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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5회 박수량의 탄생 - 박수량 생가에서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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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박수량의 탄생 - 박수량 생가에서

박수량 묘소를 보고나서 다음으로 가는 곳은 박수량 생가이다. 아곡 박수량 생가는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 있다. 그리고 보니 박수량의 호 아곡은 그의 생가 지명을 따서 붙인 것이다.

홍길동 테마파크를 지나 왼쪽으로 1km 정도 가니 ‘아곡 박수량 선생 -> 생가’ 라는 길 안내 표시가 있다. 여기에서 500-600미터 정도를 더 가니 박수량 생가가 나온다. 생가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오른 편에 쉼터가 있다. 집 앞에는 청백당 淸白堂 현판이 있고 집 벽에 ‘아곡 박수량 생가’ 한문 목판이 붙어 있다.

먼저 집 앞에 세워진 ‘아곡 박수량 선생 생가및 부조묘’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안내판에는 ‘이곳은 명종 때 이름 난 선비로 38년 동안 관직생활을 한 정혜공 아곡 박수량 선생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후손들은 여기에 부조묘(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고 재사를 받는 신위)와 제실을, 청백당이란 현판을 걸어 선생의 청백정신을 지금도 기리고 있다’고 적혀 있다.

박수량은 1491년(성종 22년)에 아버지 박종원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성(지금은 밀양)인데 단종 때 충무시위사 대호군 벼슬을 하던 박수량의 증조부 박연생(朴衍生)이 세조가 즉위하자 전라도로 낙향, 은거하면서 태인을 관향으로 삼았다 한다. 단종 폐위를 반대한 박연생은 지조와 절개를 지킨 선비였다. 박수량 집안이 장성에 거주한 것은 조부 때인 1460년경이란다.

박수량 연보에는 박수량의 탄생과 어린 시절의 일화는 적혀 있지 않다. 박수량을 조선 역사와 관련지어 살펴보면 박수량의 나이 8살 때인 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14살인 1504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난다. 무오사화는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사림파가 화를 당한 사건이고,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윤씨의 죽음과 관련하여 피바람을 일으킨 사건이다.
그런데 박수량 연보에는 사화와 관련된 행적이 전혀 없다.

한편 박수량이 10살인 1500년(연산군 6년)에 도적 홍길동이 잡힌다. 홍길동은 연산군 시절에 활약한 의적인데 그는 박수량과 같은 동네인 장성군 황룡면 아치실 출신이다. 실존인물 홍길동은 허균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에 의하여 다시 민중영웅으로 태어난다. 홍길동 테마파크에 가면 홍길동 생가터가 있고 그곳에 길동샘도 있다.

연산군(1476∼1506. 재위 1494∼1506)실록에는 1500년 10월22일부터 12월29일까지 5회에 걸쳐 홍길동에 관한 기록이 적혀있다. 그 기록은 ‘ (1)도적 홍길동을 잡았으니 나머지 무리도 소탕하게 하다. (2) 홍길동을 도와준 당상 엄귀손의 처벌을 논하다. (3) 홍길동을 도와준 엄귀손을 끝까지 국문하게 하다. (4)정승들에게 홍길동의 무리인 엄귀손이 어찌 당상의 자리에 올랐는지 문책하다. (5)홍길동의 죄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권농 이정 등을 변방에 보내기로 하다’ 등이다.

그러면 관련 실록을 살펴보자.

연산군 6년(1500년) 10월 22일 2번 째 기사

도적 홍길동을 잡았으니 나머지 무리도 소탕하게 하다

영의정 한치형 · 좌의정 성준 · 우의정 이극균이 아뢰기를, “듣건대, 도적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연산군 6년(1500년) 10월 28일 2번째 기사

홍길동을 도와준 엄귀손의 처벌을 의논하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엄귀손(嚴貴孫)은 죄가 마땅히 곤장 1백 대를 때려 3천 리 밖으로 유배하고 고신(告身)을 모두 회수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정승들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윤필상이 의논드리기를,
“포악하고 독한 무리끼리 작당하여 백성들에게 큰 해독을 끼쳤으니, 이같은 도적들은 사람마다 분개하는 것입니다. 만약 들었다면 의당 고발하여 체포해야 할 것인데, 엄귀손이 홍길동의 행동거지가 황당한 줄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았고 또한 따라서 산업까지 경영하여 주었으니, 법으로도 마땅히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죄가 법과 합합니다.”
하고, 어세겸은 의논드리기를,
“엄귀손이 비록 홍길동의 음식물을 받아먹었지만 이것은 인정(人情)에 보통 있는 일이니 그다지 허물할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국문을 당하여도 승복하지 않았다고 해서 졸급하게 율문의 ‘실정의 알고도 죄인을 숨겨준 조문’을 적용한다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고, 한치형은 의논드리기를,
“엄귀손은 본래 탐욕이 많은 사람으로 선왕 때에 포도장 이양생이 엄귀손의 홍천 본가에 가서 황당한 물색을 수색해 냈으나 그 때 겨우 면했었는데, 지금 또 홍길동의 음식물을 받았고, 또 일찍이 주선하여 가옥을 사주었으니 홍길동의 범한 짓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형벌을 더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죄를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리까.”
하고, 성준은 의논드리기를,
“엄귀손은 범죄와 율이 서로 꼭 맞습니다.”
하며, 이극균은 의논드리기를,
“엄귀손이 다만 홍길동의 행동거지가 황당한 것을 알면서도 주선하여 감추어 주었다면 적용한 법이 너무도 적당하겠지마는 만약 홍길동이 장물(贓物)을 기탁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법을 적용할 수 없으니, 홍길동의 문초 끝나기를 기다려 죄를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리까.” 하니, 한치형의 의논대로 하였다.


이를 읽어보면 홍길동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다. 삼정승이 모여서 논의를 하고 당상관 엄귀손과도 연관이 있는 거물급 도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박수량 연보를 읽어 보면 박수량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단다. 그는 같은 고향 선배로 문과를 거친 김개 밑에서 경서를 공부하여 문명이 일찍 드러났고 김개가 고부군수로 재직 시에는 그곳에 가서 수업을 하였다. 고부군은 지금의 전북 정읍시 고부면이다. 장성군에서 1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이다.

1502년(연산군 8년), 박수량이 12세 때에 전라감사가 여러 읍을 순시하면서 인재를 구하였는데 어느 날 고부군 古阜郡을 순시하였다. 박수량은 전라감사 앞에서 망해부 望海賦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전라감사가 이 글을 보고 해남에서는 윤구 尹衢의 문장을 얻고, 고부에서는 박수량의 부를 얻었다며 탄복하였다. 전라감사는 박수량의 비범한 재능을 크게 칭찬하며 소문을 서울까지 퍼트렸다. 윤구(1495-1549)는 해남 윤씨의 종조인 어초은 윤효정의 아들이고 오우가,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증조부이다. 그는 최산두, 유성춘과 함께 호남 3걸로 이름났으며 퇴계 이황과 함께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하기도 한 문장가였다.

망해부는 박수량이 망망대해 바다를 바라보면서 지은 바다예찬론이다. 그는 창해 滄海의 위대함에 찬사를 보내면서 바다처럼 넓은 기상과 포부와 덕성을 키워 도덕군자로 살아가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속된 근심을 떨치고 유유자적하게 한가롭게 노닐고 싶다고 밝힌다. 한편 그는 ‘소년이여! 대망을 품어라’ 같은 다짐을 하기도 한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박수량이 본 바다는 어디일까?’ 하는 점이다. 아마도 고부에서 가까운 서해바다일 것이다. 고부군은 서쪽으로 40리 정도 가면 해안이 나온다. 그곳은 바로 변산반도이다. 변산반도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개혁을 도모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박수량은 무장현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다. 그 때 지은 시가 읍취루부이다. 이어서 박수량은 그의 나이 23세인 1513년에 진사에 급제하고 나이 24세인 1514년에 문과에 급제한다. 그의 나이 29세인 1519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조광조, 김정, 기준 등 개혁 사림파가 화를 당하여 조광조가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많은 사림들이 유배를 간다. 전라감사로부터 박수량과 함께 칭찬을 받은 윤구는 1520년에 훈구파에게 핍박당하여 해남으로 유배를 당하였으나 박수량은 무난히 벼슬을 한다.

이제 박수량 생가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살림집이 있고 집안 왼편에 사당이 있다. 사당에 들어가니 마당에는 오래된 동백나무가 한 그루 있다.

사당안에는 가운데에 신위가 있고 벽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등 사군자와 소나무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들은 지조와 절개 그리고 인의를 중시하는 선비의 상징들이다.

이윽고 신위 덮개를 열고 신위 앞에서 머리 숙여 읍하였다. 그리고 권력형 부정부패가 심해지는 요즈음에 청백리 박수량 선생이 더욱 그립다고 토로하였다. 조금 있다가 신위 앞에 가까이 가서 신위에 적힌 신주를 읽었다. 왼편에는 박수량의 신주가 오른편에는 박수량 부인의 신주가 있다. 거기에는 ‘현 선조 고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겸 경연 의금부 춘추관 오위도총부 도총관 시 정혜공 부군신주’ ‘현 선조 비 정부인 유씨 신주’라고 한문으로 쓰여 있다.

박수량의 신주는 백비와 달리 꽤나 긴 벼슬이 나열되어 있다.
그냥 ‘청백리 밀양 박수량 신위’라고 현대에 맞게 한글로 적으면 안 되는 것일까? 신주란 격식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박수량 생가를 나온다. 발길은 다음 행선지인 홍길동 테마파크 내 청백당으로 향한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