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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0회 박수량, 청백리에 두 번 뽑히다.(1)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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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박수량, 청백리에 두 번 뽑히다.(1)

아곡 박수량(1491-1554)은 청백리에 두 번 뽑히었다. 첫 번째는 그의 나이 56세인 1546년 4월이고 두 번째는 61세 때인 1551년 11월이었다.

1546년은 명종임금(1534-1567)이 왕위에 오른 지 1년 되는 해이다. 그런데 실권은 명종의 어머니 문정황후가 장악하였다. 11세의 명종 대신 수렴첨정을 한 것이다.

1545년 9월에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명종이 왕위에 오른 뒤 겨우 두 달이 된 때였다. 문정왕후와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은 인종의 외삼촌 윤임 일파를 제거한다. 그리하여 공훈을 세운 윤원형, 이기 등 권신들이 조정을 마음대로 농락한다. 그리고 탐욕과 횡포를 자행한다.

1546년 4월에 박수량은 청백리에 선발된다. 그는 광주목사로 있다가 병이 나서 잠시 관직을 그만두었는데 1545년 12월에 다시 행 호군(行護軍)이 되었고, 이어서 청백리로 뽑힌 것이다.

의정부 · 이조 · 예조가 청백리와 효자 등에 관한 일【*.】을 함께 논의한 후 입계(入啓)하니 전교하였다.
“박수량과 장언량은 각각 자급을 뛰어넘어 가자(加資)하라. 조사수는 가자하고, 홍담은 한 자급을 더하여 승품(陞品)시키고, 변훈남은 주부(主簿)에 준(準)하여 가자하고, 박민헌은 직장(直長)에 준하여 가하라.”
【*청백리로는 행 호군(行護軍) 박수량(朴守良), 대사간 조사수(趙士秀), 공조 정랑 김순(金洵) 등이며, 효자로는 이조좌랑 홍담(洪曇), 유학(幼學) 박민헌(朴民獻), 동부참봉(東部參奉) 변훈남(卞勳男) 등이다.】(명종실록 1546년(명종 1년) 4월 6일)

여기에서 박수량과 함께 청백리로 뽑힌 대사간 조사수 趙士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중종 시절에도 청백리로 일화를 남기었다.
중종임금은 청백리를 뽑을 때, 먼저 청문(淸門)ㆍ예문(例門)ㆍ탁문(濁門)을 세우고 조정의 신하로 하여금 각자 스스로 자신을 헤아려 어느 문으로든지 들어가게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예문(例門)으로 들어갔는데 조사수만이 홀로 청문(淸門)으로 들어갔다. 그만큼 그는 청렴결백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청백리로 선발될 때에는, 그의 아내가 이웃과 불화가 있었음을 이유로 자신을 청백리 명단에서 삭제하여 달라고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명종은 조정의 모든 신료가 결정한 것이니 허락할 수 없다고 전교한다.

한편 박수량은 1551년 11월10일에 두 번째로 청백리에 뽑힌다. 먼저 실록을 읽어보자.

삼공이 안현·홍섬·박수량 등 33인을 염근으로 이름을 고쳐 뽑다

사인이 삼공의 뜻으로 아뢰기를,
“청간한 사람은 널리 뽑기가 어려우므로 염근(廉謹)으로 이름을 고쳐서 초계하였습니다. 또 수령은 다 알 수가 없으니 감사로 하여금 초출하게 하고 육조에 소속된 각사(各司)는 육조로 하여금 뽑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뽑힌 자는 안현(安玹)· 홍섬(洪暹) · 박수량(朴守良)· 이준경(李浚慶)· 조사수(趙士秀)· 이명(李蓂)· 임호신(任虎臣) · 주세붕(周世鵬)· 김수문(金秀文)·이몽필(李夢弼)·이세장(李世璋) · 이영(李榮) · 김순(金珣)· 전팽령(全彭齡)·홍담(洪曇)·성세장(成世章)·윤부(尹釜)·윤현(尹鉉)· 윤춘년(尹春年)·정종영(鄭宗榮)·박영준(朴永俊)·오상(吳祥)·이중경(李重慶)·김개(金鎧)·임보신(任輔臣) · 이황(李滉) · 안종전(安從㙉) · 송익수(宋益壽)· 김우(金雨)· 변훈남(卞勳男)· 신사형(辛士衡)· 강윤권(姜允權) · 우세겸(禹世謙) 등 모두 33인이었다.

(명종 6년(1551년) 11월 10일 4번 째 기사)

당시에 박수량은 전라도관찰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1551년 8월4일에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된다. 명종 임금이 형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까지 한 박수량을 지방 수령인 전라도 관찰사로 발령 낸 것은 파격이었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한 이 시기는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은 윤원형과 이기의 탐욕과 횡포는 도를 넘었다. 백성들은 수령들의 가렴주구로 도탄에 빠지었다. 그리하여 명종은 전라도 민심을 수습할 인물로 박수량을 지목한 것이다.

박수량이 부임한 지 두 달째 된 1551년 10월, 박수량은 전라도 백성을 구료할 약제를 보내 달라고 조정에 요청한다.

전라도 관찰사 박수량이 치계하였다.

“가을부터 따뜻하고 무더운 것은 봄여름의 환절기 같기도 하고, 강풍(强風)과 폭우(暴雨)에다가 우박이 내리고 눈이 날리는 등 한냉(寒冷)한 기후는 겨울 같기도 하며, 짙은 안개가 사방에 깔려 아침 내내 걷히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절후가 순조롭지 못할 때에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기 쉬운데 임신부는 더욱 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약제(藥劑)를 내려 보내어 백성의 목숨을 널리 구제하게 하소서.”
(명종 6년(1551년) 10월 24일 4번 째 기사)

이 해는 여느 해와 달리 가을 날씨가 지극히 불순하여 사람들이 병에 걸리기 쉬웠다. 특히 임산부는 위험하였다. 박수량은 이런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고 임산부의 건강까지 챙긴 것이다. 참으로 애민하는 목민관답다.

다시 1551년 11월10일의 청백리 선발 이야기로 돌아가자. 명종이 청백리를 한꺼번에 33명 선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고대방 典故大方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청백리는 218명으로 나타난다. 이를 임금 별로 보면, 태조 5인, 태종 8인, 세종 15인, 세조 8인, 성종 20인, 중종 34인, 명종 45인, 선조 27인, 인조 13인, 숙종 22인, 경종 6인, 영조 9인, 정조 2인, 순조 4인이다. 헌종 이후 조선 말기에는 아예 청백리를 안 뽑았다. (참고로 청선고 淸選考에는 청백리가 186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조선왕조 사상 가장 많이 청백리를 뽑은 임금은 명종이다. 명종은 왜 이렇게 많이 청백리를 뽑았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당시에 청백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른 견해는 시대가 너무 부패하여 청백리를 많이 뽑아 다른 이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많이 선발 하였다는 해석이다. 필자는 후자의 견해에 찬동한다. 청백리가 많은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명종 시대가 너무 부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근거가 바로 청백리가 선발된 시점의 국정 상황이다. 이는 1551년 11월1일부터 11월10일까지 10일간의 명종실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열흘간의 실록을 살펴보면, 11월2일에 명종과 문정왕후는 대신들을 인견하고 대신들에게 청백리를 추천하라고 명하고, 11월4일에 삼정승이 조사수 · 주세붕 · 이준경 등 16명을 청백리로 추천하였고, 11월5일에 명종은 이들 이외에 정2품 이상과 수령, 각사의 관원 중 염근한 자를 추가로 추천토록 하였으며, 11월 6일에 사헌부에서 청백한 사람을 신중히 뽑으라고 간언하였다. 마침내 11월10일에 명종은 33명의 청백리를 뽑았다.

한가지, 눈여겨볼 것은 사헌부와 사간원은 11월1일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전 영의정 이기(李芑 : 1476-1552)를 쫒아낼 것을 청하여 11월10일에 이기가 파직된 점이다.
(참고 : 1551.11.1. - 11.10까지의 명종실록 목록)

명종 6년 11월 1일(을유)
○ 함양·거창 백성들이 군졸·기인의 폐단을 진달하자 대신에게 의논케 하다
○ 양사에서 이기를 쫓아낼 것을 세 번 청했으나 불허하다
○ 집의 유강·장령 임내신이 체직을 청했으나 불허하다
○ 어계선의 건의로 대사헌 이명규를 체직시키고 유강·임내신을 출사시키다
○ 태백이 미시에 사지에 나타나다

명종 6년 11월 2일(병술)
○ 대신들을 인견하고 자전과 인심의 교화 · 역로 소생· 인재 함양 등을 논하다
○ 사간원에서 이기를 쫓아낼 것을 청했으나 불허하다
○ 삼공의 건의로 토호의 침학을 엄중 처벌케 하고, 경연관을 줄이다
○ 홍문관 부제학 조사수 등이 공론에 대해 올린 상차
○ 성균관 동지를 겸대한 자 중 본직의 일이 긴급한 자는 체직토록 전교하다
○ 이명규·권찬·조사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명종 6년 11월 3일(정해)
○ 양사에서 이기를 쫓아낼 것을 청했으나 불허하다
○ 미시에 태백이 사지에 나타나다

명종 6년 11월 4일(무자)
○ 양사가 이기를 찬축할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 대사간 김주· 대사헌 권찬이 이기를 찬축하라는 상차를 올렸으나 불허하다
○ 삼공이 청간한 사람으로 조사수· 주세붕 · 이준경 등을 초계하다
○ 밤에 손방·간방·건방에 불같은 기운이 보이다

명종 6년 11월 5일(기축)
○ 양사에서 이기를 쫓아낼 것을 세 번 청했으나 불허하다
○ 정2품 이상과 수령, 각사의 관원 중 염근한 자를 초계토록 하다

명종 6년 11월 6일(경인)
○ 양사에서 이기를 쫓아낼 것을 세 번 청했으나 불허하다
○ 사헌부에서 청백한 사람을 신중히 뽑으라고 하다
○ 석강에 나가다
○ 홍문관이 상차하여 이기를 쫓아낼 것을 청했으나 불허하다
○ 태백이 미시에 사지에 나타나다

명종 6년 11월 7일(신묘)
○ 조강에 나가자 영경연사 윤개가 이기를 쫓아낼 것을 청하다
○ 양사에서 이기를 쫓아낼 것을 두 번 청했으나 불허하다
○ 삼공이 이기의 처벌을 청하지 않은 일로 대죄하다
○ 임보신을 사헌부 지평으로 삼다

명종 6년 11월 8일(임진)
○ 양사에서 이기를 쫓아낼 것을 두 번 청했으나 불허하다
○ 석강에 나가다
○ 햇무리가 지다

명종 6년 11월 9일(계사)
○ 조강에서 장령 임내신·헌납 이중경이 이무강의 계사 초안에 대해 말하다
○ 승정원에서 이기를 쫓아낼 것을 청했으나 불허하다
○ 석강에 나가다
○ 양사에서 이기와 이무강의 찬축을 청하자 이무강만 문외 출송하다

명종 6년 11월 10일(갑오)
○ 조강에 나가자 참찬관 권철이 이기의 비리를 말하다
○ 석강에 나가다
○ 양사에서 이기와 이무강의 찬축을 두 번 청하자 이기를 파직시키다
○ 삼공이 안현·홍섬·박수량 등 33인을 염근으로 이름을 고쳐 뽑다
○ 야대에 나가자 시강관 윤춘년이 조정의 기강을 세우라고 하다
○ 햇무리와 달무리가 지다. 검은 구름이 동방에서 남방으로 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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