씨 문중 중심으로 다시 학교 설립 기성회 조직 : 대표자 김시중
회원수 40명 회비 부담 각자 소유의 지가 1% 연 2기 분납 키로
400원 이상 700원 이하 기부자 명단 김시중, 김요중, 김요직, 김요준, 김요흠, 김세갑, 김세중, 김규, 김요현, 김요관, 김명중, 김하중, 김요식, 김진환, 김요극, 김요계, 김복.

(7) 사거리 사립학교

1) 설립연대 : 1921년 추정
2) 위 치 : 현 북이초등학교(북이면 신평리)
3) 설립과정 : 학교는 김변수, 변남연, 김상효 등이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1년만에 폐교되었다. 그 뒤 김상효 단독으로 사재를 털어 학교부지를 마련하고 교실 6칸, 운동장 등을 마련하여 개교하였다. 그러나 김상효 단독으로 교직원 봉급과 운영비 등을 부담함으로써 다시 개교 1년 반만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지방 유지들이 힘을 모아 그 자리에 공립보동학교를 설립했다.

2. 일제 식민지 시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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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립 보통학교

일제는 1910년 한국을 강제 합병하고 조선교육령(칙령 229호)을 공포하여 식민통치를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에따라 1920년을 전후하여 각 읍·면에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 학 제 : 초기에는 4년제로 했으나 뒤에 6년제로 하였다. 지역에 따라 4년제를 허용한 대신 6년제 학교에 편입토록했다.
2) 입학연령 : 초기에는 8세 정도로 했으나 뒤에 그 이하로 점차 낮아졌다.
3)교육목적: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가 아니고 일본 제국주의 노동력 공급의 방편으로 삼았음으로 학력 또한 일상 생활의 보통 기능위주로 되어있다.
4) 조 직 : 교장(일본인) 수석교사, 1학급 1교사 담임제 6명중 1명 일본인 교사
5) 학급당 수용인원 : 초기에는 10명 내외였으나 점차 증가하여 20명 내외로 되었다. 초기에는 교직원이 학생 모집을 위해 직접 부락을 방문하였다.
6) 학교시설 : 교사(校舍) 목조, 함석지붕 건평 교실당 복도 포함 20평 운동장은 6학급 경우 약 3000㎡내외였다.
7) 학습자료 : 올겐 1대 간단한 괘도, 기본실험기구, 조류박제, 지구본 등
8) 교육과정 : 교과별 시간 배당 토요일 전학년 4시간 오전 수업

① 교과서는 일본어로 되어있고 4년부터 한자가 병용되었다.
② 조선어는 1935년쯤 해서 폐지되었다.
③ 음악은 양악이었고 노래 말은 일본어였으며 기악은 없었다.
④ 미술도 서양화 일색으로 4년까지는 크레용으로 쓰고 5,6년에서는 물감으로 쓰게 했으나 당시는 형편이 어려워 도화지도 없어서 공책을 뜯어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미술에 공작과 습자라 하여 서에가 있었는데 공작에 비해 서예는 중시 된 듯하다.

공립 보통학교 교육과정

공립 보통학교 교육과정 - 학년/교과, 1, 2, 3, 4, 5, 6, 비고 제공 표
학년123456비 고
교과
수신(수신)바른생활, 도덕311111
독본(독본)일본어, 이야기짓기810101099초기에는 한문도 있음
조선어 한국어....11일제 말 페지
산술 산수666655
이과 자연...222
역사 사회....22
지리 사회....22
체조 보건333333
창가 음악222222
도화 서예, 회화, 공작222222
실습 가사, 실과....22
242424263131

9) 교수학습

① 현재의 바른생활인 수신지도 : 4학년 부터는 일본인 교장이 수업을 직접 맡았다.
② 학습형태 : 교사 중심의 주입식으로 학습도입은 국어의 경우 교과서 읽기로 시작하여 한자의 음을 습득케하고 글의 전체 대강의 뜻 다음에는 단어의 뜻 그리고는 문단의 뜻 주제확인 끝에 낱말에 대한 짧은 글짓기 등을 하고 끝냈다.
이런 학습과정에서 수업의 흐름은 주로 문답식으로 진행되는데 우등생 중심이 되어 학습 참여율은 낮았으나 학생은 몰라도 즉(하이)이라는 대답을 크게 하곤 했다.산수 과목의 경우는 조별로 칠판에 나가서 문제를 풀고 설명하는 과정을 밟는게 기본 틀이다. 이때에 교사는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익혔다.
③ 학습 부진아 지도 : 학습 부진아는 학급에서 3,4명 정도 남게하여 수업이 끝난 뒤에 1시간 정도 담임 교사가 직접지도 하거나 같은 부락 우수아가 지도하는 방법인데 주로 산수 구구셈 외우거나 계산 문제 연습이나 국어 읽기 등을 시킨다. 남아서 공부하는 것을 일본말로 [노꼬리 벤꼬]라 했는데 아주 싫어했다.
④ 숙제 : 숙제는 대개 교과 수업이 끝날 무렵이나 종례 시간에 국어 산수를 중심으로 내 주는데 국어는 주로 낱말 뜻 써오기, 한자 써오기, 대가의 뜻 적어오기 몇 번 읽어오기 등이고 산수는 몇 쪽 문제 풀어오기 등으로 거의 매일 숙제가 있고 토요일에는 더욱 많았다. 숙제검사는 수업 시작 전에 실시되고 안한 아이는 앞에 나와 꿇어 앉거나 복도 청소 등을 하거나 운동장 몇 바퀴 돌리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회초리로 손 바닥을 맞기도 했고 심하면 변소 청소도 시켰다.
⑤ 평가 : 그 당시에는 평가라 않고 시험 또는 고사라 했다. 시험은 별로 없고 학기말 고사가 있었는데 이 질문지 고사에 의해 성적을 결정하는데 성적은 갑, 을, 병, 정(甲, 乙, 丙, 丁)의 4단계로 나누어 갑은 100만점에 85점으로 했는데 한때는 갑상, 갑, 갑하로 나누기도 하고 통신표는 학기말에 가정으로 통신과 함께 성적, 건강, 행동은 조행(操行)이란 항목으로 평가하여 보냈다.

10) 교과외 활동(특별활동)

① 조회(朝會) : 우천시를 제외하고는 매일 아침 조회를 하였고 그때마다 교장은 긴 훈화를 하였다. 내용은 주로 일본의 자랑이었다.
② 봄소풍, 가을소풍 : 소풍은 원족(遠足)이라 하여 아침에 출발하여 석양에 돌아오는 일종의 행군 훈련이어서 돌아올 때는 거의 힘이 빠졌다.
③ 운동회와 학예회 : 운동회는 해마다 가을에 했는데 지역의 축제였었고 학예회는 몇 해씩 건너뛰어 이른 봄에 교실을 터놓고 했는데 음악이 주였다.

11) 일본 제국의 민족 탄압 교육

① 황국 신민 서약 강요 : 일본은 침략 정책을 아세아 전역에 확대하면서 한국국민에게는 일본 황국신민교육정책을 강화하여 내선일체(內鮮一體) 즉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면서 황국신민(皇國臣民) 서문(誓文)을 만들어 매일 조회 때마다 외우게 하고 잘못 외우면 남겨서 강제로 외우게 했다.
②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 : 신사는 일본 조상의 신을 모신 사당이다. 이 신사를 각 읍면의 경관이 좋은 요지에 지어 성역처럼 꾸며놓고 크고 작은 행사 때면 여기에 가서 참배를 강요했다. 나중에는 그 앞에 지날 때마다. 신사당을 바라보고 단정히 서서 절을 하고 가라고 했다. 여기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만의 태도가 보이면 요시찰인으로 낙인 찍어 불이익을 주었다.
③ 조선어 사용 금지 : 우리 고유의 민족성을 없애기 위해 우리말을 못쓰게 했다. 학교에서 우리말을 하면 벌칙을 주었고 가정에 가서도 일본말을 쓰라고 강요했다.
④ 일본식 창씨 강요 : 세계2차 대전이 확대되면서 지원병이니 학병이니 하여 전선에 내 보내면서 일본 국민화 정책은 더욱 강조되면서 성씨마저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압력을 넣었다.

12) 반일 감정의 분출

① 일본 설 반대 : 일제 때 우리민족은 음력설을 쇠었는데 일본사람은 양력설을 쇠면서 우리에게도 일본 설을 쇠라고 강요하고 여러 가지 훼방을 놓았다. 겨울 방학 때인데도 설날 아침 다례 모시는 시간에 학교에 안나오면 결석으로 한다고 협박을 했다. 그래도 일본 설이라며 거부를 했으나 나중에 일부는 그대로 순종해서 설을 두 가지로 쇠기도 했다.
② 김동규 학생 단문(短文)사건 : 사거리 보통학교 6학년 학생 때 국어시간에 짧은 글짓기를 하였는데 일본총독을 모독하는 글을 지어 경찰에 불려갔다.
③ 동맹휴학 : 1933년 무렵에 사거리 보통학교에서 일본인 교장을 배척하는 동맹휴학 사건이 발생하였다.

13) 학교명칭 변경

① 공립보통학교 → 심상소학교(일본인 학교명과 같음)
② 심상소학교 → 국민학교(일제말기)

14) 전시체제교육(중일, 태평양전쟁)

① 근로봉사 : 일본은 전쟁이 확대되고 힘겨워지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국민학교 어린아이들 까지 동원하여 근로봉사란 이름으로 공부는 하는둥 마는둥 일만 시켰다. 심지어 학교 운동장에 피마자나 콩을 심는 등 심한 노동을 시켰다.
② 고철 모으기 : 집에서 고철을 주워 모았다가 월요일 아침에 가져오게 하는가 하면 수저, 밥그릇까지도 가져오라 괴롭혔다.
③ 관솔 따오기 : 소나무의 관솔을 따오라 해서 산에 올라 소나무에 매달려야 했다.
④ 위문문 쓰기 : 일선에서 싸우는 군인들에 쓰라고 매일같이 귀찮게 했다.

15) 고통스러운 신발

찰딱게는 지푸라기로 만든 일본식 신발인데 학생들 스스로 만들어 신게했다. 학생들은 이 신발이 곧잘 망가져 애를 먹었다. 고무신도 귀했고 절약도 해야 된다며 학교에서 강요했다.

16) 학비 (학교납부금)

① 월사금 : 그 당시 학교에 내는 공납금을 수업료(授業料)라 하여 납부하는데 가정에서는 다달이 내는 감사의 돈이란 뜻으로 월사금(月謝金)이라 했다. 이 월사금은 시골에서 4일 노동을 해야 충당할 금액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돈을 감당 못해 입학도 못했거니와 다니다가도 중도 퇴학하는 경우가 흔했다.
② 학용품 : 교과서도 개인이 사야되고 공책 연필도 준비해야 되는데 학부모가 소득이 적으니 연필 한 자루를 제대로 못 사주어 거의가 몽당연필을 붓대에 꽂아 썼고 지우개는 살 염두도 못 내어 휜 고무신짝을 잘라 석유 호롱에 몇 일 넣었다가 쓰기도 했으니 지금 아이들은 너무 사치스럽다.

17) 취학률

① 초기취학률 : 초기에는 취학률이 극히 낮아 교사들이 마을에 나와 모집했다.
② 일제말기 : 일제 말기에는 교육열이 높아져 정원 초과되어 입학이 어려울 정도였는데 그래도 취학률이 80% 정도로 본다.

(2) 간이학교(簡易學校)

1) 성격 : 연령초과로 정규 보통학교에 취학하지 못한 아동을 위해 벽지에 설립, 1·2년 특별 지도를 하여 보통학교에 편·입학시키는 학교다.
2) 설립시기 : 1935년 전후
3) 설립장소 : 각 읍 면의 교통 불편 오지로 연령 초과자 많은 곳에 1교
4) 학교시설 : 교실은 처음 서원(書院)강당을 빌리기도 했다가 목조로 허술하게 지어 임시로 이용했다.
5) 설립주체 : 지방행정
6) 사설학당 : 간이 학교에서도 약간의 수업료가 있었는데 빈곤한 아동들은 이마저 못 다니고 산골 구석에서 서당과 비슷하게 몇 명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친 곳이 있었는데 일본 경찰들은 허가 없는 곳이라며 막았다 한다. (※ 변길연 제보)

(3) 농업 보습학교

1) 성격, 규모 : 보통학교 6년을 졸업한 20대 전후의 중견 청년들 중에 각 읍면장의 추천을 받아 2년 동안 농업 실습위주의 합숙 교육을 마친 뒤에 읍·면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학생수는 60명 내외
2) 설립시기 : 1935 전후
3) 설립장소 : 장성읍 성산리 성산학교 인접 기숙사는 실습지 부근
4) 설립주체 : 전라남도

(4) 영천 심상소학교(일본인 초등학교)

1) 성격, 규모 : 일본인 초등교육기관이다. 각 읍면에서 소수 아동 통학
2) 설립시기 : 1913
3) 설립장소 : 장성읍 영천리
4) 설립주체 : 전라남도

(5) 고등소학교

1) 성격, 규모 : 주로 일본인 소학교 졸업한 아동에게 2년간의 중등교육을 목적으로 했는데 더러는 한국인도 입학이 허용되었다.
2) 설립시기 : 1913
3) 설립장소 : 영천 심상소학교
4) 설립주체 : 전라남도

(6) 중등학교 진학

1) 장성군내 : 장성군내는 일보인 고등 소학교가 있으나 일반 한국인은 입학이 어려웠다.
2) 타지로 유학 : 초등학교 졸업도 어려운 형편이라서 중학교 진학은 10%도 안되는 편인데 이웃 고창 고등보통학교(고창고보)와 정읍농업학교,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나 목포상업학교 등에 진학하였다.

(7) 야학(夜學)

1) 일반화된 자생적 성인 교육

① 성격, 규모 : 한말 개화의 바람이 시골에까지 미치고 한일합방으로 국민이 새 문화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청장년 남녀같이 배움을 통감했다. 이때 각 마을에서는 서로 뒤질새라 마을 지도자 중심으로 농한기의 밤을 이용하여 문맹퇴치 운동으로 붐을 일으켰다.
② 추진시기 : 1935 전후
③ 장소 : 그 마을에 잠실 등 비어있는 큰 방
④ 추진주체 : 마을 이장 등 지도급 인사
⑤ 시설 : 칠판(판자에 먹칠 한 것)백묵, 남포등(호롱불 10배나 되는 유리등불), 책상은 각자가 사과괘작(나무판자로 된 것)
⑥ 교육내용 : 한글이해, 산수, 가감승제 계산법
⑦ 수강생부담 : 공책, 연필, 연료(돌아가면서 나무를 갖아오기) 등유값 약간
⑧ 수강생 연령 : 15,6세 이상 30대, 주로 남자
⑨ 강사 : 마을 이장이나 지도급 인사
⑩ 수강시간 : 저녁 식사 마친 뒤부터 약 2시간 보통 10시 30분쯤 끝남
⑪ 일본 경찰 순회 : 혹시나 반일 감정이나 깨우치는가 하고 때때로 순회
⑫ 노래지도 : 북이면 묘동 마을 야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노래도 지도했다.[지난 엿새 동안에는 힘을 다하여 공부하고/오늘 일요일을 또 당하여 즐겁기 한이 없네. 삼삼오오 작반하여 야외 산보를 나가보세 / 산수 좋은 곳을 찾아 마음이 상쾌하게]
⑬ 처녀야학 : 처녀들은 별도로 방을 마련하여 서간문 붓글씨 공부도 했다.

2) 단광노동야학(丹光勞動夜學)

① 설립시기 : 1928
② 설립장소 : 장성읍 단광리
③ 설립 및 후원 : 일본인 지주 길전직량(吉田直良) 장성 운송부 지사장
④ 교육내용 : 일본어, 산수, 한글은 강사가 비밀리에 지도
⑤ 수업료 : 7원∼8원, 극빈자는 면제
⑥ 강사 : 자원봉사
⑦ 수강생 : 야학부는 40명 정도이고, 주간부는 약 30명, 여학생은 1/3 정도였다.
⑧ 야학선택 이유 : 가정 빈곤으로 보통학교의 수업료를 부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⑨ 학용품 무상 제공 : 극빈으로 공책도 준비 못하는 수강생은 강사가 제공하였다.
⑩ 기타 : 야학에서 기초를 배우면 아곡리 간이학교에 편입했다. 이웃인 진원면에서도 학생이 왔다.
⑪ 폐교 : 1944년에 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면서 폐교되었다.

(8) 서당

1) 성격 : 옛부터 내려온 전통식 교육제도로 독서당은 여유있는 가정에서 자기 자녀들만을 가르키기 위한 것이고 마을에서는 한문을 배우는 곳이다.

2) 규모 : 마을 서당의 경우 마을에 빈방을 이용하는데 배우려는 학동은 집안 형편이 안좋기 때문에 많아야 10여명 정도였다.

3) 교육내용 : 천자문·추구집(推句集)·사자소학(四字小學)·동몽선습(童蒙先習)·명심보감(銘心寶鑑) 등을 주로 가르쳤다. 한자의 습득과 함께 서예지도를 겸했다. 학습은 철저한 개인지도로 환전히 습득한 뒤에야 다음 학습으로 들어갔다. 학습방법은 큰소리로 읽고 뜻을 풀이하고 다음에는 붓글씨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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