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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3회 청백(淸白)과 효(孝)의 길을 걸은 선비 송흠 - 장성군 삼계면 묘소에서(3)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3회 청백 淸白과 효 孝의 길을 걸은 선비 송흠 - 장성군 삼계면 묘소에서 (3)



송흠이 태어난 곳 : 장성군 삼계면 주산1리 정각 마을
그러면 먼저 송흠의 탄생과 어린 시절부터 살펴보자. 묘갈명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자.

송흠은 1459년(세조5) 3월 13일에 태어나 1480년(성종1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2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연산군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에서는 물러나 고향에 거처하며 후진을 가르치고 경적(經籍)을 강론하면서 스스로 즐겼다. 1502년(연산군 8)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시묘살이를 마치자 남원교수 (南原敎授)에 제수되었다.


이를 보면 송흠은 1459년에 삼계현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에는 송흠은 영광 출신으로 적혀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지금의 장성군 삼계면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영광군 관할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삼계현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는지는 기록이 없다. <지지당 유고>에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 같이 답사를 한 신평송씨 문중의 총무이신 송무현 씨가 찾아낸 장성군청 인터넷 홈페이지 문화관광- 문화유산 - 전설과 설화의 “송흠과 청룡”에는 “송흠이 세조 5년(1459년) 3월 13일 삼계 주산리 정각에서 송가원과 하동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지지당 유고>에는 그가 정각 井閣 마을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시 한수가 있다. 그 시는 제목이 “정각초와견 안처사 래방 증오언일률 井閣草窩見安處士 來訪贈五言一律 (정각의 초가 움집에 찾아온 안처사를 보고 시를 지어줌)이다.

송흠이 지은 시를 읽어 보자.

훌륭한 그대는 나에게 스승이니
혼후 渾厚 한 그 성품 타고난 자질일세.
공부에 힘쓰며 뜻이 원대하니
참다운 근원은 가히 닦아서 알아지리.
시 제목에 나오는 안처사 安處士는 송흠의 제자 안처함(1488-1543)이다. 안처함은 조광조, 김정 등 기묘사림을 옹호한 중종 때 정승 안당(1461-1521)의 아들로서 그의 형 안처겸이 1521년 신사무옥으로 처형되자 그 또한 유배를 당하였다.

시 제목에 나오는 정각 井閣은 바로 장성군청의 청룡 설화 기록에 나오는 주산1리 정각마을과 일치한다. 요컨대 송흠은 장성군 삼서면 주산 1리 정각마을에서 태어났고, 낙향 후에도 그곳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곳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송흠의 어린 시절 : 청룡과 송흠 설화 說話


다음은 송흠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유명한 인물은 태몽 꿈이 어떠하고, 5-6세 때 이미 천재성을 보이느니, 감사나 부사가 나중에 크게 될 인물이라고 칭찬을 하는 등등의 영웅담이 있다. 하서 김인후가 그러하고 학포 양팽손이 그렇다.

하서 김인후(1510-1560). 문묘 18현 중 한 사람인 그는 이름난 성리학자로서 장성군 황룡면 맥동마을에서 태어났다. 5살이 되던 해 정월 보름날에 아래 한시를 써서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 났다.

높고 낮음은 땅의 형세요
이르고 늦음은 하늘의 때라
사람들 말이야 무슨 험 되랴
밝은 달은 본래 사심이 없도다.

高低隨地勢 고저수지세
早晩自天時 조만자천시
人言何足恤 인언하족휼
明月本無私 명월본무사
학포 양팽손(梁彭孫 1488-1545)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화순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다. 일곱 살 때 이 고을을 순시한 전라감사가 양팽손에게 천지일월 天地日月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고 하자, 그는 “천지는 나의 도량이요, 일월은 나의 밝음이 된다. 天地爲吾量 日月爲吾明” 라고 지었다 한다. 이에 전라감사가 “이는 해학 海鶴의 모습이요 추월 秋月의 정기라 훗날 용문 龍門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리라.” 하며 칭찬하였다 한다.

아쉽게도 송흠 선생의 경우는 어렸을 때의 기록이 없다. 어렸을 때의 일화가 문집이나 야사에 없다. 그런데 우연히도 장성군청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송흠과 청룡” 설화가 소개되어 있다. 이 설화는 송흠의 어린 시절 이야기 이다. 관련 부분을 읽어 보자


송흠이 어렸을 때 정각에서 지내다 공부를 위해 삼서 생동의 봉씨 집에서 수학하였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정각에 계시는 어머니를 뵈러 왔다고 한다. 어느 날 송흠이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한달을 채우지 못하고 보름 만에 정각에 오자 어머니는 화를 내며 밤인데도 생동으로 쫓아 보냈다고 한다. 쫓겨난 송흠이 생동에 돌아와 보니 만곡사 아들 집 대문이 잠겨져 있어 대문 옆에서 쪼그리고 잠이 들었다.

그날 밤 만곡사 아들이 꿈을 꾸었는데 대문 옆에 청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가 잠에서 깨어 하인들을 시켜 대문을 살피도록 했으나 살피고 온 하인들이 대문 옆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자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똑같은 꿈을 꾸자 이상해 여긴 그가 다시 대문을 살피도록 해 대문을 열어보니 송흠이 대문 밖에서 쪼그리고 앉아 잠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꿈의 용이 바로 송흠이라 믿었고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을 예감하였다.


이 이야기를 정리하여 보면 (1)송흠은 어릴 적에 삼서면 생동마을의 봉씨 집에서 기숙하면서 공부를 하였고, (2) 엄격한 송흠의 어머니는 집에 온 어린 송흠을 잠도 안 재우고 쫒아 냈으며, (3) 만곡사 아들이 대문 옆에 청룡이 꿈틀거리는 꿈을 꾸었고, 그는 대문 밖에서 쪼그리고 잠이 들어 있는 송흠을 발견하고 꿈속의 용이 바로 송흠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만곡사 아들이 누구인지 하는 점이다. 우선에 인터넷에서 ‘만곡사’를 찾았다. 그랬더니 만곡사 萬谷祠는 바로 장성군 삼서면 보생리 생골마을에 있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이다. 봉유례, 봉즙, 봉여해, 박팽년 등을 모신 사당이다.

내친김에 송씨 문중 세 분과 함께 만곡사 萬谷祠를 찾았다. 거기에서 봉씨 문중 분을 만났다. 그분은 봉씨 일족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은 단종 복위 사건과 연관이 있고, 그 중심에 봉여해가 있다고 설명한다.

봉여해(奉汝諧,1419~1456)는 성삼문 · 박팽년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모의에 가담한 혐의로 처형된 선비이다. 그는 박팽년, 성삼문 등과 함께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나중에 박중림의 사위가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봉여해는 세조를 시해하기 위해 칼을 차고 어전으로 가던 도중 의금부에 붙잡힌다. 당시 그의 벼슬은 궁중 음식 공급과 요리를 검사하는 사옹원 별좌 司壅院別座이어서 어전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봉여해가 참변을 당하자 그의 아들 봉인 (사헌부 감찰)과 두 동생 봉극순 (태인현감), 봉극겸 (대호군)등은 피신하여 전라도 영광 삼서 생골 마을(지금의 장성군 삼서면 보생리)로 내려온다. 이후 이들 후손이 계속 정착하여 이 마을은 봉씨 집성촌이 되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봉여해를 만곡사로 불렀던 것이고, 봉여해의 아들 봉인은 만곡사 아들로 불리게 된 것이다. 마치 시골에서 방앗간 집 아들이라면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누구나 알 듯이.

여기에서 윤증의 묘갈명을 보면 송흠의 아내는 하음 봉씨 河陰奉氏이고, 감찰 인 寅의 따님으로 적혀 있다. 그러면 봉여해의 아들 봉인과 송흠의 장인 봉인은 동일인이 틀림없다. 이 전설을 믿으면, 청룡 꿈을 꾼 봉인은 송흠에게 공부를 가르쳤고 그의 사위까지 삼은 것이다.
그리고 보니 봉인의 용꿈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 하나가 나주목사를 한 사촌 김윤제(1501-1572)가 대낮에 꾼 용꿈 이야기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있는 환벽당 주인 김윤제는 1551년(명종 6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가 별당아래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놀고 있는 꿈을 꾸었다. 너무나 꿈이 생생하여 잠에서 깨어 용소로 내려가 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엇다. 그가 바로 송강 정철(1536-1593)이다. 16세의 정철은 어머니와 함께 순천에 사는 둘째형을 만나러 가는 도중이었는데 하도 날이 더워서 용소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김윤제는 정철에게 이러저런 질문을 하여 보니 너무 똑똑하여 정철이 순천에 가는 것을 포기 시키고 자기의 제자로 삼는다. 그리고 나중에 사위 유강항의 무남독녀와 결혼을 시켜서, 정철은 김윤제의 외손녀 사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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