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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마을유래

제4절 동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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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혁

ο 선사시대의 유물인 돌끌과 돌화살촉이 구림리에서 출토되었고 고인돌이 임정마을에서 발견되었다.
ο 동화면은 옛날부터 북부와 남부가 서로 다른 고을에 속하였다. 백제때 북부는 삼계·삼서와 함께 소비혜현에 속하고 남부는 광산군 본양·삼도·임곡과 함께 수천(水川)현에 속했는데 통일 신라 경덕왕 16년 소비혜현은 삼계현으로 수천현은 여황(艅 )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ο 고려 현종 9년(1018) 북부가 속했던 삼계현은 영광군에 예속되고 남부는 나주목의 영현인 여황현에 속했던 것 같다.
ο 조선 초기 여황현이 폐현이 됨에 따라 남부는 나주목에 속하고 북부는 영광군에 속해 있었다.
ο 1749년 발간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북부는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261호 945명이고 남부는 나주군 대화면 지역으로 357호 1,146명이었다.
ο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 의하면 외동면은 278호 693명으로 반룡동(盤龍洞)·수연동(隨緣洞)·산직촌(山直村)·서양동(西陽洞)·삽치(揷峙)·통안리(通安里)·조산리(造山里)·구산리(龜山里)·묘촌·쌍룡동(雙龍洞)·구남촌(龜南村)·성수동(成水洞)·신정(新亭)·황산리(黃山里)·환산(環山)·가정(柯亭)·황룡(黃龍)·신기(新基)·수연리(隨緣里) 19마을이 있었고 대화면 지역은 235호 767명으로 지달촌(地達村)·신촌(新村)·호계촌(虎界村)·축내촌(丑內村)·송사리(宋士里)·양지촌(陽地村)·신기촌(新基村)·삼촌(森村)·신옹점(新瓮店)·판교촌(板橋村)·임정촌(林亭村)·인산촌(仁山村)·허교촌(許橋村)·한치촌(寒峙村)·황산촌(黃山村)·동산촌(東山村)·초지촌(草枝村)·하초지촌(下草枝村)·신옹점(新瓮店) 등 19마을이 있었다.
ο 1906년 대화면이 나주군에서 함평군으로 옮겨짐.
ο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영광군 외동면에 19마을(보룡리·서양리·동계리·남동·조산리·장동·부산리·용계리·가정리·화곡리·환산·황산·연산·구산·통안리·서촌·기동·평강리) 함평군 대화면에 23마을(만화리·판교리·마산리·동각리·송정리·대치리·남강리·구봉리·인산리·월전리·덕산리·조치리·임정리·황산리·월정리·동계리·성산리·송사리·신기리·삼룡리·신정리·좌동리·두곡리)이 나온다.
ο 1914년 영광군 외동면과 함평군 대화면을 동화면으로 통합하여 장성군에 편입시켰다.

(2) 용정리(龍亭里)

용정리는 가정과 기산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 가정·황룡·신기·수연리(隨緣里)가 나오는데 수연리는 알 수 없고 신기는 기동으로 추측되며 황룡은 원황룡마을의 음지편(현재 가정의 작은뜸)을 말한다.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 가정리·서촌·기동·부산리가 나오는데 서촌은 황룡면 수산마을의 서수산인 것 같다. 1914년 영광군 외동면의 가정·기동·부산·서촌일부 장성군 황룡일부를 용정리(황룡과 가정에서 따옴)로 묶어 장성군에 편입했다.

ㅇ 가정(柯亭)

가정은 동촌, 서촌, 우대미, 작은뜸으로 이루어졌다. 오래전 진씨들이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신평송씨가 1520년경에 들어오고 함평이씨가 9대째 영월신씨가 6대째 김해김씨가 4대째 살고 있다. 일제때 회진임씨·장흥고씨·문경송씨·청안이씨 해방후 수원백씨·밀양박씨가 들어오고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작은뜸은 원황룡 마을의 음지편으로 황룡의 광산김씨들이 옮겨와 살았으며 지금도 황룡과 한마을처럼 생활한다. 동화면사무소가 처음 이 마을에 있었고 주재소도 잠깐 있었다. 일제때 함평이씨 30호·영월신씨 10여호·신평송씨 5호 등 80여호가 살았으며 6·25때는 3명이 죽고 가옥피해는 없었다. 현재 52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배형국이라 가(井)이라 했는데 가정(柯亭)으로 변했다 한다. 인물 : 이형범(한말의병)·이한범(구휼 적선가)·신항문(동화면장)·신철수(초등교장, 면장)·이기수(경남지사)·고동석(병원장)·김기수(고대교수).

ㅇ 기산(基山)

기동과 부산마을로 이루어졌다. 처음 텃골(기동)에 탐진최씨와 진주강씨가 물뫼에서 옮겨왔는데 그 시기는 알수 없으며 호구총수 (1789년)에 나오는 신기가 기동인지도 확실치 않다. 부산에는 광산김씨가 5대째, 진주강씨가 4대째, 한양조씨가 3대째 살고 있다. 일제때 기동에 12호(탐진최씨 5·진주강씨 3·밀양박씨 3·김해김씨 1) 부산에 16호(광산김씨 4·김해김씨 3·한양조씨 3·정씨 2·이씨 2·차씨 1·강씨 1) 살았으며 6·25때 피해는 없었다. 현재 기동에 15호 부산에 22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텃골이라 부르다가 기동(基洞)으로 표기하며 부산(釜山)은 마을이 가마솥 형국이다. 인물 : 조항규(장성군수)·김인배(면장)·정찬원(판사)·조명규(면장). 유족유물 : 입석, 열녀비, 진원박씨 제각.

(3) 동호리(東湖里)

동호리는 연동·남동·동계·조산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 반룡리(현동계)·조산리가 기록되어 있고 1912년(행정구역명칭)에 동계리·남동·조산리·연산이 나온다. 1914년 남동리·조산리·동호리·연동리를 동호리라 하여 장성군 동화면에 편입했다.

ㅇ 연동(連洞)

200여년전 경주최씨가 들어 왔으며 150여년 전 함평이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김해김씨·상산김씨, 해방후 평택임씨·나주임씨, 그리고 6·25후 청주한씨·광산김씨·창원황씨·탐진최씨·여산송씨가 들어왔다. 새터에는 일제때 경주최씨가 들어온 후 광산김씨·상산김씨가 들어왔다. 일제때는 경주최씨를 중심으로 30여호가 살다가 6·25때 2명이 죽었으나 가옥피해는 없었다. 장성댐 수로공사때 2호가 철거되고 현재 25호(연동 23·새터 2)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연화형국이 있다는 설과 마을앞에 연방죽이 있어 연화동→연동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연방죽은 일제말엽 논이 되었다. 인물 : 최창석(육군중령), 황하석(동화농협장).

ㅇ 남동(南洞)

옛날 고창과 황룡장을 오가는 길목으로 주막이 있었는데 호구총수(1789년간행)에는 나오지 않으나 광산김씨가 7대째 살고 있다. 100여년전 해주최씨·경주정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함평이씨·김해김씨가 들어와 12호가 거주하다가 6·25 때 피해는 없었다. 상산김씨·신평송씨·밀양박씨·창녕조씨·경주이씨·한양조씨·전주이씨·파평윤씨 등이 들어와 20여호가 되었는데 장성댐 수로공사때 5호가 헐렸다. 그러나 호수가 증가하여 2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관잔등이라 불러왔는데 옛기록에 남동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고 1968년 면에 건의하여 남동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도 남동으로 나와 있다. 인물 : 최은철(예비군중대장), 이준영(농협전무).

ㅇ 조산(造山)

원조산·강당·산태바우·삼밭골의 4뜸으로 이루어 졌는데 호구총수(1789년)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옛일은 알 수 없다. 원조산에 광산김씨 부자가 살다가 떠났다고 하며 그후 다른 광산김씨들이 들어왔다. 120년전에 경주김씨가 들어오고 그 외는 일제때 들어왔다. 해방후 광산김씨·경주김씨·의성김씨·함평이씨·허·박·조씨 등이 살다가 6·25후 밀성박씨·김해김씨·청주한씨·경주정씨가 들어왔다. 강당에는 110여년 전에 밀성박씨, 일제말 진주강씨, 6·25후 광산김씨·전주이씨가 들어왔다. 산태바우는 일제말 광주정씨가 들어왔으며 6·25후 창녕조씨·전주이씨·전씨·여양진씨·밀양박씨·수성최씨·진주강씨가 들어오고 삼밭골에는 1962년 동래정씨가 들어왔다. 일제때는 원조산에 30여호 강당에 4호가 살다가 6·25때 1명이 죽고 전호가 소각되었다. 1976년 장성댐 수로가 날 때 6호가 헐리고 현재 27호(조산 12·강당 6·산태바우 7·삼밭골 2)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조산 ­ 마을 입구 솔무덤과 강당 앞 논 가운데 산 때문인 듯하다. 강당­광산김씨 제각이 있다. 인물 : 육군소령 진현묵, 유적 : 김기의묘 숭모사­광산김씨 제각이 있던 곳에 2000년 사우를 짓고 문숙공과 2자의 위폐를 모셨다.

ㅇ 동계(東溪)

원동계와 월봉촌으로 이루어졌다. 옛날에 함평이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1780년경 광산김씨가 동정이골로 들어온후 차츰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월봉촌은 일제때 조성되었으며 해방후 원동계에 35호 월봉촌에 10호가 거주했는데 6·25때 5∼6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그후 대부분 다시 들어왔으나 현재 31호(광산김씨 13·장흥고씨 2·평택임씨·동래정씨·나주정씨·장수황씨·진주정씨·울산김씨·신평송씨·밀양박씨·해주오씨)이다. 동명유래 : 호구총수(1789년)에는 [반룡동]이라고 나온다. 광산김씨 동리(東里0선생이 동쪽계곡에 초당을 짓고 강학하면서 동계로 불렀다고 하며 일명 [자차우]라 한다. 인물 : 김조(영조때 학자)·김채수(동화면장)·김택열(평통의원)·김강식(강진세무서장) 유물유적 : 목우재(광산김씨재각) 울산김씨재각, 영사재(상산김씨 재각).

(4) 서양리(西陽里)

서양리는 서양과 삽치 두 마을로 형성되었다. 옛날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 수연동(隨緣洞)·산직촌(山直村)·서양동(西陽洞)·삽치(揷峙) 마을이 적혀 있다. 그러나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는 삽치가 없고 구평리(九坪里)가 나온다.

ㅇ 서양(西陽)

서양과 장군봉 두뜸으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에도 나오며 순창설씨가 처음 들어와 8대째 살고, 그후 여양진씨가 150여년전에 들어왔다. 일제때 전주이씨·함평이씨·동래정씨·장흥고씨·창녕조씨·남씨·장씨 인동장씨·밀양박씨·공주이씨·김해김씨 등이 들어와 40∼50호(장군봉에 7호)가 살았다. 여순반란군이 수연산으로 몰려왔는데 이때 3호가 불탔으며 6·25때 1명이 죽고 전호가 소각되었다. 이때 생활수단인 지소(종이공장 2∼3개가 있었음)가 없어져 대부분 타지로 떠나고, 광산김씨·강릉유씨·진주정씨·청도김씨·경주이씨 등이 새로 들어와 6호 14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동명유래 : 서용(西龍) 또는 수연(수용·시웅)이 변했다는 설이 있고 [시랑동]이라 했다고도 하는데 확실치 않다. 인물 : 나몽성(도의원)·김연수(동화중대장). 유물유적 : 절터·도요지.

ㅇ 삽치(揷峙)

호구총수(1789년)에 삽치가 나오며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는 보이지 않고 대신 구평리(九平里)가 나오는데 한 마을인지 확인할 수 없다. 1770년경 의령남씨가 입향하였으며 중간에 신평송씨·진주정씨·광산김씨·김해김씨·전주이씨 등이 들어왔다. 40여호가 살다가 6·25때 2명이 죽고 가옥이 소각되었으며 5호만 남았다. 30여호가 다시 들어와 살다가 많이 타지로 떠나고 현재는 군부대에 편입되어 8호만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재수재(영광가는 고개)에 깃발을 꽂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는데 확실치 않다. 인물 : 정재일(동화조합장).

(5) 구림리(九林里)

구림리는 장만·통안·구산 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에는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통안리·구산리·묘촌이 나오며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장동·구산·통안이 기록되어 있다.

ㅇ 장만(壯晩)

장군봉 남쪽 기슭의 장동과 동쪽 기슭의 만평(晩坪)을 합친 마을이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1700년경 동래정씨가 장동으로 들어와 후손들이 만평까지 성촌했다고 한다. 일제말 장동에 16호(동래정·광산김·함평이·의성김·전주이·손씨 등)만평에 13호(동래정·광산김·울산김씨 등)가 살았으며 6·25때 16명이 죽고 장동의 가옥이 전소되었다. 그뒤 대부분 떠나가고 새로 들어와 현재는 장동에 8호(함평이 2·동래정·흥성장·해주오·전주이·경주정·전씨)·만평에 14호(경주정 5·동래정 2·울산김·강릉함·밀양박·광산김·경주최·여산송·장흥고) 총 27호 61여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장동은 장군봉 또는 노루형국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만평은 늦게 생긴 마을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인물 : 김종엽(면장)·김시락(면장)·정준모(효자)·김용백(동장). 유물유적 : 고려장·효열각.

ㅇ 통안(通安)

안뜸(반수동; 潘水洞)·양촌·새뜸·학림동 4뜸으로 이루어졌으며 호구총수(1789년)에는 통안리,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는 통안리와 항림(項林: 鶴林)리가 기록되어 있다. 청동기시대 것으로 보이는 돌화살촉과 돌칼이 발견되어 그때도 사람이 살았던 것 같다. 1594년 밀성박씨가 들어와 14대째 15호가 살고 있으며 함평이씨가 8대째 28호가 거주하고 있다. 일제말에는 치동에도 4호(이·박·허씨 2)가 살았으며 학림동 17호(밀성박·김해김·하동정·전주이)등 총 77호가 거주하다가 6·25때 3명이 죽고 2호를 제외한 전가옥이 소각되었다. 그후 88호까지 되었으나 현재 45호 170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동구산 아래 마을이라 구동(龜洞)이라 불렀으며 통암이라 부르다가 통안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인물 : 박득황(진사)·박철수(호 통암, 유학자)·박병기(초등교장)·이용보(한말의병)·이정범(무공훈장)·박병우(대검수사관)·이요한(서예가)·이진환(초등교장). 유물유적 : 밀성박씨 재각·석기유물(전남대 박물관 소장)-돌촉·돌도끼(끌) 1960년 박익수가 밭에서 발견.

ㅇ 구산(九山)

구산·생계(송계)·모랭이·요촌으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구산리(龜山里)와 묘촌이 나오는데 묘촌은 요촌이나 모랭이인 듯 하다. 당산나무 옆에 지석묘가 있고 인접 통안 마을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어 이 부근에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나 상고할 수 있는 것은 밀양박씨가 11대째 살고 있다. 그후 수원백씨(8대째)·함평이씨(6대째)·진주강씨(4대째)·전주최씨(4대째)·광산김씨(4대째)·경주김씨(3대째)·전주이씨(3대째)·평산신씨(3대째)가 들어오고 일제때 금성오씨·경주최씨·남평문씨·한양조씨·신평송씨가 들어와 73호가 살다가 6·25때 5명이 죽고 마을이 전소되었다. 다시 마을을 복구하고 김해김씨·나주정씨·행주기씨 등이 새로 들어 왔으나 현재는 42호 117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동구산 아래 마을로 구산(龜山)이 구산(九山)으로 변했다. 인물 : 백경구(화학박사, 교수), 김성호(한학자). 유물유적 : 지석묘·당산나무(수령 500년 정월 보름 당산제를 지낸다.)

(6) 남평리(南平里)

남평리는 안곡·화곡·환교·남평 4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에는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 쌍룡동·구남동·성수동·신정·환산이 나오는데 쌍룡동과 구남촌은 남평의 일부분이고 성수동과 신정은 위치를 알 수 없다.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일람]에 화곡리·환산·평강리가 나오는데 평강리는 남평의 한뜸이다. 1914년 평강리·환산리·화곡리·구남(九南)리·통안리 일부를 남평리라 하여 장성군 동화면에 편입되었다.

ㅇ 안곡(安谷)

안곡은 면소재지로써 안장개와 네거리로 이루어졌는데 행정적으로는 남평리이지만 지적도상에는 안장개는 구림리, 네거리는 용정리에 속한다. 1923년경 장성­함평도로가 개설되자 1930년경 면사무소가 가정에서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성촌된 마을인 것 같다. 안장개에는 일제때 김씨 2호와 이씨·송씨가 살았는데 일본인 2인이 들어왔다. 그후 정준모가 1937년경 들어오고 함평이씨가 들어왔는데 일제말 네거리에 가계가 두세곳 있었다. 6·25사변후 수복 당시 피난민이 몰려들어 20여호가 살았으며 1980년대 취락구조 사업으로 호수가 늘어나 68호(네거리 54­안장개 14)였는데 현재는 122세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안장개는 말의 안장이라하며 주변에 안마산·마구청 등의 지명이 있다. 안장개에서 안곡이 비롯되었다. 인물 : 정진형(면장·군의원)·고재원(동화면장)·이후근(동화지서장)·홍번(농민회 전남 위원장)·이경모(예비군중대장).

ㅇ 화곡(化谷)

화곡과 밤나무촌 두 뜸으로 이루어졌는데 200년이 못된 마을로 추측된다. 광산김씨가 1835년경 들어온 후 행주기씨·밀양박씨가 들어왔으며 일제때 화곡에 15호 정도(광산김 3·밀성박 3·행주기·장수황·순천박·남평문·청주한 등) 밤나무골에 이씨 2호가 살았다. 6·25때 16명이 죽었으나 가옥피해는 없어 산골마을에서 피난민이 모여들어 살다가 떠났으며 그후 24호(밤나무촌 2호)가 살았는데 1990년경 밤나무촌에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15개업체가 들어오고 화곡에 30세대 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서 현제 42세대 97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낚싯대형국인 마을뒷산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인물 : 박광문(한말의병)·김영대(동화면장)·문창석(동화면장).

ㅇ 환교(環校)

환산과 교촌이 합해진 마을로 환산에는 진씨가 살다가 떠났다는 구전이 있으며 1810년경에 수원백씨가 입향하고 교촌은 1926년 동화초등학교가 생긴이후 조성된 마을이며 해방후 환산에 22호(수원백·남평문·인동장·부안김 등) 교촌에 15호(수원백·함평이·전주이·공주이·경주김·순창설·청주한·광산김 등)가 살았는데 6·25때 3명이 죽었다. 그 후 몇 성씨들이 들어왔으나 이농현상으로 현재 33호(환산 20·교촌 13) 74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환산 ­ 마을이 고리 형국이라 옛부터 [고리뫼]로 부르다 한문표기로 환산이라 했다. 교촌- 옛날에는 살푸쟁이(사포정 沙浦亭)라 하다가 학교가 생긴뒤 교촌이라 했다. 인물 : 백군기(소장·31사단장)·백은기(육군중령)·한웅진(육군소장)·백환종(육군중령)·한창수(육군대령)·이내수(법원사무관)·이용현(육군대령)·김공수(동화면장)·김용백(총무처 부이사관) 유물 : 수원백씨재실.

ㅇ 남평(南平)

구남촌(九南村)·청용동(靑龍洞)·초동(草洞)·평강(平江) 4뜸으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에 구남(龜南)촌과 쌍룡동이 나오는데 쌍룡동은 남쪽 골짜기에 지명만 남아 있다. 광산이씨와 함평이씨가 오래 전에 살았던 것 같으나 현재의 두 성씨는 일제 때 입향했다. 김해김씨·행주기씨가 100여년전에 들어온 후 일제때 남원양씨·진주강씨·평택임씨 등이 들어왔다. 해방후 안곡에 5호가 살았으며 광산이씨 10여호·행주기씨 6호·전씨 5호 등 총 28호가 살았는데 6·25때 자체 알력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으며 2호를 제외한 전호가 소각되었다. 현재는 39호(초동 11·청룡동 6·구남촌 13·평강 9) 110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구남과 평강에서 한 자씩 떼어내 남평이라 했다. 인물 : 김형식(면의회의장)·기노생(면장)·김희준(새만금 현장 소장)·원영산(육군소령). 유물 : 함평이씨 재각.

(7) 남산리(南山里)

남산리는 황산·동산·연산·작소 4마을로 이루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이전에 황산과 동산은 영광과 함평(옛날에는 나주)의 경계지역이었고 연산은 옛날 나주군 대화면 지역이었다가 1906년 함평군으로 옮겨진 곳이다.

ㅇ 황산(凰山)

황산과 송정(松亭) 두 마을이 합해졌는데 옛날에는 황산은 영광황산·송정은 나주황산으로 불렀다.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 영광군 외동면에 황산리(黃山里)·나주군 대화면에 황산촌(黃山村)이 나오며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도 영광군 외동면과 함평군 대화면에 각각 황산리가 나오는데 1917년 기록에 송정(松丁)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1914년 두 마을이 함께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가 되면서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바꾼 것 같다. 오랜 성씨가 없고 황산에는 1905년경 창녕조씨가 들어온 후 이어서 달성배씨·원주이씨·금성나씨·한양조씨·신평송씨·광산김씨 등이 들어왔으며 6·25후 평택임씨가, 70년대 후반에 하음봉씨·탐진최씨·수원최씨·나주정씨 등이 들어왔다. 송정에는 반남박씨와 함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1910년경 회진임씨와 진주강씨가 들어온 후 문화유씨가 들어왔다. 일제때는 황산에 35호, 송정에 10여호가 살았으며 현재는 33호(황산 19·송정 14)가 거주하고 있다. 동명유래 : 옛날 기록에는 [황산(黃山)]으로 나오는데 황토땅이기 때문인 듯 하며 송정(松亭)과 황산(凰山)은 소나무숲이 좋기 때문인듯함. 인물 : 박덕수(동화조합장)·조병기(육군중령)·강대석(영광불갑면장) 유물유적 : 노사기정진의묘, 광산김씨재각, 모정(1937년 건립), 입석.

ㅇ 동산(桐山)

동산·나주황산·부곡·용계 4뜸으로 이루어졌다. 옛날에는 동산과 황산은 나주(잠시 함평)에 속하고 용계와 부곡은 영광이었던 것 같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나주에 황산촌이 나오고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는 함평에 황산리 영광에 용계리가, 1917년 기록에는 장성군 동화면에 旺山里(동산)가 나온다. 옛날에 해남윤씨가 살다 떠난뒤 전주이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다. 동산에는 150여년전 나주정씨와 반남박씨가, 100여년전 달성배씨가 들어온뒤 일제때 무안박씨·보성선씨·남평문씨·청주한씨·안동김씨, 해방후 동래정씨, 그후 탐진최씨·광산김씨·나주정씨·김해김씨·한양조씨·문화유씨·밀양박씨·상산김씨가 들어왔다. 용계에는 일제때 장흥고씨·평택임씨·수원백씨·남평문씨·보성선씨 등이 살고 부곡에는 달성배씨·하흠봉씨·박남박씨 등이 살았다. 일제때 40여호(원동산 19·용계 9·부곡 5·황산 4 등) 였으며 6·25때 5명이 죽고 가옥피해는 없었다. 현재 31호(동산 21·황산 6·용계 2·부곡 2)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동산(桐山)-오동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용계(龍溪)­지형이 용처럼 꼬불꼬불하다. 부곡­땅이 기름져서 부곡이라 했다고 한다. 인물 : 고경주(장성군수)·정우광(초등교장).

ㅇ 연산(蓮山)

원래 영광군 외동면 지역으로 호구총수(1789년)에는 나오지 않은 마을이다. 옛날 황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1800년경에 장흥고씨와 한산이씨가 들어오고 1900년경 전주이씨·신평송씨·금성오씨가 1954년경 진주강씨·한산이씨가 들어오고 1960년대 이후 해주오씨·파평윤씨·진주정씨·밀양박씨·동래정씨·김해김씨·한양조씨 등이 들어왔다. 해방후 42∼3호(한산이씨 22·장흥고씨 8·경주이씨 2 등)가 살았으며 6·25때 40여명이 죽고 가옥피해는 없었다. 현재 30호 82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연화도수 형국이라 한다. 인물 : 이동규(공업진흥청과장)·고인수(여수경찰서장)·고제원(면장)·이성주(내무부 총무과장).

ㅇ 작소(鵲巢)

작소는 남강·두실·허더리·한치·작소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 나주였다가 1906년에 함평에 속했으며 1914년 장성에 편입된 곳이다. 호구총수(1789년)에도 허교촌(許橋村)·한치촌(寒峙村)이 나오며,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는 대치리(大峙里)·남강리(南江里)·두곡리가 1917년 기록에는 임교리와 작소리가 나온다. 허교리와 임교리는 허더리(허다리)인 것 같고 한치와 대치는 같다. 한치는 황씨가 오래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장흥고씨가 4대째 살고 있다. 6·25때 6명이 죽었으나 가옥피해가 없어 삼계면민들이 피난을 오기도 했고 60년대말 38호(남강 10·두실 5·허더리 2·한치 17·작소 4)였으나 산골마을이라 생활이 불편하여 많이 타지로 떠나 현재는 13호(남강 5·두실 3·허더리 1·한치 3·작소 1)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작소 -마을 뒷산이 까치집형국(비작귀소형국)이다. 두실 ­ 뒷 계곡이 2개이다. 한치 ­ 삼계면의 한치 마을과 원래 한 마을이었다가 갈라졌다. 큰 고개 위에 있다. 남강 ­미상 인물 : 정태면(외무고시), 고복주(사법고시).

(8) 월산리(月山里)

월산리는 월전·초지·임정·인정·만화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나주지역이었는데 1906년 함평에 속하였다가 1914년 장성군으로 편입되었다.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나주편에 신옹점·초지촌·하초지촌·인산촌이 나오고 1912년 [행정구역명칭]함평편에 만화리·인산리·월전리·초지리·임정리·월정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1914년 임정리·월정리·인산리·만화리·초지리·명장리·월전리·구봉리와 오산면의 평촌리 일부를 월산리라 하여 장성군 동화면에 소속시켰다.

ㅇ 월전(月田)

호구총수(1789년)에는 나오지 않으며 광산김씨와 탐진최씨가 가장 오래 살고있으나 입향시기를 알 수 없다. 150여년전 김해김씨가 130여년전 나주나씨가 들어온 후 일제때 전의이씨·평산신씨·나주정씨·신평송씨·광산이씨·선산김씨가, 해방후 반남박씨가 들어왔으며 6·25때 피해는 없었고 도림봉의 절만 소각되었다. 60년대에 전주이씨·황주변씨·장흥고씨 최근에 달성배씨·해주오씨가 들어 왔다. 1870년대에 8호였으며 지금은 40호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달형국이라 달팽이(달평이)라고 부르다가 월전으로 표기했다. 인물 : 나종섭(초등교장)·나종경(전남중기사업소장)·김익생(동화면장)·고성주(동화면장)·김원삼(육군대령)·김용관(육군소령).

ㅇ 초지(草枝)

호구총수(1789년)에 초지촌·하초지촌·신옹점(新瓮店)이 나오는데 신옹점은 마을뒤 사기점등이나 만화동과 인산 경계에 있는 점등으로 추측된다. 1917년 기록에 초지리와 명장리(明長里)가 나오는데 마을 서쪽 잔등에 있었던 명장동(鳴障洞)에 불이나서 현 마을터로 옮겨왔다고 한다. 400여년 전 밀양박씨가 들어와 12대손이 살고 있으며 그후 울산김씨와 광산김씨가 살다가 떠났다. 150년 전 장수황씨가, 120년전 함평이씨와 장흥고씨가, 100년전 나주정씨·나주나씨·영산신씨·담양전씨·남원양씨·양성이씨·죽산박씨·풍산홍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보성선씨·창녕조씨·인동장씨·광산김씨·김해김씨가, 그후 나주임씨가 들어오고 최근에 진주강씨·고성이씨·청주한씨가 들어왔다. 일제때는 밀양박씨 40여호를 비롯 80여호의 큰마을이었으며 60여호가 살다가 6·25때 3명이 죽고 가옥 5호가 소각되었다. 현재 52호 135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샛가지]라 부르며 초지로 표기한다. 인물 : 박신극(진사)·김길현(육군중령)·김사철(면장)·김판현(서기관)·홍순열(무공훈장)·황명옥(초등교장)·정웅(사장)·김성현(무공훈장)·전계복(훈장)·전희영(목사).

ㅇ 임정(林亭)

광산김씨가 10대째 살고 있으며 의성김씨가 4대째 살고 있다. 함평이씨와 신평송씨가 150여년전에 들어온 뒤 울산김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순흥안씨·전주이씨 그리고 6·25후에 밀양손씨 최근에 담양전씨·창원정씨가 들어왔다. 일제때는 광산김씨를 주축으로 50여호가 거주하였으며 6·25때 2명이 죽고 가옥피해는 없었다. 현재 32호 81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숲에 쌓인 마을이라 [임정지]라 부르다가 임정으로 표기했다. 인물 : 김재대(진사)·김영채(면장)·김영철(해군소장).

ㅇ 인정(仁汀)

인산과 월정 두 마을이 합해졌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인산촌(仁山村)만 기록되어 있고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인산리 월정리(月丁里)가 모두 나온다. 청송심씨가 오래전에 살았다는 구전이 있다. 인산에는 광산김씨가 가장 오래 살고 있으며 일제때 울산김씨·평택임씨·신평송씨·함평이씨 6·25후에 김해김씨·밀양손씨가 들어왔다. 월정에는 순흥안씨가 5대째 살고있으며 100년 전에 회진임씨·연안차씨·담양전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파평윤씨·문화유씨, 6·25후에 인동장씨·평택임씨 최근에 언양천씨가 입향했다. 일제때는 인산·월정 각 20여호씩 거주했으며 6·25때 5명이 죽고 가옥 5호가 소각되었다. 현재 20호(인산 9·월정 11) 65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인산과 월정은 합하여 인정이라 했으며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인물 : 김봉규(중앙선관위상임위원)·김희수(철학박사)·임택만(군의원)·장중길(대령)·차성환(대령)·안경운 (한말의병) 유물유적 : 지석묘·점터·하마비.

ㅇ 만화(萬化)

150여년전 영산신씨가 입향하였으며 그 외는 100여년 이후에 들어왔다. 일제때 26호 정도(영산신씨 10·광산김씨 7·풍천임씨 2·진주강씨 2·동래정씨·제주양씨·申씨·손씨·한양조씨) 살았으며 6·25때 피해는 없었고, 옥천전씨·경주최씨가 들어와 27호까지(낙수쟁이 5호) 살았으나 현재 19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1912년 기록에는 만화(滿化)로 나오는데 6·25후 만화(萬化)로 바뀌었다고 한다. 볏들이라 하여 만화(萬禾), 밤·감꽃이 많이피어 만화(滿花) 또는 옛부터 피난지지의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인물 : 김영태(판사)·신우현(경감)·신가현(보국훈장)·김영국(행정고시).

(9) 구룡리(九龍里)

구룡리는 구룡·덕산 2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나주지역이었는데 1906년 함평에 속했다가 1914년 장성으로 편입되었다.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 판교촌·신기촌·삼촌(森村)·신옹점이 나오는데 삼촌은 삼룡, 신옹점은 덕산, 신기촌은 온골로 추측된다. 1914년 신기리·삼룡리·덕산리·마산리·동각리·판교리·구봉리와 삼서면 판교리 일부를 합쳐 구봉의 구와 삼룡의 룡 자를 따서 구룡리라 하였다.

ㅇ 구봉(九峰)

구봉·너더리·동각 3마을이 합쳐진 마을이며 호구총수(1789년)에는 판교촌(너더리)만 나온다. 구봉은 담양田씨가 5대째 살고 있으며 1870년경 김해김씨가 일제때 김해김씨·평산신씨·문화유씨가 6·25후에 여산송씨·광산김씨·밀양박씨가 들어왔다. 너더리는 옛날 100여호가 살았다는 말이 있으며, 너더리와 장승백이 두 뜸으로 되어있는데 담양田씨가 1540년경 들어왔다가 떠났으며 일제때 해주김씨가 들어오고 6·25후에 김해김씨·진주정씨·평산신씨·전주이씨·추계추씨·함평노씨가 들어왔다. 동각은 원주원씨가 1910년대에 입향했으며 일제때 해주김씨·전주이씨·광산김씨 등이, 6·25후에 장흥고씨·부안김씨·수원백씨·연안차씨 등이 들어왔다. 일제때는 60여호(구봉 30·너더리 12·동각 17)가 거주했으며, 6·25때 6명이 죽고 초등학교가 소각되었다. 70년대부터 인구가 감소하여 현재는 구봉 30호(담양전씨 10·김해김씨 5·평산신씨 5·기타) 동각 12호(원씨 3·고씨 2·기타) 너더리 8호(김해김씨 2· 기타) 총 50호 109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구봉 ­ 마을 앞에 9개의 봉우리가 있다. 너더리 ­ 삼서 홍정으로 가는 길목에 판자다리가 있었다. 동각 ­ 너더리 밑에 정각이 있었다.

ㅇ 덕산(德山)

덕산·신덕·삼룡·마산·온골 5개 마을이 합쳐진 마을이다. 호구총수(1789년)에 신기촌(新基村)·삼촌(森村)·신옹점(新瓮店)이 기록되어 있는데 신기촌은 온골, 삼촌은 삼룡, 신옹점은 덕산으로 추정된다.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 마산리(馬山里)·덕산리(德山里)·신기리(申己里)·삼룡리(三龍里)가 기록되어 있다. 원덕산은 옛날 점터였다고 전하며 그릇편, 기와편이 많이 나온다. 광산김씨가 5대째 살고 있으며 문화유씨가 4대·진주정씨가 3대째 살고 있다. 일제때 김해김씨·원주원씨·전주이씨가 들어오고, 6·25후 영월엄씨가 들어왔다. 신덕은 1892년 신평송씨가 들어온후 수원백씨·함평이씨·문화유씨가 들어왔다. 마산은 함평이씨가 150여년전에 들어왔으며, 온골은 1810년경 상산김씨가 들어온후 100년전 나주나씨·광산승씨가, 일제때 광산김씨·오씨, 6·25후 경주이씨가 들어왔다. 삼룡은 덕산에서 가장 오래된 터이고 옛날 장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150년전 전주이씨가 들어와 8호가 살다가 6·25후 모두 떠났다. 150년전 상산김씨가, 130년전 문화유씨와 진주정씨가 들어오고 1960년대에 나주나씨가 들어왔다. 해방후 60여호(덕산 20·신덕 8·마산 2∼3·온골 10·삼룡 16)가 살다가 6·25사변때 6명이 죽고 가옥피해는 없었으나 많은 시련을 겪었다. 현재는 30여호(덕산 16·신덕 4·마산 2·온골 5·삼룡 4)가 거주한다. 동명유래 : 덕산 ­ 덕뫼·둥메라 부르다가 덕산이 되었다. 신덕 ­ 덕산 옆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마산 ­ 몰미산(말미산) 아래에 있다. 온골 ­ 홀어미가 옹골지게 산다고 하여 붙였다고 한다. 삼룡 ­ 깊은 산중으로 삼(森)촌이라 했다가 뒷산 줄기가 3갈래로 갈라진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인물 : 송영하(경위)·이계옥(한국일보기자)·백하규(함평군수).

(10) 송계리(松溪里)

송계리는 좌동·축내·송사 3마을로 이루어졌다.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의 나주군 대화면 조에 지달촌·신촌·호계촌·축내촌·송사리·양지촌이 나와있는데 신촌은 좌동의 한 뜸인 것 같고, 양지촌은 송사의 한뜸이다. 1906년 대화면은 함평군 소속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좌동리·성산리·동계리·송사리·신정리·축내리·양지리를 송계리라 하여 장성군 동화면에 편입시켰다.

ㅇ 좌동(左洞)

좌동·한골(동계; 東溪)·신정(申丁; 6·25때 폐촌)으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에 지달촌(地達村)·신촌(新村)·호계촌(虎界村)이 나오는데, 지달촌은 남쪽 지달재 부근인 것 같으나 알 수 없고 호계촌은 좌동이며, 신촌은 확실히 알 수 없다. 좌동은 윗쪽 외약골(좌동 : 외얏골)과 아래쪽 신촌으로 나눈다. 광산김씨가 1500년경에 들어와 일제 때까지 자자일촌 하였고 해방후 평택임씨와 제주양씨가 1960년대에, 수원백씨·탐진최씨가 들어왔다. 해방후 좌동에 19호·한골에 6호(광산김씨)·신정에 5호(평택임씨 3)가 거주하였으며 6·25동란때 4명이 죽고 3호가 소각되었다. 현재 광산김씨 17호등 21호(좌동 17·한골 4)가 거주하고 있다. 동명유래 -마을이 범의 형국이라 호계라 했는데 호랑이가 좋아하는 송(松)자를 썼으며 좌측에 있기 때문에 외약골(좌동)이 되었다. 한골 ­ 큰골·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계라 한 것 같다. 인물 : 김병철(행정고시 감사원), 김제복(광덕중교장), 김명수(면의원).

ㅇ 축내(築內)

축내와 고짓터(성산)로 이루어졌다. 송계리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480여년전 광산김씨가 들어왔다고 하며, 순흥안씨가 6대째, 경주이씨가 6대째, 낙안오씨가 4대째 살고 있다. 일제때 여산송씨·전주이씨가 들어와 해방후 30여호(광산김씨 4·경주이씨 7·옥천조씨 4 등)가 거주했으며 6·25때 10여명이 죽고 6호가 소각되었다. 그후 양성이씨·문화유씨·평택임씨·장흥고씨 등이 들어와 37호까지 살았는데 현재 20호(축내 15·고짓터 5)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부터 [방죽안]이라고 불렀는데 [축내]로 표기한다. 고짓터는 창고자리라는 뜻이다. 인물 : 유범열(육군대령)·이상용(장성문화원장)·오성복(동양화가), 안익현(부영여고교장).

ㅇ 송사(松沙)

송사·잿말(양지촌·영(嶺)촌)·새터로 이루어 졌는데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송사리(宋士里)·양지촌이 기록되어 있고, 1917년의 [조선면리동일람]에는 송사리(松沙里)·양지리(良地里)가 나온다. 옥천조씨가 1620년경에 들어왔다고 한다. 일제때는 송사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옥천조씨 16호·장흥고씨 10여호·광산김씨 4호·양성이씨 3호·수원백씨 3호·남평문씨 3호 등 40여호(양지촌 7·새터 4 포함)가 살았는데 6·25때 6명이 죽고 가옥피해는 없었다. 양지촌은 2호가 살다가 1994년 없어지고, 새터는 1960년대초에 없어져 지금은 원송사에만 11호(광산김씨 5·옥천조씨·장흥고씨·경주최씨·전주최씨·전주이씨·상산김씨 각1호) 25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송사 ­ 마을 앞 염불산이 절과 관련이 있어 [송사(松寺)]라 하다가 [송사松沙]로 바뀌었다고 한다. 인물 : 김영필(동화면장), 조병수(목포시장), 김광석(소령).

[표8-4] 동화면 마을·인구현황 (2001.1.1현재)

동화면 마을·인구현황 - 리별, 마을, 세대, 인구, 이장 제공 표
리 별마을세대인구이장
용정 1리가정52164이종남
용정 2리기산42122정도수
동호 1리연동2780김원선
남동2680
동호 2리동계3180김진식
조산3382김상호
서양 1리원서양614김오례
서양 2리삽치1846남영희
구림 1리통안45170이채범
장만2761
구림 2리구산42117최재영
남평 1리안곡122355박춘섭
화곡4297
남평2리환교4093김순애
원남평39110김상권
남산 1리동산2554나길수
황산49135
남산 2리연산53156김운희
월산 1리월전4099이기상
월산 2리초지52135홍학도
월산 3리임정3281안영복
월산 4리만화40116신귀현
구룡 1리구봉55144김채림
구룡 2리덕산3587엄호태
송계 1리좌동2255백성연
송계 2리축내3575나영심
2610452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