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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1회 박수량, 청백리에 두 번 뽑히다. (2)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11회 박수량, 청백리에 두 번 뽑히다. (2)

명종이 1551년 11월10일에 33인의 청백리를 뽑은 과정을 살펴보면, 11월2일에 문정왕후(文定王后 : 1501-1565)가 대신들에게 청백리를 추천하라고 명하고, 11월4일에 삼정승이 조사수 · 주세붕 등 16명을 추천하였다.

11월5일에 명종은 다시 정2품 이상과 수령, 각사의 관원 중 염근한 자를 추천토록 지시하였고, 11월 6일에 사헌부는 청백한 사람을 신중히 뽑으라고 임금에게 건의하였으며, 11월10일에 삼정승은 33명의 청백리를 염근리로 고쳐 불러 뽑았다.

그러면 1551년 11월 2일의 명종실록을 자세히 살펴보자.

이 날 명종은 사정전 思政殿에서 영의정 심연원, 좌의정 상진, 우의정 윤개를 비롯한 대신들을 인견하였다. 대왕대비 문정왕후도 함께 수렴(垂簾)하였는데, 문정왕후는 한숨을 몇 번 쉬고 대신을 앞으로 나오라 명하고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나랏일이 날로 글러져서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작은 법령도 대소 신하들이 받들어 따를 뜻이 없어 백성들은 날로 곤궁해지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병들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나의 마음이 망극하다. 어찌하여 국법을 지키지 않음이 이토록 심한가. 교화가 행해지지 않고 풍속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실로 내가 부덕 不德하기 때문이다.

대간과 시종들이 나랏일을 근심하여 이기(李芑)를 논계하였는데 어찌 이기(李芑) 혼자서 탐오한 풍습을 만들었겠는가. 이러한 습속은 이전부터 조금씩 이루어져 내려온 것이다.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은 말은 옳으나 행동이 너무 다르다. 위에서는 백성에게 은혜를 주려고 감사에게 간혹 작질 爵秩을 높여 보내어 마음을 다해 폐단을 바로 잡도록 했으나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역로(驛路)의 피폐함을 염려하여 하서(下書)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백성들이 살아났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수탈한다는 말만 들린다.
대신은 보필의 책임이 있으니 어찌 나라 일을 염려하지 않겠는가마는, 거듭 생각해 보니, 심상한 옛 규례로서는 세도(世道)를 만회할 길이 없다.

이제 새롭게 교화하려면 다른 데서 구할 것이 아니다. 재상으로부터 서관(庶官)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청렴한 사람 廉簡之人을 등용해야 할 것이니, 문관과 무관 그리고 남행(南行)을 구별하지 말고 가려서 아뢰어라. 내가 그 사람을 알아서 등용하고자 한다.

용렬한 자를 도태하고 청렴한 자를 우대하면 탐오(貪汚)한 풍습은 거의 제거될 것이다. 삼공은 백관을 총괄하므로 가려 뽑는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니 이조 · 병조와 함께 현량한 인재를 신중히 가려서 아뢰어라.

어린 명종 대신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문정왕후는 나라가 이미 엉망이 되어 기강이 안서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음을 한탄한다. 그리하여 청백리를 등용하여 조정을 일신하고자 한다. 그녀는 삼정승에게 이조 · 병조와 함께 청백리를 추천하라고 명한다.

한편 문정왕후는 당시에 탄핵을 받고 있는 이기(李芑 : 1476∼1552)에 대하여는 너그럽게 대한다. 이기는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과 손잡고 을사사화를 일으킨 주역이었는데,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아 1549년에 영의정이 된다. 이 때 그는 자기 마음대로 정권을 농락하면서, 그를 탄핵한 사람들은 죽이거나 귀양 보내는 등 가차 없는 보복을 하였다. 담양 면앙정 주인 송순이 귀양 간 것도, 퇴계 이황의 형 이해(李瀣)가 1550년에 귀양 도중에 죽은 것도 모두 이기 李芑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의정 이기는 1550년에 중풍으로 쓰러져서 1년 동안이나 정사를 못 보다가 1551년 8월에 사직한다. 이후 그는 영중추부사가 되었는데 이 때 공론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대간들이 이기를 탄핵한 것이다.

문정왕후의 하명 下命이 있자,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은 자신같이 불초한 자가 재상 자리에 있어 이런 사태가 생기었다고 하면서, 청렴한 자를 선발하여 등용한다면 이 폐습은 저절로 바로잡힐 것이라고 아뢴다. 심연원은 명종 비 妃 심왕후의 조부이다.

다시 문정왕후는 조정이 사당화 私黨化 되는 폐해를 지적한다.

오늘날 인심이 옛날 같지 않아 중종조로부터 나라의 소중함을 알지 못해서 종사가 거의 위태하였었는데, 다행히 조종(祖宗)의 도움을 입어 다시 안정되었다. 당초에 조정이 간당(奸黨)들에 의해 그르쳐졌었는데 내 생각에 이미 몸을 바쳐 신하가 되었다면 이심(異心)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여겨 협박당하여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않았다.

이제 와서 보니, 만약 자기와 좋은 사이면 비록 역적의 도당이라도 오히려 구원해 주고 비록 대역부도한 말을 했더라도 옹호해 주니, 전의 습속이 아직까지도 개혁되지 않은 것이다. 민생의 곤궁함이 그와 같고 나라 일이 또 이와 같다. 생각이 이에 이르니 매우 한심하다.

이 때 좌의정 상진(尙震)이 아뢴다.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부를 아랫사람들이 들으면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또한 감동이 되는데 탐오한 것이 습속을 이룬 지 이미 오래되어 사람들이 절행(節行)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백성을 병들게 하는 폐습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청백한 사람은 자급을 뛰어넘어 등용하고 탐오한 자는 물리친다면 오늘의 습속이 크게 변할 것입니다.


이어서 상진은 청백리로 안현(安玹) · 조사수(趙士秀), 홍담(洪曇)을 거명한다. 이에 문정왕후가 대답한다.


안현은 나도 가상히 여기고 있다. 그러나 허다한 사람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대신이 이를 심상하게 여기지 말고 습속을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하는데 정성을 다할 것을 바란다.

정부가 백관을 통솔하는데 있어서도 청백함을 숭상하여 만약 비리를 저지르는 자가 있으면 그 죄를 다스리도록 아뢰고, 육조도 서로 각기 소속 관사(官司)를 검찰(檢察)한다면 폐습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우의정 윤개(尹漑)가 아뢴다. 그는 신중하게 청백리를 선별해야 하고, 비리를 저지르는 관리는 가차 없이 처벌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자전의 분부를 여러 차례 받들었는데 백성이 피폐함을 근심하시고 풍속을 좋게 바꾸기가 어려운 것을 염려하시면서 먼 앞날의 걱정과 지금의 당면한 근심을 깊이 우려하셔서 간곡한 전교가 지극한 정성과 비통한 마음에서 나왔으니, 무릇 혈기 있는 자라면 어느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간절하신 분부를 들었으니, 만약 어리석은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찌 감히 진달하지 않겠습니까. 풍속을 순후하게 바꾸는 계기는 그 근본이 위에 달려있습니다.

위에서 이같이 염려하시는데도 아직 풍속이 크게 바뀌었다거나 편안해진 것을 보지 못했으니 진실로 여러 신하들의 죄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고, 본체가 바르면 그림자도 곧다.’ 했습니다. 위에서는 본원에 유념(留念)하시는데 신들이 위로 임금의 뜻을 본받지 못한 것은 신 臣의 죄입니다.

정부란 본보기가 되는 곳이니, 여기서부터 먼저 바르게 될 것 같으면 먼 곳에까지 퍼져나가서 마침내는 임금의 은택이 널리 입혀질 것입니다.

또 문관·무관 및 남행 가운데서 청백한 사람을 가려내라고 분부하셨는데, 오늘날의 폐단은 탐오한 풍습이 더욱 심해지고 백성이 더욱 곤궁해져서 하루아침에 흙더미처럼 무너질 형세에 놓여있으니, 이 폐단을 바로잡자면 성교(聖敎)를 따라야 할 것이지만 인물을 구별하여 그 실정을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대체로 명실(名實)이 상부(相符)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서, 만약 이름만 취하고 그 실지를 취하지 않으면 인물을 구별하는 과정에서 간혹 뒤섞일 폐단도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항상 이 일을 유념하시어 호오(好惡)의 소재를 분명히 보이시면 풀이 바람에 쓸리듯 교화가 자연히 이룩될 것입니다.

만약 탐오한 죄상이 공론에 제기되었다면 가차 없이 다스리도록 하소서. 비록 별도로 가려서 아뢰지 않더라도 현달한 사람은 위에서도 아실 수 있을 것인데, 이제 만약 재상들을 선별하여 아무개가 청백하다 하여 별도로 등용한다면 청선(淸選)에 들지 않은 자는 불안한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제왕의 일이 겉으로 드러난다면 천지(天地)와 같은 넓은 도량에 어긋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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