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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와라(홍길동)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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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속의 이상향 율도국과 일본의 오키나와
왜 홍길동의 추모비가 일본에?

민권 운동의 선구자로 기록된 오야케아카하치(홍가와라)의 추모비가 조선에서 뱃길로
3,000리나 떨어진 머나 먼 타국 일본 오키나와에 왜 세워져 있는 것일까?
홍길동의 추모비가 오키나와에 세워지기까지 그 발자취를 따라 500년 전의 먼 옛날로 시간 여행을 떠나 보기로 하자!

홍길동 추모비

일본 오키나와현 교육 위원회에서 1953년 건립 이시가키지마(석원도) 오하마무라 기원(崎原)공원에 세워져 있는 홍가와라 추모비 「자유민권운동의 선구자」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에 비석을 세움으로써 그의 위업을 기리는 바입니다.

1953년 4월 6일

오야케아카하치 현장비건립위원장(顯章碑建立委員長), 광전정부(廣田禎夫) 찬(撰), 회사장영순(會舍場泳殉) 서(書)

홍가와라 추모비 번역문

오야케아카하치(赤蜂)는 별명을 홍가와라(洪家王)아카하치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는 군웅할거 시대에 두각을 나타내어 당시 오호하마촌(大兵村)을 근거지로 집단 생활을 하였으며 민중의 제왕으로 추앙받았습니다.

문명(文明) 18년 오키나와 본도 중산왕조의 상진왕은 사신을 야에야마 지역으로 파견하여 이리키야아마리 축제를 음사사교(陰邪邪敎)로 규정하여 금지하였는데 이 신앙탄압에 대하여 섬주민들은 격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야케아카하치는 선두에 서서 중산정부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중산에 대한 조공을 3년에 걸쳐 중단하여 중산정부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상진왕은 대리왕자를 대장으로 삼아 구미도의 신녀인 군남풍과 함께 정예부대 3,000여명과 병선 46척을 보내 반란 진압에 나섰습니다. 아카하치는 방전분투 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하고 저원(低原)에서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명응(明應) 9년 지금으로부터 454년 전의 일이였습니다. 아카하치는 봉건제도에 대해 반항하여 자유민권을 주장하고 섬 주민들을 위해 용감히 싸웠습니다. 싸움에서는 졌으나 그의 정신과 행동은 길이 후세에 전해질 것 입니다.

성충남 공주시 사곡면 계실리 무성산(614m) 정상에 있는 홍길동 산성

홍길동이 활빈당 무리를 이끌고 의적활동을 벌였던 마지막 은거지입니다.

오키나와에는 지배자의 거주지, 적군의 침입을 막기위한 요새, 신에게 제사드리는 신성한 구역 등의 역할을 지닌 성들이 무수히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성(城)』을 일본어로 음독하면 『조』가 되고 훈독하면 『시로』가 되는데, 유독 오키나와에서만 『구수쿠』라고 발음합니다. 어떻게 해서 보통명사가 되었는지 학자들 마저도 유래를 규명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구수쿠에 얽힌 비밀은 조선에서 건너간 홍길동을 통하여 쉽게 풀어볼 수 있습니다. [홍(洪)]을 일본어로 음독하면 『고』 또는 『구』가 됩니다. 『수쿠』는 『소굴(巢窟)』의 일본식 발음으로 『집단 거주지』를 뜻한다. 결국 『구수쿠』는 『홍길동 집단의 거주지 또는 소굴』로서 오랜 시간에 걸쳐 보통명사로 정착되어 버린 것 입니다.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배자의 거주지였던 구수쿠와는 달리 일반 백성들이 사는 곳을 『촌(村)』이라 하는데 구메지마에서는 마을(里)을 『간절(間切)』이라 적고 『마시쓰』또는 『마세쓰』등으로 발음 한다. 우리의 『마을』을 뜻하는 마실과 음이 비슷합니다.

지금도 충청·전라·경상도 지역의 시골 마을에서는 ‘마실'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어원 분석 외에도 문화적인 동질성의 측면과 간과할 수 없습니다. 성 축조 방법이 얇은 돌을 기왓장처럼 포개는 오키나와 방식과는 달리 충남 공주시 무성산 정산에 있는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서 쌓은 홍길동 산성과 거의 흡사합니다.

홍길동은 1502~1503년 경 후루수토 지역에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죽부도, 서표도, 여나국도 등 인근의 지배권을 장악했고, 1504년 에는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원주민을 규합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카소네 집단을 섬의 동북부 밀림지역으로 몰아내고 상비옥산(上比屋山)에 조선 도래인들의 집단주거를 위해 초가집 군락을 조성했습니다.

이어서, 1505 ~ 1508년 경에는 해상권을 장악, 섬의 요처에 적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선양식의 성(城)을 구축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점차 오키나와 열도 일대에 해상 왕국(일명‘율도국’)을 건설한 듯 합니다. 이시가키지마 후루수토 바루에 있는 홍가와라 집단 거주지는 오랜 풍화로 담장이 무너져 있었으나, 일본 정부와 오키나와 자치단체의 공동 출연에 의해 최근 일부가 원상복구 되었습니다. 하떼루마지마의 적의 침입을 관측하기 위해 세운 봉화대는 500년전에 축조한 것으로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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